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아이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진일상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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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금년으로 서거 200주년을 맞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모음집이다. 짧은 생애 동안에 쓴 8편이 모두 실려 있다.

- 미하엘 콜하스
- O... 후작 부인
- 칠레의 지진
-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
- 로카르노의 거지 노파
- 버려진 아이
-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 결투

일독 후 클라이스트의 작품 특징에 대한 섣부른 상념은 사건 중심의 서술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묘사가 생략되어 있거나 극히 간략하다. 오직 끊임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작품전개가 이루어진다.

더구나 단편에 장편 분량의 사건이 압축되어 있다. 따라서 작품의 극적 박진감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긴박한 사건전개로 팍팍하여 여유를 갖기 어렵게 한다. 또한 배경묘사 및 심리묘사 등의 부재로 사건의 미묘한 뉘앙스나 암시 등을 느끼기 힘들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골조로만 이루어진 집 같다고나 할까. 그의 글에서 풍윤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클라이스트는 사건 구성과 인물 행동도 매우 극단적이다. 살인, 방화, 교수형, 지진, 타살, 강간 등 상상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에 인물들을 몰아넣는다. 인간성의 극단적이고 어두운 면모에 대한 집착, 그의 작품은 결코 밝고 따스하지 않다. 이러한 한계상황의 설정은 인간의 본질적 면모(정신, 행동 등)는 이 순간 드러난다고 생각한 탓일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실존주의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만하다.

대표작 <미하일 콜하스>는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정의감이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고 가정과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과정이 여실히 나타나있다.

“그러나 정의감은 콜하스를 강도와 살인자로 만들었다.” (P.7)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당한 모욕에 대해 명예를 회복하고, 미래의 시민들에게 질서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P.16)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소. 발로 짓밟혀야 한다면 인간이기보다는 차라리 개가 되겠소.” (P.32)

융커에 대한 공격 선언은 점증하는 시민의식과 체제 반동적 귀족제도 간의 갈등 심화 및 폭발을 보여주며, 미흡하나마 정의가 실현되고 자신의 권리가 회복되었다고 믿기에 콜하스는 행복한 심정으로 단두대에 오른다.

현재의 시각에서 콜하스는 황제-제후에 대한 태생적 의존과 기존 체제의 틀 내에 안주하였다는 한계를 지니지만, 당대에 그의 급진성은 많은 주목을 받을 만하다.

<O... 후작 부인>은 여주인공의 고독한 양심이 인상적이다. 세상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순결한 그녀는 겸손하지만 의연하게 비난에 대처하며 운명적 삶을 감수하려고 한다. 섣부른 자결을 하지 않고 꿋꿋함으로 버티며, F...백작의 청혼을 거부하는 그녀에게서 20세기 이후 진취적 여성상을 예감할 수 있다.

<칠레의 지진>은 인간성의 연약성과 이중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헤로니모의 자살 결심과 이어진 대지진 후 생의 기쁨 표현은 가식 없는 인간성의 본성이다. 한편 압도적 재난과 불행의 결과로 달라진 지진 후 사람들의 태도는 나중에 부정적 집단정신의 처참한 표출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특히 교회와 광장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비극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야수성으로, 인간정신의 부정적 극한이다.

<버려진 아이>에서 니콜로의 추악함에 치를 떨면서도 참회를 거부하고 지옥에 가서라도 복수를 하겠다는 피아치에게 공감도 비난도 할 수 없는 것은 인간성의 불완전성과, 이성과 진실에 대한 작가의 불확실성을 인식하게 한다.

<산토도밍고 섬의 약혼>과 <성 세실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는 어떠한가. <버려진 아이>에서 피아치를 통해 형식적 종교의례를 거부한 작가는 일변하여 오히려 신의 [무정한] 섭리를 드러낸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처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선악의 경계와 무관하지만 인간은 대항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것이 구스타프가 토니에게 총을 쏜 원인이며, 외관상 중상을 입은 프리드리히가 멀쩡하고 가벼운 상처를 입은 야코프 백작이 종양으로 죽어가게 된 근본적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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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팽 양 열림원 이삭줍기 18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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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걸작이자 마이너리티의 명작.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론가로 저명한 테오필 고티에의 존재는 내게 있어 우선적으로 제라르 드 네르발의 친우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서문과 소설로 구분되는데, 서문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갖고 있다.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던 것이다. 불과 23세의 젊은 고티에는 나폴레옹 이후 왕정복고 시절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공리주의자들의 예술 검열을 단호히 거부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P.41)

고티에의 공리적 비평가들에 대한 공격은 화려하고 현란하며 재기발랄하다. 서문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보다도 고티에의 대담하며 재치 있고 유려한 문체에 매혹된다. 엄격하고 정연한 이성적 논리를 찾지 말자. 그것은 고티에의 영역을 벗어난다. 고티에는 비판의 화살마저도 아름답고 화려한 세공과 치장을 아끼지 않는다.

서문과 소설 <모팽 양>이 결합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비록 <모팽 양>은 서문의 정신을 십분 발휘하였지만 서문을 의식하고 지은 글은 아니다. 이 작품은 고티에의 평소 예술과 문학에 대한 견해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몇 가지 초점을 생각해본다.

먼저 관음증의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즐거움이다. <모팽 양>은 도덕 교사나 윤리 교사의 시각에서 볼 때 썩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주인공 달베르의 애인을 갖고자 하는 열망과 아쉬운 대로 로제트와 지내는 정사의 나날이 그러하며, 또한 테오도르 즉, 모팽 양의 남장 차림과 아름다운 미모로 로제트의 열렬한 애정의 육탄공세에 시달리는 모습이 줄타기를 하듯 펼쳐진다. 게다가 테오도르의 시각으로 여성이 보는 남성, 여성이 보는 여성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것을 여과 없이 보게 된다. 마지막의 여성으로 돌아온 테오도르와 달베르의 정사 장면은 아름답고 관능적이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남장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은 외형은 어찌되었든 본질에서 있어서는 여성 동성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요즘이야 성적 소수자들의 커밍아웃 목소리가 커지면서 덜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는 대상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한층 더 음지에 머물던 소재가 아닌가. 이 작품에는 두 가지의 동성애적 성향을 보여준다. 하나는 테오도르(외관상 남성)에 대한 달베르의 남성 동성애적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테오도르(실제로는 여성)에 대한 로제트의 여성 동성애적 사랑이다. 후자의 경우 물론 로제트는 한치도 모르고 있지만, 테오도르는 이를 의식하고 있으며 가벼운 부분에서는 받아들여 즐기기도 하며, 외부적 방해가 없었으면 선을 넘어갔을 수도 있다. 더구나 마지막에서 테오도르가 떠나기 전 로제트의 침대가 흐트러져 있었다는 표현은 매우 복합적이다.

남성과 여성은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온 사람들로 사고와 행동양식에서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남성과 남성간, 남성과 여성간, 여성과 여성간에 주고받는 사상과 행태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성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연인과 부부간이더라도 완전한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남장 여성 테오도르가 바라보고 겪게 되는 남성 사회와 남성들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은 여성에게는 충격이며 그들이 여성에게 얼마나 가식적으로 대하는가를 알 수 있게 되며, 외형상 우아하고 정중한 남성일지라도 돌아서서는 바로 술집여자를 품에 안을 정도로 흐트러지고 방만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여성에게 남성은 결코 아름다운 존재가 못 된다. 이것은 남성의 본질에 대한 여성주의의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분석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고티에 자신도 예술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식과 문체, 표현과 수사 등에서 최고로 절차탁마함으로써 더더욱 Z을 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티에 작품은 매우 아름답고 한편의 아름다운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바라보는 심미안적 즐거움과 호사를 누리는 기쁨을 제공한다. 비평가가 아닌 이상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아름다움을 제쳐놓고 분석을 하려는 미련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티에의 작품은 주제의 심오함과 진지함을 고민하지 말자. 고티에의 미덕은 독자를 아찔하게 하는 빼어난 표현능력이다. 그렇게 보면 아름다움에 유달리 집착하는 달베르(P.181)는 곧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테오도르가 남자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는 여자와 같은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갖가지 직업의 남성을 풍자적으로 야유하는 장면(P.424)은 신랄한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테오도르가 달베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바치는 연유가 되는 공통점이다.

이 작품은 결코 국내에서 환영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문학계와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깊은 감동과 심오한 사상을 기대한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유달리 사랑받는 것이며, 주제의 진지함 대신에 구성의 경쾌함, 문체와 묘사의 탁월함, 재기와 풍자의 신랄함을 주특기로 삼는 작가가 저평가되는 것이다. 아, 물론 후자의 경우 번역상의 난점이 크다는 현실적 장벽도 무시 못 한다.

테오필 고티에를 모르는 이, 고티에를 알지만 이론가로만 알고 있는 이,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관심 있는 이,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진부하지 않으며 색다른 문학작품을 읽고 싶은 이의 일독을 권한다.

*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대체적 얄팍함에 익숙하였다면, 섣불리 이 책을 펼쳐들면 큰코 다친다. 판형도 제대로고, 분량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고티에의 글은 속도감과 전혀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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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과 비르지니 - 그린북스 92 그린북스 92
생 피에르 지음 / 청목(청목사) /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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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폴과 비르지니>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접하다가 라마르틴의 <그라지엘라>에 비중 있게 작품내용이 소개되면서 구체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내가 가이드북으로 삼고 있는 <세계문학사 작은사전>(가람기획)에도 작가와 작품소개가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번역본은 참으로 구하기가 어려웠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1960년대 박영사 판(이헌구/이상로 공역)과 1980년대 청목사 판(김종건 역)이 전부다. 하지만 둘 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되어 시중서점에서 구하기 어려웠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한동안 끙끙대다가 중고서점을 통해 간신히 입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청소년용으로 기획된 청목사 판이다.

사연이 남달랐던 만큼 무엇보다 작품내용이 궁금하였다. 비극적 결말의 순결한 사랑의 명작으로 세간에 알려진 평가가 정말로 적정한지...

작품은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 상의 당시 프랑스 식민지 프랑스 섬(현재의 모리셔스)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문명의 손때가 덜 탄 열대의 섬, 이는 단순한 지역적 배경이 아니라 폴과 비르지니의 순수한 사랑이 잉태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작가는 섬의 자연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일찍이 이 섬의 기행기를 썼던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다.

폴과 비르지니의 어머니들은 각기 프랑스 본토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자의반타의반으로 섬에 흘러들어왔다. 주류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당대 사회의 패배자이며 주변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상사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들과 자녀들의 삶을 꾸려나간다.

생-피에르는 계몽사상가 루소에게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인위와 겉치레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작품 내내 시종일관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화자인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긍정적 인간상으로 그려진 반면, 비르지니의 어머니의 백모로 대변되는 프랑스 본국의 사람은 부정적 인간상으로 대비된다.

작품 전반부는 섬에서의 행복한 목가적 생활에 대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찬미가다. 그 속에서 폴과 비르지니의 사랑은 가족에서 연인의 감정으로 서서히 자라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소박하며 아름다운 삶을 그린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밝고 따뜻하며 때로는 감미롭기조차 하다.

작품의 그림자는 비르지니가 프랑스로 떠나게 되면서이다. 부유한 백모에게 수년간 머물며 유산 상속을 받은 후 폴과 결혼하여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주변에서 권유한 결과다. 그 후 작품의 분위기는 급격히 어둡고 무거워진다. 프랑스로 쫓아가고자 하는 폴과 이를 만류하는 화자 간의 기나긴 대화는 세상사의 가식과 허위, 모순, 부패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비르지니가 본국에서 결코 순탄하고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리라는 것의 암시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진지한 대화이므로 오히려 전반적 작품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느낌마저 든다.

조금씩 암시를 드리우며 불길하게 예고된 결말은 마침내 비르지니가 탄 배가 폭풍우로 인하여 섬 앞에서 좌초하고, 비르지니가 거치적거리는 옷을 벗고 구조되기를 거부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본국에서 몇 년간 교육의 결과는 그녀에게 문명인의 수치심을 목숨보다 중시하도록 만들었다.

비르지니와 가족의 비극은 그들이 그릇된 문명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순수한 자연성 회복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한다. 폴과 비르지니가 노동을 하며 땀 흘리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만족하였다면 눈물을 웃음이 대신하였을 것이다.

이미 세태의 먼지에 물들어 삶과 사랑의 순수성에 쉽게 감동하지 못하지만 이 작품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울러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제대로 출판되지 않는 현실이 씁쓸하다. 영어판 중역이 아니라 프랑스어 원전으로 반듯한 새 번역본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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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물고기
J.H.B. 드생 피에르 지음, 채운정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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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는 <인도의 초가집[오두막]>이며, 1790년 작이다. 이 책도 후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재출간 되었을 때는 <인도의 초가집>이라는 원제로 정정하였다.

생-피에르는 <폴과 비르지니>라는 순결한 애정소설을 대표작으로 남긴 작가로 서양에서는 꽤 유명하다. 물론 국내에서는 아는 이가 별로 없지만. <폴과 비르지니>를 읽기 위한 전초 단계로 이 책을 읽는다. 시중에서는 구판과 신판이 모두 절판 상태이다.

번역자의 약력과 겉표지 상단의 독일어 표기를 통해 이 책이 프랑스어 원전 번역이 아니라 독일어 판본의 번역본임을 알 수 있다. 출판 당시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현재는 거의 잊혀진 작품이라고 작품 해설에서 알려주고 있다. 이 경우는 원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번역하여 출판해 준다는 자체에 무조건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

비교적 간단한 구성의 작품이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도 명료하다. 영국 왕립 학회에서 진리 탐구를 위하여 파견한 한 철학자가 인도의 최고 브라만 승려를 방문하지만 실망에 싸여 돌아오던 중 폭우를 만나 우연히 몸을 피한 파리아 계급, 즉 불가촉천민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담화를 나누다가 진정한 진리와 행복의 길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이국 취향[인도]을 배경에 깔고, 인위와 허식을 배격하고 자연과 순수를 예찬하는 정신을 높게 옹호하고 있다. 그가 브라만 승려계급의 아집과 독선, 그리고 허식을 간결하지만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이에 바탕을 둔다.

반면, 파리아 계급의 한 남자를 통해 그가 찾고자 한 것, 즉 “어떻게 해야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과연 어디서 그 진리를 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P.37)에 대한 해답을 깨우친다.

“인간은 순수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 진리를 자연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낸 그 진리는 오로지 착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말할 일입니다.” (P.129)

파리아 사내는 자신의 타고난 불행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듣고 본 황제와 귀족들의 자신에 대한 노예가 되는 삶을 통해서 자유롭고 소박한 자연 속 삶의 미덕을 발견하였다.

“저는 그래서 자연보다도 더 현명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정한 법칙을 벗어나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지 않았죠.” (P.104)

생-피에르가 글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대체적으로 동양적 가치관에서 참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지만, 이것만이 진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세련된 사교계의 취향이 당대를 휩쓸던 서구에서는 미지의 신비스런 동양의 것은 감성적 호기심과 아울러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파리아 사내의 가치관이 보통의 전통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우리 선조들도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았던가.

오히려 작가의 도덕적 훈육보다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로 받아들여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흐뭇하게 하는 정서적 진정 효과를 만끽하면 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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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운정 2011-04-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누군지 정말 글 잘써놨네요
 
나체즈 족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366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지음, 문미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유의할 점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한다. 먼저 이 책은 원작의 요약본이다. 편집자 일러두기에 따르면 원전의 약 34%를 발췌 번역하였다. 따라서 원전과 같은 문학적 흐름과 향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다만 국내 초역인 이 작품의 개괄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그쳐야 한다.

다음으로 이 책 단독으로 읽어도 괜찮지만, 가능하면 <아탈라>와 <르네>도 같이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두 작품은 작품의 독자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나체즈 족>의 일부이기도 하며 배경과 사건과 인물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으로는 완전한 이해에 부족하다.

나체즈 족은 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 주를 중심으로 미시시피 강 동안 중남부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인디언으로서 프랑스 군의 탄압으로 종족이 몰락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 중이던 샤토브리앙은 나체즈 족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명작을 포함한 대작을 구성하였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이국취미의 발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조국 프랑스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으로 몰락하는 힘없는 피압박민족에 대한 동정심과 공감일 수도 있다.

<르네>에서는 소홀히 취급되었던 나체즈 족에 정착한 르네의 신대륙 생활이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르네의 우울과 고뇌가 <르네>에 못지않게 작품 전반을 휘감고 있어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도자라는 작가의 명성을 헛되지 않게 하고 있다.

“르네는 무료한 시선으로 자신의 은둔 생활을 둘러보았다. 그의 행복은 참회를 닮았다. 그는 사막과 한 여인과 자유를 원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무엇인가가 그의 소유를 망치고 있었다.” (P.85)

“나는 삶이 지겹습니다. 나를 삼킬 듯한 권태에 늘 괴로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로워하는 것들에 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나는 기쁨이 없는 덕망 있는 자입니다...나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영원히 잊혀진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P.122)

자신에 대한 우투가미즈의 우정을 보답하고자 셀루타와 결혼하지만 그는 아무런 열정도 기쁨도 갖지 못한다. 그의 마음속에 뿌리깊은 슬픔과 우울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이 아멜리와의 이루어지지 못할 근친상간적 연정의 작용인가 아니면 프랑스 대혁명 전후 당대에 떠돌던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에 대한 작가 자신의 예민한 감성의 기인인가.

작품의 결말은 시사적이다. 르네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나체즈 족은 근거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악인 옹두레는 우투가미즈에 의해 처단된다. 르네는 그 불신앙의 처벌을 받은 것이며, 옹두레는 악의 대가를 받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나체즈 족의 불운과 셀루타의 불행은 무슨 잘못인가? 역시 불신앙과 서양에 대한 불예속의 과오의 대가인가.

이 작품은 한 고독한 프랑스인과 불운한 인디언 종족에 대한 웅장한 비극적 일대 서사시이다. 이 작품이 후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대는 패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탈라>와 <르네>가 제대로 포함된 완역본을 읽을 수 있다면 샤토브리앙이 나체즈 족의 운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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