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 아니다 - 아메리카의 진정한 해방자 볼리바르
니나 브라운 베이커 지음, 이정민 옮김 / 파스칼북스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알라딘에서 리뷰를 보았는데, 썩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그나마 국내에 달랑 두 종류 밖에 없는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책인데 말이다. 어쨌든 서해문집에서 나온 걸 읽었으니 이쪽도 읽어보고 싶었다. 나온 지 수십 년이 경과한 묵은 책이 아닌 보다 생생함을 기대하며.
 
이 책을 평전으로 받아들이면 꽤나 빈약해지고 만다. 전기에 소설적 흥미를 불어넣은 저작으로 이해하면 차라리 불만은 줄어든다. 아무래도 서해문집 판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베이커는 말 그대로 일대기적 구성을 통해 시몬 볼리바르에게 접근한다. 이것은 장단점이 교차하는 서술방식인데 우리가 볼리바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흥미진진할 수 있다. 반면 도대체 볼리바르가 웬 듣보잡인가 한번 알아봐야지 하는 독자에게는 따분하기 그지없으리라.
 
서해문고 본은 이 점에서는 보다 설득력을 지닌다. 초반부를 시몬 볼리바르가 등장하기 전의 남아메리카의 시대적 배경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덕분에 후반부의 볼리바르가 어떠한 난관을 뚫고 남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분투했는지 그 의의를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빈약한 자료 탓도 있지만 분량 자체가 적다 보니 그의 다채로운 활동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베이커의 책은 그렇지 않다.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를 그다지 잘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소설적 구성을 많이 취하고 있다. 그것이 효과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알라딘에서 안 좋은 리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결코 엉터리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웬만한 내용은 전부 수록하였다. 따라서 오히려 역으로 볼리바르에 대한 해외의 연구의 현 수준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토록이나 중요한 인물인데 그에 대해 무지의 장벽은 깊고도 길다.
 
시몬 볼리바르는 왕이 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스페인을 대신한 전제군주의 자리에 오르기를 간청하였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고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지 않았다.
 
시몬 볼리바르는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링컨보다 수십 년 앞서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워싱턴이자 링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의 해방투쟁은 처절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전쟁을 치른 북아메리카에 비하면 안데스산맥을 넘나든 그와 그의 부대는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에 뒤지지 않는다.
 
시몬 볼리바르의 한계는 무엇일까.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남아메리카인들의 역량을 오판하였다.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면 자신이 꿈꾸는 것처럼 지역적 편견과 갈등을 추스르고 대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같은 인종적 속성과 언어 문화적 속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국가의 테두리에 뭉치기를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이합집산할 수 있다.

그가 대 콜롬비아 공화국의 이상에 얽매이지 않고, 다섯 국가들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인정하고 독립국가들의 느슨한 연결체를 구성하는데 만족하였다면 그의 삶의 후반은 더 평온하였을 것이다. 연방국가 속의 연방들만이 협력과 평화를 보장하는 수단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너무도 순수하였고, 오염될 수 없었다. 이것이 시몬 볼리바르의 삶의 원동력인 동시에 생을 재촉하는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6.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시몬 볼리바르 -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서해역사책방 17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조재선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에서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과 존재를 처음 인식하고 약간 당황하였다. 이런 역사적으로 비중있는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어째서 기억에서 망각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이 책은 문고판보다 조금 큰 사이즈에 분량도 해설을 합쳐야 간신히 200면을 넘기는 수준이다. 이렇게 적은 분량은 그만큼 이 책이 쓰여진 1940년 당시만해도 볼리바르에 대한 연구와 자료가 빈약했음을 반증한다.

그런데 본문 분량의 1/3을 그나마도 역사적 및 시대적 배경에 저자는 할애하고 있다. 이는 볼리바르의 업적이 가지는 중요성을 되새기려면 남미 독립운동의 필연성을 언급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 책은 전문적이거나 학술적 연구서가 아니다. 저자의 머리말과 역자 후기 대로 이 책은 저자의 '시몬 볼리바르 공부'의 산물이다. 게다가 20세기 전반의 저작이므로 최근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도 존재하여 시몬 볼리바르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일종의 입문서로 이해함이 마음 편하리라.
 
저자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듯 술술 풀어나가는 솜씨를 발휘하여 독자들의 흡인력을 한껏 높여주고 있음은 큰 미덕이다.
 
시몬 볼리바르, 그는 오늘날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해방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 생명, 재산, 행복과 건강을 제단에 바쳤다(P.196). 그리고 씁쓸하게 생을 마쳤다. 이것이 해방의 은인이 받은 대가였다.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콜롬비아 대공화국을 구성하겠다는 순진한 바램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고 그냥 베네수엘라(아니면 다른 나라)의 통치만 잡았더라면 그는 권력과 아마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는 현실의 영달보다는 남미의 머나먼 발전적 미래를 지향했다. 이 시점에서 불현듯 38선을 넘는 백범의 떠오른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암울한 시대의 숙명.
 
나는 참 무지하다. 시몬 볼리바르, 여기에 산 마르틴(아르헨티나와 칠레의 해방자), 그리고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수크레 등. 한 대륙을 압제로부터 해방을 이루고자 노력한 영웅들을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 수수께끼의 인물, 산 마르틴. 그는 볼리바르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리고 왜 영광의 선두에서 무명의 구석으로 스스로 물러나 초라하게 생을 마쳤는지.
 
오늘날 볼리바르의 이름은 볼리비아라는 국명에 잔존한다. 또 개명한 베네수엘라의 국명에도 들어 있다. 하지만 시몬 볼리바르가 살아서 현재의 남미를 돌아본다면 그는 기쁨보다도 슬픔과 걱정의 눈길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가 생애를 걸고 애쓴 대공화국의 후예들이 자유와 평등의 이념 아래 국제사회의 당당한 주역이 되기를 바랬을 텐데. 그리고 빈부와 계급의 차별을 건너뛰어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사회를 꿈꾸었는데.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본격 연구서가 아니라 시몬 볼리바르에 무지한 이들을 일깨우기 위한 소개서다. 따라서 이를 기초삼아 좀 더 그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인이 보라고 준 책이다.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서 서둘러 책장을 펼쳤다.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것, 어차피 후회할 바에는 해보라고 어른들이 권하는 것. 이것이 결혼이다. 아내(또는 남편)와의 결혼을 후회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지 회의적이다.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
 
저자는 문화심리학자라고 한다. 낯선 영역이다. 이력을 보니 '노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가생활이니 레저 등. 이 책도 이러한 맥락의 연속으로 생각된다.
 
다소 도발적인 표제로 세인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하여 일약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갔다. 이제 저자는 바램대로 캠핑카 구입을 할 여건이 갖춰진 셈이다.
 
이 책은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대한민국 남자들의 내외를 관찰하고 있다. 그들의 허장성세와 내면의 연약함을 까발리고 있다. 그렇다, 대한민국 남자들. 밖에서 치이고 안에서 대접 못 받는 과거의 유산들 말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그리고 정보사회로 시대적 추이는 급격하게 변화해 가는데 아직 많은 중년 남성들은 산업사회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머물고 있다. 소위 가장으로서 밥벌이의 지겨움을 천형처럼 등에 지고 살아간다. 월급만 갖다 바치면 의무는 완수했다는 단순한 사고방식, 그러나 가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불쑥 머리가 굵어진 자녀와 가사에 숙달한 아내에게 남편을 고맙지만, 불편하기만 한 존재다. 그러니 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은 남편을 갑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남자들이 모두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가 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만들고 지켜나갈 대상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행복' 말이다. 사람이 사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하기 위함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듯이 행복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을 저자는 '재미'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저러한 각종 기법들을 재밌는 에피소드에 버물려서 감칠맛 나게 제공하고 있다. 무심히 책장을 넘기다보면 슬며시 웃음 짓는 자신의 모습에 몇 번씩이나 흠칫 놀라곤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출하는데도 이렇게 어색하고 주저한다. 일상은 고저없이 단조롭기 그지없다. 우리네 삶은 사막같이 휑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가족의 출발은 부부다. 가족의 행복은 부부간 행복에서 비롯된다. 부모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데 화목한 가정은 언감생심이다. 부부 사이가 경제적 역할 분담과 육체적 즐거움의 충족으로 필요충분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소통의 문제, 즉 대화의 중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시시콜콜히 주절거리는 아내와, 입술을 꾹 다물고 간간이 응~하며 반응을 보이는 남편의 대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점차 횟수도 줄어든다. 부부간 대화도 활성화되지 못한 마당에 부모 자식 간은 불완전하다.
 
이러한 상황이 오로지 문화심리학적 현상이라고 한정지을 수는 없다.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심리학에 앞선 생리학적 측면도 외면할 수는 없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구조의 차이와 성 역할의 구분에서 비롯된 역사적, 문화적 배경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저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침대 시트를 흰색으로, 형광등을 부분 조명으로 바꾸며, 마음자세를 고치면 삶이 바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아내(또는 남편)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완벽한 배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후회하지 않더라도 아내(또는 남편)는 후회할 수도 있다. 마냥 후회만 하며 살아간다면 너무 불행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분투노력한다면 삶은 더욱 피곤하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상대방과의 결혼을 후회하는 빈도가 증가하지 않도록 적당한 수준에서 조절하는 데 있다. 그 첫걸음이 소통 즉, 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부간의 화기애애한 대화 전개는 참으로 어렵다. 이제 대화의 기술이 필요할 차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8.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設, 첫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김훈은 본디 산문작가다. 지금은 소설가로 더 유명하지만 <자전거여행>을 펼치면 그의 원류가 무엇인지 쉽사리 알게 된다.
 
이 책은 그가 유명세를 타기 전에 소위 '생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썼던 토막글'(책머리에서)이다. 그래서일까. 조금을 더 순수한 그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음이 기쁘다. 더구나 세상을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바짝 다가서는 세설(世說)이기에.
 
김훈 산문의 본령은 세설과 얼만큼의 관련이 있는가. 자전거여행과 역사소설의 거대담론을 배격한 개별성의 소중함은 당대에 대하여 개별성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투쟁이다.
 
세설은 휴머니즘이면서 정치성을 담고 있다. 내가 비통해하는 현상을 그들은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순전히 감성적 코드에 기대는 예술과 시사 글의 차이다. 따라서 세설을 쓰는 행위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세상엔 갖가지 세설이 넘쳐난다. 누구도 남의 글과 말을 보거나 듣는 대신 자신의 것을 표출하는 데 급급하다. 세상에 내보이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슬픈 존재, 그것이 오늘날의 세설이다.

그리고 세설은 당시성의 한계를 지닌다. 사건의 핵심과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문장도 세월이 경과하면 상황적 배경 설명 없이는 후대의 읽는이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고전으로 승화하면 시대적 간극을 훌쩍 넘나드는 예술과는 또 다르다.
 
다채로운 관심사 중 전직 언론인답게 언론 개혁에 관한 글(사실과 의견/개수작을 그만두라/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은 직설적으로 현실에 메스를 대지 않는 김훈으로서는 예외다. 하긴 그는 "당대를 향하여 할 말이 나에게 있는 것인가"(P.78) 물음을 던지고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을 하겠다고 이미 모두에 선언하였다.
 
또한 몸과 몸의 연장에 대한 관심은 어떠한가. '축구를 좋아하는 까닭'에서 그는 "축구공은 끝끝내 인간의 몸의 질감으로 굴러가고"(P.187)고, "공을 찰 때 이 세계는 인간의 몸이 연장된 공간이므로"(P.188) 축구를 좋아하는 까닭을 밝히고 있다. 이는 '자전거 타기'에서 "사람들이 두 다리의 힘으로 바퀴를 굴려서 이동하는 일의 기쁨"(P.190)에 대해 언급할 때 두드러진다. 김훈은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현대 문명에서 오히려 석기 시대의 감성 코드를 지니고 있다. 석기인이 돌도끼와 돌칼로 사냥을 하는 것처럼 그에게 "모든 연장은 손의 연장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P.174)".
 
산문은 위험한 글이다. 산문은 글쓴이의 웅숭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한껏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는 이 모든 게 허구라고 선언하면 신간 편한 소설과는 유가 다르다. 소설에는 3인칭 시점이 일반적이다. 산문에서는 1인칭 시점이 지배적이다. 글쓴이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마음의 양식을 오래오래 되새김질하여 내놓는 푹 버무려진 한 뭉텅이의 글 다발, 그것이 산문이다.
 
세상 사람들아, 김훈을 알고 싶으면 그의 산문을 읽을지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6.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4년 김훈은 다시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다. 4년간의 시차, 이전과 이후의 그는 변함없지만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확연히 다르다. 당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그만큼 그의 자전거 페달이 주는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환희와 좌절의 순간도 겪었다.

이제 그의 바퀴는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4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었던가. 늙은 것은 전국의 산하와 마을을 누빈 풍륜인가 아니면 그 길을 여는 허벅지인가. 어쩌면 훌쩍 떠날 촌음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는 유명 작가의 허울이 주는 속박인가. 자전거는 다시금 여행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횡적 범위가 축소된 반면 종적 깊이는 그 웅숭깊음을 더해간다.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둔 일산 신시가지와 김포 전류리 포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착잡하다. “강력하고 완강한 변하는 것들과 위태로워서 사소한 변하지 않는 것들”의 전복된 가치를 안타까워하며, 현대 도시문명의 특징인 “단절로서의 변화”를 “수용으로서의 변화”와 대비하여 사색한다. 일산 신도시만 가지고도 이럴진대 최근의 김포 한강신도시와 파주 교하신도시에 대한 작가의 소회는 더욱 궁금하다.
 
말라가고 있는 남양만 갯벌과 사라지는 염전 등 소멸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을 보면 아, 김훈은 영락없는 작가임을 깨닫는다. 슬픔에 대한 본능적인 친연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성공하거나 성공을 꿈꾸는 소시민들은 방조제에서 자연을 뒤엎는 인간의 힘과 개발의 부푼 희망을 웅변할 것이다.
 
방조제와 갯벌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 정리된 듯하다. 기존에 진행 중인 방조제공사(간척사업)는 아마도 새만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환경단체들의 맹렬한 저항과 환경파괴에 대한 정치권의 부담감은 신규 공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갯벌과 기수역(밀물과 썰물의 교차수역)에 대한 향후 과제는 기왕에 만들어 놓은 방조제와 하구언 처리에 관한 것이다. 강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영산강 중류로 고깃배가 드나들고 갯벌에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여 바지락 등 수많은 갯벌 생물이 생을 꾸려갈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이 보다 아름답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에 보전보다는 개발이 우선순위를 지녔다. 당장 배고파서 죽어 가는데 보전은 먼 훗날의 얘기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큼 되자 환경과 보전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서울 시내의 수많은 복개하천의 복원 정책을 보라. 대세는 복원이다. 아, 그런데 내가 사는 동네의 조그만 하천은 언제나 복원되려나. 주변에 변변한 산도 공원도 없는 삭막한 주거지역인 그곳.
 
남한산성을 돌아보는 작가의 시선을 남다르다. 이미 소설의 구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나 보다.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언어의 전쟁은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이었다...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고,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P.203~204) 작가는 남한산성을 통해 치욕도 삶의 일부라고 삶이든 역사든 온전할 수는 없음(P.208)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을 다소 모호한 소설의 숨은 목소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남한산성의 현질사든 아니면 아산의 현충사 등 이러한 아쉬운 기념과 추억의 자취를 반기지 않는다. 이러한 흔적은 태평성대에는 세워지지 않는다. 난세와 전란의 시기에만 추앙된다. 그래서 나는 충신의 등장을 원하지 않는다. 충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선호한다.
 
김훈이 차기작의 소재는 무엇이 될 까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자전거 여행에 답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양수리(두물머리)가 유력하지 않을까? 정다산. 치욕과 침묵이 함께하는 모순적인 내면과 외면의 압박. 작가의 펜끝이 언젠가는 다산에게 다가올 것으로 감히 예감하고 싶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