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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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위의 고독한 악동에 대한 이미지]

나도 또한 글렌 굴드로 인하여 바흐의 건반악기 작품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라이센스 LP로 발매된 〈프랑스 모음곡〉을 턴테이블에 올려 놓은 순간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그의 통통 튀는 듯한 피아노 음향과 속도감, 그리고는 이어서 들려오는 흥얼거림. 이렇게 나의 굴드 편애는 시작되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글렌 굴드의 전기가 출판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못 기대를 하였다. 괴짜 내지 이방인의 이미지를 풍기는 그의 실제 삶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나와 같은 단순한 흥미로 이 책을 접하는 사람은 곧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의 삶은 단편적으로만 소개될 뿐이었다. 순간 무슨 전기물이 이렇지? 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페이지를 잇달아 넘기면서 나의 우매함을 탓하게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전기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예술가들의 전기는 창작의 수수께끼를 늘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그래서 저자는 사실들 혹은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는 대신 ‘영혼의 사실들’을 이야기한다. 그 편이 오히려 예술가 글렌 굴드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이므로.  

프랑스 음악 또는 문학은 서구 다른 나라의 그것과 묘한 차이를 보인다. 때론 현학적인 느낌마저 드는 미묘한 이미지의 전달.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두서없는 개인적 감상문이 아닌가 의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경계를 넘나들며 저자는 우리에게 굴드에 관한 어떤 이미지를 전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도 싶다.

1964년, 굴드는 연주회장을 영원히 떠났다. 이어서 레코딩에의 전념, 그리고는 1982년 죽음. 이처럼 그의 삶은 단순한 외양을 지닌다. 청중과의 의사소통 내지 교감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했기에 연주회를 떠났고, 골드베르크에서 시작하여 골드베르크를 마쳤으니 삶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경건주의와 엄숙주의에 젖어있던 연주계에 유쾌한 바흐상을 보여주면서 바흐를 우리들 옆으로 인도했다. 동시대에 살아 숨쉬는 바흐로. 비록 자신은 세상으로부터의 절대고독을 택했지만.  

명연주자를 수식하는 문구가 흔히 있다. ‘건반 위의 사자왕’ ‘강철타건’ ‘건반 위의 철학자’. 내게 글렌 굴드는 악동의 이미지를 풍긴다. 그것도 고독한 악동. 그래서 나는 그를 ‘건반 위의 고독한 악동’이라고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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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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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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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정복을 꿈꾸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교훈]

이 책은 구입한 후 한동안 펼쳐보지를 않았다. 책 자체의 호기심보다는 추가 세일 때 대량구매에 같이 휩쓸려서 구매가 이루어진 다소 불순한 구입동기를 지닌 책이다. 오랜만에 펼쳐들고서야, 환경오염 고발이라는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깜짝 놀랐다.  

1960년대 초반,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각종 곤충류 및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으로 살포되었던 살충제와 제초제. 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이었던 이들 제품에 대해 미국 내에서 그 효능에 대해 의심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물며 엄청난 환경파괴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탄화수소계열화합물(DDT로 대표되는)로 인하여 숲과 강, 들판은 폐허화되었고, 목표였던 해충과 잡초는 더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더구나 인간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점증하게 되었다.

카슨은 이와같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해충(잡초)을 절멸(!)시키려는 화학회사 및 과학자들(화학회사에서 그들에게 거액의 연구비를 지급한다)의 객기가 결국은 인간 스스로에 위협을 가져오므로, 자연의 특성을 이해하는 살충(제초)방법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DDT, 디엘드린, 클로르덴 등 독성물질의 무분별한 사용이 가져오는 각종 참혹한 사례들을 적절하게 제시하면서, 자칫하면 봄이 와도 생명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의 봄’이 멀지 않다고 경고한다.  

감수자의 말대로, 오늘날 이처럼 독성이 심한 화학물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의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 심심치 않게 비치는 환경호르몬 이야기, 유전공학적 처리를 한 농산물에 대한 시민의 반발 등 형태를 달리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사건은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자연을 인간의 편의에 따라 언제든지 개조가능한 도구로 생각하고 있는데 연유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해충 또는 잡초 개념은 인간의 편의를 기준으로 한 구분이다. 그것이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별로 없다. 단지 내게 피해를 주니까 박멸해야 된다는 논리가 득세한다.  

레이첼 카슨은 그 흔한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과학계에서는 비주류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몇 년후 세상을 떠났던 것도 진실을 은폐하고자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세상의 몰이해가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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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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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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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와 진실의 사이에서]

움베르코 에코는 친숙하게 들리지만, 내겐 별로 가깝지 않은 작가이다. 기껏해야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을 읽었을 뿐, 유명한 『장미의 이름』도 읽지 않았다. 어쩌면 이 책도 누군가에게 선물받지 않았다면 접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바우돌리노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는 세상의 온갖 모험을 다 겪은 풍운아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희대의 허풍쟁이이자 사기꾼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바우돌리노는 가톨릭 성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우돌리노가 비잔틴제국의 역사가 니케타스 앞에서 자신의 일생과 모험을 구술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는데, 분량도 방대하며 내용은 더더구나 상상을 뛰어넘어 황당하기조차도 하다. 성배에 관한 이야기는 ‘아서왕의 기사’ 아니면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이더스」를 생각나게끔 한다.

‘픈다페침’ 과 요한사제의 왕국, 프리드리히황제의 죽음 등 일련의 사건들이 술술 넘어가며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라고 믿게끔 유도한다. 그러면서 가끔씩 니케타스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갖게 만든다. 그의 삶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한낱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소에 부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역사서에 드러난 것만이 참다운 역사라고 하는 주장도 또한 억지에 불과하다. 역사와 진실이 반드시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에코는 나름대로 가벼운 문체로 대중을 위하여 썼다고 하지만, 중세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진 대중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혹 유럽 사람에게는 어릴 때 동화책에서 읽어 보편화 되어 있는 민담이 아닐까. 나는 책을 읽을 때, 저자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늘 궁금해 한다. 에코는 바우돌리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역사의 객관성과 진실성에 대하여, 아니면 바우돌리노를 통한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에 대하여... 어쩌면 에코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엄청 복잡하군. 그저 단순히 이야기 자체를 즐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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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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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짐 콜린스 & 제리 포라스 지음, 워튼포럼 옮김 / 김영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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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타이틀, 그러나 비전있는 내용]

유사한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의식한 다소 상업성이 강한 타이틀(원제는 Built to Last)을 달고 나온 이 책은 내게는 관심 밖이었다. 아무리 언론에서 평가가 후하게 내려져도. 하지만 얼마전에 후속작인 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고는 상당히 매료되어서 전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 갔었지만, 마침 한권 있던 책의 상태가 불량하여 대출이 안되는 바람에 서점에서 구입하려 했는데, 구판이 절판된 상태라 몇 달을 기다린 후에야 신판을 구입할 수 있었다. 발간순으로는 역순이지만, 에서 저자는 내용상으로는 이 책이 먼저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좋은 기업을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시키기에 앞서 과연 위대한 기업은 무엇이며 그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답이 이 책이다. 여기서는 ‘위대한 기업’을 ‘비전 기업’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물론 반드시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18개의 비전 기업을 선정한 후, 비교 기업군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조목조목 분석해 나가는 방법이 후속작과 매우 유사하다. 여기서 잠시 두 저작의 주요개념을 잠시 열거해 보자.

Good to Great- 단계5의 리더십, 사람먼저 다음에 할일, 냉혹한 사실을 직시하라, 고슴도치 컨셉, 규율의 문화, 기술 가속페달, 플라이휠. Built to Last- 시간을 알려주지 말고 시계를 만들어 주어라, 이윤 추구를 넘어서, 핵심을 보존하고 발전을 자극하라,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 사교같은 기업문화, 많은 것을 시도해서 잘되는 것에 집중하라,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진, 끊임없는 개선 추구. 여러 부분에서 흡사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시계를 만들어 주어라’와 ‘내부에서 성장한 경영진’은 ‘단계5의 리더십’에 연결된다. 즉, 카리스마적 경영자 한 사람에 의존해서는 결코 위대한(비전) 기업이 되지 못하며, 조직의 가치,비전,사명을 체득한 외부인사가 아닌 내부경영자가 기업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끊임없는 개선 추구’와 ‘핵심을 보존하고 발전을 자극하라’는 ’플라이휠‘ 개념으로 연결된다. 기업의 핵심가치,사명 등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변화를 거부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며 그 틀내에서 발전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한때의 성공에 안주하면 파멸의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와 ‘냉혹한 사실을 직시하라’는 어떠한가. 또한 ’많은 것을 시도해서 잘되는 것에 집중하라‘와 ’고슴도치 컨셉‘도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즉 비전 기업이든지 아니면 위대한 기업이든지 명칭에 관계없이 소위 성공한 기업이 갖추고 있는 모습은 다른 기업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한끗 차이에서 기업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겠다. 이 책은 일반적 경영서와는 달리 통시적 시각에서 다수 기업을 분석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 물거품처럼 명멸하는 수많은 기업체 중에서 장시간을 성공적으로 생존하는 기업을 세우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까하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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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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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
에르네스트 르낭 지음, 신행선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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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민족국가, 그리고 국민과 국민국가의 경계]

책세상문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읽어 보지는 않았다. 굳이 어설픈 변명을 하자면 아직은 국내 사회과학계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개인적 편견 탓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고전의세계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선택이 쉬웠다. 고전이란 용어가 이미 내용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부여하는 데다,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저작을 가볍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에르네스트 르낭이 누구인지 표지만으로는 알지 못했다. 약력을 보고서야 <예수의 생애> 저자였음이 어렴풋할 정도이니. 새삼스레 19세기 인물의 글을 시리즈 제1편으로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민족’에 관한 글을. 출판사에서는 아직도 ‘민족’에 관한 르낭의 논의가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데올로기가 약화된 요즘, 민족 또는 문명 등의 요소가 글로벌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요소로 부각되는 것과 관련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 아래에서는 간단하나마 르낭의 글에 대한 나름대로의 느낌과 생각을 정리한다.

1. 독일 통일에 대한 프랑스의 부정적 역할-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서 르낭은 소위 보불전쟁을 일으키는데 프랑스의 잘못도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일처럼 문명화되고 지적 정신이 충만한 민족이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함에도 프랑스는 독일에 지속적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프랑스에 적대적 통일분위기가 조성되는 실책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주장이다. 한편 르낭은 독일과 프로이센을 구분하여 비록 프로이센 같은 비독일세력에 의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독일에 의하여 흡수되기를 바라고 있다.

2. 유럽 공동체 개념- 한편 프로이센의 봉건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에 우려를 보내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원만한 관계유지가 문명사회의 진보를 위하여 매우 긴요함을 강조한다. 전쟁중인 양국 관계가 어떤 식으로 종결되더라도 그 파급효과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이러한 갈등과 위협요인을 억제하기 위하여 유럽의 개입 즉, 유럽합중국의 구성과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마치 20세기 후반의 유럽연합을 예견하는 듯하여 놀랍기까지 하다.

3. 민족 개념과 구성원의 의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르낭은 전통적으로 종족, 언어, 종교, 지리 등에 의한 민족 구분 개념을 비판하고, 구성원들의 동의 내지 결집하고자 하는 의지야말로 민족 개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글의 흐름을 생각해 본다면 매우 타당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언급한 해제를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의아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다.

4. 민족과 국민의 구분- 학교 수업 또는 여러 책들을 통해 파악한 민족의 개념은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것이다. 즉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지니는 인간 집단을 대개 민족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르낭은 구성원의 결합의지를 더욱 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경험과 문화를 달리 하더라도 결합의지만 존재하면 같은 민족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스위스는 또는 미국은 민족국가인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연방국가이다. 역사서에서는 서양의 근대이후 국가체제를 국민국가로 이해하고 있다. 즉 국가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지방분권적인 봉건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국민국가로 넘어간다. 국민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소속의지 또는 결합의지이다. 히스패닉계 미국인과 중국계 미국인은 다른 민족이지만, 같은 국민이 가능한 것이 바로 앞에서 연유한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매우 불명료한 것으로 여겨진다.

5. 생물학적 인종주의 대 문화적 인종주의- 본문에는 없지만 해제에서 르낭의 사상이 갖는 인종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르낭은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인종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생물학적으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은 차이가 없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는 존재한다. 백인종이 황인종과 흑인종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백인종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유대인은 백인종과 황인종 중간에 위치한다. 르낭은 당시 지성인들처럼 다윈의 진화 개념을 받아들여 이와 같은 개념체계를 정립한 듯싶다. 그러나 르낭이 어떠한 방식으로 문화적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든 결국 근대적 사고체계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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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2.12.31에 쓴 글을 마이페이퍼에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