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전
이형식 옮김 / 궁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통상 <롤랑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중세 프랑스의 서사시다. 역자가 굳이 '롤랑전'이라고 표제를 붙인 사유는 옮긴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으며, 동의여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다.
 
일단 번역을 거치는 시의 속성 상 원작의 향취를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서정시가 아니고 서사시(이를 무훈시라고도 한다)이므로 작품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 등에 비하면 분량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에네이스>는 두툼한 책의 부피에 놀라서 책상에 널브러진 채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있는 신세다.

내용은 샤를마뉴(카를, 카를로스) 대제 당시를 배경으로 스페인 정벌과 뛰어난 기사 롤랑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시각에서 바라본 무훈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확실히 작품 전체에 걸쳐 중세를 압도하던 기독교의 정신이 충만하며, 롤랑과 그의 동료들, 적국인 사라센 용사들의 빛나는 무공이 전편에 충일하다. 광신과 잔혹은 고대와 중세의 공통된 특성이므로 문제삼지 말자. 오히려 신과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교도'들이 승리할 수 있었음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황제마저 발리강의 칼에 투구가 박살나지 않았던가(261절). 적어도 그들에 대해서는 종교를 떠나서 용맹의 묘사에서는 공정함을 유지하고 있음이 이 작품의 덕목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렇게 단순하게 평가를 내리기에는 뭔가 묘한 구석이 있다. 롤랑과 가늘롱의 대립과 이의 파생으로 롤랑의 파국으로 이어지는 부분, 이것이 어쩌면 이 작품의 진면모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주요 인물의 관계 설정을 보자. 가늘롱은 롤랑의 의부(義父)이며, 롤랑은 샤를마뉴 황제의 조카다. 그리고 가늘롱은 황제의 매제가 된다. 즉 가늘롱의 처가 황제의 누이다.

그런데 롤랑과 가늘롱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 먼저 사라고사 마르실 왕에게 사신을 보낼지 여부를 놓고 롤랑이 반대를 주장하자, 가늘롱이 이를 반박한다. "오만에서 비롯된 진언이 가납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미친 자들은 내버려 두시고, 현명함을 취하소서!"(15절). 결국 가늘롱의 진언대로 사신 파견이 결정되자 롤랑은 가늘롱을 적임자로 추천한다(20절). 가늘롱 백작의 고뇌하는 장면에서 이 임무의 중요성과 동시에 내재한 위험성의 크기를 유추할 수 있다. 자칫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전례(바장과 바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도 롤랑의 자신의 의부를 추천하였고, 주저하는 가늘롱을 비웃기조차 한다. 이것은 보통 인간관계에서는 있기 힘든 경우다.
 
이에 대해 가늘롱이 적개심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늘롱은 마르실 왕의 사신인 블랭깡드랭과의 대화에서 그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29절~30절), 사라센인의 손으로 롤랑을 제거하려고 계획한다(46절~47절). 그렇다고 가늘롱이 비열한 겁쟁이라고 매도한다면 오해다. 마르실 왕 앞에서 당당한 태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장면에서 사라센인들이 감탄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참으로 고매한 신하로다!"
 
결국 샤를마뉴 황제의 군대는 마르실 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스페인에서 퇴각을 결정한다. 그리고 후위 부대를 남겨두는 문제로 한바탕 파란이 벌어진다. 이번엔 가늘롱이 롤랑을 추천한 것이다. 이에 황제는 "몹시 노한 기색으로...그대는 진정 악마로다"(58절)라고 하며 가늘롱을 비난한다. 롤랑 추천이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지 의아스럽다. 롤랑이 이 임무에 적임자라는 점은 황제가 신임하는 넴므 공작의 동의로 드러난다. 그런데 황제와 롤랑은 가늘롱에 악담을 퍼붓는다. "아! 비열한 자, 출신이 더러운 악당이로다."(60절). 즉 유추하건대 이 임무도 또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지난한 과업이다. 그러기에 롤랑이 가늘롱을 마찬가지로 비난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롤랑에 대해 살펴본다. 롤랑은 당대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는 용사이며, 동료 올리비에와는 굳은 우정으로 맺어져 있다. 올리비에는 롤랑 못지않게 용맹하면서도 지혜도 지니고 있다. 이런 올리비에가 롤랑에 대하여 "그대의 성정 혹독하고 오만"(18절)하다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후위대로 잔류하다가 사라센 대군에 의해 곤경에 빠진 롤랑에게 올리비에는 수차에 걸쳐 황금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황제의 본군을 되돌려 구원군으로 삼자고 조언한다. 롤랑은 이를 무시한다(83절~86절). 만약 이때 롤랑이 뿔피리를 불었다면 롤랑과 동료 기사들은 파멸을 맞지 않고 사라센은 대패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명한 조언을 거부한 롤랑은 역시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임을 보여준다. 나중에 롤랑이 태도를 바꿔 구원군을 부르겠다고 하니 올리비에는 그에 대해 야유와 비난을 쏟아붓는다(129절~131절).
 
역사는 힘센자에 의해 윤색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간혹 존재한다. 강대국일수록 실패의 치욕을 숨기고자 혈안이 되곤 한다. <롤랑의 노래>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번 조작된 역사의 뒤집기를 시도하자. 먼저 샤를마뉴 황제의 스페인 원정이 7년간 지속되면서 아직 사라고사를 깨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세와 사기가 불리해지자 프랑스 내부에서 주전파와 주화파가 대립한다. 황제와 롤랑은 주전파고, 가늘롱은 주화파라고 볼 수 있다.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황제의 군대는 퇴각하고, 적의 추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후위군을 롤랑이 지휘하게 된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는 군대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보편적 전술의 하나다. 그만큼 후위군은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결국 롤랑과 후위군은 몰살을 당하고 샤를마뉴는 장기간의 원정에도 성과없이 씁쓸하게 귀국한다. 한편 프랑스(기독교)의 자존심을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하느님의 신성한 군대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이 패전의 배후에는 배신자가 있을 것으로 조작하고 주화파인 가늘롱을 제거한다. 그리고 서사시에서는 황제가 롤랑의 복수를 멋들어지게 해치우고 나아가 사라고사뿐만 아니라 전 사라센의 황제인 발리강 마저도 죽이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것이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와서 황제가 가늘롱을 재판에 회부하자 신료들은 황제에게 가늘롱의 무혐의를 주청한다. 가늘롱을 "고결한 신하"(276절)라고 칭하면서. 이에 황제는 신료들을 "그대를 모두 반역자로다!"(276절)라는 반응을 보인다. 즉 황제와 신하들 간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가늘롱은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주전파의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따름이다.
 
이 작품의 종결은 깊은 여운과 슬픔을 남긴다. 가늘롱을 처단한 후 밤이 되어 이제 휴식을 취하려는 이백세 넘은 늙은 황제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 이교도들이 포위하고 있는 앵프 성을 구원하라고 전갈한다.
 
"황제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다. 그가 홀로 탄식한다.
"하느님, 저의 삶이 어찌 이리도 고단하나이까!"
 그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 그는 자기의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291절)
여기에서 기독교적 신성의 영광과 빛나는 무훈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 인터넷에서 샤를마뉴 황제의 스페인 원정에 대해 잠깐 찾아보았다. 사라고사는 피레네 산맥을 겨우 넘어선 곳에 있다. 스페인 중에서도 북동부에 있는 곳이다. 칠년 간 원정의 결과가 겨우 사라고사도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면 치욕스럽기 그지없는데, 게대가 퇴각하다가 대패를 당했으니 더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샤를마뉴 황제는 내치에 힘썼다고 하니 참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깨닫는 바가 많다"(184절)는 격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산세계문학총서 007.

대산세계문학총서에 수록되지 않았다면 읽기는커녕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했을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대산문화재단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 작품의 문학사적 중요성이나 흑인문학에서의 위상에 관한 시시비비는 제쳐놓고 소설로서의 재미가 제법 녹록치 않다.

재니라는 혼혈 흑인여성이 여성으로 자라서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내지 사별의 과정을 통하여 흑인여성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도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흑인여성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형식적인 노예해방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흑백차별이 엄존하던 미국 중남부. 당시 흑인여성은 제3의 성이다. 백인과 흑인남성 아래에 존재하는.
 
재니는 결혼이란 "저 깊은 뿌리에서 여린 가지까지 행복에 겨운 온몸의 떨림이 모든 꽃송이로 흘러들며 환희에 전율하는 것"(P.21)임을 계시받는다. 할머니의 애정어린 독촉에 못이겨 마지못해 한 첫번째 결혼에서 재니는 무애정한 결혼생활의 무의미성을 절감한다.

그러다가 조 스탁스를 만나고 과감히 그를 따라나선다. 비록 계시의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변화와 기회"(P.43)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임을 기대하며. 그와의 결혼생활을 이십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외견상 그녀의 선택은 성공적이다. 숙녀 대접을 받는 시장 부인으로 존칭되며 대체로 평온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에. 그런데 그녀는 조 스탁스의 아내가 무엇을 의미함을 점차 알게 된다. 여전히 독자적인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아닌 아름답지만 열등한 존재로서의 인식.
 
재니가 티 케이크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바로 그의 일상에 충실하며 무기력하지 않으며 열성적인 삶의 자세다. 고정된 직업 없이 그때그때 생기는 일자리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경제적 조건에도 재니와 티 케이크는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재니에게는 일생 처음 겪는 주체로서의 삶의 생생함이었다.

만약 재니의 품성이 내면의 정열과 활력을 뿜어내지 않았다면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조 스탁스가 만들어준 인형의 집에서 안온한 생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또다시 사별로 막을 내리는 또다른 선택을 과감히 하였고, 비록 슬픔에 가득찬 채로 귀가하였지만 그녀의 내일은 분명히 과거로의 회귀는 아닐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다지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평이한 전개로 일관한다. 순간적으로 과대평가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문득 일어나곤 한다. 그러다가 조 스탁스와의 결혼생활 파경과 티 케이크를 만나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하더니 플로리다 습지대에서의 노동자의 삶과 허리케인 장면에서는 흥미진진함이 배가되어 책장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이런 작품이 1970년대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평가를 받게 되었다니 의아할 뿐이다. 그것도 흑인들에서마저 무관심의 코너에 방치되었다는 점이 말이다.

문학이 사회선도를 결과할 수 있지만, 사회선도를 목적으로 하는 문학은 영속하지 못한다. 흑인여성 작가로서 허스턴은 당대의 대세인 계급적, 투쟁적 시각을 비껴가며 인간 자체에 더욱 천착하였다. 이것이 그녀의 작품이 당대에서 망각되었지만 현대에 와서 부활한 성공한 역설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트리스트럼 샌디 2 대산세계문학총서 2
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산세계문학총서 2.
 
토비 삼촌과 워드먼 부인 사이의 연애 해프닝으로 드디어 제9권이 막을 내린다. 이때가 주인공 트리스트럼 샌디가 몇 살 무렵인지 알 수 없으며,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주인공의 삶과 견해란 부제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버린지 오래다. 제9권이 마지막 권이 된 것은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로렌스 스턴의 건강이 좋았더라면 아마 20권도 충분히 발표할 수 있었으리라.
 
전반부에 비하여 이 후반부는 파격적인 글쓰기에 조금 익숙해진 듯하다. 아니면 실험적인 면모가 다소 약화된 것인지. 상대적으로 실소와 파안대소를 자아내던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조금 더 현실에 가까워졌고 작가의 이야기가 진지함을 머금고 있다.

여전히 라블레의 후손다운 돌출적 단편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적어도 화자의 일관성이 작품 전체에 체계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 선구자라는 영예를 받은 작품답게 그러한 기법이라고 볼만한 독백 내지 심리분석 등(12장~14장이 기억에 남는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한 장소적 배경도 영국을 떠나 프랑스도 잠시 여행 무대로 삼고 있음도 흥미롭다.
 
고전이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고전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상념이 스며나온다. 출판사마다 소위 세계문학전집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기획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단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선정기준은 제각각이다. 검증된 고전 위주가 있는가 하면 근,현대와 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 작가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기존의 것만 고집하면 편협과 진부함의 함정에 빠질 것이요 참신함을 강조하면 깊이를 결여한 감각에 치중하게 될 것이다. 고전이 고전다운 것은 시간의 엄혹한 테스트를 견디며 살아남았다고 볼 때 동시대의 작품들이 고전으로 살아남을지는 섣불리 판정내릴 수 없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200여년 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고전의 주류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소개된 점으로 볼 때 시간의 테스트는 이겨내었다. 다만 인구에 회자되기 위해서 필요한 감동의 깊이를 구비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본다. 단순히 기이함으로 인해 각인된다면 작가에게도 너무 슬픈 일이리라.
 
역자의 말처럼 독자가 등장하는 재담이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두 이해하고 따라갈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지도 않다. 이 소설의 재미, 혹은 그 목적은 일관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과 그 혼란스러움 자체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거창한 업적을 남긴 영웅과 귀족계급이 아닌 중하위 계층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이들의 적나라한 실생활의 자질구레함을 가감없이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황당을 넘어선 시대적 의의를 지닌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9.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트리스트럼 샌디 1 대산세계문학총서 1
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산세계문학총서 1
 
18세기의 프랑수아 라블레. 이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으며 머릿속을 문득 스쳐지나간 인상이다. 그만큼 라블레의 후예다운 이가 또 있을까?
 
1권은 원작의 총 9권 중에서 제4권까지에 해당한다. 이제 겨우 트리스트럼 샌디는 출생하고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작가는 샌디의 삶과 견해를 기록한다는 미명하에 무수하게 당대에 대한 무자비한 풍자와 조소, 비판을 해학의 스타일을 빌려 독자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있다. 그 구성의 독특함을 작가 스스로 22장 말미에 밝히고 있다.

"이런 장치로 인해 이 작품의 구성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형식을 이루며, 두 가지 상반된 동작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지엽적이면서도, 점진적이라고 하겠지요,-그것도 동시에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본론과 그 나머지 부분들이 서로 교차하도록 구성하여, 지엽적인 움직임과 점진적인 움직임을, 바퀴 안에 바퀴를 넣어, 서로 복합적으로 얽히게 만들어, 기계 전체가, 지속적으로, 돌아가도록 했으며.."
 
의도적 가벼움은 젠체하는 권위를 타파하는 확실한 무기로서 일찍이 라블레가 중세적 무거움과 위선을 해소하기 위하여 채택한 수단이다. 스턴이 라블레의 후계자라는 점만 명심하면 처음 소설이 주는 낯섦과 당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의 미로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다. 권위당국 입장에서는 웃음이 주는 무기력과 무장 해제로 인해 작가를 처벌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이 작품은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지만, 통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문학사 개설서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반면 '20세기를 선취한 18세기 소설'로서 현대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선구자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런데 뭐가 의식의 흐름이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로 끊고는 지엽적인 이야기와 대화가 엉뚱하게 전개되다가 다시 합류하도록 하는 형식이? 형식적 특성은 빈번한 의도적 작가 개입과 전개 중단에 있다. 자가는 인물 뒤가 아니라 인물과 나란히 때로는 전면에 나서 작품과 독자를 매개하고, 전개의 방향을 돌려놓으며 자기변호를 일삼는다. 현대 창작기법에서는 암묵적 금기사항으로 알고 있는데.
 
가르강튀아처럼 외설적 뉘앙스와 터무니없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토비 삼촌의 공성, 진지, 대포 등에 대한 황당한 열정과 아버지의 코와 이름에 대한 집착을 보라!)이 작품 전면을 지배하는데, 작가는 해학의 배후에 날카로운 비수를 드리우고 있으니 이 점에서 참으로 현대적일 수밖에.
 
문학적 주제에 다가가는 대조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하나는 정공법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대다수의 작가들이 해당한다. 그들의 작품을 주제의 묵직함을 반영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자세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엄숙함이 있다.
 
반면 라블레, 세르반테스, 스턴과 같이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치환하여 무거움의 하중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문득 깨닫게 하는 작가들도 일군에 존재한다. 그들의 수는 비록 적지만 이는 보기 드문 천부의 재능을 타고나야만 가능하다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기인한다.

이제 트리스메기스투스 샌디의 말을 이어서 들어볼 차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9.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칼릴라와 딤나 - 개정판
바이다바 지음, 이븐 알 무카파 아랍어 역,이동은 옮김 / 강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특별한 이력을 지닌 고전이다. 원전은 고대 인도(기원전)의 <판차탄트라>, 이것을 페르시아의 바르자위가 6세기에 당대 페르시아어인 파흘라위어로 번안하였으며, 또 이것을 이븐 알 무카파가 8세기에 아랍어로 번안하였다.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 각국으로 번역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끊임없는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시대를 초월하여 음미하고 교훈 삼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에 있다. 여기에는 작품 외형이 우화라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번안의 형태를 취하였음은 문화적 간극을 메꾸고 당대인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서기 위한 방편임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20세기 전후하여 우리를 되돌아보더라도 많은 번안 작품들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표제 ‘칼릴라와 딤나’는 첫 두 개의 장에 등장하는 재칼 친구의 이름인데,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큰 이야기이므로 번안 과정에서 표제로 삼은 것 같다. 칼릴라는 선한, 딤나는 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야기는 1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장의 머리에는 다브샬림 왕이 현자 바이다바에게 희망하는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면, 바이다바가 그에 적합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사자와 소의 장’은 “신뢰가 두터운 친구 사이에 간교한 모사꾼이 끼어들어 그들을 이간시키고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각 장도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여러 편의 짤막한 우화를 담고 있다. 즉 이야기가 이야기를 품은 액자 구조의 서술 형식이 오래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길게는 수천 년 전, 짧게 보아도 일천여 년 전의 내용으로 보기에는 그 시의성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 우화가 지니는 묘미다. 언뜻 동물들의 객담에 지나지 않나 싶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보다도 그 여운은 제법 길다. 그 잔잔한 메아리가 가슴 속의 반향을 일으켜 장구한 세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전 우화는 먼 옛적과 지금의 인간사가 본원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는 재미를 부여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군신, 친우, 부자 간의 관계의 본질은 변함없으며 재화로 비롯한 계급 분화와 갈등은 여전하다.
 
<멧비둘기의 장>에서 큰 쥐의 신세타령:
 “돈이 없으면 왜 그토록 비참해지는지 아시오? 가난이란 체면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오. 체면을 포미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면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오....가난은 가장 모진 시련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갖은 멸시와 모욕이 빗발치는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소...”(P.193-194)
 
또한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원숭이와 숫거북의 장>에서 거북이한테 속아서 바다로 간 원숭이가 자신의 심장이 몸에 없다고 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우리의 토끼와 자라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전승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간단히 보더라도 우연한 문화적 공통으로 간주하기에는 제재와 구성의 유사성의 정도가 너무 크다.
 
우리의 현대 문화가 서구에 편향되어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등의 뛰어난 측면을 외면한 지 오래다. <칼릴라와 딤나> 또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수 년 밖에 안 되어 어찌 보면 서구인보다도 더 서구 지향적 우리 문화의 병폐의 예증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 수용 과정과 그 이후의 묵수(墨守)적 태도를 볼 때, 우리는 지나치게 순수성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된다. 사상과 종교 등은 모두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필요성에서 발명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네는 이를 절대시하여 이에 어긋나는 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니 이단이니 하여 한 치의 유연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지난 세기 후반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데올로기가 천륜보다도 더 중시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서구 문명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보다 많은 이들이 균형 잡힌 문명 시각을 지니고 국경 밖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바란다. 여전히 인도와 아랍의 고전 상당수가 우리의 손을 벗어나 있다.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를 접하면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임을 각성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9-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0.1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