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 길벗어린이 문학
미하엘 엔데 지음, 프란츠 요제프 트립 그림, 선우미정 옮김 / 길벗어린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발표한 후속작이다. 대표작인 <모모>에 비하면 국내 번역본은 숫적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직접적 동화라는 외관상 차이점에 기인한 듯하다. 하지만 전작도 마찬가지지만 내용을 보면 단순한 동화는 아니다. 오히려 중·고교 이상 성인들에게 더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작의 모험담이 산맥과 사막이 배경이라면 여기서는 바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인어공주 수르술라피치와의 조우
 물의 요정 우샤우리슈움
 
그리고 바닷불을 밝히기 위한 자석 암초에서 발견한 소위 영구기관으로 비행을 하는 기관차
 
몸바꿈을 한 '슬기로운 황금용'에게서 들은 정보로 13인의 해적과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하고 포로가 되는 일행과 정말 어이없게 해적들을 쉽사리 제압하는 짐 크노프
 
짐 크노프의 출생의 비밀과, '있어서는 안되는 나라'와 '잠발라'의 관계. 그리고 최고의 반전은 '13인의 해적'의 진실에 있다.
 
정말 종반부로 갈수록 극적인 사건의 반전이 흥미진진함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초·중반부의 다소간 밋밋한 전개를 일거에 불식시킨다.
 
전작이 예측치 못한 판타지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하여 감탄을 자아냈다면 - 룸머란트, 만달라, 세상의 왕관 산맥, 세상의 끝 사막, 용들의 도시 쿰머란트 등을 보자 - 후속작은 보다 참신과 흥미를 제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법 컸을 것이다. 엔데는 이를 멋지게 극복하였다. 당시 독자들에게 얼마나 환호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로 만들어도 꽤나 호응이 좋을 텐데. 동화인 만큼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엔데는 연이은 작품으로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선다.

엔데의 작품의 기조가 여기서도 뚜렷하다. 현실과 낯선 세계를 대비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그 무엇을 되찾아 주고자 함이다. <모모>는 '시간'의 의미를, <끝없는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조화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전작과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에서 엔데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짐 크노프의 비밀'(P.322)에서 언급하였듯이 선의는 옳지 않은 것을 옳게 만든다는 소박하지만 자명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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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길벗어린이 문학
미하엘 엔데 지음, 프란츠 요제프 트립 그림, 선우미정 옮김 / 길벗어린이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모>로 유명한 미하엘 엔데의 출세작이다.

그리고 소설이 아니라 '동화'이기도 하다. 이 점은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노랑 표지 배경에 컬러로 채색된 두 주인공의 이미지가 먼저 심상치 않다. 또한 출판사 이름을 봐도 아동용 도서출판사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중간에 나오는 삽화가  또한 묘미다. 있으나마나한 존재감이 희박한 그저 그런 유형이 아니라 본문의 이해와 재미를 배가시키는 동화에 빠져서는 안 되는 진정한 삽화 말이다.
 
동화는 어린애들을 위한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다가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자세가 바뀌었다. 어쩌면 동화는 이야기의 가장 소중한 원초적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화답게 배경과 등장인물의 면면이 흥미롭다. 철칙 제1이 일단 아동들의 흥미를 유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미야말로 동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조그만 섬나라 룸머란트. 여기에는 달랑 4명만이 거주한다. 알폰스 12시 15분전 임금님, 뭐요 아주머니, 소매씨, 그리고 기관사 루카스. 룸머란트는 이들이 살기에도 빠듯한 작은 섬이다. 그리고 어느 날 소포로 우리의 꼬마 주인공 짐 크노프가 배달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화는 환상을 자주 다룬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제재는 호기심 증폭이 어렵다. 적당히 미지의 것이 이야기 전개 및 관심 유도에 효과적이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우리 옛이야기도 시작은 항상 동일하다.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 또한 EBS의 인기 프로그램인 '모여라 딩동댕'의 꾸러기 마을도 어딘지 모르는 곳에 존재한다. 대체로 그러하다.
 
그래서 등장인물과 사건의 전개도 때로는 터무니없게 느껴진다. 기관차로 항해를 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동화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만달라 국가의 투명한 나무와 빨갛고 하얀 줄무늬 산, 메아리 골짜기, 그리고 꼬마친구 핑 퐁의 존재는 어떻고. 더구나 겉보기 거인 투르 투르 씨와 용의 도시 쿰머란트, 그리고 떠다니는 섬 '새 룸머란트' 등등.
 
성인이 동화를 읽는 데는 한 가지 난점이 따른다. 이미 성인은 현실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판타지를 경시한다. 한마디로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고 환상을 갖는 이들을 비판한다. 이해타산과 처세에 능해야 진정한 성인으로 사회인으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그런 그들이 동화 속 설정과 가치관이 순진하게 받아들이기는 무척 어렵다. 이야기답게 술술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도중에 뚝뚝 끊긴다. 독자와 피독자의 대립과 긴장 관계다. 이런 점에서는 아이들이 부럽기조차 하다. 그들은 아직 유연하다.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는 그의 후기작인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와는 상이하다. 지향점이 다르다. 동화로서의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 조금 더 성인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스토리 전개의 재미 전달에 주력한다. 그 점이 성공 요인이자 이 책이 더 자주 인구에 회자되지 못하는 한계이다. '동화'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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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끝없는 이야기 2
미하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2월
평점 :
절판


<모모>를 읽은 후 갑자기 그의 대표작들이 궁금해졌다.

'끝없는 이야기', 영어로는 Never Ending Story 라고 한다. 영어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 영화 때문이겠지만.
 
현실계와 환상계를 넘다드는 독특한 구성이 우선 재미를 준다. 또한 책 속의 책이라는 진부한 기법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실제 책 디자인도 똑같이 처리한 점도 흥미롭다.
 
바스티안과 아트레유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바스티안의 상상 속의 자기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전개에 따라 둘 사이의 간극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1권의 주인공은 아트레유이며, 2권의 주인공은 바스티안이다.

이 작품은 넓게 보면 바스티안의 정신적 성장을 고양하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어머니 죽음 이후 아버지와 소통이 단절된 그는 점차 세상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결국 환상계에서 돌아온 후 바스티안은 다시금 아버지와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다는.
 
하지만 엔데는 결코 아동작가가 아님을 상기할 때 표면적인 주제보다는 현실계와 환상계의 관계 회복을 주된 테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멀어진 바스티안이기에 오히려 상상의 세계에 탐닉하고 이어 환상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실계를 망각하고 환상계에서 안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 환상계를 위해서도 불행하다. 그 환상계는 바스티안의 상상력에 전적으로 존재를 의지한다. 그래서 바스티안은 환상계를 구할 수 있었다. 진부한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어린 왕녀에게 부여함으로써.
 
바스티안이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환상계는 물론 그 자신도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다. 더 이상은 참다운 인간이 아니게 된다. 결국 현실과 상상의 조화로운 균형이 바람직한 인간상임을 작가는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이제는 속도와 이익만이 인생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상상 혹은 환상(이것은 애우 포괄적이다. 문학과 온갖 종류의 예술은 이것이 기반을 두고 있다.)에 가슴을 열어줄 의사가 없다. 즉 환상계를 무너뜨릴 '무(無)'가 점차 확산되고, 마침내 환상계 전체에 퍼지면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기계로 전락하는 결과다.
 
바스티안은 자신과 환상계를 구하기 위하여 환상계에 들어가야 했지만, 다시금 동일한 이유로 환상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인간은 대지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생을 영위하는 존재다.
 
엉뚱한 느낌이지만 아트레유가 환상계를 구할 영웅을 찾기 위해 환상계를 헤매고 늑대인간이 이를 추격하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중간계를 헤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한 바스티안이 아트레유와 한판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마찬가지로 미나스티리스의 전투가 연상된다. 영화로 인한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엔데는 서양 고대 민담에서 차용한 갖가지 상상의 피조물과 환상적인 스토리라인을 구사하여 의외로 장대하며 흥미로운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거기에 인간 존재의 깊은 균형을 이루는 두 요소 간의 조화의 중요성을 정교하게 삽이하여 자체로 빼어난 금자탑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흥미진진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지나치게 서양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많이 담고 있어서 내게는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장애를 준 듯하다. 차라리 <모모>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탈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게 오히려 내게는 친숙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 같은 일부 동양 독자들의 불평일 뿐 서양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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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4.1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끝없는 이야기 1
미하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2월
평점 :
절판


<모모>를 읽은 후 갑자기 그의 대표작들이 궁금해졌다.

'끝없는 이야기', 영어로는 Never Ending Story 라고 한다. 영어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 영화 때문이겠지만.
 
현실계와 환상계를 넘다드는 독특한 구성이 우선 재미를 준다. 또한 책 속의 책이라는 진부한 기법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 실제 책 디자인도 똑같이 처리한 점도 흥미롭다.
 
바스티안과 아트레유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바스티안의 상상 속의 자기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전개에 따라 둘 사이의 간극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1권의 주인공은 아트레유이며, 2권의 주인공은 바스티안이다.

이 작품은 넓게 보면 바스티안의 정신적 성장을 고양하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어머니 죽음 이후 아버지와 소통이 단절된 그는 점차 세상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결국 환상계에서 돌아온 후 바스티안은 다시금 아버지와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다는.
 
하지만 엔데는 결코 아동작가가 아님을 상기할 때 표면적인 주제보다는 현실계와 환상계의 관계 회복을 주된 테마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멀어진 바스티안이기에 오히려 상상의 세계에 탐닉하고 이어 환상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실계를 망각하고 환상계에서 안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 환상계를 위해서도 불행하다. 그 환상계는 바스티안의 상상력에 전적으로 존재를 의지한다. 그래서 바스티안은 환상계를 구할 수 있었다. 진부한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어린 왕녀에게 부여함으로써.
 
바스티안이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환상계는 물론 그 자신도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다. 더 이상은 참다운 인간이 아니게 된다. 결국 현실과 상상의 조화로운 균형이 바람직한 인간상임을 작가는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이제는 속도와 이익만이 인생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상상 혹은 환상(이것은 애우 포괄적이다. 문학과 온갖 종류의 예술은 이것이 기반을 두고 있다.)에 가슴을 열어줄 의사가 없다. 즉 환상계를 무너뜨릴 '무(無)'가 점차 확산되고, 마침내 환상계 전체에 퍼지면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기계로 전락하는 결과다.
 
바스티안은 자신과 환상계를 구하기 위하여 환상계에 들어가야 했지만, 다시금 동일한 이유로 환상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인간은 대지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생을 영위하는 존재다.
 
엉뚱한 느낌이지만 아트레유가 환상계를 구할 영웅을 찾기 위해 환상계를 헤매고 늑대인간이 이를 추격하는 장면은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중간계를 헤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한 바스티안이 아트레유와 한판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마찬가지로 미나스티리스의 전투가 연상된다. 영화로 인한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엔데는 서양 고대 민담에서 차용한 갖가지 상상의 피조물과 환상적인 스토리라인을 구사하여 의외로 장대하며 흥미로운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거기에 인간 존재의 깊은 균형을 이루는 두 요소 간의 조화의 중요성을 정교하게 삽이하여 자체로 빼어난 금자탑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흥미진진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지나치게 서양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많이 담고 있어서 내게는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장애를 준 듯하다. 차라리 <모모>처럼 현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탈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게 오히려 내게는 친숙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 같은 일부 동양 독자들의 불평일 뿐 서양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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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4.1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나는 왕이 아니다 - 아메리카의 진정한 해방자 볼리바르
니나 브라운 베이커 지음, 이정민 옮김 / 파스칼북스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알라딘에서 리뷰를 보았는데, 썩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그나마 국내에 달랑 두 종류 밖에 없는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책인데 말이다. 어쨌든 서해문집에서 나온 걸 읽었으니 이쪽도 읽어보고 싶었다. 나온 지 수십 년이 경과한 묵은 책이 아닌 보다 생생함을 기대하며.
 
이 책을 평전으로 받아들이면 꽤나 빈약해지고 만다. 전기에 소설적 흥미를 불어넣은 저작으로 이해하면 차라리 불만은 줄어든다. 아무래도 서해문집 판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베이커는 말 그대로 일대기적 구성을 통해 시몬 볼리바르에게 접근한다. 이것은 장단점이 교차하는 서술방식인데 우리가 볼리바르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흥미진진할 수 있다. 반면 도대체 볼리바르가 웬 듣보잡인가 한번 알아봐야지 하는 독자에게는 따분하기 그지없으리라.
 
서해문고 본은 이 점에서는 보다 설득력을 지닌다. 초반부를 시몬 볼리바르가 등장하기 전의 남아메리카의 시대적 배경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덕분에 후반부의 볼리바르가 어떠한 난관을 뚫고 남아메리카의 해방을 위해 분투했는지 그 의의를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빈약한 자료 탓도 있지만 분량 자체가 적다 보니 그의 다채로운 활동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베이커의 책은 그렇지 않다.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를 그다지 잘 배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소설적 구성을 많이 취하고 있다. 그것이 효과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알라딘에서 안 좋은 리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결코 엉터리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웬만한 내용은 전부 수록하였다. 따라서 오히려 역으로 볼리바르에 대한 해외의 연구의 현 수준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토록이나 중요한 인물인데 그에 대해 무지의 장벽은 깊고도 길다.
 
시몬 볼리바르는 왕이 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스페인을 대신한 전제군주의 자리에 오르기를 간청하였지만 그는 거부하였다.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고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지 않았다.
 
시몬 볼리바르는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링컨보다 수십 년 앞서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그는 남아메리카의 워싱턴이자 링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의 해방투쟁은 처절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전쟁을 치른 북아메리카에 비하면 안데스산맥을 넘나든 그와 그의 부대는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에 뒤지지 않는다.
 
시몬 볼리바르의 한계는 무엇일까.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남아메리카인들의 역량을 오판하였다.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면 자신이 꿈꾸는 것처럼 지역적 편견과 갈등을 추스르고 대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거듭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같은 인종적 속성과 언어 문화적 속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국가의 테두리에 뭉치기를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이합집산할 수 있다.

그가 대 콜롬비아 공화국의 이상에 얽매이지 않고, 다섯 국가들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인정하고 독립국가들의 느슨한 연결체를 구성하는데 만족하였다면 그의 삶의 후반은 더 평온하였을 것이다. 연방국가 속의 연방들만이 협력과 평화를 보장하는 수단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너무도 순수하였고, 오염될 수 없었다. 이것이 시몬 볼리바르의 삶의 원동력인 동시에 생을 재촉하는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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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6.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