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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신화와 전설
찰스 스콰이어 지음, 나영균.전수용 옮김 / 황소자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출간된 지 한 세기가 넘는 이 책이 켈트 신화에 대한 대표적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기독교의 영향 아래 쇠잔하던 신화의 그림자가 급격한 근대화로 절멸의 단계로 접어든 데 연유할 것이다. 새로운 신화와 전설의 발굴은 고사하고 현존하는 유산도 사라질 판국이 된 게 아니겠는가?
켈트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그 영역은 유럽의 서부와 중부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켈트 문화는 로마제국과 게르만족 이동 이전 유럽 문화의 원형이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싸운 대상이 바로 골족이라는 프랑스의 켈트인이었다. 오늘날 켈트의 뼈대는 사라졌지만 그 본질은 문학과 예술에 끊임없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이성 우위의 서양사상에서 켈트는 “환상과, 해학과, 시 그리고 비논리성을 혼합”(P.10)한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 예술에 깊은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현대의 판타지 문학과 게임 등에서 상상력의 보고 구실을 하고 있다.
켈트의 흔적은 아일랜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에서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선대와 당대의 신화 단편들을 취합하고 종합 정리하여 그야말로 켈트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켈트 신화는 남유럽의 그리스 신화, 북유럽의 게르만 신화와 대등하게 자신의 자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켈트 신화를 단번에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것은 동일한 켈트의 신을 지칭하는 명칭이 지역별로 대단히 다양하다는 점에 있다. 귀디온과 아서의 간격은 너무 멀다.
“게일계나 브리튼계의 켈트족들은 군소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각각은 근본적인 개념들은 같으면서 다른 이름으로 육화시킨 자기 지역의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P.300)
또한 켈트 신화의 특색은 인간이 신을 정복한다는 점에 있다.
“신들을 정복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켈트족 이야기이다. 게일 신화는 그런 이야기를 상세히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신화이다.” (P.117)
그리스 신화를 보면, 인간은 의지나 품성, 행위에 관계없이 신의 변덕에 운명이 좌우된다. 신에게 상처라도 입힐 수 있는 경우는 트로이 전쟁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켈트에서는 신이 너무 쉽게 죽음을 맞는다. 영생불사의 신 개념이 아니다. 신은 적대 부족과의 전투, 또는 신들 간의 다툼에서 목숨을 뺏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인간과의 싸움에서도 역부족이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가 생경하면서도 대단히 흥미롭다. 투아하 데 다난과 포모르인들의 투쟁에서 비롯하여 헤라클레스에 비견되는 ‘쿨란의 사냥개’ 쿠훌린의 위업, 핀과 추종자 페니안의 전설 등.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서왕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다. 원탁의 기사로 알려진 아서왕에 대하여 저자는 이것이 이교도 신을 인간화시킨 대표적 사례로 보고 있다. 켈트 신화에서 아서는 비교적 후대의 신으로서 그는 위대한 신 귀디온의 계승자이며,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 오딘에 해당된다. 아서왕 뿐만 아니라 원탁의 기사의 등장인물 모두가 선대 켈트의 제신들이다. 후대에 세속화,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신들이 각기 왕과 기사로 신분이 격하된 것이다.
브리튼족의 아서, 귄휘바르(기네비어), 메드라우트의 전설은 게일족의 아이렘, 에탄, 미처르의 이야기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P.303). 게일족의 신화는 밤과 낮의 투쟁, 여름과 겨울의 대결, 삶(빛)과 죽음(어둠)의 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아서왕의 전설을 진부한 영웅담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서왕의 전설은 기독교와 연관되어 성배 탐색으로 이어져 서양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된다. 저자는 성배의 원형을 켈트족의 마술 가마솥에서 찾고 있다. 브란과 쿠훌린, 아서의 공통점은 그들이 가마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쿠훌린과 아서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 그것을 획득하였다. 원탁의 기사들은 성배를 찾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퍼시발 경은 민족을 뛰어넘어 중세 독일에서 파르치팔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갈라하드 경은 괄하메이 즉, 가웨인 경에 다름아니다. 모두 후대 아서왕 전설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의 주요 인물들이다.
성배 이외에도 켈트 신화는 무수한 문학과 예술 작품을 낳았다. 바그너의 악극으로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아서왕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에게 세계를 양보하고 언덕의 집으로 물러난 신들은 왜소해져 요정이 되었는데, 스펜서와 셰익스피어는 켈트의 자산을 바탕으로 불후의 걸작을 후대에 남겼다.
이제 켈트의 신들은 몰락하고 멸망하였으며 그들의 종교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박은 켈트의 영혼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서양의 각종 축제와 기념일(오월제, 할로윈 등), 진정한 의미를 감춘 제의적 행위들, 자연숭배의 관념 등은 모두 켈트 신화의 유산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