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참 우리 고전 4
홍대용 지음, 김태준.박성순 옮김 / 돌베개 / 200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대주의의 발로였던지 아니면 실리외교의 적극적 활용인지는 모르나 고려 이래로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지속하였다. 고려는 송과 원에, 그리고 조선은 명과 청에.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개인적 출장이 아닌 공무상 출장은 항상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의무화되어있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통하여 각종 중국출장보고서가 많이 남아있으며, 또 비공식적인 여행기도 다수 존재한다. 이는 새로운 정보에 목말라했던 당시의 조선 지식사회와 백성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세계여행기를 읽으며 상상력과 탐험심에 불을 밝혔듯이.

홍대용은 북학파의 선구자적 존재다. 성리학의 공허함에 대한 비판이 실학의 등장배경이므로 '실사구시'야말로 그들의 모토이다. 단순한 중국 여행기가 아니라 실학자의 눈에 담긴 중국이기게 더욱 관심이 간다.

<을병연행록> 전체가 번역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이렇게 부분적으로나마 출판된 것도 요새 같은 척박한 시기에는 감지덕지일 뿐이다. 대중성과는 등돌린 이런 기획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서울(한양)에서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을 가로질러 청의 수도인 연경(북경)에 도달하여 객관에 머물다 다시 역순으로 귀국하는 과정이 물경 반년이다. 말과 때로는 가마를 타고 비포장길을 터벅터벅 걷는 모습은 불과 삼백여년 전이지만 얼마나 낙후된 시절인가를 되새게끔 한다. 육로보다는 차라리 해로를 이용하여 바로 서해를 질러가는 편이 더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아니면 능력이 없는지 모를 일이다.

당시 중국에는 서양에서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었다. 응당 천주당도 세워져 있었고 이것은 조선의 사절들에게는 커다란 관광거리의 하나였던 듯 싶다. 홍대용도 북경에 와서 천주교당 방문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더구나 그는 실학의 선도답게 과학 등 다방면에도 관심이 커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듣고 그 작동원리를 추리해내는 한편 천문대를 방문하여 서양출신 학자와 심층적인 담론을 나눈다.

이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중국선비와의 교우관계이다.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강남에서 올라온 엄성, 반정균, 육비와의 만남과 교류, 그리고 마음을 주고 받아 마침내 칭형제하는 모습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인류보편적 세계인의 열린 자세의 산풍경이다. 서로에게 아프기조차 한 충고를 서슴지 않으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놀랍다. 시와 그림과 글을 주고 받아 서로의 정표로 삼는 것이 당시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수단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특히 작별을 앞두고 눈믈을 흘리는 장면에서는 때로 의아하기조차한 게 우리들 속물의 심정이다.

홍대용은 중국이 비록 오랑캐 청에 지배당하고 있지만 그 사람과 문화는 변함이 없으므로 배우고 본받을 것은 익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실학자다운 자세이다. 반면 여전히 그에게 있어 성리학적 세계관은 너무나도 정신세계를 압도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알 수 있다. 청의 풍속을 좇아 머리를 깎고 복장을 달리하는 수치를 그는 만나는 중국선비들에게 계속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이성적으로는 화이관을 극복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화이관의 뿌리는 깊다.

우리의 고전은 항상 골치아프고 딱딱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비록 분량이 많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런 인식을 깨뜨릴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연행의 이동경로와 북경내 지도 등을 첨부하였다면 더욱 이해가 쉽고 흥미를 자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한줄기 아쉬움도 있다. 여하튼 이렇게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을 남긴 홍대용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4.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으로 무섭고도 도발적인 표제다. 국민으로부터 탈퇴하게 되면, 우리는 무슨 존재가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대담한 용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스포츠경기를 시작할 때, 또는 무슨 행사를 거행할 때 다른 어떤 순서보다도 먼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차례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국민의례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 제창'은 간혹 생략되는 수도 있지만, 그걸 의식적으로 빠뜨린다는 것은 굉장한 파격이요 모험이기도 하다. 국기와 국가는 바로 나와 우리의 잠재적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중심주의'와 충성을 상징하고 있다.

서구와는 달리 시민사회의 발전이라는 자연스런 역사적 흐름속에서 근대국가 형성을 갖지 못한 우리네 사회에서 국가가 갖는 지위는 남다르다. 더우기 조선의 패망 후 일제에 의하여 수십년간 식민지배를 경험하였기에 나라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체험한 백성들은 자기 한 몸을 희생하더라도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하는 마음자세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의 교육을 받아 왔고, 지금 만약 타국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전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추호도 의심한 바 없었다.

저자는 진지하게 묻는다. 개인이 먼저인가 아니면 국가가 먼저인가를. 국가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를 새삼 반문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 국가는 선험적 존재이며 무조건 정당하다고 간주된다. 오류는 정권이 저지르지 국가 자체는 가치판단에서 중립적 존재이다.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처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지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국가적 정체성이나 애국심이 개인 삶과 행복의 수단이라는 인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29쪽). 이것이 바로 작금의 우리들 인식이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일부의 향수는 바로 이러한 강력한 국가주의의 상징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의 희생을 자동적인 담보로 삼는 안보는 가짜다"(68쪽)고 외치며, 개인의 존엄과 자유가 최고의 수호될 가치임을 천명하고 있다.

국가가 최상위 가치를 지닐때 다른 가치는 그보다 작은, 무시되어도 좋은 가치로 격하된다고 본다. 성과 계급의 문제는 국가보다는 하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국가는 나와 남을 구분한다. 타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려면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쉽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는 힘과 군대가 필요하며 이는 자동적으로 남성성에 대한 숭배와 여성에 대한 무관심적 배제를 낳는다.

이런 폭발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저자에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더이상 신성하지 않다. 온국민이 열광해 마지않는 월드컵 열기조차도 매우 위험스럽게 비판받는다. 수십만명의 거리 응원과 '대~한민국'의 구호는 바로 내재된 국가중심주의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단층적으로 내보인다는 것이다. "온국민은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162쪽). 더구나 월드컵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가.

이런 유형의 논리에 대하여 반박을 해보고 싶어서 흠을 찾기 시작한다. 그래, 국가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서구적 가치체계에 입각한 편향적 비판일 뿐이다. 국가를 중시하는 게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것은 바로 국가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이것을 염두에 두었다. "근대를 아직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보는 발상은 근대적 사유의 틀에 무성찰적으로 눌러앉는 교조에 지나지 않는다"(59쪽)고 자신의 이론의 비절대적 논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문화에서 벗어난 지 일천한 우리 국민들은 여전히 그 깊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의 소중함이 국가나 집단과 대등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소위 국익을 위하여 젊은이들을 전장터로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우리가 '국민'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게 되는 그 날,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존재와 관계망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가 아니겠는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5.1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 김영사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류시화의 글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찍이 시인 류시화가 구도와 명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도 및 인디언에 관한 일련의 책을 써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펼치고자 하는 유혹은 그다지 들지 않았는데, 그건 왜였을까. 기실 이 책도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와 같이 세트로 판매하는 것을 오래전에 구입하였다가 이번에 겨우 펼쳐든 것이다.

저자가 인도여행(보다 정확히는 구도의 길이라고 해야겠다)을 수차례 하면서 체험한 일화 중 특히 가르침이 될만한 내용을 모아 놓았다. 하필 인도일까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종교와 철학이 현실과 불가분의 긴밀성을 갖고 그 생명력을 굳건히 유지하는 곳이 지구상에 인도를 제외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세계 제2위의 인구대국이며, 인도 아대륙의 광대한 영토, BRICs로 통칭되는 신흥 경제개발대국.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화두가 가장 저열한 밑바닥과 삐걱거림없이 병존하는 공간, 그게 나 아니 일반인의 인도관이다.

무엇때문에 작가가 그리 인도에 집착하고 몰두하였을까 모른다. 찌는듯한 더위가 지저분함과 결부되어 휴양지가 되기는 어려울텐데. 워낙 뿌리깊은 역사 덕택에 찬란한 문화유산은 간직하고 있을터이나 류시화의 눈에서 유형적 문화기념물에 대한 관심을 찾기는 어렵다. 그의 관심은 오직 인도의 사람들, 신과 가까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책의 글처럼 우리 모두는 인생수업을 받기 위하여 지구라는 별에 잠시 온 여행자인지 모른다. 어떤 시인은 한세상 잘 놀다 하늘로 간다고 백조의 노래를 남겼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인생은 신과 더불어 사는 삶, 도처에서 신을 발견하고 신의 뜻에 맞게 심신을 정돈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신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퉁명스러운 검표원에게 초라한 구도자가 당당하게 응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망고주스를 파는 노인은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연상시킨다.

인도라는 나라는 그동안 관심건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통적인 중국문명권도 아니고 근대화이후 서구화의 초점에서 배제되었으니 당연지사이다.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동맹국이 아니며,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저 아래 있으니 눈여겨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수많은 패키지상품이 개발되어 지면을 도배하면서도 인도 패키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개별여행객들만이 드문드문 찾을뿐.

책장을 덮고서 인도에 가볼까하는 상념이 스친다. 그건 작가가 그려낸 인도의 정경이 아름답고 화려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종전 인도의 선입관을 강화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더럽고 속이는데 능숙하며 여러모로 불편한 이미지 말이다. 그럼에도 인도와 인도인들이 궁금한 것은 오늘날 서구화의 강력한 진전으로 원자화된 우리 사회에서 잃어버린 그 무엇을 그곳에서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찾기 쉽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가능성이다. 물질의 빈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가득 채우기 열망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5.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미실 - 2005년 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라는 거창한 꼬리표를 달고 있다. 이러한 꼬리표가 도서구입의 중요한 선택기준이 되는 경우도 다반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예 작가의 일개 장편 소설이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내게도 이 꼬리표가 기준의 하나였지만, 애초에 작가 김별아와 '미실'의 이름을 접한 것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이다. 이리저리 서핑을 하는 도중 갑자기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 마광수가 등장했다". 마광수라면 웬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것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필두로 '즐거운 사라'로 필화를 입고 무수한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마광수라는 별칭을 여성작가에게 부여하다니, 금방 호기심이 생겨 도서관을 조회하니 대출중이라 그냥 구입해버렸다. 검증되지 않은 작가의 소설책은 잘 사지 않는 내 구매패턴에 하나의 예외라 할만하다.

'미실'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굳이 인용체를 사용하는 까닭은 내가 화랑세기를 읽어 보지 못하였음에 있다. 화랑세기는 김대문에 의하여 통일신라시기에 지어진 화랑의 세기, 나아가서는 신라 지배층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그동안 이름만이 전하다가 십여년전에 필사본이 발견되어 진위여부를 놓고 한동안 떠들썩한 기억을 남겼다. 그 안에 서술된 내용은 종전의 신라사회에 대한 인식을 뒤바꿔 놓을만큼 황당하다시피하였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수한 근친혼과 자유로운 성의 난립이다. 근엄한 유학자가 보기에는 황음무도하기가 이를데 없는 불순하기 짝이 없는 위서일 밖에.

그곳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 작가의 관심을 끈 여인이 바로 '미실'이다. 여성으로서의 유대감의 발로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작가가 소망하는 힘있는 여성의 이념형으로 그가 새삼 조명받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미실'에 대한 관심은 작가 이전에도 화랑세기 연구가의 호기심을 끌기도 한 걸 보면(이종욱 '색공지신 미실') 평범한 여인네는 아니리라.

역사속의 인물이야 그렇다 치고, 왜 작가 김별아는 다시금 문자화된 인물에 살과 뼈를 불어넣어 21세기의 현대사회에 부활시키고자 했을까? 그리고 그의 이런 노력은 과연 값진 성과를 이룩했는지?

작가의 이력을 보니 성적인 테마에 주목한 것이 처음은 아닌듯 싶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라는 작품도 있으니. 그리고 십년 이상의 문단 경력을 쌓은걸 보니 단순한 센세이션 노림수도 아닌듯 싶다. 더더욱 궁금하다.

우선 이 작품에는 낯설은 역사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도 귀에 익은 조선시대가 아니라 삼국시대의 신라의 것이. 더구나 법흥왕부터의 가계도가 무수히 얽혀 있어서 책을 보다가 앞부분의 가계도를 들척이는 경우가 너무 잦아 내용이해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다. 워낙에 낯선 소재와 배경이니 그 정도는 양해하도록 하자. 반면 장점도 있으니 그것은 작가가 고어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여 의식적으로 순순한 우리말 용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그것이 주는 상큼한 효과는 간혹 느슨해지기 쉬운 전개에 조미료 역할을 하고 있다.

내내 마음속에 의문을 품는다. 작가가 굳이 '미실'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쓴 이유가 뭘까? 그리고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유교적인 사회문화체계가 가동되기 이전의 자유분방했던 성적 관계에 대한 그리움, 말도 안되겠지. 성을 무기로 권력을 움켜쥔 과거 여인의 페미니즘적 동경이 그것일까, 그래서 현대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찬미하고 싶은걸까. 아니면 그저 순수하게 과거에서 미래를 앞서간 한 여성의 일대기를 심리적 관점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확실한 건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였건 소설 내부에서 다층적으로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사랑에의 동경을 가진 순결한 처녀이기도 하며, 불구의 천민을 입에 품으면서의 그녀가 다분히 성녀의 이미지를 자아낸다면, 권력을 움켜쥐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온갖 암계를 도모하는 그녀는 간녀에 다름아니다.

담담한 심경을 품고 죽음을 기꺼이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한줄기 성스러움이 배어나오기조차 한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의구심이 끊이지 않는 것은 과연 작가가 '미실'의 생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모르겠다. 그대는 아는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5.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바다와 나비 - 2003년 제2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인숙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4년 김훈의 '화장'에서 시작한 편력이 2005년 한강의 '몽고반점'으로 촉발되어 이제 시기를 거꾸로 올라가려고 한다. 2003년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가 그러하다.

김인숙이란 작가가 왠일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기억을 되살려 서가를 뒤적이니 <칼날과 사랑>이라는 소설집이 눈에 띄었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이니 아마도 김인숙의 첫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그때 신문서평에 괜찮게 나와서 사본 기억이 난다. 젊은 여성작가 치고는 사회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었지, 아마도. 그러고보면 나도 선각자적 자질이 있는건 아닌가 느닷없이 뿌듯한 자긍심이 샘솟는다.

각설하고, 십여년의 시절이 경과하였음에도 작가의 눈길은 크게 흔들리지 않나보다. 사회적 문제가 관심을 기울인 그답게 '바다와 나비'도 자식 교육을 위한 기러기 부모 현상이 주소재가 되고 있다. 거기에 외국인노동자도 살짝 가미되어 있고. 다만 읽기를 마친 지 달포가 지난 시점이라 자세한 내용은 이제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고 흐릿한 잔상뿐. 나비가 바다를 건너는건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바다를 건너지 않을 수 없는건 그렇게 운명지워졌고 그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결국 지쳐서 죽음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은 다른 작품들은 '고양이의 사생활', 원조교제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일까 자칫 위험한 소재를 절묘하게 줄타기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 얼굴에 어린 꽃'은 과연 복거일 다운 작품이다. '부인내실의 철학'도 그러하고 '호텔 유로' 등 여러 작품이 새로운 소재를 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소재주의의 함정에만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하나 상당히 많은 여성작가들이 점유를 하고 있다. 사회 각 방면에서 여성파워가 득세하는게 문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현상이려나. 하긴 문화니 예술은 여성적 영역이라고 치부하는게 작금의 현실이니까.

더이상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내용을 붙잡고 끙끙거리기는 싫다. 그렇다고 느낌글을 쓰기 위하여 다시 펼쳐든다는 것도 우습고. 여성작가들의 다수 등장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런데 그들의 소재는 아무래도 여성적, 가정적 스케일에 머무는 경향이 크다. 단편소설이란 쟝르가 사회적 역사적 테마를 다루기에는 작은 그릇이지만. 소재, 표현, 기법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경험을 갖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11-1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5.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