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이야기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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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집단의 바램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화는 당대 사람들의 삶의 양태와 동시에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소망마저도 감싸 안는다.

여자에서 남자로의 변신은 대표적인 사례다. 릭도스와 텔레투사의 딸 이피스의 경우 아버지의 말을 통해 원시 모계사회에서 고대 부계사회로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많이 하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딸은, 우리에게 짐이 될 뿐이오. 불행히도 나는 딸을 먹여살릴 만큼은 넉넉하지 못하오. 그러니 그대가 딸을 낳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오. 만일에 딸이 태어나면 그 아이는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P.55)"
 
불행히도 여자로 태어난 수많은 이피스들에게 남은 생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하면 제2의 성으로 예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외에 대안이 없었다. 이따금씩 자신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뿐.
 
근친상간 내지 근친결혼도 마찬가지다. 올림포스의 신들이야 당연히 허용된 이 사항이 인간 사회에는 금기사항이었다. 복수의 여신이 가장 크게 화를 내는 죄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몰약이 된 뮈라'(P.83)는 아버지 키뉘라스 왕을 속이고 이 금기를 어겼다. 또 오빠를 사랑한 누이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성장하면서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이성은 가족 내에 존재한다. 하지만 가정과 사회의 구성과 유지를 위해서 가족 간, 나아가 근친 간의 교배는 집단구성의 원리 상 인정될 수 없다. 따라서 근친 간의 이성적 사랑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랑이므로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강도는 더욱 처절하기 마련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 유명해진 트로이 전쟁에 대한 내용도 이 책에 등장한다. 여기서 인상적인 대목은 아킬레오스(아킬레스)의 유품을 둘러싸고 아이아스와 오뒤세우스 간의 대결이다(P.181~207). 힘으로는 그리스 제일가는 용사와 지혜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수. 그들이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야말로 적격자임을 강조하는 웅변은 무려 삼십면 가까이 전개된다. 아이아스의 발언에서 호메로스의 또 다른 영웅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일방적인 찬사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당한 결투를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육체의 미덕을 찬양하는 시대에서 꾀와 지혜, 속임수도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에서 아이아스는 구시대를, 오뒤세우스는 신시대를 대표한다. 그리고 영예는 오뒤세우스가 차지하고, 아이아스는 자살을 택한다. 사회 가치관의 변천을 두 인물의 극적인 결말의 대비로 잘 보여준다. 오뒤세우스는 그 지혜로 아킬레오스의 유품을 차지하고 꾀로써 트로이를 멸망시키지만, 그 대가로써 귀향길에 십년 간의 방황을 하게 됨은 아직도 그 지혜에 대한 세인들의 부정적 인식도 만만치 않음을 반영한다.
 
오비디우스는 피타고라스의 주장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낸다.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처음의 모양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이 우주에 소멸되는 것은 없습니다. 변할 뿐입니다. 새로운 형상을 취할 뿐입니다...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습니다."(P.300~303)
 
이 대목은 이 책의 제목인 변신의 근거인 동시에 자연관의 표상이기도 하다. 표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현대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상기시킨다. 고대 그리스인의 자연관은 우주가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네 가지 원소의 상호작용으로 수많은 변용과 변신이 발생하였으며 이것을 신들의 개입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이 책 '변신 이야기'다. 즉 이것은 단순한 신화 모음집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에 대한 문학적 종교적 풀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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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1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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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의 프로젝트를 개시한다. 세계문학전집 독파에 나선 것이다. 얼마의 기간이 소요될 지 예측하기 어렵다. 민음사 전집을 기준으로 300권을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다고 하더라도 6년 정도 지나야 할 터인데. 천상 마음을 느긋하게 잡고 시간에 연연하지 않을 수밖에.
 
목록은 민음사 판본을 기준으로 하고, 대산세계문학전집과 을유세계문학전집, 그리고 펭귄 클래식 북스를 보완하는 것으로 하였다. 개중에는 이미 과거에 한두 번 읽은 작품들도 있겠으나 최근에 읽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번에 새롭게 다시, 아마도 내 생애의 마지막이라는 심경으로 한 장 한 권을 집어들 생각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유명 번역가 이윤기의 역작이다. 원전 번역이 아니라는 약점이 있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오히려 이편이 다가서기 더욱 용이하다. 그래도 원전에 대한 아쉬움은 추후 천병희 번역본을 따로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너무나 친숙하다. 어릴 적 동화를 통해서 그리고 자라서는 각종 서양문화의 직간접적 은유와 인용을 통해서. 그런데 익숙한 만큼 생경한 대목도 적지 않다. 더욱이 뒤엉켜 있는 신들의 족보와 사건들의 계보는 체계있는 이해를 방해한다. 여기에는 신들의 불멸성이 한몫 한다. 예컨대 유피테르가 인간 처녀를 취하여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의 몇 대손 가운데 자색이 뛰어난 처녀를 유피테르의 아들 아폴론이 사랑하는 등.
 
수년 전에 토마스 불핀치가 정리한 그리스 로마신화 이후 오랜만에 읽다 보니 아하, 이 부분이 그러했구나 무릎을 치게 하는 대목도 나온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단어의 어원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세상물을 더 먹었다고 과거와는 다른 감흥과 이해를 받는 느낌도 꽤 괜찮다. 이래서 고전은 세대마다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는 경구가 나온 것인가.
 
오비디우스는 로마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작가다.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제정으로 접어드는 시기. 그래서 작가는 위대한 로마와 못지않게 위대한 위정자를 찬양하여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월계수가 된 다프네에게 아폴로가 속삭이는 말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카피톨리움으로 기나긴 개선행렬이 지나갈 때...그대는 로마의 장수들과 함께 할 것이다...아우구스투스 궁전 앞에서는 그 문을 지킬 것이며...(P.48~49)"

그리스 시대에 생뚱맞게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즉 작가는 신화를 통하여 로마의 전통적 신성 권위를 강화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찬양하는 목적을 숨기지 않는다. 하기사 현대에도 일부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신격화 작업에 신화 조작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므로 이 부분에 관한 한 문명 발전을 주장할 수 없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 못지않게 변덕이 심하고 감정적이다. 그들은 전능한 자신들의 능력을 개인적 원한풀이에 사용하거나 아니면 신들의 능력에 근접하는 뛰어난 자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데 발휘한다. 당시의 인간은 참으로 운명 앞에 불안에 떠는 존재였다. 지금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전능한 능력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면 자못 비스무리하지 않을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억울한 사례는 유피테르처럼 여성 편력이 심한 신에게 강제로 몸을 빼앗기고 거기다가 아이까지 낳는 여인이다. 순결을 잃은 것만도 통탄할 일인데 유피테르의 부인신인 유노의 질투로 사람의 모습마저 빼앗기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유노는 분풀이를 하려면 자기 남편한테나 할 것이지 애꿎은 여인들마 족치고 있다.

유피테르에 의해 농락당한 칼리스토는 유노의 분노로 곰으로 변신하여 아들의 창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찰나 패륜을 막기 위한 유피테르의 배려로 모자가 하늘의 별자리로 올라간다.
 
황소로 둔갑한 유피테르는 에우로파를 취하고, 누이를 찾아 나선 카드모스는 신탁을 받아 도시를 건설하는데 그것이 테바이(테베)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테바이는 유노에 의해 곤경에 많이 처하게 된다.

신들의 무분별한 행위의 피해자라면 악타이온을 빼놓을 수 없다. 우연히 디아나 여신의 목욕 장면을 보게 된 잘못으로 그는 사슴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사냥개에 물어 뜯겨 죽는 처참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가장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박쿠스와 관련된다. 광란의 박쿠스 축제를 거부하는 테바이의 펜테오스 왕은 광신도가 된 어머니와 이모들의 손에 의해 팔이 잘리고 머리가 부서진다. 그 어머니의 외침("보아라, 우리가 이겼다. 내가 승리했다!")은 전율 그 자체다. 인간의 비이성적 충동의 끔찍함과 광신의 폐해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성적인 국가의 지도자로서 펜테오스 왕의 정책 판단에 어긋나는 선택을 할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신들의 이야기는 사실 신의 가면을 뒤집어 쓴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은 신의 이름을 빌려서 개인과 사회의 숨겨진 충동과 은밀한 행위를 환한 대낮에 꺼내놓는다. 그럼으로써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기본 틀을 형성한다.

신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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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6.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롤랑전
이형식 옮김 / 궁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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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통상 <롤랑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중세 프랑스의 서사시다. 역자가 굳이 '롤랑전'이라고 표제를 붙인 사유는 옮긴이의 말에 잘 나타나 있으며, 동의여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다.
 
일단 번역을 거치는 시의 속성 상 원작의 향취를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서정시가 아니고 서사시(이를 무훈시라고도 한다)이므로 작품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 등에 비하면 분량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에네이스>는 두툼한 책의 부피에 놀라서 책상에 널브러진 채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있는 신세다.

내용은 샤를마뉴(카를, 카를로스) 대제 당시를 배경으로 스페인 정벌과 뛰어난 기사 롤랑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시각에서 바라본 무훈시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확실히 작품 전체에 걸쳐 중세를 압도하던 기독교의 정신이 충만하며, 롤랑과 그의 동료들, 적국인 사라센 용사들의 빛나는 무공이 전편에 충일하다. 광신과 잔혹은 고대와 중세의 공통된 특성이므로 문제삼지 말자. 오히려 신과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교도'들이 승리할 수 있었음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황제마저 발리강의 칼에 투구가 박살나지 않았던가(261절). 적어도 그들에 대해서는 종교를 떠나서 용맹의 묘사에서는 공정함을 유지하고 있음이 이 작품의 덕목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렇게 단순하게 평가를 내리기에는 뭔가 묘한 구석이 있다. 롤랑과 가늘롱의 대립과 이의 파생으로 롤랑의 파국으로 이어지는 부분, 이것이 어쩌면 이 작품의 진면모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주요 인물의 관계 설정을 보자. 가늘롱은 롤랑의 의부(義父)이며, 롤랑은 샤를마뉴 황제의 조카다. 그리고 가늘롱은 황제의 매제가 된다. 즉 가늘롱의 처가 황제의 누이다.

그런데 롤랑과 가늘롱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 먼저 사라고사 마르실 왕에게 사신을 보낼지 여부를 놓고 롤랑이 반대를 주장하자, 가늘롱이 이를 반박한다. "오만에서 비롯된 진언이 가납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미친 자들은 내버려 두시고, 현명함을 취하소서!"(15절). 결국 가늘롱의 진언대로 사신 파견이 결정되자 롤랑은 가늘롱을 적임자로 추천한다(20절). 가늘롱 백작의 고뇌하는 장면에서 이 임무의 중요성과 동시에 내재한 위험성의 크기를 유추할 수 있다. 자칫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전례(바장과 바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도 롤랑의 자신의 의부를 추천하였고, 주저하는 가늘롱을 비웃기조차 한다. 이것은 보통 인간관계에서는 있기 힘든 경우다.
 
이에 대해 가늘롱이 적개심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늘롱은 마르실 왕의 사신인 블랭깡드랭과의 대화에서 그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29절~30절), 사라센인의 손으로 롤랑을 제거하려고 계획한다(46절~47절). 그렇다고 가늘롱이 비열한 겁쟁이라고 매도한다면 오해다. 마르실 왕 앞에서 당당한 태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장면에서 사라센인들이 감탄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참으로 고매한 신하로다!"
 
결국 샤를마뉴 황제의 군대는 마르실 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스페인에서 퇴각을 결정한다. 그리고 후위 부대를 남겨두는 문제로 한바탕 파란이 벌어진다. 이번엔 가늘롱이 롤랑을 추천한 것이다. 이에 황제는 "몹시 노한 기색으로...그대는 진정 악마로다"(58절)라고 하며 가늘롱을 비난한다. 롤랑 추천이 무슨 큰 잘못이란 말인지 의아스럽다. 롤랑이 이 임무에 적임자라는 점은 황제가 신임하는 넴므 공작의 동의로 드러난다. 그런데 황제와 롤랑은 가늘롱에 악담을 퍼붓는다. "아! 비열한 자, 출신이 더러운 악당이로다."(60절). 즉 유추하건대 이 임무도 또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지난한 과업이다. 그러기에 롤랑이 가늘롱을 마찬가지로 비난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롤랑에 대해 살펴본다. 롤랑은 당대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는 용사이며, 동료 올리비에와는 굳은 우정으로 맺어져 있다. 올리비에는 롤랑 못지않게 용맹하면서도 지혜도 지니고 있다. 이런 올리비에가 롤랑에 대하여 "그대의 성정 혹독하고 오만"(18절)하다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후위대로 잔류하다가 사라센 대군에 의해 곤경에 빠진 롤랑에게 올리비에는 수차에 걸쳐 황금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 황제의 본군을 되돌려 구원군으로 삼자고 조언한다. 롤랑은 이를 무시한다(83절~86절). 만약 이때 롤랑이 뿔피리를 불었다면 롤랑과 동료 기사들은 파멸을 맞지 않고 사라센은 대패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명한 조언을 거부한 롤랑은 역시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임을 보여준다. 나중에 롤랑이 태도를 바꿔 구원군을 부르겠다고 하니 올리비에는 그에 대해 야유와 비난을 쏟아붓는다(129절~131절).
 
역사는 힘센자에 의해 윤색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간혹 존재한다. 강대국일수록 실패의 치욕을 숨기고자 혈안이 되곤 한다. <롤랑의 노래>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번 조작된 역사의 뒤집기를 시도하자. 먼저 샤를마뉴 황제의 스페인 원정이 7년간 지속되면서 아직 사라고사를 깨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세와 사기가 불리해지자 프랑스 내부에서 주전파와 주화파가 대립한다. 황제와 롤랑은 주전파고, 가늘롱은 주화파라고 볼 수 있다.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황제의 군대는 퇴각하고, 적의 추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후위군을 롤랑이 지휘하게 된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는 군대의 후방을 공격하는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보편적 전술의 하나다. 그만큼 후위군은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 결국 롤랑과 후위군은 몰살을 당하고 샤를마뉴는 장기간의 원정에도 성과없이 씁쓸하게 귀국한다. 한편 프랑스(기독교)의 자존심을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하느님의 신성한 군대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이 패전의 배후에는 배신자가 있을 것으로 조작하고 주화파인 가늘롱을 제거한다. 그리고 서사시에서는 황제가 롤랑의 복수를 멋들어지게 해치우고 나아가 사라고사뿐만 아니라 전 사라센의 황제인 발리강 마저도 죽이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것이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로 돌아와서 황제가 가늘롱을 재판에 회부하자 신료들은 황제에게 가늘롱의 무혐의를 주청한다. 가늘롱을 "고결한 신하"(276절)라고 칭하면서. 이에 황제는 신료들을 "그대를 모두 반역자로다!"(276절)라는 반응을 보인다. 즉 황제와 신하들 간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가늘롱은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주전파의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따름이다.
 
이 작품의 종결은 깊은 여운과 슬픔을 남긴다. 가늘롱을 처단한 후 밤이 되어 이제 휴식을 취하려는 이백세 넘은 늙은 황제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 이교도들이 포위하고 있는 앵프 성을 구원하라고 전갈한다.
 
"황제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다. 그가 홀로 탄식한다.
"하느님, 저의 삶이 어찌 이리도 고단하나이까!"
 그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데, 그는 자기의 하얀 수염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291절)
여기에서 기독교적 신성의 영광과 빛나는 무훈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 인터넷에서 샤를마뉴 황제의 스페인 원정에 대해 잠깐 찾아보았다. 사라고사는 피레네 산맥을 겨우 넘어선 곳에 있다. 스페인 중에서도 북동부에 있는 곳이다. 칠년 간 원정의 결과가 겨우 사라고사도 정복하지 못한 것이라면 치욕스럽기 그지없는데, 게대가 퇴각하다가 대패를 당했으니 더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샤를마뉴 황제는 내치에 힘썼다고 하니 참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깨닫는 바가 많다"(184절)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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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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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07.

대산세계문학총서에 수록되지 않았다면 읽기는커녕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했을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대산문화재단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 작품의 문학사적 중요성이나 흑인문학에서의 위상에 관한 시시비비는 제쳐놓고 소설로서의 재미가 제법 녹록치 않다.

재니라는 혼혈 흑인여성이 여성으로 자라서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내지 사별의 과정을 통하여 흑인여성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도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흑인여성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형식적인 노예해방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흑백차별이 엄존하던 미국 중남부. 당시 흑인여성은 제3의 성이다. 백인과 흑인남성 아래에 존재하는.
 
재니는 결혼이란 "저 깊은 뿌리에서 여린 가지까지 행복에 겨운 온몸의 떨림이 모든 꽃송이로 흘러들며 환희에 전율하는 것"(P.21)임을 계시받는다. 할머니의 애정어린 독촉에 못이겨 마지못해 한 첫번째 결혼에서 재니는 무애정한 결혼생활의 무의미성을 절감한다.

그러다가 조 스탁스를 만나고 과감히 그를 따라나선다. 비록 계시의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변화와 기회"(P.43)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임을 기대하며. 그와의 결혼생활을 이십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외견상 그녀의 선택은 성공적이다. 숙녀 대접을 받는 시장 부인으로 존칭되며 대체로 평온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에. 그런데 그녀는 조 스탁스의 아내가 무엇을 의미함을 점차 알게 된다. 여전히 독자적인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아닌 아름답지만 열등한 존재로서의 인식.
 
재니가 티 케이크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바로 그의 일상에 충실하며 무기력하지 않으며 열성적인 삶의 자세다. 고정된 직업 없이 그때그때 생기는 일자리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경제적 조건에도 재니와 티 케이크는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재니에게는 일생 처음 겪는 주체로서의 삶의 생생함이었다.

만약 재니의 품성이 내면의 정열과 활력을 뿜어내지 않았다면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조 스탁스가 만들어준 인형의 집에서 안온한 생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또다시 사별로 막을 내리는 또다른 선택을 과감히 하였고, 비록 슬픔에 가득찬 채로 귀가하였지만 그녀의 내일은 분명히 과거로의 회귀는 아닐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다지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평이한 전개로 일관한다. 순간적으로 과대평가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문득 일어나곤 한다. 그러다가 조 스탁스와의 결혼생활 파경과 티 케이크를 만나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하더니 플로리다 습지대에서의 노동자의 삶과 허리케인 장면에서는 흥미진진함이 배가되어 책장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이런 작품이 1970년대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평가를 받게 되었다니 의아할 뿐이다. 그것도 흑인들에서마저 무관심의 코너에 방치되었다는 점이 말이다.

문학이 사회선도를 결과할 수 있지만, 사회선도를 목적으로 하는 문학은 영속하지 못한다. 흑인여성 작가로서 허스턴은 당대의 대세인 계급적, 투쟁적 시각을 비껴가며 인간 자체에 더욱 천착하였다. 이것이 그녀의 작품이 당대에서 망각되었지만 현대에 와서 부활한 성공한 역설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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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7.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트리스트럼 샌디 2 대산세계문학총서 2
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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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2.
 
토비 삼촌과 워드먼 부인 사이의 연애 해프닝으로 드디어 제9권이 막을 내린다. 이때가 주인공 트리스트럼 샌디가 몇 살 무렵인지 알 수 없으며,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주인공의 삶과 견해란 부제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버린지 오래다. 제9권이 마지막 권이 된 것은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로렌스 스턴의 건강이 좋았더라면 아마 20권도 충분히 발표할 수 있었으리라.
 
전반부에 비하여 이 후반부는 파격적인 글쓰기에 조금 익숙해진 듯하다. 아니면 실험적인 면모가 다소 약화된 것인지. 상대적으로 실소와 파안대소를 자아내던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조금 더 현실에 가까워졌고 작가의 이야기가 진지함을 머금고 있다.

여전히 라블레의 후손다운 돌출적 단편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적어도 화자의 일관성이 작품 전체에 체계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 선구자라는 영예를 받은 작품답게 그러한 기법이라고 볼만한 독백 내지 심리분석 등(12장~14장이 기억에 남는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한 장소적 배경도 영국을 떠나 프랑스도 잠시 여행 무대로 삼고 있음도 흥미롭다.
 
고전이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고전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상념이 스며나온다. 출판사마다 소위 세계문학전집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기획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단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선정기준은 제각각이다. 검증된 고전 위주가 있는가 하면 근,현대와 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 작가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기존의 것만 고집하면 편협과 진부함의 함정에 빠질 것이요 참신함을 강조하면 깊이를 결여한 감각에 치중하게 될 것이다. 고전이 고전다운 것은 시간의 엄혹한 테스트를 견디며 살아남았다고 볼 때 동시대의 작품들이 고전으로 살아남을지는 섣불리 판정내릴 수 없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200여년 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고전의 주류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소개된 점으로 볼 때 시간의 테스트는 이겨내었다. 다만 인구에 회자되기 위해서 필요한 감동의 깊이를 구비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본다. 단순히 기이함으로 인해 각인된다면 작가에게도 너무 슬픈 일이리라.
 
역자의 말처럼 독자가 등장하는 재담이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두 이해하고 따라갈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지도 않다. 이 소설의 재미, 혹은 그 목적은 일관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과 그 혼란스러움 자체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거창한 업적을 남긴 영웅과 귀족계급이 아닌 중하위 계층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이들의 적나라한 실생활의 자질구레함을 가감없이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황당을 넘어선 시대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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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9.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