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인생 - 2002 제2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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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이라는 작가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실 대상 작품은 내게 그다지 인상깊게 다가오지는 못하였다. 평론가들의 다각적인 분석과 칭찬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작가의 이력을 보니 한번 주요 작품을 이 기회에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집어든 게 바로 이 책이다.

네이버에서 '장밋빛 인생'을 탁 조회해 보니 화면 가득 정보가 쏟아진다. 이렇게 성가가 높던 작품이었나하는 순간이 무색하게, 엉뚱하게도 다른 '장미빛 인생'이었다. 바로 최진실을 재기시켰던 바로 그 텔레비전 드라마.

1987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재야(?)에서 잠적하다가 2001년 재데뷔한 후 바로 그 다음해에 이 소설로 문학상을 거머쥐었으니, 특이한 이력이다. 무협지로 치면 폐관수련한 후 급속한 내공의 상승을 얻었다는 것일까.

여성작가의 주인공은 으레 여자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처음부터 빗나가 버렸다. 광고회사의 잘나가는 중견 남자직원이 주인공. 게다가 때론 당혹스러울 정도로 성표현이 직설적이다. 이제는 여성작가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일도 그만두어야겠군.

현실의 광고업계가 이러할까 싶게 소설의 소재와 배경으로 등장하는 광고계에 대한 묘사는 매우 현장감이 넘친다. 하긴 이러니까 심사위원들이 모두 전직 광고업계 출신 작가라고 오판할 수밖에. 사용된 어휘 하나하나가 속칭 업계의 깊숙한 체험과 내막을 담고 있어 섯부른 자세로 덤벼든 게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광고업계의 신화적 존재인 '나'가 부도덕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민'의 죽음 후 일상과 회상이 맞물려 가는 구조 속에 '이강호'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삶과 죽음, 광고의 존재론적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라고 쓰면 과장법이 심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현대문명의 총아인 미디어를 활용한 광고의 위력이 막강하다는 반증이다. 티비광고, 신문광고, 지하철광고판, 옥외광고 등 눈뜨고 다시 눈감기까지 일상의 모든 시간과 장소는 광고에 둘러싸여 있고 광고없이는 숨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제 광고는 단순히 상품을 팔기 위한 도구적 목적을 초월하여 자체로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우리들은 광고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광고, 멋진 광고에 열광하고 공익광고에 가슴 뭉클해 하는 현실 아니던가.

'나'와 좋은 관계를 지속했던 '민'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이유는 명확히 나와있지 않다. 공식발표대로 단순한 사고사일 수도 있게고, 아니면 '민'의 남편이 말한 대로 '임신'의 충격 내지 공포('민'의 남편은 불임이므로), 또는 표피적인 '나'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일지 모른다.

'나'는 다수를 설득하는데는 전문가이지만, 아내와는 완전한 의사 불소통을 겪고 있으며, 그래도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민'과도 진실로 소통이 이루어졌는지 역시 회의적이다.

이 점에 '이강호'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삶의 지속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에게 타인과의 관계 형성 및 유지보다는 자신의 장밋빛 꿈을 실현하고 그 이미지에서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보다 소시적의 '나'의 자화상이다.

소설 중에서 '이강호'가 훨씬 선배인 '나'보다도 더 인생의 깊이를 체득한 듯하였음이 이채롭다. 그래, 인생이란 장밋빛으로만 꾸며지지 않는다. 회색이나 검은색, 다양한 색조가 어울려야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는 것처럼 인생도 그러한 법. '나'는 너무나 장밋빛 만을 갈구하고 있구나 싶다. 아니 그건 '나'만의 문제점이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의 '나'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2002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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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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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읽는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황건 옮김 / 청미래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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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제대로 된 <로마제국 쇠망사> 완역본이 없다. 그것은 곧 우리 인문학 및 번역계의 수준을 단적으로 표상하는 바로미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끝없이 찍어내면서 이백여년 전의 고전은 이렇게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하기사 그런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도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고, 이들은 그나마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의 가련함에 비하면 오히려 행복한 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님에 일차로 놀랐고 그럼에도 역사학자를 능가하는 안목과 지적 능력에 이차로 탄복하게 된다. 제목그대로 '로마제국 쇠망사'이므로 로마의 성립과 포에니전쟁을 겪으면서 지중해의 강자로 부상하게 되는 찬란한 로마의 영광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절정을 구가하던 로마가 어떤 연유로 쇠락의 과정을 겪게 되었는지를 복합적인 시각에서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을 저술한게 18세기 후반이다. 그때는 계몽주의가 득세하는 동시에 제국주의가 발아하기 시작하였던 시기다. 오스만투르크는 굳건히 그리스와 소아시아, 중동일대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기번의 시각이 현대인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언제나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단견과 편견, 인식의 한계가 곧 눈에 띄게 되기 마련이므로. 따라서 너그러운 마음자세를 갖추고 책장을 넘겼다.

전성기의 로마는 유프라테스강과 도나우강, 라인강 그리고 대서양, 사하라사막에 의하여 제국의 경계가 획정되었다. 그 이상은 기후도 척박하여 무리를 무릅쓰고 정복을 해봤자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탄탄한 국방력의 도움을 받아 내부에서는 유례없는 영광을 향유하게 된다. 스스로 로마가 세계 그 자체라고 인식한게 적어도 서양권에서는 전혀 오만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이다.

맛좋은 꿀이 있으면 벌이 날아오고, 군침도는 음식이 있으면 파리가 꼬이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번영은 이방인들에게 끊임없이 로마경계를 침탈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로마는 강대한 국가이지만 사방의 이민족들에 의하여 지속적인 충돌이 빚어지다보니 군비확대로 점차 경제가 어려워지게 되는 법. 근근이 유지하던 국경선은 훈족에 쫓긴 게르만족의 서쪽과 남쪽으로의 이동에 의하여 일거에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서로마제국은 급격한 쇠락을 겪다가 이윽고 명을 다하게 되고 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어떤 국가도 현명한 군주가 계속 등장하여 통치를 이룰 수는 없다. 절대권력을 가진 만인지상의 말 한마디와 동작 하나는 곧 자체로 법이요 명령인 것이다. 이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게 절대권력자가 절대권력을 무분별하게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장친인 것이다. 공화정시기의 로마에는 그것이 가능하였다. 원로원의 권세가 막강하였으며 권력은 집정관, 재무관, 법무관 등 여러 보직자에게 분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무능한 황제의 등극은 제국의 난맥상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정치체제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역사적 경험을 배태한 산물이라고 칭하고 싶다. 범용한 최고권력자라도 무난한 임기를 마칠 수 있는 체제. 최고를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최악은 막아낼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이 현대의 민주주의체제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지만 동로마제국은 그후로 1,000여년간을 더 존속하였다. 그럼에도 서로마제국에 법통을 인정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뿌리요 기둥이었던 이탈리아가 서로마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로마제국은 가톨릭이 아닌 정교라는 점도 차이를 보여준다. 동로마황제의 권력체제는 오히려 동양의 절대군주정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고. 하지만 국외자의 눈에는 이 모든 논의를 초월하여 오늘날 서양 문명국의 대다수는 서로마제국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탓이 아닐까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서로마제국의 판도는 지금의 영국, 스페인, 프랑스, 독일 일부, 동유럽 일부와 이탈리아를 포함하는 유럽지역의 중추를 차지한다. 서양적 사고가 암묵적으로 깊숙이 뿌리내린 것을 감안하면 그들이 동로마보다는 서로마를 자신들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높이 평가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기독교의 세력확대가 로마제국의 쇠락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기번은 주장한다. 기독교는 탄압속에서도 꾸준히 신도를 포섭하여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에 공인되었고 얼마후부터는 국교로까지 옹립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가난한 신민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기보다는 파벌게임에 몰두였으니 아리우스파등 각종 분파를 모두 이단으로 추방하여 내쫓은 것이다. 신앙상의 차이를 포용하기 보다는 격렬한 대립을 통하여 가뜩이나 어려워진 로마의 내정을 혼란케 하는데 일조 하였으니 이런 지적이 나와도 별달리 할말은 없을 것이다.

이제 로마는 과거의 웅장한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로마제국은 어딜까? 미국이 그러하다면 미국은 자신의 오만과 독선을 낮추고 항상 주변국과의 친선관계를 도모하는게 역사적 교훈을 놓치지 않는 방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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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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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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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시저,케사르)는 무려 2,000여년도 더 옛적 인물이다. 기원전 거인의 육필기록을 이렇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경이로운데 하물며 그 내용의 충실성은 되새김질하고 싶게 만든다.

기존까지 내게 알려진 카이사르의 윤곽은 그저 로마공화국에서 제정을 시도하려다 공화파에 의해 암살당한 정치가 이게 전부이다. 물론 "주사위는 던져졌다"와 같은 경구는 익숙하지만.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카이사르가 얼마나 대단한 위인인지 그가 단지 운이 좋아 로마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던게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의 나이 사십대를 몽땅 쏟아부은 갈리아 정복전, 그것은 정치적 라이벌들에 비하여 군사적 업적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카이사르가 인생을 걸었던 모험이었다.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갈리아인들. 당시의 갈리아는 오늘날 프랑스 전체와 플랑드르 및 독일 일부와 스위스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였다. 이탈리아 본토와 스페인, 발칸지역 그리고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부를 차지한 로마인들에게 지중해를 둘러싼 일부 틈새를 메꾸어 명실공히 '로마의 호수'로 삼고 싶은 욕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어쨌든 카이사르는 과감히 갈리아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갈리아 부족들간의 갈등과 역학관계를 조정하여 강약 전법을 교묘히 구사하여 숫적으로 지리적으로 불리한 정복전을 성공적으로 끝내었다. 그리고 곧바로 브리타니아로 진격하였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였고 여전히 유럽문명의 핵심을 자랑하는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로마의 갈리아정복에 대하여 감사의 심정을 품고 있을지 궁금하다.

누구나 자유와 재산을 침탈당하면 그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는게 인간사의 법리다. 갈리아인에게 로마인의 고향을 침입한 적국의 군대이다. 그들이 강력한 저항투쟁을 벌이는것 또한 응당 그럴법하다.

카이사르의 탁월함은 단순히 전쟁사령관이 아니라는데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는 군대를 지휘할 뿐 아니라 고도의 심리 외교전을 수행하며 동시에 갈리아인들에게 교역을 확대하여 로마의 지배를 받는게 실익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며 대개의 경우 너그럽게 항복한 이들을 처리하여 인망을 높이 쌓는다. 힘과 덕망이 갖추어진 지도자에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 법. 그래서 갈리아인들은 로마가 아니라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그래서 훗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치열한 내전을 전개할 때도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다.

참으로 놀랐던 점 한가지는 로마군의 무시무시함이다. 체격이 상대적으로 거대한 갈리아인과 게르만인을 상대해서 막강한 보병 공격격를 발휘한 로마인들이 당시 서구세계를 지배하고 수세기 동안 지배했던게 결국 다 연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공성작전을 벌일때의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방벽을 쌓거나 진지를 구축하는 무모하다시피한 전략이 수시로 채택되는 것을 보면 당시의 갈리안인들의 기막혔을 표정이 상상이 간다.

결국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복속시키고 폼페이우스와 일전을 벌인후 로마 최고의 지위에 오르며 각종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비운의 칼날을 맞는다. "브루투스, 너 마저도..."로 유명한 그의 최후는 이제껏 공화파와 제정파의 갈등으로만 이해하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한 뛰어난 인물로 회자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공화정의 감내할 수 없는 누적된 위기를 겪고 있었기에 공화정체제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해설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브루투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원로원파의 수단에 불과한게 아니었을까. 만약 카이사르가 그대로 성공적인 개혁정치로 로마를 이끌어갔다면 그후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또다른 내전의 불꽃은 불붙지 않았을 것이며 로마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짙은 의구심이 상상의 똬리를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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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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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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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이후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마침내 원로원파를 뒤에 업은 폼페이우스와 일대 결전을 벌인다. 카이사르로서는 평화를 원한다면 본인의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서 모험에 몸을 맡기는 외에 선택의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그토록 무정하고 모진 것이다.

수년간의 내전 끝에 마침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일파를 진압하고 로마 제일의 권력가로 부상하여 이후 제정의 토대를 마련하다가 암살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실 내전에 관한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외에 자세한 이야기는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카이사르 본인이 직접 기술한 이 기록에 따르면 그의 승리는 결코 간단한게 아니었음을 알게된다. 폼페이우스 역시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일찌기 젊은시절부터 장군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아 오리엔트 일대를 정복하여 개선장군이 되었던 것처럼 명망에 있어 결코 카이사르에 뒤지지 않았고 더구나 막강한 원로원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카이사르보다는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탈출하는데 그것은 로마에는 카이사르를 대적할 군단이 없었고 그의 근거지는 소아시아 일대였기 때문이다. 최근 정복한 갈리아를 제외하고는 로마의 모든 영역이 카이사르보다는 폼페이우스 세력권에 가깝다고 하는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초기에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호민관 쿠리오에게 아프리카 진격을 본인으 히스파니아 제압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로써 일단 서방과 남방을 완전히 제압한 후 동방의 라이벌을 압도할 방책이었던 것이다. 전략에서 가장 하책중의 하나가 양편의 적과 싸우는 것임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양진영의 수장이 모두 당대의 용장이었던만큼 그들의 세력대결은 팽팽하기 그지없었다. 히스파니아는 굴복시켰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실패하였으므로 일대일인 셈이다. 이제 보스간의 대결이 남았는데 무대는 오늘날의 그리스지역이다. 해군력에서 열세였던탓에 많은 부대를 이끌지 못한 카이사르는 더구나 요충지 디라키움 점령에도 실패함으로써 많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보급도 부족한데다 병력에 있어서도 절반에 미치지 못한 누가 봐도 패배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일거에 균형추를 옮겨 놓았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를 포기하고 시리아로 향했지만 세상은 패자에게 냉담하게 돌변하여 결국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단 내전기는 여기에서 펜을 거둔다. 아직 내전이 종료된 것은 아니지만 운명이 더이상의 글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점에서 유리하였던 폼페이우스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만심이 아니었을까.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나친 자신감으로 군기가 해이해 졌으며, 지도층끼리는 내전 이후의 세력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독한 승리에의 일념으로 충만한 카이사르군에게 숫적인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용병 한명은 겁병 백명은 당하고도 남는다.

카이사르 이전과 이후 로마의 대외정책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정복과 뒤이은 이집트 합병으로 실질적인 로마의 국경선은 확정되었다. 그후의 공방전은 충동적인 정복욕을 제외하고는 단지 국경을 지키고자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언제나 대외를 향하던 로마군단의 창끝이 자국민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그리고 치열하고 잔인하기는 과거 못지 않음을 내외에 천명하였으니 위대한 공화정으로서의 로마는 사실상 문을 닫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씨앗을 뿌린 제정 덕택에 로마가 수백년을 지탱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때문에 불과 수백년밖에 버티지 못했는지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카이사르는 그 전환기의 로마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거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천여년전의 인물들이 행동과 사고가 마치 현재 지금의 것과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인간성이란 영속적인 존재인가. 당시 우리나라는 전설상의 단군시대였고 이제 삼국이 태동되는 즈음인데 로마인들은 이렇게 가치높고 충실한 기록물을 역사적 유산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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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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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영혼
오히예사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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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헐리우드 서부영화로 각인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이미지는 견고한 틀을 이루어 좀체로 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조작된 진실의 파급력은 막강한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꾸준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그동안 뭔가 잘못알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유럽 이주민들은 결코 무주공산의 무인도에 정착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만년동안 아메리카대륙의 땅과 기후에 적응하여 지속적인 삶의 시스템을 구축해온 원주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굴러온 돌은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무참히 폭력을 행사하고 살해하더라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인간보다는 동물과 가까운 생명체로 무시하고 말았다.

그래서 원주민이 정착민 정부와 맺은 협정은 언제나 기만당하기 일쑤였고 얼굴 흰 자들은 계속하여 원주민의 땅을 요구하였다. 눈엣가시같은 원주민은 소위 인디언보호구역이라 하여 척박하고 불결하기 이를데없는 조그만 공간은 제약하여 한발짝도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한후 위반시 가차없이 죽음으로 응징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뿌리이며, 앵글로색슨 문명의 우월성의 감추고 싶은 실체이다.

가끔씩 전해지는 오늘날의 인디언의 삶도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여전히 인디언보호구역은 존재하며 의식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인디언들의 현실을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멸종이 결코 머나먼 일은 아닌듯싶다. 오히려 미국정부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라고 그러길 소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할일은 없는데 생계비를 주니 술과 마약으로 찌들기 마련이며, 그 구역내에서는 그토록 철저한 마약류 단속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예사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전반을 살아간 소위 인디언이다. 하지만 여타 인디언과는 다른 점이 그는 청소년기까지 전통 원주민으로 살아갔다가 후에 얼굴 흰 자들의 문명세계에서 그들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점이다. 그당시 그가 겪어야 했던 모진 고초와 인내는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가. 그리고 수십년간 원주민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올바로 얼굴 흰 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그에 따르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머릿가죽을 벗기는 일은 과거에는 없었다고 한다. 얼굴 흰 자들이 먼저 그런 관습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서부영화는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였는가? 평화와 고요를 사랑하고 자연과 대지를 항상 품고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혼은 정착민들의 선교와 술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기독교의 유일신 주장은 자신들의 '위대한 신비'가 우상이지 않았을까 하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술은 엄격한 가족간 전사간의 기초적 윤리와 존중을 바닥에서부터 깨뜨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코 겪어보지 못한 천연두와 콜레라 등 치명적 전염병의 광범위한 살포는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원래 씨족단위의 분산화된 삶을 선호하는 전통에다가 위와 같은 요인으로 인해 동부로부터 밀려오는 얼굴 흰 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더우기 생명의 근원인 들소 개체의 인위적인 급격한 감소 또한 치명타를 날렸다.

이 시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원주민이 과연 열등하여 오늘날의 위치에 있는게 당연하게 여겨질 것인가? 그들의 음악을 귀기울여 들어본 경험이 있는지 그들 자신의 나직한 목소리를 가슴깊이 새겨들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결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폭력을 앞세우는 행동을 먼저 저지르지도 않았다. 오히예사는 울분을 삭이며 말한다. 소위 '얼굴 흰 자'들이 내세우는 기독교의 정신에 보다 가까운 것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라고.

아직도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편견이 있는 이라면 제일 먼저 이 책을 통하여 그들의 닫힌 생각을 깨뜨릴 것을 권하고 싶다. 아직도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얼굴 흰 자들의 사고와 생활을 우러르면 사는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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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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