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랑의 이야기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344
후안 루이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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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4세기 전반에 발간된 이 작품은 장편 운문 소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원전이 방대하고 수록한 내용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소실된 경우도 있어 체계적 이해가 어렵다는 평이 있다. 게다가 이 번역본은 원전에서 3분의 1 정도를 발췌하여 번역하고 있어 번역의 질을 떠나서 작품의 전체적 이해가 매우 곤란하다.

이타의 수석사제 신분인 작가는 이 작품의 의도를 ‘나쁜 사랑’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계도하는데 둔다. 여기서 나쁜 사랑은 속세의 미친 사랑을 지칭하며, 좋은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어서 작가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의 속성 상 미친 사랑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미친 사랑의 이야기를 통하여 제대로 된 미친 사랑을 하는 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작가의 진정한 의도가 이 중에서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이 작품에서 표제[비록 작가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지만]와는 달리 좋은 사랑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화자인 작가가 사랑을 하고자 뭇 여성에게 구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사랑과 여성의 의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밝힌다.

“여인이 남자에게 나쁜 것이라면, 남자의
몸에서 만든 여자를 남자에게 동반자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토록 귀족적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P.44)

따라서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구애를 하는 것은 당연한 본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아름다운 여인에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의인화된 사랑(Amor)이 당시의 미인관을 들려준다.(P.77~78, 81~82)

애석하게도 화자의 노력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번번이 헛수고에 그친 화자는 마침내 사랑(Amor)에게 불평을 털어놓고 비너스에게 하소연한다. 비너스의 조언을 받아들인 화자는 매파, 즉 뚜쟁이를 통해 도냐 엔드리나에 대한 구애에 성공한다. 매파와 뚜쟁이는 종이 한 끝 차이인데, 뚜쟁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라 셀레스티나>의 원형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애에서 매파의 중요성이 강조되므로 매파 우라카가 죽었을 때 화자의 상실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화자는 매파를 데려간 죽음을 비난하며, 묘비명을 적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화자의 연애담은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화자와 여성 간의 담화 중에 인용하는 숱한 우화 및 일화가 작품의 재미를 더해 준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 간에 일어난 이야기
사자와 여우에 대한 우화
땅의 출산에 대한 우화
알카라스 왕의 아들에 대한 예언
도둑과 개에 대한 우화
세 명의 여자와 결혼하고자 했던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
주피터에게 왕을 청했던 개구리들에 관한 우화
늑대와 학의 우화
화가 나서 자살한 사자의 우화
개구리를 믿은 두더지에 관한 우화
같은 여인을 동시에 사랑한 두 명의 게으름뱅이에 대한 이야기
화가 피타스 파야스에 대한 이야기
귀도 심장도 없는 당나귀에 대한 우화

이런 이야기들이 작품 속에 들어가 있으며, 게다가 ‘육체 씨와 사순절 양의 싸움’이라는 우화는 별도 장으로 길게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무수한 단편의 모자이크로서, 민간 구비전승이 문자로 정착하는 시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발췌본이 아니라 하루빨리 완전본이 나와야 작품의 진면목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좋은 사랑에 대한 작가의 속내는 무엇일까? ‘탈라베라 사제들의 노래’를 보면, 정부를 두지 말라는 대주교의 칙령으로 모든 성직자들이 낙심하고, 일부는 집단으로 불복 상소를 내기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내심을 슬쩍 표현한 게 아닐까?

“만일 주교가 그 일을 나쁘게 본다면
여러분들은 선행을 버리고 악행을 행하시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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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후안 테노리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6
호세 소리야 이 모랄 지음, 정동섭 옮김 / 책세상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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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 후안>의 무수한 아류작 중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 것이 이 <돈 후안 테노리오>로서 원작 출시 후 2백여 년이 경과한 후다.

돈 후안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거침없는 여성 유혹과 편력의 대담함과 신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무모함에 있다. 가톨릭이 지배하던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종교는 삶의 모든 것을 규율하고 지배하는 무거운 질곡이 되기도 하였다. 돈 후안은 종교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대중의 내심을 잘 반영하였다.

호세 소리야의 <돈 후안 테노리오>는 선배에게서 주인공을 빌려 왔을 뿐 작품의 전개와 성격, 분위기, 결말 등 모든 면에서 차별화를 도모하고 있다. 물론 극작품이라는 장르적 성격은 동일하다.

티르소의 돈 후안이 여성 유혹자임을 자부하지만 극중에서는 불과 4명 만을 유혹하는 데 그치는 반면, 호세 소리야의 주인공은 돈 루이스 메히아와의 악한 대결에서 72명의 여성을 정복하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티르소는 극중에서 유혹 장면을 보여주지만, 호세 소리야의 작품에서는 극중 유혹 장면은 단 한 명, 도냐 이네스 뿐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돈 후안의 도냐 이네스 유혹이 이야기의 중심을 끌어간다. 양가의 아버지 간에는 정혼이 구두합의가 되었으나 돈 후안의 파렴치함을 목도한 기사단장 돈 곤살로가 파혼시킨 예비 수녀, 이것이 도냐 이네스의 모습이다. 그녀는 나면서부터 수녀원에서 생활하여 세속의 티끌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의 현신으로 묘사된다.

돈 후안은 그녀의 약혼자임을 이용하여 접근하고 납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의 무구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려 기사단장의 발에 무릎을 꿇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이 전작과의 차이점이다. 전작의 돈 후안은 끝없이 신에게 도전하고 경멸하지만 후자의 돈 후안은 신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돈 후안과 돈 루이스의 회동 장면에서 우리는 돈 후안 자신의 입으로 그의 장문의 악행 리스트를 듣게 된다(P.38~42). 판소리 <흥부가>에서 형 놀부의 심술 대목의 나열을 연상시키는데 정도는 훨씬 심하다. 이러한 그가 도냐 이네스를 만나고 소위 개과천선을 바라지만 돈 곤살로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제 존재를 새롭게 하며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악마였던 자를 천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P.154)

“그렇지 않으면 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늘 그래왔던 그런 과거의 사람, 지금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될 겁니다.” (P.153)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 후안은 돈 곤살로와 돈 루이스를 죽이고 떠나며, 도냐 이네스는 아버지의 죽음과 돈 후안의 떠남에 정신을 잃고 영원히 쓰러진다. 완전한 비극!

2부에서는 돈 후안의 귀국과 묘지가 된 자신의 저택, 돈 곤살로와 도냐 이네스의 석상이 주 배경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냐 이네스의 존재이다. 티르소의 작품에서 기사단장의 딸은 도냐 안나로 그녀는 아버지 몰래 모타 후작과의 만남을 꾀한다.

호세 소리야는 이를 도냐 이네스로 대치하는데, 단순 대치가 아니라 돈 후안 못지않은 중요한 캐릭터로 격상하고 있다. 그녀는 단테에게 베아트리체, 파우스트에게 그레트헨과 같은 구원의 여인상이다. 석상의 초대로 무덤에서 지옥으로 끌려가려는 돈 후안. 마지막 순간 그는 신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도냐 이네스가 나타나 돈 후안의 영혼을 구원한다.

호세 소리야는 선배의 그늘을 의식하지만 결코 이에 가려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돈 후안의 성격의 새로운 규정, 도냐 이네스라는 여인의 창조, 이를 통해 독자는 전작의 편력적 구성의 산만함에 비해 남녀 주인공에 집중된 보다 극적인 흐름을 느낄 수 있고 그들의 엇갈린 운명에 탄식을 흘리다가 마침내 주인공의 구원에 안도의 한숨과 갈채를 보낼 수 있다.

전작에 비해 분량이 많지만 오히려 읽어나가기는 훨씬 용이하다. 연대적 차이가 언어적, 문화적으로 보다 접근을 용이하게 하며, 아울러 작가의 글쓰기가 한층 대중친화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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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 나남신서 327
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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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전황은 급격하게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린다.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린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다시 힘을 내고 파죽지세로 북한군을 몰아붙여 마침내 압록강 도달이 멀지 않을 정도로 승세를 탄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당시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공개적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군의 동태를 고려에 넣지 않았다. 자국의 국경이 위협받는 것을 방관치 않겠다는 모택동의 경고를. 모두가 낙관적 분위기에 도취되어 있을 때 중국군 대부대가 국경을 넘어 험준한 산악에 매복하고 있었으며, 단 한 번의 역공으로 서부전선의 8군은 평양을 포기하고 남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10군단은 장진호반에서 엄청난 수의 중국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모두가 그들의 전멸을 예상하였다.

이 책은 10군단, 특히 주력인 해병 제1사단이 자신의 몇 배나 달하는 적군을 물리치고 무사히 흥남으로 철군하는 처절한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논픽션이다. 저자 자신이 당시 해병대원으로 참전하였기에 자신의 청춘 시절의 잊지 못할 체험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전우들에 대한 눈물겨운 헌정이기도 하다.

당시 해병 제1사단의 후퇴작전(해병들 스스로는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고 주장한다)의 기적적인 성공은 한국전쟁의 전세에 두 가지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해병 제1사단이 무너지지 않고 퇴각함으로써 중국군에 대항할 전투력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또한 장진호로의 공격과 후퇴 도중에 맞닥트린 중국군 최소 6개 사단 이상의 전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일거에 남진하려던 중국군의 전략에 지장을 주었다. 서부전선의 중국군 공세만만으로도 서울을 재포기할 정도였으니 만약 해병 제1사단이 아니었으면 동부전선의 중국군마저 공세에 합류하여 그야말로 유엔군은 전쟁 자체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는 게 무리한 추측이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모든 해병 개인들이다. 그들은 최악의 순간에도 상관과 동료와 자기 자신을 믿었으며, 자신이 해병임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자부심은 특별한 데가 있다. 그것은 육군(소위 땅개라고 그들이 무시하는)에 대한 해병대의 우월성을 자각하는 데서 나온다. 그들의 모토는 Sempre Fidelis, 즉 언제나 충성으로서 적군에게 밀리는 것을 치욕으로 알았으며, 후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전장에서 비겁한 행동을 한 병사는 그들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였다.

평시의 인명 사고는 뉴스거리가 된다. 전쟁이 발발하면 더 이상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의 목숨도 숱하게 희생당하며, 적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적을 먼저 죽여야 내가 살아남으며 높이 평가받는다. 그래서 전쟁은 인간을 비이성적 존재로 만든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은 천명에 가까운 전사 내지 실종자가 발생하였는데, 중국군은 3만 명 가까이 전사하였다. 해병대의 혁혁한 전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한편 유엔군과 중국군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떠나 한국이라는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목숨을 바치게 만든 인류의 야만성이 새삼 두려워진다. 그들은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동토의 설국에서 동상에 몸의 감각을 잃어가면서 참호에서 무슨 상념을 품었을까?

전쟁은 개인적 감상을 용납지 않는다. 전쟁은 집단적 힘과 힘의 전면적 대결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의 결과에 환호하며, 전쟁 영웅을 우상시한다. 전쟁에서 영웅이란 무엇인가?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것에 다름 아니다. 평시에서는 사형에 처해지지만, 전시에서는 훈장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장에 선 병사 하나하나의 개인에 대해 무심하다. 오로지 전투의 결과, 전장의 성패가 주목받는다.

이 책은 장진호 전투에 참여한 개개인의 생생한 증언을 담고 있다. 장진호 전투는 전반적인 전략적 패배 속에서 이루어낸 일련의 전술적 승리(P.611)였다. 미국 대중들은 한국전쟁에 무심하다. 오죽하면 잊혀진 전쟁이겠는가. 설혹 관심 있는 이들도 병사들이 한국전에서 어떠한 고초를 겪었는지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선에서 그들의 심경은 무엇이었는지 무심하다.

저자는 장진호 전투가 가진 역사성과 동료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충성과 헌신을 되새긴다. 익명으로 취급된 병사들 하나하나를 역사 속의 살아 숨쉬는 존재로 부활시켜 마치 눈앞에서 그들이 떠들고 농담하다가도 불현 듯 소총을 부여잡고 눈발이 휘날리는 엄동설한에 능선으로 돌격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앞으로 전쟁 영화를 더 이상은 무심히 보지 못할 것 같다. 단순한 영화로 여겨지지 않고 전투원 개개인의 아픔이 내게 뼈저리게 다가온다.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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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후안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4
티르소.데.몰리나 지음, 전기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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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학사상 영원한 인간형으로 일컬어지는 돈 키호테, 햄릿, 파우스트, 그리고 돈 후안[또는 돈 환, 돈 주앙]. 그 돈 후안의 원형이 바로 이 작품 <돈 후안, 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이다. 돈 후안은 후대에 많은 오마쥬를 낳았다. 몰리에르, 푸쉬킨 등 문학적 후배는 물론 음악에 있어서도 모차르트와 리햐르트 쉬트라우스가 표제를 붙였다. 무수한 예술가와 독자를 끌어들인 작품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걸까?

돈 후안은 여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인물이다. 극중에서는 겨우(?) 4명의 여성을 유혹하고 비록 1명은 실패하고 마는데 그치지만, 유혹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위선의 가면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혹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냉혹함과 비열함마저 드러낸다.

작가는 돈 후안이 석상에 초대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결말을 통해 악덕을 저지른 불신자의 최후를 경고하는 종교적 도덕적 교훈을 표면적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원형적 인물 돈 후안의 캐릭터 창조에 있다.

돈 후안의 성적 방황은 자포자기와 체념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성적 유린을 통해 얻는 찰나적 쾌락에 의해서만 현세의 삶을 유지해 갈 에너지를 보급 받는다. 그는 세상에 별다른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감히 신에게 도전적 언사를 거듭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주위에서 그의 악행에 대한 신의 분노를 경고하는데 대한 반응이다.

“그래, 정말 오래도록 참아주는군!” (P.49)
“정말 오래도록 내버려 두시는군!” (P.52)
“죽어서까지 그렇습니까? 참으로 오래도록 봐주시는군!” (P.77)
“죽을 때 큰 상을 내리시려는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P.103)
“올 테면 오라지. 참 오래도록 나를 지켜봐 주시네!” (P.106)
“그나저나 당신도 참 인내심이 강하오.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P.120)

돈 후안은 신도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과 담대함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뻔뻔스러운 무모함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석상과 만찬을 나누며, 기사답게 석상의 무덤으로의 초대를 회피하지 않는다.

“두렵다는 단어를 썼소? 나한테? 당신이 지옥 자체라 해도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소이다.” (P.129)

그리고 돈 후안은 불신자로 죽어간다.

다른 측면에서 이 작품은 당대 여인들의 행태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기도 하다. 유혹된 네 명의 여인은 모두 당대의 도덕률에 비추어 볼 때 흠결을 지니고 있다. 이사벨라 공작부인은 정혼자 옥타비아인 줄 알고 몸을 허락하지만 이들은 아직 혼전이다. 티스베아는 신분의 차이와 남자의 겉과 속이 다른 속성을 알면서도 신분 상승의 욕구에 이를 눈감는다. 이 점에서는 아민타와 그녀의 아버지 가세노도 마찬가지다. 한편 유혹에 속지 않은 도냐 아나는 어떠한가? 그녀는 아버지의 의사에 반해 모타 후작에게 마음을 주고 심야에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돈 후안은 자신의 남성적 매력과 여성들의 허영심을 적절히 조합하여 유혹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불신자로 징계받은 자>는 전자보다 더 극적이다. 전자가 단일한 주인공의 단일한 성격으로 시종여일 일관하는데 반해 복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며 그들은 선과 악의 변신을 넘나든다. 이 점에서 평면적 구성의 전자에 비해 입체적인 구성미와 성격묘사가 크게 부각된다.

여기서는 신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수도사 파울로와, 세상의 온갖 악을 저지르지만 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무뢰한 엔리코가 처음부터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파울로가 선일 때 엔리코는 악이었으며, 파울로와 엔리코가 중간에 모두 악을 행하다가 마지막에 엔리코는 선으로 구원받지만 파울로는 끝내 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지옥불에 빠진다.

파울로와 엔리코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신학적 논점은 별로 관심이 없다.

엔리코는 한마디로 사회악(194면~199면에 걸친 엔리코 자신의 악행의 진술을 들어봐라)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연민과 사랑은 그가 절대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하느님이 저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란 저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조차 그분의 자비로움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P.254)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위대하시다. 그분의 자비하심에 경배를! 그 자비하심으로 나 구원받으리!” (P.277)

파울로는 10년간을 수도했지만 악마의 유혹에 빠져 타락자의 길로 들어선다. 신은 파울로의 타락을 방관하였다. 이는 그가 순간적으로 교만의 죄에 빠졌다는데 연유한다. 악마는 절묘하게 이 틈을 노렸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하느님을 믿기보다 의심하는 데 더 힘을 쏟고 있지.” (P.166)

흔들리는 어린 양을 악마에게 방치하기 보다는 천사의 보살핌으로 어루만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면 엔리코와는 달리 어차피 파울로는 악에 넘어갈 운명이었던가? 악마의 유혹에 비해 꼬마 목동은 너무 약하다.

“의로웠지만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았던 이를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나는 세상의 재앙이 될 겁니다.” (P.204)

“주님, 제가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주님을 벌써 저를 심판하셨으니, 이제 다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렵니다.” (P.205)

나는 여기서 파울로라는 인물에 동정심을 품는다. 그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흔들리기 쉬운 보다 인간적인, 어떤 측면에서는 보다 근대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신성과 이성 사이의 흔들림은 종교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종교에서는 오히려 무지하지만 신성에 대한 몰입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파울로에서 나와 멀지않은 고독한 현대인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티르소 데 몰리나의 뛰어난 점은 탁월한 성격 창조에 있다고 하겠다. 돈 후안과 파울로라는 대조적인 불멸의 캐릭터. 그는 진정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에서 로페 데 베가와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중간을 잇는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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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구) 문지 스펙트럼 11
작자 미상,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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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는 고대 영어로 씌어진 최초의 장시로서 고대 스칸디나비아를 배경으로 베오울프라는 한 영웅의 일대기를 기술한 영웅 서사시이다. 흔히 그렇듯 작자는 미상이며, 10세기 이전에 문자화되었다.

지리적 배경이 비교적 생소한 북유럽 지역이므로 등장인물과 계보, 괴물마저도 낯설다. 무엇보다도 아직 기독교에 완전히 융화되기 이전 토속적 세계관과 문화를 접할 수 있다. 3천행이 넘어가는 대작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고대 영웅을 다룬 소설처럼 술술 읽혀나간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도 후에 영화화되었다고 하므로 기회가 닿으면 한 번 감상하리라.

각설하고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와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어 기분 좋은 생소함을 안겨주는데, 주인공 베오울프는 영웅적 업적 외에도 외에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현재의 스웨덴 남부와 핀란드 남부 지역의 예이츠 세 왕국의 물고물리는 치열한 전쟁과 은원 관계가 작품의 깊이와 폭을 더해주고 있다.

베오울프는 예이츠 출신의 용사이다. 덴마크 왕국에 그렌델이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잡아먹지만 아무도 이를 처치하지 못한다. 베오울프는 용사들과 함께 덴마크로 건너가 그렌델을 해치운다. 무기가 아무 소용이 없자 맨손으로 그를 잡아 죽인 것이다. 또한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그 어미마저 괴물들의 호수로 들어가서 해치운다.

여기서 이야기는 오십년을 훌쩍 넘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예이츠의 왕이 된 베오울프는 평화롭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데 땅속에 잠자고 있던 용이 깨어나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다. 노령의 베오울프는 죽음을 각오하고 용의 동굴에 뛰어들고 젊은 용사 위글라프의 도움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용을 죽이는데 성공하나 자신도 치명상을 입고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고대 영웅들의 위업과 그를 기리는 문장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어, 문학사적 의의 외에 현대의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 <베오울프>는 좀 다르다. 그의 영웅으로서의 업적은 인간을 상대로 한 참혹한 전쟁에서가 아니라 인간을 괴롭히는 괴물을 소탕한데서 비롯한다. 또한 그의 최후 역시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는 용을 쓰러뜨리는 싸움의 결과이다. 그는 휴머니즘적 영웅인 셈이다.

또한 통상 화려하고 당당한 찬미로 끝나는 영웅 이야기와는 다르게 베오울프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젊은 시절이라면 패기와 용기, 자신감과 체력 등 명예를 위하여 모험을 무릅쓰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고령의 늙은 영웅, 그에게는 괴물과 싸우는 게 버겁다. 승리에 대한 확신보다도 싸움의 패배, 즉 죽음에 대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의 마음은 슬펐고 불안했으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노라. 그 고령의 왕이 맞이해야만 하는 운명은 그에게 바짝 다가와 영혼의 보고를 찾아 육신에서 그의 생명을 떼어놓으려 했노라. 이제 군주의 생명은 육체에 오랫동안 묶여 있을 수가 없었노라.” (P.120)

그럼에도 그는 덴마크의 흐로드가르 왕과는 다르다. 그는 목숨을 아끼고자 운명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무릅쓴 고독한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명예는 죽음과 더불어 스러지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곳곳에 기독교의 자취가 드러나 있지만, 이것은 표피에만 머물고 있다. 즉 작품의 온전한 보존을 위하여 종교의 외피를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가혹한 검열에도 버티어 나갈 수 있으므로. 한 꺼풀 벗겨보면 기독교의 세례 이전 영국인들의 선조인 고대 스칸디나비아인들의 거칠고 생생한 호흡을 가감 없이 체험할 수 있다.

북유럽에는 흔히 알려진 그리스 로마신화 체계와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신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들의 방대한 신화 체계는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일부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우리들에게 그들은 익숙하지 않다. 이번 참에 북구의 신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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