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거울
그레이엄 핸콕 지음, 김정환 옮김, 산타 파이아 사진 / 김영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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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과 경영학]

핸콕의 새 저작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일찌기 <창조의 수호신>과 <신의 지문>을 통하여 핸콕은 기존 고고학의 역사 추론에 대한 강력한 반대가설을 제시하였다. 그것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전개하여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듯한 기분이었다. 그 두 권 이후에 나의 관심은 한동안 핸콕을 잊고 있었다. 새삼  그의 저서목록을 뒤적거리니 <신의 거울>이 수년전에 출간되었구나. 부랴부랴 도서관에 가서 대출받았다.

핸콕의 관심이 여전히 사라진 고대문명에 닿아 있다. 그는 고대문명의 유산인 거석문화가 통설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엄청난 건축학 지식 뿐만 아니라 정교한 천문학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이집트에서 캄보디아를 거쳐 태평양을 지나서 안데스에까지.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태양과 지구의 운동, 특히 지구의 세차운동이다. 거석유적의 위치와 배치는 모두 천상의 별자리를 반영한 것이다. 하늘의 사자가 땅의 스핑크스로, 하늘의 용은 땅의 앙코르와트(뱀)으로 등등.

하늘의 신비를 땅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사후세계와 연관이 있음이 틀림없다.

핸콕의 주장을 뭔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신비롭고 찬란하면서도 엄청난 스케일로 일상을 벗어난 그 무엇. 순간 <장자>의 붕새가 스쳐 지나간다.

지금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핸콕의 저서를 접하지만, 아득하게 여겨지는 학창시절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고고학과 역사학 등에 몰입한 적이 있다. 밤을 새워가며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며 무한한 기쁨으로 눈이 피곤한 줄 모른채 밤을 지새우고는 했는데..

세월의 때와 더불어 영혼의 더께도 나날이 두터워지고 있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속으로 재보고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두들겨 확인한다. 그것이 현명한 처사로 당연시 된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썹 한줄 찌푸리지 않고 등을 홱 돌린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은데, 비이윤적인 행위에 시간낭비하면 안된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시간을 나누고 짤라서 원자 단위까지 쪼개고 우리 자신은 시간의 로봇인 된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몰상식하고 무책임한 공공의 적이다.

경영의 논리, 이윤의 논리가 현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다움을 주장하는 행동은 경제에 마이너스를 가져오기에 자제하여야 한다. 경제를 위해서라면 간과 쓸개를 모두 내놓고 인간이기를 유보해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힘인가, 아니면 물신주의의 악령인가. 사회가 물질적 풍요로 넘쳐날때 정신적 공허도 정비례하여 늘어난다. 누가 있어 영혼에 깊은 범종을 울리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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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3.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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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최근 경영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브랜드 네이밍의 원리를 작가들은 진작에 깨우친 듯 싶다. 고금의 명작을 훑어보면 표제에서 풍기는 묘한 암시와 흥미가 독자의 눈길을 두번 사로잡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타이틀에서 벌써 절반은 먹고 들어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얼마나 형이상학적이면서도 독자의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제목인가.

쿤데라의 초기작인 <농담>에서 파악했듯이 그의 주요 작품 모티브는 농담, 실수, 우연 등이다. <농담>에서는 농담이었고, 이 작품에서는 그 역할을 '우연'이 대신한다.

토마스가 테레사와 개인사적 조우를 한 것은 무려(!) 여섯번의 우연이 거듭된 결과이다. 본인의 말마따나 마침 외과과장의 건강만 좋았더라면, 그 호텔에 묵지 않았더라면, 기차시간을 맞추었더라면 결코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섯번의 우연 덕택에 그들은 일생을 같이하는 끈에 연결되었고, 이것이 그들의 생을 이끌었다.

토마스는 바람둥이다. 그가 여성관리에서 예외를 인정했던 것이 테레사였다. 글쎄, 테레사가 사비나보다 토마스에게 적합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게 나의 견해다. 어쨌든 그는 테레사를 선택했고, 사비나는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프라하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토마스와 테레사가 프라하로 돌아갔던 것과 대비된다.

그들의 삶이 행복했었는지는 캐묻지 말자. 적어도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으로는 보인다. 토마스와 테레사가 필연의 짐을 버리고 우연의 가벼움을 받아들였다.

인간의 생이란 참으로 우연적 현상이다. 무수한 많은 가능성 중에 하필이면 바로 이것이 발생한 것은 필연(선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또한 우연인 것이다. 우연이 하나, 둘, 셋, ... 이렇게 쌓여서 보편성과 타당성을 획득하여 필연으로 전화한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다.

인간의 역사와 개인의 존재는 우연으로 구성되었고, 우연은 천체의 무중력상태만큼이나 가볍기 그지없다. 찰나적 가벼움에서 우주적 무거움이 배태되었다.

그대라면 존재의 가벼움(우연성)을 참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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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5.1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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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과 우연, 그리고 인간]

여러분은 농담, 우연, 실수와 같은 어휘들에서 어떤 동질성을 유추해 낼 수 있겠는가. 보통의 경우라면 의도가 반영되지 않은 탓에 결과 이행을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 일상성의 한 흔적 정도. 하지만 우리는 이미 프로이트를 겪었다. 정신분석의 깔때기를 통과하면 농담, 실수 등은 더이상 본래의 면책특권을 향유하지 못한다. 더구나 그것이 사회적 파장을 촉발하고 역사적 사건으로 귀결될 경우에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제목 자체가 작가의 주제의식을 드러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배경은 체코 공산시절. 대학생인 주인공 루드빅은 공산당 청년위원으로서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엽서에 장난삼아 불온한 문구를 적어 보낸다. 그리고 반공주의자로 낙인찍혀 사회의 바닥으로 내팽개쳐진다. 그는 그것이 단지 농담이었음을 주장하나 반응은 냉담할 뿐이다.

회의주의자 루드빅은 진정 죄가 없을까. 프로이트라면 유죄를 선고했을 것이다. 그의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루드빅은 군대로 쫓겨나 탄광에서 몇년간 광부로 일한다. 그리고 간신히 허가를 엉어 복학하고 과학자가 된다. 헬레나는 그를 추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동료의 부인이다. 야로슬라브는 루드빅의 죽마고우로서 전통음악의 대가이지만, 점차 루드빅과 사이가 멀어진다. 소설은 章을 달리하여 이 삼자의 삶을 모습과 내면을 그리고 있다. 루드빅은 헬레나를 농락하려고 했지만, 헬레나는 그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느낀다. 야로슬라브는 전통음악의 순수성이 쇠퇴함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파란만장한 인간 군상들의 인생은 루드빅의 농담 하나로 엄청나게 요동을 쳤다. 만약 그가 농담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름대로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고, 야로슬라브와의 관계도 소원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헬레나와의 설킨 인연도 맺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농담을 한 루드빅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옳을까? 사람은 습관적으로 농담을 한다. 농담의 가치을 찬양하는 글은 찾기란 쉽다. 의학적으로도 농담은 건강에 유익하다. 물론 과도하지 않는 범주내에서. 루드빅이 농담을 한게 잘못이라면, 우리는 모두 엄숙한 표정의 철학자로 인생의 역정을 헤쳐나가야 함이 마땅하다.

왜 역사는 개인의 농담 한마디를 관대하게 용인하지 못하는가.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나약한 개인에게 어쩌자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가. 사회와 역사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가치란 어떤 의의와 비중을 차지하는가. 역사의 우연으로 인하여 개인의 삶이 얼마나 굴곡을 겪게 되는가.

작가의 이런 관심은 이십년 가까이 경과한 후 발표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관통하는 모티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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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5.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겅호!
켄 블랜차드,셀든 보울즈 지음, 조천제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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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해당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책이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잠시 짬을 내어 훑어 보았다.

겅호(工和)는 일종의 구호다. 예전에 이면우 교수가 W이론을 주창하면서, 신바람나는 직장만들기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바로 겅호가 신바람나는 직장, 보람있는 회사를 만들기 위한 구호이다.

책의 핵심 내용은 간명하다. 다람쥐의 정신, 비버의 방식, 기러기의 선물.

다람쥐의 정신은 직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과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의와 가치있는 결과를 올바로 인식한다면, 업무에 임하는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비버의 방식은 직원들이 업무에 대한 자율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단지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일에 대하여는 권한과 자율을 위임받을 때, 책임의식도 높아지게 된다. 업무에 대한 자세가 능동적이 됨은 당연하다.

기러기의 선물은 경영자와 직원, 직원 상호간에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저자의 후작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로 등장한다. 부정적인 피드백보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재론하기에는 입이 아프다.

이렇게 단순한 지혜를 아는 것과 실제 기업에 적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일대 베스트셀러이지만, 많은 적용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별로 없다. 너무나 자명해서 그럴까. 아니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인간관은 소위 Y이론에 가깝다. 하지만 대다수의 기업은 여전히 X이론을 선호한다. 그래야만 경영층에서 감독과 통제를 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상대적 우월감을 향유할 수 있다. 양치기가 채찍과 개로 많은 양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처럼. 가끔씩 털을 깎으며, 시원찮은 양은 도살하여 고기로 팔고 그 자리는 새로운 양으로 대체한다.

인간사에 진리가 없어서, 도덕론이 부재하여 모두가 善人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2,000여년 전에, 불경은 그야말로 수천년 전부터 도덕을 설파하였다. 여전히 현대사회는 혼란과 패륜이 난무하고 있다. 경영학 관련 서적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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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6.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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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이국의 삶과 자연을 접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다. 더구나 그 이국이 가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가기 어려운 완전한 미지의 세계라면 관심은 더더욱 증폭되기 쉽다.

20세기 초, 티벳이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있을 당시 그들은 철저한 쇄국정책을 펼쳤단다. 왜 그랬을까. 많은 서양인들이 티벳을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모두 퇴출당하고 만다. 이때 한 여성이 용감하게 티벳에 들어가서 수도 라싸까지 순례하고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그 여성의 기록이다.

처음엔 단지 겉멋들린 사람의 자기자랑이라고 간주했다. 揚名하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내재된 욕망.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티벳인보다 더 철저히 티벳인이었다. 완벽한 현지어 구사에, 깊은 문화적 이해를 지니고 있었다.

대다수의 기행기들은 이방인이 자신의 기준에서 현지인들의 독특한 문화를 신기하게 묘사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현지인들에게 그들은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비드 넬은 완전한 현지인으로써 그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흔치 않는 일이다. 똑같이 티벳인이기에 그들은 아무거리낌없이 부끄러움과 숨김없이 그들의 일상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80여년전의 티벳 산야와 사람들이지만, 산천은 의구하겠으나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을까. 중국에 병합된지 수십년 여전히 달라이 라마는 외국을 전전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그들에게 어떤 변화를 안겨주었는지 궁금하다. 중국은 호기심이 가득찬 세계이며, 더구나 티벳, 신강자치구 등은 실크로드의 신비와 함께 궁금함의 극치를 자아낸다.

언제나 눈에 모든 것을 담아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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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4.6.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