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 모범소설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외 옮김 / 오늘의책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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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로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중단편 소설집이 바로 <모범소설>이다. 그러데 작품명이 주는 선입견 탓인지 그다지 인구에 회자되지 않으며, 섣불리 읽을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표제로 손해 보는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모범’이라는 어휘가 원래 그러하다. 네모반듯하지만 개성 없고 재미없는 인간 유형처럼, 이 작품집도 그러하지 않을까?

작가는 왜 이런 타이틀을 붙였을까?
“이 소설들은 앞뒤 없이 막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작품들에서 보게 될 사랑의 밀어들은 매우 정직할 뿐더러 이성과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도 전혀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조심성이 있든 없든 이 소설을 읽게 될 어떤 독자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독자들께서 작품을 잘 읽어본다면, 그 속에 조금이라도 유익한 교훈이 없는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주제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작품들은 아마도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당신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번역본 <모범소설 2>에 수록된 작가의 머리말에서 세르반테스는 실로 대담무쌍한 발언을 한다. 이 작품집이야말로 재미와 윤리 모든 측면에서 가히 소설의 모범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집은 소설의 대표작이라고 말이다.

이제 작가의 주장이 독단적인지 아니면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볼 차례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
<피의 힘>
<유리석사>
<집시 여인>
<영국에서 돌아온 여인>
<고상한 하녀>

이상이 1권에 수록된 여섯 작품들이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그의 8편의 막간극에도 동명의 작품이 존재한다. 그만큼 이 소재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음이다.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은 바로 인간의 탐욕, 즉 욕심이다. 나이 70을 바라보는 노인 까리살레스가 10대 중반의 레오노라에게 끌려 청혼을 하는 것 자체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탐욕이며, 가난한 레오노라의 부모가 까리살레스의 재산을 보고 결혼을 허락한 것도 결혼의 순수한 의미에 역행하는 욕심의 발로다.

까리살레스가 레오노라를 타인의 시선에서 감추기 위하여 벌이는 삼중 장벽에 수많은 조처를 보자. 이는 인간이란 존재가 동굴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처사인데, 이 또한 레오노라를 홀로 독점하기 위한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닌가?

레오노라를 정복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는 로아이사는 어떤가? 그는 사랑과 열정의 포로가 된 것도 아니다. 레오노라에 대한 그의 집념은 오직 비장해둔 보물을 훔치려는, 또는 순결한 정조를 뺏는 기쁨을 누리려는 불의한 욕망에 기인한다.

탐욕의 결과는 모두의 불행으로 귀결된다. 까리살레스는 슬픔과 고통으로 세상을 떠나며, 레오노라는 수녀원에 들어가 버렸고, 로아이사는 유언이 실현되기를 기대하다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레오노라를 비난할 수 없다. 그녀는 더럽혀진 욕망에 의해 노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게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움에 대한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다. 새장 속의 새가 아닌 보다 인간다움에 대한 갈구.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자유로워지려는 의지가 있을 때에는 열쇠와 굳건한 문 그리고 담들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P.81)

<피의 힘>은 다소 작위적이다.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한 여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후에 사고를 당한 아이를 구한 이는 다름 아닌 생조부였다. 여인이 아이를 찾아간 곳에서 자신의 과거의 장소임을 깨닫고 자신과 아이의 숨겨진 삶이 드러난다. 외국에 나가 있던 아이의 생부가 돌아오고 둘은 정당한 법적 관계를 회복한다.

아이의 ‘피의 힘’으로 해피엔딩으로 매듭짓지만 이 작품은 그리 녹록치 않다. 여기는 순결한 여성에 대한 강압적 육욕 추구라는 비인간적 범죄가 묻혀서 용인되고 있다. 개인과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는 만행이 쉽게 용서되는 것이다. 가톨릭은 공식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득이한 사유의 원치 않는 임신이라도 낳을 수밖에 없다. 미혼모로서 아이를 양육하고 자신의 미래의 삶을 포기하는 당사자의 처참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작가는 모른척한다. 그것을 작위적 구성으로 우연한 계기로 당사자들을 조우시킴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레오까디아의 로돌포에 대한 태도는 클라이스트의 <O...후작부인>의 후작부인과는 대조적이다. 후작부인은 기절한 자신을 범한 F...백작의 끈질긴 구애와 용서 구걸에도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권리마저도 상당히 빼앗은 후에 정식으로 청혼을 받아 당당히 결혼한다. 반면 레오까디아는 과연 로돌포를 사랑했을까 의문스럽다. 자신을 범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의 생부라는 사실만으로 급작스러운 애정이 샘솟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로돌포의 입맞춤을 허용하고 아주 쉽게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극적인 흥미로움에도 일각의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유리석사>의 소재는 환상소설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다. 그 비일상성과 광기, 그리고 기이함은 바로 환상소설의 특징이 아니던가?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당대 사회를 풍자하고 따끔한 일침을 날리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또마스는 자신의 몸이 유리로 되어 있어 깨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었지만, 한편 다년간의 공부와 여행을 통한 깨우친 지식이 광기와 결합하여 “모든 질문에 대해 기지와 정확성을 가지고 대답”(P.135)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또마스는 각계각층의 인물과 직업에 대해서 촌철살인의 평을 쏟아내는데, “훌륭한 화가들은 자연을 모방하지만 나쁜 화가들은 자연을 토해낸다”(P.145)거나 “놀라운 점은 이 세상에 속임수를 쓰는 재단사는 수없이 많지만 정직하게 옷을 만드는 사람을 이 업종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P.153)는 등 그가 언급한 인물군은 매춘부, 뚜쟁이 여인을 비롯하여 시인, 서적상, 포주, 가마꾼, 노새몰이꾼, 짐마차꾼, 선원, 마부, 의사는 물론 판사, 가짜 학사, 검사, 변호사 등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또마스의 목소리는 바로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다. 최전성기를 지나는 스페인 제국의 휘황한 위용은 사람들의 눈을 압도하여 사회에 내재한 자멸의 부조리를 외면하게 하지만, 영민한 세르반테스의 눈은 이미 사회가 부패와 부조리로 가득 차있음을, 조만간 내재적 모순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임을 예감하였던 것이다.

제정신을 차린 유리석사에 대한 세인들의 무관심은 대중스타의 덧없는 인기를 연상시킨다. 대중은 겉보기 화려하고 멋있거나 특이한 존재에 열광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인기는 한여름의 소나기와 같다. 그래서 유리석사는 스페인을 떠나 플랑드르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후안무치한 사기꾼들은 배불리 먹여 살리고 겸손한 인격자들은 굶겨 죽이는”(P.166) 당대 스페인에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그는 삶과 죽음이 한 발의 총탄에 좌우되는 엄연하고 진지한 현실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집시 여인>은 뛰어나다. 제재와 구성, 그리고 전개가 훌륭할뿐더러 집시 세계에 대한 지적 흥미마저 충족시켜 준다. 집시의 원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인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제기하고 있는데, 확실한 건 오늘날도 살아남은 집시가 유럽 문화에 끼친 수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더불어 가장 비참한 대우와 편견에 피해본 집단이라는 점이다. 안드레스가 집시 사회의 일원으로 가입할 때 집시 노인이 장문(P.224~227)으로 들려주는 집시의 계율과 문화는 그들의 언뜻 이해 불가능한 삶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이 작품집에서 출생의 비밀은 일상적인 제재가 되어 사실 별다른 흥미를 자아내지 못한다. 집시가 귀족 여자아기를 납치하여 집시로 키우다 이러저러한 사건의 경과 후 원래의 출생 신분을 되찾아 행복해진다. 비록 집시일망정 그런 여주인공은 사고와 몸가짐에 있어 남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우월한 면모를 보인다. 심하게 표현하면 이 또한 인종차별이 아닐는지.

사랑의 콩깍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혹자는 사랑의 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돈 후안은 쁘레시오사를 사랑하여 그녀의 요구에 따라 2년간 집시가 되기로 하고 자신의 신분과 집안을 버리고 출가하여 집시 안드레스가 된다. 일견 부잣집 도련님의 철없는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적어도 그의 솔직한 사랑과 대담한 실천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쁘레시오사에게 바쳐진 로만세와 시들, 그리고 끌레멘떼와 안드레스가 벌이는 한밤의 사랑의 노래의 경연이다. 이 시들은 쁘레시오사의 매력을 찬미하는 한편, 산문에 운문의 감흥을 배가하며, 더욱이 세레나데의 경연은 로맨틱한 정감을 극대화하여 이 부분만 떼어서 보면 목가적이기도 하다.

<집시 여인>과 유사한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작품이 <고상한 하녀>이다. ‘고상한’이라는 수식어는 당대의 관점에서 하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찬의 문구다. 하녀는 하녀일 뿐이다. 그런데 한 여관집 하녀는 그 미모와 독실한 신앙으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소설 초반부는 피카레스크 풍이다. 까리아소는 악동적인 기질에 못 이겨 가출을 하여 스스로 고생을 자초한다. 그리고 악자로서 갖가지 체험을 한 후 고향에 돌아오나 참치 어장의 파란만장한 생활을 못 잊어 다시 친구와 길을 나선다. 세르반테스가 스페인 문학의 한 전통인 피카레스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훌륭히 계승하였음은 이 짤막한 소설뿐만 아니라 유명한 <돈키호테>가 이를 입증한다.

여관집에서 고상한 하녀 꼰스딴사에 마음을 뺏긴 아벤다뇨로 인해 두 사람은 각기 성명과 신분을 감추고 기꺼이 여관집 하인 행세를 한다. 여기서 작품은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데 고상한 하녀에 대한 아벤다뇨의 사랑과, 다른 하녀들의 추근거림과 물장수 아스뚜리아노가 된 까리아소의 불운과 고난, 특히 “꼬리를 내놓아라”에 얽힌 일화는 웃음과 아울러 당대 서민사회의 단면을 직관하는 작가의 날카로우면서 따스한 시선을 볼 수 있다. 고상한 귀족사회는 그의 관심세계가 아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하인>은 주된 배경이 스페인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여기에는 영국과 스페인의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의 역사가 바탕에 깔려있다. 기사 끌로딸도의 인신 납치는 비록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결과로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비열한 짓이다.

여왕의 곁에 있게 된 이사벨라와 결혼하기 위하여 리까레도는 영국 해적선을 이끌고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데, 흥미진진한 해전의 스토리는 작가 자신의 참전 경험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후에 생사가 불투명해진 리까레도의 극적인 귀환도 역시 이슬람 해적으로부터 수도사들이 성금을 모아 해방시킨 자전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즉 드물게 보는 작가의 삶의 경험이 작품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외적인 아름다움, 즉 미모를 상실한 이사벨라에 대하여 리까레도가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의 숭고함에 있다.

“그녀는 추한 괴물처럼 변하고 말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형편없는 몰골로 사느니 차라리 독으로 죽어버리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P.334)

“이사벨라! 그대를 사랑한 순간부터 난 관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과 종말이 있는 그런 사랑과는 사뭇 다른 사랑을 느꼈다오. 그대의 외적인 아름다움은 나를 감정의 포로로 사로잡았고 그대의 끝없는 덕은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오. 한때 내가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대의 추한 모습도 역시 사랑하오.” (P.336)

이러한 사랑이 온갖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찬란한 행복의 결실을 맺었음에 기뻐함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제시하는 사회와 인간상은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므로 부분적으로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적합하지 않고 긍정할 수 없는 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귀족 사회의 공허함에 한눈팔지 않고, 사회의 실체인 서민과 하층 계급에 관심을 기울인 점,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미덕에 대한 옹호와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은 책장을 계속 넘기게끔 만드는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결합하여 과연 스스로 <모범소설>이라 자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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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이야기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 물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민음사판 <세계의 환상소설>에 <잔혹한 이야기>의 일부 내용-‘진실보다 더 진실한’-이 수록되어 처음으로 릴아당[릴라당]을 알게 되었다. 매우 짧은 내용이라 제대로 된 면모를 이해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묘한 인상과 여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후로 <잔혹한 이야기>를 한번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았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그동안 장편소설로 생각했던 게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27편의 단편소설과 1편의 시로 구성된 ‘작품집’이다. 다양한 시기에 개별적으로 쓰여진 작품들을 작가는 한 권의 작품집으로 묶어놓고 그럴듯한 표제를 붙였다.

‘잔혹한 이야기’, 표제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유혈이 낭자하고 뼈와 살이 튀기는 처참한 B급 고어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집에서 그런 재미를 기대한다면 일치감치 책을 덮을 것을 권고한다.

공포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유혈장면도 더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지만, 일변하여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암시와 분위기만으로도 섬뜩함을 자아내는 게 보다 고단수의 솜씨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집이 바로 그러하다.

몇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작가가 의도한 잔혹함은 육체 면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 면에서의 잔혹함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도약기, 사람들은 배금주의와 물질주의의 마력에 점차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고전주의와 계몽주의 시기의 이성적 인간관, 고상한 미덕을 갖춘 바람직한 인간형에 대한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돈과 부가 가치관의 주류로 부각한다.

저자는 당대야말로 잔혹한 시대임을 인지하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비정상적인 잔혹한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정신과 영혼이 타락하고 비정상인 경우보다 더 잔혹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전체 수록작품들이 모두 생경한 인상을 남기며, 깊은 여운을 드리워 새삼 곱씹을 만하다. 숨어있는 명작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몇 작품의 인상을 기록한다.

<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에서 언니 앙리에트와 동생 올랭프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몸을 판다. 고결하고 숭고한 동기는 그들을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올랭프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의무에 태만하고 망각하기조차 한다. 둘 중에서 누가 타락한 아가씨인가? 작가는 앙리에트의 당당함과 올랭프의 수치심을 극적으로 대조하여 전복된 가치관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랭프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여자아이(P.19)일 뿐이다.

우주와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는 물질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유물론적 관점이 지배적인 오늘날, 물질이 존재를 구성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관념의 고도 집약이 존재를 형상화할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에서 떠도는 먼지들이 강력한 중력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뭉치듯이 말이다. 관념만으로 존재가 형성되는 현상을 그린 작품이 <베라>이다. 아톨 백작의 지극한 아내 사랑은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P.36)
되살아난 베라는 아톨 백작의 관념이 만들어낸 실체이다. 그러기에 관념이 흔들리면 실체의 존재마저도 흔들리게 된다. 백작이 문득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베라의 실체는 사그라진다, 돌이킬 수 없이.
“그는 고작 한마디 말로 자기를 지니고 있는 눈부신 생명의 실을 끊어버린 것이다.”(P.37)

<복스 포풀리>는 샹젤리제에서 시대에 따라 반복하여 거행되는 웅장한 열병식 장면과 불쌍한 거지의 외침을 통해 진정한 민중의 소리-염원과 바램-가 무엇인지를 냉소적으로 웅변한다. 정권이 바뀌고 지배층이 변경되어 군중은 환호하고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지만 그들의 삶은 변함없다.
반복되어 외치는 거치의 구걸 소리-“제발 이 불쌍한 장님에게 동정을 베푸십시오.”. 그것은 진실의 소리(P.43)이자 야경꾼의 목소리(P.44)이며 청렴한 보초병의 목소리(P.44)이다.

<두 사람의 점술사>는 한 신문사 편집주간과 예비 저널리스트 간의 대화를 통해 당대 부르조아 사회,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편집주간의 말은 아프기 이를 데 없다.
“우린 절대로 아무도 출간 안 할 거라고 확신한 원고만 읽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원고들만 인쇄하지.”(P.51)
여기는 당대 부르조아 독자층의 지적 수준과 선호도에 대한 작가의 경멸스러운 냉소가 깊게 어려 있다. 편집주간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바로 “영혼”(P.57)이라고 지적하며, 예비 저널리스트에게 문필가의 진정한 좌우명은 “범인(凡人)이 되시오!”(P.58)라고 설파한다.

<하늘의 선전물>은 우울한 과학기술적 배경을 취하고 있다. <영광 제조기>, <마지막 숨의 분석기>, <트리스탕 박사의 치료> 등이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기술의 가면으로 위장한 부르조아의 천민자본주의와 배금 만능주의에 대한 얼치기 예찬 형식을 빌린 실체 고발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비생산적이었던 하늘을 활용하여 실리와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예찬을 나열한다. 그리고 가져올 엄청난 광고효과와 막대한 실질적 가치를 예시한다. 작가가 말한 하늘은 오늘날 사이버공간으로 훌륭하게 대체 구현되어 있다.

<영광 제조기>는 엄밀히 말해 극장에서의 영광에 국한하며, 박수꾼을 기계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정신’은 바로 기계에 있는 거랍니다.”(P.91)
“정신적 대상에 도달하는 물질적 수단, 즉 성공은 현실이 되는 것이죠.”(P.91)
당대 연극계에 만연한 부조리에 대한 일침을 통해 작가는 관객과 박수꾼 부대, 훼방꾼, 평론가들을 싸잡아 비판하고 있다. 박수꾼은 물론 평론기사도 기계화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오늘날 대중예술계에서 박수부대의 적극적 활용과 노이즈 마케팅 등은 비록 기계화되어 있지 않을 뿐 릴아당의 지적한 바를 여전히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작품을 통해 릴아당은 당대 부르조아 사회와 시민을 풍자 및 조소하고 그들의 상업성, 태금주의, 위선적 교양과 도덕 등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비르지니와 폴>은 유명한 <폴과 비르지니>를 뒤집어놓는다. 더 이상 순결하고 무구한 폴과 비르지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돈을 듬뿍 버는 것에 기뻐하며, 하잘 것 없는 선물대신 저금통을 듬뿍 채워주길 바라며, 시골생활이 경비를 절감해 줄 것을 기대한다. 릴아당의 시대는 그들마저 세속주의에 물들게 한다.

<마지막 만찬의 손님>은 사튀른느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과 점증하는 이상함이 작품을 주도한다. 반전으로 드러나는 정체와 충격.
“확실히 이성을 잃어버린다는 점에서는 그 완벽성에 미친 사람을 따를 자가 없으니까요.”(P.144)

<혼동하는 만큼!>은 앞서 언급한 <진실보다 더 진실한>과 같은 작품이다. 시체공시소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주식거래인들이 모여 있는 카페의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면서 작중인물은 “두 번째로 본 광경이 첫 번째보다 한층 더 불길한 징조”(P.156)를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감상주의>는 감각에 대한 일반인과 예술가의 차이점을 시인 자신의 입을 빌어 열정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바다로 다가가면서 듣게 되는 큰 파도 부서지는 소리처럼 점점 커지는 것이지요. 오묘한 감각의 연장을 인식하는 것, 그 무한하고 신비로운 울림을 인식하는 것만이 우리 예술가 혈통의 우월성을 결정짓지요.”(P.182)
그것은 또한 시인 막시밀리앵의 실연에 따른 죽음에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 사후에 은은한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만찬>은 한편의 우화이다. 라이벌 페르스노아 씨와 르카스텔리에 씨 는 가장 멋진 만찬 대결을 벌인다. 르카스텔리에 씨의 만찬은 외관상 일 년 전 페르스노아 씨의 만찬과 완벽히 동일하다.
“똑같은 만찬이었지요?”
“네, 똑같았어요.”
그리고는 한숨 한 번과 침묵, 그리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떨떠름한 우거지상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정말로 똑같았지요?”
“그러나 무언가 다르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그래요. 다른 무언가가 있었어요.”
“결국...그래요, 올해 쪽이 더 좋았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묘하네요. 똑같았습니다...만, 그러나 훨씬 멋졌습니다!”(P.199~200)

전년과 올해 만찬의 차이는 단 한가지였다. 각자의 접시 위에 하나씩 놓인 이십 프랑짜리 금화 한 닢(P.197)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극배우 쇼드빌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연기에 불과함을 깨닫고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망령을 보고 회한을 통해 진짜 인간다운 감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그는 방화를 저지르고 이 흉악한 범죄로 수많은 인명이 불에 타죽는다. 그는 외딴 등대로 몸을 피하고 망령이 찾아와 자신이 회한에 떨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엇 하나 전혀 느끼지를 못했다...”(P.216). 절망과 고독에서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그는 망령을 보길 간구하면서 죽어갔다. “그 자신이야말로 그가 찾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P.217) 깨닫지 못한 채로.

<마지막 숨의 분석기>는 죽음 앞에서 탄식과 눈물은 사회 차원의 시간낭비(P.228)이므로, 이 분석기가 상주들이 망자 앞에서 견식있고, 동정심 있고, 호감이 가고, 격식에 맞게 무관심(P.226)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잊혀지게 마련이니, 즉석에서 잊어버리는 데 익숙해지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P.228)

<노상강도>는 막연한 공포가 집단 발작을 일으켜 자멸의 길로 빠져드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팽팽한 공포와 긴장 상황에서 사소한 계기가 바로 방아쇠를 당기는 구실을 하게 된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새삼 절감하게 한다.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사실이 허구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쩌면 본래 허구가 사실로 둔갑되었다가 다시 허구로 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D씨의 ‘사실’ 이야기는 듣는 이를 모두 매료시킨다. 후에 ‘나’가 들은 대로 친구에게 전달하였다.
친구의 반응은? “으음, 완전히 소설이네요!...그걸 글로 쓰지 그래요!”
‘나’의 대답은? “예. 이제 이걸 쓸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완성됐으니까요.”(P.265)

‘이제’라는 시점을 통해 작가는 허구화가 완성되었음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펠리시엥은 극장에서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하여 그녀를 쫓아가 구애를 하지만 의외로 그녀의 대답은 차갑다.
“몇 년 전부터 제게는 언제나 똑같은 대화였답니다. 이런 역할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정확하게 정해진 대사를 해야 하는 역할이에요.”(P.304)

그녀는 자신이 귀머거리임을 밝히며, 일반 여성들을 정신적 귀머거리(P.308)로 혹평한다. “말의 표면상의 의미가 아니라 그 말 속에 숨겨진 것을 나타내는 심오한 말의 본질, 즉 진정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상대가 아첨을 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P.307)

그녀는 사랑의 맹목성과 결혼 생활이 오히려 잔혹한 순간이라고 말하며, 자리를 총총히 떠난다. 이것이 <미지의 여인>이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잔혹성을 현실의 부조리를 먹고 크는 환상의 아들로 지칭한다. 현실이 상식성에서 일탈하여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울 때 현실은 잔혹성을 띤다. 일상성을 떠난 현실, 그것은 바로 환상이다. 환상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 동전의 양면관계이다. 환상이 꿈과 몽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일상에 근접하고 현실에 가까운 기반을 두면서도 우리에게 생경한 연유는 바로 이러한 의외적 편재성이 주는 당혹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록작품>

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
베라
복스 포풀리
두 사람의 점술사
하늘의 선전물
앙토니
영광 제조기
포틀랜드 공작
비르지니와 폴
마지막 만찬의 손님
혼동하는 만큼!
군중의 성마름
옛 음악의 비밀
감상주의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만찬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
어둠의 꽃들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
노상강도
이자보 여왕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
전조
미지의 여인
마리엘
트리스탕 박사의 치료
사랑 이야기
오묘한 회상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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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재판관
박철 지음 / 연극과인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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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1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마지막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여 <모범소설>등에 이어 <돈키호테>2편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을 1615년에 발표한다.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은 세르반테스가 꾸준히 써왔던 극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으로 연극 장르에 대한 작가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막간극’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막간극은 귀족들의 연회 도중 휴식시간에 상연하거나 긴 연극의 막 사이에 분위기 전환용으로 상연하는 짧은 극작품을 가리킨다. 어떻게 보면 장편 연극에 대응되는 단편 연극이라고 하겠다.

8편의 막간극은 다음과 같다.
–  이혼 재판관
–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
–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
–  성가신 감시
–  가짜 비스까야 사람
–  기적의 인형극
–  살라망까 동굴
–  질투심 많은 늙은이

각각의 작품은 짧은 분량에도 온전한 개성을 드러내며 성격이 명확하다. 더욱이 돈키호테 정신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고상하고 젠체하는 귀족과 왕정에서 멀리 떠나 범인(凡人)과 속인(俗人)의 세계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그가 보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허점투성이다. 따라서 조소와 해학을 아끼지 않지만 그가 보는 시선을 결코 차갑지 않다. 그는 당대의 평범한 사람들에 따뜻한 애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작중에서는 악인도 악인답지 않으며, 인간은 선과 악이, 그리고 고결과 비속이 혼재된 존재임을 은연중 깨닫게 된다.

<이혼 재판관>에는 이혼 허가를 요청하는 네 쌍이 등장한다. 나이든 남편에 대한 성적인 욕구 불만, 남편의 생활 무능력, 상호간의 증오, 창녀와 술김에 결혼한 인부의 아내의 나쁜 성격과 행실 등 그 사유는 다채롭기 그지없다.

재판관은 “이런 이유가 이혼 사유가 된다면 끝없는 이유를 대며, 결혼의 속박에서 지을 털어놓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소?”(P.15)하며 이들을 만류한다. 반면 서기는 “그렇게 되었다가는 여기 이 법정의 서기들과 검사들은 굶어죽게요?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혼신청을 했으면 좋겠습니다.”(P.17)라는 입장이다.

결론은? “제 아무리 나쁜 부부라도 가장 좋은 이혼보다는 낫다.”(P.18)는 악사의 노랫말.

과연 그럴까? 가장 좋은 부부를 능가하는 것은 없겠지만, 때로는 가장 좋은 이혼이 인간관계의 파탄을 막아줄 수도 있는 법.

<뜨람빠고스라는 홀아비 뚜쟁이>는 창녀와 기둥서방이 등장한다. 당대는 몸을 파는 직업에 대하여 커다란 거부감을 지니지 않은 듯하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겸손한 순응이랄까. 뜨람빠고스는 자신의 창녀의 죽음으로 상실감에 빠져있다. 뜨람빠고스와 다른 뚜쟁이 치끼스나께 간의 대화는 그야말로 진지한 해학의 참면모를 보여준다. 뜨람빠고스가 진정으로 뻬리고스의 죽음을 슬퍼했을까? 천만에, 단지 그는 수입원이 사라진 게 아쉬웠을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창녀를 고른 후 파티를 벌인다. 이때 레뿔리다의 애인이었던 건달 에스까라만이 증장하여 한바탕 걸쭉한 춤과 노래로 막을 내린다.

대체 이게 뭐냐고? 막간극에서 뭔가 진지한 것을 기대하지 말자. 막간극의 용도가 무엇인지 벌써 잊었는가?

<다간소 마을의 시장선거>는 시장선거에 출마한 4명의 후보자를 학사와 서기, 시의원이 면접시험 하는 희화화하고 있다. 두 시의원 빤두로와 알론소의 말꼬리 잡는 험담은 그들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후보자들도 만만치 않다. 암송만 잘하는 이, 뛰어난 포도주 맛 감별력, 새총 맞추기에 탁월한 솜씨 등.

분위기는 뻬드로 데 라나의 진지하며 성실한 시장 직무관 피력으로 사뭇 엄숙해지지만 곧 등장한 집시들의 가무로 흐트러진다. 지켜보던 성당지기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던지자 바로 치도곤을 당하고 쫓겨난다.

“정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걸세.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P.58)

복합적 결말이다. 막간극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종교의 정치 간섭에 대한 거부감, 어리석은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 그리고 소박한 정치에 대한 소망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성가신 감시>는 군인이 자신의 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인의 집 밖을 지키고 서서는 경쟁자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는 내용이다. 구두상인과의 얼토당토 않는 흥정이 웃음을 선사한다. 결국 하녀는 집주인 앞에서 군인 대신 성당지기를 선택하고, 투덜과 자축의 말로 극이 끝난다.

<가짜 비스까야 사람>은 두 젊은이가 자칭 영특하다고 하는 세비야 출신의 매춘부를 놀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유는 묻지 말자. 막간극에서 그런 질문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가짜 비스까야 사람으로 위장하고 끄리스띠나에게 값비싼 목걸이를 담보로 맡겨 공돈을 벌 수 있겠구나하는 헛된 희망을 품게 한 다음, 목걸이가 가짜로 바뀌었다며 소동을 벌인다. 매춘부 여인은 당당하게 시장 앞으로 나가 진실을 주장할 수 없다. 직업적 연유로 시장이 그녀를 나쁘게 인식하고 있는 판국이다. 결말은 놀림이었음을 밝히고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해피엔딩! 만약 놀림이 아니고 진짜 발생한 일이라면 끄리스띠나의 앞날은 샛노랗게 변했을 터인데 장난이 죄없다고 누가 주장하는가?

<기적의 인형극>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과 유사한 제재를 다룬다. 아무것도 상연되지 않는 인형극 무대, 하지만 관객들은 기적이 보이는 양 연출가의 대사에 맞장구치기 급급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거나, 합법적인 결혼을 한 부모에게서 임신되고 출생되지 않은 사생아들”(P.110)로 비난받을까 두려워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게 보이니 그야말로 ‘기적의 인형극’이 아닌가?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아무 사정도 모르는 기병대 장교를 저주받은 창녀의 아들이나 천박한 유태인으로 마음껏 희롱한다. 바보들의 행진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치들 중 하나가 틀림없소!...개종한 유태인이나 사생아 같은 자들은 용감하지 못하지! 따라서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그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요. 그들 중 하나야.” (P.123)

또 하나의 바보들의 행진이 있다. 바로 <살라망까 동굴>이다. 첫 장면은 애틋하지 그지없다. 나흘간 집을 비우는 남편의 부재를 눈물로 슬퍼하며 기절까지 하는 아내, 진정한 부부애의 전형이다. 하지만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여자의 반응은?

“꺼져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 사라져버리고 마는 연기처럼!” (P.128)

아내는 정부(情夫)를 불러 즐거운 밤을 보낼 생각에 하녀와 더불어 몸이 달아있다.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가난한 살라망까 출신의 대학생의 등장. 남편의 갑작스런 귀가는 이들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다. 그리고 대학생은 살라망까 동굴에서 터득한,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불러오는 기술을 능청스러운 연기한다. 졸지에 악마가 돼 버린 두 명의 정부(情夫)! 순진한 남편은 모두를 식당으로 안내한다.

인간 악마와 남편 빤끄라시오 간의 대화가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악마가 식사를 하며, 노래도 부르며, 유명한 춤도 잘 춘다는 사실에 남편은 놀란다. 악마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고 친근한 동네 이웃과도 같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질투심 많은 늙은이>는 나이어린 여성과 결혼하여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늙은이와 이를 속여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젊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다. 늙은이는 일체 외출을 금하고 문과 창문에 자물쇠와 철책을 설치하며, 이웃조차도 대문을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단속한다. 그에게 도냐 로렌사는 늘그막의 “여생의 동반자이자 선물”(P.151)에 불과하다.

인간의 근원적 욕구는 억누를 수 없는 법, 그래서 도냐 로렌사와 하녀는 이웃인 오르띠고사와 짜고서 한 사내를 몰래 집안으로 들이고 굶주린 아내는 회포를 푼다. 그림 속의 사내와 현실의 사내. 남편을 속이기 위한 아내와 하녀, 오르띠고사 간의 절묘한 화음은 부조화 속의 조화를 연상시킨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유명한 4중창 장면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세르반테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쓴 짤막한 단편극에 진지하고 심오한 사족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치와 사회제도의 부조리, 결혼제도의 모순과 불평등, 억압당하는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지위 등 이것저것 주워오면 꽤나 그럴듯하다.

세르반테스는 요컨대 외형적 가면과 속박을 벗어난 소위 생얼의 인간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쑥스러움과 재미를 동시에 관객에게 안겨준다. 물론 비평가들의 현학성도 충족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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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시아.사기꾼 페드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3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선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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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는 동시대의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문학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의 <돈키호테>는 서양문학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세르반테스의 거의 전부다. 혹 좀 더 관심 있는 독자라면 <모범소설> 정도 이름을 들어봤을 뿐으로,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는 거의 동일어로 취급받는다.

이런 사실을 세르반테스가 알면 몹시 슬퍼할 것이다. 당대 스페인 문학의 황금시기에 많은 작가처럼 세르반테스도 극작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다수가 소실되고 현전하는 것은 몇 편 되지 않지만, 그에게서 극작을 빼놓는다면 그의 문학세계의 한 축을 빼놓는 셈이다.

세르반테스의 사고와 문학은 세금징수관으로 일하던 중 겪게 되는 억울한 옥살이로 급격히 변모한다. 전기가 체제 긍정적, 애국적 경향이라면, 후기는 당대의 부패와 타락을 사회비판과 풍자 등으로 폭로하고 있다.

<누만시아>는 애국주의의 극적인 발로의 대표작이다. 누만시아는 오늘날 스페인 중북부 소리아 주에 해당하며, 스페인의 원류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승승장구하던 로마 공화국에 의하여 누만시아가 점령당하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세르반테스는 누만시아인의 저항과 용기를 예찬하고 그들의 비극이 후세 스페인 제국의 영광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드높여 외친다. 세르반테스는 절정을 구가하던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문학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만시아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장기간 공격에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총사령관 스키피오는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물자 출입을 단절시킴으로써 고사시키는 작전을 사용한다.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성 안, 사람들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가진 것을 모두 불태우고 스스로를 절멸시켜 로마인들에게 텅 빈 성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전쟁의 목적을 헛되이 하며, 누만시아인의 불굴의 기개를 떨쳐보인다.

극한의 상황에서 기아에 쓰러져가는 성안 사람들. 연인 리라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성 밖에 나가 식량을 구한 후 죽어가는 모란드로. 모든 것을 버리자는 테오헤네스의 의견과 이의 실행, 그리고 처절한 죽음과 죽임의 잇달음. 과연 이것이 연극의 제재와 전개 상 적합한 지에 대한 일말의 의문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 마법사 마르키노는 어찌할 수 없음에 사전에 목숨을 끊지만, 인격화된 스페인과 두에로 강은 오늘의 고통과 비극이 내일의 영광을 예언하고, 역시 인격화된 명성이 이를 반복하여 증언한다.

“이 비할 데 없는 업적으로 인해 이 조상들의 강인한 피를 이어받은 후예들은 미래에 강한 스페인을 만들 것이다...결코 정복되지 않았던 기상과 용기는 계속 전해져야 한다.” (P.120)

그런데 전원 분사를 선택한 누만시아인의 선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스키피오와 로마세력은 폭압적 정복자가 아니다.

“내가 그리도 야만적이고 거만하며 오직 죽음만을 생각하는, 자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던가? 혹시 내가 피정복민을 그리도 매몰차고 가혹하게 다루는 사람이던가? 누만시아는 나에 대해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어. 나는 승리 후에 패배자를 용서해주는 사람인데...” (P.114)

누만시아인은 죽음으로써 그들의 대담성과 불굴성을 드러냈지만, 후대 스페인인과 그들은 아무 혈연적 연관성도 없다. 같은 땅에 시대를 달리하여 살았다고 동일한 민족이라고 할 수 없다. 차라리 항복의 치욕을 무릅썼더라면 민족의 삶은 존속되고 후일 재기의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테오헤네스의 절규(P.107)와 누만시아인의 집단자살행위는 인간성의 모짊과 집단 광기를 새삼 상기시켜 전율케 한다.

전자와 달리 <사기꾼 페드로>는 조금 더 익숙한 세르반테스의 모습에 가깝다. 사회 체제와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 그것은 웃음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우는 세르반테스의 주특기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주인공 격인 페드로 데 우르데말라스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사기꾼으로 분명 악당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복합적 유형이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래서 피카레스크 희곡(P.278)으로 불리는 것도 타당성을 지닌다.

페드로가 거친 직업만 열거해도 그의 인생편력을 알 수 있다. 버려진 아이로 시작된 그의 삶은 고아원을 나와 견습 선원, 소매치기, 일꾼, 거짓 사제, 포주, 수송병, 장님 시종, 노새 몰이꾼, 야바위꾼을 거쳐 시장의 보좌관을 하고 있다. 그는 자연스레 세상의 악과 타락에 물들었으나 그의 본성은 선의를 지니고 있다.

“페드로가 비록 사기꾼이긴 해도 부정적으로만 그려지지 않고,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밉살스럽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 있는 낙천적인 인물로 제시”(P.278)되는 것은 바로 페드로가 스페인 민중의 생동하는 자유분방함을 대변하는 인물인데서 연유한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왕이 되거나, 아니면 수도자나 교황일 될 운을 타고났다고 믿고 시장 보좌관을 그만두고 예언을 좇아 집시의 일원이 된다(P.155). 집시가 되어 벨리카를 만나고 이를 계기로 왕에게 극단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 받는다. 이제 그는 무대 위에서 꿈꾸던 모든 직분을 다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벨리카는 긍정적인 성격 유형이 아니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지만 집시 신분에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망상을 품고 있다. 후에 비록 우연한 계기로 사실로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는 분명 망상이다. 그리고 왕족으로 탈바꿈한 후 집시들을 외면하여 자신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에피소드가 부가되어 있다. 하나는 클레멘테와 클레멘시아의 결혼이며, 파스쿠알과 베니타의 결합이 다른 하나다. 어찌 보면 작품의 큰 줄기와는 무관한 듯하지만, 첫부분의 크레스포 시장의 송사와 함께 모두가 페드로의 재치와 선의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스페인 민중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엿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사기꾼 페드로>는 가볍고 재미있는 희극으로서, 소설 <돈 키호테>의 정신이 여기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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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박태균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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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좀 늦었지만 일련의 한국전쟁 관련 서적을 읽어볼 계획이다. 왜냐고? 그건 내가 이 나라의 국민이며 이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틀 부제처럼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끝나야 할 전쟁’이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한국전쟁의 진정한 종전 이후에 가능하다.

한국전쟁, 솔직히 아직은 6·25사변이라는 명칭이 더 입에 익숙하다. 수십 년간 교육받은 결과는 하루아침에 바꿔지지 않으니까. 한국전쟁은 종결된 전쟁이 아니며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리고 잊혀진 것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우리의 가족 중 연장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해당 없다고 섣불리 단언하지 말라. 우리 현대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좋건 나쁘건 한국전쟁과 그 후폭풍에 압도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전쟁을 잘 알고 있는가? 교과서에서 나열된 단편적인 상식, 그리고 가끔씩 TV에서 보여주는 낯선 흑백화면들. 무척 잘 알고 있을 듯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혹은 전혀 실상을 알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전개과정은 우리가 알 듯 영웅적이었는지, 휴전 협정과 그 이후는 어떠했는지 말이다.

저자는 대단히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가급적 한 발짝 떨어져서 차분한 어조로 한국전쟁에 관한 각종 주장과 학설들을 소개하고 비판한다. 물론 그도 뜨거운 한국 사람인지라 부분적으로 감정이 치솟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것을 단점으로 칭한다면 가혹한 일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여기서 한국전쟁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개론서의 미덕에 충실하다. 여기서 드라마틱한 전쟁 장면의 전개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나도 조금은 실망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진짜 관심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으로 피해 받은 인간과 사회이며, 여기에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감추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과거 분분한 논의가 있었다. 전통적인 전격 남침설에, 브루스 커밍스의 유명한 저작에 힘입은 수정설, 그리고 일부의 북침설 등. 그동안 학교에서 교육받은 원인은 물론 전격 남침설이다. 피에 굶주린 북괴가 전격적으로 38선을 넘어와 평화롭게 살아가던 남한을 일대 아수라장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공헌은 한국전쟁에 대한 기원을 단지 1950년에 맞추었던 인식을 1945년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해방과 곧 이은 분단, 그리고 분단의 고착과정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이며, 1950년은 고조된 긴장이 분출된 시점이었다. 저자 박태균은 좌우익의 대립이라는 내적 기원론과 미국과 소련에 귀인하는 외적 기원론을 세심하게 분석 및 비판하고 있다. 부분적 책임은 있지만 전체를 귀인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정치세력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정치세력들 사이에는 갈등의 골을 메울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P.55)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식민지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던 것이다...미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이 한반도의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P.71)

“문제는 외세가 어떻게 한 나라를 분단시킬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점이다. 이는 외세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분단을 하려는 외세의 힘에 부합하는 내부의 힘이 있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다양한 정치세력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을 통합으로 풀기 보다는 외세와 결탁하여 특정 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바로 분단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이다.” (P.81)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과거사가 청산되지 못한 상황에서 민족보다 개인의 야망이 우연성과 결부하여 필연성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며, 그 여파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옥죄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재평가하자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바른 건국을 망치고 민족과 국가에 영영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명약관화한 사실은 결코 외면되거나 은폐할 수 없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은 이승만이 주장한 민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주장한 민족은 보통 국민들로 구성된 민족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민족 구성원들을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민족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대관절 어떤 민족을 구하려 했단 말인가? (P.297)

저자는 분단과 분단극복 활동에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의 좌우합작세력에 대한 지지와 여운형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은 무엇보다 그것의 성공이 분단의 조기 극복과 장차 다가올 거대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인식에서이다. 하지만 역사는 주전파와 매파의 선명성을 선호하며, 주화파와 비둘기파는 언제나 회색분자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여운형은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통일국가가 수립되었을 때 다양한 정치세력들을 포괄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합의를 끌어낼 인물이 그 말고는 없었다.” (P.107)

“역사에는 결과론적으로만 평가해서는 풀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분단국가가 수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민 정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연석회의는 사회적인 공감대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P.109)

한국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다. 전개과정에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중공군의 참전이 잇달아지면서 국제전으로 확전되었지만, 발발 최초에는 남과 북의 군대 간 힘겨루기였다. 미국과 소련의 정보 공개 이후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김일성의 남침 요청에 스탈린은 매우 망설였다. 그러다가 1949년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개전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고, 단시일 내에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전쟁을 승인하였다.

“전쟁 계획을 입안한 것은 북한이었다. 다만 개전 후 외부 세력이 개입할 경우 북한 단독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북한 지도부는 동분서주했다. 소련과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P.170)

“전쟁은 기습적이고 신속해야 합니다. 남조선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강력한 저항과 국제적 지원이 동원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P.167)

전쟁의 전개과정을 저자는 남과 북의 각각 실패과정으로 파악한다. 북한은 당초 구상대로 조기에 남한을 통일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미군은 간신히 낙동강방어선을 확보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국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지만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하였고 무분별한 북진으로 중공군의 참전과 뼈아픈 후퇴를 겪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은 대개 ‘성공’의 과정으로만 그려져 왔다...그러나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참혹한 이 전쟁은 앞에서 보았듯이 실패의 연속과정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P.243)

그런데 전쟁은 단순한 정치적 게임이 아니다. 전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군인과 민간인에게 돌아간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피해는 드러나지 않거나 공론화되지 않을 뿐이다. 최근에서야 노근리 학살사건 등 민간의 전쟁 피해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저자는 민간인 피해와 세균전 의혹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이는 개론적 차원에 국한하고 있다. 다른 저자의 <전쟁과 사회>가 전자에 대한 본격적 연구서이며, 후자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토로한다.

“불행한 사실은, 실패의 피해는 전적으로 병사들이나 후방의 민간인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전쟁 지휘자들이 실패에 대해 지는 책임은 지극히 적거나 또는 전혀 책임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P.244)

“전쟁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이다. 그러나 전쟁은 전선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에 군인 아닌 민간인도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민간인학살과 같은 피해도 있고,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곤란 같은 피해도 있다...민간인학살과 이산가족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P.328~329)

한국전쟁의 결과는 무수한 인명과 막대한 재산의 손실만이 아니다. 전쟁은 잠정 분단을 영구화하였고, 이후 미국과 소련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 국제 정세는 이데올로기 간 첨예한 냉전 체제가 강화되었다. 게다가 남과 북은 모두 김일성과 이승만에 의한 독재 체제가 구축되어 북쪽에서는 여전히 그리고 남쪽에서는 최근까지도 억압이 끊이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한다.

“한국전쟁은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단지 눈에 보이는 분단을 넘어서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이다.” (P.360)

“한국전쟁의 경험은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가로막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점 또한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중요한 변화가 될 것이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이 가져왔던 엄청난 실패는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미국이 제3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P.362)

이 책이 한국전쟁 전반을 아우르는 총서가 아니다. 400면 남짓한 분량으로 우리 역사와 사회에 처참한 상흔을 남긴 일대 전쟁의 전모를 어찌 담아내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중요한 쟁점을 중심으로 논점을 명확히 하거나 과거의 관습적 인식에 날카로운 분석의 칼을 던지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 여파에 오늘날까지 드리워져 있음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  앞으로 천천히 읽어나갈 한국전쟁 관련 책들이다. 앞으로 갈길이 아득하지만, 우리 현대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콜디스트 윈터 (데이비트 핼버스탬) : 미군의 시각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 한국군 최고지휘관의 시각
마지막 한발 (앤드류 새먼) : 영국군의 시각
한국전쟁1 - 맥아더·클라크·리지웨이 보고서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 미군 최고지휘관의 시각
전쟁과 사회 (김동춘) : 민간인피해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토르쿠노프) : 전쟁 발발의 기원
한국전쟁 (정병준) : 한국전쟁의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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