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
에르네스트 르낭 지음, 신행선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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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국가, 그리고 국민과 국민국가의 경계]

책세상문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어 보지는 않았다. 굳이 어설픈 변명을 하자면 아직은 국내 사회과학계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개인적 편견 탓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고전의세계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선택이 쉬웠다. 고전이란 용어가 이미 내용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부여하는 데다,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저작을 가볍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르네스트 르낭이 누구인지 표지만으로는 알지 못했다. 약력을 보고서야 <예수의 생애> 저자였음이 어렴풋할 정도이니. 새삼스레 19세기 인물의 글을 시리즈 제1편으로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민족’에 관한 글을. 출판사에서는 아직도 ‘민족’에 관한 르낭의 논의가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가 약화된 요즘, 민족 또는 문명 등의 요소가 글로벌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요소로 부각되는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 아래에서는 간단하나마 르낭의 글에 대한 나름대로의 느낌과 생각을 정리한다.

1. 독일 통일에 대한 프랑스의 부정적 역할-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서 르낭은 소위 보불전쟁을 일으키는데 프랑스의 잘못도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일처럼 문명화되고 지적 정신이 충만한 민족이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함에도 프랑스는 독일에 지속적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프랑스에 적대적 통일분위기가 조성되는 실책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주장이다. 한편 르낭은 독일과 프로이센을 구분하여 비록 프로이센 같은 비독일세력에 의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독일에 의하여 흡수되기를 바라고 있다.

2. 유럽 공동체 개념- 한편 프로이센의 봉건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에 우려를 보내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원만한 관계유지가 문명사회의 진보를 위하여 매우 긴요함을 강조한다. 전쟁중인 양국 관계가 어떤 식으로 종결되더라도 그 파급효과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이러한 갈등과 위협요인을 억제하기 위하여 유럽의 개입 즉, 유럽합중국의 구성과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마치 20세기 후반의 유럽연합을 예견하는 듯하여 놀랍기까지 하다.

3. 민족 개념과 구성원의 의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르낭은 전통적으로 종족, 언어, 종교, 지리 등에 의한 민족 구분 개념을 비판하고, 구성원들의 동의 내지 결집하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민족 개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글의 흐름을 생각해 본다면 매우 타당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언급한 해제를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의아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4. 민족과 국민의 구분- 학교 수업 또는 여러 책들을 통해 파악한 민족의 개념은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것이다. 즉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지니는 인간 집단을 대개 민족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르낭은 구성원의 결합의지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달리 하더라도 결합의지만 존재하면 같은 민족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스위스는 또는 미국은 민족국가인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연방국가이다. 역사서에서는 서양의 근대이후 국가체제를 국민국가로 이해하고 있다. 즉 국가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지방분권적인 봉건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로 넘어간다. 국민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소속의지 또는 결합의지이다.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중국계 미국인은 다른 민족이지만, 같은 국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앞에서 연유한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매우 불명료한 것으로 여겨진다.

5. 생물학적 인종주의 대 문화적 인종주의- 본문에는 없지만 해제에서 르낭의 사상이 갖는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르낭은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인종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생물학적으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는 존재한다. 백인종이 황인종과 흑인종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백인종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유대인은 백인종과 황인종 중간에 위치한다. 르낭은 당시 지성인들처럼 다윈의 진화 개념을 받아들여 이와 같은 개념체계를 정립한 듯싶다. 그러나 르낭이 어떠한 방식으로 문화적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든 결국 근대적 사고체계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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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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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리들리의 붉은 여왕
매트 리들리 지음, 김윤택 옮김 / 김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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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로 조망하는 성과 인간의 모습]

영화제목에는 ‘누구누구의 XXX’ 라는 유형이 종종 눈에 띈다. 주로 유명한 영화배우가 출연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의 작품성은 별로다. 『붉은 여왕』도 앞에 ‘매트 리들리’라고 저자의 이름이 병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일전에 베스트셀러였던 『게놈』의 저자란다. ‘붉은 여왕’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하였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에 빗대어 부제 그대로 인간의 성과 진화를 풀이하고 있다.  

내용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에서는 글자 그대로 ‘성(sex)’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처럼 유전자의 선택과 유전노력이 생물의 성의 존재이유와 양성 구분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는 자신의 우수한 형질을 보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성생식을 통한 번식도 가능하지만, 이는 기생생물(바이러스 및 기타 병균 등)의 생존 위협에 대한 적합한 대책이 되지 않으므로 필요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성생식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저자는 열쇠와 자물쇠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기생생물은 끊임없이 숙주에 침투하려고 시도하는데, 숙주는 이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기생생물의 성공적 침투는 숙주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 그래서 다양한 유전자 조합이라는 자물쇠 장치를 마련하지만, 이는 장기적 효과를 얻지 못한다. 기생생물도 여기에 맞는 열쇠를 지속적으로 개발한다. 결국 ‘붉은 여왕’처럼 기생생물과 숙주의 치열한 전쟁 속에 진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는 때로는 개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진화관과 대비된다고 하겠다.  

후반부에서 매들리는 위의 관점을 인간사회에 적용하고 있다. 인간이란 종도 유인원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남자(수컷)와 여자(암컷)의 본성에 존재하는 차이는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유전자 차원의 본성적 차이로 교육으로 차이가 해소될 수는 없다. 수컷은 유전자 번식의 기회를 증가하기 위하여 가급적 많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려고 한다. 그들은 정자만 제공하면 되는 유리한 입장이다. 반면 암컷은 정자를 받아들이고 새끼를 출산하고 양육하여야 되어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이므로 최고의 수컷 유전자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각각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표출된다. 지구상의 많은 민족이 과거에 일부다처제였으며, 현재도 일부는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결코 우연한 현상으로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책은 많은 신기한(적어도 나에게는) 주장을 담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관점, 근친상간 금기 및 유태성숙, 성적 매력이 있는 아들 이론(피셔 이론)과 건강한 자손 이론(좋은 유전자 이론) 등 예전에 생물교과서를 통해 얻을 수 없는 여러 최신의 다양한 생물학과 유전학 개념이 소개되고 있어 지적 흥미를 끌어당기고 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유전자에 의해 조작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나도 그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점검해보고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왜 스스로 거부하겠는가.  

마지막으로 한가지 아쉬움을 토로하겠다. 번역의 문제인데, 전체적인 흐름을 보건대 아주 매끄럽게 이어져야 함에도 문장의 호흡이 단절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자면 문장을 알고 내용을 전달하기 보다는 그냥 단어를 옮겨놓는데 불과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좋은 외서는 좋은 번역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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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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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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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론물리학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여태껏 읽어본 교양과학서 중에서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주제, 원문, 그리고 번역의 삼박자가 참으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먼저 주제를 보자.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현대 이론물리학의 눈부신 성공과 발전에 전문과학도는 물론 일반인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론물리학의 발전은 또한 수학의 복잡성과도 극적으로 비례하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접하기 어려움도 사실이다. 이러한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바로 교양과학서가 담당한다고 할 때, 브라이언 그린의 이 책은 정말로 뛰어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현대 이론물리학의 세 흐름인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대한 소개와 최근의 초끈이론까지도 담고 있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다음 저자의 매끄러운 필치는 번역을 거치면서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채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어니스트 러더포프의 인용문처럼 어려운 내용을 평이한 언어로 더구나 흥미진진하게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내용을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20세기 전반과 중반을 주도했던 이론이므로 비교적 다양한 입문서를 만나볼 수 있다. 반면에 끈이론 또는 초끈이론은 너무나도 최신이론이어서 전문가들조차도 흐름을 쫓아가기가 어려운 지경이니 어찌 문외한들을 위한 개설서를 기대하겠는가. 하물며 일체의 수학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한편 원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번역에 의해서 생사가 좌우되기 마련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붉은 여왕』도 괜찮은 작품이지만, 번역에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적어도 번역에 의해 내용전달이 왜곡되거나 지장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한가지 초반부에 너무나도 많이 등장하는 옮긴이의 참견은 때로는 성미를 돋구기도 한다는 점에서 제발 개정판이 나오게 되면 빼던가 정 아쉬우면 각주로라도 처리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후로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서도 이 부분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삼박자의 조화에, 깔끔한 편집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과학에 흥미가 없는 사람에게도 자신있게 추천하고픈 그런 책이다. 절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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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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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개정판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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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아홉살 시절이 기억나지 않을까]

역시 우연한 기회에 손에 들어왔는데, 표지에는 느낌표 선정도서라고 자랑스레 적혀있다. 요즘 느낌표에 한번 방영만 되면 소위 대박이 난다고 한다. 진정 바람직스러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나쁜 일은 아니리라, 어쨌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책을 많이 접하게 하는 계기를 부여하니까. 표지를 벗겨놓고 출퇴근시간에 오가며 읽는데 속표지가 노오란 병아리색이라 제목과 잘 매칭된 셈이지만, 어째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의식되기도 한다. 군데군데 소박한 그림도 들어있어 가볍게 읽을만하다. 하지만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고 아홉 살 된 꼬마가 세상과 인생을 경험하는 과정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일종의 성장기라고나 할까. 너무나 담담하고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어 자칫 꼬마의 삶이 낭만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달동네의 모습이란 결코 환상을 품을게 못됨을 상기한다.

월급기계의 잔혹하지만 당시에는 워낙 일상적인 선생의 모습, 기종이의 엉뚱하지만 진실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움, 우림이와의 풋사과 같은 감정, 그리고 토굴할매와 골방철학자의 슬픈 삶 등, 어찌 보면 꼬마의 나이가 아홉 살이 아니라 적어도 열아홉 살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아심도 생긴다. 작가는 서른의 삶을 아홉 살에 투영하고 있다. 만약 진실로 아홉 살짜리가 이렇다면 세상은 참으로 고달프지 않을까 싶다. 흘러간 과거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련하다. 그것이 기쁜 일이건 아니면 슬픈 추억이든.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나 물건을 보면 왠지 반갑고 정다운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이런 작품이 더더욱 인기를 끄는지도 모르겠다. 중간 중간 나의 아홉 살 시절을 되새겨본다. 착한 학생은 아니었다는 막연한 인상, 그리고 모든 게 뿌연 안개 속에 가려있는 느낌이다. 나는 왜 아홉 살 시절이 기억나지 않을까. 그만큼 현실에 치여 사는데 급급해서 어릴 적 꿈과 동경은 상실하고 말았는가. 한 가지 더, 요즘 아홉 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나날을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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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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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19C-현대 -하 - 세계총서 32
정판룡 외 / 세계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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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를 통독하다 보면 꽤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개개의 문학작품을 고립화된 원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지양하고 시대와 개인의 텍스트에서 긴밀하게 엮인 화학적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전에는 관심도 없던 작가와 작품들에 새삼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해당 작품의 의의를 이해하게 된 데 연유한다.

또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와 작품 외에 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뛰어났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세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나로서는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로 이어지는 프랑스 고전파 희곡작가들과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등의 셰익스피어 선배와 동시대 작가들에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 작품들도 그러하다. 이 책에만 국한한다면 인도의 고전들, 즉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샤쿤탈라, 판차탄트라 등이 주목된다.

이 책을 보면서 국내 문학계의 얕은 수준에 절망하게 된다. 변변한 세계문학사 입문서도 부재하여 1980년대 연변에서 간행된 이 책을 봐야 할 정도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앞서 존 메이시의 세계문학사에 비하며 이 편이 더 공평하다. 어느 정도 오리엔트와 아시아권의 작품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다만 특수한 연유로 중국은 제외하고 있다. 우리는 서양문학사의 시시콜콜한 작가와 작품들도 훤히 꿰뚫고 있는 반면 이웃과 옆나라의 걸작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무지하다. 연변 조선족 학자들은 비록 마르크스적 관점이 두드러지는 한계가 있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인 소개와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든 저작에는 가치관 내지 세계관과 이념의 개입을 회피할 수 없다. 회피하려는 노력 자체가 또다른 편향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글쓴이의 선호와 사상이 편집 과정에 반영됨은 당연하다. 이들 저자는 세계문학사의 시발에서 중간을 거쳐 내내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비치고 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다.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문학을 그 자체의 예술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피지배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폭로하는 정도, 그리고 민중의 의식깨침과 봉기에 대한 의식 정도로 문학작품의 중요성과 가치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지나침의 함정에 빠져 있다.

존 메이시와는 달리 이들 저자는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 때로는 꽤 상당한 분량을 특정 작가와 작품에 할애하고 있다. 이것이 편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계적 균등이 아닌 실질적 공평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만 8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에 20면 가까운 분량을, <겐지모노가타리>에도 9면을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저자들은 중요한 것은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개설서이지만 나름대로 깊이있는 해설과 분석을 하여 간과하기 쉬운 참면모를 밝혀내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소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제 하권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하권은 19세기부터 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흠, 그런데 솔직히 기대에 많이 못 미친다. 존 메이시의 저작에서 아쉬운 점의 하나가 20세기 초까지 만을 다룬 점이라서 20세기 중후반부에 대한 기대가 자못 있었다. 그런데 이 책 역시 20세기 전반까지 만을 다루고 있으며, 그나마도 러시아를 위주로 한 공산주의권 작가와 작품만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사실의 왜곡에 미치는 영향을 눈앞에서 보는 기회를 가졌다.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차라리 공산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이므로 나름대로 커다란 이념적 지향이 전체적 이해에 지장을 주지 않았는데, 이 하권에서는 이념이 문학을 압도해 버렸다. 이념의 기준으로 측정하여 맞지 않는 작가와 작품들은 과감하게 마치 침대에 다리를 맞추듯이 배제시키고 있다. 문학사적 거장이 왜소한 난장이가 되고, 조그만 씨앗을 거대한 고목으로 둔갑시키는 재주는 손오공도 울고 갈 지경이다.

일례로 거장 도스토예프스키를 보면 단 5줄로 간결하게 언급하는데 그치고 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1821~1881년)는 장편소설 <죄와 벌>(1866년)에서 평민출신의 빈궁한 대학생 라스꼬르니꼬프의 살인과 참회의 과정을 통하여 폭력적인 수단을 비난하고 기독교적 순종의 정신을 설교하였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 <까라마조프형제>(1880년)에서 도스또예프스키는 반동적인 신권정치를 공개적으로 비호하여 나섰다."(P.212)

이는 동시대의 병칭되는 거장인 톨스토이에게 18면을 할애한 것과는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인다. 열린책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보유한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의 작품 제재 및 주제가 종교적 색채로 차있고 관념주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은 과연 공산주의답다는 생각만 떠오른다. 그의 초기작 중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은데 이조차 외면하다니.

이런 저자들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20세기 전반기의 문학 사조를 퇴폐 및 반동, 파쇼로 이해하는 이념적 덫에 갇혀 있는데 연유한다. 사회주의 러시아를 예찬하기 위하여 무산계급 문학을 내세우다 보니 대칭되는 유산계급(자본주의) 국가들의 문학 전반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결과를 빚고 만다. 잠시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체계내에서의 전반적 공황의 도래와 함께 현대 자산계급 문학에서 퇴폐적 경향이 더한층 격화되어 갔다. 독일 군국주의의 재생과 함께 파쇼문학이 대두하여..."(P.318)

반면 문학사적 가치보다는 혁명사적 의의가 큰 파리꼼뮨 시기의 문학을 별도로 다룬 점 및 소련, 일본,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주목한 점 등은 기존 자본주의 문학관에서 놓친 부분을 양지로 이끌어냈다는 부분적 긍정을 부여하더라도 과도한 비중으로 이런 유형의 개설서에서 가장 중요한 균형과 절제를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기존 인식에서 벗어난 참신한 시각으로 제기하는 스탕달의 <적과 흑> 재해석과, 상권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의 고뇌를 나약성의 관점을 탈피한 점 등은 지나치지 않다면 문학작품을 읽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맛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환영한다.

더욱이 바이런, 하이네 등 단순히 낭만파 시인으로 인식되던 그들에 드러나지 않던 고뇌와 번민, 사회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유랑 등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측면도 있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반면 그가 보여준 일탈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여긴다. 전혀 엉뚱한 사례지만 이것과 유사하다. 다양성을 인정하되 함몰되지 않는 것, 이것이 참다운 중용의 미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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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8.17과 9.3에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