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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 희곡선집 ㅣ 아일랜드 희곡 시리즈
W. B. 예이츠 지음, 권경수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수록작품>
1. 캐슬린 백작부인
2. 캐슬린 너 훌러한
3. 그림자 드리운 바다
4. 매의 우물가에서
5. 발리아 해변가에서
6. 이멀이 바란 단 한 가지
7. 모래시계
8. 뼈다귀들이 꾸는 꿈
9. 갈보리
10. 쿠헐른의 죽음
명실상부한 예이츠 대표희곡 선집이다. <디어드라>를 제외한 주요작품이 모두 실려 있다. 국내에서 극작가 예이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비추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극작자로서 예이츠의 특성을 옮긴이의 글에서 옮긴다.
“예이츠는 극에 대해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와 해석을 제시했는데 첫째로 극작가는 지적인 극을 창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아름다움과 진실이 정당화되어야 한다. 둘째로 배우는 말의 운율과 운율 사이를 박자와 박자 사이를 잘 구별해 시극의 음악적인 요소를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셋째로 시극에서는 연기가 단순해야 하고 말의 소재를 방해하는 모든 것, 짧은 순간의 강렬한 표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 넷째로 동작을 간결하게, 배경색도 간결하게 하는 하나의 제의 같은 극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P.7)
그의 희곡은 일반적 사실주의 극과는 차원을 달리하므로 통상적인 접근법으로는 매우 난해하다. 단순화되고 신비스러운 무대 배경, 시적인 대사, 정적인 연기가 플롯의 상징성과 어울려 그의 극작품의 참맛은 무대에 올려진 실제 공연을 봐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희곡은 반복되는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다. 무대에서 기다란 천을 펴고 접는 행동, 이것은 막을 대치할뿐더러 단순하고 모호한 행동을 통해 생경하고 기이한 효과를 부여한다. 주요 인물이 아닌 연주자 또는 코러스의 존재, 명백히 그리스 희곡에서부터 유래하였을 이들은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켜 주며 향후 작품 전개의 암시를 던지고 있다. 일상성에서 벗어난 초자연적 배경과 인물, 시대적 배경이 대체로 고대 아일랜드와 영웅시대를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가면 착용, 일본 노극에서 받은 영향으로 가면을 통해 인물의 비인간적 요소를 극대화하고 있다.
<캐슬린 백작부인>은 그의 첫 희곡이다. 초기작이니만치 앞서 말한 그의 특징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선과 악, 영혼의 거래,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 등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담겨져 있다. 특히 캐슬린 백작부인이라는 지순한 영원의 여인상을 창조하여 순결한 영혼의 의의와 회복을 부르짖고 있다. 식민치하 당대의 아일랜드인에 불어넣는 고대 아일랜드인의 숨결.
<캐슬린 너 훌러한>은 근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지만, 캐슬린 너 훌러한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시대적 경계를 무너뜨리며, 당대의 절실한 문제, 즉 독립 투쟁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로서는 보기 드물게 적극적인 애국심의 표출이다. 캐슬린의 소망은 “아름다운 초원을 되찾는 소망. 내 집에서 이방인들을 쫓아내는 소망”(P.96)이다. 아름다운 초원은 아일랜드, 이방인은 영국을 지칭함은 명백하다. “오늘은 억압당한다 해도, 내일은 우위를 점하게 될 거야”라고 하면서 의지를 불사른다. “나를 돕기로 한 사람들이 할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 혈색이 좋은 많은 사람들이 창백해질 것이고, 자유롭게 언덕과 습지, 풀밭을 돌아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먼 나라들에서 딱딱한 길거리를 걸어 다니게끔 내몰릴 테지...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도, 세례식에 이름을 지어줄 아버지가 없을 게야.”(P.98) 그 길이 평탄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림자 드리운 바다>는 환상적이고 몽상적이며 과도할 정도로 상징적이다. 인물들의 대사 자체도 구체성을 결여한 모호한 시적 언어로 형상화되어 있다. 펄게일은 선장이자 주술사로서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이상한 사랑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한 삶의 여인에게로, 그림자가 없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여인”(P.106)을 찾아 항해에 나선다. 펄게일의 하프 연주에 여왕 덱토라의 혼이 사로잡혀 각성하면서 연인은 죽음도 가르지 못할 불멸의 영원한 사랑을 토로하면서 스러져간다. 혹시 예이츠의 모드 곤에 대한 사랑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모래시계>에서 예이츠는 이성과 구원 간의 갈등과 대립을 다룬다. 현자의 “신중하고 냉철한” 지성은 인간 구원과 영원한 진리에 이르지 못함을 갈파한다. 극중 바보는 역설적 상징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바보가 이성의 바보라면, 현자는 영혼의 바보임을. 바보의 대사가 이를 잘 나타낸다. “당신과 나, 우리는 두 명의 바보들이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만,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P.230). 말로와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극중 현자의 캐릭터는 강렬하다. 파우스트 박사는 신에 대한 회의로 지옥에 빠지지만, 신을 부정하던 현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용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뼈다귀들이 꾸는 꿈>은 예이츠가 독립투쟁이 격화되던 당대를 고대 아일랜드의 사건과 결부시킴으로써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있다. 조국을 배신하여 조국을 노예로 팔아버린 한 쌍의 연인, 쥐얼뮈드와 드볼길라는 7백년 동안 동포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닌다. 등장인물 청년의 입에서 용서의 표현이 나오길 간구하지만, 청년은 단호히 용서를 거부한다. “결단코, 결단코 쥐얼뮈드와 드볼길라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갈보리>는 예수의 죽음 장면을 재해석한다. 죽음에서 살려낸 나사로는 영원한 안식을 어지럽히고 다시금 고통을 선사하였다고 예수를 비난하며 조롱한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도 당당하다. 유다는 예수의 전지전능성에 숨 막혔기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를 배신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가 배신은 예정되어 있다고 하자 유다는 예정된 배신을 실행에 옮긴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의지였다고 반박한다. 이 작품은 예이츠의 비기독교적 관념을 보여준다.
한편 예이츠의 켈트의 전설적 영웅인 쿠헐른[쿠훌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극을 여러 편 남겼다. <매의 우물가에서>는 영생을 추구하는 청년 영웅 쿠헐른을, <발리아 해변가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아들을 죽이게 되는 비극적 영웅을, <이멀이 바란 단 한 가지>는 아들을 죽이고 광기에 휩싸여 파도와 싸움을 벌이다 목숨이 끊어지려는 쿠헐른을 앞에 둔 아내 이멀의 고뇌를, <쿠헐른의 죽음>에서는 최후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쿠헐른과 여전사 이파의 대면을 각각 다룬다.
예이츠가 유독 쿠헐른을 주인공으로 하는 극작품을 시리즈로 남긴 연유는 무엇일까? 유명한 전설상의 영웅이므로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 쿠헐른의 돋보이는 영웅적 풍모와 장엄한 비극성, (신이 아닌) 인간적 면모 등이 언뜻 떠오른다.
<매의 우물가에서>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가 있어 생략한다. 다만 재독을 하니 작품이 훨씬 친숙하게 다가왔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발리아 해변가에서>에서 쿠헐른과 젊은이는 부자지간을 인식 못하면서 자연스레 이끌려 벗이 되고자 한다. 이때 마지못해 충성서약을 한 크로후얼의 강요와 마법의 작용으로 그는 젊은이와 결투를 벌여 죽이고 만다. 쿠헐른과 크로후얼의 서약은 정치적 고려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행위이다. 정치가 인간성의 발현을 저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광기에 빠진 쿠헐른은 파도와 맹렬히 싸우는데, 등장인물 장님과 바보의 대화로 숨은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바보: 오! 그는 파도와 싸우고 있어!
장님: 그는 그들 모두에게 있는 크로후얼 왕의 왕관을 보는군.
바보: 저기, 큰 파도를 쳤어! 왕관을 쳐서 떨어뜨렸어. 거품이 날나가게 하는군,” (P.180)
극중 바보와 장님의 역할은 단순하지 않다. 여성 선지자의 대사에서 이를 알게 된다.
“인생이란 것은 마지막에는 바보와 장님 사이를 떠돌게 되지. 아무도 끝을 모르는 거야.” (P.174)
<이멀이 바란 단 한 가지>에는 등장인물 소개에서 오류가 있다. 이 작품은 쿠헐른의 법적인 아내 이멀의 고뇌가 중심을 이룬다. 아내이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이멀, 그녀는 쿠헐른의 사랑 놀음을 지켜보면 한 가닥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되찾을 날을. 하지만 쿠헐른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랑을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철저한 자기희생만이 그를 살릴 수 있지만, 이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사랑의 위대한 힘이 발휘된다.
<쿠헐른의 죽음>은 예이츠의 유작이다. 실상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쿠헐른에 빗대어 말하고자 했음은 아니었을까? 서두에 연극을 소개하는 노인은 예이츠 자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메이브 여왕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쿠헐른에게 이파가 나타난다. 자신이 죽인 아들의 생모, 영생의 샘의 우물가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여전사. 쿠헐른에게 몸을 허락했으나 떠나버린 그를 증오하게 된 여인. 영웅의 목숨을 취한 건 장님. 그는 12페니를 위해 영웅의 목을 베었다. 이 작품은 영웅 쿠헐른과 예이츠를 위한 송가이다. 지나가버린 시대의 귀족적 고귀함에 대한 찬가이다. 물질적 천박함에 오염된 당대에 대한 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