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홀릭 - 백야보다 매혹적인 스칸디나비아의 겨울 윈터홀릭 1
윤창호 글.사진 / 시공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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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부제 “백야보다 매혹적인 스칸디나비아의 겨울”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꿈(환상)”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이고르 마르케비치 지휘인데, 녹음 탓인지 총주에서 음이 뭉치고 텁텁하여 북구의 쨍-하는 겨울 분위기는 덜하지만 곡 자체를 맛보기에는 충분하다. Winter Dreams 와 Winter Holic, 비슷하게 다가온다.
 
스칸디나비아로 총칭되는 북유럽의 여행기다. 특이한 점은 저자가 사진작가인 연유로 사진의 비중이 꽤 차지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특별히 어휘 하나, 문장 한 줄에 고심하며 해독해야 하는 유형의 책이 아니므로 사백 면에 가깝지만 실제 완독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북유럽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과 덴마크, 아이슬란드가 포함되며 여기에 저자는 러시아를 추가하였다. 하긴 단체여행 상품도 러시아를 거의 항상 포함시킨다. 북유럽의 여행 시즌은 한여름이다. 그래야 비교적 화창한 날씨로 여행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유독 겨울철, 찾는 이 별로 없는 비수기에 스칸디나비아를 찾는다. 그곳의 겨울에 중독되었기에 서제도 ‘윈터 홀릭’ 아니던가.
 
스칸디나비아는커녕,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덮인 겨울 풍경조차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저자의 심경을 헤아릴 길 없다. 여행은 사물보다도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데에 묘미가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즌을 피해서 굳이 인적 뜸한 곳을 골라 찾는 저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삼복더위에 바가지요금과 체온으로 미지근한 바닷물, 오가는 혼잡한 도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이 맛에 바캉스를 간다고 한다. 반면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 속에서 참다운 자기를 재발견하는 시간으로 본다면 여행의 진미는 인적 끊어진 때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라면 단연 겨울이리라.
 
인터넷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찾아볼 수 있게 된 요즘, 해외 여행기는 과거와는 달리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싯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읽고 열병을 앓은 때가 있었다. 여행기가 개인의 단순한 감상기에 그치지 않고 또한 범람하는 여행 정보서와도 차별화를 이루려면 정보와 감상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유된 감흥이라고 하겠다. 한번 픽 웃고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며 독자로 하여금 “나도 한번 같은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잠재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말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로 매우 웅장하고 드라마틱하게 피날레를 마친다. 내게 있어 스칸디나비아는 어떤 피날레로 자리 잡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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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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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 여행
정기태 지음, 위직량 사진 / 바보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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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향이 경기도 용인인 내게 강과 바다 같은 물가는 친숙하지 않다. 기껏해야 무릎이나 허리 정도까지 깊이의 개울에서 멱을 하거나 다슬기를 주웠던 기억뿐이다. 음식도 산과 들에서 나는 먹을거리가 주를 이루었으며 어류는 고등어, 갈치, 임연수 정도. 어머니도 김치 담그실 때 새우젓 외에는 다른 젓갈류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다. 회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인데 여전히 광어와 우럭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 진미를 알겠는가. 젓갈은 기껏해야 오징어젓을 간혹 젓가락으로 깔짝거릴 뿐. 명란젓을 좋아하는 아내는 이 점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내게 이 책에서 글쓴이가 느끼는 절절한 감수성을 기대하기란 난망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 고기잡이의 원형을 기록으로 남기”고, “갯가 풍속과 다양한 어법을 알려주자는 의도”로 이 여행 시리즈를 기획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각종 수산용어와 어부들의 은어가 난무하니 나 같은 문외한은 글쓴이가 알려주는 고기잡이 방법에 대해서는 들어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그저 거문도에는 갈치가 특산물이며, 담양호에도 빙어가 나는구나 등과 같이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는 어류와 어법의 다종다양함에 감탄하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이 책의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우울함이다. 고기잡이 중노동에 시달리는 어부들의 괴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배를 탄다는 것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초가삼간 지어놓고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이 농촌과 산촌의 고달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듯이. 남획으로 사라져 가는 수산자원, 그나마 간척과 개발로 고기들의 터전마저 줄고 있는 가운데 각종 수입산의 대거 등장으로 고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년 적자와 가난에 허덕이는 어민들의 처지는 환경과 장소를 달리하지만 도시와 육지에 사는 모든 서민들의 애환과 다름없다.
 
저자명에 글쓴이와 함께 사진작가의 이름도 같이 기재됨은 당연하다. 사진 한 장이 무수한 글자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를 어디 한두 번 겪었는가. 오늘날 사진은 진실은커녕 사실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도구로 전락하였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사진은 인간과 끈끈하게 밀착된 말없는 웅변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속의 어선과 어민들은 최첨단도 아니고 최신 유행의 말쑥한 멋쟁이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에는 분홍빛 구름 위가 아닌 황토빛 대지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사람의 내음이 배어있다.
 
마지막 안면도 대하 편을 읽으면서 불현듯 어리굴젓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비록 당장 입맛에 짝짝 붙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법으로라도 글쓴이의 심정에 동감하고 미약하나마 보람을 느끼게 하고 싶다면...웃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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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3.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 - EBS 교육방송
김영훈 지음 / 베가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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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육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평소 아이 돌보기에 열성인 체질은 아니다. 문득 너무 아이에 소홀한 게 아닐까 자성의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다. “언저리를 맴돌기만 하던 아빠, 이제 태교와 육아에 몰입하라!”는 뒷표지의 카피가 유난히 절실하게 다가온다.
 
딱히 명확한 육아 철학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저 애가 무탈하고 모나지 않게 자라주는 데 만족하고 싶다. 예체능 및 취미는 재능이 두드러지거나 본인이 흥미를 느끼기 전에는 강요하지 않으련다. 공부에 대해서라면 부모는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환경)를 만들어 주고 길잡이 역할을 하면 나머지는 아이 본인에게 맡기고 싶다. 물론 내 아이가 다방면에서 뛰어나다면 무척이나 기쁘겠지만 제 앞가림만이라도 해주면 만족하겠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육아에서 아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몇 가지 팁을 제공하는 정도로 예상했는데 저자는 육아에서 오히려 아빠를 중심에 놓는 듯 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소홀한 아빠의 적극적 기여가 요구되는 것은 시대의 소명이다. 하지만 엄마에 의한 육아를 아빠에 의한 육아로 대치하고 다소간의 아빠 효과를 첨가하는 방식은 현실 적용 면에서 실효성이 의문시된다. 많은 아빠가 육아를 어려워하는 것은 아기를 접할 기회가 부족한데서 연유하는데 이런 근본적 여건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육아에서 아빠의 역할과 중요성 및 기대감이 증대하는 현실을 감안하되, 육아의 중심은 여전히 엄마임을 인정하고 건강한 육아를 위한 아빠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서술했다면 효과는 더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아빠 육아를 다루면서 동시에 영재 교육 또는 뇌기반 교육도 병행하는 저자의 욕심은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달릴 것을 기대하는 난감함이 존재한다. 두 가지 의도를 한 권의 책에 어설프게 결합하기 보다는 하나라도 오롯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게다가 뇌기반 교육의 강조는 가뜩이나 어려운 뇌 관련 의학용어가 반복적으로 난무하게 하여 흥미를 반감시키기조차 한다.
 
물론 이 책을 흥미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당한 육아실용서다. ‘한눈에 보는 육아 체크리스트’가 책 뒤의 부록으로 달려 있으며, 책 구성도 육아 시기별로 태아기, 영아기, 걸음마 단계, 첫 번째 사춘기, 취학 전으로 구분하여 즉각적으로 내용을 참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견해를 품은 이, 저자의 육아관에 동조하는 이라면 제법 유용하게 쓸 만한 책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첫 번째 사춘기에 한창인 맏아이가 아빠를 너무 만만한 친구로 여기고 있어 당최 아빠의 위엄과 위신이 서지 않는다. 어찌 대처해야 할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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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2.2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윌리엄 새들러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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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일찍이 나이 마흔에 이르러 미혹되지 않았다(不惑)고 자술하였다. 그러나 21세기 벽두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마흔의 숫자는 여전히 높은 벽이다. 육체적 연령과 정신적 연령의 격차는 나날이 깊어만 간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끔 되었다. 내가 아무리 강변을 하더라도 외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싱싱한 향기를 내뿜는 젊은이는 절대 아닐 것이다. 그저 미약한 바램은 그렇게 추레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정도다.
 
각설하고 이러한 내적 동기가 불현 듯 이 책을 손에 들도록 하였다. 이제 평균 수명이 70세를 가뿐히 넘기고 있는 추세이니만치 대략 30년 정도의 삶에 대한 마음의 각오를 슬슬 다져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마흔 이후의 삶이 앞선 세대처럼 인생의 하강기가 아니라 새로운 성장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 하며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흔 이후의 사람들에게 환호 받을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여섯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확실히 이네들은 무슨 무슨 원칙을 들먹이기 좋아한다. 그래야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하여튼 그 원칙을 나열하자면, 중년의 정체성 확립하기, 일과 여가활동의 조화,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조화,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의 조화이다.
 
사실 그다지 혁신적인 내용은 없다. 다만 그동안 간과하거나 외면하였던 측면을 새로이 포장하였다. 중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내용, 지극히 기본적이다. 그리고 일 중심에서 벗어나 일과 가족, 자신, 공동체 간의 균형 모색, 행동과 성찰의 무게 이동 등. 하지만 누구나 아는 내용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상한 습성을 가진 생물이다.
나이 듦은 자랑이 아니지만 부끄러움도 아니다. 시대가 젊음과 활력을 우상화하다 보니 중년 이후의 삶은 비참한 것으로 지레 겁먹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십상이다. 혹자는 이에 반발하여 노년에도 청년처럼 행동하며, 다른 이는 일찌감치 노년의 길을 서둘러 따른다. 환갑잔치를 거창하게 벌이던 때가 오래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된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 새삼 의미를 되새기게 된 것은 ‘일’에 대한 정의다. 일이란 비단 돈을 받고 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가치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있는 다양한 활동 모두를 포함한다.(P.118) 이에 따르면 여가활동, 취미활동, 관심 있는 것에 대한 공부, 지역사회 봉사활동 모두가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회사의 일과 나머지 일 간의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중요하다.
 
저자는 언론에서 떠드는 ‘중년의 위기’는 기실 ‘중년의 자유 또는 해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오류라고 비판한다. 중년이 되면서 자연스레 자신과 가정, 직장, 사회를 보는 시각은 20대 및 30대와는 다른 각도를 지니게 된다. 팍팍하던 일상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도 된다. 혹자에게 자유는 곧 불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를 기꺼이 독재와 억압에 자발적으로 헌납하고 통제된 안정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중년의 자유는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과제이다.
 
만약 사회적 출세와 지위 확보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다면 인생의 불안은 많이 줄일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도 대부분 지위 불안을 분석하고 있음은 현대인의 삶은 지위에서 파생된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다지 가볍거나 술술 넘어가지 않음에도 책장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현실적 필요성이 크다.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 그것은 강력한 동기 요인의 하나다.
공자가 나이 마흔에 불혹이라고 자술했던 당시 평균 수명은 얼마나 될까. 한 40세를 넘기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마흔은 오늘날 60세 정도에 해당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미혹함이 많은 것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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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2.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제국의 미래 - 총.달러 그 이후... 제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지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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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압감을 주는 표제와 두툼한 분량에 괜히 기가 죽어서 사는 것도 읽는 것도 한참이나 뜸들이다가 이제사 읽다. 읽고 난 소감은? 읽을 만하다. 더 정확히는 흥미롭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과 유사한 점이 제법 있다.
미국인들의 사회과학 저작물의 특징은 풍부한 사례에 있다. 일세를 풍미했던 앨런 토플러와 최근의 각광받는 토머스 프리드먼과 다르지 않다. 이론적인 부분은 서두에 또는 말미에 간략하게 정리하고 본문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각종 예화로 빽빽이 채운다.
에이미 추아의 이 책의 핵심적 논지는 이미 서문에 모두 드러나 있다. 관용을 발휘한 국가는 초강대국(제국)이 되었고 관용을 상실한 순간부터 제국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워진다. 저자가 표제에서 밝히는 현대의 제국은 바로 미합중국이다. 냉전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확산되는 현실에 비추어 미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언하고자 하는 게 저자의 저작 목적이다.
 
예로 든 역사적 사례는 흥미진진하고 다채롭다. 순간 저자가 법학자가 아니라 사학자로 착각할 정도로 역사적 통찰과 서술에 빛을 발하고 있다. 고대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로마 제국, 중국 당나라, 몽골 제국, 근세의 네덜란드, 대영제국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스페인, 오스만 투르크, 중국 명나라, 무굴 제국, 그리고 현대의 독일과 일본을 성공하지 못한 반대 예화로 언급한다. 한편 당대의 미국의 부상을 살펴보고, 잠재적 도전자라 할 중국, 유럽연합, 인도 등이 과연 경쟁자가 될 수 있는지 훑어보며 다시 미국의 미래로 책을 마친다.
 
저자는 역사상 초강대국(미국을 포함하여)의 필수 요소는 ‘관용’이라고 단언한다. 관용은 인종, 종교, 문화 등에 있어 개방적 태도를 의미한다. 자국의 영토 내에 이질적인 요소를 끌어안을 수 있고 물리적, 화학적 통합을 이루어 낼 때 변방의 소국은 대국으로, 지역의 강국으로 그리고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저 타국보다 조금만 더 관용을 베풀면 된다. 그러면 관용은 인재와 재화를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변한다. 한편 저자는 초강대국의 쇠락을 이끈 도화선도 관용임을 지적한다.
불관용이 쇠망의 원인인지 아니면 쇠망으로 불관용이 촉발되는지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어떤 임계점(저자는 극적인 변화 지점으로 표현한다)이 존재함은 사실이다. 관용의 허용 수준은 임계점 이전은 성장을, 임계점 이후는 쇠퇴를 가져온다고 단정하면 지나칠까. 하지만 이 임계점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다. 사회 발달 단계와 내부 결속력(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접착제)의 존재에 따라 임계점은 조기에 다가올 수도 아니면 상당한 기간 지연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후자의 경우이다. 아케메네스조와 몽골 제국은 전자에 해당하겠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거대국가의 위상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다. 친미와 반미는 지나치게 유아적 반응이다. 아마존의 밀림에 사는 원주민들도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에 침을 흘린다. 우리는 어떤가? 미국사회와 우리사회 간 연대감은 우리사회의 당대와 50년 전 과거를 능가한다. 국경을 초월한 동질감에 비하면 시간차의 이질감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반미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제국의 미래는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서문 말미에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미국은 제국을 상실하지만 초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다. 관용의 미덕을 발휘하는 미국은 자신을 하나의 본보기로 제시해야지 관용의 제도를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미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낙인찍힌다는 것이다(P.461).
 
저자 자신과 그 가족은 중국계로서 이미 미국의 관용 정책에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가난하고 암울했던 조국에 대비하여 기회와 번영의 땅, 미국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이민자로서 성공하여 그 국가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이런 저서를 발표한다는 자체가 이민자 국가로서 미국의 관용의 효력을 강하게 웅변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관용’을 떠올린다. 우리에게 관용은 가진 자의 선심 내지 패배자의 자위에 불과하다. 적자생존의 치열한 현장이 바로 이곳이니까.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경청과 겸손보다 억지주장과 허위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우리 사회다. 우리는 타 인종, 종교, 문화에 관용을 베푸는가? 이런 질문을 하기조차 부끄럽다. 무의식적인 백인숭배 및 유색인 멸시풍조. 국제결혼과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독선의 종교 등.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은 이민자의 나라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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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3.1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