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 - 20세기 클래식史를 이끈 위대한 지휘자 34인
안동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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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에서 거장 지휘자들의 시대는 이미 종언을 맞이하였다. 그 시점을 19세기에 태어난 전설적인 명지휘자들의 마지막 활동시기인 1960~70년대로 추산하든 아니면 20세기 초에 태어난 거장들의 세상을 떠난 1990년대를 산정하든 결론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20세기의 인물이지 21세기를 이끄는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 안동림이 누구인가.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과 <이 한 장의 명반 오페라>로 국내 음반 가이드 방면에서는 최고 권위자이자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오죽하면 그의 저작과 추천을 딴 음반 시리즈가 발매되고 있겠는가. 그의 전작 책들을 보면 SP와 LP 시절의 음반에 대한 깊은 내공이 자연스레 배어있음을 알게 된다. 누가 뭐래도 연륜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부제가 ‘20세기 클래식史를 이끈 위대한 지휘자 34인’로 정해진 점은 당연하다.


그의 책을 통해 우리는 거장들이 포디엄을 지배하던 옛 시절의 정취를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과거에 대한 일말의 향수도 곁들여져 있다.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발터, 라이너, 셀, 뵘 등 음악애호가라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명지휘자들의 명단이 줄줄 이어진다. 그 시절 음악회에 가는 것은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었을까. 비단 푸르트벵글러의 주술뿐만이 아니다. 청중은 객석에 앉아 단상의 지휘자가 뿜어내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매혹되어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바그너 등 음악의 신들을 숭배하였다.


연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보여주는 카리스마와 독설은 활화산 같은 토스카니니의 리허설 장면을 듣게 되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지휘자는 존재하지 않으면 그러할 수도 없다. 지금은 21세기이며, 문화예술에서 클래식 음악은 변두리의 극소수 매니아들이 선호하는 장르일 따름이다. 그것은 발생지인 유럽도 큰 차이가 없다. 현대의 지휘자는 단원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협력자 내지 동반자의 태도로 악단을 이끌고 있다. 청중도 더 이상 음악회장에서 종교와 철학, 도덕을 공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변화된 환경에서 거장 지휘자들의 추억을 더듬고 그들의 위대한 유산을 반추하는 것은 안동림의 작업이다. 그가 다루는 34인의 지휘자는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가장 소장이라고 해봤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쥬세페 시노폴리이다. 음악회의 생생한 현장에서 경험을 공유할 수 없게 된 그들의 음악세계는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세월의 경과에 따라 애호가들에게도 잊혀지고 있다. 저자는 현대의 지휘자들은 대소를 불문하고 과거의 거장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음악의 표면에 함몰되지 않고 깊은 내면을 응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새로운 음악관을 실현하는 젊은 지휘자들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전통의 권위와 무게를 떨쳐 버리고 음악을 음악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음악을 순수하고 즐거워야 하지 사변과 관념의 시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에게는 자칫 유희와 가벼움으로 치부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베를린 필의 전임 아바도와 현임 래틀, 마젤과 바렌보임, 메타와 레바인 등에게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 클렘페러의 재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래틀은 의도적으로 음악에서 심각성을 배제한다. 바렌보임은 음악을 통해 문명 간 화합을 추구하며, 메타와 마젤 등은 음악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을 겨냥한다. 포디엄의 고독한 절대자의 이미지는 더 이상 없다.


안동림과 볼프강 슈라이버의 비슷하지만 상이한 저작의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20세기와 21세기 지휘자의 성격을 규정함이다. 안동림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슈라이버는 음악이란 과거에 함몰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와 미래에 충실한 음악관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양자 중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까? 아니 선택 자체가 가능하며 필요한지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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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지휘의 거장들 - 볼프강 슈라이버의
볼프강 슈라이버 지음, 홍은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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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평론가 중에 레너드 번스타인과 오자와 세이지를 무척 혐오하는 이가 있다. 혹자는 그들을 일컬어 지휘대 위의 원숭이라고 비하하기조차 한다. 그가 경애하는 지휘자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이다. 아, 그는 카라얀도 무척 싫어한다.
 
과거 안동림 교수나 이순열 등의 영향으로 나도 초기부터 카라얀을 무시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음반가게마다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노란딱지의 도배에 반감이 있었던 연유도 크다. 어쨌든 클래식 음악의 진수는 베토벤과 브람스 등 독일 고전주의이며, 이들의 음악은 푸르트벵글러 등의 깊은 정신성을 가진 지휘자의 연주를 통해 진정한 묘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음악에서 정신성을 강조하는 사조의 눈으로 보자면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로린 마젤, 오자와 세이지, 제임스 레바인 등은 하찮은 이류 지휘자들로 분류된다. 베를린 필하모니커의 수장으로서 사이먼 래틀의 능력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음악을 왜 듣는가 하는 원초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음악과 미술을 포함한 예술 장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서 출발한다. 보아서 즐겁고 들어서 즐거워야 함이 예술의 근본 덕목이다. 물론 약간의 노력을 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아서 괴롭고 들어서 괴롭다면 예술의 자격을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리라. 진지한 성찰은 철학만으로 충분하다. 음악은 철학도 형이상학도 아니다. 음악은 언어와 글자가 아니라 순간에 울려퍼지는 음을 매개로 소통을 한다.
 
모두가 베토벤이고 푸르트벵글러일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와 로시니에 환호하며, 바그너와 베르디에 갈채를 보낸다. 때로는 옷깃을 여미며 바흐의 종교곡에 집중하다가도 텔레만의 식탁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모든 지휘자에게 푸르트벵글러의 깊이와 클렘페러의 무게를 강요하지 말자. “기분좋게 만들고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무엇을 느끼게 해주는 것”(P.60)이 주빈 메타의 스타일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LA 시절의 메타만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잦아들게 된다. 다니엘 바렌보임을 자클린느 뒤 프레의 불행과 연관하여 인간적으로 비난한다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21세기의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독단적 카리스마를 부정한다. 그 점에서 지휘자의 심각한 철학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악단과 청중이 모두 순수한 음악 자체를 즐기게끔 노력하는 사이먼 래틀이 어떤 면에서는 더욱 뛰어나다.
 
볼프강 슈라이버는 지휘자의 계보를 죽 훑어나가지 않는다. 과거의 거장 지휘자의 일화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자신만의 구분으로 종과 횡으로 지휘자들의 세계를 재단하여 독자에게 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음악적 관점을 헤아리도록 한다. 그에게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못지 않게 클라우디오 아바도도 위대한 지휘자이며, 제임스 레바인도 탁월함에서 뒤지지 않는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세르쥬 첼리비다케는 말할 나위도 없다.
 
흔히 이런 유형의 저작물들이 빠지기 쉬운 거장성에 함몰되지 않고 타계하거나 활동중인 지휘자를 고루 조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크나큰 미덕이다. 당대의 지휘자들이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보존하면서 현대에 맞게 새로운 변용을 도모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이 책이 나의 클래식 음악 내지 지휘자의 편견과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극제의 역할을 준데 대하여 기쁨을 느낀다.
 
* 그래도 카를 뵘과 로브로 폰 마타치치가 소개되지 않은데 대하여 저자에게 불만을 나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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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2.28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윈터홀릭 - 백야보다 매혹적인 스칸디나비아의 겨울 윈터홀릭 1
윤창호 글.사진 / 시공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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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백야보다 매혹적인 스칸디나비아의 겨울”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1번 “겨울날의 꿈(환상)”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이고르 마르케비치 지휘인데, 녹음 탓인지 총주에서 음이 뭉치고 텁텁하여 북구의 쨍-하는 겨울 분위기는 덜하지만 곡 자체를 맛보기에는 충분하다. Winter Dreams 와 Winter Holic, 비슷하게 다가온다.
 
스칸디나비아로 총칭되는 북유럽의 여행기다. 특이한 점은 저자가 사진작가인 연유로 사진의 비중이 꽤 차지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특별히 어휘 하나, 문장 한 줄에 고심하며 해독해야 하는 유형의 책이 아니므로 사백 면에 가깝지만 실제 완독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북유럽에는 스칸디나비아 3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과 덴마크, 아이슬란드가 포함되며 여기에 저자는 러시아를 추가하였다. 하긴 단체여행 상품도 러시아를 거의 항상 포함시킨다. 북유럽의 여행 시즌은 한여름이다. 그래야 비교적 화창한 날씨로 여행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유독 겨울철, 찾는 이 별로 없는 비수기에 스칸디나비아를 찾는다. 그곳의 겨울에 중독되었기에 서제도 ‘윈터 홀릭’ 아니던가.
 
스칸디나비아는커녕,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덮인 겨울 풍경조차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저자의 심경을 헤아릴 길 없다. 여행은 사물보다도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데에 묘미가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즌을 피해서 굳이 인적 뜸한 곳을 골라 찾는 저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삼복더위에 바가지요금과 체온으로 미지근한 바닷물, 오가는 혼잡한 도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이 맛에 바캉스를 간다고 한다. 반면 여행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 속에서 참다운 자기를 재발견하는 시간으로 본다면 여행의 진미는 인적 끊어진 때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라면 단연 겨울이리라.
 
인터넷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찾아볼 수 있게 된 요즘, 해외 여행기는 과거와는 달리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싯적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읽고 열병을 앓은 때가 있었다. 여행기가 개인의 단순한 감상기에 그치지 않고 또한 범람하는 여행 정보서와도 차별화를 이루려면 정보와 감상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공유된 감흥이라고 하겠다. 한번 픽 웃고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며 독자로 하여금 “나도 한번 같은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잠재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말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알레그로 마에스토소로 매우 웅장하고 드라마틱하게 피날레를 마친다. 내게 있어 스칸디나비아는 어떤 피날레로 자리 잡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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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12.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고기잡이 여행
정기태 지음, 위직량 사진 / 바보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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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향이 경기도 용인인 내게 강과 바다 같은 물가는 친숙하지 않다. 기껏해야 무릎이나 허리 정도까지 깊이의 개울에서 멱을 하거나 다슬기를 주웠던 기억뿐이다. 음식도 산과 들에서 나는 먹을거리가 주를 이루었으며 어류는 고등어, 갈치, 임연수 정도. 어머니도 김치 담그실 때 새우젓 외에는 다른 젓갈류는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다. 회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인데 여전히 광어와 우럭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 진미를 알겠는가. 젓갈은 기껏해야 오징어젓을 간혹 젓가락으로 깔짝거릴 뿐. 명란젓을 좋아하는 아내는 이 점을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내게 이 책에서 글쓴이가 느끼는 절절한 감수성을 기대하기란 난망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 고기잡이의 원형을 기록으로 남기”고, “갯가 풍속과 다양한 어법을 알려주자는 의도”로 이 여행 시리즈를 기획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각종 수산용어와 어부들의 은어가 난무하니 나 같은 문외한은 글쓴이가 알려주는 고기잡이 방법에 대해서는 들어도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그저 거문도에는 갈치가 특산물이며, 담양호에도 빙어가 나는구나 등과 같이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는 어류와 어법의 다종다양함에 감탄하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이 책의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는 우울함이다. 고기잡이 중노동에 시달리는 어부들의 괴로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배를 탄다는 것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들이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초가삼간 지어놓고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이 농촌과 산촌의 고달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듯이. 남획으로 사라져 가는 수산자원, 그나마 간척과 개발로 고기들의 터전마저 줄고 있는 가운데 각종 수입산의 대거 등장으로 고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년 적자와 가난에 허덕이는 어민들의 처지는 환경과 장소를 달리하지만 도시와 육지에 사는 모든 서민들의 애환과 다름없다.
 
저자명에 글쓴이와 함께 사진작가의 이름도 같이 기재됨은 당연하다. 사진 한 장이 무수한 글자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경우를 어디 한두 번 겪었는가. 오늘날 사진은 진실은커녕 사실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도구로 전락하였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사진은 인간과 끈끈하게 밀착된 말없는 웅변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속의 어선과 어민들은 최첨단도 아니고 최신 유행의 말쑥한 멋쟁이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에는 분홍빛 구름 위가 아닌 황토빛 대지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사람의 내음이 배어있다.
 
마지막 안면도 대하 편을 읽으면서 불현듯 어리굴젓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비록 당장 입맛에 짝짝 붙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법으로라도 글쓴이의 심정에 동감하고 미약하나마 보람을 느끼게 하고 싶다면...웃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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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3.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 - EBS 교육방송
김영훈 지음 / 베가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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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육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평소 아이 돌보기에 열성인 체질은 아니다. 문득 너무 아이에 소홀한 게 아닐까 자성의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다. “언저리를 맴돌기만 하던 아빠, 이제 태교와 육아에 몰입하라!”는 뒷표지의 카피가 유난히 절실하게 다가온다.
 
딱히 명확한 육아 철학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저 애가 무탈하고 모나지 않게 자라주는 데 만족하고 싶다. 예체능 및 취미는 재능이 두드러지거나 본인이 흥미를 느끼기 전에는 강요하지 않으련다. 공부에 대해서라면 부모는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환경)를 만들어 주고 길잡이 역할을 하면 나머지는 아이 본인에게 맡기고 싶다. 물론 내 아이가 다방면에서 뛰어나다면 무척이나 기쁘겠지만 제 앞가림만이라도 해주면 만족하겠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육아에서 아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몇 가지 팁을 제공하는 정도로 예상했는데 저자는 육아에서 오히려 아빠를 중심에 놓는 듯 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소홀한 아빠의 적극적 기여가 요구되는 것은 시대의 소명이다. 하지만 엄마에 의한 육아를 아빠에 의한 육아로 대치하고 다소간의 아빠 효과를 첨가하는 방식은 현실 적용 면에서 실효성이 의문시된다. 많은 아빠가 육아를 어려워하는 것은 아기를 접할 기회가 부족한데서 연유하는데 이런 근본적 여건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육아에서 아빠의 역할과 중요성 및 기대감이 증대하는 현실을 감안하되, 육아의 중심은 여전히 엄마임을 인정하고 건강한 육아를 위한 아빠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서술했다면 효과는 더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한편 아빠 육아를 다루면서 동시에 영재 교육 또는 뇌기반 교육도 병행하는 저자의 욕심은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달릴 것을 기대하는 난감함이 존재한다. 두 가지 의도를 한 권의 책에 어설프게 결합하기 보다는 하나라도 오롯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게다가 뇌기반 교육의 강조는 가뜩이나 어려운 뇌 관련 의학용어가 반복적으로 난무하게 하여 흥미를 반감시키기조차 한다.
 
물론 이 책을 흥미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당한 육아실용서다. ‘한눈에 보는 육아 체크리스트’가 책 뒤의 부록으로 달려 있으며, 책 구성도 육아 시기별로 태아기, 영아기, 걸음마 단계, 첫 번째 사춘기, 취학 전으로 구분하여 즉각적으로 내용을 참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견해를 품은 이, 저자의 육아관에 동조하는 이라면 제법 유용하게 쓸 만한 책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첫 번째 사춘기에 한창인 맏아이가 아빠를 너무 만만한 친구로 여기고 있어 당최 아빠의 위엄과 위신이 서지 않는다. 어찌 대처해야 할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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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31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2.2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