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멘 호수.백마의 기사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10
테오도어 슈토롬 지음, 이은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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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청소년문학시리즈 010

테오도어 슈토름은 19세기 중반 소위 시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이다. 여러 노벨레 작품으로 명망을 누렸으며 특히 대작 <백마의 기사>가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대학시절> <삼색 제비꽃> <꼭두각시 폴레>가 번역되어 있다.

<임멘 호수>는 그나마 여러 번역이 나온 편인데, ‘첫사랑’ 또는 ‘호반(湖畔)’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였다. 결론적으로 원제목은 아니지만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사실 ‘임멘 호수’라는 표제보다는 독자의 감성에 대한 호소력이 더욱 뛰어나다고 하겠다. 영화 <워털루 브리지>를 <애수>로 바꾼 것처럼.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의 첫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그들의 사랑은 어릴 적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쌍방의 적극적 열정이 동반되지 않고 있다. 특히 엘리자베트는 사랑보다도 관습에 순응하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라인하르트가 이년을 기다려달라고 했음에도 끝내 이를 지키지 못하고 에리히와 결혼한다. 후에 노랫말이 가리키듯 ‘어머니의 뜻’으로 말이다.

이 작품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라인하르트가 고향을 방문하여 에리히의 집에서 엘리자베트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그들의 만남은 손을 맞잡고 외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에 간직한 체념한 사랑으로 수렴되고 이에 라인하르트는 길을 떠난다. 여기서 엘리자베트의 모습은 ‘흰 옷을 입은 소녀 같은 여인’(P.50)으로서 호수에 피어있는 ‘하얀 수련’으로 상징화된다.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건만 아무리 헤엄쳐도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존재.

전체적으로 잔잔하면서 간결성과 투명성이 돋보인다. 일체의 정념이 체념의 경지에 스며들어 있는 독특한 문체이다. 첫사랑의 기쁨을 그리기 보다는 첫사랑의 가슴 아픔을 독자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하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더욱 애절한 법이니.

<백마의 기사>는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른 방향의 작품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또는 사회)의 대치 구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 하우케 하이엔의 성격과 행동은 밝음과 어둠의 혼재로 드러난다. 그의 결단과 의지는 결과적으로 선을 향하지만 내면적 충동은 부정적 사상으로 강화된다. 따라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한다.
“그 순간 이들에 대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젊은이의 가슴에 명예심과 사랑 이외에도 공명심과 증오가 자라기 시작했다”(P.159)

이렇게 보면 하우케의 새 제방 축조도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 제방감독관으로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면 거짓이리라. 절차에서도 그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해당사자인 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설득을 구하는 대신 관청의 힘을 빌려 시행을 강제하고 있다. 따라서 후에 홍수로 제방이 곤경에 봉착하였을 때 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는 매우 시사점이 크다. 결과적 정당성이 과정의 정당성을 상쇄하는 것은 이미 구시대적 관념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최선의 정책이 절차 정당성을 얻지 못하여 묻혀버리고 차선의 정책을 선택되는 경우가 다반사고 오히려 이것이 보다 정당하다. 하우케는 이 점을 등한시하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하우케가 중인(衆人)들과 다른 점은 종교적 관습을 지키지 않는데도 있다. 그에게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이성적 판단에 적합하지 않은 미신적 관습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자연은 엄혹하지만 충분히 대처 가능한 존재이다. 철저한 사전 준비와 꼼꼼한 감독으로 자연의 변덕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근대인이자 계몽인이기도 하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전근대인이며 봉건인이다. 작품 말미에서 하우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이 “유능한 인사를 단지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이유로 유령이나 귀신 들린 자로 만드는 일은 어느 시절이나 있기 마련이지요”(P.294-295)라는 평가가 이를 명확히 하는 작가의 하우케 변론이다.

이 두 작품은 다른 제재를 택하고 있지만, 한구석에 뿌리치지 못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탈봉건과 근대성의 기치를 내걸고 있음이다. 전자는 사랑을 얽어매는 낡은 관습, 후자는 봉건적 인습을 뿌리치는 근대인의 강인성과 자연 개발 의지. 이 점에서 슈토름의 노벨레는 단순한 시적 사실주의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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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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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
알퐁스 도데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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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에서 상당 부분 표출되었던 팜므 파탈에 대한 도데의 집요한 천착이 <사포>를 낳은 원동력이다. 작가 스스로가 파리 시절에 겪었던 그 체험이 가슴 속에 강한 여운과 충격을 남겼던 것인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 누구라도 그녀의 매력을 외면할 수 없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인은 사내의 몸과 정신, 그리고 재물을 서서히 고갈시켜 파멸로 이끌고 만다. 그리고는 미라를 팽개쳐 버리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이르마 보렐과 파니 르그랑은 여기서 멀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 형성이 이루어진다. 그중에는 상생의 관계뿐만 아니라 상극도 존재한다. 스쳐지나가는 관계에서도 상극은 피해야 할 텐데 하물며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함에 있어 상호 파멸로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비극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뭇 남성들이 팜므 파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함은 파멸의 고통과 추락에서 쾌감을 느끼던가 아니면 이미 심신이 마비되어 의지가 박탈된데 기인한지 모르겠다.

장 고셍이 화류계에서 사포로 불렸던 파니 르그랑에게 도덕적 정숙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외 파견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시잠깐 즐기려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는 점차 그에게 괴로움과 질투로 다가왔다. 즉 남녀 관계가 단순 육체적 단계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단계로 진전됨에 따라 순전한 독점적 소유욕이 충족되지 못함에 대해 마음 한구석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사실 파니가 장 고셍에게 쏟은 헌신은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적어도 그녀는 장 고셍을 만난 이후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고 그에게만 충실하였다. 그녀의 과거가 깨끗하였다면 장 고셍과의 결합에 그리 큰 장애요인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장 고셍은 파니를 떠나려다 결국은 가족과 약혼녀를 포기하고 그녀에게 다시 오지만, 파니는 그를 따라나서지 않는다. 사포로 살아온 파니가 사포임을 버리고 파니가 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녀가 사랑하였던 장 고셍에게는 커다란 불행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벗어나지 못한 애욕의 굴레를 사포가 직접 벗겨준 것이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보면 비판받을 만한 내용과 제재를 다루고 있다. 목동의 순수한 사랑을 기억하는 독자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기 바란다. <아를의 여인>에서 출발한 도데는 <꼬마 철학자>를 지나고 여기 <사포>를 통해서 예술지상주의에 가까운 감각적 문장을 구사하여 사랑과 애욕, 남과 여, 정숙과 타락, 애정과 증오 등 인간(특히 남녀)에 내재한 지독한 집착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사포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여류시인이다. 그녀의 명성은 서사시의 호메로스, 서정시의 사포라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높았지만 애석하게도 현전하는 작품은 몇 편 남지 않아 명성의 실체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편 사포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여성들을 가르치는 멘토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성동성애주의자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레즈비언(레스보스 여인?)이라는 명칭은 사포의 고향인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포는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용어로 전락하게 된다.

* 작품 해설과 책 뒤표지에서 잘못된 내용 전달이 있어 바로잡는다. 외교관 지망생 장 고셍 앞에 나타나 “당신의 눈동자 색깔이 마음에 들어요. 이름이 뭐죠?”라고 묻는 여인은 ‘흰 비단 레이스가 달린 스페인 수녀 복장의 여자’가 아니라 ‘이집트 여인’이다. 스페인 수녀 복장의 여인은 가면무도회에서 잘생긴 장 고셍에게 감탄한 뭇 여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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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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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의 타르타랭 교학사 청소년 세계명작 24
알퐁스 도데 / 교학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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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과 ‘마지막 수업’으로 알퐁스 도데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빨리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들이닥치는 당혹감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다.

<풍차방앗간 소식>에서 싹 트고 <월요일 이야기>에서 떡잎을 틔운 도데의 유머와 해학의 풍조는 타르타랭 시리즈에서 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삼부작 중 나머지가 번역되지 않은 현실에 매우 유감스러워하게 된다.

엉뚱하고 비상식적인 행동 양태를 보이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으로는 <돈키호테>와 <그리스인 조르바>가 문득 떠오른다. 선불 맞은 멧돼지 마냥 막무가내고, 갓 잡아 올린 고등어 마냥 팔딱팔딱 뛰는 우리의 주인공 타르타랭은 양자의 중간에 해당된다. 낙천적이며 현세적 인생관 및 여성에 대한 진지한 몰입은 조르바와 가깝고, 자신에 대해 착각과 오해하면서 앞뒤 모르고 덤벼대는 것은 돈키호테와 친구 사이다.

소위 타라스콩 알프스 클럽의 회장인 타르타랭은 질투의 화신 코스트카르드로부터 회장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알프스를 정복하러 떠난다. 도중에 허풍선이 고향사람 봉파르와 만나서 알프스를 거대한 테마파크로 착각하게 되어 난관에도 대범하게 유유자적 융프라우를 등정하게 된다. 도중에 마주치는 알프스 관광객들 군상과의 관계, 특히 러시아 혁명조직과 젊은 여성 소냐와의 우습지만 열렬한 애정은 둘시네아를 향한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한다. 어쩔 수 없이 몽블랑 등정에서 나섰다가 조난되어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 타르타랭.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맞추어 귀향한다.

솔직히 이 작품은 줄거리 자체는 대수롭지 않다. 곳곳에 등장하는 타르타랭의 대사와 행동이 관건이다. 입만 열면 북아프리카 사자 사냥 일화를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는 허풍에 불과하다. 소냐를 열렬히 사랑하고 뛰어난 사격술(?)을 과시하지만 혁명에 동참하게 될까 두려워 도망치듯 떠나고 결국 수다쟁이라는 핀잔을 받지만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인간. 그것이 바로 타르타랭이다. 그가 진정 소중하게 여기고 즐기는 것은 인생 자체이며, 인생을 소홀히 하거나 염세적으로 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알퐁스 도데는 등장인물들을 모두 유머와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신이 프로방스 출신답게 풍물과 사람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보듬고 있다. 그것이 도데의 미덕 아니겠는가. 그래서 봉파르라는 어찌 보면 거짓말만 주워섬기는 사기꾼마저 타라스콩 사람은 원래 그런 법이라며 감싸 안는다.

19세기 후반기의 점차 냉정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 도데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잊거나 소홀히 하는 따뜻한 인간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을 품고 있는 듯하다.

<알프스의 타르타랭>은 비교적 경장편에 속하므로, 필업으로 대표 단편선을 수록하고 있다. 그것은 ‘별’, ‘마지막 수업’, ‘어린 자고새의 놀람’, ‘세 번의 경고’, ‘크리스마스 이야기’,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노인들’이다. 이 중 ‘어린 자고새의 놀람’ ‘세 번의 경고’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처음 읽는다. 전자는 우화 형식을 빌어 사냥꾼과 사냥당하는 동물의 긴장된 관계를 그리고 있다. 언뜻 사냥 비판론이 아닐까 싶지만 전쟁이라는 황폐한 체험의 소산임을 깨닫게 된다. ‘세 번의 경고’ 역시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 사회 비판으로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후자는 산업시대 이전 화려한 귀족 사회의 자취를 되새기고 있다. 

* 여명출판사 번역본은 절판되고, 현재는 교학사 번역본만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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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단편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5
알퐁스 도데 지음, 김사행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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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는 ‘별’, ‘마지막 수업’으로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작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별’을 읽고 그 투명한 아름다움에 영혼이 빛나고, ‘마지막 수업’으로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느껴보지 못한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도데의 다른 작품은 거의 접하지 못하였다. 모처럼 짬을 내어 도데 단편집을 펼친다.

단편으로 유명한 알퐁스 도데이지만, 출발은 시인으로서였다. 그의 작품에서는 시적 향기가 배어난다. 특히 초기 작품집인 <방앗간 소식>이 두드러진다. 반면 단편작가로서의 이미지가 강렬한 탓일까. 그가 중후반 이후에 쓴 10편이 넘는 장편소설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나마 국내에 소개된 얼마 안 되는 작품 중 첫 장편인 <꼬마 철학자> 정도만이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역시나 국내 문학계의 편식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두 권의 단편집 <방앗간 소식>(1866)에서 12편, <월요일이야기>(1873)에서 16편을 발췌하였다. 도데는 모두 40여 편의 단편을 썼다고 하니 주요한 작품은 거의 수록한 셈이니 이 한 권으로 도데의 단편 세계를 조망하는데 부족하지는 않으리라.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도데의 특성은 모두 <방앗간 소식>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고향인 프로방스 지방 사람들을 간명하고 따뜻한 필치로 시적인 정취를 불어넣어 너무나도 깨끗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어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당대 프로방스 사람들의 일원으로 더불어 숨 쉬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다. 이러한 대표작이 바로 ‘별’인데, 너무 순수하여 오히려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순수한 첫사랑을 그린 작품으로서 황순원의 ‘소나기’와 함께 유달리 기억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 외 작품들은 프로방스에 전해지는 이야기 및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미소 띤 시선으로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다. ‘코르니유 영감님의 비밀’의 뭉클한 결말,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의 슬픔을 자아내는 해학 등이 잘 어울려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소위 보불전쟁을 계기로 알퐁스 도데의 제재와 어조는 변화를 겪었다. 전쟁이란 그렇게 사회는 물론 개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더 이상 혼자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에 안주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월요일 이야기>에서 우리는 프로방스에서 알자스와 파리 등으로 배경을 옮겼을 뿐만 아니라 보다 날카로운 시선을 뿌리는 도데를 만나게 된다. 패전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의 발현, 무기력한 자국 정부와 군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나마 인간성에 대한 소박하지만 굳건한 믿음이 도데의 글에서 문학적 향기를 앗아가지는 않고 있으니 다행이랄까. ‘마지막 수업’과 ‘소년 간첩’, ‘기수’는 애국심을 다루고 있으며, ‘당구’, ‘8월 15일의 서훈자’, ‘패흐르 라셰즈의 전투’ 등은 당대 사회와 정부를 풍자하고 있다.

민족과 문화가 달라서인지 앞서 읽었던 독일 노벨레 작품들과는 글의 분위기가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도데의 글에서는 그늘조차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단편소설은 인생과 사회의 단면을 대상으로 한다. 부분이 전체를 내포할 수 있지만, 시냇물과 대하는 차원이 다르다. 보다 큰 스케일과 구성을 지니되, 소품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는지 알퐁스 도데의 장편소설을 읽고 싶다. <알프스의 타르타랭>(1885), <사포>(1884), <꼬마 철학자>(1868)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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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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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 브루노 발터가 만난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지음, 김병화 옮김 / 마티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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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브루노 발터가 만난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는 1958년판 서문에서 말러의 현재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명하고 있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에서 말러의 위상을 브루노 발터는 물론이고 말러 본인이 직접 목도할 수 있다면 이런 아쉬움을 더는 토로하지 못할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말러 열풍은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1년에 아마 절정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말러의 음악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그의 음악이 주는 광활성과 심원성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극도로 신경질적 성향을 완연히 내비치는 음악세계는 극적인 몰입의 폐해를 가슴깊이 남기게 된다. 따라서 애호가 중에서 자녀들에게 들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마디로 비교육적이라는 것, 영화로 치면 19금(?) 정도라고 할까.

개인적으로도 말러의 곡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유독 장대하고 극적인 성향의 곡을 일찍부터 선호하여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에 관심을 두었다. 말러 곡 중에서는 1번, 2번, 5번, 대지의 노래, 9번 순으로 듣게 되어 6번, 3번, 7번까지 별 거부감이 없다. 다만 4번과 천인 교향곡은 좀 더 시일이 필요할 듯. 언어의 한계는 내게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다.

말러의 곡을 통해 유추하건대 말러의 인간성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타입이다. 여유가 없고 신경질적이고... 말러 후반생의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우인 발터의 전언에 따르면 이는 부분적으로만 맞다. 사람 됨됨이는 섣불리 속단해서는 안 됨을 또 한 번 절감한다.

이 책의 매력은 작곡가 말러의 인간적 면모를 마치 옆에서 보고 듣는 것처럼 소상히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사상가, 예술가와 운동선수 등 외견적 업적에 감탄하면 곧바로 업적을 산출한 개인 그 자체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현시대 가장 인기있는 작곡가인 말러의 전기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말러의 교향곡 작품을 초기 말러 작품의 절대적 권위자였던 브루노 발터가 해석하는 내용이다. 수많은 지휘자들이 깊은 연구와 발전된 음향 기술의 덕택으로 보다 정교하고 극적인 말러의 음악을 재현하면서 브루노 발터의 권위는 많이 퇴색되고 있다. 특히 레너드 번스타인의 극단적 팽창주의는 물질문명의 이데올로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러의 작품이 가진 최고의 가치는 모험적이고 과감하며 개척자적이거나 기괴한 것이라는 진기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진기함이 아름답고 영감에 가득하고 심오한 음악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것이 고도로 창조적인 예술성과 의미 깊은 인간성이라는 영속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P.177)

바로 이것이 브루노 발터의 말러 작품론이다. 말러의 작품에 내재한 예술성과 인간성을 구현하는 것 말이다. 그러기에 발터의 말러 음반을 들어보면 외향적인 음향 효과에 치중하기 쉬운 <거인>과 <부활>에서도 화려한 분출을 조심스럽게 자제하고 있다. 마지막 교향곡에서도 과도한 비탄조를 피하고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말러의 음악은 20세기 초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그의 작품에서 설핏 감지되는 기계적 성향과 거대한 구조는 시대적 산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극단적로 전개해 나가면 현대의 많은 지휘자들이 그러하듯이 장대한 오케스트라 쇼피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발터는 말러와의 인간적 교감을 통해 그것은 말러의 가슴과 정신, 그리고 세계가 빚어내는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임을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진지한 클래식 애호가, 특히 말러에 푹 빠져 있는 이들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완독한 이후 다시 말러의 음악을 듣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말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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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5.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