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의 죽음 2
토마스 말로리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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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에서는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의 후반과 성배 탐색의 모험, 귀네비어 왕비와 랜슬롯 경의 사랑과 아서 왕의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트리스탄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말로리의 이야기에는 강조하는 차이점이 확연하다. 말로리는 기사로서 트리스트람 경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조드는 필생의 연인임은 맞지만 이는 다른 기사들도 모두 연인을 갖고 있고 이를 꿈꾼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반면 트리스탄은 그러하지 않다. 그는 뛰어난 기사이지만 이는 부수적이다.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은 연인 트리스탄이며, 이즈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 사랑이다. 따라서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빠졌던 원탁의 기사의 활약상을 말로리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맛볼 수 있다.

 

트리스트람 경 못지않게 판이한 성격으로 변모하는 게 바로 마크 왕이다. 트리스탄 이야기에서 마크 왕은 고매한 인품과 덕성을 지니며, 도덕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흔들리는 동정심을 품을 만한 인물로 나타난다. 반면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에서 마크 왕은 오로지 사악한 존재다. 그의 사악함은 비단 트리스트람 경에 대한 것을 넘어서 평소 불의한 언행과 비겁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고결한 트리스트람 경에 대비되는 절대 악의 현현으로 몰락하고 있다.

 

말로리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적 등장인물 외에 못지않은 중요성과 비중을 두고 있는 기사 인물도 등장하여 독자의 심금을 매료시킨다. 라모락 경과 팔로미데스 경이 대표적이다. 팔로미데스 경은 이교도로서 트리스트람 경과 마찬가지로 이조드를 연모하므로 그와 끊임없이 갈등과 대결을 벌이는 상대역으로 나타나는데 이교도적 사악함과 기사도적 용기를 갖춘 모순된 유형의 인물이다. 라모락 경은 트리스트람 못지않게 비극적이다. 그는 랜슬롯 경, 트리스트람 경에 뒤지지 않는 탁월한 실력의 기사인데, 가웨인 경 형제들의 아버지를 싸워 죽이고 어머니와 연인 관계를 맺고 있어 가웨인 경 형제들의 원한을 사고 있다. 말로리는 라모락 경의 최후를 간접적으로만 전하고 있는데, 이는 고매한 기사의 비극적 죽음 장면을 피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러한 태도는 마크 왕에 의해 암살된 트리스트람 경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귀네비어 왕비와 랜슬롯 경은 관점에 따라 여러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고 고매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의심할 여지없는 분명한 불륜인지 말이다. 순수한 정신적 사랑이었다면 침실에 불러들이고 같이 눕는 것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것을 당대의 일상적인 문화와 관습으로 볼 것인지 또 다른 의문이 뒤따른다.

 

확실한 것은 아서 왕과 랜슬롯 경에 대한 것보다 귀네비어 왕비에 대한 당대와 원탁의 기사들의 인식은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도어 경의 왕비 기소 사건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우리의 가장 고귀한 아서 왕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경만큼이나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오. 하지만 귀네비어 왕비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소. 그녀는 훌륭한 기사를 죽인 자이오.” (P.408)

랜슬롯 경의 왕비에 대한 언행과 왕비의 랜슬롯 경에 대한 언사를 비교하여 보더라도 확실히 귀네비어 왕비는 고매한 인간성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흠결이 엿보인다. 아서 왕의 부인인 왕비는 랜슬롯 경과 다른 여인의 연애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광적인 질투와 투기를 드러낸다. 랜슬롯 경을 내치면서 뱉어내는 잇따른 저주의 언사(“그에게 저주가 내리기를!”(P.430))를 보면 고결한 아서 왕의 배필로 적합한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러한 그녀의 부적절한 사랑이 결국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파국으로 몰고 가게 된 단초를 제공하였다.

 

성배 탐색의 이야기는 앞서 읽은 <성배의 탐색>과 싱크로 율이 완벽히 일치한다. 말로리는 프랑스 원전을 최대한 동일하게 요약하는데 주력하였다. 성배 탐색은 아서 왕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모험이다. 사라져 버린 성배를 발견하고 온전히 찾아올 수 있다면 그의 왕국은 불멸의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온전히 믿는 자는 거의 없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끼지 않는(P.300) 당대 사회는 죄로 넘친 세상이었으므로 성배가 존재할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성배를 발견한 갤러해드 경과 퍼시발 경은 세속을 등지고 피안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작품 말미는 아서 왕과 랜슬롯 경 간의 슬픈 전쟁 이야기다. 여기서 가웨인 경 형제들이 주요한 역할을 맡는데, 이들은 훌륭한 가문이지만 진실하지 못한 심신으로 비난받으며, 모친 살해의 패역을 저지른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가웨인 경이 사리분별이 탁월한데, 이마저 동생 가헤리스 경과 가레스 경의 뜻밖의 죽음에 맹렬한 분노에 휩싸여 버린다.

 

랜슬롯 경과 아서 왕의 분란은 잠재된 불안이 표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던 지도 모른다. 강력한 왕권 체제에서 왕보다 고결하고 용맹이 앞서며, 독자적 지지기반과 추종 세력을 가진 인물이 언제까지나 신하로 있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랜슬롯 경에 대한 가웨인 경의 미움은 상당 부분 왕실의 신권 견제에 기인한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가웨인 경은 섣불리 랜슬롯 경과 전면적 대결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래서 격노한 아서 왕을 달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가끔 저희는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일을 하지만 우연히 그것은 최악의 것이 됩니다.” (P.505)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가웨인 경은 배반자 모드레드 경(그는 아서 왕의 아들이었다!)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어 죽음에 임박하여 아서 왕에게 있어 랜슬롯 경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으나 운명은 사람들의 의지에 따르길 거부하였다. 랜슬롯 경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잇달은 배반자 모드레드 경과의 싸움에서 랜슬롯 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원탁의 기사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아서 왕의 강력하고 고결한 왕국도 종국을 맞이하였다. 아서 왕도 생사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채 아빌리온 계곡으로 배를 타고 떠나간다.

 

책장을 덮으면서 눈시울과 콧잔등이 시큰한 것은 위대하였던 이 전설상의 인물들에 대한 애석한 추모의 한줄기 상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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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단막극선집 - 대역/주석본
송옥 지음 / 동인(이성모)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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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제2 목동극> : 작자 미상
<피라머스와 티스비> : 윌리엄 셰익스피어/프레데릭 리틀
<골짜기 그늘 아래> : 존 밀링턴 싱
<바다로 가는 사람들> : 존 밀링턴 싱

 

예이츠와 동시대 아일랜드의 요절한 극작가인 존 밀링턴 싱의 작품이 수록된 국내 유일(?)의 책이다. 아쉽게도 그의 대표작 <서쪽지방에서 온 난봉꾼[멋쟁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제2 목동극>은 중세 신비극으로 웨이크필드의 수도승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앙극답게 예수 탄생의 신비를 소박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당대 목동들의 고달픈 삶이 해학과 어우러져 특유의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흠을 잡는다면 예수 탄생 이전임에도 구세주와 기독교 성인 이름이 스스럼없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매우 지루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의외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 이는 종교적 내용의 비중에 비해서 세 목동들의 고달픈 신세 한탄, 양도둑 매기와 그의 아내 질의 속임수 등 세속적 사건이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서 연유한다. 종교극을 표방한 한바탕 세속극이라고 하겠다. 예수 탄생의 필연성을 현실의 목동과 농민들이 고초를 겪는데서 찾는다.

 

<피라머스와 티스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의 극중극 장면을 한 편의 단막극으로 번안한 것이다. 솔직히 원작이 어떠한지는 읽어본 지가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다. 영주 앞에서 하층민들이 연극 공연을 벌이는 것인데, 그네들의 거침없는 말투와 바텀[바틈]의 거리낌 없는 좌충우돌이 인상에 남는다. 가벼운 소극(笑劇)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앞의 작품들에 비하면 존 밀링턴 싱은 극의 성격과 분위기가 확연히 대조적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외딴 섬에서 거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싱이 무대로 삼은 곳은 아일랜드 서부의 아란 군도이다. 거친 대서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이곳은 아일랜드에서도 가장 오지이며, 환경이 척박하여 힘겹게 생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열악한 땅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문명화가 덜 되어 있기에 켈트 문화의 고유성이 가장 많이 살아남은 곳이다. 싱은 이곳에서 아일랜드 고유문화의 원형을 발견하고 이를 생생하게 극에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여인들이다. 아란 군도의 여성들은 가난과 무지의 억압으로 인해 일반적 여성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 그네들은 오로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원치 않은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게다가 언제든 배를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자연으로 인해 남편과 자식들이 목숨을 잃어도 체념한 채 살아가야 한다. 이 모든 요인들이 지독한 숙명성과 수동성을 부여하여 그네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란 사람들이 무조건 운명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입센의 <인형의 집>을 연상시키는 <골짜기 그늘 아래>에서 가정제도의 억압성을 못견뎌하고 벗어나려는 여주인공 노라. 수동성을 탈피하고 능동적 여성상을 선택하려는 여주인공 이름이 입센의 작품과 동일하다는 점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은 켈트의 유산으로서 노라가 마이클 대신 떠돌이와 길을 떠나는 것도 이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에서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섬을 떠나는 배를 타려는 바틀리의 태도도 숙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도전을 표상한다. “바다로 가는 건 젊은이의 삶”(P.277)이라는 캐스린의 대사는 곧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바다로 가는 사람들, 죽을 줄 알기에 이를 만류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바다로 표방되는 자연은 위험천만하지만 삶을 위해 동반이 불가피한 존재다. 삶과 죽음이 나란히 이웃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두가지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운명에 오뚝이처럼 도전할 것인가,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할 것인가.

 

작가 싱이 아일랜드의 오지에서 발견한 것은 날것 그대로의 아일랜드였다. 근대 도시문명에 길들여진 나약함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 억압과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불굴의 영혼을 지닌 아일랜드인.

 

<골짜기 그늘 아래>에서 노라는 과감히 문을 박차고 길을 떠난다. 그녀의 앞길은 평탄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떠돌이가 장밋빛 미래를 주절거려도. 집을 나서는 순간 노라는 가정이 주는 안전과 보호막을 상실하고 세찬 풍파에 직면해야 한다. 헐벗고 굶주리며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것처럼 주체를 상실하고 피동적인 삶은 사는 대신 그녀는 힘겹더라도 자아를 지키며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바다로 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은 바틀리를 보내는 노모 모이라와 여인들의 호곡으로 맺는다. 모이라에게 죽음은 이미 낯선 현상이 아니다. 슬픔을 자연스레 받아들여 이를 초월하려는 달관의 심적 정서가 면면히 흐른다.
“더 무얼 바라겠어요?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우린 이걸로 만족해야지요.” (P.307)
바틀리의 누이이자 모이라의 두 딸인 캐스린과 노라는 아마도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녀들은 아직 자연에 도전할 뜻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들의 미래가 엄마의 것과 같은 상황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젊기에 삶을 그대로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남편과 자식은 앞으로도 계속 바다로 가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수록 작품의 원문과 번역본을 나란히 실은 영한대역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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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의 죽음 1
토마스 말로리 지음, 이현주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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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씌어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에 관한 이야기의 집대성으로서 기사도 문학의 총 결산이라고 하겠다. 6세기 경 인물로 추정되는 아서 왕 전설은 12세기 들어 문학적 형상화의 세례를 받아서 당대 서구 대중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유럽 지배민족인 게르만 족과 대결하여 쇠퇴하였던 켈트 족 영웅이 서구인들의 가장 인기 있는 설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일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서 왕 이야기는 최초에 영웅 아서 왕 개인의 무훈담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이야기는 확대되어 원탁의 기사가 생겨났고 호수의 기사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트리스트람[트리스탄] 경과 이조드[이즈,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그리고 성배 탐색으로까지 파생되었다. 오늘날 서양 예술과 오락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확대 재생산 현상을 통해 그네들의 문화에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의 의의를 유추할 수 있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기에 오백 면이 넘는 빽빽한 판형의 책 두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웬만한 판형이라면 너끈히 서너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국내 최초 번역이자 완역을 위해 장시간 고생한 번역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본문 내용 중에는 이미 읽어 아는 것도 있지만 처음 접하는 내용도 상당히 많다. 아는 것도 세부적으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작자 말로리는 대부분 프랑스어 원전에서 옮겨 수록하면서 가급적 원형을 유지하려고 애쓴 것처럼 보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의도적으로 편집을 가한 곳도 있다. 대체적으로 짜임새가 탄탄한 작품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단 작자 자신의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며, 지리적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퍼진 이야기를 모으고 시간적으로도 수백 년간 파생되고 변형된 이야기를 취합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작자 말로리는 방대한 이야기를 모아서 전하기에 힘쓸 뿐 일관된 체계로 재탄생하는 예술적 역량을 갖추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산만하여 개별 일화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며, 중첩되고 상호 모순되는 이야기가 병치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이 책의 미덕은 단점을 능가한다. 개별적으로는 상세한 내용이 가능하겠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서 이 책보다 풍성하고 흥미로운 작품은 없을 것이다. 원전이 되는 작품들은 기사들의 사랑, 마법 등 관심에 따라 각각 초점을 달리한다. 작자 말로리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지상의 미덕은 기사도의 참모습을 전하는데 있다. 아서 왕도 랜슬롯 경도 사랑의 미약을 먹은 트리스트람 경도 무엇보다 올바른 기사로서 겪는 모험과 용맹, 기사도 정신의 발휘에 더 큰 비중을 든다. 그들의 불륜적 사랑과 심적 고뇌 등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몇몇 잘 알려진 원탁의 기사 외에 무수한 뛰어난 기사들의 일화를 많이 알게 된 점도 수확이다. 아서 왕이 왕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발린 경은 물론 별도의 장을 부여할 정도인 오크니의 가레스 경, 라모락 경과 팔로미데스 경 등.

 

중세 기사들은 모험과 사랑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기사로서 명예를 쌓기 위하여 대대적인 마상 창시합에 참가하였으며, 노상에서 마주치는 기사들끼리도 자웅을 겨루곤 하였다. 기사들에게 창시합은 의무이자 일과인 동시에 취미라고 해석된다. 비록 시합 도중에 불운하거나 불행에 빠지게 되더라도 당당한 기사라면 이를 피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수많은 일대일 또는 일대다의 대결 장면이 등장한다. 시합이 너무 자주 발생하고 할애되는 분량도 많기에 이 부분만 없앤다면 전체 작품의 분량을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자체가 중세 기사도 문화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할 때 역시 힘들더라도 봐두는 게 좋을 것이다.

 

기사의 계율에는 여성 존대가 있다. 진정한 기사는 아름다운 귀족 여인을 연인으로 두어야 한다. 연인은 혼인하여 부부가 될 수도 있지만, 기혼녀와 연인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가 그러하면, 트리스트람 경과 이조드 왕비의 정사(情死)가 대표적 경우이다. 뛰어난 여성에 대한 정신적 숭배 정도라면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할 것이지만 애정과 육체관계가 개입되면 사랑은 불륜으로 변질된다. 여기에 지위 및 도덕적 의무와 마음에 내재한 진실한 감정 간 갈등이 비롯된다. 이 작품에서는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아 종교적,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초기에는 아서 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소년 영웅이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하며 강자로 군림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여정. 아서 왕과 함께 그들의 친인척 간인 기사들도 함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케이 경과 가웨인 경이다. 특히 가웨인 경은 초기 아서 왕 문학에서 기사도 정신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온갖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이였다. 아서 왕과 이들 기사는 후대가 되면서 변두리로 밀려 나고 랜슬롯 경과 트리스트람 경이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아서 왕은 이따금 창을 잡고 말에 올라타지만 대개는 궁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고귀한 왕으로 역동성을 상실하였다. 가웨인 경은 이류 기사로 전락하였다. 계율과 의무에서 불충할뿐더러 용맹에 있어서도 뭇 기사 중의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여기에는 여러 연유가 있겠지만 기사들 간의 전투에 식상한 대중들이 목숨을 건 위험한 사랑 이야기에 더 빠져든 것도 있다고 본다.

 

어쨌든 작자 말로리의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라이오네스의 트리스트람 경 이야기의 한 중반에서 제1권이 끝난다. 제2권에서는 트리스트람 경의 남은 이야기와 성배 탐색, 랜슬롯 경과 귀네비어 왕비의 사랑, 그리고 아서 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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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 희곡선집 아일랜드 희곡 시리즈
W. B. 예이츠 지음, 권경수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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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캐슬린 백작부인
2. 캐슬린 너 훌러한
3. 그림자 드리운 바다
4. 매의 우물가에서
5. 발리아 해변가에서
6. 이멀이 바란 단 한 가지
7. 모래시계
8. 뼈다귀들이 꾸는 꿈
9. 갈보리
10. 쿠헐른의 죽음

 

명실상부한 예이츠 대표희곡 선집이다. <디어드라>를 제외한 주요작품이 모두 실려 있다. 국내에서 극작가 예이츠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비추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극작자로서 예이츠의 특성을 옮긴이의 글에서 옮긴다.
“예이츠는 극에 대해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와 해석을 제시했는데 첫째로 극작가는 지적인 극을 창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아름다움과 진실이 정당화되어야 한다. 둘째로 배우는 말의 운율과 운율 사이를 박자와 박자 사이를 잘 구별해 시극의 음악적인 요소를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셋째로 시극에서는 연기가 단순해야 하고 말의 소재를 방해하는 모든 것, 짧은 순간의 강렬한 표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 넷째로 동작을 간결하게, 배경색도 간결하게 하는 하나의 제의 같은 극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P.7)

 

그의 희곡은 일반적 사실주의 극과는 차원을 달리하므로 통상적인 접근법으로는 매우 난해하다. 단순화되고 신비스러운 무대 배경, 시적인 대사, 정적인 연기가 플롯의 상징성과 어울려 그의 극작품의 참맛은 무대에 올려진 실제 공연을 봐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희곡은 반복되는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다. 무대에서 기다란 천을 펴고 접는 행동, 이것은 막을 대치할뿐더러 단순하고 모호한 행동을 통해 생경하고 기이한 효과를 부여한다. 주요 인물이 아닌 연주자 또는 코러스의 존재, 명백히 그리스 희곡에서부터 유래하였을 이들은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켜 주며 향후 작품 전개의 암시를 던지고 있다. 일상성에서 벗어난 초자연적 배경과 인물, 시대적 배경이 대체로 고대 아일랜드와 영웅시대를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가면 착용, 일본 노극에서 받은 영향으로 가면을 통해 인물의 비인간적 요소를 극대화하고 있다.

 

<캐슬린 백작부인>은 그의 첫 희곡이다. 초기작이니만치 앞서 말한 그의 특징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선과 악, 영혼의 거래,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 등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담겨져 있다. 특히 캐슬린 백작부인이라는 지순한 영원의 여인상을 창조하여 순결한 영혼의 의의와 회복을 부르짖고 있다. 식민치하 당대의 아일랜드인에 불어넣는 고대 아일랜드인의 숨결.

 

<캐슬린 너 훌러한>은 근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지만, 캐슬린 너 훌러한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시대적 경계를 무너뜨리며, 당대의 절실한 문제, 즉 독립 투쟁을 다루고 있다. 예이츠로서는 보기 드물게 적극적인 애국심의 표출이다. 캐슬린의 소망은 “아름다운 초원을 되찾는 소망. 내 집에서 이방인들을 쫓아내는 소망”(P.96)이다. 아름다운 초원은 아일랜드, 이방인은 영국을 지칭함은 명백하다. “오늘은 억압당한다 해도, 내일은 우위를 점하게 될 거야”라고 하면서 의지를 불사른다. “나를 돕기로 한 사람들이 할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지금 혈색이 좋은 많은 사람들이 창백해질 것이고, 자유롭게 언덕과 습지, 풀밭을 돌아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먼 나라들에서 딱딱한 길거리를 걸어 다니게끔 내몰릴 테지...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도, 세례식에 이름을 지어줄 아버지가 없을 게야.”(P.98) 그 길이 평탄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림자 드리운 바다>는 환상적이고 몽상적이며 과도할 정도로 상징적이다. 인물들의 대사 자체도 구체성을 결여한 모호한 시적 언어로 형상화되어 있다. 펄게일은 선장이자 주술사로서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이상한 사랑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한 삶의 여인에게로, 그림자가 없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여인”(P.106)을 찾아 항해에 나선다. 펄게일의 하프 연주에 여왕 덱토라의 혼이 사로잡혀 각성하면서 연인은 죽음도 가르지 못할 불멸의 영원한 사랑을 토로하면서 스러져간다. 혹시 예이츠의 모드 곤에 대한 사랑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모래시계>에서 예이츠는 이성과 구원 간의 갈등과 대립을 다룬다. 현자의 “신중하고 냉철한” 지성은 인간 구원과 영원한 진리에 이르지 못함을 갈파한다. 극중 바보는 역설적 상징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바보가 이성의 바보라면, 현자는 영혼의 바보임을. 바보의 대사가 이를 잘 나타낸다. “당신과 나, 우리는 두 명의 바보들이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만,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P.230). 말로와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극중 현자의 캐릭터는 강렬하다. 파우스트 박사는 신에 대한 회의로 지옥에 빠지지만, 신을 부정하던 현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용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뼈다귀들이 꾸는 꿈>은 예이츠가 독립투쟁이 격화되던 당대를 고대 아일랜드의 사건과 결부시킴으로써 애국심을 고양시키고 있다. 조국을 배신하여 조국을 노예로 팔아버린 한 쌍의 연인, 쥐얼뮈드와 드볼길라는 7백년 동안 동포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닌다. 등장인물 청년의 입에서 용서의 표현이 나오길 간구하지만, 청년은 단호히 용서를 거부한다. “결단코, 결단코 쥐얼뮈드와 드볼길라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갈보리>는 예수의 죽음 장면을 재해석한다. 죽음에서 살려낸 나사로는 영원한 안식을 어지럽히고 다시금 고통을 선사하였다고 예수를 비난하며 조롱한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도 당당하다. 유다는 예수의 전지전능성에 숨 막혔기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를 배신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가 배신은 예정되어 있다고 하자 유다는 예정된 배신을 실행에 옮긴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의지였다고 반박한다. 이 작품은 예이츠의 비기독교적 관념을 보여준다.

 

한편 예이츠의 켈트의 전설적 영웅인 쿠헐른[쿠훌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극을 여러 편 남겼다. <매의 우물가에서>는 영생을 추구하는 청년 영웅 쿠헐른을, <발리아 해변가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아들을 죽이게 되는 비극적 영웅을, <이멀이 바란 단 한 가지>는 아들을 죽이고 광기에 휩싸여 파도와 싸움을 벌이다 목숨이 끊어지려는 쿠헐른을 앞에 둔 아내 이멀의 고뇌를, <쿠헐른의 죽음>에서는 최후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쿠헐른과 여전사 이파의 대면을 각각 다룬다.

 

예이츠가 유독 쿠헐른을 주인공으로 하는 극작품을 시리즈로 남긴 연유는 무엇일까? 유명한 전설상의 영웅이므로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 쿠헐른의 돋보이는 영웅적 풍모와 장엄한 비극성, (신이 아닌) 인간적 면모 등이 언뜻 떠오른다.

 

<매의 우물가에서>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가 있어 생략한다. 다만 재독을 하니 작품이 훨씬 친숙하게 다가왔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발리아 해변가에서>에서 쿠헐른과 젊은이는 부자지간을 인식 못하면서 자연스레 이끌려 벗이 되고자 한다. 이때 마지못해 충성서약을 한 크로후얼의 강요와 마법의 작용으로 그는 젊은이와 결투를 벌여 죽이고 만다. 쿠헐른과 크로후얼의 서약은 정치적 고려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행위이다. 정치가 인간성의 발현을 저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광기에 빠진 쿠헐른은 파도와 맹렬히 싸우는데, 등장인물 장님과 바보의 대화로 숨은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바보: 오! 그는 파도와 싸우고 있어!
장님: 그는 그들 모두에게 있는 크로후얼 왕의 왕관을 보는군.
바보: 저기, 큰 파도를 쳤어! 왕관을 쳐서 떨어뜨렸어. 거품이 날나가게 하는군,” (P.180)

 

극중 바보와 장님의 역할은 단순하지 않다. 여성 선지자의 대사에서 이를 알게 된다.
“인생이란 것은 마지막에는 바보와 장님 사이를 떠돌게 되지. 아무도 끝을 모르는 거야.” (P.174)

 

<이멀이 바란 단 한 가지>에는 등장인물 소개에서 오류가 있다. 이 작품은 쿠헐른의 법적인 아내 이멀의 고뇌가 중심을 이룬다. 아내이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이멀, 그녀는 쿠헐른의 사랑 놀음을 지켜보면 한 가닥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되찾을 날을. 하지만 쿠헐른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랑을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철저한 자기희생만이 그를 살릴 수 있지만, 이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사랑의 위대한 힘이 발휘된다.

 

<쿠헐른의 죽음>은 예이츠의 유작이다. 실상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쿠헐른에 빗대어 말하고자 했음은 아니었을까? 서두에 연극을 소개하는 노인은 예이츠 자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메이브 여왕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쿠헐른에게 이파가 나타난다. 자신이 죽인 아들의 생모, 영생의 샘의 우물가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여전사. 쿠헐른에게 몸을 허락했으나 떠나버린 그를 증오하게 된 여인. 영웅의 목숨을 취한 건 장님. 그는 12페니를 위해 영웅의 목을 베었다. 이 작품은 영웅 쿠헐른과 예이츠를 위한 송가이다. 지나가버린 시대의 귀족적 고귀함에 대한 찬가이다. 물질적 천박함에 오염된 당대에 대한 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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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예이츠
정영희 지음 / 평민사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앞서 읽은 예이츠의 시집에 대한 아쉬움에 기인한다. 이십여 편의 시와 간략한 권미(卷尾) 해설은 예이츠의 시 세계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썩 만족스럽지 못하며 친절하지도 못하다. 물론 해설서를 찾아보면 되겠지만 전문 독서인이나 연구자가 아닌 경우 가볍게 시를 읽으려는 의욕을 저하시키는 조언이다.

 

이 책은 예이츠 초심자를 위한 안전한 선택이 될 것으로 감히 생각한다. 수록된 시도 38편으로 가장 많으며, 내용도 매우 충실하다. 게다가 어렵지 않다는 큰 미덕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시인의 작품 세계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각 시기를 대표하는 시들을 수록하는 방식이다. 시는 응당 영한 대역이며, 각 시마다 작품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개별 시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생애와 전반적 작품 세계에 대한 기술이 책 말미에 자리 잡고 있어 구성면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다.

 

앞서 두 권의 시 선집과 상당 부분 겹치지만 생경한 시편들도 등장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저자는 예이츠의 작품들을 신화적 민족문학, 가톨릭 중산층과의 충돌과 영국계 아일랜드 문화론의 대두, 존재통합과 문화적 이상, 그리고 비극적 환희와 현실 수락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통상적 시기 구분과 유사하지만 세 단계가 아니라 네 단계로 나누어 존재의 통합을 세분하는 점이 이채롭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서정성과 모더니즘의 미학을 벗어나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서 예이츠가 느꼈던 고독과 영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에 대한 그의 애증 섞인 복합적 태도”(P.6)에 대한 인식이다. 예이츠는 아일랜드가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면서도 영국적인 봉건 귀족주의가 이끄는 사회를 지지하였다. 그는 대중의 얄팍한 지성과 물질 숭배의 태도를 혐오하여 <‘서구세계의 바람둥이’를 증오한 사람들에게>나 <1913년 9월>, <거지가 거지에게 소리쳤네>에서 격렬하게 비판한다. 이런 혐오감은 추후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예이츠의 애매한 입장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모호한 지지를 보내면서도 생명을 담보로 한 유혈투쟁의 타당성에 대한 일말의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1916년 부활절>과 <에바 고어부스와 콘 마키에비츠를 추모하며>가 그러하다.

 

그의 존재의 통합의 이상은 <학교 아이들 가운데서>에 잘 드러나 있다. 예이츠는 극단을 회피하고 균형과 중용의 정신을 찬미한다.

 

“실재에 대한 꿈과 실재 자체는 다르며 설사 그 꿈이 숭고한 것이라도 그 때문에 삶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이츠의 생각이었다. 그는 삶이 명분보다 중요하고 추상적 명분에 앞서 구체적 삶에서 참다운 진리, 즉 직관적 진리가 터득된다고 생각했다.” (P.137)

 

중도와 조화의 정신은 얼음처럼 차가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이츠는 생명력의 분출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은 무모하다시피 한 열정이기도 하다. 열정에 대한 몰입, 그것은 인간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이며 존재의 통합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오, 음악에 맞추어 흔들리는 몸이여, 오, 빛나는 눈길이여,
어찌 춤추는 이와 춤을 가를 수 있겠는가?” (P.135)

 

달관과 초월의 경지에서 바라보면 세상사의 번잡함은 찰나에 불과하며, 인간사의 아웅다웅은 한바탕 웃음거리 밖에 지나지 않는다. 인위적인 차별이 없는 상태, 예이츠의 말년의 시는 그러한 심경을 반영한다. 미친 제인이 보기에 주교의 권유는 종교적 속박의 옹졸함에 뒤덮여 있다. 하지만 주교를 저주하는 것도 신물 난 예이츠는 관조적 태도를 취하는데, 저자는 이에 ‘비극적 환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비극적 환희는 이상과 거리가 먼 현실에, 반쯤 슬퍼하고 반쯤 조롱하며 저항하는 황홀경의 상태에서 시대의 현실을 연극의 관람객처럼 초연하게 받아들일 때 솟아나오는 삶에 대한 긍정이었다.” (P.155)

 

모순적 용어의 병치, 그것은 진정한 기쁨으로 넘치는 환희는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체념은 더 이상의 절망을 막아주기에 심적 상태는 개운하고 홀가분하다. 이는 절대 성인의 경지에 도달했거나 아니면 죽음을 예감한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경지라고 하겠다. 그렇다. 예이츠는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게 아닐까?

 

그의 마지막 시 <불벤 산 기슭에서>는 후배 시인들에 대한 당부와 유언을 담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의 시인들이 “웅대했던 700년에 걸쳐 / 흙에서 다져진” 농민들, 시골 신사, 수도사, 짐꾼들, 명랑한 귀족과 귀부인들을 노래하라고 권유한다. “다가오는 세상에도 / 우리 여전히 불굴의 아일랜드 국민일 수 있을 / 미래에 마음을 기대시게”, 이렇게 말이다.

 

그의 유언은 비장하며 단호하다.
“삶에, 죽음에,
차가운 시선을 던지시게.
말 탄이여, 그냥 지나가시라!”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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