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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나뉘어라 - 2006년 제3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정미경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평점 :
올해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사서 읽는다. 별 대단찮은 일이지만 나름대로 일년에 최소한 한 권의 순수문학집을 사겠다는 결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자부한다.
올해는 정미경의 '밤이여,나뉘어라'가 수상했다. 수상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갑자기 나타나서 대상을 수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 특색이다. 정미경만해도 2003, 2004년에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외 김경욱은 2003, 2005년에, 김영하, 전경린, 윤성희는 2003년에 각각 우수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다. 즉 차근차근 기초를 쌓고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들이 대상을 수상한다. 이것은 이상문학상 선정기준에 일시적 유행성보다는 문학 본연의 가치를 중시하는 긍정적인 자세이다.
수록작품에서 구광본의 '긴 하루'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김경하의 '아이스크림'이 재미있게 읽혀진다. 특히 김경하의 글은 일상적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아서인지 보다 친근미가 넘친다. 평소와 달리 다소 맛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식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공유하는 바다. 하지만 그저 그것으로 끝난다. 두 부부가 상상하는 김부장의 실체는 단순한 가공일 뿐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간단한 소품적 재미만을 남길뿐이다.
구광본의 글은 사람이 아니라 카메라가 화자로 나서서 보고 느끼고 증언해준다. 사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간 군상의 행태. 그것은 그다지 밝은 세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편의점 알바생에 대한 따뜻한 시각은 결국 사물의 외투만 뒤집어썼을뿐 근본은 따스한 작가의 눈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글쎄, '위험한 독서'는 독서계몽운동의 브로셔처럼 비쳐지기 딱 좋다. 이럴때는 이런 작품이 저럴때는 저런 글을 읽으면 심리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비타민처럼 현대사회에 독서붐이 일어날텐데. 그러나 독서치료사는 여자환자를 독서지도와 육체관계를 통하여 치료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치료라는 미명하에 위장하였던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드러내고 말았으니 장차 어이할꼬.
함정임의 '자두'와 윤성희의 '무릎'은 가족관계를 다룬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이다. 솔직히 함정임의 글은 잘 다가오지 않는다. 탐탁치않은 결혼생활의 실패를 겪은 남자가 재혼 준비를 하며, 여자는 배다른 오빠가 보내준 그림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며 자두를 먹는다. 대체로 이런 스토리인데 남자의 결혼실패를 자세히 기술하며, 재혼을 위하여 상견례를 하고 집을 구하는 과정을 또 낱낱이 풀어놓는걸 보면 결혼으로 맺어지는 또다른 가족관계의 허상과 불안감을 표현하려는 노력인 것도 같건만..
'무릎'도 내용상의 비현실성에 있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잘것없는 물건들만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꿈꾸거나,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정원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정원사로 일하는 주인공. 주인공은 가출하여 방황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가치를 깨닫고 돌아오는 돌아온 탕자인 듯 싶다. 그러기에 작가는 가족관계에서 무릎의 의의에 대하여 말미에 친절하게 풀어쓰고 있는게 아닐지.
대상은 정미경이 수상하였지만, 개인적인 취향의 선호도는 '야상록'이 가깝다. 왠지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 백야의 스칸디나비아 보다는 우리네 시골이 보다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초상과 맞물리는 여자의 환영받지 못하는 애정관계. 슬프기 보다는 어둡고 비극적인 배경에서 서원의 검은 못물에 대비되는 하얀 꽃 무더기. 참으로 밤의 정서에 어울리는 흑과 백,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등이 현란한 문체와 어우러지며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밤이여,나뉘어라'는 내가 인식한 주제의식과 심사위원들의 그것이 상이하여 당혹스럽다. 수상작 선정이유서에서 "사랑에 대한 미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채 나락으로 빼져든 인간의 비극적 파멸"이라고 적시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P의 자기파멸이 사랑과 직접적 연관성을 지니는지 되새김질을 해봐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나로서는. 북구의 백야에서 어두운 밤을 그리워하듯, 태양처럼 빛나는 인생에서 응달의 존재는 빛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데 그게 없다면 그건 빛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박하지만 강력한 진실의 웅변이다. P의 천재성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면 좀더 성공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P를 쫓아가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P가 떠나버리자 삶의 지침을 상실하고 의학공부에서 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나'는 P를 알지 못한다. 그가 아는 P는 이미 살아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삶도 이제부터는 평온치 못하리라, 인생의 나침반이 영영 사라졌으니.
처음에는 그다지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술술 읽어 넘어갔는데, 후반부 작품론을 읽다 보니 가슴이 탁 막힌다. 얼마 안되는 단편 하나에 이렇게 깊은 의미를 부여하다니. 정말 작가는 평론에서 파헤친 그 모든 것을 머리속에 인지하고 작품을 그렸단 말인지. 침소봉대라는 말이 자꾸 뇌리를 어지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