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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고전으로 인정받는 문학작품들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도 20세기의 영문학 고전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또한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누구나에게 모두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격찬을 아끼지 않고 그 위대성을 치켜세우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납득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위대한 개츠비>가 내게 바로 그러하다.
이 소설이 평가받는 이유는 여럿 있다. "1920년대 재즈의 시대를 배경으로 무너져가는 아메리칸드림을 예리한 필치로 그려내었다"고 한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따분한 유형의 작품도 아니다. 그냥 덤덤하다고나 할까. 물론 1920년대 미국 뉴욕의 모습과 상류층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점에서는 유익하였다.
나 또한 제목부터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위대한'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영어의 great 이란 단어가 곧 '위대한'과 일대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닌데. 일부에서는 '돈많은'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네이버의 지식검색을 보니 많은 다른 이들도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답변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원론적이다. 자신의 순수한 꿈(이상)을 좇기 위해 전심을 다했기에 위대하다라고 했다는...설득력이 없다.
개츠비가 선한 캐릭터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는 부자집으로 시집간 옛 애인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단기간 내에서 성공하기 위해 불의와 타협했으니, 금주법을 어기고 밀주사업을 하거나 증권조작 등에도 개입했다. 덕분에 그는 큰 돈을 벌었으니 어쨌든 일차적 목표는 성공한 셈인가.
또 톰과 데이지가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캐릭터인가에 대하여도 궁금하다. 세속적인 면이 잘못이라면 모르겠으나 가난한 군인보다 상류층 남자를 택한 것은 현시점에서도 타당성이 있다. 더우기 부부관계가 화목하지는 않지만 아이도 있는데, 옛 애인이 찾아와서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을 요청한다고 해서 그리 쉽게 넘어갈 여자도 없으리라.
이 소설이 소위 아메리칸드림(현대의 아메리칸드림이 아니니 오해말기를!)이라는 주제 뿐만 아니라 기법면에서도 정말로 뛰어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예술적 감동과 연결되지 못하면 헛수고가 아닐까. 기술자는 되겠지만 예술가는 못되는..
서두의 시에서 언급하였던대로 차라리 <황금모자를 쓴 개츠비>였다면 보다 그럴듯 했으리라. 꿈과 사랑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한 가난했지만 지금은 부유해진 젊은이의 사랑과 좌절이라는 플롯과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이것을 미국을 건설한 원동력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며 그것을 '아메리칸 드림'으로 추켜올리는 것은 금물이다.
개츠비는 자신을 지탱한 꿈을 상실하였다. 그것은 데이지의 망설임 탓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서다. 총에 맞지 않았더라도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는 없으리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과 꿈에 매달려 오늘을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과거는 뿌연 안개에 휘감긴 채 우리를 아련한 저편으로 몰고 간다. Belle epoc 라고 했던가. 화자인 나, 닉 캐러웨이가 깨닫고 실망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일종의 성장소설로 파악했다는 해설의 평론가와 의견을 같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