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은 사슴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한강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분량에, 산문적 글쓰기가 과연 작가 초기의 작품임을 알게 된다. 솔직히 좀 읽는 데 지친다. 무엇보다 이십 대 후반의 여성 작가가 문학적 형상화를 더위잡기에는 좀 버거운 주제라고 생각되는데, 이에 과감하게 도전한 작가의 속내가 궁금하다.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렇게 깊고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이밀 각오를 하게 되었을까. 이런 연유로 소설을 읽고 난 지 한참이 지났어도 섣불리 감상평을 끄적이길 주저하였다.
화자 인영, 명윤, 의선, 그리고 장.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이다. 한결같이 트라우마를 지니며 평범하지 않은 내면세계를 지닌 사람들이다. 인영과 의선, 명윤과 의선, 장의 삶을 각각의 작품으로 구현하였어도 제법 분량이 나올만한 사연을 모두가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이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이 소설은 작가가 아낌없이 재료를 쏟아부은 느낌이 진하게 든다.
겉보기에 이 장편의 서사 구조는 단순하다. 직장에서 알게 된 인영과 의선. 광기에 사로잡힌 의선을 사랑하게 되는 인영의 후배 명윤. 의선의 갑작스러운 행방불명. 의선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인영과 명윤. 탄광촌에서 사진작가 장과의 만남. 의선의 고향을 찾아갔으나 허탕 치고 돌아오는 길에 철도사고를 당하는 인영.
독자는 처음에 의선을 기묘하지만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상처받고 가여운 처지에 놓인 어린 사슴. 그녀의 걷잡을 수 없는 광기의 연원은 무엇일까. 세상과 불필요한 관계를 단절한 인영은 무슨 까닭으로 의선을 받아주었는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의선에게 명윤이 사랑에 빠지게 된 연유는 무엇이며 그녀의 행방을 찾아 막무가내로 찾아 헤맬 정도로 집착하게 되었는가.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혼자임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의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나는 그녀를 내 방에 받아들였던 것일까. (P.330)
작가는 인영과 명윤의 각자 자기 회고를 통해 그네들의 삶이 범상치 않았음을 슬며시 드러낸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버린 언니와 그로 인해 파탄 난 그녀의 가정. 이후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의 삶에 안주하는 인영. 그녀의 삶은 고독하지만 마음 편한 삶이기도 하다. 다만 현관 앞에 출몰하는 버려진 늙은 개는 그것이 바람직한 삶이 아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명윤은 어떠한가. 연탄 공장 인근의 가난한 서민 가정. 아버지가 사고로 가장 노릇을 못 하게 되어 풍비박산 난 집안. 가난을 못 견뎌 가출한 여동생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명윤. 의선을 찾아 헤매는 명윤의 모습은 여동생을 찾아다니던 모습과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윤은 의선에게서 발견한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여성 이상의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 소설에서 가장 특이한 인물은 사진작가 장이다. 그는 땀에 절고 생사를 오가는 사람들의 진실한 사진을 찍기 위해 제 발로 탄광촌에 들어왔다. 어렵사리 사진 촬영을 허락받기 위해 광부와 마찬가지로 막장을 드나들다 그는 광부처럼 탄가루에 몸과 정신이 황폐해지고 만다. 사택촌의 화재로 허름한 집과 함께 사진들을 홀라당 태워 먹고 아내마저 떠나버려 점차 인간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그의 모습은 참혹하기조차 하다.
작가는 무엇 때문에 한 정신 나간 여성의 자취를 쫓아서 가장 어둡고 힘겨우며 삶의 마지막 현장이라 불리는 탄광촌을 정면으로 주시하는가. 요즘은 석탄산업 자체가 채산성이 맞지 않아 탄광업이 거의 미미한 수준이지만,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는 시대까지만 해도 석탄은 중요한 연료원이었다. 당시는 안전 의식이 지금보다 경시되던 시절이니만치 탄광 사고가 심심찮게 뉴스거리가 되었다. 갱도가 무너져 수십 명의 광부가 갇히고, 며칠 만에 간신히 구조에 성공했으나 이미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등등이 반복되는. 이 소설에서도 이 같은 장면이 묘사된다.
서서히, 놀랍게도, 명윤은 저 낮고 더러운 건물들과 인적 없는 시가지의 어떤 부분이 기묘하게 의선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진작 망가지고 무너졌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웅크리고 있는, 마치 산 채로 버림받은 짐승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이 도시에서, (P.122)
작가 한강은 탄광촌의 실상에 대한 고발적 의도를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고발보다는 그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을 더 주시한다. 장이 사진을 찍도록 처음 허락한 사람, 탄광 사고에서 장과 함께 견디고 결국 목숨을 구해준 사람, 그가 회상하는 인물이 의선의 아버지였음을 독자는 결국에 깨닫고 만다. 어린 의선 남매를 버리고 집을 떠난 아내를 찾아 헤매며 역시 집을 떠난 남자. 그에게 아내는, 자식은 어떤 의미를 지녔던 걸까.
이 소설을 첫 대목부터 마지막 단락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어둡고 답답하며, 때로는 더럽고 냄새나며 끈적거리는 느낌으로 자욱하다. 의선이 나신으로 시내를 활보하다가 경찰을 피해 달리는 장면조차도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주지 못한다. 압권은 인영과 명윤이 마주하게 되는 겨울 탄광촌의 칠흑 같은 어둠이리라. 가뜩이나 폐광으로 쇠락하고 있는 도시가 술집과 나이트클럽의 장면과 뒤섞여 영락의 현실을 가중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생사를 걸고 연골까지 의선의 행적을 좇았으나 끝내 찾지 못한 채 병에 걸린 명윤을 간신히 끌고 돌아오는 대목에서 끝맺음하였으면 어떤가 하는 데 있다. 폐광된 갱도가 갖는 위험성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 세상으로부터 고립하려고 하는 인영의 삶이 결코 그러할 수 없음을 나타내려고 했음인지. 자신의 과거와 의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명윤이 현실 세계로 복귀하도록 하는 장치였을까. 어찌 되었든 싱크홀과 열차 사고는 개연성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다.
이 모든 어둠을 거치면서도 작가는 끝내 빛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빈집에 놓인 사진 한 장으로 생사불명의 상태였던 의선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그녀의 삶이 어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녀는 연골로 갔다가 도시로 되돌아왔다. 인영과 명윤도 달라질 것임을 작가는 암시한다. 인영 일행을 만나면서 장도 포기했던 사진의 열정이 다시 생겼다고 하니 역시 이후 행로가 궁금하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P.191-192)
검은 사슴은 연약한 짐승 사슴과 어울리지 않는 어둠의 이미지가 결합한 동물이다. 그것이 실재이든 상상이든 지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열망을 무참히 뺏긴 검은 사슴의 생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불쌍한 그것이다. 여기서 검은 사슴은 인물 한두 명을 가리키지 않는다. 의선, 의선의 아버지 임, 의선의 어머니 모두가 검은 사슴이다. 명윤, 명윤의 여동생, 명윤의 가족 모두가 검은 사슴이다. 장과 그의 아내도 검은 사슴이다. 인영 자신도 검은 사슴이다.
모두가 가슴 속에 깊은 상처를 품고 고통 속에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아 헤매며, 끝끝내 삶의 미련 한 자락을 부여잡고 세상의 끈을 놓지 않은 인간의 본성 아니겠는가.
명윤은 허탈한 어조로 나지막이 덧붙였다.
어찌 됐든 살아 있다는 건 좋군요.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그는 이어 물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나 같은 놈도? (P.434)
펴낸날이 1998년 9월 10일이다. 1판 2쇄본이다. 2017년에 새로운 판형으로 다시 나왔다. 20년 만에 작가가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 느끼는 감회는 어떠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