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내로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라니! 표제만으로는 언뜻 유머 모음집이 연상된다. 개콘이나 웃찾사에 등장할 소재가 아닌가. 하지만 실화를 다룬 책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몸과 마음의 옷깃을 단단히 여밀 필요가 있다.

신경학 전문의인 저자가 자신의 임상체험 사례를 기술하였는데, 감동을 자아낼 정도의 소박하며 과도하지 않은 아름다운 필치로 독자에게 소개하고 있다.

사실 신경학이라면 다소 낯선데, 흔히 말하는 정신병 환자를 다루고 있다. 다만 뇌와 신경 기능의 이상으로 초래된 것으로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신체의 운동이나 감각 기관은 정상인데 이를 전달하는 신경 기능 또는 인지하는 뇌 부위의 이상으로 언뜻 황당하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병적 행태가 등장한다. 우습지만 웃을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기에 남의 이야기가 아닌 연유다.

타이틀의 이야기는 시각인식 불능증에 걸린 한 음악선생의 사례다. 우리는 사물 또는 사람을 인식할 때 개개의 부분 정보를 모두 수집 정리하여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지의 존재를 파악할 때 하는 방식이다. 보통은 한번 쓱 보면서 전체적으로 인식한다. 흠 이건 현대자동차의 쏘나타 차종이군. 저기 앞에 걸어오는 이는 우리 수학 선생님이네 등등. 만약 전체적 인식이 불가능하여 모든 정보를 종합 분석해야 한다면 인생이 매우 피곤해질 것이다. 종합하기 힘들뿐더러 종합된 결과가 옳다는 보장도 없다. 두드러진 특징을 보유할 경우만 식의 확실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있다. 여의치 않다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할 수 있다. 이것은 시각기능의 장애가 아니라고 한다. 시각과 뇌를 연결하는 신경 또는 이를 인식하는 뇌의 특정 부위에 질병 또는 장애가 발생하면 이렇게 되고 만다.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와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 ‘매들린의 손’은 모두 몸 전체 또는 다리, 손이 없다고 인식하는 증세를 다룬다. 고유감각 기능의 상실로 몸에 대한 모든 인식과 감각을 상실한다면 소위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되니 그럼 나의 존재 근거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마저 제기될 수 있다. 뒤 두 편은 각각 다리와 손에 대한 인식과 통제기능을 상실한 경우다. 내 것이 아닌 낯선 팔다리가 내 몸에 붙어 있다는 감각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렇게 제1부는 장애에 따른 기능의 상실을 다루고 있는데, 제2부에서는 역으로 장애에 따른 기능의 과잉을 안내한다. 옛말에 과유불급이라고 하였다. 지나침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투렛 증후군의 병례를 언급하고 있다. 투렛 증후군은 신경질적인 에너지 그리고 기묘한 동작이나 생각이 과잉현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P.177)이라고 한다. ‘익살꾼 틱 레이’에서 환자는 극심한 틱 증상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약물 처방을 받아 증세가 완화되었더니 탁월한 재즈 드럼 솜씨가 퇴보하였다. 그래서 주중에만 약물을 처방하고 주말에는 투렛 증후군이 발생하는 상태에서 예술적인 장기를 살리기로 한다. 또한 코르사코프 증후군을 겪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톰슨 씨의 병례도 흥미와 아울러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혹시 예능인 중에도 본인은 잘 모르지만 이런 증세(다소 약하더라도)를 지닌 사람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하기도 하다.

제3부는 이행을 다루고 있다. 정확한 이해는 어렵지만 신경 장애가 현실과 예술 또는 현실과 과거 등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를 일컫는데 대개 사회적으로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 관심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비밀과 힐데가르트의 환영을 읽어보면 예술가의 기질이 범인과는 차이가 나는 점도 일부분 설명되지 않나 생각한다. 신경 장애가 예술적 영감이 극대화된다면 오히려 예술가들은 앞 다투어 신경 장애에 걸리고자 노력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너무 까마득해서 기억에도 없던 어린 시절의 노랫소리와 당시 정경이 한순간에 상기된다면, 아니면 고국의 추억이 되살아난다면 오히려 병에 걸린 것을 고마워할 사람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이 책의 ‘회상’에 나오는 C 부인과 ‘인도로 가는 길’의 소녀처럼 말이다. 그들은 병세의 악화로 아름다운 회상이 사라져가는 게 너무도 아쉬울 것이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즐겁고 흐뭇한 기분으로 가는 게 최선이 아니겠는가.

제4부는 소위 자폐증 환자에 관한 사례다. 이들의 특징은 낮은 지능에도 두드러진 탁월성을 발휘하는 영역을 지니고 있다. 리베커의 시적 재능, 뛰어난 음악 기억력의 마틴, 날짜계산의 천재 쌍둥이 형제, 그림을 잘 그리는 호세 등.

1985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신경과 정신에 관련된 임상 체험을 탁월한 솜씨로 형상화하고 있다. 지금 보아도 내용이 생소하고 충격적인데 20여 년 전 당시의 독자에게는 하나의 경악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그동안의 신경정신학이 뇌의 좌반구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고 비판하며 우반구에 원인을 두고 있는 증후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반구는 좌반구 보다 원시적이므로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능력을 담당하고 있으며, 여기에 장애가 발생하면 진단하기가 좌반구 장애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반구에 원인을 가진 증후군이 나타나면 그것을 특이하고 기묘한 현상으로 간주했다.(P.20)

내게 이 책을 권해 준 지인은 인지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에게 이 책에 실린 사례는 인지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는 어떠한가. 우선 이야기 자체로 흥미롭다. 게다가 내게도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위 정신병 행태를 보이는 사람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편견을 품지 말자는 각성이다. 사실 팔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은 타인의 동정과 관심을 받기 쉽지만, 행동이나 어투에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보이는 사람의 주위는 모두들 피한다. 같은 장애인데 신체적 장애에 비해 정신적 장애는 사람이 아닌 동물로 취급받는다. 사람다움을 잃어버렸다는 것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그들이 과연 인성과 영혼을 상실하였는지 아니면 그런 시각을 지닌 우리들이 신경 장애인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6.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빨강파랑 2014-06-1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퍼가도 될까요?

성근대나무 2014-06-1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만 명확히 하시면 퍼가도 괜찮습니다.
 
불후의 클래식
허제 지음 / 책과음악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안동림 교수가 쓴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과 <이 한 장의 명반 오페라>를 가지고 있다. 각권이 정가 5만원에 분량도 전자의 경우 1500여 면을 훌쩍 넘는다. 서가에 꽂아놓고만 있어도 흐뭇하며 가끔씩 들춰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물론 이런 유형의 저작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무 옛 시대의 거장들의 연주를 선호하고, 개인적 감상이 깊숙이 반영되어 있어 음반가이드로서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이유다.

그런데 이러한 책을 음반가이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 한 장의 명반’에 대한 수상록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싶다. 물론 비싼 돈 주고 수상록을 사보는 데 반대한다면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다.

여하튼 허제의 이 책을 보며 안동림 교수의 저작을 떠올리는 건 대체로 스타일이 비슷한데 연유한다. 허제는 일찍이 <명반의 산책>과 개정판인 <명반의 산책 1001>로 정통적인 음반가이드북을 출간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가이드북에 충실하게 대중적 명곡과 대표음반 세 장씩을 소개하여 나 같은 입문자에게는 지금도 꽤나 도움이 되고 있다. 영문판인 <펭귄 가이드>나 <그라마폰 가이드>는 조금 어렵다.

<불후의 클래식>은 음반가이드북이 아니다. 오페라를 제외한 주요 작곡가의 대표 작품 당 단 하나의 음반을 소개하고 있는데, 기실 900여 면을 빽빽하게 채운 것은 음반 자체보다는 음반에 수록된 작곡가와 작품, 그리고 연주가와 연주에 얽힌 이야기다. 음반 선정 자체는 대체로 주관성과 객관성이 혼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명반이라는 것이 원래 그러한 법이 아니겠는가?

저자가 추천하는 음반으로 그 음악을 들으며 책장을 넘기면 그동안 간과하기 쉬웠던 악구의 미묘한 의미를 되새기는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가이드북처럼 한번 쑥 스쳐지나가며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그래서 나도 날마다 몇 장씩 읽다 보니 거의 두 달이나 소요되었다. 음악 감상과 병행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이 책을 클래식 입문자에게 추천하기는 약간은 곤란하다. 소위 보편타당한 추천음반으로 어느 정도 귀가 익숙해져서 나름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저자의 주관성에 함몰되지 않는다. 저자의 절대 명반은 내게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경우 저자는 헨릭 셰링을 추천하지만, 나의 가슴 속에는 요제프 시게티가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의 아름다움을 처음 깨달은 연주는 여기서 추천하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미국 데뷔 50주년 음반이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두 종류의 음반이 아니라 아쉬케나지가 유진 오먼디와 협연한 것이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경우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쿠르트 잔데를링의 멜로디야 음반을 듣고 나서 비로소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감상성과 상투성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즉 허제의 이 책은 한 음악애호가의 주관적 감상기로 참고도서로 유용하게 활용하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이 책은 결정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정가 49,000원의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부담이 될 만한 책이라면 내용뿐만 아니라 편집에도 보다 철저를 기해야 했음에도 다소 미흡하다. 눈썰미가 좋은 독자라면 곳곳에 수많은 오타를 발견할 수 있다. 연주와 녹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명반이 되는 것처럼(연주는 좋은데 녹음이 나쁘면 historic 이라는 단어가 추가된다) 내용과 편집이 잘 어우러져야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상업성이 취약한 1인 출판의 한계가 노정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는데, 클래식 음악 감상에 대한 저자의 다년간의 몰입과 열정이 수록된 내용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7.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에피 브리스트 대산세계문학총서 83
테오도르 폰타네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산세계문학총서 083.

1. 에피와 인스테텐의 결합

1) 에피
사랑보다 조건(지위, 신분) 선택 → 연령차 20년 이상!!!
부녀 같은 사이에 무슨 사랑과 애정의 감정을 느낄 것인가?
애정의 결핍이 외도를 유발시키는 필요조건이 되었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처리에 대해서는 불만: 가혹함 → 한때의 실수

2) 인스테텐
정신적, 윤리적으로 엄격한 모범적 귀족 & 관료
에피와의 결혼은 에피의 어머니에 대한 일종의 대체재?
20년 이상 차이의 에피와 행복한 결혼생활 기대는 과욕, 잘못된 판단
조건으로 애정 결핍을 보전할 수 없음
유령의 집에 대한 모호한 태도와 7년 전의 지나간 사건에 대한 결투와 복수
→ 자신과 부인의 진정성이 아닌 사회적 계급의 틀에 얽매인 보수적 가치관 표출
→ 개인<사회(계급)
복수는 불가피했는가? (사랑하는 여인의 과거를 용서할 수 있는가의 문제)
진정한 용서가 불가능하다면, 복수와 결별 그리고 덮어둠가 외양적 평온 중 무엇이 바람직한가의 가치관 문제

2. 에피와 인스테텐의 비난 불필요성
그들은 19세기 사회적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음
당대의 여러 가정에 잠복해 있는 위험이 외면으로 표출된 것일 뿐

3. 여성주의 문학의 걸작 이유?
에피의 외도의 불가피성 해명???
에피에 대한 인스테텐/사회의 가혹한 처사 비난???
에피의 이혼 이후 여성으로서의 독자적 삶 개척???
19세기 당대의 귀족적 삶의 모순과 은폐에 대한 온유한 비판 (작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 내용 추가 
http://blog.aladin.co.kr/anaudeh/4080572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8.2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테오도르 폰타네의 소설연구
배중환 지음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영주 저 <테오도르 폰타네 연구>가 아무래도 여성인물의 분석에 치중하고 있어 전체적인 작가와 작품 경향 파악에 한계가 노정되고 있으므로 보완의 기대로 이 책을 읽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절반의 충족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책에 대해 말하자면,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기본으로 다듬은 것이라 그다지 읽기에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논문 특유의 딱딱하고 분석적인 어투는 결코 대중에게 친절하지 않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 비록 <얽힘과 설킴>과 <에피 브리스트>만을 다루고 있지만 - 폰타네의 문학관과 문학사적 의의를 알 수 있고, 두 작품을 비교적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폰타네가 어떤 점에서 탁월한 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게는 단순한 여성소설로 이해될 따름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서론에서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즉 19세기 근대 서양소설사의 주류는 사회소설인데 독일은 사회소설 대신에 괴테 이후 독일소설의 전통인 교양소설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유럽문학의 주류에서 소외되었는데 폰타네는 당대의 사회와 인간을 잘 묘사한 사회소설(P.7)을 써서 당대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독일소설의 끈을 주류와 연결시킨 큰 공로가 있는 셈이다.

폰타네는 소설을 “‘우리 자신이 속한 시대의 상’이며 또 소설의 과제를 ‘인생과 사회에 인간의 영역을 묘사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왜곡되지 않게 묘사함’”(P.9)으로 이해하였다. 이로써 폰타네는 독일에서 근대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두 편의 작품 분석은 각각 도입, 의미, 구조(구성, 화법, 라이트모티브)로 구성되며, 결론에 앞서 두 작품을 비교하고 있다. 의미 부분은 각각 순수한 사랑, 동일신분의 결혼, 만족없는 삶(이상 <얽힘과 설킴>), 부자연한 결혼, 탈선, 인습에 의한 희생, 체념과 화해(이상 <에피 브리스트>)으로 나누어 작품을 분석한다.

<얽힘과 설킴>은 번역본이 없어(저자의 각주에는 1979년에 번역본이 간행되었다고 하나 중고서점에서도 찾기가 어렵다) 읽어보지 못했으니 뭐라고 촌평할 여건도 안 되니 생략.

<에피 브리스트>도 이미 나름대로 짤막한 의견을 개진한 바 있으니 역시 생략. 다만 폰타네의 특성 중 배경의 효과에 대해서는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의 작중 배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와 전개를 전조하며, 결말을 예감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등장인물에 무의식적으로 발휘하고 있다.

한편 부록으로 또 다른 작품 <배나무 아래에서>를 분석하고 있는데, 추리소설적 기법이 사용되어 실제로 독서를 하게 되면 무척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 출판계에서 보다 많은 폰타네의 작품이 번역되기를 희망한다. 달랑 두 편은 너무하지 않은가?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9.14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테오도르 폰타네 연구
김영주 지음 / 삼영사 / 1989년 3월
평점 :
품절


폰타네의 두 작품 <마틸데 뫼링>과 <에피 브리스트>를 읽어보았다. 20편에 가까운 장편 중 단지 두 편(번역본은 이게 전부이므로)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추론한다는 것이 섣부르지 않은가 의문스러웠다. 특히 <에피 브리스트>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아울러 그가 과연 어느 정도의 문학사상 평가를 받는 작가인가도 궁금하였다.

이런저런 궁금증의 해소하기 위하여 작가론을 펼치게 되었는데, 김영주는 <에피 브리스트>의 번역자이기도 하니 잘 된 셈이다. 이 책이 1989편에 간행되었으므로 그는 20년 이상 테오도르 폰타네 연구에 헌신하고 있는 셈이다. 이 연구서는 초년 시절의 것이므로 현재의 저자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폰타네의 기본적 개념에 접근하는 것이므로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폰타네의 주요한 여성소설 네 편(<얽힘과 섥힘>, <에피 브리스트>, <예니 트라이벨 부인>, <슈테힐린>)의 주인공을 통해 사회비판적 역할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폰타네의 소설을 단순 여성소설로 간주하면 개인의 불행사로 이해하면 족하지만, 관습과 제도에 의하여 억눌린 소수자의 것으로 이해한다면 사회비판적 의의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에피 브리스트>를 제외한 세 편은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이므로 저자의 내용 소개와 분석에 따라 작품의 대강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참고가 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얽힘과 섥힘>은 구신분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여 시민계급의 여성 레네와 귀족계급의 남성 보토는 사랑하면서도 신분제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각각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배우자를 고른다. <에피 브리스트>에서는 귀족사회를 억누르는 구 사회규범의 해악을 비판한다. 자연의 대변자 에피는 사회의 대변자 인스테텐과 결혼하나 가정을 지배하는 사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일탈하여 파멸한다. <예니 트라이벨 부인>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귀족계급에 필적하게 부상한 신흥 부르조아 사회의 이중적 또는 기만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예니는 고상하고 순수한 척 행동하지만 자신의 아들이 가난한 시민계급 여성과 결혼하려 하자 그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탐욕스러운 부르조아의 실체를 드러낸다. <슈테힐린>의 멜루지네는 신질서와 구질서의 균형을 추구하며 일방의 급격한 지배가 아닌 점진적 사회 변화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노년의 폰타네의 사상과 가치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나마 <에피 브리스트>가 익숙한 작품이므로 저자의 견해와 내 자신의 판단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서 작품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폰타네의 작풍은 온유하고 체념적이다. 위의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들의 행동은 소극적이다. 그들은 사회의 모순에 반발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도전하기를 포기하고 수용한다. 그것은 인간 자체가 약한 존재라는 인식에서이다.
“폰타네 문학에서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현실 속에서 사랑을 체념하여 행복을 포기하거나, 삶을 희생당하는 비극적 운명을 겪는다.”(P.12~13)
"폰타네의 비영웅적인 주인공들이 사회와 개인의 불균등한 투쟁에서 그 싸움을 피하고 있다...“(P.54)
“폰타네는 인간의 내면이 전승되어 온 사회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에는 그 스스로 유약함을 통찰하였기 때문이다.”(P.56)

에피와 인스테텐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해서 저자 및 이전의 비평가들은 결혼을 통해서 에피에게 사회가 처음으로 출현하였음을 지적하며, 사회의 대변자 인스테텐과의 결합은 곧 파멸에의 첫걸음을 의미한다고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에피는 개인의 대변자이고 인스테텐은 사회의 대변자이므로 에피에게 구혼한 것은 에피에게 사회가 출현함을 의미한다.”(P.71)
“에피에게 있어서 인스테텐과의 결혼은 사회에 희생당하는 에피의 삶의 도정에서 처음으로 사회와 대면하게 된 사건인 것이다. 인스테텐의 출현 자체가 에피에게는 삶을 파멸로 몰고 가게 될 사회에의 첫 걸음을 의미한다...”(P.76)

한마디로 인스테텐과 에피는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이다. 계속된 분석에서는 인스테텐은 가해자, 에피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시각이 매우 농후하다. 여기서 지난세기 초부터 몰아닥친 전투적 페미니즘의 폐해를 찾게된다.

에피의 가해자는 사회 또는 계급이다. 인스테텐도 에피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에피와 인스테텐의 삶은 당대의 억압적 사회규범에 의해 파멸당하였다. 그런데 분석에서는 인스테텐 개인의 가해자로 취급한다. 인스테텐의 사회의 대변자라는 당황스러운 논조이다.

인스테텐과 결혼을 선택한 것은 에피 자신의 선택이다. 물론 부모의 명시적 권유가 있었지만 강요라고 할 수는 없다. 에피는 사랑보다도 지위와 명예를 확보한 인스테텐과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연령차나 애정은 결혼에서 부차적일 수 있다는 것이 당대의 지배적 가치관임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관구장 부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은 본인의 선택의 귀결이므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적어도 사회성에 관한 한 인스테텐을 홀로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에피와 인스테텐은 모두 사회성을 공유하였으며, 당시 관습에서 볼 때 인스테텐은 모범적이며 충실한 남편상이다. 애정이 가로놓여 있지 않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여러 평자들이 이 작품에 내재한 사회비판적 의미를 언급하고 있다. 에피로 하여금 간통의 죄를 범하게 만든 것은 억압적 사회규범이므로 에피의 탈선은 사회비판의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탈선한 에피에게 비판자의 지위를 부여한다면 탈선하지 않는 유사한 처지의 대다수 부인들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에피의 불행은 섣부른 결혼관과 당당한 자아관의 결핍이 빚어낸 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결과를 유발한 구시대적 사회규범이 에피와 인스테텐을 돌아오지 못할 길로 안내하였다는 비판이 보다 적합하다.

뷜러스도르프와 인스테텐의 대화에서 인스테텐은 개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가치의 우월성을 언급한다.
“우리는 단순히 개별적 인간이 아니죠. 우리는 전체에 속해 있어요. 우리는 항상 전체를 고려해야 해요. 우리는 철저히 전체에 의존하고 있어요...”(P.101)

집단가치의 무조건적 수용과 내면화. 이것의 무시무시한 결과가 무엇인지 독일역사, 아니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20세기 독일의 양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배경, 그 근원은 이렇게 뿌리 깊다.

즉 폰타네는 <에피 브리스트>를 통해 억압적 사회규범이 개인의 가치관에 미치는 깊숙한 영향력과, 그것이 선량한 에피와 인스테텐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과 결말을 독자에게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자연적 정의란 무엇인가를 반추하도록 하고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근대나무 2011-08-2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9.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