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의 아빠
알퐁스 도데 외 지음, 최복현 옮김 / 글읽는세상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작품을 찾아 읽는 여정에 마주친 책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프랑스 단편소설 명작모음집이다. 전문적인 문학 번역서라기보다는 눈높이를 약간 낮추고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겉표지에 나온 대로 “가장 소중한 당신께 읽어드리고 싶습니다”라는 용도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전체 4부로 하여 작품들을 지혜, 사랑, 행복, 희망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소 인위적이지만 대체적 분위기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페데리고>는 한마디로 황당하지만 재밌는 작품이다. 노름에 빠진 귀족이 예수님을 대접하여 세 가지 소원을 받은 후, 이를 활용하여 본인은 물론 지옥에 떨어진 순진한 노름 희생자의 영혼을 구제하여 천국으로 이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압권은 지옥을 찾아가서 지옥의 왕 프루통과 벌이는 노름 대결 장면과, 천국 입구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하여 결국 천국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또한 죽음의 신을 골탕 먹여서 두 번이나 생을 연장하는 부분도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주목할 곳은 페데리고가 노름에서 무조건 승리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깨닫게 된 사실, 즉 자신이 파멸시킨 젊은 노름꾼들이야말로 “유일하게 정직한 노름꾼”(P.19)이었다는 점. 이것이 페데리고의 영혼을 근본에서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르셀 에메가 어떤 작가인지 네이버 검색을 해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척 흥미로운 작가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다니! 이 책에서는 <착한 개>와 <금언>을 수록하고 있다.

소경 주인을 위해 소경을 바꾼 개를 배신한 나쁜 주인, 고양이가 개를, 생쥐가 고양이를 대신하여 소경이 되는데, 게으른 나쁜 주인은 거지 몰골로 개에게 나타나지만, 결국 생쥐와 소경을 대신하다. 생쥐가 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는 앞 못 보는 나쁜 주인에게 달려간다. 착한 개! 정말로.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예전과 현대가 다르다. 과거에는 부자간에 대를 이어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신분제 사회라는 외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탓이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숙련된 솜씨와 풍부한 경험으로 인한 노하우는 어린 아들에게는 존경스럽고 장차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 하지만 현대는 다르다. 재벌가의 자식이 아닌 이상, 아버지의 직업을 승계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시골은 도시로, 도시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기를 꿈꾼다. 부자가 모두 함께. 이런 판국에 어설픈 아버지의 권위는 오히려 자식의 조소를 유발할 따름이다. 루시앙은 아버지 쟈코탱을 원망하지만, 문득 너무나 약하고 위태로운 아버지의 지위를 깨닫는다. 슬픈 아버지의 초상화여!

알퐁스 도데의 작품도 두 편이나 실려 있다.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과 <아를르의 여인>. 이미 도데 작품집을 읽었으니 새삼스럽지 않으나, 코르니유 영감이 웅변하는 옛것과 새것의 갈등은 요즘 되새겨볼 만하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장인정신이니, 친환경, 수제(手製) 등을 내세우면 더욱 각광받는 현실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도 결국은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못 이긴다.

쟝에게 사랑의 죽음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반추한다. 누구에게 사랑은 일부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전부다. 대개는 여성들이 전부 아니면 전무를 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로방스의 쟝은 단순하며 순진하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런 경우가 있다면 그야말로 순애보로 대서특필될 만하다. 오히려 사랑을 방해한다고 일가족을 죽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련만.

앙드레 모르아의 <광산귀신>은 은광을 둘러싼 부패세력과 여기에 대항한 광산기사의 비참한 말로를 잘 보여준다. 광산귀신이 허위이며 거대한 빼돌리기의 위장막임을 알면서도 책임자들은 외면한다. 올곧은 사바티니가 본사에 이를 알렸지만, 그 후 사바티니는 광산업계에서 매장당하였다, 회사의 재산을 지키는 용감한 처사에 공로상이라도 주어야 하건만. 더 큰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부조리와 악의 자행을 감수해야 하는 게 타당한가. 입맛이 씁쓸하다. 광산귀신이 저 먼 볼리비아의 산 속이 아니라 우리 사회 각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다.

단편소설의 거장 모파상의 작품은 의외로 그다지 읽은 기억이 없다. 여기에 수록된 세 편 <보석>, <시몽의 아빠>, <포로>와 이전에 읽었던 <밤>을 상기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보다 풍부한 그의 문학세계를 탐구할 생각이다. 죽은 아내의 지혜로운 재테크로 졸지에 갑부가 된 사연은 재미와 여운을 동시에 안겨준다. 아내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경이로운 노력을 기울였던가, 졸부 남편은 그 후 진정 행복에 넘친 삶을 누렸을까? 재혼한 아내가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우 괴롭혔다고 씌어있으니 아닌 것 같다. 소시민 남편과 갑부 남편 중에서 무엇이 진정한 행복한 삶인가 생각해 본다. 물론 현대인은 인생 역전의 꿈을 버릴 수 없겠지만.

편모슬하의 자식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냉대는 그나마 차츰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그것이 매우 심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동양이나 서양이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사별이 아닌 경우에는 결사적으로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버티지 않았던가? 일본의 황혼이혼은 과거 유산의 슬픈 잔설(殘雪)이다. 시몽과 그의 어머니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다. 단지 하나, 타인과 사회의 차디찬 시선을 막아줄 아빠와 남편의 존재. 다행히 시몽은 좋은 아빠를 만난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항상 그러할지는 알 수가 없다.

<포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적 갈등을 배경으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로운 삼림간수의 딸이자 아내인 베르틴느의 행위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은 독일 병사들을 속임수를 써서 포로로 잡은 그녀. 하룻밤 머물고 그들은 숲을 떠날 것이다. 그녀가 독일군을 머물게 했다고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선량한 사람을 기만하였다. 단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현대에서 전쟁은 군대끼리만 하는 것으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살상은 대내외적으로 지탄받는다. 베르틴느의 가슴 속에 독일군에 대한 조용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고 문득 몸서리쳐진다.

샤를 루이 필립은 서민의 보다 일상적인 삶의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먼저 <노인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을 뒤따른 노인의 사연이다. 일상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된 일상을 생활할 수 없다. 먹어도 허전하며, 일 하다가도 멍하니 있곤 한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마냥. 부부가 동고동락하며 백년해로하면 서로의 몸과 마음이 반 정도 겹쳐지는 게 아닐까. 한 사람이 떠나면 남은 사람은 반토막 된 심신으로 여생을 꾸려야 한다.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결혼과 이혼, 재혼이 밥 먹듯 손쉬운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동생>은 출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룻밤 이웃집에 맡겨진 아이들의 웅숭깊은 생각을 잘 보여준다. 작년에도 동일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 후 막내가 생겼다. 그럼 이번에도? 자잘한 일상의 모습에서 평범하지만 소박한 가정의 모습, 그것이 참으로 정겹고 아름답다.

<순박한 사람들>은 중의적이다. 아내가 떠나간 슬픔을 호소하기 위해 방문한 이웃집 남자의 사연을 듣는 여성 화장. 그리고 문득 깨닫는 현실. 떠난 사람은 이웃집 여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남자도 함께라는 것을. 인생에는 행복보다 많은 불행과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그속에 찰나의 행복은 아침이슬처럼 영롱하다. 쟌과 이웃집 남자는 슬픔에 잠긴 채 각자의 인생 여정을 힘겹게 걸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행복과 대면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순박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야심에 찬 시골청년의 상경. 그는 힘겹게 분투하면서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이. 그의 성공가도에 지난 날의 인연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과감한 뿌리침. 어디서 많이 보던 스토리라인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같은 순수문학은 물론 무수한 TV 통속극에 등장한 식상한 소재. 하지만 언제나 공분을 일으키기도 한다. 프랑수와 코페의 <연애편지>도 마찬가지다. 시적 재능이 떨어지는 시인이 자신에게 사랑을 바친 여성의 생전 편지를 출간하여 화려한 명망을 누린다는 가슴아픔과 분노의 동시 유발. 일반적으로 이러한 유는 결말이 대체로 두 가지다. 자신의 죄악에 자책을 느껴 자멸하는 방향과 아니면 여인의 처절한 복수극으로 이어지는 방향. 코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여인은 죽고, 마리우스 카반느는 여전히 당당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일상을 누린다.

프랑시스 잠의 <삶의 병>과 <인생여정>. 주인공은 작가처럼 시인이다. 자신의 분신인 듯. 마음을 좀먹는 불안에 시달린 시인은 시골로 떠난다. 거기서 순박한 시골여인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그의 불안 증세는 씻은 듯 사라진다. 잠시 도시로 돌아간 시인의 귀에 들린 자신의 몰락에 대한 소문, 시인은 자신의 안녕을 기원하는 어머니에게 시골로 가자고 권한다. 창백하고 까칠한 도시인, 그들은 외관상 세련되고 우아한 생활을 누리지만, 내면으로는 우울과 불안과 고독에 시달린다. 아이들의 아토피도 시골에 가면 대개 사라지듯이, 시골은 도시의 병폐를 치료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시골여인은 건강한 삶, 건전한 생활관을 가지고 시인을 건강하게 한다. 시인을 몰락한 게 아니라 삶의 질을 크게 업그레이드하였음을 도시의 속물들을 알지 못하리라, 영원히.

<인생여정> 역시 시인의 잊고 지낸 진정한 삶을 상기시킨다. 수호천사의 이끌림에 따라 그는 시골의 냇물과 숲, 개울 옆 무덤 가를 산책하며, 물총새의 하늘빛, 산비둘기의 솜털, 나뭇잎들의 속삭임, 첫사랑의 미루나무 여인 등을 회상한다. “가시덤불과 쐐기풀, 장구채풀이 우거진 조용하고 조그만 무덤 가”가 시인의 길이고 잠들 곳이며, 그의 산책 여정은 바로 그의 인생여정이다. 시인은 곧 우리들 자신이다.

J.A.위스타슈의 <산책 나간 두 개의 종>은 파리의 한 종탑 종들의 연대기다. 옛적에 평온과 안정을 가져다준 그윽한 종소리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기계화된 모터로 작동하는 무감각한 소리로 변모하고 말았다. 성목요일 미사 후 교황의 축복을 받으러 여행을 떠난 종은 성토요일 미사 때맞추어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앙리에트 루이즈와 마리라는 두 종은 잠시 그들의 노정을 벗어나 자유로이 유럽을 종횡한다. 거기서 그들이 보는 것은 비옥한 들판과 푸른 초원, 은빛 바다, 종탑에 자유를 억압당한 종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자연과 인간들의 여유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도 생의 본질은 여전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구세주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었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슬프지만 그는 꿈과 환상의 세계를 버리고 사회의 엄혹한 현실에 눈뜨게 된다. 아이에게는 일종의 통과의례이지만 어른 입장에서는 대견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상반된 감정을 품게 된다. 프랑수와 모리악은 <곱슬머리 금발>에서 아이의 실망감과 배반을 좀 더 극단으로 몰고 간다. 쟝 드 브레는 어머니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실제로 산타의 존재를 확신하였다. 그 확신이 깨지는 순간 확신의 정도만큼 배신감은 강해지는 법, 배신은 곧 반항으로 이어지고 그의 삶의 불행한 결과는 매우 극단적이다. 작가의 집요한 상상력은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동생의 말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다. 화자, 프론트낙은 위태롭지만 슬기롭게 고비를 넘어선 통상의 우리들의 어린 모습이다. 넘을 때는 몰랐지만 뒤돌아보니 가파르기 그지없는 능선이었음에 새삼 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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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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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 문학의 이해와 감상 78
고일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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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와 같이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몇 편 되지 않아 번역본만으로는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조망하기 힘든 경우 삶과 문학세계를 소개한 책이 매우 유용하다.

레르몬토프는 20대 후반에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충분한 성숙단계에 도달한 바로 그 순간에 때 이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푸슈킨과 후대를 잊는 군소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과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을 읽고 나서, 그의 서정시집을 일독한 후 이 책을 펼쳐든다.

무엇보다도 푸슈킨과 바이런의 세례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들의 영향을 극복하고 독자성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확실히 <시인의 죽음> 이전 그의 단시들은 서경적, 서정적 낭만성으로 충만하였다. 이따금 보이는 환멸과 나태 등 면도 아직은 관념에 머물고 있다.

다수의 장시 내지 서사시를 통해 레르몬토프의 본령이 단시에 머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희곡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였음도 알게 된다. 레르몬토프는 일부 무지한 자들이 생각하듯이 우연히 끄적거린 한 편의 시와 소설로 명성을 얻은 운 좋은 유한귀족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불어와 영어를 철저히 공부하였고, 아랍어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이미 십대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조숙한 문인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비로소 <우리 시대의 영웅>의 페초린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리곱스카야 공작부인>의 페초린, 그리고 희곡 <가면무도회>의 아르베닌과 장시 <악마>의 인간적인 면을 지니는 악마. 이들은 모두 레르몬토프 자신의 분신이다. 당대 전제 군주정의 압정에서 자유의 공기를 압살당하고 운신이 제약받는 선구적 지식인이 겪는 시대와 사회와의 불화. “사회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또한 사회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는 극복될 수 없다.”(P.83)

그 속에서 주인공은 사회와 겉돌고 사랑에 무정하며, 자신에 체념한다. 이는 내면에 대한 자기비판과 외부에 대한 냉소 및 공격성으로 발현된다. 가슴속 한켠에 따스한 불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차가운 이성으로 불빛의 발산을 가로막는다.

“타인에게 행복은 안겨 주는 게 아니라 불행을 안겨 주는 운명을 타고난...이 점에서 이들은 철저히 비극적인 주인공이요, 악마적인 형상이다.” (P.92)

이러한 부조화와 억제된 갈등은 오래가지 못한다. 니트로글리세린이 조그만 충격이나 열에도 맹렬한 연소 작용으로 이어져 폭발하듯이. 현실의 레르몬토프는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존경하던 대선배의 뒤를 따라서. 작중의 페초린은 결투에서 상대에게 죽음을 안겨주고 페르시아로 총총히 떠난다. 그는 공녀 메리에게 사랑의 쓴맛을, 벨라에게는 사랑의 죽음을, 그리고 막심 막시므이치에게는 우정의 환멸을 안긴 채 조국을 떠난다. 아르베닌은 아내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며, 악마는 사랑을 얻자마자 자신의 본성으로 사랑을 빼앗기고 만다.

레르몬토프의 요절은 향후 문학세계를 무한한 발전을 예상해 보면 참으로 아쉽지만 그의 작품 인물들의 행보를 통해서 이미 운명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결투로 죽음을 맞이하기 5개월 전에 발표한 시 <유언>이 이를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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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26 마이페이퍼로 쓴 글을 이동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미하일 레르몬또프 지음, 임채희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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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의 시작품집이 이미 10여년 전에 번역 출간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우연히 레르몬토프가 아니라 레르몬또프로 검색한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많은 외국어도 그렇지만 특히 러시아어는 우리말 표기가 혼재되어 있어 혼란스럽다.

여기에 실린 67편의 시는 그의 많은 시작품 중에서 서정시만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서사적 장시들은 제외되어 그의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조감해 보기에는 불완전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기대치 않은 번역본의 존재는 의외의 기쁨을 안겨준다.

대체적으로 그의 작품경향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개인적 소회를 토로한 시들, 특정인(여인)을 수신자로 하는 시들, 역사적 소재를 다룬 시들, 현실비판적 사회시 등등. 그 중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개성의 발현과 역량 발휘를 억압하는 체제 속의 소외된 자아를 그린 시편들이다.

어차피 언어가 같지 않으므로 원시가 지니는 형식적, 예술적 묘미를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므로 하릴없이 인상에 남은 몇몇 시의 내용만 잠시 되새겨 보련다.

<터키 인의 하소연> : “노예 제도와 쇠사슬 때문에 사람들이 신음”하는 “내 조국”을 터키가 아니라 러시아로 대치해 보자.

<독백> : 십대의 어린 시절에도 이미 그의 시의 특색이 잘 드러나 있다. “재능과 자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어디에다 쓸 수 있을까요?/우리는 언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우리의 삶은 음산합니다./.../조국에서는 숨이 막힐 것 같고,/...”

<파도와 사람들> : “공허한 소음” “보잘것없는 무리” 등의 어휘와 “그들의 영혼은 파도보다 더 차갑다!”는 표현의 분위기가 어둡고 스산하다.

<보로지노 들판>, <보로지노> :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후자에서 “용사들은-너희들이 아니야!” 문구를 서두와 말미에 반복 사용함으로써 과거 러시아 인민들의 힘과 역량을 상기하여 현재의 억압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나는 살고 싶다> : 작가는 억눌린 평온이 아니라 치열한 삶, 폭풍우와 고통으로 점철되더라도 진정으로 살아있는 삶을 누리고 싶음을 토로한다.

<인어> : 희생된 용사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지식인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차갑고 말이 없어요./그는 잠들어 있어요...”

<돛> : 앞의 <나는 살고 싶다>와 같은 심경이다. “반항아인 그는 폭풍우를 바라고 있다./마치 폭풍우 속에 평온이라도 있는 듯이!”

<시인의 죽음> : 뿌쉬낀[푸시킨]의 죽음에 자극받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로 작가의 문명을 떨친 계기가 되었다. 시사성을 제외한다면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다만 존경하던 대선배의 죽음으로 충격받아 권력층을 “쓰레기”와 “사형집행인”과 같이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비난을 퍼부은 바람에 작가는 생애 내내 고초를 겪는다. 하긴 권력층 입장에서도 대놓고 자신들을 욕하는 사람을 어찌 가만두겠는가.

<누렇게 익은 곡물밭이 물결치고> : 레르몬토프로서는 보기 드물게 밝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작품이다. 작가는 조숙한 만큼 초기작에서도 어둡고 비판성이 내재한 시를 써왔다. 여기서는 자연으로부터의 위안과 행복을 상찬한다.

<명상> : 자기비판과 반성이 강하게 드리운다. “나는 슬픈 듯이 우리 세대를 바라본다!/.../위험 앞에서는 수치스럽게 소심하고/권력 앞에서는 경멸스런 노예들이다./.../우리는 소리도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리라,/...”

<시인> : 다마스크 강철 단검이 쓸모가 없어져 장식용으로 전락한 것처럼 시인도 사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자괴감. “비웃음당한 예언자여, 그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는지,/.../그 황금 칼집에서 다시는 뽑지 않을 것인지?...”

<얼마나 자주 나는> : 시인은 현재의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비상을 꿈꾼다. “나는 영혼 속에서 지난 옛날의 꿈과/망쳐버린 세월의 신성한 소리를 어른다./.../나는 자유로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간다./..."

<울적하고 슬프다> : 글자그대로 울적하고 슬픈 시상. 희망, 사랑, 정열의 덧없음이여...

<편집인, 독자 그리고 작가> : 편집인과 독자, 작가가 등장하여 진정한 작가상과 작품관을 논하는 독특한 시편이다. “도대체 언제 메마른 러시아에서/거짓된 허식과 결별하고 나서/사상은 평범한 언어와/정열의 고상한 목소리를 얻게 될까?”

<먹구름> : 먹구름에 작가의 심경을 이입하여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영원히 차고 영원히 자유로운 너는/조국도 없고, 너에겐 추방도 없다.”

<유언> : 작가의 죽기 1년 전, 시인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는 듯, 유언을 남기고 있다. 유언과 실제 작가의 죽음이 묘하게 중첩되어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발레리끄> : 14면에 걸친 이 책에 수록된 가장 긴 작품이다. 발레리끄 강에서의 전투를 담고 있다. 레르몬토프는 수신자를 염두에 둔 서신 풍의 시작을 여럿 남기고 있다.

<안녕, 잘 있거라> : <유언>과 같은 사세구(辭世句)다. “안녕, 잘 있거라, 씻기지 않는 러시아여.”

<절벽> : 여전히 담담한 씁쓸함을 자아낸다.

<따마라[타마라]> : 장시 <악마>에도 동일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루지야 설화를 배경으로 하는데, 레르몬토프는 카프카즈에 대해서 남다른 애착을 남기고 있다.

<나뭇잎> : 나뭇잎과 작가 자신은 동일한 신세다. “참나무 잎은 태어난 나뭇가지에서 떨어져/잔혹한 폭풍우에 내쫓긴 채 초원으로 굴러갔다./그 잎은 추위와 무더위, 슬픔 때문에 마르고 시들었으며/마침내 흑해에까지 굴러갔다.”

<나는 홀로 한길로 나간다> : 3장에서 작가의 체념적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시인은 이미 삶에 지쳐 있다. “이미 나는 삶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지나간 그 무엇도 나는 애석해 하지 않는데./내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나는 나를 잊고 잠들었으면 좋겠다!”

<바다의 공주> : 바다의 공주의 순진한 사랑의 기대는 잔인하게 배신당한다. 시인의 순진함도 당대에 배신당하였다.

<예언자> : 시인을 무엇보다도 괴롭히는 것은 무지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비난이다. 그들은 예언자, 즉 시인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며 헐벗고 가련하다고 경멸한다.

레르몬토프는 프랑스대혁명이 몰고 온 자유의 바람이 반동체제의 강화로 굳게 억압되던 숨 막힐 듯한 시대의 불운아였다. 그는 당대의 조국에 좌절하였으나 결코 조국의 자연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시 <조국>을 보자.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기이한 사랑이다!
나의 이성도 그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피로 산 영광도
당당한 확신으로 가득 찬 평온도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해오는 귀중한 전설도
내 속의 유쾌한 몽상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한다 - 나 자신 그 이유를 모르지만 -
조국의 초원의 차가운 침묵,
그 끝없는 숲의 흔들림,
바다와 같은 그 강들의 범람을 사랑한다.
나는 짐마차를 타고 시골길을 질주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고 밤의 그림자를 느린 시선으로 꿰뚫어 보면서,
묵어갈 곳을 찾아 사방에서
슬픈 마을들의 가물거리는 불빛을 마주치는 것을 사랑한다.
나는 불탄 그루터기의 가는 연기,
초원에서 밤을 지새는 짐마차 행렬
그리고 누런 곡물밭 한가운데 언덕 위
흰빛의 자작나무 한 쌍을 사랑한다.
남모른 기쁨을 가지고
나는 꽉 찬 곡식 창고와
짚으로 덮힌 오두막집
그리고 조각한 덧창문을 바라본다.
명절에, 이슬 맺힌 어느 저녁,
술취한 농부들의 이야기 소리에 맞추어
발을 구르고 휘파람 불며 춤추는 것을
한밤중까지 바라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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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8-24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0.12월말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루씨야 2014-09-19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나무님,, 혹 이 시집 가지고 계신가요? 품절센타 통해서도 구할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너무 읽어보고 싶어서요.

성근대나무 2014-09-2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씨야님, 미안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라서...

루씨야 2014-09-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나무님,, 어느 도서관인지?? 좀 알려주세요..네??

성근대나무 2014-09-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도서관에서 빌렸기 때문에 어려우실꺼고요. 서울시 통합도서관 사이트(http://lib.sen.go.kr)에서 책제목으로 자료검색하면 5군데가 나오니까 이용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루씨야 2014-09-2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대나무님!!
 
과수원지기의 개 지만지 희곡선집
로페 데 베가 지음, 윤용욱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의 대가이자 국민연극의 창시자인 로페 데 베가의 국내 두 번째 번역본 출간이다. 외국문학의 다변화 측면에서 경하할 일이다.

일단 당대의 극작품들이 그러하듯 로페의 이 작품도 운문 희곡 또는 시극 형태를 갖추고 있어 번역에는 언어적 제약 외에 장르적 한계라는 이중적 어려움이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운문의 묘미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 작품의 번역본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 메시지 및 구성 등을 조금이나마 접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데 만족할 뿐이다.

이 극은 남녀 간의 사랑의 갈등과 결합을 다루고 있다. 사랑과 조건이 일치한다면 사랑의 결실에 방해 요소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조건이 불일치한다면? 특히 여성에 비해 남성의 조건이 월등히 뒤처진다면 그 사랑을 성사될 수 있을까? 역사적 경험이나 과학적 지식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개인적 자질이 우수한 여성(특히 외모)이 결혼을 통해 상위 계층에 편입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반면 우수한 남성이 상위 계층의 여성과 연을 맺는 것은 가족과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로페 데 베가는 바로 이런 경우를 그리고 있다. 젊은 여백작과 하인 신분인 그녀의 남자 비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여백작이며, 그녀에게 구혼하는 귀족들이 끊이지 않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비서에게 마음을 애태운다.

비서 테오도로는 어떠한가? 그는 젊고 패기 있으며 자신만만하지만, 출세를 위해서 자신에게 헌신하는 여인을 거침없이 버리는 비정한 남성. 훗날 스탕달과 드라이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유형의 선배 격에 해당한다. 테오도로의 여주인에 대한 감정은 당초 상하관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디아나의 눈과 말에서 감정을 알아채고는 일순간 삶의 목표가 달라졌다. 밀회를 위하여 심야에 방에 뛰어들던 그가 이제는 마르셀라를 외면한다. 그녀의 편지를 찢고는 스스로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천명한다.

“마르셀라는 참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P.63)
““나의 남편, 테오도로에게.” 뭐? 남편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나!” (P.77)
“진지하게든 장난으로든, 이제 내 이름을 당신 입에 올리지 말아요.” (P.110)

디아나 백작은 번민한다. 그녀의 내심에서 감정과 명예가 맹렬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심은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용납하지 않지만, 내면의 열정적 감정은 사랑을 최우선시 한다. 그래서 테오도로에 대한 그녀의 언행은 극과 극을 달리며, 냉탕과 온탕을 넘나든다. 일면 이해가 간다. 현대에도 쉽지 않은 일인데, 당대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귀족과 하인, 더구나 남성이 신분이 떨어지는 사례는 통상적으로 상상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가 나와 같은 신분이었다면 그의 고상함과 우아함에 내 마음은 떨렸을 거야. 사랑은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나는 나의 명예가 더 소중해. 나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에 대해 존중해 주길 원해.” (P.35)

표제 ‘과수원지기의 개’는 테오도로에 대한 디아나의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과수원지기의 개는 언제나 먹을 것이 넘쳐나 자신이 먹기는 싫지만, 누가 와서 가져가려면 사납게 짖어댄다. 디아나는 테오도로가 마르셀라와 사랑을 속삭이는 걸 견딜 수 없다. 맹렬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순간적 감정의 폭발과 차가운 이성의 자제. 곁에서 지켜보는 이에겐 영락없는 과수원지기의 개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시종 트리스탄의 기지로 신분을 위장한 테오도로. 더 이상 디아나가 명예심으로 고뇌할 필요가 없다. 테오도로와 결혼을 선언하는 디아나. 양심에 걸린 테오오도로가 진실을 토로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격. 그녀에게 이제 명예심은 불 꺼진 재에 불과하다.

“당신은 참으로 현명한 동시에 어리석군요. 당신이 저에게 당신의 숭고함을 보여 준 것은 현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저와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저는 당신의 천한 사회적 신분 속에서 제가 좋아하는 색깔을 찾았어요. 기쁨은 신분적 고귀함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원하는 영혼의 결합에 있는 거랍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할 거랍니다.” (P.171)

작가는 사랑의 소중함을 강조할뿐더러 곁들여 세인들의 신분 지향적 태도변화를 꼬집고 있다. 테오도로가 하인이 아니라 백작의 자제라고 드러나자 모두들 앞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기에 급급하다. 일순간의 태도 급변은 이전의 상황과 대비되어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신분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하기사 이것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TV 드라마마다 넘쳐나는 소위 ‘출생의 비밀’을 보라.

모두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불쌍한 마르셀라. 그녀는 잘못은 테오도로를 사랑한 것 외에 없다. 그녀의 사랑은 배신으로 보답 받고 그녀는 강제로 파비오와 결혼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당대 사회에서 하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음을 알게 된다.

“당신이 나를 그와 결혼시키는 거예요. 나에 대한 당신의 경멸이 나를 이렇게 행동하도록 부추겼어요.” (P.156)

남녀 주인공의 진실한 결합이라는 해피엔딩에 열광의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지만, 마르셀라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디아나와 테오도로에게 환호하기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의 귀중함만 알지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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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지음, 김원중.최문희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3세기 경에 롱고스(Longos)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랑 이야기다. 전원을 무대로 한 산문 구성의 목가적 사랑 이야기의 고전으로서 후대 많은 작품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골에 버려진 아기, 아기의 신표, 빼어난 외모, 순진하고 자연 순응적인 삶, 주인공의 고난과 사랑의 성취, 그리고 밝혀진 출생의 비밀, 행복한 결말 등. 과거나 현재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고전적 사랑담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 있다.

무대는 그리스 레스보스 섬.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여류시인 사포로 유명해진 곳이며, 레즈비언의 어원이 되기도 한 곳이다. 섬 주민들은 제우스 신을 비롯한 디오니소스, 판과 님프들을 공경하는 고대문화의 유습을 독실하게 지니고 있다. 아직 기독교의 세례가 미치지 않아 볼 수 있는 이러한 이교도적 문화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진부함을 떨쳐내 작품에 소박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겨 색다른 재미를 준다.

다프니스는 염소를 치며, 클로에는 양을 돌본다. 그들은 한 곳에 양과 염소를 풀어놓고 나무 아래에 다정하게 앉아 다프니스의 팬파이프를 반주삼아 클로에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푸르르고 상쾌한 하늘, 새들은 지저귀고 샘물이 졸졸졸 흘러가는데 미풍은 귓가를 간지럽힌다. 상상만 하더라도 절로 가슴 속이 흐뭇하고 시원해지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천진무구 자체이다. 자연의 본능에 따라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며 옷을 벗고 나란히 누워서 행복함을 즐기나 아직 이성 간의 육체적 성 관계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뭔가 답답하고 미진함을 느끼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를 가르쳐주는 이는 없다. 이웃의 유부녀인 리카이니온의 사랑 수업으로 성교의 즐거움을 알게 된 다프니스, 하지만 그는 첫 성교가 클로에를 아프게 할까봐 그녀와 행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인위적 도덕률과 가식적 경건함의 외피를 두르지 않는다. 아직 문명의 위선이 들어오기 전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거리낌 없이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잃어버린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다.

해적의 노략질과, 이웃 마을 메티나의 침공 등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폭력과 전쟁의 그늘을 당대에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간난신고는 주인공들의 행복한 결실에 필수적 통과의례이다.

롱고스의 글은 자체로서도 고전적 격조의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만,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화가 마르크 샤갈의 빼어난 그림의 역할이다. 20세기의 뛰어난 화가인 샤갈은 1961년에 롱고스의 작품에 삽입할 칼라 판화 작품을 완성하였다. 총 41편의 그림은 글을 읽지 않고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느낌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하지만 역시 글과 그림의 결합이 목가적 글에 환상적 분위기를 더해주어 글과 그림의 행복한 만남의 미덕을 가시적으로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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