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의 탐색
알베르 베갱, 이브 본푸아 엮음, 장영숙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13세기에 중세 불어로 씌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역자 후기를 인용한다.
“이 <성배의 탐색>은 1220년경에 쓰인 시토 수도회의 작품인데, 작가는 미상으로 남아 있으며, 성배에 관한 소설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훌륭하게 씌어진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P.361)

 

일단 원탁의 기사의 극적인 모험담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재빨리 책장을 덮기 바란다. 이 작품은 원탁의 기사가 등장하는 기독교적 문학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에 의해 시발된 그라알 이야기는 당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는데, 로베르 드 보롱에 이르러 종교적 방향성이 설정되었으며, 이 작품은 종교적 측면에서 성배 이야기의 한 정점이라고 하겠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설화의 직접적 영향 하에 기독교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 종교적 요소는 대단히 중핵적 영역이다. 기존 아서 왕 설화의 핵심이 기사들의 모험담이라면, 이 작품의 핵심은 종교와 신앙 그 자체이다.

 

원탁의 기사 소재를 차용하지만, 작품 내에서 비중과 의의는 사뭇 다르다. 주요 인물은 랜슬롯과 가웨인, 보호트, 퍼시벌, 그리고 갤러해드이다. 이 중 갤러해드가 단연 두드러지는 주인공으로 오로지 그만이 완전무결한 기사로서 성배의 신비를 누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퍼시벌과 보호트도 갤러해드보다는 못하지만 그의 동료로서 같이 성배를 찾는 명예가 주어졌다.

 

반면 랜슬롯과 가웨인은 그렇지 못하다. 호수의 기사 랜슬롯은 전에는 숭고한 기사였지만 왕비와의 불륜적 사랑으로 도덕성에 치명적 흠결을 입었고 따라서 성배를 보지만 다가갈 수 없는 한계를 겪는다. 가장 고아한 가웨인 경에 대한 대접도 자못 실망스럽다. 랜슬롯처럼 뚜렷한 도덕적 흠결이 없는 그이지만, 수년간 고해성사를 외면하였다는 죄목으로 성배 탐색의 영광에서 탈락된다.

 

작품에서 갤러해드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는 랜슬롯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고귀함과 완전함 그 자체로서 타락과는 거리가 멀다. 성배의 탐색과 동시에 여러 은자들과 목소리를 통해 성배를 찾는 이는 갤러해드임이 반복적으로 예언되며, 때로는 갤러해드의 종교적 의미를 예수의 탄생과 비견하기도 할 정도다.

 

각 인물들이 탐색 모험과정에서 겪는 여러 모험과 이상한 경험 또는 꿈은 하나하나가 깊은 종교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은자와 사제의 해석을 통해 각 기사의 신실하지 못한 신앙이 비판되며, 이는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의 길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부드러운 요구에서 강력한 경고까지 포함하고 있다.

 

종교의 시각에서 기사 개인의 용맹과 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아를 버리고 신에게 의탁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그에 따라 충과 불충이 판명되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판별 기준은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매우 전형화시키고 평면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작품의 인물과 전개에 생동감이 부족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갤러해드 보다는 죄와 구원의 경계를 넘나드는 랜슬롯에 보다 인간미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외관상 풋내기 기사에 불과한 갤러해드에 대한 작품의 끝없는 찬미와 예찬은 오히려 반감을 자아낼 정도라면 과민할 반응일까?

 

또한 성명 미상인 작가는 원탁의 기사와 아서 왕의 당대에 비판적인 듯하다. 해몽의 입을 빌려 원탁의 기사들이 사치와 오만으로 심하게 죄에 물들어 있음을 비판하며(P.220), 왕국 사람들이 성배를 합당하게 사용하고 명예롭게 하지 않았다며(P.348) 성배는 아서 왕국에서 사라진다.

 

이 작품은 무수한 기사들이 등장하지만 기사도 문학이 아니며, 세속적 작품이 아닌 종교적 문학이다. 그것은 알베르 베갱의 서문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 작품을 쓴 이가 시토 수도회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혁신을 위해 당대인들에게 친숙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설화를 차용하고 변용하는 방법의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이므로.

 

신자인 경우 그 감흥은 비신앙인과는 매우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작품의 구성과 소재, 인물 등 모든 요소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지식이 있다면 작품을 읽는 재미는 한층 더할 것이다.

 

작품의 구성은 모든 인물들의 모험이 성배의 탐색에 시종하고 있어 짜임새 있는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각 인물들의 행위와 꿈 하나하나는 종교적 의미와 알레고리를 갖고 있어 무심히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예컨대 <천로역정> 같은 동종의 작품이 일반 독자들마저 감동을 주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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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윈 경과 녹색기사 대산세계문학총서 92
작자 미상 지음,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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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4세기 후반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운문체의 중세 로망스 문학이다. 작품 해설은 이렇게 소개한다.
“중세 로망스인 <가윈 경과 녹색기사>는 작품에 담긴 상징성, 주제와 소재의 절묘한 조화 및 두운이라는 독특한 운율의 효과 등으로 인해 로망스 문학의 백미로 간주된다.” (P.153)

 

사실 이러한 평가는 실제 작품을 읽어보지 않으면 무슨 의미인지 다가오지 않는다. 특히나 운문의 번역에서는 독특한 운율미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절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불리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우선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망스라고 일컫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다. 원탁의 기사가 주인공이고 기사도의 구현이 중요하게 대두되지만, 아름다운 귀부인과의 연애나 사랑은 관심영역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 작품은 진정한 기사도 정신의 구현을 추구한다. 또한 구태의연한 기사도가 아닌 당대 관점에서 참다운 인간성의 추구이기도 하다. 완벽한 기사와 완벽한 기독교인의 가치는 상호배타적이 아니다.

 

녹색기사가 제안한 목 베기 게임은 죽음을 감수하는, 즉 삶의 본능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터무니없고 자못 비인간적인 게임이다. 인간이라면 응당 이런 유형의 게임에 자신의 목숨을 도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윈 경이 아서 왕을 대신하여 이 게임에 응하는 것은 오로지 충성과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이다.

 

녹색기사가 떨어진 목을 주워들고 떠나는 장면에서 그가 인간적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일 년 후 가윈 경은 그를 찾아가서 자신의 목을 내밀어야 한다. 더 이상의 게임을 외면할 수 있지만 이는 원탁의 기사의 명예에 대한 손상인 동시에, 신의라는 덕목에 포기하는 행동으로서 신의의 대명사인 가윈 경으로서는 취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그 일 년간의 삶은 불치병에 걸린 시한부의 삶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가윈 경이 주체가 되는 1차 목 베기 게임과 녹색기사가 주체가 되는 2차 목 베기 게임 사이에 낯선 성의 방문이 자리 잡는다. 여기서 가윈 경과 훌륭한 성주는 가윈 경이 머무는 사흘 동안 획득물 교환 게임을 약속하는데, 각자가 하루에 획득한 무엇이든지 일체를 상대방에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신의를 바탕으로 한다. 그 사흘 동안 가윈 경은 성주 부인으로부터 세 번의 유혹을 겪으며, 성주는 세 번의 사냥에 성공한다. 유혹과 사냥은 성의 안과 밖에서 병행 구조를 이룬다. 성주의 사냥물은 사슴, 멧돼지, 여우인데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각각이 깊은 함의를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차 목 베기 게임에서 가윈 경은 목에 가벼운 상처만 입고 목숨을 건지고, 녹색기사는 자신이 성주임을 밝힌다. 그리고 가윈 경의 신의 배반, 즉 성주 부인의 녹색 띠를 받은 것을 숨긴 행동을 엄중히 비판한다.

 

비록 생을 향한 맹목적 본능(녹색 띠는 착용자의 목숨을 지켜준다!)이었지만 가윈 경은 신의를 저버린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녹색 띠를 영원히 몸에 지님으로써 신의 배반에 대한 경계로 삼겠다고 선서한다. 가윈 경은 비록 인간적 약점을 보였지만, 그것은 가윈 경이 녹색기사와 같은 초월적 존재가 아닌 한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가윈 경은 이마저도 만족하지 않고 더더욱 완벽한 인간성을 구현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한다.

 

수많은 원탁의 기사 중에서 가윈 경이 주인공으로 선택된 사유 또한 명백하다. 가윈 경은 아서 왕의 조카로서 완벽한 기사도의 전형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신의가 매우 깊은 것으로 평판이 자자했다.
“자신의 말에 가장 진실된 자이자/예법에 있어서도 가장 공손한 자였다.” (P.45)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에서도 페르스발과 함께 양대 주인공으로 고뱅 경, 즉 가윈 경이 등장하는데, 그만큼 가윈 경이 원탁의 기사를 대표할 만한 미덕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작품은 그 의미와 구성 등을 제외하고도 자체로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녹색기사와 가윈 경의 기사 복장과 무구 착용 장면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새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중세 기사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수 있게끔 해준다. 한편 성주의 사냥 장면에 대한 역동적 필치는 당대의 영주 및 기사들에게 있어 사냥은 단순 오락적 요소를 능가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성주 부인의 가윈 경에 대한 유혹에서는 기사들의 여성에 대한 예법의 실제적 적용 사례를 알 수 있으니, 여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우회적 언어표현과, 작별 시 키스가 고상한 예법이었음을, 게다가 사랑의 기교에도 능통해야 했음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작품해설을 통해 이 작품의 가치를 다시금 명확히 해본다.

 

“얽힘구도를 둘러싼 목 베기 게임과 유혹 그리고 획득물 교환게임의 세 요소는 <가윈 경과 녹색기사>의 핵심 구성 요소로서 동시에 작품에서 추구되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P.168)

“자신의 한계와 허물을 인정하고, 양심의 가책의 상징인 녹색 띠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가윈 경의 자세는 진정한 기사도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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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너머의 나라 켈트의 속삭임 - 신화로 만나는 세계 3, 켈트 신화
레이디 오거스타 그레고리 지음, 홍한별 옮김 / 여름언덕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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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신화에 대한 대중적 소개서이다. 앞선 찰스 스콰이어의 책에 비해 보다 평이하고 덜 난삽하게 쓰려고 한 자취가 역력하다. 옮긴이는 저자의 <신과 전사> 제1권을 기본으로 읽기 쉽게 편역하고 도판과 설명을 추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켈트 신화에 대한 입문서로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아일랜드 문예부흥에 헌신하였으며, 예이츠의 동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켈트는 기본적으로 아일랜드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화 단계까지만 다루고 이후 전설과 영웅의 시대는 제외되어 있다. 쿠훌렌과 핀 막쿨, 아서 왕의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제외되어 있는 것이 이런 연유이다.

 

켈트의 기본 신족인 투아하 데 다난이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 땅에는 이미 원주민, 피르볼그 족이 자리잡고 있었다. 투아하 데 다난은 피르볼그 족과의 전쟁을 통해 모이투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들의 세력을 몰아내고 아일랜드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거인족 포보르[포모르] 인들이 압박을 가하여 반노예 상태로 전락하여 곤경을 겪다가 긴 팔의 루의 등장을 계기로 삼아 일대 봉기를 꾀하고 모이투라 대전에서 포보르 족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여 이후 긴 세월 아일랜드를 지배한다.

 

이후 인간인 게일 인들이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지배권을 놓고 쟁패를 벌이는데 신족이 인간족에게 패배하는 파란이 탈틴 전투에서 벌어지고 이후 지상의 패권을 게일 인들에게 넘겨주고 투아하 데 다난은 지하의 세계를 다스리는데 만족하게 되며, 신화시대는 끝을 맺는다.

 

이렇게 보면 아일랜드의 켈트 신화는 상당히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 신화에 비하면 혼란스러운 점이 매우 많은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서구문화의 주류로 편입된 문명과 그렇지 않은 문명 간의 불가피한 차이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 하나 그리스 신화와의 차이점은 신들은 기본적으로 불사이지만 다른 신족 또는 인간과의 싸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모순되는 사실이다.

 

켈트 신화에는 매력적이며 흥미로운 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우선 다재다능한 태양신 긴 팔의 루가 그러한데, 포보르 족에게 보인 관대함은 투렌의 세 아들의 장대한 모험에도 풀리지 않는 가혹함과 매우 대조적이다. 미이르와 에탄의 일화는 인간과 신간의 사랑다툼을 보여주며, 맨 섬에 자취를 남긴 바다의 신 마나난(마난난)과 엇갈린 리르의 아이들의 운명은 신들의 영락의 비극적 가시화이며 점차 기독교의 영향에 포섭되고 있음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이 추방과 유랑의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 아버지의 시이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눈에 뜨인 것은 “풀로 덮인 작은 언덕과 쐐기풀 덤불뿐”이었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켈트 신화에 대한 간략한 입문서다. 따라서 이를 통해 켈트 신화에 대한 개략적 흐름과 신들 및 그들의 일화를 처음 접하는데 용이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의 이야기는 방대한 켈트 옛 이야기의 단편에 불과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조각난 신화들은 물론이고 전설과 영웅시대의 켈트 이야기도 더없이 흥미롭다. 게다가 이야기 차원이 아닌 역사적 고고학적 차원에서 켈트 문명에 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켈트 신화는 단순히 오래전 서양에 머물렀던 종족의 헛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켈트 신화가 서양 예술과 문학에 남긴 유산은 막론하고,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못지않게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깊이 남아있으며, 서구 문명이 세계 문명의 보편적 가치로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문화에도 켈트의 영향이 전무하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현대 사회는 정서상으로 메말라있다. 건조한 감성과 빈약한 상상력을 채워줄 수 있는 기본적 원형이 바로 신화에 있으며, 현대인들이 신화에 굶주리고 열광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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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알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26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최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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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왕 전설은 서양 문화와 문학에서 독특한 파생물을 낳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배’이다. 12세기에 불현 듯 문학적 소재로 등장한 성배는 이후 무수한 추종자를 양산하였으며, 대중예술과도 결합하여 아서 왕 전설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이 성배의 시초가 트루아의 운문 소설 <그라알 이야기>라고 한다. 아서 왕 전설을 문학의 형식으로 전환한 최초의 작가인 트루아는 이 미완성작을 통해 세계문화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옮긴이는 ‘그라알’이란 어휘를 굳이 번역하지 않았다. 그라알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탐구가 이 작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옳은 판단이다. 그라알이 성배로 고착화된 것은 트루아의 후대 작가들의 노력 덕택이다. 성배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포도주를 담았던 잔이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담았던 글자 그대로 신성한 잔 내지 그릇이 되었다. 하지만 트루아는 그라알에 모호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후대 아서 왕의 기사들은 성배라는 유형적 존재를 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데 반해 트루아는 그라알의 의미를 찾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국내 최초 번역된 이 작품은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 전반부는 페르스발(퍼시발, 파르치팔)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웨일스의 촌뜨기는 우연히 마주친 기사처럼 멋있게 되기 위하여 무작정 아서 왕을 찾아 나서고 어거지로 기사로 서임받는다. 이후 페르스발의 행각은 좌충우돌이다. 돈키호테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때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서 은근한 해학과 재미를 제공한다. 그는 순수하지만 무지하므로 규범과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여러 용맹한 기사를 무찔러 세상에 명성을 알리게 된 페르스발은 우연히 어부왕의 성에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라알과 피 흘리는 창을 목도한다. 그는 궁금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는다.

 

후반부는 아서 왕의 조카인 고뱅 경(가웨인, 가윈)의 독무대다. 고뱅 경은 모든 면에서 페르스발과 다르다. 누구 못지않게 용맹하지만 품위있고 기사 예법에 밝은 그는 진정한 기사의 표본이다. 공개적으로 모욕받아 결투를 위해 길을 나서는 그도 도중에 여러 경험을 하는데 환상의 성에서 아서 왕의 모친과 자신의 모친이 죽지 않은 채 살고 있음을 알게 되다. 그는 결투에 휘말리게 되어 아서 왕과 기사들을 오도록 청하며, 여기서 작품은 끝난다.

 

옛날 작품이고 운문체의 원문임에도 비록 운율은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매끄럽고 이야기 이해가 쉬우며 재미있어 어색함을 느낄 수 없으니 이는 전적으로 옮긴이의 역량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라알은 무엇일까?

 

작중에서 그라알은 여러 사건과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흘러간다. 하지만 이후 페르스발의 뇌리와 그를 질타하고 잇따라 경고하는 사촌누이는 어부왕의 궁전에서 그가 겪은 체험이 결코 범상하지 않음을 일깨운다.

 

핏방울이 솟아나는 새하얀 창과 촛불이 빛을 잃을 정도로 환한 빛이 퍼지는 그라알. 이 기이한 장면을 보면서 페르스발은 궁금하지만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촌누이는 그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성을 낸다. 그리고 그의 침묵이 커다란 행운을 놓친 것이며, 그는 물론 수많은 다른 사람들마저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녀는 아서 왕의 궁정에서 다시 한 번 페르스발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수년 동안 방랑을 거듭한 페르스발은 한 거룩한 은자의 집에서 비로소 어부왕의 정체와 그라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잘못에 회개를 하고 성체를 받는다. 그의 숙부인 은자에 따르면 그가 질문을 하지 못한 것은 죄 때문에 혀가 굳어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심스레 추론해 보면, 창과 그라알에 대한 질문은 참된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볼 수 있다. 페르스발은 어릴 때부터 믿음에는 대체로 무심하였다.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비종교자는 용인할 수 없는 존재이며, 최고의 악이자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리 심한 비난과 저주가 퍼부어졌을 것이다.

 

한편 작품의 또 다른 축인 고뱅도 페르스발 못지않은 기이한 모험을 겪는다. 에스카발론 왕 앞에서 결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선 고뱅은 “눈물처럼 영롱한 핏방울이 맺히는 창”을 찾아 바치는 조건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이 창은 언젠가 아서왕의 왕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의 창이다.
 
또한 그는 마법의 궁전에 들어가 그 성에 씌워진 마법을 깨뜨리는데, 그 성에는 놀랍게도 아서 왕의 모친과 고뱅 자신의 모친이 여왕으로서 살고 있다.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지 수십 년도 더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여왕은 자신을 포함한 성 안 모든 사람들의 주군으로 고뱅을 인정한다. 고뱅의 주군인 아서 왕의 모친이 고뱅을 주군으로 섬긴다. 일견 모순되는 관계라고 하겠다.

 

작가는 성의 마법을 깨뜨릴 기사의 자격을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현명하고 너그럽고 탐심이 없으며, 아름답고 용감하고 고귀하고 충성스러우며, 비열함도 다른 어떤 악덕도 없는 기사라야 하니까요.” (P.179)

 

이처럼 뛰어난 자질과 품성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기사라면 만인의 주군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속세의 주군 관계를 초월하는 성격이다.

 

작가가 페르스발과 고뱅의 두 주인공을 등장시킨 연유와, 미완성 작품이지만 대충이나마 향후 이들의 행보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진정한 기사는 무용만이 뛰어난 것으로는 부족하다.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페르스발은 이 점이 누락되었다. 반면 고뱅은 완벽한 기사상의 구현이다. 용맹과 예법, 그리고 신앙을 고루 겸비하였다.

 

작품 말미에 페르스발과 고뱅은 만나도록 예정되어 있다. 페르스발은 그라알을 찾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종국에는 고뱅과 동등한 수준에 올라올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작품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또 하나의 <천로역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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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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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신춘문예로 등장한 신진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게다가 흔하디흔한 단편모음집이 아니라 당당한 장편(비록 경장편이지만!)소설이다.

 

앞서 그의 단편집을 통해 김이설 문학세계를 대강 들여다보았다. 등단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은 매우 개성적이며, 그것은 선보다 악이 지배하는 현실, 빛보다 어둠이 압도하는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작품경향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일체의 감정이입을 허용치 않는 건조한 문체로 사람살이의 치부를 남김없이 까발려 백일하에 드러낸다. 그건조함이 범상치 않은 배경과 인물의 외설적, 폭력적 행동, 대화 등에 덧씌워지기 쉬운 선정성의 함정에서 용케 작품을 구해내고 있다. 음란하되 음란성을 느낄 수 없고, 폭력적이되 덤덤하게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재주도 작가의 능력이다.

 

일상의 평범한 인물과 가정은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항상 억압받고 빼앗기고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는 가난과 폭력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육체적 장애마저 한 요소로 추가된다. 작가는 왜 그리 삶의 아름답지 못한 측면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보통 사람들의 무난한 삶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혹시 작가의 성장배경과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별별 생각이 든다.

 

그렇다. 작가는 주인공 화숙의 입을 통해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그 고만고만한 일이 나에게는 힘들게 애쓴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치열하게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P.119)

“세상이 만만하냐? 남들처럼 사는 게 쉬운 거 같지? 너 같은 애들이 나처럼 살아 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P.126)

 

화숙은 천변 이쪽, 고물상 동네를 벗어나기 위하여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아등바등, 악착같이 일하였으나 여전히 휘황찬란한 천변 저쪽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보통사람의 삶, 평범한 생활이야말로 지상제일의 소망인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 줄기차게 작가가 설파한 주장이기도 하다. 장편이 단순히 분량이 늘어난 단편이 아닐진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작가는 뒤틀린 인간관계와 가정의 심화된 묘사를 통해 정상적인 삶의 어려움과 취약성을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관계는 이른바 비정상적이다. 화숙은 정신지체를 엄마로,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외숙모는 남편의 학대에 딸을 버리고 가출하였다. 외삼촌은 툭하면 딸, 수연을 때렸다. 화자 화숙도 분풀이를 수연에게 퍼붓는다.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어 관계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수연은 남편 몰래, 첫사랑과 외도를 유지하며, 남자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결국 그를 떠나지 못하고 체념하며 받아들인다. 외삼촌과 진순의 동거, 혜주에 대한 진순의 애정도 왜곡된 것ㅣ며, 화숙과 버스기사 아저씨의 관계도 외면상 따뜻하고 위로를 주는 듯이 비치지만 결국은 남자의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 관계인 것이다.

 

한편 작중 인물들의 삶에 대한 자세에서도 특이한 뭔가가 감지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수동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운명 내지 숙명에 대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겠다. 정신지체인 화숙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으며, 수연의 외삼촌과 재현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다. 진순이 자발적으로 외삼촌과 동거하며 혜주를 친딸처럼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하다. 하지만 무엇도 작중에서 가장 독립적인 외삼촌과 화숙을 넘어서지 못한다. 외삼촌의 가족에 대한 경시와 일 내지 재물에 대한 중시는 결국 삶의 맹목성의 최대 피해자가 외삼촌임을 그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알려준다. 한편 화숙은 어떠한가? 화숙은 항상 현실을 뛰어넘으려고 하지만, 그녀의 실패와 장애요인은 언제나 외부에 귀인한다. 그녀는 외삼촌을 원망하고 증오하지만 그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특히 수연은 그녀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언제나 희생양이 되었다. 화숙이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은 외삼촌과 수연의 죽음 이후 왜곡된 인간관계에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된 이후에서이다.

 

화숙의 체념적 태도의 편린을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회진화론의 자취도 언뜻 풍긴다. 이기지 못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은 무력감마저 드러낸다.
“따지면 나쁜 사람은 없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없고, 상처 없는 사람도 없다. 다만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P.108)

 

결국 이 작품 <나쁜 피>는 작가가 데뷔 이후 꾸준히 주력해 왔던 표면의 일상적 삶의 이면에 숨은 처절함과 위태로움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의 연장이라고 하겠다.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작렬하는 햇빛의 강렬함은 강조된다. 다른 작가들이 눈부신 햇빛만을 바라볼 때 작가 김이설은 오히려 그림자에 주목한다.

 

한 가지 우려는 정상을 드러내기 위한 비정상, 평온에 대비되는 격동과 불안을 강조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수단 자체가 때로는 목적의 의의마저 파괴할 수도 있다. 작가는 약간은 비정상과 폭력의 관계와 이의 묘사에 경도된 듯하다.
“더 호되게 앓는 인물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P.181, 작가의 말에서)

 

작가여, 너무 작중 인물을 아프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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