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0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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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근현대 건축가 12인 중 이름이나마 접해본 사람은 김중업을 제외한다면 안토니오 가우디 달랑 한 명 뿐이다. 그만큼 나의 건축적 상식은 그 얕은 바닥을 드러낸 셈이다.

저자는 우리 시대의 명건축가 12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삶과 건축사상의 위치를 주요 작품에 대한 소개와 함께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칫 딱딱한 경향으로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고 교양 강화에 치중하려는 의도로 매 책장마다 각종 사진자료가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어 가뿐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여기서 보게 되는 각 건축가들의 대표 건축에 대한 사진은 무지몽매한 나조차도 때로는 탄복하게끔 아름답고 탁월함이 도처에 넘쳐난다.

저자는 예술의전당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을 설계한 국내의 대표적 건축가다. 따라서 전문가적 견지에서 바라본 시각은 아마추어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고 복잡한 이론과 현학적 표현을 남용한다면 당장 책장을 덮을텐데 그렇지 않으니 다행이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확실히 천재같다. 그의 작품 사진을 보노라면 정말로 초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누가 가우디를 좇을 수 있을까?

발터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은 몰라도 바우하우스는 익히 들어보았다. 그만큼 바우하우스는 현대미술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존재다.

르 코르뷔지에의 롱샴 교회 사진을 보았을때 놀라움이 그치지 않았다. 눈을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런 대담하며 신선함과 동시에 환상적인 건축도 가능하구나.

하지만 현대 건축은 재료면에서 개인적 기호와는 배치된다. 찰스 매킨토시가 주창한 현대 마천루의 원형인 글라스타워는 분명히 당대의 전위적 발상이지만 오능날의 삭막한 고층빌딩군의 원형이라는 면에서 마땅치 않다.적어도 내게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든가 알바 알토 등이 훨씬 더 가슴에 다가선다. 자연 위에 군림하는 건축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건축의 개념.

나는 지금은 비록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지만 언젠가 근사한 단독 주택을 지어서 정말로 멋있는 생활을 누리는 꿈을 잃지 않고 있다. 인간에게 아파트는 최선이 아니라 필요악이다. 그런면에서 요즘의 아파트 가격 폭등은 상식과 천리를 거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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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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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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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예언자다. 남들이 빛을 노래할 때 그는 어둠을 읖조린다. 사람들이 기쁨과 행복을 찬양할 때 그는 비극과 불행을 예언한다. 그는 빛과 어둠, 행과 불행이 결코 다르지 아니함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는 평범하면서도 무서운 진리를 그는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깨달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아무도 그의 글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지 오웰은 특이한 작가다. 그는 빛을 어둡게 그리지 아니한다. 비극과 불행을 비극적으로 표현하지 아니한다. 오히려 낙관적인 전망으로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를 묘사한다. 여기서 낙관적이라 함은 자유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빅 브라더의 통치하에서 억압과 통제에 안분자족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리 독립적이지 못함은 역사적 경험을 반추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썼으며, 우리도 군부독재체제를 수십년간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 소설로 <카탈로니아 찬가><동물농장>에 이어지는 그의 후기 대표작은 얼추 섭렵한 셈이다. 스페인 내전에의 참전 경험이 조지 오웰에게 미친 충격은 참으로 컸다.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은 반공산주의자로 변모하엿다. 그것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산당의 실체를 통하여 스탈린이 사회주의의 순수성을 변질시키고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광경을 처절하게 관찰하여던 경험에서 유래한다. 스탈린은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와 다를바 없는 인류의 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소련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미래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은 예언을 인류에게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떴다. 그의 예언은 반세기가 경과한 현시점에도 유효하다. 전체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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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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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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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에 이은 울프 두번째 소설이다. KTX에 놓고 내린 <자기만의 방>을 포함하면 세번째 도전에 해당한다. 울프는 만만한 작가가 결코 아니다. 역자의 해설을 통해 보더라도 울프는 자신을 지적인 작가로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던 듯 하다. 당시의 일상적인 여성작가와는 구분되는.

울프 글은 먼저 뚜렷한 플롯 내지 스토리가 부재하다. 이를 서사구조의 파괴라고 하는데 지난 세기 초에 등장하였던 소위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연유다. 외적인 사건은 이제 부차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요 인물 내면의 사고와 의식이 수면에 떠오른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단순해지게 되었다. 누구처럼 하루 동안의 배경으로 장편 소설을 뽑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울프는 그리 극단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댈러웨이 부인>도 시간적으로 이틀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수미일관한 일개 흐름을 지니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클러리서)에게서 셉티머스 부부, 피터 월쉬 등으로 작가의 관심은 마주치는 인물의 내면세계로 헤엄쳐 들어갔다 불쑥 빠져나온다. 나비가 꿀을 찾아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오르듯이. 어느책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의 구조성을 비판하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이와 같이 묘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결코 마르지 않는 꿀물을 찾아 헤매는 한마리 나비. 여기서 구조와 형식을 논하는 것은 감성이 메마른 자의 부지없는 미련일 뿐.

오랫동안 울프는 페미니즘 문학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것이 내가 울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고. 이제 그 시각은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권두언처럼 울프의 문학이 '인간주의 문학'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히 <등대로>에 비하면 기법적으로 원숙해 졌지만 문학적 감흥은 일지 않는다. 느끼는 문학에서 이해하는 문학으로의 변모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한계인 듯. 그래도 문학에 소위 재미가 빠지면 사람들은 문학을 왜 읽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권말해설은 '삶과 죽음의 화해로운 공존' 이라고 하여 속물로 간주당하기도 하는 클러리서와 전쟁의 상흔으로 괴로워하는 셉티머스의 엇갈린 삶의 행로를 비교하여 이것을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클러리서가 피터 월쉬 대산 리차드를 택하여 댈러웨이 부인이 되는 것을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작가가 진정으로 이러한 주제의식을 품은채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다. 아니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적중하는 경우.

작품중에서 셉티머스도 피터 월쉬도 그리 긍정적인 인간형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차라리 리차드가 단순하지만 상대적으로 건전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킬먼양에 비하면 그녀가 속물로 미워하는 댈러웨이 부인은 독립성을 가지고 본인의 인생을 선택하였으며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당한 안주인으로의 자태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황홀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울프는 페미니즘을 모더니즘과 결합시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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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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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 버지니아 울프 전집 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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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 않은 분량에 여유로운 행간이었는데 완독에 의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스토리가 복잡하지도 않은데.

사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연극 상연과 그 전후로 포인쯔홀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그리고 있다. 스토리가 단순한만큼 오히려 내용의 복잡성은 만만치 않다. 작가의 말처럼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전작들에서 한두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 독창성 여부에 대해서는 해설에서처럼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작가의 작품에만 국한하자면 구성 해체에는 성공한 듯 싶다. 한 문장도 쉽사리 독파를 허용하지 않는다. 문장 하나하나가 싯귀처럼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 더우기 평범한 대사와 혼재된 고전의 무수한 인용은 영국 문학에 대한 지식없이는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각주라도 인용의 출처를 밝혔으면 하는 한줄기 아쉬움.

이쯤에서 작품의 의도가 궁금하다. "나를 버리고 우리로 대치하자"라고 작품 구상에서 언급했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다른 역할들을 행하지만 똑같다"는 목사의 연극 총평이 이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획일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각각의 개성과 차이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우리. 2차세계대전이 광분하는 시절. 나치와 파쇼가 전횡하는 시기. 그것은 소박하지만 절실한 바램이었을 것이다. 연출자 라 트롭양이 일탈의 존재로 묘사되지만 부정적으로 여겨지지 않는게 그런 연유다. 담배를 피워대며 술집에 들어가고 동성애자("침대와 지갑을 같이 썼던")임에도 말이다.

'막간'은 말 그대로 막과 막 사이를 가리킨다. 결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부분이 아니다. 연극이 상연되는 동안 관객은 자신을 잊고 무대에 빠져든다. 사이버 공간의 실재화, 반면 막간에서 사람들은 다시금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무대위와 아래 중 진정한 삶의 반영은 어디일까? 비약한다면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가, 누가 나비고 누가 장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타이틀을 변경한 것은 가벼운 변덕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버지니어 울프의 대표작은 대개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을 꼽는다. 그만큼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즉 탁월한 작품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의욕에 지나치게 충만하여 작품의 구조 해체에 치우쳐 문학 자체의 본질 획득에 실패한 데 연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곱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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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1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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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동료가 한 번 보라고 주어서 그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단순한 축약본이 아니라 만화 형태이므로 딱딱함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을 만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글로 번역할 경우 320쪽짜리 책 413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축약하여 전달하고자 하면 불가피하게 편집자의 자의성이 개입되는데, 이게 때로는 약이 되지만 독이 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싫어하는 것도 그 지나친 자의성이 거슬렸던 탓이다. 어쨌든 저자는 방대함 중에서 정치사에 한정하여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 도저할 것이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였고 그 결과는 꽤나 흥미로웠다.

역사적으로 중종시대는 사화로 물든 시기의 한복판이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실권이 없어 공신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다시 이를 내치다가 마침내는 김안로라는 희대의 간신을 잉태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다. 작가는 이와같이 반정공신세력과 조광조, 김안로로 이어지는 시대 흐름을 종축으로 삼고 중종의 심중을 횡축으로 삼아 당대 정치사를 명쾌하게 그리고 있다. 모델링의 장점이 바로 현상의 단순화를 통한 이해의 증대가 아니었던가.

작가의 말마따나 중종에게는 성군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아무 욕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신하에 의해 쫓겨난 임금, 이는 언제든 자신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종에게는 왕좌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차대한 과업이며, 조광조는 주군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향년 38세의 나이, 며칠후면 내 나이가 그리 된다. 조광조는 비록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지만 후대에 성인 소리를 들으며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으니 무익한 생은 아니리라.

작가의 쾌도난마에만 함몰되지 않는다면 무척 흥미롭고 유익하게 볼 수 있다. 문득 작가의 나머지 책들도 손에 들고 싶다. 그나저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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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08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6.12.1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