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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ㅣ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평점 :
2006년 신춘문예로 등장한 신진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게다가 흔하디흔한 단편모음집이 아니라 당당한 장편(비록 경장편이지만!)소설이다.
앞서 그의 단편집을 통해 김이설 문학세계를 대강 들여다보았다. 등단 이후 그의 작품 경향은 매우 개성적이며, 그것은 선보다 악이 지배하는 현실, 빛보다 어둠이 압도하는 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작품경향이 심화되고 확대되는 것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일체의 감정이입을 허용치 않는 건조한 문체로 사람살이의 치부를 남김없이 까발려 백일하에 드러낸다. 그건조함이 범상치 않은 배경과 인물의 외설적, 폭력적 행동, 대화 등에 덧씌워지기 쉬운 선정성의 함정에서 용케 작품을 구해내고 있다. 음란하되 음란성을 느낄 수 없고, 폭력적이되 덤덤하게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재주도 작가의 능력이다.
일상의 평범한 인물과 가정은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항상 억압받고 빼앗기고 소외된 사람들. 그들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는 가난과 폭력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육체적 장애마저 한 요소로 추가된다. 작가는 왜 그리 삶의 아름답지 못한 측면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보통 사람들의 무난한 삶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혹시 작가의 성장배경과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별별 생각이 든다.
그렇다. 작가는 주인공 화숙의 입을 통해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그 고만고만한 일이 나에게는 힘들게 애쓴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치열하게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P.119)
“세상이 만만하냐? 남들처럼 사는 게 쉬운 거 같지? 너 같은 애들이 나처럼 살아 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P.126)
화숙은 천변 이쪽, 고물상 동네를 벗어나기 위하여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아등바등, 악착같이 일하였으나 여전히 휘황찬란한 천변 저쪽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보통사람의 삶, 평범한 생활이야말로 지상제일의 소망인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 줄기차게 작가가 설파한 주장이기도 하다. 장편이 단순히 분량이 늘어난 단편이 아닐진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작가는 뒤틀린 인간관계와 가정의 심화된 묘사를 통해 정상적인 삶의 어려움과 취약성을 동시에 제기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관계는 이른바 비정상적이다. 화숙은 정신지체를 엄마로,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외숙모는 남편의 학대에 딸을 버리고 가출하였다. 외삼촌은 툭하면 딸, 수연을 때렸다. 화자 화숙도 분풀이를 수연에게 퍼붓는다.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되어 관계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수연은 남편 몰래, 첫사랑과 외도를 유지하며, 남자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결국 그를 떠나지 못하고 체념하며 받아들인다. 외삼촌과 진순의 동거, 혜주에 대한 진순의 애정도 왜곡된 것ㅣ며, 화숙과 버스기사 아저씨의 관계도 외면상 따뜻하고 위로를 주는 듯이 비치지만 결국은 남자의 가정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 관계인 것이다.
한편 작중 인물들의 삶에 대한 자세에서도 특이한 뭔가가 감지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수동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운명 내지 숙명에 대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겠다. 정신지체인 화숙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으며, 수연의 외삼촌과 재현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다. 진순이 자발적으로 외삼촌과 동거하며 혜주를 친딸처럼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하다. 하지만 무엇도 작중에서 가장 독립적인 외삼촌과 화숙을 넘어서지 못한다. 외삼촌의 가족에 대한 경시와 일 내지 재물에 대한 중시는 결국 삶의 맹목성의 최대 피해자가 외삼촌임을 그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 알려준다. 한편 화숙은 어떠한가? 화숙은 항상 현실을 뛰어넘으려고 하지만, 그녀의 실패와 장애요인은 언제나 외부에 귀인한다. 그녀는 외삼촌을 원망하고 증오하지만 그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특히 수연은 그녀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언제나 희생양이 되었다. 화숙이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은 외삼촌과 수연의 죽음 이후 왜곡된 인간관계에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된 이후에서이다.
화숙의 체념적 태도의 편린을 이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사회진화론의 자취도 언뜻 풍긴다. 이기지 못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은 무력감마저 드러낸다.
“따지면 나쁜 사람은 없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없고, 상처 없는 사람도 없다. 다만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P.108)
결국 이 작품 <나쁜 피>는 작가가 데뷔 이후 꾸준히 주력해 왔던 표면의 일상적 삶의 이면에 숨은 처절함과 위태로움을 선명하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의 연장이라고 하겠다.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작렬하는 햇빛의 강렬함은 강조된다. 다른 작가들이 눈부신 햇빛만을 바라볼 때 작가 김이설은 오히려 그림자에 주목한다.
한 가지 우려는 정상을 드러내기 위한 비정상, 평온에 대비되는 격동과 불안을 강조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수단 자체가 때로는 목적의 의의마저 파괴할 수도 있다. 작가는 약간은 비정상과 폭력의 관계와 이의 묘사에 경도된 듯하다.
“더 호되게 앓는 인물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P.181, 작가의 말에서)
작가여, 너무 작중 인물을 아프게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