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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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를 계기로 임진왜란과 이순신에 관련된 책을 계속 읽게 된다. 출발이 어떠하든 양서를 두루 접하기만 한다면 나름대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순신과 뗄래야 뗄수 없는 중요한 존재인 유성룡, 이순신이 '난중일기'로 인간의 비극을 기록했듯이 그도 역사의 참화를 '징비록'에 담아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고는 각각 국보 76호와 132호로 보답받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중요한 선택의 결과로 비롯된다. 따라서 후세인들은 그당시 다른 선택이 이루어졌다면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상상하곤 한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도 이러한 상상의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을때, 당시 임금을 비롯한 조정에서는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태평성대에 무슨 연유로 군비를 강화하자는 것인가. 사림에서 율곡의 지위 때문에 그 정도로 끝났지 다른 이였더라면 필시 돌에 맞아 저 세상으로 여행갔으리라. 유성룡도 십만양병설에 반대한 이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율곡과 서애를 결코 동급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서애가 당시 관료들보다 뛰어났던 점은 뒤늦게나마 전화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대응에 부심하였던데 있었다.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이 정반대라는 점은 두고두고 우리를 당혹케 한다. 그들이 방문하고 살펴본 왜국은 서로 다른 실체였던가. 이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준이자 한계였고 조선왕조가 나라를 잃을뻔한 위기에 처한 배경이기도 하다.

징비록을 처음 펼쳐든 것은 아니다. 소년시절에 청소년용으로 윤색된 형태로 접하였던 기억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위기에 처하면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평시에는 그렇게나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신료들이 왜적의 소문만 듣고도 이미 도시가 텅빌 지경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불과 보름여만에 선조를 피난케 만들었던데서 당시 나약한 조선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더구나 보병들이. 지금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로 보름정도가 소요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왜군은 거의 무인지경을 가듯이 국토를 휩쓸었던 셈이다. 그리고 당대의 명장이라 일컬어지던 신립이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 평야에서 완패한 어리석음. 적은 병력으로 스스로 총알받이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을까. 새재에서 끝내 막아내지는 못하였더라도 시일이라도 지체시켰다면 전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임진왜란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새삼 한국전쟁과의 유사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거에 밀려서 거의 패망 일보직전까지 이른 점. 외국의 원군을 받아서 간신히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게 된 점. 평화협상과 동시에 곳곳에 소모전이 벌어진 점. 두번째 파상공격이 있었던 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방비에 소홀한 결과는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국토의 유린, 그리고 외국에 의존하는 주체성의 상실이었다.

일국의 정승인 유성룡이 명나라 장수 앞에서 비를 맞으면 무릎꿇고 비는 장면에서 가슴속에 뜨거운 울분이 솟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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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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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7
이순신 지음, 송찬섭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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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간 이어온 이순신과 임진왜란 집중독서의 마지막이다.

'난중일기'에 대하여 모르는 우리나라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뇌리 속에 이순신 장군은 신화적 존재로서 굳건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은, 비단 학교와 가정에서의 교육적 세뇌 작업에 귀인되지는 않는다. 전쟁은 영웅을 낳는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대첩의 탁월한 전략과 명량대첩의 불가사의, 그리고 그 드라마틱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숨길과 눈길을 한시도 놓아주지 않는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로 시작하는 시조 한 수, 왜적의 총탄을 맞아 스러져가면서 남기는 최후의 한 마디. 그것을 눈물 한 자욱없이 스치는 사람은 아마도 감수성이 바닥을 드러낸 사람으로 치부된다.

그래서일까. 영웅적 이순신 상에 대한 외경심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이순신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화폐에 나오는 그럴듯한 도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속에 어떤 인간적 감정이 개입할 수도 없다. '성웅'이라는 단단한 외피 속에 갖혀있는, 그래서 존경하지만 친근하지는 않는 존재, 그것이 작금의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순된 감정인 듯싶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연약하고 인간적인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피 한방울 나지않는 냉철하며 카리스마적 위인이 아니다. 수시로 병마에 끙끙 앓고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약하디약한 육체를 지닌 인간. 가까운 사람들, 특히 어머니와 막내아들의 죽음에 통곡하며 스스로를 원망하는 따뜻한 인간애. 자신을 모함하고 터무니없이 일처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솔직한 감정의 토로. 그것은 우리같은 평범한 이들이 일기장에 적어놓는 내용과 똑같은 것이다. 더우기 일기에는 전쟁에 관한 중요한 내용 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도 적혀있다. 누구에게 쌀 몇 말을 주었다는 것, 타고다니는 말이 병들어 죽어 묻도록 하였다는 것, 아무개가 병들어 마음이 아프다는 등 이 모두가 이순신이라는 석 자를 제외하면 눈여겨보지 않은 장면들이다. 하지만 바로 이순신 장군의 전쟁중 기록이기에 더할 수 없는 가치가 포함된다. 이순신 장군은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오래도록 명성만이 높았으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난중일기'. 청소년본으로 접한 이후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 읽는다. 노모의 죽음에 "어서 죽게 해달라"며 통곡하고, 내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듣고 탄식하며 "내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지경을 당한다는 말인가?"하는 부분에서는 절로 눈앞이 뿌여진다.

소박한 인간의 모습, 바로 그것이 '난중일기'에서 발견하는 이순신의 진면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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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2.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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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도에 이어 두번째로 구입한 이상문학상작품집이다. 솔직이 작년도는 그렇게 썩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만큼 내 감성이 메마른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금년도의 경우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보다도 대상 작가가 젊다는 것이다. 정확히 하자면 나와 동년배라는 데서 오는 일종의 유대감이라고 하겠다.

'몽고반점'을 맞닥뜨리며 우선 소재의 파격성이 눈에 띈다.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처제와 형수의 정사"라는 근친상간적이며 도발적인 소재를 작가가 어떤 식으로 문학적 승화를 이루어냈을까. 자칫 피상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겠다. 그 경우 소위 야설이라 불리는 통속적 부류와 차이점이 없게 된다. '몽고반점'은 너무나 스토리텔링 이데아에 충실하다. 술술 매끄럽게 읽혀지는 장점 외에 문체와 표현이 한 폭의 화려한 채색화를 연상시킨다. 눈앞에 영상시각적 이미지가 확 펼쳐진다.

예술가의 극한적 표현욕을 추구하는 작품에는 과거에도 몇 편 있었다. 해설에서 언급하는 '서편제'와 '광화사'도 있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한 작품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이다. 그 끝간 데를 모르는 처절한 몸부림은 '몽고반점'의 '그'가 '처제'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이념과도 일맥상통한다. 대신 그 댓가는 파멸이다.

인상적인 작품을 덮은 후 혹시 작가가 센세이셔널리즘에 의존하는 유형이 아닐까 잠시 이력을 살펴보았다. 이미 각각 두 편의 작품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한 나름대로 역량을 갖추었다는 느낌에 안도의 심호흡을 하며 문득 작가의 또다른 작품들을 접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대상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탓일까. 다른 우수상 수상작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재미만으로는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와 '표정 관리 주식회사'가 나아보인다. 다만 그것이 순순한 재미가 아니라 씁쓸함을 동반하는 데서 이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세 번째 유방'과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힘들고 암울했던 지난 시절을 상기시켜 준다. 특히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비록 짧으나마 나의 한때의 고시원 생활을 떠올려 공통의 체험의식이 갖는 끄덕거림의 미학이 있다. '세번째 유방'은 보기드문 레즈비언적 소재를 살짝 건드리고 있어 이채롭다. 또한 '너'라는 2인칭 화법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점은 성공적이진 못해도 의의있는 도전이라고 칭하고 싶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는 TV와 현대인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데, TV와 '나'와 '그녀'가 엮어내는 변주가 썩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서두에서 연상시키는 '장자의 나비', 그리고 '나비'의 화려함과 경박함을 통한 현대문명 비판은 참신하다.

'도시의 불빛'은 잘 이해되는 편은 아니다. 난해성이란 면에서 오히려 현대소설답다고 평할 수 있으리라. 대면을 피하고 전화로, 네트워크로만 사람 관계를 소통하는 현대의 특성을 비판한 것인지 아니면 긍정한 것인지 어렵다. 특히 '수영'에 관해서는 해설을 읽고서야 비로소 동명이인을 알았을 정도이다. 이러한 기법의 효과성이 나같은 단순 독자를 헷갈리기 위한 시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이 사상서가 아닌 이상 독자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무시해서는 안되지 않나 싶다.

전년도의 작품집을 들고 책장을 넘기면서 마주친 당혹스러움이 올해는 상당히 많이 가셨다. 그동안 여러편의 소설책을 섭렵한 보람이 있어 기쁘기조차 하다. 단편소설 분야에만 국한하면 참으로 우리 작가들의 역량은 너무나 뛰어나다고 한다. 더욱더 매진하는 동시에 장편에도 많은 성과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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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3.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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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다 극찬을 아끼지 않는 문학 작품에 대하여 나는 동감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혹시 내가 작품을 잘못 대한 건 아닐까 하는 자문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학적 감수성이 겨우 요것밖에 되지 않나하는 자기반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응이 나올 것이다. 또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는 행위에서부터 머리를 쥐어뜯는 행동까지 자학의 형태도 색색이리라.

내 경우가 바로 이러하다. 파울로 코엘료, 수년전부터 국내를 휩쓴 소설가. 대중적 지지도와 평단의 호의적 언사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작가이다. 그런 그의 작품을 나는 이제 처음 접한다. (작년 중반에 잠깐 '연금술사'를 읽은 적은 있었지만)

대개 소설을 완독하게 되면, 찐한 여운이 남는다. 때로는 가슴벅찬 감동일 수도 있다. 아니면 불의에 대한 울분과 주인공에 대한 애처로운 심경이기도 하고. 또는 단순히 슬픈 감정에 눈앞이 시큰해진 적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전혀 그게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장을 다 덮어도 아무런 뒷맛이 나지 않는다. 아무 언급할만한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십대 초반의 한창 나이에 자살을 시도한 젊은 여성. 자살 후유증으로 심장 이상으로 일주일 후에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이 일주일을 보내면서 삶의 의의에 대해 자각하고 한 남자와 정신병원을 탈출한다는 스토리. 사실 여성의 죽음 예고는 의사의 놀라운 실험이었다는 뜻밖의 반전. 이것이 줄거리로만 본 작품이다. 더구나 작품의 주제도 단 한문장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것도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도록 작중에 저자의 입을 빌려서, 친절하게도.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한다" (296면)

요는 이러한 주제의식과 스토리를 어떻게 하나의 유기적인 요소로 엮어서 문학적 승화를 달성해 내는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는다는 게 나의 대답이다. 이것이 작품 또는 독자의 수준이 낮다는 표현은 아니다. 단지 취향의 차이라고 언급하고 싶다. 지식의 영역에서는 불멸의 진리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감성의 영역은 사정이 다르다. 만인이 좋다는 것도 홀로 싫어할 수도 있고, 그것이 허용되며 때로는 존중되기도 한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는 괜찮은 듯 다가왔지만, 이 작품은 전혀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이 말로 끝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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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3.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참 우리 고전 4
홍대용 지음, 김태준.박성순 옮김 / 돌베개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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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주의의 발로였던지 아니면 실리외교의 적극적 활용인지는 모르나 고려 이래로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지속하였다. 고려는 송과 원에, 그리고 조선은 명과 청에.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개인적 출장이 아닌 공무상 출장은 항상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의무화되어있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통하여 각종 중국출장보고서가 많이 남아있으며, 또 비공식적인 여행기도 다수 존재한다. 이는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했던 당시의 조선 지식사회와 백성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세계여행기를 읽으며 상상력과 탐험심에 불을 밝혔듯이.

홍대용은 북학파의 선구자적 존재다. 성리학의 공허함에 대한 비판이 실학의 등장배경이므로 '실사구시'야말로 그들의 모토이다. 단순한 중국 여행기가 아니라 실학자의 눈에 담긴 중국이기게 더욱 관심이 간다.

<을병연행록> 전체가 번역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이렇게 부분적으로나마 출판된 것도 요새 같은 척박한 시기에는 감지덕지일 뿐이다. 대중성과는 등돌린 이런 기획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서울(한양)에서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을 가로질러 청의 수도인 연경(북경)에 도달하여 객관에 머물다 다시 역순으로 귀국하는 과정이 물경 반년이다. 말과 때로는 가마를 타고 비포장길을 터벅터벅 걷는 모습은 불과 삼백여년 전이지만 얼마나 낙후된 시절인가를 되새게끔 한다. 육로보다는 차라리 해로를 이용하여 바로 서해를 질러가는 편이 더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아니면 능력이 없는지 모를 일이다.

당시 중국에는 서양에서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었다. 응당 천주당도 세워져 있었고 이것은 조선의 사절들에게는 커다란 관광거리의 하나였던 듯 싶다. 홍대용도 북경에 와서 천주교당 방문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더구나 그는 실학의 선도답게 과학 등 다방면에도 관심이 커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듣고 그 작동원리를 추리해내는 한편 천문대를 방문하여 서양출신 학자와 심층적인 담론을 나눈다.

이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중국선비와의 교우관계이다.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강남에서 올라온 엄성, 반정균, 육비와의 만남과 교류, 그리고 마음을 주고 받아 마침내 칭형제하는 모습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인류보편적 세계인의 열린 자세의 산풍경이다. 서로에게 아프기조차 한 충고를 서슴지 않으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놀랍다. 시와 그림과 글을 주고 받아 서로의 정표로 삼는 것이 당시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수단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특히 작별을 앞두고 눈믈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때로 의아하기조차한 게 우리들 속물의 심정이다.

홍대용은 중국이 비록 오랑캐 청에 지배당하고 있지만 그 사람과 문화는 변함이 없으므로 배우고 본받을 것은 익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실학자다운 자세이다. 반면 여전히 그에게 있어 성리학적 세계관은 너무나도 정신세계를 압도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청의 풍속을 좇아 머리를 깎고 복장을 달리하는 수치를 그는 만나는 중국선비들에게 계속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이성적으로는 화이관을 극복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화이관의 뿌리는 깊다.

우리의 고전은 항상 골치아프고 딱딱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비록 분량이 많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런 인식을 깨뜨릴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연행의 이동경로와 북경내 지도 등을 첨부하였다면 더욱 이해가 쉽고 흥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한줄기 아쉬움도 있다. 여하튼 이렇게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을 남긴 홍대용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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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4.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