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트럼 샌디 1 대산세계문학총서 1
로렌스 스턴 지음, 홍경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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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세계문학총서 1
 
18세기의 프랑수아 라블레. 이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으며 머릿속을 문득 스쳐지나간 인상이다. 그만큼 라블레의 후예다운 이가 또 있을까?
 
1권은 원작의 총 9권 중에서 제4권까지에 해당한다. 이제 겨우 트리스트럼 샌디는 출생하고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인가. 작가는 샌디의 삶과 견해를 기록한다는 미명하에 무수하게 당대에 대한 무자비한 풍자와 조소, 비판을 해학의 스타일을 빌려 독자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있다. 그 구성의 독특함을 작가 스스로 22장 말미에 밝히고 있다.

"이런 장치로 인해 이 작품의 구성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형식을 이루며, 두 가지 상반된 동작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지엽적이면서도, 점진적이라고 하겠지요,-그것도 동시에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애초부터, 본론과 그 나머지 부분들이 서로 교차하도록 구성하여, 지엽적인 움직임과 점진적인 움직임을, 바퀴 안에 바퀴를 넣어, 서로 복합적으로 얽히게 만들어, 기계 전체가, 지속적으로, 돌아가도록 했으며.."
 
의도적 가벼움은 젠체하는 권위를 타파하는 확실한 무기로서 일찍이 라블레가 중세적 무거움과 위선을 해소하기 위하여 채택한 수단이다. 스턴이 라블레의 후계자라는 점만 명심하면 처음 소설이 주는 낯섦과 당혹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의 미로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다. 권위당국 입장에서는 웃음이 주는 무기력과 무장 해제로 인해 작가를 처벌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이 작품은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지만, 통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문학사 개설서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반면 '20세기를 선취한 18세기 소설'로서 현대 의식의 흐름 기법의 선구자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런데 뭐가 의식의 흐름이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로 끊고는 지엽적인 이야기와 대화가 엉뚱하게 전개되다가 다시 합류하도록 하는 형식이? 형식적 특성은 빈번한 의도적 작가 개입과 전개 중단에 있다. 자가는 인물 뒤가 아니라 인물과 나란히 때로는 전면에 나서 작품과 독자를 매개하고, 전개의 방향을 돌려놓으며 자기변호를 일삼는다. 현대 창작기법에서는 암묵적 금기사항으로 알고 있는데.
 
가르강튀아처럼 외설적 뉘앙스와 터무니없는 인물의 성격과 행동(토비 삼촌의 공성, 진지, 대포 등에 대한 황당한 열정과 아버지의 코와 이름에 대한 집착을 보라!)이 작품 전면을 지배하는데, 작가는 해학의 배후에 날카로운 비수를 드리우고 있으니 이 점에서 참으로 현대적일 수밖에.
 
문학적 주제에 다가가는 대조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하나는 정공법으로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대다수의 작가들이 해당한다. 그들의 작품을 주제의 묵직함을 반영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자세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엄숙함이 있다.
 
반면 라블레, 세르반테스, 스턴과 같이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치환하여 무거움의 하중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문득 깨닫게 하는 작가들도 일군에 존재한다. 그들의 수는 비록 적지만 이는 보기 드문 천부의 재능을 타고나야만 가능하다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기인한다.

이제 트리스메기스투스 샌디의 말을 이어서 들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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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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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라와 딤나 - 개정판
바이다바 지음, 이븐 알 무카파 아랍어 역,이동은 옮김 / 강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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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특별한 이력을 지닌 고전이다. 원전은 고대 인도(기원전)의 <판차탄트라>, 이것을 페르시아의 바르자위가 6세기에 당대 페르시아어인 파흘라위어로 번안하였으며, 또 이것을 이븐 알 무카파가 8세기에 아랍어로 번안하였다.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 각국으로 번역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끊임없는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시대를 초월하여 음미하고 교훈 삼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에 있다. 여기에는 작품 외형이 우화라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번안의 형태를 취하였음은 문화적 간극을 메꾸고 당대인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서기 위한 방편임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20세기 전후하여 우리를 되돌아보더라도 많은 번안 작품들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표제 ‘칼릴라와 딤나’는 첫 두 개의 장에 등장하는 재칼 친구의 이름인데,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큰 이야기이므로 번안 과정에서 표제로 삼은 것 같다. 칼릴라는 선한, 딤나는 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야기는 1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장의 머리에는 다브샬림 왕이 현자 바이다바에게 희망하는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면, 바이다바가 그에 적합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사자와 소의 장’은 “신뢰가 두터운 친구 사이에 간교한 모사꾼이 끼어들어 그들을 이간시키고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각 장도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여러 편의 짤막한 우화를 담고 있다. 즉 이야기가 이야기를 품은 액자 구조의 서술 형식이 오래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길게는 수천 년 전, 짧게 보아도 일천여 년 전의 내용으로 보기에는 그 시의성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이 우화가 지니는 묘미다. 언뜻 동물들의 객담에 지나지 않나 싶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보다도 그 여운은 제법 길다. 그 잔잔한 메아리가 가슴 속의 반향을 일으켜 장구한 세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고전 우화는 먼 옛적과 지금의 인간사가 본원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는 재미를 부여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군신, 친우, 부자 간의 관계의 본질은 변함없으며 재화로 비롯한 계급 분화와 갈등은 여전하다.
 
<멧비둘기의 장>에서 큰 쥐의 신세타령:
 “돈이 없으면 왜 그토록 비참해지는지 아시오? 가난이란 체면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오. 체면을 포미하면 기쁨이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면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오....가난은 가장 모진 시련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갖은 멸시와 모욕이 빗발치는 것이 현실임을 깨달았소...”(P.193-194)
 
또한 문화적 교류의 흔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다. <원숭이와 숫거북의 장>에서 거북이한테 속아서 바다로 간 원숭이가 자신의 심장이 몸에 없다고 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우리의 토끼와 자라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전승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간단히 보더라도 우연한 문화적 공통으로 간주하기에는 제재와 구성의 유사성의 정도가 너무 크다.
 
우리의 현대 문화가 서구에 편향되어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등의 뛰어난 측면을 외면한 지 오래다. <칼릴라와 딤나> 또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수 년 밖에 안 되어 어찌 보면 서구인보다도 더 서구 지향적 우리 문화의 병폐의 예증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 수용 과정과 그 이후의 묵수(墨守)적 태도를 볼 때, 우리는 지나치게 순수성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된다. 사상과 종교 등은 모두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필요성에서 발명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네는 이를 절대시하여 이에 어긋나는 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니 이단이니 하여 한 치의 유연성도 보여주지 않는다. 지난 세기 후반의 이데올로기 갈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데올로기가 천륜보다도 더 중시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서구 문명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만시지탄이나 보다 많은 이들이 균형 잡힌 문명 시각을 지니고 국경 밖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바란다. 여전히 인도와 아랍의 고전 상당수가 우리의 손을 벗어나 있다.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를 접하면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임을 각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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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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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두따 - 세계의 고전 인도편 1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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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시간적 간극과는 무관하게 사람의 정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나보다. 기원전의 호메로스나 그리스 희곡작가들과 5세기 인도의 깔리다사, 그리고 채널만 돌리면 무수히 등장하는 21세기의 가요와 연속극 등. 그들의 공통점은 사랑이며, 차이점은 신(神)과 물신(物神)에 있다.
 
<샤꾼딸라>에서 고초에 굴하지 않는 사랑의 강인함을 그렸던 깔리다사는 이제 시의 영역에서 또 다른 사랑의 노래를 읊조린다. 그것이 <메가두따>다. 메가는 구름을, 두따는 사자 즉, 메신저라는 의미라고 하니 ‘구름의 사신’은 무엇을 전달하는 것일까? 이 역시 사랑이지만, 헤어진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이다.
 
자고로 사랑하는 사람 간에 생이별만큼 가슴 찡하게 하는 상황도 흔치않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고 싶은데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을 때, 나는 옴짝달싹 못하는데 먼 하늘의 두둥실 구름은 바람 따라 무심히 흘러가니 더욱 서글픈 법. 그래서 선인들은 바람이나 구름 등에 의탁하여 자신의 감상을 회고하기를 즐겼다.
 
깔리다사의 이 작품은 121편의 연작 서정시다. 그렇다. 서사시가 아니라 서정시다. 이제 신들의 시대는 새벽을 맞이하여 스러져가는 달빛이요, 인간의 시대는 아직 어슴푸레하지만 먼동을 곧 환하게 물들일 것이다.

모시던 꾸베라 신의 저주로 신혼의 아내와 헤어져 아내는 히말라야 이쪽 까일라사에 있는데, 약샤는 머나먼 남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장마를 알리는 검은 구름을 보며 약샤는 아내의 안위가 걱정된다. 그래서 구름에게 아내를 찾아가서 자신의 위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작가의 눈앞에는 구름이 지나가게 될 인도 각지의 정경이 스쳐 지나간다. 바삐 지나쳐가도 부족하련만 작가는 구름의 시선을 한층 낮고 다사롭게 하여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사를 온화하며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이 전반부 뿌르와메가이다.
 
전반부에서 아내가 있는 도시 알라까에 도착한 구름은 후반부 우따라메가에서 도시와 자택에 대한 묘사를 거쳐 이제 아내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에 지극하다. 실상 아내를 그리워하는 심경이 미모에 덧씌워져 있으니 그 지극함은 형언할 수 없으리라.
 
시대적,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향한 약샤의 절절한 마음에 심히 공감하는 것은 인간 본원의 공통된 심금을 울리고 있음에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슬픈 서정시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서정시인 독자가 서정시인 약샤의 마음을 서정시인 깔리다사의 시구를 통해 공명한다.
 
소박하고 간명한 이 작품이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괴테와 실러의 찬사를 얻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개인적 평으로 감상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고전의 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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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0.1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샤꾼딸라 - 세계의 고전 인도편 2
깔리다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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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 산스크리트 문학의 걸작으로 일컫는다. 작가 깔리다사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서기 5세기 전반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사성은 물론 서정성을 강하게 드리운 작품을 많이 썼으며 그 중 여러 편이 남아 전한다. 어찌 보면 인도의 호메로스 내지 인도인들의 표현을 빌면 인도의 셰익스피어라고 하는데, 확실히 서정시와 희곡을 남긴 점에서 터무니없는 비교는 아니다.
 
샤꾼딸라는 작품의 여주인공 이름으로 전 7막으로 구성되는데, 소재는 요즘 관점에서 보면 상투적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숲 속 성자의 아쉬람에서 양녀로 자라는 순진한 소녀 샤꾼딸라가 사냥 온 두샨따 왕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이어 얼마 후 아이를 갖게 된 샤꾼딸라가 두샨따 왕을 찾아가나 왕은 다른 성자의 저주로 샤꾼딸라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유일한 희망인 정표로 준 반지도 샤꾼딸라가 잃어버려 기억을 살릴 수 없다. 이에 실망한 샤꾼딸라는 왕궁을 떠난다. 우연한 계기로 발견된 반지를 보는 순간 왕은 샤꾼딸라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자책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인드라 신의 명령으로 악마(아수라)를 물리치고 돌아오다가 우연히 샤꾼딸라와 아들과 해후하게 된다.
 
일단 희곡 형식에 충실하게 쓰였으며 더욱이 고대 인도의 희곡이니만큼 요즘과는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음은 당연하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200면 이내의 얄팍한 분량에도 비교적 사건과 갈등의 전개 구조가 확연하다. 다만 대화체이기는 하나 인물의 사상 표현은 수많은 시를 통해 표출되므로 어찌 보면 극시에 가깝다고 하겠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정서가 현대와는 다른 만큼 어떤 감동이나 감흥을 찾기는 어렵다. 원문으로 접하거나 인도인이라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고대 인도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이렇게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점은 역시 흥미롭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로 화를 벌컥 내고 저주를 퍼붓는 인도의 성자는 진정 성자인지 의심이 될 만큼 독특한 인물이다. 인도의 고대문학을 보면 성자는 두 부류다. 온건하고 자기수양적인 성자와 편협하고 성격이 불같아서 홀대 받았다고 생각되면 바로 저주를 쏟아 붓는 성자. 그런데 성자의 저주는 없애거나 되돌릴 수 없다고 하니 참으로 무서울 수밖에.
 
두샨따와 깔리다사의 아들의 먼 후손이 바라따 족의 비조가 된다고 하니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인물들은 역시 깔리다사와는 시대적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부록의 싼쓰끄리뜨 어의 발음규칙을 보면 v가 u 소리를 내는 것은 동남아에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베다는 웨다로, 비쉬누는 위쉬누로, 쉬(시)바가 쉬와로 하는 게 맞다고 하니 영어식 명칭에 익숙해진 우리 귀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원어 존중을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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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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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타 - 불멸의 인도문학 2
비야사 지음, 주해신 옮김 / 민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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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인도문학 2.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쌍벽을 이루는 인도의 고대 서사시다. 무려 10만 구절의 20만행의 분량만으로도 초대작인 이 작품은 그 유명한 그리스의 양대 서사시를 합한 것의 8배에 해당하는 분량이고 한다.
 
작가는 비야사라고 하는데, 대개 고대 서사시가 그러하듯 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닐 뿐 오랜 기간의 무명 악사들에 의한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도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나니 여기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참으로 이 대작에는 인간사의 모든 측면이 깊숙이 드리워져 있다.
 
크게 보면 판다바들과 카우라바들의 친족 간 왕위 계승 전쟁에 불과하지만, 마치 <일리아스>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 동맹군이 세계(그들이 아는 범위 내에서)의 패권을 건 일대 혈투를 벌이듯 온 인도의 국가들이 양측에 갈라져 격전을 벌인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외관상 판다바들의 승리로 끝나지만 수많은 혈육과 친지, 지지자들을 잃은 마당에 상처뿐인 영예를 차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런지. 오히려 이를 계기로 고대 인도의 정치체제가 붕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화를 보면 언제나 고대는 완전하고 선한 세상이다.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그러하며, 고대 중국의 요순 시절에 대한 회귀적 갈망이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신화에서 황금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오는 과정도 다르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바라타족의 전쟁을 계기로 환상이 깨지기 이전에 신성과 절대선은 추앙을 받았다. 라마야나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친족 간의 살해가 빈번히 등장한다. 그리고 다르마(도덕)의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만큼 라마야나보다는 후대에 기술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카우라바들은 판다바들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고 결국 대전쟁으로 귀착되는데, 이 과정에서 판다바들의 부인에 대한 비겁한 모욕으로 씻을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한다. 이 분노의 결과 비마는 일백 명에 달하는 카우라바들을 한명만 제외하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또한 상호 전투 과정에서 엄숙하게 선서하고 지켜지던 계율들, 즉 무기없는 자는 공격하지 않는다, 비전투요원을 공격하지 않는다, 전투는 일몰과 함께 끝난다, 하체는 공격하지 않는다 등등의 전투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무시되고 마침내 비마는 두료다나의 두 다리를 공격하여 전쟁을 종결짓지만 이로 인하여 다르마를 위배했다는 비난을 판다바들은 얻게 되고 잔여세력의 야습이라는 복수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다르마푸트라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던 유디슈티라는 거짓말로 드로나를 속여 그를 죽게 만드나 그 대가로 "언제나 지상에서 한 뼘쯤 떠서 다녔던 그의 전차가 드디어 지상에 닿았다는 것은 그 또한 속세의 속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뜻이었다(P.403)."
 
교과서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대하여 듣지 못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사실 보다 더 세분된 신분계급이 있다고 하는데, 속세를 다스리는 지배층은 크샤트리아며, 마하바라타 역시 크샤트리아들 간의 전쟁이다. 브라만은 고행을 통하여 영적인 신통력을 지닌 승려계급으로 원칙적으로 속세에는 관여하지 않으나 전투에 참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크샤트리아의 다르마는 "늙거나 병들어 침대에서 죽기보다는 전쟁터에서 자랑스럽게 죽기를 원하다"(P.289)고 하는데, "싸움터에서 죽는 무사에게는 남들이 크게 고생해야 얻을 수 있는 천국에의 길이 쉽게 열린다"(P.366)고 한다. 곧 크샤트리아는 전쟁이 다르마인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을 바치는 대가로 속세의 지배권과 천국에의 약속을 보장하는 것이 인도의 계급 제도다. 한편 브라(흐)만은 속세를 떠나 숲속 등에서 은둔의 고행을 통해 신의 능력을 가지게 되는데, 고행자의 분노와 저주는 세속의 왕 뿐만 아니라 하늘의 신까지도 두렵게 만든다. 즉 천신조차도 위대한 브라만에게 고개를 숙인다. 439면을 보면 불의 신 아그니가 브라흐마차리야 삼바르타의 분노에 벌벌 떠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라마야나와는 달리 마하바라타에서는 신과 아수라 같은 인간 이상의 존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크리슈나는 비슈누신의 화신이지만 결코 신 자체의 역할을 맡지는 않는다. 즉 바라타족의 전쟁과 패망은 신에 의해 운명지어졌지만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바라타족 자신인 것이다. 카우라바들의 아버지인 드리타라슈트라의 소시민적 선과 소극적 방관이 불화를 비극으로 이끈 계기가 되고 있다. 마하바라타의 시대에 와서 신은 인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맹인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우화가 있다. 마하바라타를 400여 면의 압축된 한 권의 책으로 진면모를 알았다고 하면 세인의 조소를 받게 될 것이다. 그나마 이것에라도 감사할 따름은 이조차 없다면 우리는 인도인의 정신세계의 큰 자리를 차지한 이 고전에 대해 발가락이라도 만져볼 기회가 없음에서이다.

판다바는 선하고 카우라바는 무조건 악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어쩌면 보다 인간적인 것은 두료다나일 것이다. 뻔히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 맞부딪히면 깨질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운명에 떠밀려서 한편으로는 감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천국에 올라간 것은 전쟁터에서 죽은 크샤트리아로서가 아니라 악의 숙명을 묵묵히 감내한 그의 동정이 불가피한 인간적 속성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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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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