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이츠 - 존재의 완성을 향하여 문학의 이해와 감상 43
서혜숙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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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의 시집을 읽었다. 알 듯 모를 듯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 시인이 우리말로 쓴 시라도 이해가 쉽지 않은데 하물며 번역시다. 게다가 예이츠가 누군가? 그의 시는 평범한 듯하지만 그 속에 고도의 상징과 신비로움을 부여하여 제대로 맥락을 짚기가 용이하지 않다.

 

이럴 때 구원투수로 해설서가 필요하다. 시집 자체에 풍부한 주와 해설이 있다면 좋겠지만 본문 외에 간략한 해설만 있는 상황에서 되새김질은 한계가 있다. 저자는 학문적으로 예이츠를 전공한 사람이니 내용의 수준과 신뢰성은 어느 정도 담보되어 있다.

 

대개 유명 시인은 일찍이 천재적 자질을 보여주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이미 이십 대에 문명(文名)을 떨쳐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경우가 많은 장르가 바로 시에 있다. 예이츠는 대기만성 형이다. 이십 대 중반에 첫 시집을 출판하였으나 중년이 될 때까지 그의 시인으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올망졸망한 시인 무리의 일원. 오십 대를 넘어가면서 급격히 작품의 원숙미와 깊이가 더해지면서 돋보이기 시작하더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저자는 전반부에서 예이츠의 생애를 짚어본다. 가계로부터 시작하여 모드 곤과의 만남, 그리고 연대순으로 일생을 살펴보면서 문학적 연관성을 상세하지만 명료하게 제시하여 이 부분만 읽더라도 시인의 시를 받아들이는데 꽤 도움이 될 정도다. 예이츠의 작품은 그의 삶과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정당하게 해석되기 어려운 점이 많음을 유념해야 한다.

 

책의 핵심은 이어지는 작품 해설에 있다. 얄팍한 소책자에서 80면을 여기에 할당할 정도다. 구성은 작품들의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기별로 발표된 시집과 수록된 주요 시의 분석을 하고 있다. 게다가 여타 시집에서는 언급하지 않는 설화시, 장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 미덕을 보여준다. 시기 구분은 환상적 낭만기, 현실로의 전환, 존재의 통일, 세속적 완성의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후자의 두 시기를 합친다면, 통상적 연대 구분과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예이츠의 첫 작품이 <어쉰의 방랑>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예이츠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서 켈트 신화와 설화에 심취하였다. 일찍부터 신비주의적 종교집단에 가담하였을 만치 그의 내면에는 기독교적 특성보다는 신비주의적 이교적 요소-켈트, 기독교의 이단, 인도와 선불교 등-가 더 강하였다. 이 점은 그의 <켈트의 여명>에서 혼령과 요정을 불러내는 마법 의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적 정신의 뿌리는 켈트이다.

 

예이츠의 시인으로서의 절정기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중기에서 개인적 인식을 사회와 현실로 확대시킨 예이츠는 부단히 자아와 사회의 갈등을 겪는다. 봉건적 귀족사회의 고상하고 우아한 가치를 중시한 그에게 아일랜드 독립 투쟁과 어지러운 정치 현실은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제 그는 관조적 자세로 세상을 응시한다. 시집 <탑>과 <나선형의 계단>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정신과 육체, 신성과 욕망, 선함과 악함, 고결함과 더러움 등 상반되는 제반 요소를 그는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다룬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존재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존재는 특정 이념으로 재단할 수 없다. 존재는 자체로서 고유한 현상이자 실체이다.

 

이 책은 특히 예이츠에게 영향을 미친 동양 사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예이츠는 일찍부터 동양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초기의 인도 문학과 종교에 이어 후반에는 선불교, 탄트라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저자는 존재의 통일이 실은 불교에서의 니르바나, 즉 열반과 동일한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작품도 알지 못하는 마당에 난해한 종교적, 철학적 배경을 파악하기란 어려워 자세한 이해는 후일로 미루어 둔다. 그의 전 시작품을 읽어봐야지 이 책에서 논의된 갖가지 분석과 주장 및 배경 등이 가슴에 와 닿지 않겠는가.

 

저자와 책의 도움으로 나는 예이츠의 시세계가 범상치 않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니스프리 호수 섬>과 같은 서정시의 작가로만 알고 있던 무지가 얼마나 얄팍한지를. 국내에 소개된 그의 시 선집이 과연 거인 예이츠의 진면모를 알리는데 오히려 저해 요인이 아닌지를.

 

찾아보니 한국예이츠학회에서 그의 시 전집을 다년에 걸쳐 번역하여 출간하였으며, 최근에는 이를 합권하여 전집으로 출판하였다. 결국 전집에 도전해야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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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부활절 - 영국편 솔세계시인선 7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황동규 옮김 / 솔출판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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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으로 예이츠의 방대한 시 세계를 섭렵하였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예이츠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또 한 번 그의 시 선집을 펼쳐본다.

 

이 책은 25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는데, 민음사 본과 중복되는 시도 많지만 새로운 작품들도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중복 수록작은 그의 대표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재독한다고 하여 나쁠 것도 없다.

 

이 책은 다행이도 시기별로 구분하여 1889~1913년의 전기, 1914~1932년의 후기, 1933~1939년의 말기별로 고르게 선별한다. 각 시들의 출전도 명기하여 주어서 시기 및 출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앞에서도 예이츠의 시 세계의 뿌리의 심원함과 광대함을 언급하였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시기별로 그는 감성에서 출발하여 현실을 인식하게 되고 고차원적인 존재의 인식 단계로 접어든다.

 

전기에서 두드러지는 예이츠 시의 시간은 하루로 치면 여명 또는 황혼 이후이며, 계절에서는 가을을 선호한다. 인생에서는 노년을 찬미한다. 그의 시는 화창한 봄날과 눈부신 대낮에 대한 노래가 없다. 어찌 보면 애상의 정서, 감성의 침잠, 어슴푸레한 신비와 환상으로 대변될 수 있는 게 그의 시적 분위기다.

 

예이츠는 시 속에서 현실에 정주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떠나서 방랑한다. 호수 섬 이니스프리를 찾든가 신화 속의 잉거스처럼 방황하는 그에게 현실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피상적 실체이다.

 

후기에서 뽑은 시 중에 <아일랜드 비행사가 죽음을 내다보다>나 <1916년 부활절> 등에서 아일랜드의 격변하는 정세에 대한 작가의 구체적 인식이 표현된다. 그의 시는 더 이상 애상에 물들어 있지 않으며 굳건한 의지와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불만족스러운 현실 상황에 대한 은근하지만 날카로운 비판도 함께 한다. <비잔티움 항해>와 <국민학생들 사이에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옮긴이가 <1916년 부활절>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것도 이에 주목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기에서는 예이츠는 초월과 달관의 경지에 다다르는데, <미친 제인이 주교와 말을 주고받다>에서 그는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한다. 기실 그의 정신세계의 기저에는 신비적이며 환상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자리 잡고 있다. 켈트 신화와 전설에 대한 몰입, 비잔티움에 대한 찬미, 동양 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 등이 그러하다. 이런 모든 요소가 그의 개인과 현실에 대한 인식과 어울려 오히려 틀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분방함으로 표출된다. <박차>에서 그는 정욕과 분노가 창조력의 원천임을 밝히는 대담성을 보인다.

 

비슷한 성격의 선집인 만큼, 솔의 세계시인선과 민음사의 민음세계시인선을 여러모로 비교할 수밖에 없다. 작품 선정의 합리성에서는 솔 본의 손을 들어야겠으며, 말미의 해설도 이쪽이 더욱 충실하여 간략하나마 이해에 도움이 된다.

 

번역시집의 가장 큰 미덕은 원작의 미묘한 뉘앙스와 깊은 함의를 어떻게 우리말로 잘 구현하여 시인과 독자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메우는가에 있다. 이 점에서는 민음사 본이 더 성공적이다. 역자 두 사람이 모두 시인이니만치 자신의 언어와 스타일로 재창조하고 있는데 정현종 시인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현재 서점가에서 살아남은 것도 결국 민음사 본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술 노래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을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나지막이 시편들을 읽어나가던 도중 계속 입가에 머문 시다. 술도 잘 먹지 못하는 내 자신인데 왠지 마음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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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너도밤나무 (보급판) 지만지 고전선집 19
드로스테-휠스호프 지음, 조봉애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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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 국의 화폐에는 자국의 최고 상징물 또는 인물을 도안에 수록하고 있다. 국내만 해도 기존의 율곡, 퇴계, 세종대왕 외에 신사임당이 들어가 있다.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들 모두가 결코 간과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히 동일하다.

 

독일의 20 마르크화짜리 지폐의 도안은 한 여성작가를 내세우고 있다. 이름도 우리에겐 생소한 작가인 드로스테-휠스호프. 도대체 독일에서 이 작가는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녀의 대표작이 바로 이 <유대인의 너도밤나무>라는 노벨레다.

 

‘베스트팔렌 산간지방의 풍속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독일의 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숲이 주된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뇌리에 떠오르지만, 그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드로스테-휠스호프에게 독일 산악의 숲-브레데 숲-은 너무 짙고 빽빽하며 악마적이고 불길함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이다. 숲에 마술적인 신령의 속성을 부여한 점에서는 근자에 읽은 푸케의 <운디네>와 오히려 가깝다.

 

이 노벨레는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다. 작가는 인물과 사건,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를 일부러 꺼린다. 인물의 성격은 단편적 행동으로 사건 묘사는 핵심만 기술하여 빈 공간은 독자들의 상상과 추론으로 메우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대강 읽어서는 이 짤막한 작품의 표면만 훑고 지나가기 딱 좋다.

 

작가가 본문 앞에 적어놓은 훈계조의 문장 중 끝부분은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음미할 만하다.

“밝은 공간에서 태어나 자라고,
경건한 손에 의해 양육된 행복한 자 그대는,
저울질하지 말라, 결코 네게 허락되지 않았느니!
돌을 내려 놓아라-그것이 네 머리를 칠 것이다!” (P.14)

 

작품 중간의 메르겔의 살인 혐의와 관련하여 P법원장이 보내온 편지의 “진실이 항상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P.87)라는 것과, 말미의 지주인 남작의 발언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아”(P.106)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봉건적 문화가 여전히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독일 시골지역에서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다. 불안한 사회적 지위, 의심을 살 만한 충분한 동기. 이를 갖춘 메르겔이 자신의 정당함을 당당히 주장하지 못하고 도주함은 일면 당연하다. 요즘에도 심증과 섣부른 선입견만으로 억울한 이를 매도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메르겔은 살인범이 아닐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그의 도덕적 무결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그는 분명히 삼촌의 불법 도벌에 공범이며, 산림관의 살해에도 떳떳하지 못하다. 인격과 행동면에서 그는 세인들의 호감을 사지 못함을 작가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즉 그의 인성과 언행은 선입견을 풍기기에 충분하며 주민 및 독자의 동정을 받기에 힘들 것임을.

 

프리드리히 메르겔이 요하네스 니만트로 위장하고서 귀향한 장면은 시사적이다. 메르겔은 그의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며, 니만트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아무도 없는 동시에 아무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의 말로는 예측 가능하다.

 

메르겔이 목매단 장소가 하필 유대인 아론이 살해당한 너도밤나무라는 점도 묘한 여운을 남긴다. 메르겔이 아론의 살인범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 상황에서 메르겔도 아닌 니만트가 자살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가 인생과 운명의 시련에 너무나 지쳐 생존 의욕을 상실하였음은 명백하다. 그는 범행 현장에서 속죄를 구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매도한 세인들의 섣부른 의심에 대한 목숨을 건 마지막 항변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 이 작품은 지식을만드는지식(2009)에서 조봉애 번역으로 나온 게 시중 서점에서 유일하다. 내가 읽은 책은 배중환 번역으로 세종출판사에서 1994년에 출간된 것이다. 현재 절판된 상태이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아도 아무런 정보도 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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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드라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0
W.B.예이츠 지음, 서영윤 옮김 / 동인(이성모)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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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시인이다. 따라서 예이츠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는 26편의 희곡을 쓴 극작가이기도 하다. 시는 예이츠의 내면 정서를 드러내는 표현 수단인 반면, 극은 그의 사회 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표출 도구였다.

 

예이츠의 희곡은 시인 동시에 극이다. 극시(劇詩)은 시에 중점을 두는 명칭이고, 시극(詩劇)은 극에 우위를 부여한다. 한마디로 그의 희곡은 운문 희곡이다. 시의 정신으로 씌어진 극작품으로 무대 상연을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희곡으로 분류함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통상적인 산문체의 극과는 달리 대사에 운율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된다.

 

예이츠의 희곡은 연극의 정통에서 다소 비껴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단막극으로서 장막극의 주류와는 차별된다. 또한 당대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단순화된 형식의 상징적 표현을 주로 한다. 무대 장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일본의 노극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고 하는데, 예이츠의 기본적 성향도 일조하였다고 본다.

 

<디어드라>는 전기에 속하며, <매의 샘에서>는 후기에 속한다. 따라서 후자가 보다 상징주의적 요소가 심화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무대, 대사, 구성 등 모든 측면에서. 독자에게는 오히려 전자가 쉽게 다가오지만, 전자에도 그만의 개성이 물씬 배어있다.

 

두 편 모두 이채로운 점은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켈트 전설에서 유래하고 있음이다. 전자는 디어드라와 코노하 왕의 이야기가, 후자는 영웅 쿠훌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아일랜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작가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등장인물에 악사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비중이 제법 크다는 점이다. 악사들은 켈트 문화에서 유랑시인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극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코러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고 보니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예이츠의 극은 현대 사실주의극에서 배제된 연극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이츠의 극이 짧은 것은 그의 극이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 때문에 길어지는 사실주의극과는 달리 시간, 장소, 동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불필요한 원형적 영역에서 움직이는 상징적인 극이기 때문이다.”

 

<디어드라>는 늙은 왕과 젊고 아름다운 왕비, 그리고 젊고 용감한 청년 간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다. 켈트 문화는 유사한 소재의 이야기를 여럿 남기고 있다. 이 극으로 남겨진 데르드러 외에 페니안을 몰락으로 이끈 위대한 영웅 핀과 그러니아, 데르맛의 정사가 그러하며,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비슷한 패턴이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아서 왕의 죽음도 귀네비어 왕비의 불륜이 원인이 아니던가.

 

이는 사회적 윤리질서와 사랑의 감정 간 충돌이자 청춘 남녀 간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 대 노인과 처녀 간의 부적절한 결합에 대한 반감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합법적인 결혼 관계의 당사자 보다는 청춘 남녀의 죽음을 무릅쓴 연애에 더 큰 지지를 보내며 열광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이야기의 결말은 남녀의 사랑의 죽음으로 끝맺어져 당대 도덕률과 타협을 도모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매의 샘에서>는 “운문, 산문, 코러스에 가면과 춤 등을 혼합한 극으로 예이츠의 성숙기 극의 특징을 보인다...극에서 사용된 모든 것은 사실을 재현한다고 하는 사실주의 극의 환상에서 일탈하여 상상 속에서 창조하려는 욕구에 종속되어 있다.” (P.14)

 

그만큼 <디어드라>와 비교할 때 이 작품의 상징성의 정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대사 자체도 범상하지 않으며, 악사들이 천을 펴고 접는 행위도 극의 제의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의도를 강하게 풍긴다.

 

여기서도 늙음과 젊음이 노인과 쿠훌린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오십년의 세월을 헛되이 샘가에서 보낸 노인과 영웅 쿠훌린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은 인간에게 금기시되는 불사를 추구하려고 한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켈트 문화에서 샘은 단순히 물이 솟아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인간에게 현세의 영역을 빼앗긴 신과 요정들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그들의 권능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샘물이 솟아나려는 찰나에 강력한 신성의 발현으로 노인은 잠들고 쿠훌린은 넋을 잃고 이끌려 나가게 되고 만다.

 

예이츠의 극은 시적인 정서와 상징성에 치우쳐 희곡이 갖고 있는 외향성이 많이 희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무대화하기 용이하지 않으며,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만만치 않다. 순전히 희곡만으로 보더라도 흡인력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극에 대한 이해는 시인 예이츠는 물론 인간 예이츠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한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희랍극, 중세극은 물론 일본 노극을 소화해서 시를 통해 제의적 형태를 구현하고자하는 탈환상적 기교와 독특한 비젼을 갖춘”(P.18) 점이 예이츠 극의 의의라고 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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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친구 바벨의 도서관 11
페드로 안토니오 데 알라르콘 지음, 정창.이승수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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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다.

 

알라르콘의 대표작은 기실 같은 스페인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가 작곡하여 유명하게 된 <삼각모자>이다. 국내에서는 어찌 된 게 이것이 알라르콘의 작품의 첫 번역에 해당하니 기뻐해야 될지 자못 의아하다. 이 책에 수록된 것은 그의 후기 작품집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포함된 8편 중 2편에 해당한다. <죽음의 친구>는 중편, <키 큰 여자>는 단편의 분량으로 제법 편차가 존재한다.

 

두 편 공히 관통하는 제재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회피가 불가능한 냉엄한 현실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경은 인간 내면의 심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의 추동력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의 출발은 바로 죽음의 인식에 있지 아니한가?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어둡게 그리며 생자(生者)를 훈계하는 일면, 저승도 생각만큼 나쁜 곳은 아니라는 보다 장밋빛 감언으로 겁먹은 영혼들을 위로한다. 그래서 죽음의 연기 내지 회피라는 유혹에 인간의 태생적 취약성을 보이게 마련인 법이다.

 

<죽음의 친구>에서 힐 힐은 글자 그대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친구가 된다. 죽음의 힘 덕택으로 그는 잃어버렸던 신분을 되찾고 사랑하는 여인 엘레나와도 결합하게 된다. 삶이 행복하게 되는 순간 그는 죽음을 외면하고 시골 별장에 숨는다. 죽음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하길 기대하며. 인간은 원래 이런 존재다. 제아무리 눈부시게 포장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반감을 지닌다. 무릇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본능일 것이다. 죽음의 신성이 그토록 강변하였건만.

 

“나는 누구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아. 인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고문을 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숙적인 ‘삶’이야. 그대가 그토록 아끼는 ‘삶’이라고!” (P.35)

 

이 작품의 묘미는 막연히 상종하기 싫은 불쾌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었던 죽음의 어두운 신성(神性)의 권능을 마음껏 보여주는데 있다. 오직 절대자를 제외한 무엇도 그의 권위를 침범할 수 없으면 그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발산한다. 힐과 죽음의 신성 간 어설프고 무력한 대결 장면을 보라.

 

“왜? 그걸로 나를 죽이려고? 이번에는 검은 망토 차림의 죽음의 신성이 소리쳤다. ‘삶’이 감히 ‘죽음’한테? 이거 참 묘한 기분이 드는데......그래, 우리 한번 붙어 볼까?” (P.96)

 

역설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 키워드는 죽음의 신성의 말로 나타난다. 그리고 작가가 죽음의 미학을 통해 역으로 들려주는 삶의 소중한 가치리라.

 

“사랑을 향한 사랑이라......사랑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이지.” (P.116)
“아! 물론 그렇지......삶이란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니까......” (P.118)

 

<키 큰 여자>는 이런 면에서 훨씬 단순하다. 죽음의 전조를 알리는 키가 큰 여자의 출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발현.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텔레스포로의 말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언젠가는 그런 여자를 만날 거라고 예감했기에 느끼는 두려움이며, 노파의 외침으로 그 실체, 즉 악마임이 확인된다.

 

그의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은 곧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의 절실한 의문이라고 하겠다.

 

“그 노파는 인간일까? 왜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그 노파를 만나리라고 예감했을까? 노파는 왜 나를 보자마자 내가 누군지 알아보았을까? 그 노파는 왜 나에게 큰 불행이 닥칠 ㄸ만 나타났을까? 악마라서? 죽음이라서? 삶이라서? 적그리스도라서? 그 노파는, 그 키 큰 여자는 누구지? 도대체 뭐지......?”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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