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인식 1
송건호 외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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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정보가 기재된 뒷면을 보니 발행일이 1990년 2월로 나와 있다. 워낙 스테디셀러다 보니 요즘은 어떤 표지 디자인으로 꾸며졌을까.

현 시점에서 읽어도 부분적으로 참신하고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내용이 제법 있다. 출판 당시인 70년대말과 80년대에는 사회적으로 얼마만한 파장을 미쳤을지 새삼 깊이 인식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에 연이은 독서인지라 아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뭐든 그 때가 있다면 나는 약간 시기를 늦게 맞춘 꼴이다. 그래도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한발 물러선 채 비판적 시각으로 내용을 조감하는 장점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미군에 의하여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절반의 진실이 담긴 사고다. 그렇다면 미군 진주 이후 및 군정 당시 그네들의 정책이 당시 민중들의 염원에 어긋났던 연유는 무엇일까 자문해야 한다.

"포고문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성격으로서는 먼저 미군은 한국인이 기대하고 또 생각했던 것과 같은 해방군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보다는 오히려 점령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P.41)

"한국은 일본제국의 일부로서 우리의 적국이다...그리고 적어도 초기에 있어서의 대한점령정책은 일본의 행정기관을 통하여 실시할 필요가 있다." (P.479)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그들에게 조선은 적지에 불과하다. 이 점을 유념하면 미국이 왜 일본 통치체제를 가능한 한 그대로 잔존시키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배격하고 임시정부를 무시했는지도. 자고로 파트너를 인정한다면 무주공산이 아닌 법.

미군정은 극좌를 탄압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공산세력은 정권 쟁취를 위하여 사회 불안을 조성하므로. 또한 그들은 극우도 배격하였다. 하지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하였음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좌우합작운동을 후원하였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그래서 진덕규는 이렇게 평가한다.

"한국의 민주화라는 미군정의 최대의 목표는 극심한 이데올로기의 대결에로 유도시켰으며, 한반도의 통일은 당시의 냉전체제에 의해서 오히려 분단의 심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정계의 좌우합작은 미군정 당국자의 미숙한 정치적 행위에 의해서 진정한 의미의 좌우통합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정치적 활동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다주고 말았다." (P.46)

남북분단의 시원 유래에 대하여 미국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들은 군사적, 정치적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선택하였다.
"한반도 분할의 최초의 발상도 미국에 의해서 행해졌고, 한반도 분할의 고착화도 미국에 의해서 추구되었던 것이다." (P.47)

그렇다고 분단에 대해 무조건 외세에 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해방 후 자주적으로 통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수차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치인들 중 일부는 권력획득이라는 소승적 시각에 갇혀 있었고 정치적 포용성도 갖고 있지 못했다. 흉탄에 쓰러져간 대표적인 지도자들의 면면을 떠올려보라.

오늘날에도 친일파의 잔재는 여전하다. 어쩌면 분단 체제가 과거 청산의 실패 결과 중 하나라고 볼 때 진정한 청산은 분단체제의 극복 이후에나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미군의 행정편의주의에 입각하여 시행되었던 일제 관리체제의 유지가 이러한 독소를 깊이 퍼뜨린 것이다.

"미군정은 공산주의를 억제했으면서도 실제로는 공산주의가 파급될 수 있는 소지를 조성시켜주는 역설적인 현상을 나타내고 말았다." (P.51)

거기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반민족세력이 이를 교묘히 악용하였다. 오늘날 소위 뉴라이트에서는 이승만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승만은 영원히 민족의 죄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오익환)'를 읽어보면 그가 무슨 죄악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자칭 정통 야당의 대명사인 민주당도 과거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민주당의 창설자들이 누구인가? 처음에는 이승만과 야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였던 친일파와 지주세력의 연합체다. 그들이 후에 이승만과 사이가 갈라져서 야당화했을 뿐 만약 이승만이 고분고분한 허수아비였다면 그들은 결단코 집권당의 달콤함을 즐겼을 것이다.

따라서 진덕규는 미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미군정의 통치가 보여준 비효율성과 이데올로기적인 편협성, 그리고 권력구조 충원의 보수성은 한국정치의 민족주의적 측면에서는 비판의 중요한 대상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P.56)

개인적으로 여운형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증폭되었다. 당시에는 이승만 등이 극우파, 김규식이 중도우파, 여운형이 중도좌파, 박헌영이 극좌파로 대별되었다고 한다. 21세기의 현시점에 정상적으로 존속하는 체제는 좌나 우를 막론하고 중도세력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는 중도파가 중심을 이루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지녔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통하지 않지만 여운형 주도의 건준이 미군에 의해 인정받거나 또는 김규식과의 합작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어떠하였을까?

친일파의 숙청과 아울러 북한에 비해 약점의 하나가 바로 토(농)지개혁의 실패라고 하겠다. 유인호는 "누구를 위한 농지개혁인가"하고 반문한다(P.442).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토지소유의 봉건적 지배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었던 지주계층의 이익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견해에 주도되어 실시된 것이 우리나라 농지개혁이다. (P.462)
'우리나라 농지개혁의 농민부재성은 농지개혁의 원칙설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업시행과정의 평가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관철되어 있는 기본적 특성이다." (P.466)

이상과 같은 논의의 바탕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분단의 경험 30년은 우리에게 분단의 극복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최우선의 민족사적 과제이며 이 과제의 성취 없이는 그 어떠한 발전도 번영도 언제나 일시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P.552)

금강산 관광객에 대한 총격 사건으로 남북 관계가 냉랭한 작금이다. 우리는 여전히 1945년의 주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에게 여전히 일독할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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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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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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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인들에게 오스만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대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진행형이다. 오스만의 광대한 영토는 사라졌지만 튀르크를 계승한 터키가 독립국가로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그래서 터키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던 듯하다. 과거에는 결코 유럽이 아니었고 적대국이었는데 갑자기 유럽의 일부가 되겠다고 하니 문화적 정서상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오스만 사학계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서구 기독교적인 편향에 물들지 않고 오스만에 대한 비교적 공정한 기술과 평가를 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만 오스만의 전성기인 15~17세기가 아니라 후반부를 위주로 하고 있어 강대한 정복 제국의 면모를 일람하기에는 아쉬움도 있다. 대체적으로 오스만은 2차 빈 공략의 실패 이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절뚝거리다가 1차 세계대전 후 패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저자는 비록 오스만이 조금씩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급격히 쇠퇴하지 않았음과 이따금씩 강력한 반격을 가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어쨌든 유럽에 일정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동 지역도 세력권 내에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인은 동방의 정복 제국에 역사적 경험에서 체현된 공포심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한 훈족, 무시무시한 타타르로 악명을 떨친 몽골족, 그리고 유럽을 삼킬 뻔한 오스만 등. 두려움에 대항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대상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태도이다. 별것 아니라고 자기주문을 외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럽인은 정복제국을 야만인으로 비하한다. 우월한 서구문명을 침탈한 병균 같은 존재로서.

저자에 따르면 오스만 치하의 많은 종족들은 오스만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성기의 로마가 그러했듯이 오스만 제국은 역내의 자유로운 교역과 안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소수에 의해 조직되고 선동된 소수파의 운동이었다...어떤 종족에 속하든 오스만 무슬림들은 오스만 통치 아래 근본적으로 만족했으며, 적극적으로 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P.290~291). "지방 명사...이들은 '지방의 오스만인'들이었고, 아무리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오스만 체제의 일부가 되고자 했으며, 또한 그 체제의 일부였다."(P.93).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던 땅에 현대에 30여개가 넘는 나라가 세워졌고 잦은 종족간 종교간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가는 역설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얼마나 관용과 통합 정책의 대가였는지를 반증한다고 하겠다. 오늘 조선일보에 에이미 추아 예일대 법대교수의 <제국의 미래> 기사가 게재되었다. 모든 초강대국의 키워드는 '관용'에 있다고 한다. 시사점이 자못 크다. 비록 목차를 살펴보니 오스만을 불관용 항목에 집어넣었지만 이는 저자의 서양인 특유의 무지(?)와 편향에 연유한다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그래서 저자도 "오스만 제국을 연구하고, 그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야 하는 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오스만 제국이 그 역사의 거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관용적인 통치의 모범 때문이다."(P.29)라고 지적하였다.

애초에 저자는 이 책을 오스만 제국사의 입문서로 의도하였으며 그래서 관계된 근현대사에 많은 지면을 할당하고 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을 부패하고 후진적이며 안락사를 기다리는 정체된 제국으로 묘사하는 몰역사적인(서문에서) 결함을 조금이나마 보완하려고 의도했다. 어느 정도는 1번 타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문제는 이다음에 더 상세한 내용으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할 만한 클린업 트리오의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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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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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타산지석 4
이희철 지음 / 리수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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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되지는 않는다. 터키가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때는.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오스만 투르크가 일정한 흥미를 주었지만. 더 눈부신 세계사의 다른 구비가 그리고 질곡과 왜곡의 한국사가 보다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광풍이 몰아닥쳤다. 나는 코웃음쳤다. 차라리 기본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만다. 완역본이 없어서 축약본을 구입해 읽었다. 나나미의 글만 접한 사람보다는 왠지모를 뿌듯함이 으쓱하게 만들었다.

얼마후 심심풀이로 그의 전쟁 삼부작을 보게 되었다. 분명히 주인공은 베네치아(내지 로마문명)라고 누구나 알 수 있다. 그의 의도는 삼부작을 통해서 로마 기독교 문명이 자기 세계를 지키려고 필사적이었으며 드디어 무슬림의 의도를 분쇄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오스만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 그들은 누구인가? 어느날 갑자기 등장해서 천년을 넘긴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서구를 공포에 떨게 했으며 그 자신이 천년 가까이 존속을 유지한 저력을 발휘했던 그들. 하지만 아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터키가 궁금해졌다. 터카의 어제와 오늘. 때맞추어 여행지로서의 터키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역사의 도시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그리고 파묵칼레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나는 걷는다>를 통해 터키를 횡단하고,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통해 현대 터키를 간접적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목마르다. 백문이불여일견, 만고의 진리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었다. 터키에 대한 개설서. 월드컵을 계기로 나온 책. 하지만 어떠랴. 무엇이든 계기가 필요한 법.

터키가 자리한 땅의 역사가 무척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서에도 등장하는 그곳. 고대 히타이트 제국의 유적지로부터 트로이의 무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현장이 이 땅이라는 사실도 재발견하였다. 터키의 역사유적은 비잔티움과 오스만의 이스탄불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케말 파샤를 떠올린다. 훗날 아타튀르크로 추앙받는 그는 기력을 쇠한 오스만의 사체를 뜯어먹으려는 열강의 탐욕을 뿌리치고 한줌의 터키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이다. 그 덕분에 터키는 중세에서 갑자기 현대국가로 시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갑작스러운 변화에 국민도 정치도 군대도 완전히 적응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의 건국자들를 대비시킨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그렇다치고 박정희는 확실히 우리나라의 아타튀르크가 될 수도 있었다. 조그만 미련을 덜 가졌더라면 비명횡사도 존경도 모두 잃지는 않았을터.

10.26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국민학교 저학년. 방과후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엄마가 뭐라고 하는데 죽었다라는 말 외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건의 파장이 우리 역사에 이리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울 줄은 몰랐다.

월드컵을 계기로 한층 가까워진 터키. 한국전쟁 때 터키가 16개 참전국 중의 하나이며 수많은 전사자를 남긴 사실을 이 책에서 다시 보게 된다. 참전의 동기야 다 다르겠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의 피가 우리 산하에 뿌려진 것은 사실이니 그 의의는 폄하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아시아의 동쪽 끝, 대한민국과 서쪽 끝, 터키. 재밌는 지정학적 동질성을 지녔다. 먼 역사의 뿌리는 아마도 유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으로 달렸고 그들은 줄곧 서로 전진하였다. 이제 그들과 우리 모두 땅끝에 도달해 있다. 과거의 아픔이 땅끝의 체험이라면 새로운 양국의 미래는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궁금하다. 그래서 코렐리라면 카르데수나 칸카르데쉬로 여기는 그들과 깊은 인간적 유대를 맺어보고 싶다는 것은 단순한 백일몽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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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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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그 불만 - 前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 세종연구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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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해진 양장본이 이 책에 대한 다중들의 관심을 웅변한다. 그만큼 우리는 세계화의 진지한 담론에 굶주렸던 것이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어느 날 문득 IMF 위기가 쓰나미 같은 기세로 몰려와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고통의 나날을 견뎌야 했다.

<세계화와 그 불만>은 세계화 추진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두 주역인 국제통화기금(IMF)과 배후의 미국 재무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IMF 관계자라면 이 책에 상당한 치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도 전직 세계은행 부총재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지적이니 말이다.

1990년대 말의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에 대한 대처방안은 적정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구제 금융을 신청한 죄인의 입장에서 시혜기관이 던져주는 달러를 받기 위해 입도 뻥끗 못하고 죽은 듯이 복지부동하던 시절이었다.

스티글리츠는 당시 IMF가 수행한 역할이 오히려 위기를 장기화하고 심화하는데 일조했다고 지적한다. 금융 긴축으로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실업자들이 양산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불안이 가중되었다고 한다. 차라리 통제된 인플레이션을 유도하여 기업 활동이 이어져 나가게 하고 산업 전반이 침체되는 것을 막는 것이 나았다고 한다. 외자는 고금리가 아닌 사회적 안정과 경기 동향을 보고 투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당시 전후로 IMF의 처방은 한결같았다. 실패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는 IMF가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고 오직 금융계의 이익에 헌신하는 방향으로 변질된 데 연유한다. 이 변질은 한두 명의 주도가 아니라 관료들의 출신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비민주성에 기인하여 뿌리박힌 것이다.

무역 자유화와 금융 자유화가 경제 발전에 반드시 기여한다는 보장은 없음에도 소위 선진국에서도 완전한 자유화를 시행하지 못하는데 취약한 개발도상국에 구제 금융을 무기로 자유화를 강제하여 경제가 파탄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스티글리츠는 케인즈주의자다. 이는 그가 개발경제를 전공하고 있음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시장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금융계의 시각에서는 훌륭할지 모르더라도 그 속에 인간이 누락되어 있다. 세계는 수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치가 화폐로 환산되면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미세한 수치가 주는 영향은 실로 심대하다.

한동안 음모론(P.22~224)이 횡행하였다. 부상하는 아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서방의 의도된 음모라는 것이다. 사실 IMF 경제위기에서 덕을 본 이는 해당국의 부유층과 채권단(서방은행 등)들 뿐이다. 구제금융은 외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되었다. 외채도 서방 금융계의 것이며, 구제 금융도 결국 서방 금융계에서 나왔으니 꿩 먹고 알 먹고에 폭락한 실물자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조치였던 셈이다.

어찌어찌하여 우리나라는 위기의 긴 터널을 벗어났나 싶었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전자 못지않은 강력한 위기에 휘말려 제2의 IMF라는 용어도 낯설지 않다. 이번에는 우리보다는 소위 선진국들의 잘못이 훨씬 커다란데도 거대한 풍랑은 나룻배를 더욱 뒤흔들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시장은 신이 아님에도 많은 금융계 인사들은 이를 신격화한다. 신은 무오류성의 속성을 지닌다. 시장은 절대적으로 옳다. 국가와 정부는 필요악이므로 최소한의 역할, 즉 야경국가의 역할만 이행하면 충분하다. 최근 수십 년간 세상을 지배하던 관념이다. 이제 신화는 깨지고 있다. 썩은 동아줄을 움켜쥔 채 하늘로 오는 줄 만 알고 좋아하다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가 말한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의 구체적 논의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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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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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 세트 - 전3권 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
베니야마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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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이 지은 3부작 중 첫 번째다. 애초부터 시리즈로 기획하였던 같지는 않고 책의 반응이 좋으니 추가로 펴낸 것으로 추측된다. 그나마 1권과 2권은 전체적 분위기와 제재, 스타일에 있어 유사성이 있지만 3권은 동일한 저자인가 할 정도로 완전히 이질적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다가는 유럽에 빠졌던 발을 확 들어 올려버릴지도 모른다.

확실히 일본사람들은 여행이나 이런 면에서는 우리에 비해 폭이 넓고 깊이도 한층 깊다. 단순한 주마간산식 여행기가 여전히 대세를 이루는 우리에 비해 이들은 한 나라에 한 지역에 푹 빠져서 거의 현지인들처럼 그곳을 사랑한다. 호오에 관계없이 집요함은 인정해야 하리라.

이 책은 여행 가이드북의 상투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 가이드북은 대충 알겠지만 지도가 나오고 이어 지역 소개, 관광명소, 교통편 그리고 맛집과 호텔 등으로 이루어지며 극히 사실적인 내용과 지은이의 주관적 감상이 버무려진 구성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대체로 흥미롭다. 배낭여행자나 개별여행자에 꼭 필요한 일체의 정보는 다른 곳에서 얻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유럽에 와서 무엇을 보고 이해하고 느끼고 돌아갈 것인가에 주안점을 둔다. 쇼핑 관광자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제1권 신화와 역사 편은 잡다함이 혼재되어 있다. 1/3은 유럽 신화와 전설, 다음 1/3은 건축 양식에 대해 소개하는데 나머지는 공예와 보석 등을 중심으로 유럽 문화의 배경 지식과 상식을 알려주는 데 치중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정통한 이라면 부족함을 느끼겠지만 초보자나 회화 예술과 결부지어 새삼 되새기고 싶다면 꽤 그럴듯하다. 군데군데 흥미로운 단편적 지식도 축적할 수 있으니.

건축 양식에 대해서는 유럽 건축사에 대한 전반적 흐름과 주요 특징을 소개하는데 유럽의 웅대한 성당이나 저택 등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 정도는 알아두는 게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음에 동의한다. 교회와 카테드랄의 차이가 뭔지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이런 정도의 내용은 진지한 서적에서는 취급 안하고 가벼운 책에서도 건드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독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나 할까. 이 책이 독자에게 뿐만 아니라 여행업계 종사자에게 호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관광객의 편안한 입장과는 달리 인솔자로 때로는 가이드로 손님들에게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전달해 주어야 하는데 이 책이 그 필요에 썩 부합하는 것이다.

약간의 전문성과 많은 대중성의 조화. 뭔가 부정적인 인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심리적 한계다. 역으로 많은 전문성과 약간의 대중성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다. 진지한 자연과학자도 필요하지만 그 연구성과를 다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내용으로 해설할 수 있는 대중과학자 내지 과학저술가가 크게 요청되고 나름 인정받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소위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도록.

그래도 번역에 있어 오타의 문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전적으로 편집부의 잘못인데 어려운 전문용어도 아닌 일상적 어휘에서 그리 많은 오타가 난무하는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웬만하면 사소한 수준은 넘어가려고 하는 편인데 이것은 정도가 상당하다. 아예 교정을 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제2권은 축제와 문화편이다. 절반은 기독교와 축제를 다루며, 나머지는 자연과 음식물 및 이모저모이다. 한마디로 잡학을 습득할 기회라는 의미다. 천지창조부터 시작해서 예수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흐름을 좇아서 간략한 배경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 또는 나름 기독교 지식에 해박한 이라면 별로 대단치 않겠지만 문외한에게는 쓸 만한 내용이다. 특히 '조형미술에 나타난 상징'은 서양 문화권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든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성 마가인데, 그래서 상징은 날개달린 사자이고, 대성당 이름이 산 마르코라는 것. 또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등등. 이어지는 각종 종교축일은 더더구나 이방인에게는 낯선 영역인데 나름 잘 정리하여 알려주고 있다. 저작 의도에 어울리게 어디를 펼쳐도 내용 이해에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 여기도 여전히 무수한 오타가 난무한다는 것은 옥의 티라고 하기엔 티가 너무 커서 옥의 옥다움을 가리고 있다.

앞서 두 권의 독자라면 제3권에 대해 일종의 선입견 내지 편향이 생길 것이다. 대충 그럴듯한 내용으로 쉽고 쏙쏙 이해되게. 그런데 저자는 앞서의 성공에 자심을 얻었는지 이번에 내공의 깊이를 뽐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주위에서 너무 가볍다고 쏙닥거린 듯. 제3권 고성과 건축편은 앞서의 기억을 지우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그렇지 않으면 어어, 이 사람이 왜 이렇지 하는 끊임없는 의구심으로 쉬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뜩이나 만만한 내용도 아닌데 말이다. 유럽 여행 소개책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멋진 성들이다. 오죽하면 고성 호텔, 고성 탐방 같은 프로그램이 성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서구의 성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한다. 저자는 성채와 성관을 구분하는데 사실 그런 구분이 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성의 역사, 중세의 성, 남아있는 중세의 성벽도시 방문, 성관과 의고성(노이슈반슈타인 성이 그 예다)의 구성으로 꽤 전문적인 내용도 담고 있어 흥미 본위의 접근으로는 배겨내지 못할 사람이 많다. 그래도 끝까지 읽고 나면 흠, 서양애들도 그럭저럭 쓸 만하군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더욱이 빨리 가서 유럽의 아름답고 웅장한 성을 실제로 밟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치게 한다. 한 가지 잊지 말 것. 외관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성(성관이 아닌)은 실제 거주에는 매우 불편하다는 사실. 아 또하나 이 권은 오타가 상대적으로 거의 없어졌다. 내용의 무게와 오타율의 관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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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2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8.12.1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