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ighbour Rosicky kyung Moon Reading Classic 6
Willa Cather 지음, 박윤기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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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의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지만, 애매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표제는 <Neighbour Rosicky>인데, 국내 도서로 분류되어 있고 옮긴이 이름도 있다. 영어독해 교재인 듯싶은데 관련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도서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았더니 영어 원문과 번역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어쨌든 윌라 캐더의 미독서 작품이므로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책을 펼친다.

 

원제에도 없는 좋은 이웃을 옮긴이는 굳이 덧붙여 적는다. 사실 이 문구에 짤막한 단편 내지 중편 소설의 핵심이 담겨 있다. 평범한 농부,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으며,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두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노인. 농장 일에 매진하느라 심장에 무리가 가서 의사한테 경고를 들은 체코 이민자 출신의 노인. 작가는 그를 좋은 이웃이라고 부른다. 어디 작가뿐인가, 의사 에드 벌레이는 그를 이렇게 추억한다.

 

그에게 로시츠키 영감의 삶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였다. (P.120)

 

의사의 주의를 받았지만 장남 루돌프를 돕기 위해 무리하게 잡초 제거 작업을 강행하다 쓰러지고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는 로시츠키 영감. 그는 루돌프와 폴리 부부가 농장에서 안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리를 하게 된다. 도시 출신인 며느리가 시골에 정을 붙이지 못하자 은근슬쩍 챙겨주고 마음을 다독이는 좋은 시아버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먹고살 만한 수준에서 자신과 주변에 따뜻하게 마음을 쓰는 영감. 돈벌이보다는 올바르고 너그럽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노인네.

 

며느리의 요청으로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빈곤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런던의 비참한 삶, 뉴욕의 물질적으로 여유롭지만 정신적으로 공허한 삶. 그가 멀리 서부 평원으로 이주한 이유가 비로소 밝혀진다.

 

대도시는 건축물을 지으면서 사람들을 대지로부터 격리시키고, 사방을 시멘트로 처발라 땅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시키고 있군. (P.92)

 

도시는 죽은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망각된 자들이 사는 곳이었고, “버려진 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방이 열려져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었고, (P.119)

 

여러 사람이 로시츠키 영감과 작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는 도시 나름대로, 시골은 시골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닌다고. 하지만 적어도 작가와 영감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대지에 뿌리내리는 삶이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로시츠키 영감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농장 옆 무덤에서 가족과 이웃의 삶을 함께 호흡하고 먼저 떠난 낯익은 친구들과 땅속에서 편안한 사후를 누릴 것을 기대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은근하며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설을 읽으면 괜스레 마음이 느긋해지고 기분이 흐뭇해진다. 작가는 굳이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담담하게 로시츠키 영감의 일상을 묘사하고 그의 생각을 기술하면 그 자체로 충분할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웅변과 화려한 수사를 능가하는 기쁨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게 좋은 이웃, 로시츠키 영감 덕분이다. 그리고 그의 세상과 삶을 사랑하는 방식 덕분이기도 하다. 며느리 폴리가 시아버지를 향한 호칭이 어르신에서 아버님으로 바뀐다든지, 의사 에드가 영감의 심장 이상을 진단하고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힌다든지 하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로시츠키 영감의 사람을 사랑하는 특별한 재능, 이를테면 음악이나 색상에 대한 감식력과 같은 타고난 능력이리라. 시아버지의 사랑은 은근한 것이지, 유별나게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P.116)

 

원문이 약 70, 번역문이 약 50면을 차지한다. 잠시 원문을 읽어봤는데, 영어독해를 위한 각주와 설명이 상세하게 달려 있다. 확실히 번역문과는 다른 뉘앙스를 보이는데, 작가는 로시츠키 영감이 원어민이 아님과, 대초원 시골 지역임을 어투와 어휘에서 잘 나타낸다. 문장 자체도 아주 어려운 편이 아니라서 학습 목적으로 접근해도 나쁘지 않다. 서두의 작가 소개와 로시츠키 영감의 공감적 사랑이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도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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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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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통해 작가 한강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한강의 책들을 몇 권 집중적으로 읽었다. 동화, 에세이, 시를 제외하고 본격 소설만 꼽자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여수의 사랑>, <소년이 온다>. 한동안 시들하다가 다시 읽을 생각에 안 읽은 책들을 중고 도서로 차근차근 준비하던 즈음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분명 크게 기뻐할 소식이지만 나만의 숨겨둔 애호 작가가 사라지는 서운함도 어찌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금년도 노벨문학상 작가 독서를 시작한다. 발표 연대 역순으로 첫 번째가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제재로 하였다면,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을 제재로 삼는다. 두 편 모두 우리 현대사의 묵직한 아픔을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예민한 사안임에도 작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소년이 온다>와 달리 여기서 작가는 직접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화자 경하와, 친구 인선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다.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대의 참상을 겪은 인물이다. 작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것이 4.3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사전 지식 없는 독자라면 한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조차도 작품이 한참 전개된 후에야 비로소 기술된다.

 

홀연히 제주로 낙향한 인선은 병든 노모를 돌보면서 점차로 사건의 세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하자.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상한 언행의 근원이 고문과 고통의 산물임을 인선이 깨닫게 되었다 하자. 이 모든 것이 인선에게는 깊은 충격과 각성을 주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 독자는 경하를 의아하게 여긴다. 소설가인 듯한데, 광주 항쟁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세상과의 말 그대로 단절을 시도하기도 한 그는 작가 한강의 분신인가.

 

한강의 문체상 특징으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엄밀하고 상세한 사실적 묘사는 작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시적 여운과 울림, 그리고 압축과 생략을 통해 작가는 산문 문체의 고유한 개인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에게 있어 사회적, 역사적 사건은 자체로서 그대로 작가에게 투영되지 않는다. 개인적 체현이라는 필터를 거치기에 거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과 사회소설을 작가에게 기대하기 어렵지만, 반면 역사성의 내밀한 개인적 감성을 통해 우리는 사건의 본질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 소설을 줄거리 위주의 서사 구조로 보면 맥락이 닿지 않고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현실과 환상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어 독자는 무엇이 현실이고 어디까지 환상인지 분명히 구별하기 쉽지 않다. 화자가 묻은 새는 진짜 죽었는지 아니면 화자의 상상에 불과한가. 화자와 더불어 4.3 사건과 그들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선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나아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 중산간 외딴집에 찾아온 화자가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건 사실인가 아니면 눈 속에 고꾸라져 묻힌 그녀가 실제인가.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P.194)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실체가 드러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이루어졌다. 반면 4.3 사건은 여전히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나조차도 그런 게 있었다는 정도만 알 뿐 사건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작중에서도 군부 치하에서 일체의 진상 파악 노력이 중단되었다고 언급하였듯이 제주도민의 무차별적 학살은 이념 만능주의와 빨갱이를 향한 적대감, 지역감정 등이 결부되어 희대의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학살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글자 그대로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철저한 발본색원?

 

개인의 존엄성은 집단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평시에 한 개인의 죽음은 슬픔과 위엄을 지닌 채 존중되기 마련이지만, 대량의 죽음에서 개개인은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수많은 해골과 뼈가 제대로 매장되거나 처치 받지 못한 채 낭자하게 굴러다니는 몰골은 인간성의 민낯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P.329)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어마어마한 죽음을 건드리면서 하필 작가는 사랑을 꿈꾸는가. 누구의 무엇을 향한 사랑인가. 상실한 오빠와 가족을 향한 인선 어머니의 필사적 사랑, 데면데면했던 모녀 간의 관계가 어머니의 무한한 고통을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 인선의 사랑, 이념과 야만으로 타락하여 소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외치는 보편적 사랑. 인선은 자신의 마지막 다큐 영화가 아버지를 위한 것도, 역사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인선이 필사적으로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초조하게 매진하도록 만드는가. 정작 제안자인 화자는 덤덤한데 말이다. 진실과 화해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지금 이때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그러한가. 이제 사라진다면 더는 기회가 없다. 아직은 아픈 역사를 땅속에 묻고 작별할 때가 아니며, 작별해서도 안 된다는 절박함의 발로.

 

미약하고 은근하게 시작되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고 당혹케 만드는 작품의 전개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밀물의 물결처럼 우리네 마음과 정신을 계속 밀어붙여 후반부에 이를수록 고조되는 감정과 고양되는 영혼의 아픔에 이르게 한다.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남는 질문 하나. 도대체 인간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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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토니아 - 디오네 세계문학 01
윌라 캐더 지음, 윤명옥 옮김 / 디오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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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테이블에 두 팔을 디딘 채 창밖을 바라보는 한 젊은 여인. 수수한 옷차림으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응시하는 옆얼굴. 그녀는 무언으로 웅변한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버텨나가리라. 표지 한가운데가 네모지게 파여있고 책날개의 안쪽은 온통 빨간 바탕에 몇 글자가 흰색으로 쓰여있다. 책날개가 한번 접히면서 이 글자가 파여있는 네모 사이로 드러난다. <나의 안토니아>, 아름다운 표지다.

 

이상이 201712월에 쓴 문장이다. 거의 7년 가까이 지난 이제 다시금 <나의 안토니아>를 읽었다. 우연한 계기로 촉발된 윌라 캐더 전작 읽기를 미완결된 시작점에 돌아와 마무리하고 싶었다. 예전과 지금,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감상의 관점도 확실히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오로지 여성 인물 안토니아가 중심적이었다. 낯선 땅에서 풍성한 생명력으로 삶을 긍정하는 여인. 지금은 시골 지역과 도회지에서 살아가는 개척자들의 삶이 안토니아의 삶과 어우러져 그 시절 네브래스카의 향토 속에서 묘한 회고적 추억과 정서를 풍긴다.

 

가장 행복한 날들은.... 가장 빨리 사라진다 - 베르길리우스 (P.5)

 

작가가 소설 첫머리에 인용한 문구다. 짐과 안토니아로 대표되는 네브래스카 시골의 삶이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이 작품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정서는 분명히 추억과 회고다. 현재는 잃어버린,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과거. ‘안토니아는 추억을 상기시키는 마법의 단어다.

 

그 소녀는 우리가 기억하는 어떤 사람보다도 더 우리에게 그 고장, 그때의 상황들, 모험 어린 우리의 어린 시절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사람과 장소를 떠올리게 해서 그 이름을 말하면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조용히 진행되었다. (P.8-9)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최초 이주자인 뉴잉글랜드 주민들과 후에 넘어온 유럽 각국의 개척민들과 구별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후자의 집단인 보헤미안,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인 이주민들이 등장하여 자기 고유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유지한 채 사는 모습이 그려진다. 쉬머르다 가족에 대한 묘사, 러시아인 파블과 피터 그리고 늑대 이야기 등은 다양한 민족 집단이 뿜어내는 다채로운 문화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땅에서 힘겨운 적응 노력과 동시에 떠나온 고향을 향한 짙은 향수를 지니며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내 정착에 성공하는 모습은 미국 역사의 한 장면에 해당한다. 다르노의 피아노 연주 대목도 흑인 차별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다.

 

짐은 어릴 적부터 안토니아를 비롯한 시골 처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훗날 도시처녀들과는 구분되는 눈부신 생명력과 진실한 성실성의 미덕을 그들에게서 찾게 된다. 짐 역시 어린 나이에 동부에서 서부로 멀리 낯선 곳으로 온 동병상련의 처지 아니던가. 그런 짐과 안토니아는 서로를 친구 이상의 관계, 즉 가족과 남매 같은 존재로 받아들인다. 짐이 방황하고 흔들릴 때, 그가 외롭고 우울할 때 안토니아는 그에게 기운과 위안을 주는 존재로서.

 

안토니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녀의 친절한 두 팔, 그녀의 진실한 마음. 그녀는, , 그녀는 여전히 나의 안토니아였다! (P.215)

 

나는 그녀의 얼굴을 열심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내가 항상 간직해야 하고, 모든 여자들의 얼굴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에서 가장 친근하고 가장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얼굴이었다. (P.303)

 

작가는 안토니아를 완벽하고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의 외모와 품성, 태도를 지나칠 정도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인간적 약점을 지닌 젊은 처녀임을 상기시킨다. 즉 암브로쉬와 제이크의 싸움에 엉뚱하게 분개하고, 천막 교습소에 가는 걸 금지하자 발끈하여 주인집에서 나와 커터씨 네에서 큰일을 당할 뻔하며, 형편없는 남자에게 사랑에 빠져 미혼으로 사생아를 낳는 수치를 겪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운 심정에서 불쌍한 안토니아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럼에도 독자는 그녀를 구원의 여인상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건강한 생명력과 낙담할 줄 모르는 긍정적 정신이다. 짐이 맨 처음 안토니아와 만나는 대목에서 어린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 프랜시스가 짐의 할머니에게 전달하는 처녀 안토니아의 건강한 모습에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중년 여인이 되어 외모는 사그라들었음에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안토니아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쿠작네 자녀가 열 명이 넘도록 설정한 것은 그만큼 안토니아의 풍성한 생명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나는 안토니아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의 불꽃은 사그라져 버린 많은 여자들을 알고 있다. 다른 무엇이 안토니아에게서 사라져버렸다고 해도 그녀는 생명의 불을 잃지 않고 있었다. (P.315)

 

그녀는 마치 초기 종족의 시조 같은, 생명의 풍요로운 광산이었던 것이다. (P.332)

 

이 작품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배경인 네브래스카를 향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다. 캐더는 짐의 눈을 통해 언뜻 황량한 시골에 불과하게 여겨질 수 있는 그 지역의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항상 우호적이지 않다. 타는 듯 뜨거운 햇볕, 도처에 편재한 방울뱀의 위험, 휘몰아치는 폭설과 매서운 한파는 사람을 위협하고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조차도 조화롭고 순수하다. 그것은 일종의 찬가다.

 

바람 부는 봄철과 불타는 여름철이 이어지면서 그 고원지대를 풍성하고 농익게 했다. 그 대지 속으로 흘러들어간 인간의 모든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기름진 밭이 줄지어 뻗어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내게 아름답고 조화로워 보였다. 그것은 위대한 사람 또는 위대한 사상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P.289)

 

캐더는 세월의 흐름과 문명의 발전에 따라 전개되는 야생의 개발과 도시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사라져 버린 당시의 순수함과 소박함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도 여전히 가치 있음을 되풀이하여 역설한다. 언뜻 보면 시골 배경 이주민들의 소소한 살아가는 모습을 기술하였기에 윌라 캐더를 지방주의 작가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산업화하고 문명화된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인간성에 대한 천착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추억과 회고의 감정과 정서가 배어 나오게 된 것이리라.

 

안토니아 못지않게 독자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타이니 소더볼과 레나 린가르드다. 안토니아에 비해 처녀 시절 품행에 있어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그들은 외양적으로는 독보적인 성공 가도를 달린다. 짐과의 애인 관계였던 레나가 더욱 흥미로운데, 부질없는 일이지만 짐과 레나가 결혼했다면 두 사람의 앞날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금광 개발로 큰돈을 번 타이니와, 남성 종속적인 결혼 자체에 부정적인 레나는 요즘 관점으로 주체적 삶을 지향하는 여성주의자의 전형에 가깝다.

 

여기에 여러 아이에 둘러싸인 평범한 아줌마가 있다. 그녀는 어릴 때 꽤 고생했고, 평탄하지 못한 삶의 길을 밟아왔지만 꿋꿋이 버텨내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녀와 꼬맹이 시절부터 친한 한 중년 남성이 있다. 변호사로 출세한 인물이지만 현재 행복한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정신적 토대는 여전히 시골 네브래스카에 두고 있다. 두 사람의 인생은 나란히 때로는 엇갈리고 이따금 멀어져 가기도 했지만 운명의 끈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고 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 짐과 안토니아를 다시금 연결한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갈림길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습에서, 그리고 두 사람의 평생 여정을 찬찬히 따라온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듯이.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귀중한 과거를 함께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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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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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유목제국사>를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중국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흉노를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북흉노의 쇠망과 이후 남흉노의 점진적 소멸로 동양의 흉노 세력은 실체를 상실하였다고 보며, 흉노와 훈의 동일성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취하는 저자의 관점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흉노와 훈은 동질적인 집단인가 아니면 전혀 무관한 관계인가. 이때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이것이다. 올해 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이며, 외국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며 영어로 쓴 저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내놓았다. 무엇보다 흉노와 훈을 타이틀로 내걸지 않았는가. 간단히 표현하면 이 책은 무지하게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역사서다.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탐험하며 어둠에 감춰졌던 사실에 환한 빛을 비추어 세상 밖으로 드러낸 역작이다.

 

흉노와 훈의 관련성에 대하여 저자의 입장은 명백하다. 흉노와 훈은 동질적인 집단이다. 우선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훈이라는 이름 자체가 흉노에서 연원하였다고 단언한다. 또 하나, 소위 200년의 공백은 어찌 볼 것인가. 역사 기록이 부실하여 공백으로 인식하게 되었을 뿐 역시 과거 사료와 최근 연구를 토대로 볼 때 지정학적, 기후적 요인 등으로 흉노는 점차 서진하여 훈으로 등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힌다.

 

서양사에서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해 서로마제국을 멸망의 길에 이르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틸라의 야만족 대제국이 유럽 중앙에 딱 버티고 앉아 문명 세계를 파괴한 것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유럽의 뿌리가 깊은 편견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비판하며 훈족은 게르만의 저항 때문에 붕괴한 게 아니라 내홍으로 무너졌으며 상당 기간 세력을 유지하였음을 주장한다. 무엇보다 훈족 세력이 무지한 야만 세력이 아니라 발달한 중앙아시아 문명을 경험하고 받아들여 고도의 국가 체제를 완비한 제국이었음도 역설한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히 국가로서 존재했다. (P.155)

 

이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바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족이다. 우리는 그동안 흉노와 흉노의 서진, 즉 유럽 훈과의 관련성에만 주목하였다. 저자는 훈족 일파는 유럽으로 서진하였고, 다른 일파는 남진 및 남서진하였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훈은 백훈이라고 불리는데, 키다라 왕조와 뒤를 이은 에프탈 왕조가 훈계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6세기 중반 돌궐 제국이 나타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 이란, 북인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아래의 표를 통해 훈계 집단의 확산과 기나긴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훈의 기원으로서 흉노 제국의 역사를 죽 훑어본 후 북흉노의 패망 이후 남흉노를 제외한 잔여 흉노 세력이 어떻게 집단 정체성을 유지한 채 이동하면서 서서히 발전하여 유럽 훈과 아시아 훈으로 변모하였는지를 차근차근, 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중국의 흉노 역사에서 저자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남북조 시대를 개창한 유연과 이후 그들의 후손, 그리고 혁련발발과 저거씨의 왕국도 모두 흉노의 틀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 역시 다른 학자들과 차별점이다. 그에 따르면 흉노는 동과 서 양쪽에서 모두 당대의 대제국을 무너뜨린 역사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서양사에서 훈의 역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마의 멸망이라는 크나큰 사건이 더욱 주목받기 때문이다. 훈족은 그저 태풍과도 같은 일종의 재해로만 여겨질 뿐이다. 그들은 난데없이 쳐들어와 유럽을 혼란에 빠뜨렸다가 아틸라 사후 갑자기 소멸하였다는 인식. 저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과 배치됨을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훈은 재해가 아니라 이후 유럽사를 근본에서 뒤바꿔놓은 하나의 현상이라고 하면서.

 

요컨대 훈 집단의 영향력과 지리적 범위, 그리고 정복은 진정한 유라시아적 현상이었다. 이들은 도달한 모든 곳에 매우 혼종적인 내륙아시아 문화를 도입했고, 방대한 인구의 문화와 운명을 급진적으로 바꾸었다. (P.297)

 

저자가 제시하는 훈의 정치적 유산을 들어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유럽의 정치 구조를 완전히 뒤집었다. 잠깐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 훈이 아니라 오도아케르라는 용병대장으로 기억하는데, 하는 이견이 있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는 훈계 집단이다. 이어 중세 유럽의 시초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건설자는 아틸라의 봉신 출신이다. 중세 유럽의 특징적인 정치, 사회 제도인 봉건제 역시 훈족의 유산이다. 강력한 사회 및 군사제도는 게르만족의 각성을 이끌어서 국가 형성을 촉진하였고, 기마 중심의 군대 전통은 중세 유럽의 기사도와 승마 문화로 이어졌다. 이 정도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다. 기존에 내가 익히 알던 세계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편향적이었는지 새삼 부끄럽다. 게다가 훈계 집단이 남긴 문화적 영향은 또한 어떠한지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틸라 사후 훈의 미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오직 사라질 뿐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7장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있는데, 아틸라 제국은 곧바로 분열과 해체를 겪은 게 아니라 동쪽 절반은 여전히 굳건한 세력을 유지한 채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불가르 훈이라고 불리면서. 그러면 동부 아틸라 제국은 서부 아틸라 제국이 붕괴하는 걸 왜 방관하고 있었느냐는 의문에 대해 동부 초원의 새로운 유목 세력에 대응하느라 여력이 없었다고 저자는 제시한다. 어찌 되었든 불가르 훈은 100여 년을 존속하였고, 다른 지역에서는 캅카스 훈이라는 별개의 지파가 역시 국가를 형성하였다. 훗날 아바르인들의 점령으로 훈족 국가가 무너질 때 이를 훈의 최후로 볼 것인지 저자처럼 훈과 아바르의 결합으로 볼 지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양분된 아바르 제국의 한쪽이 나중에 불가리아로 이어졌다는 후일담은 흥미롭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존 훈족에 대한 견해와는 여러모로 다른 참신한 견해를 쏟아놓는다. 이것이 백 퍼센트 사실일지 여부는 누구도 단언하지 못한다. 다만 여태껏 주목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훈족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만도 큰 공헌이다.

 

훈의 역사를 이해할 때 특히 유의해야 할 점으로 저자가 거듭 강조한 사항이 있다. 흉노와 훈은 이미 자체로서 혼합적 민족과 문화, 종교 집단체다. 따라서 단일한 인종 내지 민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양자의 연속성은 정치, 문화적 동질성, 즉 흉노식 가마솥과 편두 풍습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훈족보다는 훈계 집단이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훈을 하나의 민족이나 종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집단은 종족과 민족, 종교적으로 다양한 부류가 함께 소속된 복잡한 정치체로, 그 안에서는 매우 다양한 생활 양식과 관습으로 인한 문화적 융합과 변용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P.17)

 

흉노와 훈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것은 두 집단 사이의 유전적연결고리가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유산의 전달이다. (P.19)

 

훈계 집단의 문화적 영향력과 관련해서 당대 중앙아시아가 후진적인 지역이 아님을 저자는 역설한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주민 문화 기준으로 볼 때 유목민은 후진이라는 편견을 지니는데, 그들은 농경과 유목 문화,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두루 체험하면서 두 문명의 혼합과 교류를 통해 한층 빼어난 발달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예술 연구자나 중앙아시아를 잘 알고 있는 고고학자들 가운데 원시적인훈 사회라는 정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오히려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내륙아시아의 고고학은 게르만 시대 유럽의 예술과 물질문화가 초원의 예술과 물질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P.291)

 

8백 년 후 몽골이 세계를 뒤흔들어놓기 훨씬 이전에 흉노/훈계 집단은 후대가 이룬 것과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니 고립되었던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역사적, 지리적 단위로 묶어놓았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그들의 등장과 유산은 유라시아적 현상이라 불릴 만하다. 이 책은 흉노/훈의 역사적 소임과 부침을 극적으로 부각시킨 대단한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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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수전 외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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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작품은 각자 특색이 분명하다. <레이디 수전>은 중편소설로 작가의 초기작이며 미발표작이다. <왓슨 가족><샌디턴>은 미완성작이다. 특히 후자는 작가의 유고작이기도 하다. 두 편 모두 완성되었으면 독자의 라이브러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작품들이기에 한층 안타깝다.

 

<레이디 수전>은 서간체 소설이며 주인공이 악인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차별되는 지점이며 작가가 향후 이러한 유형의 글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의 문학적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판단이 든 모양이다.

 

레이디 수전은 젊지 않다.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딸이 있으며, 얼마 전에 미망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봐서도 당시 사회 기준으로는 중년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외모와 교태, 말솜씨 등으로 주위 남성들을 유혹하여 좌지우지할 수 있는 요부에 가깝다. 물론 그런 그녀의 행실은 결코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평판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랄까.

 

연로한 드 쿠르시 경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당장 결혼해도 크게 득 볼 게 없으니까. 사실 난 그 결혼이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 그가 내 능력을 알게 만들었지. (P.30)

 

유부남인 맨워링 경의 집안을 뒤흔들어 놓고, 자기 딸과 결혼시킬 속셈으로 제임스 경을 유혹하여 맨워링 경의 딸로부터 떼어놓으며, 자신에게 적대적인 동서의 남동생 레지널드마저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할 정도다. 이쯤 되면 굉장한 능력자라고 할 만하다. 결혼 추진을 받아들이지 않는 딸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기숙학교에 강제로 입교시키는 면에서는 비정하기조차 하다. 확실히 동서인 버넌 부인의 말처럼 레이디 수전은 딸에게 무관심하고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존재처럼 행동한다.

 

아무리 작가라도 대놓고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기술하기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결국 그녀의 정체는 탄로 나고 레지널드와의 약혼은 취소된다. 그런데 그녀는 문득 제임스 경과 결혼을 발표한다. 그녀 입장에서는 딸과 결혼시키려고 했던 남성을 남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당대 도덕률에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레이디 수전과 친구 존슨 부인은 죽이 잘 맞는 사이다. 만약 남편의 강력한 제재만 아니라면 친구도 레이디 수전과 신나게 어울렸을 게 분명하다. 제임스 경과 결혼하라고 강력히 권고한 게 존슨 부인이니까.

 

3주 후, 레이디 수전은 제임스 마틴 경과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그제서야 버넌 부인은 이전부터 의심하던 바를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딸을 치워버리려는 레이디 수전의 수고를 스스로 자처하여 떠맡은 것이었다. 분명 레이디 수전은 처음부터 이렇게 할 작정이었다. (P.106)

 

레이디 존슨의 선택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확실한 건 레지널드보다는 제임스 경이 재산은 물론 오히려 다루기 쉬운 존재다. 둘 다 나이는 본인보다 훨씬 어리고. 게다가 버넌 부인의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 알 수 있듯 재혼에 있어 걸리적거리는 존재인 딸 프레더리카를 손쉽게 치워버리지 않았는가. 이 소설은 한마디로 레이디 수전의 종횡무진 활약 속에 놀아나는 주변인들의 뒤늦은 어벙벙함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차 있는 기이한 유형의 작품이다.

 

<왓슨 가족>은 전형적인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다. 주인공 이름도 에마다.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이라는 그녀 작품 주인공의 일반적 특징도 공유한다. 에마는 일찍부터 부유한 이모 집에서 자랐는데, 이모가 뒤늦게 재혼하면서 상속녀의 지위를 상실하고 본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녀 오빠의 말처럼 군식구로 전락한 셈이다.

 

매사 아늑하고 우아했던 가정의 생명이자 천사이며, 모두가 순조롭게 독립하리라 기대하던 상속녀였다. 이런 존재에서 벗어나 이제 누구에게나 하찮고, 애정을 기대할 수 없는 부담스런 존재, 가정의 편안함이나 앞으로의 지원을 기대할 가망도 없이 열등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미 너무 많은 대가족의 군식구가 되었다. (P.182-183)

 

그녀 처지에서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좋은, 즉 부유한 남편을 만나서 자신도 당당히 독립하고 본가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것. 그래서 언니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자매들이 그렇게 괜찮은 남성을 찾아 헤매는 것 아니겠는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유독 이러한 설정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대 영국 여성들의 사회상을 적확하게 반영하기 위함이다.

 

무도회에 참석하여 좋은 인상과 관심을 끈 에마에게도 주위에 세 명의 남성이 나타난다. 언니들은 쫓아다니지만 그녀 자신은 약간 경멸하는 톰 머스그레이브, 하워드 목사, 그리고 오만한 오스본 경. 아직 인물들 간 본격적인 사건과 행동은 벌어지지 않는다, 장편소설의 서두에 불과하므로.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스본 경의 태도 변화다. 마을의 지주이자 귀족인 오스본 경은 평소를 여자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긴 주변에 어떻게든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인 여자들로 넘쳐났을 테니까. 그런데 유달리 자신에게 독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에마에게 색다른 인상을 받는다.

 

난생처음 여성을 즐겁게 해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여성에게, 그러니까 에마 같은 상황의 여성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지금껏 그는 분별심이나 좋은 성격을 원한 적이 없기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P.159)

 

이 작품은 일단 에마의 자아성찰 내지 현실자각 장면에서 중단된다. 알려진 구성대로라면 꽤나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전개되었으리라.

 

<샌디턴>은 작가의 밝고 재기발랄함이 여타 작품에 비하여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주인공도 가난한 집안이 아니라 시골 지주의 딸이다. 물론 주변인들에 비해 똑똑하고 이성적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샌디턴의 파커 씨 부부 집에 한동안 방문하게 된 그녀는 아웃사이더의 눈으로 마을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파커 씨에게 있어 샌디턴은 제2의 아내이자 제2의 자식이었다. 그만큼 사랑했고, 분명 그 이상으로 열중해 있었다. 그는 샌디턴에 대해 끝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샌디턴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P.199)

 

샌디턴을 해변 휴양 마을로 개발하고자 하는 파커 씨 부부의 열의와 주장은 샬롯은 물론 독자에게도 낯설게 다가온다. 파커 씨의 자매와 동생들이 품는 상상병은 한층 이색적이다. 건강에 대해 염려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만 언제나 안달하며 전전긍긍하는, 게다가 신체적 이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네들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우며, 더구나 아서 파커의 꾀병은 해학적이다.

 

샬럿은 다이애나 양의 심상치 않은 건강 상태라는 것이 상당 부분 엄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병과 치유는 모두 상식과는 너무 달라서 진짜 질환과 회복이라기보다는 열정적 정신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의 질병에 가까운 것 같았다. (P.256)

 

파커 씨 가족과 더불어 한 축을 이루는 게 데넘 부인이다. 그녀는 결혼으로 재산과 신분을 일군 사람답게 샬럿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것을 무기로 주변 사람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한. 데넘 부인의 저택에서 발견한 첫 번째 남편 홀리스 씨의 초상화가 받는 대접은 샬럿의 감정을 독자에게 공감시킨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부분은 전적으로 샬롯의 관찰에 국한한다. 에드워드 경은 데넘 부인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클라라에게 접근하는데, 결과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마을은 파커 씨가 의도했던 대로 개발의 성공을 이룰 것인지, 데넘 부인의 상속자는 누가 될 것인지, 상상병자 식구들의 건강은 회복될 것인지, 샬럿은 샌디턴 마을에서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분명한 건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제인 오스틴의 기존 소설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시기로의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이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미완성으로 그친 게 아쉽다.

 

10여 년 전에 제인 오스틴의 전체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이후 제인 오스틴 전집이 출판된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보니 국내 초역 작품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삭줍기 차원이랄지 작가에 대한 예우랄까 뒤늦게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역시나 제인 오스틴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점을 새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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