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첩
이풍익 지음, 이성민 외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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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이라는 금강산 유람기가 있다.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명작이다. 난 이 작품을 읽을 때면 작가가 느꼈을 웅장하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의 편린이나마 내게도 전이되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부터 금강산 여행은 어릴적 부터 나의 지고한 꿈으로 자리잡았다. 작가처럼 금강산철도라면 금상첨화일텐데.

상전벽해가 되어 이제는 연중 수시로 금강산 관광을 떠날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물론 금강산 전체는 아니고 개방이 허용된 몇몇 구간을 그것도 가이드의 엄중한 안내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아직 금강산을 보고 싶은 바램을 억누르고 있다. 금강산을 이리 섣부르게 대우하는 것은 격에 어울리지 않는 실례가 아닌가.

<동유첩>의 저자 이풍익은 의외로 오래된 사람은 아니다. 19세기 전체를 아우른 그야말로 복많은 인물이다. 말년에는 외세의 침탈의 단초도 겪었으리라.

당시 유행처럼 이풍익은 금강산 유람을 떠난다. 그리고 약 한달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와 글과 시, 그림을 엮어서 하나의 시문화첩을 만들었다. 원본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이 번역본도 장정이 남다르다. 일단 규격도 다르며, 지질도 고급지를 사용하고 일부는 한지도 썼다고 하니. 화첩에 어울리게 글과 시와 그림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누워서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모습이다.

21세의 약관을 갓 넘긴 연치의 저자에게 금강산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무슨 감회를 느꼈는지 궁금하다. 해설에서는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교육적 여행이 선비들의 전통이라고 하던데.

사실 금강산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내게는 구구절절한 글월 묘사보다는 한 점의 그림이나 사진이 더욱 다가온다. 처음엔 본인이 그린 그림인 것으로 생각해서 정말 그림도 잘 그리네 속으로 감탄하였다가 아니야 화공을 데려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나중에 해설을 보고서야 사후에 화공으로 하여금 그리게 했던 모양이고, 화원이 김홍도를 모사하였다고 하니 재밌는 스토리다.

어쨌든 귀에 익은 지명과 낯선 지명이 머리속을 바쁘게 하는 가운데, 젊은 저자는 물을 넘고 산을 넘어서 금강산 깊숙이 들어간다. 그리고 곳곳에서 읇조리는 싯구. 처음엔 이 시를 본문처럼 묵독을 하며 지나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역시 시는 소리내어 읽는게 아무래도 제맛같다. 처음엔 어색하고 어조를 조절하기 힘들었는데 점차 마음과 정서마저 안정되어 머릿속이 맑아온다.

여행은 몸으로 체험하며 배우는 길이다. 따라서 고생이 많을수록 깨치는 바도 많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얼마나 깨쳤는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산길을 오르내릴 때 놀랍게도 젊은 저자는 본인의 두 발이 아니라 가마(!)를 타고 대부분의 길을 다녔다. 보라, 평지도 아닌 산지에서. 그럼 가마꾼은 누구였던가? 힘좋은 머슴이나 전문가마꾼으로 속단하지 말라. 바로 스님들이다. 세상에 여전히 사농공상과 사대부 계급의식이 뿌리깊게 젊은 저자의 몸을 휘감고 있음을 여기서 알게 된다. "도저히 올라가지 못할듯 가파른 길에서"조차 가마에 의지하다 너무나 위험천만해져서야 "하는 수 없이 가마에서 내렸다(168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의 이전 시문과 후의 감회가 모다 위선적으로 들리게 되고 말았다. 여기서 무슨 '호연지기'가 피어날 수 있다는 말인지.

이 책 <동유첩>은 여유로운 사대가의 한 자제가 금강산을 노닌 후 그 증거를 남겨서 시문화첩으로 만든후 동년배들끼리 즐기기 위해 만든 분명한 목적을 지닌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꽤 괜찮은 편이다. 일독 내지 일람할 의의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아쉬움은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책을 구입할 독자가 몇이나 될까 하는데 있다. 후반부에 원문을 영인본과 같이 수록하였는데 좋은 지질과 더불어 책가격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양서는 널리 보급해야 비로소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면 이 책 역시 세상에 존재한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만큼 대중적이 되기에는 너무 높은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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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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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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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을 살펴보니 박완서도 벌써 70이 훌쩍 넘겼다. 우리나라의 원로급 문인인 그의 작품은 단편 '엄마의 말뚝'을 읽어본 게 전부다. 그나마도 뾰족한 인상을 받지 못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도 자체가 흥미로울 것 같아서 선뜻 구입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1+1이라 부담되지 않는 가격에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도 더불어 습득할 수 있다는 물욕 탓이랄까.

소싯적에 지리학자가 되어 세계 방방곡곡을 유랑하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각국 정보를 소개한 책이나 세계여행기를 탐독하곤 하였다. 아직도 박찬삼의 글이 마음 한구석에 깊이 남아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여행자유화가 되고 인천공항이 북새통이 될 정도로 해외로 떠나는 인파를 이루고 있으니, 해외여행기라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쓰는이도 읽는이도 드문 과거의 유산.

그러면 여행기는 아무 존재의의가 없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이 책이 될 수도 있겠다싶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낯선 정보를 제공하는 목적 대신 겉날리지 않는 속깊은 감상과 사색을 공유하는.

이 책은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TV드라마의 상투적 설정처럼. 4부 12편의 글이 실려 있지만 제대로 된 여행기는 4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나머지는...부족한 분량을 채우기 위한 필업(fill-up) 정도일뿐. 중국/백두산 기행, 에티오피아 방문기, 티베트 기행, 카트만두 기행이 메인이며, 특히 후자 2편이 핵심으로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백두산,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도 백두산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백두산 자체가 내뿜는 카리스마와 아울러 백두산 가기 위한 머나먼 여정과 도중에 마주치는 또다른 삶. 거기는 상실한 우리 역사와 현실이 두눈 부릅뜬채 지나는 이들을 지켜본다. 그래서 작가는 '좋은 울음터'라고 지칭했나 보다. 나는, 아직 백두산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티베트는 내게서 멀리 떨어진 지명은 아니다. 언젠가 한번은 꼭 가봐야지 하는 필연 탐방코스로 점찍은 곳이다. 카트만두는 어떠한가. 못지않은 인도에 대한 열망을 식힌 적이 결코 없다, 나는.

티베트는 작년에 갔다온 실크로드처럼 중국 본토가 아닌 지금은 자치구로 되어 있는 중국 속의 타국이다. 숱한 우여곡절이야 어이 필설로 형언할 수 있겠는가마는 아직도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티베트가 독립할 수 있는 가망성은 거의 없다. 중국에 천지개벽하는 정변이 발생하지 않는한. 형과 아우의 노래를 통하여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관계에 대해 새삼 인식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과 관광은 추구하는 목적으로 구분된다. 해외여행이 있는자에게 일상사가 되버린 시점, 정말로 궁금하다. 이것이 참말 여행인지 아니면 관광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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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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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를 따라 일본 에도시대를 가다 - 400여 년 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정장식 지음 / 고즈윈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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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년간 불고 있는 한류의 실체와 영향이 진실로 어떠한지는 참으로 궁금하다. 한류는 일개 바람에 그치는 환상에 불과한게 아닐까싶기도 한데.

'에도시대 일본에는 이미 한류가 있었다'는 표지 문구가 신선한 동시에 상업성을 물씬 풍기는 이 책은 의외로 진지하며 유익한 내용을 가득 담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메이지유신까지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대체로 평화기조를 유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몇차례 통신사를 파견하여 우호 교린을 확인하였고.

이 책은 바로 12번이나 파견되었던 통신사 일행의 사행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사행의 배경과 경과, 양측의 대응 등 그동안 우리의 관심사밖에서 방치되었던 분야인 동시에 양국관계를 생각한다면 소홀히 다루어졌던 분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의 충격이 막심하였음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나 그 정신적 외상이 그렇게 오래 끈질기게 남아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통신사의 사신들은 일본의 경제력과 무력에 놀라면서도 단지 '오랑캐'라는 케케묵은 단어에 집착하는 태도를 초지일관하였다.

허망하기 짝이없는 오랑캐의식으로 병자호란의 치욕마저 감내해야 하였으면서도 실력을 배양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심약한 조선의 사대부. 그들은 외적인 무력감을 내적으로 위안받고자 하였다. 그게 바로 소중화사상이었던 것이니 참으로 가련한 작태였다.

겉으로는 일본의 무력에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오로지 상국의 논리에 집착하며 협박에 굴복하면서도 대국의 양보로 포장한 가식적인 행동이 이 책에서는 그대로 묻어난다. 오죽하면 일개 대마도조차도 가운데서 조선을 농락하였단 말인지. 참말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역사는 치욕적인 면을 너무도 많이 발생시키고 있구나.

조선과 에도막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통신사가 시작되었고 이제 필요가 없어졌기에 일본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일본에서 조선의 가치와 비중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일본에게는 엄청난 물력과 힘으로 들이닥치는 서양세력이 보다 중요하게 되었고 이제 조선은 일개 향후의 먹잇감일 따름이었으니.

통신사의 시말은 오늘날까지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열린자세로 타국의 나쁜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이용후생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의 우리역사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며 대일관계도 보다 당당할 수 있으련만. 문제는 그것이 한낱 과거에 국한된 경우가 아니라는데 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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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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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임진왜란 2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 엮음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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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임진왜란은 물론 이순신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참으로 부족하였다는 사실을 요즘들어 절감하고 있다. 군사정부시절에는 오로지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급급해서 인간이 아닌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그후로도 큰 진전이 없었던 듯. 어쩌면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이러한 정체된 이순신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연구가 꼭 전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소위 재야사가들의 연구가 정통학계에서는 별로 인정을 못받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젠가는 다방면에서 참신한 접근법과 발상을 갖고 우수한 성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순식역사연구회와 구성원들의 헌신과 열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징비록><난중일기>를 비롯한 역사고전과 '불멸의 이순신'드라마, 각종 시중 문헌을 참조하면서 이순신의 위대성은 날로 부각되고 있다. 과거의 이순신 상이 단순한 무장에 그쳤다면 요즘은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경영자로서의 새로운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그도 아픔과 슬픔을 겪고 괴로워 할줄 아는 진실한 한 인간임에 더욱 친근함을 접하게 된다.

이순신의 해전 전략전술에 관하여 구체적 분석이 일반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역시 이순신이 나서니 잘했구나 하는 인식과 아울러 한산대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고, 거북선으로 들이받아서 이겼다고 믿을 뿐. 하지만 잠시 되짚어보니 전쟁이란게 그리 간단한 상황은 아닐듯 싶다. 적 또한 나 못지 않게 이성과 감성을 갖고 똑같이 이기고 살아남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준비하고 내가 힘쓰는 동안 그들이 그냥 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두 권의 책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처음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따져보고 비교분석한 점은 글자그대로 참신하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막연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부분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논리는 순수한 역사전공자 또는 일개인으로서 이루기 어려운 성과라고 할때 다방면의 연구집단이 이루어낸 업적인 것이다.

2권 중반부터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경사학(經史學)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이해하겠지만, 저자의 견해처럼 너무나 전통의 학문접근을 등한시하고 서양과학에 몰입되었는지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여튼 공리공론에만 치중을 한 당시 조정의 무능과 격물치지에 충실한 이순신은 정말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후반부터 등장하는 '임진왜란은 ...에서 막을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포에서, 아니면 문경새재에서 또는 한강이나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는데 우왕좌왕하여 막지 못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나도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저자들의 답답한 심경이겠지만 이런 연구서에 그렇게 토로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부산에서 한강에서 대동강에서 어선과 협선들을 활용하고 화포무기를 적극 활용하였다면 당연히 임진왜란의 흐름은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을 것이지만, 그렇게 대비를 못하고 피난가서도 당쟁에 몰두하였던 것이 당시의 조정과 집권층이었음을 왠만한 이라면 충분히 인지하는 사실이 아닌가. 저자들 못지 않게 읽는 나도 짜증스러운데 그걸 동어반복으로 읽자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난중일기>와 <징비록><선조실록>을 일자별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훑어나가는 부분에서는 도대체 이 책이 보여주려는게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을 무찌른 전략과 전술, 전시경영의 참모습 등이지 당시 무능한 조정의 잘못을 한줄한줄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 있지는 않다. 차라리 비판하려면 그렇게 한심하고 썩어빠진 선조와 집권층이 전쟁후에도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고 썩은내 나는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왕조가 멸망할때까지 움켜쥐고 있었나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발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추어이기에 가능한 연구서이며 성과도 남다르다. 특히나 정발의 부산성전투와 송상현의 동래성전투에 얽힌 신비화의 껍질을 벗겨내어 잘못된 우상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데서 참으로 공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특히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마추어로서의 한계가 노정되는 점에서 후속작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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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2.1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이순신과 임진왜란 1 -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이순신역사연구회 엮음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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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물론 이순신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참으로 부족하였다는 사실을 요즘들어 절감하고 있다. 군사정부시절에는 오로지 '구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키는데 급급해서 인간이 아닌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그후로도 큰 진전이 없었던 듯. 어쩌면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이러한 정체된 이순신 연구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연구가 꼭 전공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소위 재야사가들의 연구가 정통학계에서는 별로 인정을 못받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젠가는 다방면에서 참신한 접근법과 발상을 갖고 우수한 성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순식역사연구회와 구성원들의 헌신과 열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징비록><난중일기>를 비롯한 역사고전과 '불멸의 이순신'드라마, 각종 시중 문헌을 참조하면서 이순신의 위대성은 날로 부각되고 있다. 과거의 이순신 상이 단순한 무장에 그쳤다면 요즘은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경영자로서의 새로운 면모에 집중하고 있다. 그도 아픔과 슬픔을 겪고 괴로워 할줄 아는 진실한 한 인간임에 더욱 친근함을 접하게 된다.

이순신의 해전 전략전술에 관하여 구체적 분석이 일반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역시 이순신이 나서니 잘했구나 하는 인식과 아울러 한산대첩에서 학익진을 사용했고, 거북선으로 들이받아서 이겼다고 믿을 뿐. 하지만 잠시 되짚어보니 전쟁이란게 그리 간단한 상황은 아닐듯 싶다. 적 또한 나 못지 않게 이성과 감성을 갖고 똑같이 이기고 살아남으려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존재가 아니던가. 내가 준비하고 내가 힘쓰는 동안 그들이 그냥 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두 권의 책에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처음 옥포해전부터 부산포해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따져보고 비교분석한 점은 글자그대로 참신하며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막연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부분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논리는 순수한 역사전공자 또는 일개인으로서 이루기 어려운 성과라고 할때 다방면의 연구집단이 이루어낸 업적인 것이다.

2권 중반부터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경사학(經史學)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는 이해하겠지만, 저자의 견해처럼 너무나 전통의 학문접근을 등한시하고 서양과학에 몰입되었는지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여튼 공리공론에만 치중을 한 당시 조정의 무능과 격물치지에 충실한 이순신은 정말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후반부터 등장하는 '임진왜란은 ...에서 막을 수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포에서, 아니면 문경새재에서 또는 한강이나 임진강, 대동강에서 막을 수 있었는데 우왕좌왕하여 막지 못했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나도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저자들의 답답한 심경이겠지만 이런 연구서에 그렇게 토로하는 것은 적합치 않다. 부산에서 한강에서 대동강에서 어선과 협선들을 활용하고 화포무기를 적극 활용하였다면 당연히 임진왜란의 흐름은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을 것이지만, 그렇게 대비를 못하고 피난가서도 당쟁에 몰두하였던 것이 당시의 조정과 집권층이었음을 왠만한 이라면 충분히 인지하는 사실이 아닌가. 저자들 못지 않게 읽는 나도 짜증스러운데 그걸 동어반복으로 읽자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난중일기>와 <징비록><선조실록>을 일자별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훑어나가는 부분에서는 도대체 이 책이 보여주려는게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을 무찌른 전략과 전술, 전시경영의 참모습 등이지 당시 무능한 조정의 잘못을 한줄한줄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 있지는 않다. 차라리 비판하려면 그렇게 한심하고 썩어빠진 선조와 집권층이 전쟁후에도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고 썩은내 나는 그들만의 계급사회를 왕조가 멸망할때까지 움켜쥐고 있었나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발전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추어이기에 가능한 연구서이며 성과도 남다르다. 특히나 정발의 부산성전투와 송상현의 동래성전투에 얽힌 신비화의 껍질을 벗겨내어 잘못된 우상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데서 참으로 공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특히 후반에 접어들수록 아마추어로서의 한계가 노정되는 점에서 후속작업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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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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