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친구 바벨의 도서관 11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지음, 정창.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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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다.

 

알라르콘의 대표작은 기실 같은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가 작곡하여 유명하게 된 <삼각모자>이다. 국내에서는 어찌 된 게 이것이 알라르콘의 작품의 첫 번역에 해당하니 기뻐해야 될지 자못 의아하다.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그의 후기 작품집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포함된 8편 중 2편에 해당한다. <죽음의 친구>는 중편, <키 큰 여자>는 단편의 분량으로 제법 편차가 존재한다.

 

두 편 공히 관통하는 제재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회피가 불가능한 냉엄한 현실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경은 인간 내면의 심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의 추동력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출발은 바로 죽음의 인식에 있지 아니한가?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어둡게 그리며 생자(生者)를 훈계하는 일면, 저승도 생각만큼 나쁜 곳은 아니라는 보다 장밋빛 감언으로 겁먹은 영혼들을 위로한다. 그래서 죽음의 연기 내지 회피라는 유혹에 인간의 태생적 취약성을 보이게 마련인 법이다.

 

<죽음의 친구>에서 힐 힐은 글자 그대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친구가 된다. 죽음의 힘 덕택으로 그는 잃어버렸던 신분을 되찾고 사랑하는 여인 엘레나와도 결합하게 된다. 삶이 행복하게 되는 순간 그는 죽음을 외면하고 시골 별장에 숨는다. 죽음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길 기대하며.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다. 제아무리 눈부시게 포장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반감을 지닌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능일 것이다. 죽음의 신성이 그토록 강변하였건만.

 

“나는 누구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아. 인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고문을 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숙적인 ‘삶’이야. 그대가 그토록 아끼는 ‘삶’이라고!” (P.35)

 

이 작품의 묘미는 막연히 상종하기 싫은 불쾌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었던 죽음의 어두운 신성(神性)의 권능을 마음껏 보여주는데 있다. 오직 절대자를 제외한 무엇도 그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으면 그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발산한다. 힐과 죽음의 신성 간 어설프고 무력한 대결 장면을 보라.

 

“왜? 그걸로 나를 죽이려고? 이번에는 검은 망토 차림의 죽음의 신성이 소리쳤다. ‘삶’이 감히 ‘죽음’한테? 이거 참 묘한 기분이 드는데......그래, 우리 한번 붙어 볼까?” (P.96)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 키워드는 죽음의 신성의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작가가 죽음의 미학을 통해 역으로 들려주는 삶의 소중한 가치리라.

 

“사랑을 향한 사랑이라......사랑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이지.” (P.116)
“아! 물론 그렇지......삶이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니까......” (P.118)

 

<키 큰 여자>는 이런 면에서 훨씬 단순하다. 죽음의 전조를 알리는 키가 큰 여자의 출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발현.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텔레스포로의 말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언젠가는 그런 여자를 만날 거라고 예감했기에 느끼는 두려움이며, 노파의 외침으로 그 실체, 즉 악마임이 확인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은 곧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절실한 의문이라고 하겠다.

 

“그 노파는 인간일까? 왜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 노파를 만나리라고 예감했을까? 노파는 왜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군지 알아보았을까? 그 노파는 왜 나에게 큰 불행이 닥칠 ㄸ만 나타났을까? 악마라서? 죽음이라서? 삶이라서? 적그리스도라서? 그 노파는, 그 키 큰 여자는 누구지? 도대체 뭐지......?”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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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민음사 세계시인선 11
예이츠 지음 / 민음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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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신화와 관련된 일련의 책들을 읽다가 알게 된 예이츠, 그의 <켈트의 여명> 자체는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겨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예이츠에 대한 나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니 예이츠의 시작들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품게 만들었다.

 

민음사의 세계시인선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이 시선집에는 3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생전에 방대한 작품을 남겼던 시인이었던 만큼 선별된 시들이 얼마나 그의 시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대체로 문학적 시기를 아우르면서 추려낸 것들로 보이는데, 출전을 명기하지 않아 자못 난감한 측면도 있다.

 

일독한 첫인상은 평범함과 모호함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번역문과 원문을 나란히 수록하여 애매한 대목은 원문으로 이해가 가능하여 작품 해독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가능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해설서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매우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세계가 녹록치 않음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삶과 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그리고 문학의 배경을 이루는 켈트적 뿌리와 정치적 상황, 운명의 여인에 대한 일관된 사랑 등도 발견하였다.

 

예이츠의 세계는 한마디로 깊고도 넓다. 그는 서양의 고대와 현대를 포괄하는 정신사적 세례를 받은 외에 동양적 신비주의, 즉 힌두교와 선불교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시는 자연의 풍광과 서정적 감상을 읊은 데서 출발하여 개인과 사회의 재인식으로 변모하고,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통일(Unity of Being)’로 요약되는 초월적 경지로 발전하였다. 해설서의 부제처럼 그의 시와 삶은 존재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구도의 경지라고 하겠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문학적, 전기적 배경에 대한 인식 없이 덩그러니 놓인 한 편의 시에 대해 얼마만한 이해가 가능할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세간에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니스프리 호도(湖島)>는 오히려 초기의 감상적 편린에 불과할 따름이다. 오히려 <몰 매기의 노래>와 <길리건 신부의 노래>라는 두 편의 발라드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시는 늙음의 초라함을 슬퍼하지 않는다. 늙음은 지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뜻한다. 오히려 빛나는 청춘의 날들이 지혜라는 기준에서는 거짓될 날일 수 있다.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오다>와 <비잔티움 항행>, <오랜 침묵 끝에>에서처럼.

 

그렇다고 그가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술 노래>와 <정치>를 보면 그가 세속의 전쟁이나 정치적 발언보다 젊은 여인을 안아보았으면 하는 상념을 통해 인간에게 더욱 중요하고 살가운 것이 바로 사랑임을 웅변하고 있다.

 

초월자, 각성자의 눈에는 “깨끗함과 더러움은 한 집안”(<크레이지 제인이 주교와 이야기하다>)일 뿐이며 우열과 청탁의 구별이 없다. 이런 상대성의 진리 앞에 인간의 욕심과 단견을 쉽사리 그 천박함이 노정되고 만다.

 

그의 시에는 독특한 정신과 기품이 내재되어 있다. 시라는 장르의 속성상 번역을 통해서 원작의 묘미를 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만, 그나마 영시이므로 조금이나마 원문 독해가 가능한 장점이 있어서 번역문과의 대조를 통해서 대략이나마 시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의 시는 반복되어 낭송하더라도 지루함이 없으며 묘미가 새록새록 배어나온다. 모든 영시가 이러했다면 난 진작 영시의 팬이 되었을 터인데. 앞으로 예이츠의 세계에 들어가 보련다,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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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요정 운디네 - 개정판 에버그린북스 9
푸케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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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편의 아름답고도 슬픈 동화다. 하지만 동화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책이라고 속단하지는 말자. 오히려 이 동화 소설은 청소년 내지 성인들이 읽어 마땅한 작품이다.

 

그대는 <인어공주>를 기억하는가? 물속에서 행복하게 살던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만 그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에 배신당하고 결국은 한줄기 물거품으로 명멸하였을 뿐.

 

물의 요정 운디네도 마찬가지의 숙명을 타고났다. 그녀는 인간을 사랑하고 결혼하여 영혼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이 영원한 사랑을 보장하지는 못하였다. 사랑하던 이를 죽게 만들고 자신은 샘물로 화해 버린 슬픈 존재.

 

운디네에게 사랑 외에 무슨 잘못이 있으랴? 그녀는 요정에서 인간이 되고자 하였으나 본성에 내재된 요정의 속성과 인연을 버리지는 못하였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결코 진정한 인간이 되지는 못하는 존재, 그것은 한순간의 사랑으로는 눈감을 수 있지만 영원히 극복되지는 못하는 치명적 약점.

그것이 독자가 운디네의 첫사랑이자 남편이며, 동시에 배신자인 훌트브란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연유가 아니겠는가? 훌트브란트의 바램은 어찌 보면 매우 소박하다.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는 여인을 아내로 삼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는 운디네를 사랑하지만 요정보다는 인간과의 사랑을 더욱 갈구하였다. 그의 눈앞에 기이한 요정의 자취, 즉 퀼레보른이 자주 띄지만 않았어도 둘의 행복은 더 오래 지속되었으리라. 훌트브란트가 은연중 꿈꾸던 인간과의 사랑, 그것은 인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본능적 요청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같은 부류끼리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물의 정령이 괴이한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한편으로 운디네에 대해서 점점 불쾌한 기분을, 심지어 적의를 품기에 이르렀다.” (P.124)

 

그런 면에서 베르탈다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운디네가 베르탈다의 성명축일에 벌인 잃어버린 친부모와 상봉이라는 깜짝쇼에 대해 그녀가 보인 그토록 격렬한 거부반응도 일면 수긍된다. 작중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하루아침에 귀족계급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신분상의 추락을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훌트브란트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이미 그와 운디네가 만나기 이전부터 싹트던 것이므로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훌트브란트의 개인적 미덕과 사회적 지위 및 재산 등을 고려하면 놓치기 어려우리라. 베르탈다는 전형적인 인간으로서의 젊은 여성을 상징한다.

 

문득 이런 상념이 떠오른다. 요정 운디네와 인간 운디네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우문(愚問)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영혼을 갖기 이전 운디네는 자연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때의 언행은 예의범절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있었고 겉치레와 가식에 물들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우리들은 당신네 인간보다 훨씬 행복한 처지라 할 수 있어요...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그런데도 우리는 한탄을 모르고 즐겁게 살고 있지요.” (P.68~69)

 

한편 결혼 이후 운디네는 웃는 때보다 슬퍼하고 탄식하는 날이 더 많았다. 글자 그대로 인간이기에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게 되는데, 운디네는 눈물조차 즐거움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리고 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울 수가 있어요. 눈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저씨는 도저히 짐작조차 못하겠지만 말예요. 눈물 역시 즐거움의 극치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영혼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즐거움의 극치인 거예요.” (P.138~139)

 

여하튼 물의 요정과 인간의 결합은 불행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각종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에서 누차 반복되고 있다. 신분 차이는 극복되지만 태생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한 편의 동화에 관심이 끌리는 것은 비극이 예고된 슬픈 사랑의 이야기인 동시에,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과 중부 유럽의 산과 호수, 계곡이라는 지형적 배경과 정령의 등장에서 오는 신비하고 기이함이 날실과 씨실로 엮어져 기묘한 매력을 던지는 데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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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르.브리기타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25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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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프터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하다. 세속 잡사에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평온해지고 엉클어진 실타래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슈티프터의 글을 계속해서 찾아 읽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맛 때문이다.

 

경제적 곤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을 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 본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의 글에는 사랑과 자연이 공존하다. 그의 사랑은 열정과 정념이 난무하는 숨 가쁘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의 자연 또한 인간을 압도하고 위협하는 거대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품어주는 그러한 자연이다. 겉치레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내면의 깊이와 우아함을 중시하는 태도가 자연스레 작품의 기품을 높여준다.

 

<콘도르>는 그의 데뷔작이다. 네 개의 장은 ‘밤’과 ‘낮’, ‘꽃’과 ‘열매’의 각기 대응되는 표제로 이루어져 있어 작가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무언가를 초조히 기다리며 잠 못 이루는 젊은 화가가 바라보는 창밖 도시의 밤 정경. 용감하게 열기구에 올라타 비행의 꿈을 성취하려는 젊은 여성. 남성과 동등하고자 하는 여성의 도전은 무모한 오만이었음으로 끝나고 남녀의 갈등은 눈물과 입맞춤으로 화해를 이룬다. 이윽고 화가는 길을 떠난다. 여인에 더 당당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하여.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다.

 

이 작품은 몇 가지 관점에서 되씹어보게 한다. 코르넬리아의 용기와 도전은 작중의 평가처럼 오만하고 무모한 것이었는지. 남성에 비해 수동적이고 연약하다는 인식은 작품이 씌어진 당대의 통상적 관념이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한편 화가는 떠나고 훗날 코르넬리아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장면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다. 그들은 화해하고 상호간의 사랑을 인정하였지만, 화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신분높은 여성에 당당하기 위하여 화가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을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코르넬리아는 그를 떠나게 한 원인이 결국 자신이 열기구에 탄 행동임을 자책하는 것이다. 이로써 남녀 간의 사랑은 실현에 있어 결국 세속의 틀과 한계에 가로막히고 만다.

 

“사랑은 아름다운 천사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한 사랑은 죽음의 천사와 다름없다!” (P.18)

 

<브리기타>는 슈티프터 문학의 본령에 가깝다. 슈티프터의 장기인 숲이 아니라, 헝가리 대평원을 무대로 거칠고 황량한 들판과 그곳을 개척하며 삶의 영역으로 구축해 나가는 사람의 의지와 소박한 인간성, 특히 헝가리 전통에 대한 서술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현재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분리되었지만, 19세기에는 하나의 연방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는 같은 나라 내에서도 이국적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작가는 서두에 이런 문장으로 작품의 전개방향을 짐작케 한다.
“추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금방 그 가치를 끌어낼 수는 없지만, 가끔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P.53)

 

화자와 소령의 여행 중 인연으로 결국 화자는 소령이 정주한 헝가리를 방문한다. 화자는 세상을 탐구하고 체험하고픈 방랑벽을 지녔으며, 화자의 눈으로 우리들도 대초원의 광활함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 소령은 넓은 영지를 지닌 지주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하인 및 목동, 인부들과 평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화자는 궁금하다. 소령이 발견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소령은 황야의 농지개간과 인부들과 어울리는 삶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평소 늘 멀리서만 찾아 헤매던 이런저런 행복을 이 곳에서 비로소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죠.” (P.99)

 

슈티프터 글의 특징은 이따금 나타나는 작가의 서술식 의견 개진에도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관과 인생관, 미적 관점 등을 독자에게 강요함이 담담하게 표명하는데, 자칫하면 도덕적 설교로 받아들이기 딱 좋은 내용이지만, 딱딱하고 지루함이 없이 이게 은근히 가슴에 와 닿는다.

 

3장 초원의 과거 편에서도 “인간이란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운 면을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피상적으로 보이는 감미로운 환영에 이끌려,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P.114)로 시작하여 두 면에 걸쳐 이러한 서술이 나타난다.

 

브리기타는 외모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피해를 받은 여성이다. 주변의 냉대는 자연스레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신도 굳이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브리기타에게 숨겨진 내적인 보물을 발견한 이가 소령, 즉 슈테판이다.

 

슈테판과 브리기타의 결별은 예상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찬미하는 남자라도 속성상 외적 아름다움에 무심치 못한다. 또한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더구나 외모가 빼어나지 못한 경우 더더욱 일말의 불안감을 가슴에 품기 마련이다.

 

무려 십오 년 이란 인고의 세월동안 소령은 여행과 방랑으로, 브리기타는 어린 아들의 양육과 황무지 개간으로 내적 성숙을 이루었다. 조심스러운 재회는 우정으로, 우정은 드디어 사랑의 재발견으로 점화되며, 해피엔딩으로 마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역경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엔 외모의 편견을 통한 인간관계의 어긋남에 대한 엄혹한 비판이 있으며, 노력과 행동을 통한 인물의 발전과 성숙의 가치도 보여준다. 게다가 여행과 방랑을 통해 본 헝가리 초원의 풍경과 그네들의 생활 모습은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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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펠루스 추기경 바벨의 도서관 19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조원규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이승수 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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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덧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하나이다. 20세기 전후를 살다간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인데, 대표작 <골렘>이 유명하다고 한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되고 읽어보는 작가다.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에 비해 독해가 제법 용이하지 않다.

 

1.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는 비교적 명료하지만 여운은 길다. 조부의 묘비에 새겨진 Vivo 라는 단어와 정말로 죽고 나면 새겨진다는 오버라이트의 설명은 부조화의 생경함을 부여한다. 정말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의 핵심은 오버라이트가 들려준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이야기에 있다. 시간 거머리는 “인생의 참된 수액인 시간을 우리 심장에서 빨아먹는” 허깨비같은 존재들이다. 기다림과 희망을 짓밟아버려야 이를 극복할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나는 살고 있다’가 아닌 ‘나는 살아 있다’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부질없는 “희망과 갈망 그리고 기다림”은 “자아의 마술적인 힘이 영혼에서 흘러 나가도록 하여” 추악한 분신 유령(도플갱어)를 살찌우고 부유하게 할 뿐이다.

 

오버라이트는 깨닫는다. “우리 자신이 시간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었던 것이오. 물질처럼 보이는 육신은 흘러나온 시간에 다름 아니었소” (P.33). 그래서 그는 삶에서 ‘기다림과 희망’을 영원히 근절하여 자신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꾸민다.

 

오버라이트의 각성은 모든 욕망의 해탈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의 말마따나 하나의 ‘자동기계’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절대 경지에 오른 이에게 세상의 대소사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다만 “눈처럼 흰 배를 타고 기슭없는 영원한 생의 바다로 항해”(P.34)하는 오버라이트가 과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2. <나펠루스 추기경>은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다.

 

화자를 포함한 다른 인물들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죽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무얼 찾는지도 모르면서 불안하게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를 더듬다가 죽음이 방 안에 와 있다는 걸 깨닫는 임종자들.” (P.42)

 

하지만 라트슈필러는 달랐다. 그는 ‘푸른 형제들’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면서 믿음의 겨자씨, 믿음의 핵, 믿음과 희망의 독의 정체를 깨닫고 “뱀파이어의 가면”을 잡아채 벗긴다. “잠에서 깨듯 명료하게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인생이라는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 우리 영혼을 고갈시켜서 우리의 가장 내밀하고 고유한 자아를 훔쳐가 버렸지요.” (P.46)

 

인생의 무의미성, 내면의 자아를 상실한 슬픈 인생에 대한 추상같은 자각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는 마술적인 이중의 의미가 들어 있소이다. 마술적이지 않은 일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는 겁니다.” (P.54)

 

그는 일상성 속의 환상성의 잠복을 절실하게 인식한다. 라트슈필러로 하여금 호수의 깊이를 재려는 계속적 시도를 하게 만든 원동력이 이런 인식이다.

 

“호수의 아가리는 언제고 내게 거듭 선언할 것이오. 지구의 겉껍질 위에서 햇빛을 받으면 끔찍한 독이 자라날 테지만, 가장 내밀한 밑바닥 심연은 그로부터 자유롭다고, 깊이는 순수함이라고.” (P.54)

 

이런 라트슈필러도 인간의 내생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푸른 바꽃 아코니툼 나펠루스와 나펠루스 추기경의 유리공의 예기치 못한 등장은 인간 본성의 불가피한 취약성을 드러낼뿐더러, “지구의 겉껍질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라는 끔찍한 독”의 강력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3. <네 명의 달 형제들>의 주인공은 달(月)이다. “태양은 유한한 존재에 풍족한 기쁨을 누리고픈 열망을 심어” 넣는다. 반면 “달은 현혹적인 광채로 인간들이 그릇된 상상에 빠져들도록” 하여 인간 사회에 부정적 기운을 흩뿌린다. 달의 독이 든 숨결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라고 착각하며 산업문명과 기계화에 맹목적으로 열광한다. 작가는 이 단편에서 현대 기계문명에 부정적 인식을 확고히 한다.

 

백작의 시종인 화자의 이름은 작가와 동일한 구스타프 마이링크다. 화자가 모시는 주인과 그 친구들은 공전하는 달의 네 모습 즉, 보름달, 반달(상현/하현), 그믐을 형상화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시계와 같아지도록 결정된, 부실한 사물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P.68)
“인간은 이제 팔 수 있는 것만을 현실로 여기게 되었다는 거요.” (P.69)

 

인간의 물질주의화와 자본주의화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달은 독이 든 숨결로 인간의 뇌에 생각들을 잉태시켰고, 그 생각들이 눈에 보이게 출산된 것이 기계들이라는 말이었어요.” (P.71)
“기쁨을 모르는 영구기관이 된다는 말입니다.” (P.72)

 

제1차 세계대전의 분노와 광기는 여기에서 재해석된다.

 

“세상에 증오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이미 오래전부터 기계들은 스스로 힘을 갖게 되었는데, 인간들은 아직도 눈이 멀어 자기들이 주인인 줄로 알고 있지요.” (P.80)

 

달의 형제들은 요한 오버라이트와 같은 본질의 존재을 실토하고 있다. 인간성을 탈피한 자동기계라는 사실을.

 

“달의 형제들인 우리는 영원한 존재의 상속자입니다. ‘나는 살고 있다’고 하지 않고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 존재” (P.72)

 

그러기에 그들은 인간성의 발현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우리는 인간들의 뇌 안에서, 기만적이고 냉철한 이성의 새롭고도 거짓된 광채로 살아가야한 합니다. 그들이 태양을 달과 혼동할 때까지, 그리고 빛인 것은 모조리 불신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P.86)

 

마이링크의 작품은 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바탕에 깔려 있어 몽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작중에도 거론되는 종교집단인 필라델피아 형제들, 푸른 형제들, 장미십자단 등은 언뜻 들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래가 깊은 소수 종교집단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 정도다. 여기에 인간과 사회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추구와 반문이 환상적 요소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여하튼 웬만해서는 소설을 재독하지 않는 나로 하여금 꼼꼼히 두 번을 읽게 만든 묘한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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