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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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인간의 굴레>와 쌍벽을 이루지만 대중성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한다. 아무래도 소재의 파격성에 연유한게 아닐까 섣부른 추정을 한다. 모옴의 작품은 예전에 <인간의 굴레>를 읽어본 이후 관심영역 밖에 놓여 있었다. 썩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 <달과 6펜스>도 <인생의 베일> 증정품으로 받지 않았더라면 손에 들었을 가능성을 장담 못했을 것이다.

모옴은 특히 영미권에 인기가 높다. 탁월한 문학성으로 정평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대중성에 있어서는 남부럽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언급했듯이 스토리텔러를 지향하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괜히 난해하고 현학적인 표현과 구조가 수준높은 문학으로 인정받는 시대에 그는 대중에 보다 다가서는 방법을 택한 댓가이다.

흔히 고갱을 모델로 했다는 이 작품은 한 증권중개인이 어느날 처자식을 버리고 예술의 길로 뛰어들고 자신의 길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나'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추적하고 있다. 확실히 찰스 스트릭랜드는 예술 외에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영국의 부인과 처자식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떠나왔으며, 파리에서 유부녀 블란치 스트로브의 죽음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철저한 예술지상주의 구현자라고 하겠다. 오히려 그가 중연의 나이까지 가슴속의 열망을 억누르고 살았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스트로브 부인이 그를 꺼려했던 이유는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품은 그녀에게 그는 본능적으로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이다. 죽을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전부를 의미하지만(그래서 더크 스트로브를 떠날 수 있었다) 찰스에게 사랑은 귀찮은 찰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찰스보다는 더크 스트로브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를 질시하는 살리에리가 주인공보다 더 관심이 끌리듯이. 천재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은 있지만 스스로가 천재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 범인의 비애. 아내를 빼앗아간 찰스에 대한 분노를 능가하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어찌할 수없는 사랑.

찰스 사후에 찰스의 그림은 세상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자아낸다. 무시받던 그의 그림은 일순간에 거액의 가치를 갖는 명품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예술에 미친 괴짜에서 놀랍게도 현인으로 변모되었다.
혹자는 스위스가 인류문명에 기여한 것을 과소평가한다. 전쟁과 투쟁이 오히려 수많은 예술과 과학에 기여하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예술과 예술가는 별개로 취급하는게 원안이리라. 하지만 나와 남을 파멸로 이끌어간 예술가의 작품에 대하여 탄복하고 감탄하는게 일반화된다면 우리사회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서머셋 모옴은 유달리 인간성의 발현에 관심이 큰 듯하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성의 완벽한 현현은 헛된 망상이다. 때로는 감정에 흔들리며 이성과 감성을 오가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발전을 이루는 양태가 작가가 생각하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인 듯하다. <인간의 굴레>나 <인생의 베일>이 그러하며, 이 작품도 외양으로는 세속에 대한 예술의 찬양으로 비치지만 내게는 피할수 없는 예술의 손아귀에서 허적거리는 불행한 인간의 삶을 통해 인간사의 순탄하지 못한 측면을 부각하는 것으로 인식됨은 나의 지나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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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5.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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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1>보다 먼저 읽은 책이지만 역시나 게으름의 소치로 이제야 몇 줄 끄적거릴 엄두가 나게 되었다. 도대체 어찌된 생활인지 돌이켜보면 아주 시간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각설하고 이 작품의 최근 개봉된 영화 <페인티드 베일>의 원작이다. 영화가 원제이고 번역본은 표제를 다소 각색하였다. 하긴 '페인티드 베일'하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될 테니까. 영화 개봉에다가 1+1로 <달과 6펜스>를 덤으로 준다니 충동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서머싯 몸의 대표작으로 대개 <인간의 굴레>와 <달과 6펜스>를 언급하므로 예술성으로는 탁월하다고 보기 어려운 작품이 아닌가 일단 편견을 품는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럿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키티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여성으로 키워져서 미혼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사랑하지도 않는 월터와 결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찰스와 불륜에 빠진다. 그녀는 관계가 탄로나더라도 사랑과 결혼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뒤늦게 참다운 사랑을 찾는다는 나름대로의 합리화가 있었다. 그녀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다. 그 시절 여성들은 충동과 겉치레에 관심을 가지게끔 양육되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월터를 따라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중국의 오지로 간 후 그리고 수녀원에서 봉사에 헌신하는 그들을 보면서 키티는 변모한다. 극한 상황에서 인성이 성숙해지는 것은 굳이 실존주의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무시하던 월터가 존경받을 만한 인물임을 발견하며 찰스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가 알게 된다. 남편이 죽고 홍콩으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녀는 과거의 어리석음을 탈피하게 된다. 하지만 육체의 기억을 거부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찰스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 이성이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다는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을 작가는 키티를 통해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채색된 베일'이다.

월터는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가까이 보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키티와 결혼했다. 그는 자신이 남성적 매력이 그다지 없음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현명하다. 그리고 키티가 찰스와 불륜을 벌인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찰스의 진면모를 깨닫게끔 만든다. 그가 중국 오지에 간 것은 분명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음을 배신한 그녀에게 애증이 교차한 그. 그는 연구와 치료에 몰두하면서 그렇게 시절을 넘기고 있었다. 만사가 잘 끝났다면 한결 성숙한 부부로 재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죽음으로 해피엔드를 맞지는 못한다. 그는 그녀를 용서하고 포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욱 미워하였다. 그런 면에서 오지행은 키티에 대한 응징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는 스스로에 대한 형벌이었다.

찰스는 여기서 육체적 매력이 탁월한 속물적 인간형으로 나온다. 하지만 셋 중에서 가징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그에게 키티는 일상의 진부함에 파격적 즐거움을 안겨주는 장난감이다. 그래서 그녀가 부인과 이혼을 요구하고 자신과 법적 결합을 해줄 것을 말했을때 일거에 거부한 태도를 보인다. 불장난은 한때의 유희로 그침을 그는 알고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다. 월터가 죽은 것에 그는 무관심할 것이다. 키티가 홍콩을 떠나니 그는 잠시 아쉬움을 느끼리라. 하지만 곧 그는 새로운 즐길거리를 찾고는 소소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국으로 돌아간 키티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소원했던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보인 점이다. 예전의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리 능력이 신통치 못한 돈이나 갖다주는 그저그런 존재였다. 이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그녀에게 늙은 아버지의 의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인간 본연으로서.

키티는 여성은 제2의 성이라고 주장한 보봐르가 주장한 사례의 전형이다. 그녀의 어리석음은 그녀가 그렇게 키워졌고 장려되었기에 자라났다. 개인사를 겪고 그녀는 제2의 성을 깨뜨리고 도약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미래적 여성상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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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4.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창작과 비평 136호 - 2007.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엮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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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고 있다. 벌써 여러 권이 서가에 꽂혀 있다. 하지만 펼쳐서 읽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정기간행물은 아무래도 손이 잘 안 가게 되니 이상한 현상이다.

사실 이번 호도 그냥 묻혀질 뻔하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한국장편소설에 관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문예지답게 출발은 시와 소설이다. 내가 시를 어찌 알까마는 처음 나온 '산길'(이성부)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산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강렬한 탓이다. 소설은 흠흠..굳이 언급하자면'바람의 말'(권지예)이 그나마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리 강한 인상은 받지 못하였다.

역시 특집이 재밌다. 우리나라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장편소설의 전통이 취약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 만큼 확실히 단편에 비해서는 열세다. 대담과 논설에서도 나왔지만 단편과 장편은 그 이론과 실기 토대가 구별된다. 그리고 '장편소설과 그 적들'에서 지적했듯이, 장편을 권유하기는 사회환경이 열악하다는 점도 있다. 취미작가가 아닌 이상 장편소설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게 우리네 처지 아닌가. 그러니 상대적으로 용이한 단편 위주가 되는 것도 맞다. 문학계 구조가 단편을 장려하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장편소설이 더 좋다. 단편은 인생의 단면을 그리지만 장면은 인생 전체를 조망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몇 편의 장편소설을 분석하고 있다. 나처럼 문학계와 독서계의 풍조에 둔감한 이에겐 크게 도움이 된다. 중진작가 뿐만 아니라 신진작가들도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구나. 이를 계기로 '빛의 제국'(김영하)과 '달콤한 나의도시'(정이현)를 구입하였다. 편집부가 이를 알면 무척 반가워하겠지.

도전인터뷰와 논단을 통해 이 간행물의정체성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좌파. 요즘 뭇매 맞고 있는 좌파 말이다. 그런데 국내에 제대로 된 좌파가 있긴 있었나? 한미FTA는 이 정권의 자기부정이라는 인터뷰한 어느 학자의 비판이 귓가에 생생하다.

솔직히 아직 이러한 문예지는 효용성면에서 조금 아쉽다나 아니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는 충동적으로 정기구독을 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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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6.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4 - 몽골 중국 티베트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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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비야의 세계여행도 그 매듭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그의 여행기를 읽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비록 남들보다는 10년이나 지나서 이 책을 읽었지만 그리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 이 글을 쓸 때의 그를 현재의 그와 자연스레 비교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자연스레 생긴 것이다. 또한 당시였다면 단순한 여행기의 목적에만 치중했을 터이지만 이제는 그의 족적(足跡) 자체에 관심이 더 간다.

한편으로는 그가 참 운수가 좋았다고도 생각한다. 여행을 시작하여 6년간의 여정을 마친 시점이 1998년 5월. 당시 국내 사정을 돌아보면 암담 그 자체이다. 미증유의 IMF 사태로 국란의 위기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할 때 그는 그것을 끝냈다. 즉 그의 여행기간은 우리나라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지적을 받았을 만큼 한껏 거품이 달아오른 호황기였으니 근심걱정이 없을 시절이다.

이제 한비야는 책에서 자신이 공언한대로 국내일주와 중국어학연수를 마치고 '월드비전'이라는 구호단체를 이끄는 저명인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여행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역시 일종의 구도라고 할 것이다.

나의 구도의 길은 어찌할 것인가.

내용 중 역시 제일 흥미를 끄는 지역은 티베트와 그 주변이다. 특히 리틀 티베트라고 하는 샤허는 이채롭다. 수개월 전 방송에서 차마고도(車馬古道)에 관한 다큐를 상영한 적이 있다. 그때 '캄'이라는 중국과 티베트 사이의 부족연합국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곳이 한비야가 가 본 샤허 지역인 듯싶다. 여기도 티베트처럼 인민해방군의 진주로 자주권을 상실한 곳이다.

그리고 다리와 리지앙, 원래 목표대로라면 작년에 여행했을 곳이다. 그러면 오늘 한비야의 글을 보면서 더욱 실감나는 동행체험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을 연변으로 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족과 북한주민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통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과제인가를 다시금 느끼게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는 낡았으되 결코 진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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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7.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3 - 인도차이나 남부아시아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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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본 한비야의 삶은 도전과 새로움의 추구의 연속이다. 그녀의 도전정신은 평균적 남성들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녀의 무모하게도 비치는 개척정신의 근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단순한 호기심일까?

본인의 말대로 "불확실성과 낯섬을 대단히 즐기는"(P.185) 그녀도 "오래된 것이 갖는 소중함"(P.185)에 대한 인식도 빠뜨리지 않는다. "매일 사용하며 손때 묻은 것, ...앞뒷장이 다 찢어진 세계지도와 일기장."

텔레비전 커피 광고에 유사한 내용이 나온 적 있다. 업무는 새로운 걸 추구하더라도 일상은 손에 익은 것을 택한다는. 현대 사회는 무서운 스피드로 달리고 새로움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잠깐 정신을 가다듬어 보면, 인간 자체는 새로움 보다는 익숙함에 더 연결고리가 있다. 요새 관심가지는 도보(걷기)에서도 멋있는 새 신발보다는 발에 익은 신발을 더 권하고 있음을 떠올린다.

한비야가 이끄는 '월드비전' 구호단체의 태동은 그녀의 여행중에 형성되었음을 알게 된다. 상대적으로 오지와 분쟁 지역을 여행한 탓인지 기아와 고통으로 허덕대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어른들도 안쓰러운데 하물며 어린이들은 더더구나 눈시울을 시큰거리게 한다. 한 달에 우리돈 천 원도 안되는 수업료가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미얀마 아이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는 방글라데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엾다는 생각보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앞서는"(P.218) 것은 비단 한비야 뿐만은 아닐 것이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거쳐 태국과 미얀마를 지나고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을 통과하고 카라코람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간 한비야. 여행은 그녀에게 인내와 안목과 체험을 안겨준 동시에 분노와 의기소침으로 발걸음을 무겁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의욕을 다진다.

"길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가...그 낯선 길에는 무슨 일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설렌다."

나도 한비야 못지않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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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6.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