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끝으로의 여행 동문선 현대신서 175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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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름 가까이 걸린 대장정이다. 빽빽한 조판의 770여면에 달하는 분량에, 지하철 통근 독서족의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의 조우가 빚은 결과이다. 그래도 도중에 용기를 잃지 않은 점에 스스로 대견스럽다.

셀린느(셀린 혹은 쎌린느)의 1932년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프랑스 문학사적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피카레스크 소설>(이가형/민음사)에서 20세기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분석을 하고 있어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피카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이래 나의 관심은 작품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이 소설은 단순한 피카레스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지향하고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1. 작품은 주인공 나, 즉 페르디낭 바르다뮈의 인생 역정을 따라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의학도인 페르디낭은 친구와의 대화 도중 행진하는 군대를 바라보다가 불현 듯 자원입대한다. 정신발작을 일으킨 페르디낭은 군대를 나와서 아프리카 식민지행 배를 탄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극심한 기후와 더위로 기력을 상실한 그는 미국행 화물선에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희망의 도시 뉴욕에서 그는 밑바닥 생활을 하며 실망하고 다시 프랑스로 탈출한다. 이후 그의 삶은 프랑스 내 파리 인근과 툴루즈를 오가며 전개된다.

언뜻 보아서 피카레스크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주인공의 방랑과 성장, 사회악과 부조리에 의한 피해 등. 다만 페르디낭은 조금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서 피카로의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페르디낭과 레옹 로뱅송은 사물과 그림자의 관계다. 그들은 형제인 동시에 철천지원수다. 그들은 동전의 앞뒤이자 빛과 그늘이기도 하다. 페르디낭은 로뱅송 없이 완전하게 홀로 서지 못한다. 그들의 떠나있음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기간이다. 그래서 페르디낭은 로뱅송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며 결국 그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페르디낭은 용기없는 위악적 인물이다. 그는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호색한이다. 그는 남들처럼 당당하게 비속함을 구하지 못하며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다소 가볍고 입이 가벼운. 로뱅송은 용기없다는 점에서 페르디낭과 비슷하지만 그는 위악적이지 못하다. 그 역시 사랑에 관심 없지만 마찬가지로 여자에도 무관심하다. 그는 재차의 시도 끝에 앙루이유 노파를 살해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악인이다. 하지만 독자는 그를 악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악인이되 악인이지 않은 로뱅송과, 악인이 아니지만 악인스러운 페르디낭.

2. 그들의 공통점은 부조리한 삶과 세상을 떠나려고 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처음 마주친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장. 그들은 독일군에 항복하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죽음이 아닌 삶, 그것이다. 그들은 허망하게 죽고 싶지 않다.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전쟁, 서로 죽고 죽이는 이곳에서 그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전쟁은 삶과 죽음이 무수히 오가는 곳이다. 미사여구는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욕망과 진실만이 드러나는 공간.

파리에서 잠시 마주친 그들이 재회하는 곳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그들은 전쟁과 문명세계를 도피한다. 미지의 그 곳, 오로지 자연만이 인간을 압도하는 아프리카에서 육신과 정신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곳 역시 식민지의 부조리와 자연의 야만성이 그들을 집어삼킨다. 인사불성인 상태로 벗어나는데 성공하지만 사제에 속아서 선원으로 팔려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어쨌든 페르디낭은 신대륙 미국에 도착하였다. 운 좋게 도시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페르디낭, 그에게 뉴욕의 거대한 도시문명은 비정한 물질성과 비인간성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규격화되고 획일적으로 동질화되는 곳. 그는 미국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귀국을 꿈꾼다. 여기서도 로뱅송은 항상 페르디낭에 한발 앞서 와있다. 그는 페르디낭을 예감케 한다.

전후 프랑스,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그가 염원하던 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는 의학수업을 재개하여 마친 후 변두리 지역에 개업한다. 여기부터가 작가가 진정으로 의도한 내용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나고 자란 그곳도 이제는 변질되었다. 페르디낭이 가렌느-랑시에서 겪는 옹색한 생활과 동네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그것은 소박하고 정겨운 그것이 아니라 삶의 불결하며 지긋지긋하게 악착같은 독기서린 것이다. 그 독기에서 앙루이유 부부의 노파 살해 기도가 움트게 되었다.

3. 페르디낭과 로뱅송의 여성 편력을 비교해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페르디낭은 앞서 말했듯이 호색한이다. 그는 끊임없이 여성의 육체를 애호하며 갈구한다. 부상으로 입원하였을 때 간호사인 미국여성 롤라, 수용소에서 알게 된 뮈진느와의 만남, 그리고 미국에서 매춘부인 몰리와의 감상적 연애, 극장 여배우 타냐, 그리고 로뱅송의 연인 마들랭, 병원 간호사인 소피 등. 그는 뭇 여성을 항상 갈구한다. 여성의 육체가 그를 안정시키고 거기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와 여성의 관계는 글자 그대로 표피적이다. 그에게 유일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몰리를 제외하고는.

반면 로뱅송은 여성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가 유일하게 만난 여성은 마들랭이다. 이마저도 그가 부상을 당하였을 때에 벌어졌으며 둘의 관계도 마들랭의 적극성과 끈질김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마들랭의 성격 부여가 궁금하다. 그녀는 외모와 나이를 고려할 때 로뱅송에게 연연할 연유가 결코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집착하며 마침내 그를 협박하다가 총으로 쏘아죽이고 만다. 로뱅송의 무엇이 그녀를 그에 집착시켰을까? 그의 불안정한 정서, 현실안주 거부적인 방랑자의 심리, 아니면 자신의 사랑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남자에 대한 오기의 발현 등.

이처럼 이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적 면모 외에, 반전문학의 성격과 아울러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문명비판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 밑바닥과 소시민의 견고한 궁핍과 간난을 여실히 도려내고 있는 점에서 사회비판의 색채도 아울러 띠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사상은 작품 표제에서 보여주는 그대로가 아닐까? 밤은 인간의 삶을 가리킨다. 어두운 밤에서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을 방향도 알지 못하는 채 더듬거리며 나아가야 한다. 밤이 끝나면 인간의 삶도 종말을 맞는다. 삶이 어떠한 종말을 맺든 모르는 채 인간의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생의 목적이므로, 밤 끝으로의 여행! 도대체 밤 끝으로 도착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보면 로뱅송은 페르디낭 보다는 훨씬 순수한 사상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꽤 그럴듯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대에 화제를 모았던 연유는 내용의 심오함이 아니었다.

일단 구어체와 비속어의 적극적 활용이었다. 아마 당대에는 고상한 문체가 주류이었던 듯하다. 그것을 셀린느가 소위 판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셀린느가 쓰고자 하는 내용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겐 사실적이고 비속함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방법이 필요하였다. 또한 극도의 비관주의적 분위기다. 작품에서 간혹 드러내는 실소적 장면을 제외하면 소설은 철저히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힘겹고 고달픈 삶, 거칠고 부조리한 세상. 그것은 양차 세계대전의 불안한 세계에 대한 작가와 세인의 암울한 전망을 반영한다.

구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불구경이라고 한다. 한밤중에 활활 타올라서 모든 것을 전소시켜버리는 불길의 압도적 강렬함과 뜨거움은 사람들을 도취시키는 매혹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불 꺼진 현장을 다시 가본 이가 있는지? 지난밤의 황홀한 추억은 찾기 어렵다. 온통 재투성이에 타고남아 무너져버린 잔해와, 시꺼멓게 그을린 흔적 등. 여기에는 오로지 씁쓸함만이 입가에 감돈다. 이것이 셀린느의 작품을 읽는 소감이다.

당대인에게는 열광적으로 호응 받고 도취감을 주었을 뿐더러 진부함을 타파하고 생경한 신선함의 우물물을 문학에 쏟아 부은 소설. 시대정서를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명 비판적 원대한 깊이를 제시해준 작품.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자체로 진부하다. 통시대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문학작품은 고전으로 살아남지 못한다. 셀린느의 이 작품도 이 시험대 위에서 오락가락한다. 대중의 평가는 당대성에 기우는 듯하다. 오늘날 그의 작품 중 유통되는 번역본이 달랑 이 한 편임이 입증하듯이. 하지만 간단히 외면하기에는 무게감이 제법 만만치 않다. 어찌할 것인가?

※ 참고로 이 책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간략한 작품 연보가 전부다. 따라서 셀린느의 이 작품에 대한 분석에 관심있다면 <피카레스크 소설>(이가형/민음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저자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전체적 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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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랭과 아서 지만지 고전선집 116
로버트 웨이스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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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켈트 신화의 유산인 아서 왕의 전설은 이후 서양 예술과 정신에 있어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본격적으로 켈트 신화가 서양 문학에 남긴 자취를 몇 편의 작품을 통해 실제적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아서 왕의 전설은 기실 원탁의 기사들로 더 유명하여 자칫하면 아서 왕의 면모를 놓치기 쉽다. 비록 신에서 영웅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지만 여전히 신화화된 영웅으로 서양 대중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어인 연유인지 궁금하다.

역자는 중세 프랑스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듯 하다. 국내에서는 이 분야의 번역에 있어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요즘 읽고 있는 셀린느 작품의 번역자이기도 하니 우연의 일치로는 기묘하다. 어쨌든 역자는 12~13세기의 로베르 웨이스의 <브루트 이야기>와, 로베르 드 보롱의 <선지자 메를랭>에서 발췌하였는데, 전체 12장에서 제1장(마귀들의 비상회의), 제2장(메를랭의 탄생), 제5장(아서 왕의 등극)은 보롱의 것이고, 나머지는 웨이스의 작품에서 취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역자가 메를랭(흔히 멀린으로 알려져 있다)과 아서의 두 인물을 표제로 편역을 시도한 것은 아서 왕과 관련된 문학과 일화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중요성 및 그들의 삶을 알아야 이후 추종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굳이 두 인물을 한자리에 묶어둘 절대적 필요는 없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먼저 메를랭의 탄생은 매우 신화적이다. 예수의 존재로 인하여 세력이 크게 위축된 마귀들이 비상 회의를 열고 예수의 탄생과 유사한 방식을 차용하여 마귀의 자식을 세상에 낳으려고 모의를 한다. 그리고 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 결국 순결한 처녀를 범하여 마귀 자식을 잉태시키는데 성공한다.

마귀들의 성공이 임박하였지만, 그 순결한 처녀는 결코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온갖 고난에도 진실한 신앙을 굳건히 지켜 마침내 신의 은총을 받게 된다. 그래서 뱃속의 아기는 마귀에게서 과거를 보는 능력을, 신에게서는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각각 부여받고 유아시절부터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한편, 아서 왕의 삶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아서 왕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피와 땀이 흐르는 역사적 인물로 표현된다. 그의 탄생조차도! 그는 신에게 선택된 인물로 칼뽑기(엑스깔리뷔르, 흔히 엑스칼리버로 유명하다)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마침내 왕에 등극한다.

작중에서 아서 왕의 위업과 광휘는 눈부시다. 브리튼 섬 내에 세력을 넓히던 색슨족을 몰아내고 스코틀랜드를 수복하였으며, 아일랜드와 오늘날의 스웨덴의 일부인 고틀랜드마저 점령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를 기반으로,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 프랑스 지역마저 세력에 포함시켜 전성기를 구가한다. 결국 이것이 로마제국과의 갈등을 유발시켜 동남 프랑스에서 일대 결전을 벌여 로마군을 패퇴시키고 로마황제마저 전사시킨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로마제국의 정복을 위해 로마로 진군하는 것뿐.

아서 왕의 정복전쟁은 후대 켈트인의 염원을 담고 있으며, 그의 불사의 삶은 켈트인들의 한을 내포한다. 아서 왕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서기 6세기 초에서 중반이다. 이미 유럽의 중심에서 쫓겨난 켈트인들은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프랑스 해안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와중에도 색슨족들의 끊임없는 침범으로 브리튼 섬마저 풍전등화의 신세에 놓였다. 사실 아서 왕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는 웨일즈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전설이 아서 왕에게 엄청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켈트인들이 고대의 영광을 수복할 꿈과 희망을 그에게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몰락시킨 색슨족을 응징하고, 유럽을 손아귀에 쥔 강국 로마제국을 정복한다는 원대한 꿈! 그것은 몰락한 명문가의 후예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기위안을 삼기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이 작품 전체에 비장한 복수의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우리들과 선조들을 위하여 복수도 할 겸, 우리가 저들에게로 가서 강탈할 차례입니다!” (P.162)

아서 왕의 혁혁한 무훈은 그가 단지 영웅이기에 용이하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그와 기사들, 군사들은 목숨을 내놓고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흔한 영웅담처럼 손쉬운 승전, 일방적인 전투가 아니었다. 이것이 아서 왕의 위업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그만큼 웨이스의 필치는 매우 사실적이며 별다른 과장이 없다. 무수한 병사의 죽음은 물론, 뛰어난 전사이자 충실한 왕의 기사들이 전장에서 잇달아 목숨을 빼앗겼다. 전장에서의 순간의 기세에 따라 병사들이 두려운 마음을 품기도 하였음을 놓치지 않는다(P.199). 적장을 죽이는 만큼이나 아군의 장수도 잃을 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이므로 아직은 원탁의 기사가 작품의 전면에 드러나고 있지않다. 그저 아서 왕이 뛰어난 기사들을 위해 원탁의 기사 제도를 마련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이 후세 한강의 검룡소 구실을 할 것이다.

한편 역자도 수차 언급하였듯이 웨이스의 작가적 시선은 독특한 면모가 있다.

통상 영웅 이야기는 영웅과 그들 둘러싼 왕과 귀족, 기사들의 이야기이며, 대중과 백성은 일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지 않은 근대 이전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웨이스는 그렇지 않다. 중세의 초엽에 그는 작품 속에 이미 근대성의 씨앗을 감추고 있다.

아서 왕의 대관식을 준비하는 하인들과 감독관들, 마부들, 시종들의 정신없이 바쁜 풍경을 사실적으로 기술하며(P.140), 축제를 즐기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유랑 악사들과 광대들, 특히 도박을 하는 노름꾼들까지 계급의 층하에 구분을 두지 않고 고루 등장시킨다(P.148). 항해를 준비하는 선원들의 민첩한 동작에 대한 상세한 기술적 묘사는 말할 것도 없다(P.168~169). 게다가 로마군과의 격전에서는 백작도 왕도 아닌 평민 출신의 전사 세 명의 담대한 용기를 예찬하고 있다(P.216).

맥아더의 유명한 고별사는 아서 왕에게 더 적합하다. 공식적으로 아서 왕은 죽지 않았다. 그는 반역자 모르드레와의 내전에서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기위해 아발론 섬(켈트신화에서 이는 하계(下界)를 가리킨다)으로 갔다. 그곳에서 치료를 마친 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켈트인들은 여전히 믿고 있다. 그가 돌아오는 날 켈트인은 다시 세계사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우뚝 설 것임을 고대하고 있다. 따라서 켈트인에게 그는 단순히 잊혀진 과거의 영웅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살아있는 구세주이다.

이것이 아서 왕에 대한 켈트인들의 정서일 것이며, 아서 왕 자체보다는 원탁의 기사와 성배에 열광하는 게르만족들과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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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법원에서 본 뉴욕의 한국인들
박중돈 지음 / 삼신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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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8월말 뉴욕의 '해외석탑제'에서 배부받은 책이다. 책상위에 던져놓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펼쳐들게 되었다.

저자는 현재 뉴욕 형사법원에서 한국어통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재판정만큼 인간사의 어두운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런만큼 재판을 받게된 교포들의 통역관은 숱한 인생역정을 접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이번에 술회하였다.

사람사는 곳에 범죄가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인 법. 뉴욕에 우리 교포들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한인들의 범죄율도 덩달아 증가하였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죄값을 치룬다면 누가 무어라고 하겠는가마는 미국 현지 사정에 어두워서 영문도 모른채 끌려와서 억울하게 판결을 받는 경우는 얼마나 될 것인가.

이 책의 제1부는 위와 같은 사례를 주로 다루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관습의 차이에서 비롯된 웃지못할 해프닝에서 심각한 사건까지, 그리고 이 틈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가 악용하는 사람들. 부부간, 부모 자식간, 친구간의 다툼과 갈등 등을 간결하게 그러나 교훈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음주운전은 해소되어야 할 문화적 악습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제2부는 저자가 지역신문에 기고한 칼럼들을 추려냈다. 시사중심으로 한인사회에 대한 당부, 고국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교포사회의 어쩔 수 없는 보수 편향이 은연중 비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위 글로벌 시대에 한국인이 한국땅에만 거주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다양한 외국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세계속에 한국을 심는 노력이 장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지의 문화, 관습, 법규 등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국 이민 수십년에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의사소통 조차 못하는 것을 결코 권장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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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10.17에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히딩크를 키운 나라 네덜란드
박영신 지음 / 사과나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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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존재는 특이하기 그지없다. 굶주리면 식은밥만 먹어도 황공하기 짝이 없다가도 이내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식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고전과 양서에 파묻혀 지내다가도 가끔은 불량식품 같은 군것질용 책도 보고 싶기도 하고 손에 들기도 한다. 시류에 영합하는 한번 읽으면 그걸로 족한 유형의.

이 책을 내가 읽는 이유는 몇가지 있다. 하나는 우연히 무상으로 얻게 되었다는 것이며, 저자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궁금하기도 하다. 솔직히 네덜란드라면, 풍차와 간척사업, 그리고 튤립만이 기억에 있다. 물론, 히딩크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정말로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저자는 네덜란드에서 상사 주재원으로 출발하여 의류사업으로 명성을 얻고 자칭 '네덜란드의 개성상인'으로 통한다고 한다. 오죽하면 유태상인들마저 경쟁을 피한다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으니. 그런데 왜 나는 전혀 신뢰감이 들지 않을까? 아직 내 인성을 자화자찬에 삐딱한 견해를 가지는 구시대적 심성을 극복하지 못한 듯하다.

전반적으로 네덜란드에 대한 인상기 정도라고 보면 된다. 네덜란드에서 상인을 중시하는 모습이라던가 여왕 탄신일에 아이들에게 장사를 허용하는 풍경 등은 나름대로 흥미롭다. 하지만 이 정도의 유익한 정보는 가물에 콩나듯 할 뿐, 대체로는 저자가 네덜란드에서 성공하기 까지의 과정 및 장사에 얽힌 일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치 저명인사가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본인의 성취한 업적을 홍보하는 자서전 류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걸 어찌할 수 없다. 다만 이 정도의 글이라면, 대개는 자비출판 정도로 마무리할텐데 이 책은 상업용으로 출판했으니 출판사의 과감성과 결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과연 얼마나 팔렸을까? 아니 어쩌면 월드컵 축구 4강 이후 높아진 히딩크의 명성을 재빨리 이용하는 순발력을 보였으니 조금이나마 혜택을 보았을 성 싶기도 하다.

박람강기는 굳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넘치도록 흐르지만, 이런 책도 가끔은 킬링타임으로 한 번 정도 보는걸 말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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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6.13에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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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래 오랜만에 펼쳐든 수상작품집이다. 별다른 이유없이 그저 시류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오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치열함마저 무뎌진듯.

김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 "칼의 노래"를 통해서이다. 워낙에 소재가 특별하였고, 거기에 평론가와 독자의 평가마저도 한번쯤 읽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 정도였으니.

이번 수상작품들이 국문학사에 어떤 위치를 점할 지는 아직 모르겠다. 문순태의 글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우리문학의 흐름에서 얼마나 유리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역으로 현대문학이 대중에게서 얼마나 벗어나 있었는지를) 새삼 절감하였다.

김훈의 '화장'과 자선에세이는 "칼의 노래"의 어조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작가 김훈의 성조이리라. 결코 감정을 고조시키고 드라마를 장대하게 꾸미지 않는다. 항상 낮고 내성적인 소리울림으로 글의 무게중심을 아래로 아래로 고삐를 꽉 쥐고 있다. 그의 글에는 선동의 흥분이 없는 대신 절제의 미덕이 자리잡고 있다. '화장'에서 죽음과 삶 이외에 두 여체의 대비가 중요한 모티브인지는 몰랐다. 육체의 묘사를 그리 덤덤하게 그려내었으니.

문순태의 전통성, 박민규의 유희성 이외에 다른 작가들의 목소리는 모노톤으로 들린다. 개인성과 고독성.

시대가 하 수상한 탓일까. 문학에서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진한 외로움의 체취가 묻어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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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2.15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