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 희곡 선집
조미나 지음 / 누멘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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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밀히 평하자면 이 책은 예이츠 희곡 선집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가 다소 애매하다. 내용상 커다란 관련성이 없는 두 파트를 억지로 한 권의 책으로 합본해 놓았다. 제1부는 <예이츠 희곡선>으로 세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으며, 제2부는 <예이츠의 시세계에 나타난 신비사상>으로 역시 세 편의 논문을 수록하였다. 그래서 ‘조미나 옮기고 지음’이라는 낯선 문구가 등장하였다.

 

20여 편의 극작품을 남긴 예이츠는 사실주의적 희곡을 거부하고 시와 마찬가지로 신비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의 작품을 썼다. 그의 삶과 문학에서 극은 시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앞서 ‘디어드러’와 ‘매의 샘에서’를 읽어보았는데, 이 책에서는 ‘성좌에서 온 유니콘’과 ‘배우 여왕’, ‘고양이와 달’을 수록하였다.

 

예이츠는 무대 장치를 극도로 단순하고 간결하게 처리하며, 텅 빈 듯한 무대는 신비적인 뉘앙스를 풍기게끔 유도한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도 상징성을 띄며 고도로 함축적이다. 이런 연유로 그의 작품은 그리 길지 않다. 이 작품들은 예이츠로서는 비교적 드물게 보는 비설화적 희곡이다. 동시에 매우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성좌에서 온 유니콘’에서 작가의 자본주의 및 물질문명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이런 평범한 속물이 작중 토마스이며, 존 신부, 앤드류와 마틴은 비전과 환상에 경도되어 있다. 마틴의 꿈에서 나타난 유니콘은 신성하며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존재다. 마틴은 꿈이 세상을 전복하라는 계시로 간주하여 거지들을 끌어들여 폭동을 일으킨다. 작가는 마틴이 받은 예언이 잘못 해석된 것임을 제시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온 세상이 진흙투성이인데 한 점 오점없이 유니콘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속세를 떠나는 것이 그 순결함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이리라. 마틴은 과감히 세상에 도전하였다.

 

‘배우 여왕’은 드물게 이국적 배경을 택하고 있다. 역시 유니콘이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배우 셉티머스는 유니콘의 숭엄함과 순결함을 적극 옹호한다. 그 역시 유니콘이 현세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며, 이로써 기독교 세상이 끝날 것을 예언한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여배우이자 셉티머스의 아내가 여왕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면이다. 데시마는 죽음을 택하였건만 성난 폭도는 진정되고 배우 여왕은 진정한 여왕이 된다. 모든 게 불가항력적으로. 아이러니는 여왕이 수년간 궁에만 은거하고 총리대신을 제외한 누구도 여왕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얼굴 없는 여왕은 대중들에게 실체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니콘의 예언자인 셉티머스는 버림받고 잠자는 아담이 된 반면 엉뚱하게도 데시마는 여왕이 되었다.

 

‘고양이와 달’은 상징적이면서 상투적인 작품이다. 장님 거지는 성자에게 시력을 요청한 반면, 절름발이 거지는 축복을 청한다. 현대인들은 내면을 외면하고 오로지 외적인 것을 갈구한다. 그것은 물질문명과 속물화의 진전에 따라 더욱 심해진다. 예이츠는 사람들이 잃어가는 고귀한 품성을 회복하기를 열망한다. 절름발이 거지는 육신의 회복 대신 영혼의 구원을 택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육신마저도 온전해졌다. 내용은 일견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고양이와 달이 갖는 상징성은 섣부른 추론을 배제한다.

 

사실 이 책의 핵심은 제2부에 있다. 책 서두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예이츠의 시 문학에서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그의 상징은 단순한 낭만성의 차원이 아닌 문명 전환의 일대 예언임을 주장한다. 즉 그의 시는 거개가 예언시라고. 제2부는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이츠는 일찍이 켈트 신화와 전설에 깊은 관심을 쏟았으며, 신비주의 단체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고 때로는 직접 창단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은 서구에 그치지 않고 인도 문명과 선불교도 탐구하여 생각보다 폭과 깊이가 심오함을 짐작케 한다. 그의 시에서 무수한 상징을 배제하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예이츠가 당대 장미십자단을 이끌어 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어느 마법사보다 훌륭한 백마법사였으며 인류의 대스승으로서 2000년을 중심으로 한 문명의 대주기가 끝나는 물고기자리의 마지막 세대인 후대인들을 이해 ‘다이몬(Daimon)’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유언을 남겨 놓았다...” (P.160)

 

매우 놀라운 주장이다. 예수로 대표되는 남성적 서구문명이 종말을 맞이하고 장미십자단의 소피아가 대변하는 여성 원리가 도래할 것을 예이츠는 예언하고 끊임없이 시로써 추구하였다. 예이츠는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예이츠의 문학에 등장하는 레드 한라한과 광대는 작가의 분신이다. 그러고 보니 ‘미친 제인’ 시리즈의 시에서도 미쳤다는 판단의 주체는 당대 세속인의 시각이다. 영원한 진리를 갈파하는 참된 예언자는 범인의 눈에는 미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이츠의 삶과 문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 모드 곤에 대한 인식도 남다르다. 그의 낭만시와 연애시는 세속의 여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이츠는 실생활의 여인들을 단지 사냥개의 소리로 상징했듯이 성배인 불멸의 미를 추구하기 위한 시적 소재에 불과했지 결코 그녀들이 시의 주체이거나 궁극목적은 아니었다...예이츠의 사랑은 한 여인을 향한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불멸의 장미를 향한 사랑을 위한 방편으로서 사랑의 대상이 바뀐 것은 오로지 불멸의 장미를 여성들 속에서 찾고자 한 까닭이라 하겠다.” (P.192)

 

평론가들이 예이츠 시의 진수를 ‘존재의 통일’에 두고, 그것은 개인과 사회적 인식의 조화와 관조의 경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 역시 ‘존재의 합일’이란 측면을 강조하고 있어 이 점에서는 대체로 언뜻 유사하게 보인다. 다만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예이츠의 상징시는 남녀양성의 원리의 균형을 이룬 ‘존재의 합일’을 통한 불멸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P.195)

 

저자의 주장은 기존 예이츠 해석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참신성을 보여 준다. 더불어 예이츠 문학에서 간과되어 왔던 신비주의의 영향을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어 그의 시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침소봉대(針小棒大)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예이츠의 신비주의, 마법에 대한 경도와 장미십자단, 금빛새벽단 등 종교단체 활동 등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도와 사제는 엄연히 다르다. 신비주의에 관심을 보인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과대 해석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저자가 매 페이지마다 언급하는 불멸의 소피아와 예이츠를 연결 짓는 것은 저자의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에 가깝다는 우려가 든다. 그의 시와 희곡에서 소피아는 등장하지 않는다. 장미십자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고 하여 바로 소피아를 예이츠 문학의 절대자로 추앙할 필요는 없다. 세기말 서구의 위기와 기독교 문명의 몰락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는 비단 예이츠 외에도 여럿 있었다. 이들 모두를 소피아 사도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예이츠 시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환영할 만한 일이고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부실한 건축물을 짓는 것은 현명치 않다. 현시점에서 저자의 의견이 보다 설득력을 얻으려면 더 많은 연구와 해석의 시도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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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나 2016-10-22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전에 쓴 글인데 이제 발견한 것 같네요.

우선 제 글에 때해 관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들은 예이츠가 인류를 위해 골똘히 생각한 신비 사제로서의 삶을 깊이있게 반영하여 빚어낸 희곡 작품에 대한 분석입니다. 누구도 예이츠의 신비 사제로서의 숨은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 점을 저자는 무척이나 안타까워한 것이지요. 그의 자서전과 그의 에세이들 속에 묻어나는 모든 것을 연구하고 그 상징성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설명을 한 것이지요. 물론 ˝소피아˝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쓰여진 그의 작품들이었지만 그가 살던 그 당시만해도 아직은 여성신성을 논한다는 것은 이단으로 몰려 비판당한 위험도가 매우 컸기때문에 함부로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보호차원에서 여성이나 ㄷ동물이라는 상징어를 차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를 위해 중요한 숨은 메세지를 담은 예이츠는 시인으로서 과히 최상의 시인이었고 물론 인류 스승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선구자이셨지요. 그러나 이런 예이츠의 숨은 의도와 예언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껏 제대로 분석하여 세상에 내놓지 못한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흑마법이 판을 쳐서 아직도 제 이론이 은밀히 구박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한 까닭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독후감 감사드립니다. 후에 제 시집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이츠 - 존재의 완성을 향하여 문학의 이해와 감상 43
서혜숙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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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의 시집을 읽었다. 알 듯 모를 듯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 시인이 우리말로 쓴 시라도 이해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번역시다. 게다가 예이츠가 누군가? 그의 시는 평범한 듯하지만 그 속에 고도의 상징과 신비로움을 부여하여 제대로 맥락을 짚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럴 때 구원투수로 해설서가 필요하다. 시집 자체에 풍부한 주와 해설이 있다면 좋겠지만 본문 외에 간략한 해설만 있는 상황에서 되새김질은 한계가 있다. 저자는 학문적으로 예이츠를 전공한 사람이니 내용의 수준과 신뢰성은 어느 정도 담보되어 있다.

 

대개 유명 시인은 일찍이 천재적 자질을 보여주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이미 이십 대에 문명(文名)을 떨쳐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경우가 많은 장르가 바로 시에 있다. 예이츠는 대기만성 형이다. 이십 대 중반에 첫 시집을 출판하였으나 중년이 될 때까지 그의 시인으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올망졸망한 시인 무리의 일원. 오십 대를 넘어가면서 급격히 작품의 원숙미와 깊이가 더해지면서 돋보이기 시작하더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저자는 전반부에서 예이츠의 생애를 짚어본다. 가계로부터 시작하여 모드 곤과의 만남, 그리고 연대순으로 일생을 살펴보면서 문학적 연관성을 상세하지만 명료하게 제시하여 이 부분만 읽더라도 시인의 시를 받아들이는데 꽤 도움이 될 정도다. 예이츠의 작품은 그의 삶과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정당하게 해석되기 어려운 점이 많음을 유념해야 한다.

 

책의 핵심은 이어지는 작품 해설에 있다. 얄팍한 소책자에서 80면을 여기에 할당할 정도다. 구성은 작품들의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 발표된 시집과 수록된 주요 시의 분석을 하고 있다. 게다가 여타 시집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설화시, 장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 미덕을 보여준다. 시기 구분은 환상적 낭만기, 현실로의 전환, 존재의 통일, 세속적 완성의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후자의 두 시기를 합친다면, 통상적 연대 구분과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예이츠의 첫 작품이 <어쉰의 방랑>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예이츠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서 켈트 신화와 설화에 심취하였다. 일찍부터 신비주의적 종교집단에 가담하였을 만치 그의 내면에는 기독교적 특성보다는 신비주의적 이교적 요소-켈트, 기독교의 이단, 인도와 선불교 등-가 더 강하였다. 이 점은 그의 <켈트의 여명>에서 혼령과 요정을 불러내는 마법 의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적 정신의 뿌리는 켈트이다.

 

예이츠의 시인으로서의 절정기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중기에서 개인적 인식을 사회와 현실로 확대시킨 예이츠는 부단히 자아와 사회의 갈등을 겪는다. 봉건적 귀족사회의 고상하고 우아한 가치를 중시한 그에게 아일랜드 독립 투쟁과 어지러운 정치 현실은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제 그는 관조적 자세로 세상을 응시한다. 시집 <탑>과 <나선형의 계단>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과 육체, 신성과 욕망, 선함과 악함, 고결함과 더러움 등 상반되는 제반 요소를 그는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다룬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존재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존재는 특정 이념으로 재단할 수 없다. 존재는 자체로서 고유한 현상이자 실체이다.

 

이 책은 특히 예이츠에게 영향을 미친 동양 사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예이츠는 일찍부터 동양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초기의 인도 문학과 종교에 이어 후반에는 선불교, 탄트라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저자는 존재의 통일이 실은 불교에서의 니르바나, 즉 열반과 동일한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작품도 알지 못하는 마당에 난해한 종교적, 철학적 배경을 파악하기란 어려워 자세한 이해는 후일로 미루어 둔다. 그의 전 시작품을 읽어봐야지 이 책에서 논의된 갖가지 분석과 주장 및 배경 등이 가슴에 와 닿지 않겠는가.

 

저자와 책의 도움으로 나는 예이츠의 시세계가 범상치 않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니스프리 호수 섬>과 같은 서정시의 작가로만 알고 있던 무지가 얼마나 얄팍한지를. 국내에 소개된 그의 시 선집이 과연 거인 예이츠의 진면모를 알리는데 오히려 저해 요인이 아닌지를.

 

찾아보니 한국예이츠학회에서 그의 시 전집을 다년에 걸쳐 번역하여 출간하였으며, 최근에는 이를 합권하여 전집으로 출판하였다. 결국 전집에 도전해야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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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부활절 - 영국편 솔세계시인선 7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황동규 옮김 / 솔출판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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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으로 예이츠의 방대한 시 세계를 섭렵하였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예이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또 한 번 그의 시 선집을 펼쳐본다.

 

이 책은 25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는데, 민음사 본과 중복되는 시도 많지만 새로운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중복 수록작은 그의 대표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재독한다고 하여 나쁠 것도 없다.

 

이 책은 다행이도 시기별로 구분하여 1889~1913년의 전기, 1914~1932년의 후기, 1933~1939년의 말기별로 고르게 선별한다. 각 시들의 출전도 명기하여 주어서 시기 및 출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앞에서도 예이츠의 시 세계의 뿌리의 심원함과 광대함을 언급하였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시기별로 그는 감성에서 출발하여 현실을 인식하게 되고 고차원적인 존재의 인식 단계로 접어든다.

 

전기에서 두드러지는 예이츠 시의 시간은 하루로 치면 여명 또는 황혼 이후이며, 계절에서는 가을을 선호한다. 인생에서는 노년을 찬미한다. 그의 시는 화창한 봄날과 눈부신 대낮에 대한 노래가 없다. 어찌 보면 애상의 정서, 감성의 침잠, 어슴푸레한 신비와 환상으로 대변될 수 있는 게 그의 시적 분위기다.

 

예이츠는 시 속에서 현실에 정주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떠나서 방랑한다. 호수 섬 이니스프리를 찾든가 신화 속의 잉거스처럼 방황하는 그에게 현실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피상적 실체이다.

 

후기에서 뽑은 시 중에 <아일랜드 비행사가 죽음을 내다보다>나 <1916년 부활절> 등에서 아일랜드의 격변하는 정세에 대한 작가의 구체적 인식이 표현된다. 그의 시는 더 이상 애상에 물들어 있지 않으며 굳건한 의지와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불만족스러운 현실 상황에 대한 은근하지만 날카로운 비판도 함께 한다. <비잔티움 항해>와 <국민학생들 사이에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옮긴이가 <1916년 부활절>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것도 이에 주목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기에서는 예이츠는 초월과 달관의 경지에 다다르는데, <미친 제인이 주교와 말을 주고받다>에서 그는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한다. 기실 그의 정신세계의 기저에는 신비적이며 환상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자리 잡고 있다. 켈트 신화와 전설에 대한 몰입, 비잔티움에 대한 찬미, 동양 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 등이 그러하다. 이런 모든 요소가 그의 개인과 현실에 대한 인식과 어울려 오히려 틀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분방함으로 표출된다. <박차>에서 그는 정욕과 분노가 창조력의 원천임을 밝히는 대담성을 보인다.

 

비슷한 성격의 선집인 만큼, 솔의 세계시인선과 민음사의 민음세계시인선을 여러모로 비교할 수밖에 없다. 작품 선정의 합리성에서는 솔 본의 손을 들어야겠으며, 말미의 해설도 이쪽이 더욱 충실하여 간략하나마 이해에 도움이 된다.

 

번역시집의 가장 큰 미덕은 원작의 미묘한 뉘앙스와 깊은 함의를 어떻게 우리말로 잘 구현하여 시인과 독자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메우는가에 있다. 이 점에서는 민음사 본이 더 성공적이다. 역자 두 사람이 모두 시인이니만치 자신의 언어와 스타일로 재창조하고 있는데 정현종 시인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현재 서점가에서 살아남은 것도 결국 민음사 본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술 노래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을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나지막이 시편들을 읽어나가던 도중 계속 입가에 머문 시다. 술도 잘 먹지 못하는 내 자신인데 왠지 마음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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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너도밤나무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19
드로스테-휠스호프 지음, 조봉애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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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 국의 화폐에는 자국의 최고 상징물 또는 인물을 도안에 수록하고 있다. 국내만 해도 기존의 율곡, 퇴계, 세종대왕 외에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다.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들 모두가 결코 간과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히 동일하다.

 

독일의 20 마르크화짜리 지폐의 도안은 한 여성작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름도 우리에겐 생소한 작가인 드로스테-휠스호프. 도대체 독일에서 이 작가는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녀의 대표작이 바로 이 <유대인의 너도밤나무>라는 노벨레다.

 

‘베스트팔렌 산간지방의 풍속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독일의 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숲이 주된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뇌리에 떠오르지만, 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드로스테-휠스호프에게 독일 산악의 숲-브레데 숲-은 너무 짙고 빽빽하며 악마적이고 불길함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이다. 숲에 마술적인 신령의 속성을 부여한 점에서는 근자에 읽은 푸케의 <운디네>와 오히려 가깝다.

 

이 노벨레는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작가는 인물과 사건,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를 일부러 꺼린다. 인물의 성격은 단편적 행동으로 사건 묘사는 핵심만 기술하여 빈 공간은 독자들의 상상과 추론으로 메우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강 읽어서는 이 짤막한 작품의 표면만 훑고 지나가기 딱 좋다.

 

작가가 본문 앞에 적어놓은 훈계조의 문장 중 끝부분은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음미할 만하다.

“밝은 공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경건한 손에 의해 양육된 행복한 자 그대는,
저울질하지 말라, 결코 네게 허락되지 않았느니!
돌을 내려 놓아라-그것이 네 머리를 칠 것이다!” (P.14)

 

작품 중간의 메르겔의 살인 혐의와 관련하여 P법원장이 보내온 편지의 “진실이 항상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P.87)라는 것과, 말미의 지주인 남작의 발언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아”(P.106)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봉건적 문화가 여전히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독일 시골지역에서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다. 불안한 사회적 지위, 의심을 살 만한 충분한 동기. 이를 갖춘 메르겔이 자신의 정당함을 당당히 주장하지 못하고 도주함은 일면 당연하다. 요즘에도 심증과 섣부른 선입견만으로 억울한 이를 매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메르겔은 살인범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무결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그는 분명히 삼촌의 불법 도벌에 공범이며, 산림관의 살해에도 떳떳하지 못하다. 인격과 행동면에서 그는 세인들의 호감을 사지 못함을 작가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그의 인성과 언행은 선입견을 풍기기에 충분하며 주민 및 독자의 동정을 받기에 힘들 것임을.

 

프리드리히 메르겔이 요하네스 니만트로 위장하고서 귀향한 장면은 시사적이다. 메르겔은 그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며, 니만트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아무도 없는 동시에 아무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말로는 예측 가능하다.

 

메르겔이 목매단 장소가 하필 유대인 아론이 살해당한 너도밤나무라는 점도 묘한 여운을 남긴다. 메르겔이 아론의 살인범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상황에서 메르겔도 아닌 니만트가 자살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가 인생과 운명의 시련에 너무나 지쳐 생존 의욕을 상실하였음은 명백하다. 그는 범행 현장에서 속죄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매도한 세인들의 섣부른 의심에 대한 목숨을 건 마지막 항변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 이 작품은 지식을만드는지식(2009)에서 조봉애 번역으로 나온 게 시중 서점에서 유일하다. 내가 읽은 책은 배중환 번역으로 세종출판사에서 1994년에 출간된 것이다.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아도 아무런 정보도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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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드라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0
W.B.예이츠 지음, 서영윤 옮김 / 동인(이성모)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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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이츠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시인이다. 따라서 예이츠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는 26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시는 예이츠의 내면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 수단인 반면, 극은 그의 사회 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표출 도구였다.

 

예이츠의 희곡은 시인 동시에 극이다. 극시(劇詩)은 시에 중점을 두는 명칭이고, 시극(詩劇)은 극에 우위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그의 희곡은 운문 희곡이다. 시의 정신으로 씌어진 극작품으로 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희곡으로 분류함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산문체의 극과는 달리 대사에 운율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된다.

 

예이츠의 희곡은 연극의 정통에서 다소 비껴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단막극으로서 장막극의 주류와는 차별된다. 또한 당대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단순화된 형식의 상징적 표현을 주로 한다. 무대 장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일본의 노극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고 하는데, 예이츠의 기본적 성향도 일조하였다고 본다.

 

<디어드라>는 전기에 속하며, <매의 샘에서>는 후기에 속한다. 따라서 후자가 보다 상징주의적 요소가 심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무대, 대사, 구성 등 모든 측면에서. 독자에게는 오히려 전자가 쉽게 다가오지만, 전자에도 그만의 개성이 물씬 배어있다.

 

두 편 모두 이채로운 점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켈트 전설에서 유래하고 있음이다. 전자는 디어드라와 코노하 왕의 이야기가, 후자는 영웅 쿠훌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아일랜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작가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등장인물에 악사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비중이 제법 크다는 점이다. 악사들은 켈트 문화에서 유랑시인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극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코러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고 보니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예이츠의 극은 현대 사실주의극에서 배제된 연극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이츠의 극이 짧은 것은 그의 극이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 때문에 길어지는 사실주의극과는 달리 시간, 장소, 동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불필요한 원형적 영역에서 움직이는 상징적인 극이기 때문이다.”

 

<디어드라>는 늙은 왕과 젊고 아름다운 왕비, 그리고 젊고 용감한 청년 간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다. 켈트 문화는 유사한 소재의 이야기를 여럿 남기고 있다. 이 극으로 남겨진 데르드러 외에 페니안을 몰락으로 이끈 위대한 영웅 핀과 그러니아, 데르맛의 정사가 그러하며,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비슷한 패턴이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아서 왕의 죽음도 귀네비어 왕비의 불륜이 원인이 아니던가.

 

이는 사회적 윤리질서와 사랑의 감정 간 충돌이자 청춘 남녀 간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 대 노인과 처녀 간의 부적절한 결합에 대한 반감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법적인 결혼 관계의 당사자 보다는 청춘 남녀의 죽음을 무릅쓴 연애에 더 큰 지지를 보내며 열광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이야기의 결말은 남녀의 사랑의 죽음으로 끝맺어져 당대 도덕률과 타협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매의 샘에서>는 “운문, 산문, 코러스에 가면과 춤 등을 혼합한 극으로 예이츠의 성숙기 극의 특징을 보인다...극에서 사용된 모든 것은 사실을 재현한다고 하는 사실주의 극의 환상에서 일탈하여 상상 속에서 창조하려는 욕구에 종속되어 있다.” (P.14)

 

그만큼 <디어드라>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의 상징성의 정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대사 자체도 범상하지 않으며, 악사들이 천을 펴고 접는 행위도 극의 제의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의도를 강하게 풍긴다.

 

여기서도 늙음과 젊음이 노인과 쿠훌린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오십년의 세월을 헛되이 샘가에서 보낸 노인과 영웅 쿠훌린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은 인간에게 금기시되는 불사를 추구하려고 한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켈트 문화에서 샘은 단순히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인간에게 현세의 영역을 빼앗긴 신과 요정들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그들의 권능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샘물이 솟아나려는 찰나에 강력한 신성의 발현으로 노인은 잠들고 쿠훌린은 넋을 잃고 이끌려 나가게 되고 만다.

 

예이츠의 극은 시적인 정서와 상징성에 치우쳐 희곡이 갖고 있는 외향성이 많이 희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무대화하기 용이하지 않으며,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만만치 않다. 순전히 희곡만으로 보더라도 흡인력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극에 대한 이해는 시인 예이츠는 물론 인간 예이츠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희랍극, 중세극은 물론 일본 노극을 소화해서 시를 통해 제의적 형태를 구현하고자하는 탈환상적 기교와 독특한 비젼을 갖춘”(P.18) 점이 예이츠 극의 의의라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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