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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이순신과 슬픈 칼의 노래]
요즘도 학교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신격화된 교육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80년대초까지는 이순신 장군은 내게는 우상이자 신이였다. 단순한 구국영웅이 아니라 ‘성웅(聖雄)’이라는 칭호가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역사상 존경하는 위인을 선정하면 도맡아놓고 일등에 뽑히곤 하였다.
이순신이 위대하게 각인될수록 대비하여 원균은 초라하고 비열한 인간의 표본으로 전락하였다. 지금은 이런 이분법에 반대하여 원균을 복권하는 책도 출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순신은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 압도적인 존재였다.
작가는 이런 영웅을 인간으로 되돌려놓았다. 이 작품에서는 영웅소설이나 전쟁소설 등에서 상투적으로 써먹는 ‘영웅만들기’가 일체 배제되어 있다. 이순신은 다만 인간일 뿐이다. 그에게는 자신을 사형시키려고 한 임금에 대한 분노와 측은한 마음, 적에 대한 강렬한 적의, 그리고 병으로 쇠약해지는 육신이 있으며, 여인의 품에 안겨 안온함을 맛보는 소박한 마음조차 똑같이 있다. 영웅을 바라는 독자라면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작품이 이순신의 전생애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구국의 일념으로 맹렬한 적함을 쳐부수던 전쟁 초기는 회상의 단면으로만 재현될 뿐이다. 정유년때 적선을 요격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적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국문을 받고는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여 백의종군하는데서 소설을 시작한다. 작품의 관점은 철저히 나, 즉 이순신 장군에 있다. 내가 바라보는 전쟁의 의미, 국가와 백성의 무너지는 모습 그리고 적군의 행동에 대한 추정 등.
이것을 단순히 역사소설이라고 국한시킨다면 작가는 꽤나 섭섭해 하지 않을는지. 오히려 여기서 작가는 이순신이라는 극적 인물을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투영하고 있는 듯 싶다. 그것은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내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을 쫓다보면 마치 개인의 고해성사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그러기에 각종 전투에 대한 기록과 묘사는 부수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명량대첩에서 흔히 알고 있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쇠사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오직 조류 흐름의 변화를 기가막히게 잘 이용하고 있음만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지 아니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작가는 징징 울어대는 이순신의 칼과 임금의 칼과 적들의 칼을 통하여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싶은가 보다.
[인간 이순신과 슬픈 칼의 노래]
이 소설은 슬프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지 않는데도. 작가의 목소리는 낮은 베이스 톤으로 굴곡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 글을 쓸때 작가의 심경을 반영하듯이. 그래서 여늬 소설을 읽을 때처럼 속도감이 나지 않는다. 책장을 탁탁 넘길 때의 쾌감이 여기에는 없다. 개인의 일기나 수상록을 읽듯이 중간에 문득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내 자신을 보곤 한다. 이순신은 죽음을 원했다.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앞길에 드리워져 있음을 늘 의식했다.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그를 시기하는 적대세력과 임금에 의하여 평탄한 죽음을 맞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최후를 마쳤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추앙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극적인 동시에 강렬하였다.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 전쟁은 끝을 맺었다.
작가는 난중일기와 장계, 각종 역사기록 등을 통하여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의 이순신의 수군활동을 전하고 있다. 임진년 초창기 승전 이후 명량, 그리고 노량에 이르기까지는 소강상태로 별다른 전투의 기록이 없다. 따라서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기 일쑤이지만, 사실은 끝없는 대치상태로 인한 긴장의 연속, 식량부족과 전염병이 야기한 수많은 죽음 등 결코 평화롭지 않은 기간이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사실 전쟁기간 중에 진실로 평화로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너무 고독하다. 인간 이순신은 홀로선 자이며, 작가도 마찬가지로 혼자이다. 철저한 개별성에 바탕을 둔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슬픈 칼의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