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7
조라 닐 허스턴 지음, 이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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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007.

대산세계문학총서에 수록되지 않았다면 읽기는커녕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했을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대산문화재단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 작품의 문학사적 중요성이나 흑인문학에서의 위상에 관한 시시비비는 제쳐놓고 소설로서의 재미가 제법 녹록치 않다.

재니라는 혼혈 흑인여성이 여성으로 자라서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내지 사별의 과정을 통하여 흑인여성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도하고 있는데, 이는 단지 흑인여성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만큼 형식적인 노예해방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흑백차별이 엄존하던 미국 중남부. 당시 흑인여성은 제3의 성이다. 백인과 흑인남성 아래에 존재하는.
 
재니는 결혼이란 "저 깊은 뿌리에서 여린 가지까지 행복에 겨운 온몸의 떨림이 모든 꽃송이로 흘러들며 환희에 전율하는 것"(P.21)임을 계시받는다. 할머니의 애정어린 독촉에 못이겨 마지못해 한 첫번째 결혼에서 재니는 무애정한 결혼생활의 무의미성을 절감한다.

그러다가 조 스탁스를 만나고 과감히 그를 따라나선다. 비록 계시의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변화와 기회"(P.43)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임을 기대하며. 그와의 결혼생활을 이십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외견상 그녀의 선택은 성공적이다. 숙녀 대접을 받는 시장 부인으로 존칭되며 대체로 평온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에. 그런데 그녀는 조 스탁스의 아내가 무엇을 의미함을 점차 알게 된다. 여전히 독자적인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아닌 아름답지만 열등한 존재로서의 인식.
 
재니가 티 케이크에게 관심이 쏠린 것은 바로 그의 일상에 충실하며 무기력하지 않으며 열성적인 삶의 자세다. 고정된 직업 없이 그때그때 생기는 일자리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경제적 조건에도 재니와 티 케이크는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는데 재니에게는 일생 처음 겪는 주체로서의 삶의 생생함이었다.

만약 재니의 품성이 내면의 정열과 활력을 뿜어내지 않았다면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조 스탁스가 만들어준 인형의 집에서 안온한 생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또다시 사별로 막을 내리는 또다른 선택을 과감히 하였고, 비록 슬픔에 가득찬 채로 귀가하였지만 그녀의 내일은 분명히 과거로의 회귀는 아닐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그다지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고 평이한 전개로 일관한다. 순간적으로 과대평가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문득 일어나곤 한다. 그러다가 조 스탁스와의 결혼생활 파경과 티 케이크를 만나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하더니 플로리다 습지대에서의 노동자의 삶과 허리케인 장면에서는 흥미진진함이 배가되어 책장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이런 작품이 1970년대 이후에 와서야 비로소 평가를 받게 되었다니 의아할 뿐이다. 그것도 흑인들에서마저 무관심의 코너에 방치되었다는 점이 말이다.

문학이 사회선도를 결과할 수 있지만, 사회선도를 목적으로 하는 문학은 영속하지 못한다. 흑인여성 작가로서 허스턴은 당대의 대세인 계급적, 투쟁적 시각을 비껴가며 인간 자체에 더욱 천착하였다. 이것이 그녀의 작품이 당대에서 망각되었지만 현대에 와서 부활한 성공한 역설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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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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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트럼 샌디 2 대산세계문학총서 2
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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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2.
 
토비 삼촌과 워드먼 부인 사이의 연애 해프닝으로 드디어 제9권이 막을 내린다. 이때가 주인공 트리스트럼 샌디가 몇 살 무렵인지 알 수 없으며,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주인공의 삶과 견해란 부제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버린지 오래다. 제9권이 마지막 권이 된 것은 마찬가지로 우연이다. 로렌스 스턴의 건강이 좋았더라면 아마 20권도 충분히 발표할 수 있었으리라.
 
전반부에 비하여 이 후반부는 파격적인 글쓰기에 조금 익숙해진 듯하다. 아니면 실험적인 면모가 다소 약화된 것인지. 상대적으로 실소와 파안대소를 자아내던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조금 더 현실에 가까워졌고 작가의 이야기가 진지함을 머금고 있다.

여전히 라블레의 후손다운 돌출적 단편이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적어도 화자의 일관성이 작품 전체에 체계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 선구자라는 영예를 받은 작품답게 그러한 기법이라고 볼만한 독백 내지 심리분석 등(12장~14장이 기억에 남는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한 장소적 배경도 영국을 떠나 프랑스도 잠시 여행 무대로 삼고 있음도 흥미롭다.
 
고전이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고전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상념이 스며나온다. 출판사마다 소위 세계문학전집이라고 하여 대대적인 기획을 과거부터 현재까지 단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선정기준은 제각각이다. 검증된 고전 위주가 있는가 하면 근,현대와 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 작가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다. 기존의 것만 고집하면 편협과 진부함의 함정에 빠질 것이요 참신함을 강조하면 깊이를 결여한 감각에 치중하게 될 것이다. 고전이 고전다운 것은 시간의 엄혹한 테스트를 견디며 살아남았다고 볼 때 동시대의 작품들이 고전으로 살아남을지는 섣불리 판정내릴 수 없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200여년 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고전의 주류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소개된 점으로 볼 때 시간의 테스트는 이겨내었다. 다만 인구에 회자되기 위해서 필요한 감동의 깊이를 구비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본다. 단순히 기이함으로 인해 각인된다면 작가에게도 너무 슬픈 일이리라.
 
역자의 말처럼 독자가 등장하는 재담이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두 이해하고 따라갈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지도 않다. 이 소설의 재미, 혹은 그 목적은 일관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과 그 혼란스러움 자체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거창한 업적을 남긴 영웅과 귀족계급이 아닌 중하위 계층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이들의 적나라한 실생활의 자질구레함을 가감없이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황당을 넘어선 시대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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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9.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트리스트럼 샌디 1 대산세계문학총서 1
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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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1
 
18세기의 프랑수아 라블레. 이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으며 머릿속을 문득 스쳐지나간 인상이다. 그만큼 라블레의 후예다운 이가 또 있을까?
 
1권은 원작의 총 9권 중에서 제4권까지에 해당한다. 이제 겨우 트리스트럼 샌디는 출생하고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작가는 샌디의 삶과 견해를 기록한다는 미명하에 무수하게 당대에 대한 무자비한 풍자와 조소, 비판을 해학의 스타일을 빌려 독자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있다. 그 구성의 독특함을 작가 스스로 22장 말미에 밝히고 있다.

"이런 장치로 인해 이 작품의 구성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형식을 이루며, 두 가지 상반된 동작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지엽적이면서도, 점진적이라고 하겠지요,-그것도 동시에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본론과 그 나머지 부분들이 서로 교차하도록 구성하여, 지엽적인 움직임과 점진적인 움직임을, 바퀴 안에 바퀴를 넣어, 서로 복합적으로 얽히게 만들어, 기계 전체가, 지속적으로, 돌아가도록 했으며.."
 
의도적 가벼움은 젠체하는 권위를 타파하는 확실한 무기로서 일찍이 라블레가 중세적 무거움과 위선을 해소하기 위하여 채택한 수단이다. 스턴이 라블레의 후계자라는 점만 명심하면 처음 소설이 주는 낯섦과 당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의 미로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다. 권위당국 입장에서는 웃음이 주는 무기력과 무장 해제로 인해 작가를 처벌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이 작품은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지만, 통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문학사 개설서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반면 '20세기를 선취한 18세기 소설'로서 현대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선구자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런데 뭐가 의식의 흐름이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로 끊고는 지엽적인 이야기와 대화가 엉뚱하게 전개되다가 다시 합류하도록 하는 형식이? 형식적 특성은 빈번한 의도적 작가 개입과 전개 중단에 있다. 자가는 인물 뒤가 아니라 인물과 나란히 때로는 전면에 나서 작품과 독자를 매개하고, 전개의 방향을 돌려놓으며 자기변호를 일삼는다. 현대 창작기법에서는 암묵적 금기사항으로 알고 있는데.
 
가르강튀아처럼 외설적 뉘앙스와 터무니없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토비 삼촌의 공성, 진지, 대포 등에 대한 황당한 열정과 아버지의 코와 이름에 대한 집착을 보라!)이 작품 전면을 지배하는데, 작가는 해학의 배후에 날카로운 비수를 드리우고 있으니 이 점에서 참으로 현대적일 수밖에.
 
문학적 주제에 다가가는 대조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하나는 정공법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대다수의 작가들이 해당한다. 그들의 작품을 주제의 묵직함을 반영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자세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엄숙함이 있다.
 
반면 라블레, 세르반테스, 스턴과 같이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치환하여 무거움의 하중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문득 깨닫게 하는 작가들도 일군에 존재한다. 그들의 수는 비록 적지만 이는 보기 드문 천부의 재능을 타고나야만 가능하다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기인한다.

이제 트리스메기스투스 샌디의 말을 이어서 들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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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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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라와 딤나 - 개정판
바이다바 지음, 이븐 알 무카파 아랍어 역,이동은 옮김 / 강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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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별한 이력을 지닌 고전이다. 원전은 고대 인도(기원전)의 <판차탄트라>, 이것을 페르시아의 바르자위가 6세기에 당대 페르시아어인 파흘라위어로 번안하였으며, 또 이것을 이븐 알 무카파가 8세기에 아랍어로 번안하였다.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 각국으로 번역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끊임없는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시대를 초월하여 음미하고 교훈 삼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에 있다. 여기에는 작품 외형이 우화라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번안의 형태를 취하였음은 문화적 간극을 메꾸고 당대인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서기 위한 방편임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20세기 전후하여 우리를 되돌아보더라도 많은 번안 작품들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표제 ‘칼릴라와 딤나’는 첫 두 개의 장에 등장하는 재칼 친구의 이름인데,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큰 이야기이므로 번안 과정에서 표제로 삼은 것 같다. 칼릴라는 선한, 딤나는 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야기는 1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장의 머리에는 다브샬림 왕이 현자 바이다바에게 희망하는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면, 바이다바가 그에 적합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사자와 소의 장’은 “신뢰가 두터운 친구 사이에 간교한 모사꾼이 끼어들어 그들을 이간시키고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각 장도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여러 편의 짤막한 우화를 담고 있다. 즉 이야기가 이야기를 품은 액자 구조의 서술 형식이 오래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길게는 수천 년 전, 짧게 보아도 일천여 년 전의 내용으로 보기에는 그 시의성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 우화가 지니는 묘미다. 언뜻 동물들의 객담에 지나지 않나 싶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보다도 그 여운은 제법 길다. 그 잔잔한 메아리가 가슴 속의 반향을 일으켜 장구한 세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전 우화는 먼 옛적과 지금의 인간사가 본원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는 재미를 부여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군신, 친우, 부자 간의 관계의 본질은 변함없으며 재화로 비롯한 계급 분화와 갈등은 여전하다.
 
<멧비둘기의 장>에서 큰 쥐의 신세타령:
 “돈이 없으면 왜 그토록 비참해지는지 아시오? 가난이란 체면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오. 체면을 포미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면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오....가난은 가장 모진 시련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갖은 멸시와 모욕이 빗발치는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소...”(P.193-194)
 
또한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원숭이와 숫거북의 장>에서 거북이한테 속아서 바다로 간 원숭이가 자신의 심장이 몸에 없다고 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우리의 토끼와 자라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전승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간단히 보더라도 우연한 문화적 공통으로 간주하기에는 제재와 구성의 유사성의 정도가 너무 크다.
 
우리의 현대 문화가 서구에 편향되어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등의 뛰어난 측면을 외면한 지 오래다. <칼릴라와 딤나> 또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수 년 밖에 안 되어 어찌 보면 서구인보다도 더 서구 지향적 우리 문화의 병폐의 예증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 수용 과정과 그 이후의 묵수(墨守)적 태도를 볼 때, 우리는 지나치게 순수성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된다. 사상과 종교 등은 모두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필요성에서 발명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네는 이를 절대시하여 이에 어긋나는 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니 이단이니 하여 한 치의 유연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지난 세기 후반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데올로기가 천륜보다도 더 중시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서구 문명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보다 많은 이들이 균형 잡힌 문명 시각을 지니고 국경 밖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바란다. 여전히 인도와 아랍의 고전 상당수가 우리의 손을 벗어나 있다.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를 접하면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임을 각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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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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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두따 - 세계의 고전 인도편 1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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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시간적 간극과는 무관하게 사람의 정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나보다. 기원전의 호메로스나 그리스 희곡작가들과 5세기 인도의 깔리다사, 그리고 채널만 돌리면 무수히 등장하는 21세기의 가요와 연속극 등. 그들의 공통점은 사랑이며, 차이점은 신(神)과 물신(物神)에 있다.
 
<샤꾼딸라>에서 고초에 굴하지 않는 사랑의 강인함을 그렸던 깔리다사는 이제 시의 영역에서 또 다른 사랑의 노래를 읊조린다. 그것이 <메가두따>다. 메가는 구름을, 두따는 사자 즉, 메신저라는 의미라고 하니 ‘구름의 사신’은 무엇을 전달하는 것일까? 이 역시 사랑이지만, 헤어진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다.
 
자고로 사랑하는 사람 간에 생이별만큼 가슴 찡하게 하는 상황도 흔치않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고 싶은데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옴짝달싹 못하는데 먼 하늘의 두둥실 구름은 바람 따라 무심히 흘러가니 더욱 서글픈 법. 그래서 선인들은 바람이나 구름 등에 의탁하여 자신의 감상을 회고하기를 즐겼다.
 
깔리다사의 이 작품은 121편의 연작 서정시다. 그렇다. 서사시가 아니라 서정시다. 이제 신들의 시대는 새벽을 맞이하여 스러져가는 달빛이요, 인간의 시대는 아직 어슴푸레하지만 먼동을 곧 환하게 물들일 것이다.

모시던 꾸베라 신의 저주로 신혼의 아내와 헤어져 아내는 히말라야 이쪽 까일라사에 있는데, 약샤는 머나먼 남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장마를 알리는 검은 구름을 보며 약샤는 아내의 안위가 걱정된다. 그래서 구름에게 아내를 찾아가서 자신의 위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작가의 눈앞에는 구름이 지나가게 될 인도 각지의 정경이 스쳐 지나간다. 바삐 지나쳐가도 부족하련만 작가는 구름의 시선을 한층 낮고 다사롭게 하여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사를 온화하며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이 전반부 뿌르와메가이다.
 
전반부에서 아내가 있는 도시 알라까에 도착한 구름은 후반부 우따라메가에서 도시와 자택에 대한 묘사를 거쳐 이제 아내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에 지극하다. 실상 아내를 그리워하는 심경이 미모에 덧씌워져 있으니 그 지극함은 형언할 수 없으리라.
 
시대적,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향한 약샤의 절절한 마음에 심히 공감하는 것은 인간 본원의 공통된 심금을 울리고 있음에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슬픈 서정시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서정시인 독자가 서정시인 약샤의 마음을 서정시인 깔리다사의 시구를 통해 공명한다.
 
소박하고 간명한 이 작품이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괴테와 실러의 찬사를 얻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개인적 평으로 감상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고전의 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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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0.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