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들의 사랑 - 지만지고전천줄 0073
마리 드 프랑스 외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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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켈트 신화와 전설의 흔적은 중세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남겼다. 아서왕과 성배에 관한 이야기 군이 하나이며, 트리스탄류의 사랑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한편 기독교의 세례로 고대의 신들은 지위가 요정으로 위축되었다. 요정은 더 이상 인간들을 압도하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 신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중세 유럽에서 인간과 요정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요정의 우위에 있지만 그 격차는 크지 않으며, 사랑에 있어서는 대등하기조차 하다.

 

이 편역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러한 요정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랑발>, <갱가모르>, <요넥>, <기쥬메르>, <비스끌라브레>는 12세기 여류작가 마리 드 프랑스의 글이며, <멜뤼진느>는 14세기 쟝 다라스, <데지레>와 <그랠랑>은 작자미상이다. 또한 <비비안느>는 여러 단편들을 역자가 재구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들에 공통되는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멋진 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기사는 깊은 숲 속의 샘터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조우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약속하고 연인이 된다. <랑발>과 <갱가모르>, <데지레>와 <그랠랑>, <멜뤼진느>가 모두 그러하다. <비비안느>도 메를랭과 비비안느의 사랑과 배신이 샘터에서 전개된다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샘은 켈트 문화에서 요정이 깃들어 있는 장소다. 지상 세계를 인간에게 양보한 고대 신족들이 요정으로 화하여 샘과 구릉 등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간다. 따라서 샘터에 만난 여인들이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것은 당연하며, 인간 세상의 누구보다도 미모에 있어 우월할 수 있는 것이다. 요정은 자신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연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와 사랑에 대해 함구하도록 요구하며, 이를 어겼을 경우 격분을 감추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여러 유형의 사랑이 등장한다. 용맹하고 품위 있는 기사는 뭇 여인의 관심을 끄는데, 왕의 부인 또한 예외가 아니다. 랑발과 갱가모르는 왕비의 구애를 거부하다 참소를 받는 곤경에 처한다. 반면 마음이 맞는 인연인 경우에는 서로의 뜻을 확인한 후 곧바로 다정한 연인이 되어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한다. 사랑 표현의 솔직성과 적극성 면에서 현대인들을 능가할 정도다. 사랑에 무심하면 “자연을 거스르는 죄악”(P.187, <기쥬메르>에서)으로 비난을 받을 정도이므로.

 

한편 수록된 이야기들의 지리적 배경을 보면 주로 브르타뉴 지역이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의 글이니만치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브르타뉴인 것은 브리튼, 즉 켈트인들의 근거지였던데 기인한다. 그 외에도 브리튼과 스코틀랜드 등이 등장하므로 장소만 보아도 이 작품들이 켈트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추론하게 된다.

 

게다가 아서왕이 등장한다던가(<랑발>, <비비안느>) 그의 조카인 호엘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여(<기쥬메르>) 아서왕의 유산의 잔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기독교적 세례 흔적이 엿보이는데, 요정들이 자신들도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야 이단과 야만의 지탄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중세의 옛날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이 단편들을 통해서 켈트 문화를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으며, 중세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오늘날의 것과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워서 읽는 이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일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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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685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진일상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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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대서사시 <트리스탄>의 국내 초역이다. 12세기~13세기에 붐을 일으켰던 트리스탄과 이즈[이졸데]의 이야기 중 하나다. 미완성작인데도 2만행 가까운 대작인데, 분량 면에서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보다도 장대하고 <파르치팔>에 견줄 수 있을 정도다. 편집자에 따르면 원전의 약 15%를 발췌했다고 한다. 원전의 참맛을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므로 작품의 분위기 정도만 느끼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듯하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앞서 읽은 죠제프 베디에의 <트리스탄과 이즈>와 거의 흡사하다. 베디에가 선대 작가들의 단편들을 종합하고 요약한 것이므로 대강을 이해하기엔 매우 좋다.

 

브르타뉴 지방의 켈트족 전설을 게르만족 작가가 독일어로 썼다. 게다가 바그너는 이를 악극으로 작곡하여 불후의 명성을 남겼으니 흥미롭다. 산문이 아닌 운문 형식으로 읽게 되니 확실히 감흥이 색다르다. 불완전한 운문이지만, 중세 미네징거들이 이 작품을 가지고 낭송하는 맛을 조금이나마 알 듯하다.

 

해설에 따르면, 고트프리트의 이 작품은 묘사의 투명함과 명확함,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서사의 마력, 구체적인 완결성과 인물들의 일관된 성격, 언어의 아름다운 멜로디, 각운으로 중세 궁정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실제 읽어보니 이 평에 대체로 공감하게 된다. 더욱이 작가의 개성이 화자의 의견을 통해 깊게 반영되어 있어 익히 알려진 이야기를 반복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해석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화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작품의 의도와 성격을 규정짓는다. 화자는 진정한 사랑을 다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그것이 참말로 고통스럽더라도/사랑에 자신의 마음을 줄 것이다./진정한 사랑이/그리움의 고통 속에서 점점 더 불타오른다면/그 사랑은 더 불타오를 것이다.” (P.38~39)

 

또한 화자는 때로는 매우 시니컬하다. 트리스탄이 소년기에 학업에 매진하는 장면을 소개하며 그는 이렇게 첨언한다.
“그것이 자유로부터/등을 돌린 첫 번째였다./.../그때 최상의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처음으로 자유를 얻은 시기에/그 자유는 파괴되었다./학문과 그 억압은/근심의 시작이 되었다.” (P.87~88)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운명과 사랑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은 순전한 호의적 감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사랑의 묘약의 힘의 결과이다. 그들은 자신을 옥죄어오는 약물의 힘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금기의 사랑임을 알기에 노력하였건만 그들은 자신을 다스릴 수 없었고 그들의 사랑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작가는 놓치지 않고 장문에 걸쳐 묘사(P.109~115)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은 이라면 그들의 사랑을 차마 더 이상 피상적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트리스탄의 전설에서 사람들은 두 연인의 사랑과 죽음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사랑에 기뻐하고 비극에 눈물 흘린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동정하고 위로해 줄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케 왕이다. 그는 비단 사랑하는 조카와 아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마저도 손실을 입었다. 지극히 관대하고 훌륭한 군주인 그가 이제는 사랑의 배신을 의심하는 평범하고 초라한 사내로 전락하였다. 그는 연인을 감시하지만, 금지는 오히려 유혹을 강화하지 않던가. 화자는 오히려 감시의 부작용과 무용성을 주창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쁜 여인을 감시할 수는 없고, 좋은 여인은 감시할 필요가 없으므로.

 

흰 손의 이졸데에게 한눈을 판 트리스탄의 처지를 조금은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금발의 이졸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같은 이름의 못지않게 아름답고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목석이 아닌 이상 흰 손의 이졸데를 외면하지 못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트리스탄이 흰 손의 이졸데를 만나는 장면을 끝으로 고트프리트는 펜을 놓아버렸다. 완성되었다면 더 거대한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완성이라도 작품의 가치는 스러지지 않는다. 두 연인의 사랑은 당대 도덕관을 위배한 것이기에 사랑과 아픔을 동반하며, 사랑만큼이나 죽음도 운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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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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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사람들! 이것이 소설집을 읽어나가면서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 갖는 상념들이다.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 어디에서도 파란 하늘과 환한 햇빛을 찾아볼 수 없다. 개기일식에 들어간 한낮의 풍경도, 태양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극지방의 백야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신진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서는 매우 기이하며 파격적인 제재들이다. 노숙자인 어린 미혼모, 대리모를 하는 여대생, 부모에게 버림받고 아버지같은 사람과 동거하면서도 밤마다 갓길을 방황하며 트럭운전사들에게 몸을 맡기는 여성, 죽은 남편의 형에게 스스럼없이 몸을 대주는 여인, 암에 걸려 불임이 돼버리고 엄마마저 암으로 병사하는 주부, 우유배달 손에 집착하는 인터넷 폐인, 외로운 남성의 스스럼없는 친구인 삼류극단 여배우 등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을 꿰뚫는 단어가 한마디로 ‘불쌍함’이다. 그네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내면 상태도 지칭한다. 그네들을 보면서 새삼 삶의 무자비함과 질긴 목숨 줄이 떠오른다. 그들을 백안시하고 때로 비윤리성을 손가락질하며 외면하기는 쉬운 일이다. 누구 말대로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하지만 똥을 피한다고 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똥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눈앞에 똥은 엄연하다. 이는 이 작품들의 인물들에도 해당한다. 작가는 무슨 의도로 썩 달갑지 않은 제재에 이리 집중하였던가? 단순한 취향이나 선정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작가가 작품을 다루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열세 살>의 십대 초반의 소녀에게 세상은 지하철역 대합실이다. 엄마와 노숙자 신세로 살아가는 소녀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을 몸으로 부대끼며 터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혼모가 되기도 하며, 엄마의 비밀도 알게 된다.
소녀에게 세상은 어떤 존재일까? 불쌍한 사람들을 속여먹는 흰얼굴같은 위선자가 넘쳐나는 곳. 출산 후 배웅을 해주면서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곳. 소녀의 눈에는 엄마의 바구니에 동전을 넣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도 아가를 낳으러 가는 것으로 비친다. 소녀가 할 수 있는 것 질끈 눈을 감는 것뿐.

 

<엄마들>에서 화자는 가난으로 휴학을 한 여대생이다. 젊은 여성이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제한적이다. 외모가 뛰어나다면 술집에 나가서 소위 텐프로가 될 수 있겠지만. 화자는 그래서 대리모를 택하였다. 화자의 어조는 건조하다. 흔히들 출산의 설렘과 기쁨은 남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여성 고유의 특권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대리모인 화자에게 임신과 출산은 사업의 영역일 뿐이다. 어서 빨리 시간이 경과하여 번거롭고 불편한 몸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엄마처럼 버림받지 않기 위해 생계수단으로서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대리모를 구한 여자, 생계수단으로 대리모를 자청한 화자.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하다.

 

<순애보>는 조금 복잡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자신을 태워준 꿩장사를 아빠로 부르고 살아가며 아빠의 아이를 낳는다. 꿩농장을 하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그녀는 밤마다 고속도로 갓길로 나아간다. 트럭운전사들에게 몸을 맡기며 그녀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항구로 데려다 달라는 것. 나이든 아빠는 화자가 농장 일꾼인 치우와 같이 떠나길 바란다. 하지만 화자는 말더듬이 치우를 모욕적으로 거부하고 격분한 치우는 화자의 아기의 혀를 잘라버린다.
아빠도 치우도 악한 인물은 아니다. 화자는 과거에 붙잡혀 있다. 아빠가 가출하고 엄마가 새아빠가 될 남자와 함께 항구 근처로 가는 길에 자신을 버린 아픈 과거. 그 트라우마는 자신은 물론 주변에 비극을 자초하고 말았다.

 

<환상통>은 기혼 여성의 몸에 들이닥치는 양대 위험 요인을 다루고 있다. 암으로 대변되는 병마와, 출산의 부재 즉, 불임이다. 임신이 되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받은 암 진단, 그리고 투병, 가족 관계의 파괴.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녀에게 병마는 방향을 바꿔 친정 엄마를 덮친다. 노인에게 항암 치료는 암 자체보다 가혹하고, 노인은 쇠락한 몸으로 죽음을 맞는다. 자궁을 들어내 불임이 된 그녀는 어느 날 스스로 헤어진 남편이 병원에서 배가 소복해진 여자와 나오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녀는 아주 잠깐, 아랫배가 아리다.
독자는 남편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작중에서 그는 아내에게 한결같이 헌신하였으며, 이별도 마지못해 이루어졌다. 작가는 암 보다도 불임의 결과를 중시한다. 병마는 목숨을 빼앗지만, 불임은 관계를 깨뜨린다. 암을 이겨냈지만 화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친정 엄마는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은 가정을 떠났다. 불임은 불행의 원인이자 결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랫배가 아픈 환상통을 겪는다.

 

<오늘처럼 고요히>는 수록작품 중 가장 처절하고 추잡하며 퇴폐적이며 비극적이지만 반면 실낱같은 희망이 숨어있다. 억척스러운 닭집 딸이 노래방에 나가며 웃음과 몸을 팔게 되기까지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것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이를 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남편이 아는데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하였고, 대가는 남편과 아이, 집의 소실이었다.
화자의 말마따나 사는 건 사실 별게 아니다. 남편의 형인 병운과 함께 산다는 건 적어도 노래방이나 여관에 들락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즉 목숨의 안정적 연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상은 무미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세끼 밥을 먹고, 방해 없는 잠을 자면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하루가 반복되었다.” (P.140)
화자가 병운을 죽인 것은 혜경이에 대한 질투와 남자에 대한 배신감에서는 아니다. 병운이 화자와 혜경이 사이를 거리낌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묵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의 세상에 대한 불감을 일깨운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와 혜경 엄마에 대한 죄책감의 결부일지 모른다. 어린 혜경이의 낙태가 각성시킨.

 

<막>에서의 가족 관계 역시 파탄난 상태다. 엄마는 일찌감치 가출하였고, 오빠는 건달에 개망나니가 되었으며, 떠돌이 아버지는 할머니를 죽였다. 화자인 나는 지방극단의 나이든 삼류배우로 전전하고 있다. 엄마를 협박해 돈을 갈취하던 오빠는 결국 엄마가 던진 펄펄 끓는 국물에 전신 화상을 입는다. 직업은 배우지만 화자의 경제적 수입은 대화를 나눌 친구를 필요로 하는 남자들의 도우미 역할에 의존한다.
“사는 게 무대 위에서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내가 선택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을 견뎌도 되는 것인지,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P.215)
삶은 여전히 퍽퍽하다. 그래서 화자는 친구가 찾을 때, 불러줄 때 부지런히 가야 한다고 되뇌인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루>에서 민서 엄마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주부다. 외견상 별 문제없이 살아가는 듯싶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남편 몰래 만든 마이너스 통장, 치매가 의심스러운 엄마, 분홍색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이, 인물값 하는 남편. 그걸 다 꺼내 보일 수는 없었다.” (P.240~241)
조금은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은 그녀는 못 배우고, 못살고, 못생긴 지환 엄마가 맘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친한 척하는 게 싫다. 같이 요가원에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섞지만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지환 엄마가 자살한 후 이웃 사람들이 보인 반응에 화를 내는 것이다. 자신과 지환 엄마를 감히 한데 엮으려고 하다니! 그래서 그녀에게 지환 엄마의 죽음은 별일 아닌 것이다. 일상을 깨뜨리려는 어떠한 존재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기에 민서 엄마의 일상은 더욱 불안하다.
“어둑한 집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남편이 낮게 코 고는 소리,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집 안의 따스한 공기가 더없이 안락했다. 하루가 끝났다.” (P.255)

 

수록작 중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손>이다. 배경과 제재가 보다 현실적이므로 감정이입이 용이하며,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인터넷 폐인의 생활이 소개되어 있어 친근감마저 든다. 유일하게 남성이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어 이채롭지만, 제재를 생각하면 당연할 법하다. 낯익지 않은 제재를 몰입도 높은 구성을 통해 박진감 넘치게 결말로 이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가 노련미마저 풍긴다.
화자에게 물리적 낮과 밤은 의미가 없다. 동영상 관람, 온라인 게임, 채팅 등 흥미를 끄는 요인이 일단락되어 잠에 빠져들면 그때가 곧 밤이 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일상은 단순해지며, 육체적 활동은 최소화된다. 이런 화자의 삶의 틀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우유배달 소리였으며, 이어 창백한 손이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가 손에 집착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만큼 손의 존재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그는 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유하려고 시도한다. 폐인다운 방식으로. 또한 변태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페티쉬라고 하겠다. 방식은 불순하지만 의도는 진지하였다. 그는 손을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손을 통해 환상이 실현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지막에 그가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손을 기다린 것은 손에 대한 정면응시였다. 하지만 그는 거부당하였다. 손에, 세상에.
“손과 대면하지 못한 것도 상관없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P.188)

 

해설에서 그러했듯이, 작가는 작중 인물을 통해 인생의 어두운 면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삶의 밝고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서 잊고 지내던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만든다. 너무나 익숙하여 공기와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삶의 평온과 행복,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에 근거하는가. 조그마한 사건으로도 그것은 흔들리기를 되풀이하다가 양의 피드백을 일으켜 현상을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작중 인물은 생존에, 생활에 급급하다. 운명에 치여 허덕이는 그들에게 지상과제는 오직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죽지못해 사는 삶도 살만한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아프고 병든 삶도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생물로서의 본능에 가까운 생의 의지다. 여기에 도덕과 윤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불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사람들! 이것은 오만한 상념이다. 작중인물들의 운명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운수는 변화무쌍하다. 오늘의 행운이 내일은 불운으로 변전하기 일쑤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그들처럼 된다면 타인이 나에 대해 동일한 상념을 토로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공평하다고 생각하자. 앞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행이든 불행이든, 그건 개인의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정말 공평한 것일까.” (P.44)

개기일식이 끝나면 태양은 평소보다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빛이 강할수록 음영은 더욱 짙은 법. 작가는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혼자 추론해 본다.

 

* 간단하게 몇 자 끄적여 본다는 게 그만 생각보다 장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개별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건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성 싶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손에 든 책이 매우 쇼킹하다. 아무래도 작가에 대한 보다 바른 이해는 후속작을 읽어야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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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과 이즈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64
죠제프 베디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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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과 이즈, 혹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관한 설화는 아서왕 전설의 외전(外傳)에 해당한다. 어떤 연유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12세기~13세기 동안 집중적으로 트리스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작가들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마리 드 프랑스, 아일하르트, 토마스, 베룰, 고트프리트 등. 이를 수합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죠제프 베디에가 1900년에 발표한 것이 이 작품이며, 따라서 이것은 선대의 트리스탄 설화에 대한 요약본인 동시에 운문 이야기의 산문화 노력의 결정이라고 할 것이다.

일찍이 바그너의 유명한 악극의 제재로도 선택되었을 만큼 서구에서 널리 알려졌던 트리스탄의 설화는 숙명적인 사랑의 비극의 최고의 구현이라고 하겠다. 콘월과 브르타뉴를 배경으로 한 고대 켈트족 문화의 유산인 이 설화가 기독교 유럽세계에서 스러지지 않고 생명을 이어왔던 연유 또한 종교와 문화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자 인간 내면에 절절하게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하게 만드는 지고의 것이며, 사랑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지순의 존재이다. 사랑 속에서 함께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더 큰 기쁨이 없을 정도의 본질적인 사랑!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의 출발은 운명의 장난이자 동시에 숙명이다. 누군들 운명의 힘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빠져드는 수렁과도 같이 그들의 사랑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잉태한 비극이기도 하였다.

“나의 벗 이즈여, 그리고 트리스탄 공이시여, 그대들은 그대들의 죽음을 마시었소!” (P.59)

“아! 우리가 마신 것은 우리의 죽음이었소!” (P.219)

순전한 감정 외에 사랑의 미약의 힘을 입었으니 연인의 사랑의 정도는 이루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절절하기 그지없다.

“사랑이란 스스로를 감출 수 없는 법이다...그러나 언제 어디에서건, 서로에게로 향한 갈망이 두 사람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괴롭히며, 고이기 시작하는 포도주가 양조 통 언저리로 질질 넘쳐흐르듯, 두 사람의 모든 감각기관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P.72)

“그러나 사랑을 오랫동안 감출 수 있는 자 누구겠는가? 애석하도다! 사랑은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법이다!” (P.87)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 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 나를 부르시며, 나를 갈망하시니, 주저치 않고 가리다!” (P.152)

두 사람은 마크 왕을 피해서 모르와 숲으로 달아난다. 이는 핀의 전설 중 데르맛과 그러니아의 추격 부분을 차용한 게 명백할 정도로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숲 속에서 거칠고 가진 것 없는 생활이지만 소박한 행복을 느낀다.

사랑은 항상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상대방이 한시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질투와 의심의 그림자를 지니게 마련이다. 이것은 사랑을 한층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칫 증오로 변질되는 촉매제의 역할도 한다.

트리스탄의 영원한 여인은 이즈, 금발의 이즈였다. 하지만 브르타뉴에서 방랑하다가 그는 또 하나의 이즈, 흰 손의 이즈와 덜컥 혼인을 치른다. 흰 손의 이즈는 무슨 잘못이 있던가. 그녀는 아버지와 오라비를 위하여 공을 세운 트리스탄에게 순수한 연모의 감정을 가졌을 뿐이다.

트리스탄의 경거망동은 금발의 이즈에 대한 배신감 탓일까 아니면 오랜 외로움의 순간적 발현 작용일까?

“아! 어찌하여 그토록 선뜻 그 대답을 하였단 말인가? 그 한 마디가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하지 않았던가?” (P.174)

“그러나 또한, 순박하고 아름다운 흰 손의 이즈, 자기의 아내가 된 그 여인 역시 측은하였다. 두 여인이 모두 불운하여 자기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자기가 두 여인을 모두 배신한 것 같았다.” (P.175)

남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인이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을 유지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흰 손의 이즈를 미워할 수 없다. 오히려 그녀에게 공감하고 동정할 뿐이다. 작가의 비난과는 달리.

트리스탄을 만나기 위하여 오는 선상에서 마주친 폭풍우에서 절규하는 이즈의 외침은 곧 비극적 사랑의 절대적 구현이 아니겠는가.

“제가 없이는 임께서 죽으실 수 없고, 임 없이는 제가 죽을 수 없으니, 그것이 우리의 사랑이에요!” (P.225)

둘의 사랑은 결국 죽어서야 무덤에 피어난 찔레나무로 맺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1천년 전에 씌어진 이야기, 그 연원은 수세기를 더 앞서가는데 트리스탄과 이즈의 사랑은 시공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 현대인들보다도 더 구구절절하며 가슴 아프다. 두 사람이 조금만 더 자제했으면 더 요령껏 행동했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도 이미 문명의 때에 찌든 초라한 현대인의 부질없는 탄식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오직 사랑 그 자체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 이 작품의 국내 번역본은 두 사람의 판본을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진작부터 출판사를 달리하여 계속적으로 내놓는 것을 보아 두 사람의 이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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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침나라(둥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원작보다 압도적으로 유명한 영화로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진 소설. 그것을 행이라고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영화를 본 관객은 물론 타이틀만 아는 이라도 누구나 마치 소설을 읽은 듯 한 기분을 느낀다.

영화의 무게감에 비해 훨씬 가벼운 크기와 분량은 일단 안도감을 안겨준다. 중편 정도의 분량이 아닌가. 게다가 영화 못지않게 가볍게 쑥쑥 진도가 나가는 진행에 흡족하다. 가벼운 터치감이 이 작품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작가 카포티의 특성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독자에게 고뇌와 부담을 안겨주는 문체가 아님은 분명하다.

작중 여주인공 할리 골라이틀리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고급 매춘부일 뿐이다. 그녀 자신의 말에서 우리는 매춘과 절도, 마약, 동성애 등 도덕적 기준에서 볼 때 일탈 행위를 그녀를 저질렀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비난조가 아니라 오히려 만사를 이해해주고픈 심정이다. 어린아이가 저지르는 철모르는 행동 정도로 인식된다면 지나칠까?

그녀는 화려한 현대 도시 문명, 그 상징인 뉴욕의 불빛으로 찾아든 불나방 같은 존재다. 그녀는 그 화려함이 외관상에 불과할 뿐 내면으로는 공허함을 미처 알지 못한다. 겉보기에 세련되고 눈길을 끄는 치장을 하지만 어질러져 있고 제대로 된 살림살이도 없는 텅 빈 그녀의 공간과 같은. 게다가 그녀는 항상 ‘여행중’이다. 그녀는 현대판 방랑자요 유목민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초현대성을 선취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녀의 본성은 O.J.버먼의 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짜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신 말이 맞소. 그녀는 ‘진짜’ 가짜이기에 가짜가 아니요.” (P.49)

삶에서 일찍이 뿌리 뽑힌 그녀는 분주한 위악적 생활에서도 안정적 정주를 꿈꾼다. 비록 그 꿈이 외견상 허망하게 비칠지언정. 그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방에 가구를 들여놓지 않는 이유는 그녀 자신이 그들과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부와 명성을 욕망하지만 “뚜렷한 자아”(P.62)를 갖고 보석가게 티파니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고 해도 “본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기 바랄 정도로 똑똑하다.

이런 그녀의 똑똑함도 마약조직에 이용당하고, 결혼을 꿈꾸던 호세에게 버림받는 걸 막아주지는 못한다.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절규하고 자포자기하게 마련이지만 홀리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현대 사회를 부평초처럼 떠다니는데 익숙하므로.

“이제 고양이는 이름이 있을 테니까. 드디어 자기에게 어울리는 곳에 닿았으니... 아프리카의 오두막이든 어디든 할리도 그러면 좋을 것을.” (P.170)

이는 작중 화자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의 바램일 것이다.

* 영화가 원작을 어떻게 변용시켰는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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