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4세 2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에서 핫스퍼 일당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헨리 4세가 아직 반란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여기 2부에서 헨리 왕과 왕자들, 즉 헨리 왕세자와 존 왕자는 각기 반란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전장에 나선다. 그리고 존 폴스타프다. 1부에서 헨리 왕세자와 존 경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물론 왕세자는 자신의 행위가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2부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양자 사이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퍼시 부인) 핫스퍼의 이름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 방어력이 없던 곳에서, 그렇게 아버님은 그를 버렸습니다. (P.59, 23)

 

핫스퍼의 패배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반란세력의 성패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아버지 노섬벌랜드 백작과, 요크 대주교, 헤이스팅스 경이 핫스퍼에 합류하지 않은 까닭은 극중에서 분명치 않다. 제아무리 용맹하더라도 중과부적은 당할 수 없는 법, 모튼과 퍼시 부인이 비난 조로 말했듯 반란세력 최고의 전사를 방치한 셈이나 다를 바 없었다. 노섬벌랜드 백작은 후에 요크 대주교와 헤이스팅스 경에게도 마찬가지로 합류하지 않는다. 반란세력의 내부분열은 결국 헨리 왕이 각개격파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니 마찬가지. 요크 대주교와 헤이스팅스 경은 세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자신들의 사면과 요구 사항의 수용을 조건으로 항복한다. 마뜩잖아하는 모브레이 경을 다독인 결과, 그들에게 체포와 처형이 눈앞에서 기다린다. 웨스트모얼랜드 경과 존 왕자를 기만술을 썼다는 연유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전쟁은 선악과 시비로 판단할 수 없는 현상이다.

 

존 폴스타프 경의 광기 어린 난잡한 행동은 2부에서 한층 심하다. 폴스타프에게 해리 왕세자는 친구라기보다 가치 있는 어수룩한 이용대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왕세자가 없는 곳에서 그에 대한 무시와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 폴스타프의 위선은 미세스 퀴클리와의 허위 결혼 약속에서도 드러나며, 원초적 욕망을 본능적으로 좇는 모습은 창녀 티어시트와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뇌물을 받고 징집 대상자를 바꾸는 장면이라든가, 어리숙한 섈로우에게 돈을 뜯어대는 행위 등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에서도 그의 부도덕성과 위법성은 더욱 강화된다. 작가는 이런 폴스타프와 어울리는 왕세자의 행동이 본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워릭 백작의 옹호를 통해 독자에게 보여준다.

 

(워릭) 왕세자께서는 아주 적당한 시기 / 내팽개치실 겁니다 그 추종자들을, 그리고 그들의 기억은 / 살아 있는 표본 혹은 잣대로 되는 겁니다. / 그것으로 왕세자께서 다른 이들의 삶을 평가하시는, / 전화위복이 따로 없을 겁니다. (P.129, 43)

 

어쨌든 우리는 2부의 존 폴스타프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1부에서 참신하게 다가왔던 그의 악행과 파격적 면모에 비해 2부의 그는 특별함 없는 망나니에 불과하다. 사람은 자극에 익숙해지기 쉬운 탓인가, 존 경은 달라진 게 없건만 폴스타프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초심과 같지 않다.

 

(해리 왕세자) 내가 이 쥐젖 같은 자[폴스타프]한테 곁을 허락한 건 맞는데, 애견처럼 친하게 굴게 해 주었단 말이지, 그랬더니 이자가 아예 그 자리를 뭉개고 드는군, 뭐라고 썼나 한번 보게. (P.53, 22)

 

2부에서 존 폴스타프를 향한 해리 왕세자의 감정 변화가 두드러지게 감지된다. 폴스타프 못지않게 해리 왕세자 역시 그를 향한 자신의 행위가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표출한다. 왕세자 또한 폴스타프를 이용해 먹은 셈이다. 자신의 욕망 실현과 훗날 개과천선의 극적인 기대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내심을 이미 전환한 2부에서 존 경을 향한 왕세자의 인식은 차갑기 그지없다. 특히 왕이 된 해리에게 출세를 기대하고 열렬히 달려온 폴스타프를 향한 해리 왕의 대응은 존 경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모멸감마저 느낄 정도다.

 

(해리 왕) 난 당신을 모른다, 늙은이. 기도나 하거라. / 정말 꼴불견이구나, 백발의 바보 광대라니! / 오랫동안 꿈을 꾸었지, 이런 따위 인간, / 이토록 과잉 팽창한, 이토록 늙고, 이토록 불경한 인간 꿈을, /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정말 경멸한다 나의 꿈을. (P.168, 55)

 

해리 왕세자와의 관계에 있어 폴스타프와 대조적인 인물이 있으니 수석 재판관이다. 그는 시종 폴스타프와 왕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의 법률 시행에 있어 왕세자는 특별 대상이 아니다. 솔직히 수석 재판관의 판단과 태도는 전적으로 옳다. 따라서 해리 왕세자가 해리 왕으로 즉위한 시점에서 가장 안타까움과 동정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수석 재판관이다. 해리 왕의 동생인 존 왕자와 클래런스 공작은 수석 재판관에 동정을 표한다. 그럼에도 수석 재판관은 의연하다. 자신의 행동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직위에 충실하고 왕의 제도를 준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명한다. 이쯤에서 극적인 흐름과 대중의 기호에 부응하려면 해리 왕세자의 대승적 포용이 필요하다.

 

(해리 왕세자) 그 보답으로 나는 진정 맡기겠소 경의 손에 / 때 묻지 않은 칼, 경께서 익히 지니셨던 그것을, / 이 점을 상기시키며, 경께서 바로 그것을, / 나에게 겨눴던 바로 그 용감하고, 정의롭고, / 불편부당한 정신으로 써 달라는 것. 내 손을 잡으시오. (P.155, 52)

 

이 작품은 후속작에 대한 암시를 가리키는 대목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앞서 읽은 <헨리 6> 삼부작에 따르면 프랑스에 대한 대대적 정복전을 감행한 왕이 바로 헨리 5세다. 헨리 5세의 선택은 단순한 계기와 즉흥적 충동이 아니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 헨리 4세의 충고와 왕의 열정을 이끌어낸 인물이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헨리 왕) 그러니, 나의 해리, / 너는 앞으로 들썩이는 마음들을 바쁘게 만들도록 하라, / 외국과의 분쟁으로, 그러면 부담해야 할 군사 작전이 / 지워 버릴 것이다, 예전의 기억들을. (P.142, 43)

 

(존 왕자) 내 내기를 걸겠소, 올해가 다 가기 전에, / 우리는 가져가게 됩니다, 우리 내전의 칼과 토박이 열정을 / 멀리 프랑스까지. 새 한 마리 그렇게 노래하는 것 내가 들었는데, / 그 음악이, 내 생각에, 국왕 마음에 든 듯하오. (P.171, 55)

 

이 작품은 전 5막 구성에 앞뒤로 <도입><에필로그>가 곁들인 형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에필로그는 차기작에서 폴스타프의 장래를 예고하고 있는데, 그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아래와 같이.

 

여러분께서 뚱뚱한 고깃덩어리에 너무 물리신 게 아니라면, 우리의 겸손한 작가는 존 경을 계속 등장시키고, 프랑스 미인 카트린느로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릴 겁니다. 그 프랑스에서, 제가 아는 바로는, 폴스타프가 죽게 되지요 땀을 흘리는 성병으로-여러분의 혹평으로 그가 이미 살해된 게 아니라면. (P.173)

 

하지만 후속작인 <헨리 5>에서 폴스타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전언을 통해 극중에 알려질 뿐이다. <에필로그>와 실제 후속작 간의 간극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작가는 애초 폴스타프를 한 번 더 써먹을 생각이었음은 분명하다. 1부의 열광적 호응과는 달리 예상보다 2부에서 그에 대한 반응이 썩 좋지 않자 후속작에서 아예 등장시키지 않았던 게 아닐까. 셰익스피어 또한 존 폴스타프의 인물과 역할이 2부에서 애매하게 변질되었음을 깨달았으리라. 해리 왕세자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냉엄한 반응이야말로 존 폴스타프가 더는 생존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원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헨리 4세 1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초 계획에 따르면 <리처드 2><존 왕>을 읽어야 하는데, 전자는 도서관에 마침 책이 없어서 빌릴 수 없었고, 후자는 시대와 맥락에서 후속작과 동떨어져 있기에 <헨리 4> 2부작을 먼저 읽기로 한다.

 

이 작품은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반대파와 치른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표제는 분명 <헨리 4>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헨리 4세가 아니다. 헨리 4세의 왕세자 해리가 공식적 주인공이며, 그와 대척 관계에 놓인 핫스퍼가 안티 인물로 나온다. 무엇보다 이 희곡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일무이할 정도로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의 형상이다.

 

폴스타프라는 캐릭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오로지 <헨리 4> 2부작과 같은 시기에 쓴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만 등장한다. ‘이라는 호칭이 붙으므로 분명 귀족 계급이라고 해야겠지만, 전혀 귀족답지 않게 배불뚝이 뚱뚱이에 애주가며, 상스럽고 탐욕이 많으며 비겁한 가운데 거짓말도 능수능란할뿐더러 강도질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법과 정의에 대한 감수성도 떨어진다.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하다.

 

(해리 왕세자) 폴스타프가 죽도록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 걸어가면서 야윈 대지에 기름을 뚝뚝 떨어트려 주는군. /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그렇지, 불쌍하기도 하이. (P.51, 23)

 

(폴스타프) 아다시피 아담은 순결한 세상에서 타락했어, 그런데 불쌍한 보통 남자 폴스타프더러 악행의 시대에 어쩌라는 게야? 자네 보다시피 내가 다른 사람보다 살이 더 많아, 그러니 더 유혹에 약하단 말이지. (P.113-114, 33)

 

희극적인 점을 제외한다면 사회악에 가까운 인물이겠지만, 작가가 이 인물에 쏟는 정성과 애정은 각별하다. <헨리 4>는 기실 국왕군과 반란군의 한바탕 격돌이라는 주된 사건보다도 왕세자 해리와 폴스타프, 그리고 포인즈, 바돌프, 개즈힐 등의 패거리들이 벌이는 우당탕이 더욱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폴스타프 같은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의 왕궁 광대와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즉 작품 자체의 진지함에 가벼운 파문과 일탈을 줌으로써 긴장을 풀고 해방감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또한 극중 인물들이 드러내기 어려운 권력자를 향한 직언과 희롱 등을 마음껏 배출함으로써 관객에 일종의 쾌감도 선사한다. 광대의 농담 속에 일말의 진실과 예언이 포함되었음도 물론이다. 폴스타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처신하며 심지어 자신과 어울리는 왕세자에 대해서도 마구 험담을 늘어놓는다. 5막에서 폴스타프는 해리 왕세자가 죽인 핫스퍼를 마치 자신이 죽인 양 거짓과 조작을 하지만, 해리 왕세자는 오히려 그에게 너그럽게 대한다. 그런 폴스타프가 불쑥 내뱉는 진실을 담은 대사는, 비록 계기가 불순하지만 깊은 함의를 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폴스타프) 명예가 뭐지? 하나의 단어. 명예라는 단어에 뭐가 들었지? 누가 명예를 지니고 있지? 수요일날 죽은 자. 그가 명예를 느끼나? 아냐. 그가 명예를 듣냐? 아냐. 그렇다면 명예는 감지가 안 되는 건가? 그래, 죽은 자한테는. 하지만 명예가 산 자와 함께 살 수 있잖은가? 아니지. 왜냐고? 중상모략이 그걸 용납할 리 없거든. 그러므로 난 명예 따위 안 하겠어. 명예란 문장 새긴 장례식 방패에 불과해. 그리고 나의 교리문답은 거기서 끝. (P.146, 51)

 

철저히 현세적이고 쾌락 지상주의인 폴스타프와 해리 왕세자의 작당은 태생에서 이미 시한부임을 예감케 한다. 해리 왕세자의 방종과 일탈은 그의 본성적 요인보다는 특정한 의도를 지닌 계획적 행위에 가깝다. 헨리 왕은 왕세자 해리에 실망하며 그가 명성 높은 핫스퍼와 차라리 바뀌었음을 바랄 정도이지만, 관객은 왕세자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이미 알아차린다.

 

(해리 왕세자) 침침한 배경의 찬란한 금속처럼, / 나의 개과천선은, 내 잘못을 배경으로, / 보다 더 훌륭해 보이고 더 많은 시선을 끌 것이다 / 돋보이게 하는 그 무엇이 없을 경우보다. (P.22, 12)

 

3막에서 해리 왕세자는 부왕 앞에서 왕세자다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맹세한다. 무용으로 명성 높은 핫스퍼를 자신이 대적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그가 단지 방탕할 나날을 보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제5막에서 해리는 핫스퍼와 맞닥뜨리며 결투를 벌여 자신의 약속을 이행한다.

 

앞서 읽은 <헨리 6> 삼부작과 <리처드 3>에서 만개했던 장미전쟁의 씨앗이 이 작품에서 배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왕세자의 부왕인 헨리 왕, 즉 헨리 4세가 리처드 3세를 추방하고 왕위를 빼앗음으로써 랭커스터가가 왕권을 잡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로 선포된 모티머는 졸지에 반란세력이 되었고, 왕에 대한 우스터, 핫스퍼, 노섬벌랜드 백작 등의 반대파가 헨리 왕을 증오함을 극중에서 찾을 수 있다. 훗날 요크 공작이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헨리 6세에게 반항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핫스퍼) 리처드, 그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장미를 꺾고 / 이 가시 관목, 이 자벌레 해충 같은 볼링브루크를 심었다는 얘기로? (P.31, 13)

 

이 작품은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왕의 군대가 반란군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승전이 사태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 게, 아직도 막강한 반대세력이 잔존하고 있다. 이들을 처리해야 비로소 왕권이 단단히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헨리 왕의 일장 연설은 이를 나타낸다. 여기서 잠깐,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핫스퍼, 전투 후 체포되어 처형당한 우스터 등은 어떤 인물인가. 그들은 헨리 왕이 리처드 2세를 내쫓고 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일등공신이다. 반대파가 처음부터 헨리 왕에게 저항의 기치를 들어 올린 게 아니다.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려는 헨리 왕,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귀족층. 일시적으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합치할 수 없는 두 세력의 대결, 그것은 세계사를 통틀어 항상 반복되는 현상이다.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될 때까지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처드 3세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리처드 3세 왕의 비극

 

이 희곡은 연대기적으로 <헨리 6> 삼부작에 이어진다.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른 맏형 에드워드 4, 그의 치세도 왕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불안감이 조성된다. 아직 후계를 이은 왕자는 나이 어린데 왕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인척 세력의 전횡으로 기존 중신들과 갈등이 심화한다. 가슴속 야심을 깊이 숨긴 채 은인자중하던 리처드 글로스터는 서서히 야욕을 표면화시키고.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조선 왕조의 문종과 단종, 그리고 수양대군을 떠오르게 하는 유사한 상황이다. 단종은 보위에 오르지만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어 비극적 최후를 마치고, 수양대군은 권력을 위해 자신의 형제마저 죽인다. 리처드 글로스터도 마찬가지다. 대망의 달성을 위해 장애물은 철저히 제거한다. 자신의 형인 클래런스, 왕비 세력, 왕자들은 물론 자신의 반대파인 중신들까지. 리처드는 철저한 속임수로 상대를 안심시키며 은밀하게 행동을 한다. 상대는 미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거나 위기에 빠진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가 된다. 클래런스도, 헤이스팅스 경도.

 

(클래런스) 그럴 리 없어, 그는 내 불운을 울어 주었고, / 양팔로 날 안아 주었고, 흐느낌으로 맹세했어 / 나의 방면을 위해 애쓰겠노라고 말이다. (P.54, 14)

 

(헤이스팅스 경) 그때 난 탑으로 끌려가는 죄수 신세였지 / 왕비 일당의 사주에 의해, / 하지만 이제, 내 말해 주네만-자네만 알고 있게- / 오늘 그 원수들이 사형을 당하고, / 나는 처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낫다네. (P.94, 32)

 

자고로 봉건왕조에서 서열 순위가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라면 피바람을 모면할 수 없다. 그런 행위가 사회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사례는 군주가 된 이가 어떠한 정치 행위를 남기는가에 달려있다. 이 작품에서 리처드 글로스터는 시종일관 부정적 이미지의 표상이다. 신체적으로 기형인데다 마음마저 삐뚤어지고 권력의 위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그를 보면 셰익스피어의 의도와 실체 중 어디가 본모습에 가까울까 궁금하다. 확실한 건 스스로 천명한 것과 달리 그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리처드 글로스터) 내가 연인 팔자가 못 되고 / 이 아름답고 유창한 나날에 응할 길 없으니, / 난 결심한 거야 악당이 되고 / 요즘 세상의 게으른 오락들을 증오하기로. (P.9, 11)

 

리처드는 무지몽매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때가 오자 과감하게 행동에 나섰으며, 친구와 적을 판별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였던 헨리 6세의 왕세자 에드워드의 부인이자 워릭의 딸인 앤 부인을 설득하여 아내로 삼은 까닭은 이를 통해 랭커스터 가와 워릭 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리라. 철천지원수였던 리처드에게 증오의 언사를 내뱉던 앤 부인이 서서히 리처드의 말재주에 넘어가면서 반지를 받는 대목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지만 전혀 터무니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리처드의 설득력은 대단하다.

 

그가 죽은 형 에드워드 4세의 딸, 즉 자신의 조카딸을 아내로 취하고자 애쓴 까닭 또한 요크 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것이 만약 이루어졌다면 그가 그토록 쉽사리 리치먼드에게 왕위를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 왕) (방백) 난 내 형 딸과 결혼을 해야 해, / 그렇지 않으면 내 왕국은 깨지기 쉬운 유리 위에 선 꼴. / 그녀 남동생들을 죽이고, 그런 다음 그녀와 결혼을 한다? / 잘될지 모르지만, 내 손에 / 묻은 피는 죄악이 죄악을 선동할 정도이니. (P.130, 42)

 

전작에서 에드워드 4세는 워릭의 명예를 손상시킨 연유로 위기에 처하고 수년을 더 고생하였다. 리처드가 버킹검 공작을 박대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역시 리치먼드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가능성이 있었다. 공통점은 일단 왕좌에 오르자 왕이라는 자리에 눈멀어 자신의 최측근이자 최고 공신을 경시하였다는 점이다. 버킹검의 의견에 곧바로 실망하고 외면하지 않고, 약속했던 권리를 이행하였다면 그는 여전히 리처드의 오른팔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직 군주의 권력이 월등히 우위에 있는 절대 왕조가 아니라 귀족과 영주의 독자성이 강하게 잔존하던 시기였음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리처드 왕) (방백) 계략이 음흉하고, 머리가 좋은 버킹검은 / 더 이상 이웃이 아니리로다 내 자문에. / 그토록 오랫동안 줄기차게 나와 보조를 맞추던 그가 / 이제 숨 돌릴 짬을 가져야겠다고? , 그러든가. (P.129, 42)

 

(버킹검)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목숨을 건 내 충성에 대한 보답이 / 이런 경멸? 내 이걸 받으려고 그를 왕으로 만들어 주었나? (P.133, 42)

 

리처드 3세는 모친에게조차 버림받은 인물이다. 어머니 요크 공작부인은 그를 매우 부정적이고 차갑게 대한다. 그의 신체가 기형이므로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 상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어머니임에도 그녀는 리처드의 뒤틀린 몸과 마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다. 모르는 이라면 생모가 아니라 계모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찌 보면 리처드의 성격 파탄은 그의 어머니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생모에게 인간으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누구에게서 동등한 인격적 대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리처드 3세의 비극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요크 공작부인) 피비린 자이므로, 너의 최후 피비릴 것이다. / 치욕이 너의 삶에 동반했고, 네 죽음에 시중들 것이다. (P.147, 44)

 

이 작품에서 유령처럼 출몰하며 작중 인물들을 놀리고 괴롭히며 저주를 퍼붓는 독특한 인물이 있다. 전왕 헨리 6세의 왕비인 마가릿 왕비다. 폐위되어 죽임을 당한 전왕의 부인이 아무 거리낌 없이 궁중에 드나들 수 있다는 설정은 부자연스럽고 역사적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그녀에게 일종의 광대와도 같은 역할을 맡기고 저주와 예언을 퍼붓게 함으로써 작중 인물들이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독자는 이를 통해 헨리 6세의 비극이 그대로 끝나지 않고 훗날 가해자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올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마가릿 왕비) 너희 중 누가 나를 보고 떨지 않겠느냐? / 내가 왕비고 너희가 신하라서 절하며 떠는 게 아니라면, / 날 폐위시켰기에, 너희가 역도처럼 몸을 떠는 것이렸다. / (리처드에게) , 고상하신 악당, 어딜 가려구.

(리처드 글로스터) 징그러운 쭈그렁 마녀, 내 눈 앞에서 뭔 짓이냐? (P.35, 13)

 

(마가릿 왕비) 리처드가 아직 살아 있지, 지옥의 검은 염탐꾼, / 그 이유는 단 하나, 지옥의 대리인으로서 영혼을 사들여 / 그리로 보낼 임무 때문에. / 하지만 이제 곧, 이제 곧, / 벌어진다 그의 처참한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죽음이. (P.141, 44)

 

리처드 왕과 리치먼드 세력 간 일대 회전을 앞둔 55장은 리처드의 패전과 죽음이 천명임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세자 유령을 비롯하여 리처드에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꿈속에서 차례로 등장하여 리처드를 저주하고 리치먼드에 축복을 내리는 장면. 독자는 전투의 결과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이 희곡은 내내 어둡고 우울함으로 가득한 분위기로 일관하다 대단원에서 갑작스레 밝고 희망찬 메시지를 던진다. 리치먼드 백작, 곧 헨리 7세 왕은 약속한 대로 자신과 엘리자베스의 결합을 공식화함으로써 장미전쟁의 상처가 마침내 아물게 되었음을 밝힌다.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의 적통의 혼인을 통해서. 이는 단순히 두 가문의 사안이 아니다. 이로써 탄생한 왕가는 모든 귀족과 영주의 지지를 받는 명분과 실력을 갖춘 왕조이며 셰익스피어가 모시던 여왕의 선조이므로 당연히 화려하고 당당한 왕조의 개창일 수밖에 없다. 비극은 끝나고 잉글랜드 전체가 기뻐하고 환호하게 될 대도약의 섬돌.

 

(헨리 7세 왕) 무디게 하소서 반역자들의 칼날을, 은총의 주님, / 이 피에 굶주린 나날들을 다시 불러 / 불쌍한 잉글랜드가 피눈물 개울 흘리게 하려는 칼날을. / 그들이 살아서 이 땅의 풍부한 농산물을 맛보게 마소서, / 아름다운 이 땅의 평화에 모반의 상처를 입히려는 그들이. / 이제 내전의 상처는 가셨고 평화가 다시 삽니다. / 그것이 이곳에서 만세를 누리도록, 하나님 아멘하소서. (P.191-192, 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헨리 6세 3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요크 공작 리처드와 착한 왕 헨리 6세의 진정한 비극

 

2부에서 장미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고 요크 공작 편이 승리를 거둔다. 요크 공작은 헨리 왕에게 왕권을 요구하고 헨리 왕은 이를 조건부로 수용한다. 자신의 생전에는 왕위를 인정해 달라는 것. 장미전쟁의 본질적 계기는 결국 왕권의 정통성에 관한 질문이다. 현재 헨리 왕의 선조가 요크 공작의 선조인 과거 왕에게서 왕권을 빼앗았다.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왕권은 헨리 왕에게 있는 게 당연하지만, 그 선조가 왕권을 탈취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헨리 왕은 신하로 남아있었으리라. 이것이 요크가 지적하는 점이며, 헨리 왕의 마음속 한점 의구심인 동시에 엑스터마저 인정하게 만든 논리다.

 

(헨리 왕) (방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내 명분은 약해. (P.16, 11)

 

(엑스터) 그의 명분이 옳음이니, 노여움을 거두소서.

(엑스터) (헨리 왕에게) 제 양심은 그가 적법한 왕이라 말합니다. (P.17, 11)

 

마가릿 왕비 일행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녀는 헨리 왕에게 명예보다 목숨을 중시하고 자식의 앞날을 망쳤다며 맹비난을 퍼붓는다. 헨리 왕이 군주라 일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의 선택과 행동은 양심에 따른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후 그는 신하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시와 박대를 받는다. 그들이 보기에 헨리의 왕으로서 부족함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였으니 그를 향한 비난은 클리포드와 같이 일면 정당하다.

 

(클리포드) 헨리, 그대가 왕들처럼 통치했었다면, / 혹은 그대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한 대로 하여, / 요크 가문에 여지를 전혀 안 주었다면, (P.72-73, 26)

 

우리는 여기서 고민해봐야 한다. 왕권 다툼에 도덕과 양심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가. 역사는 대체로 이에 부정적이다. 절대권력을 쥐기 위해 천륜과 인륜마저 뒤엎는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하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승전을 위해서는 정면승부가 상책이 아니다. 온갖 간계와 기만전술을 구사하더라도 이길 수만 있다면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송나라 양공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인물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군주로서는 나라를 쇠망케 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성어가 생겼겠는가.

 

권력과 전쟁은 자체로 반인간적이니 평시의 인간성을 기대하며 곤란하다. 요크가 노인 클리포드를 죽인 행위와 클리포드가 어린 러틀랜드를 죽인 행위에서 경중과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너무나 주관적 감정과 판단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항상 복수를 다짐한다. 이렇게 복수는 맞물리고 악연은 어느 한쪽이 완전히 스러질 때까지 되풀이된다.

 

2부에서도 언급했듯이 높은 분들의 무력 충돌은 권력의 향방과 전혀 무관한 민초들에게는 고통이 될 뿐이다. 전쟁에 필요한 군대와 물자의 공급원으로 집도 재산도, 심지어는 목숨마저 몽땅 잃기 일쑤다. 전쟁의 광기에 휩쓸리면 부자, 부부, 형제, 친척과 친구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쟁광이나 학살자 역시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25장은 장미전쟁이 일반인들에게 주는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전장에서 알지 못하는 채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통함이라니. 이를 지켜보는 헨리 왕의 슬픔과 탄식 또한 못지않다.

 

(헨리 왕) 오 처참한 광경이다! 오 피비린 시대로다! / 사자들이 자기네 굴을 위해 전쟁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 불쌍한 순진한 양들이 겪는도다 저들의 적의를. / 울거라, 가여운 사람,내 그대 눈물을 눈물로 지원할 테니, / 그리고 내 가슴과 두 눈을, 내란처럼, / 눈물로 눈멀게 하고, 부서지게 하리로다, 슬픔의 과부하로. (P.68, 25)

 

우리는 그것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적어도 그의 슬픔은 참이니까, 하지만 이런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헨리 자신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의 인()은 작은데 그칠 뿐 큰 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오직 그는 선조에게 물려받은 군주 자리를 보전하는데 급급하였을 뿐. 그것이 당대 잉글랜드인과 헨리 자신의 비극이다.

 

요크의 사후 승리를 쟁취하고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의 행동을 보면 좋지 않은 역사는 반복됨을 확인하게 된다. 헨리 왕이 마가릿 왕비를 맞아들인 전철을 에드워드 또한 답습하니 프랑스 왕의 처제와 결혼하였더라면 왕위는 공고해지고 평화가 일찍 찾아올 수 있었을 텐데. 과부 그레이 부인으로의 선택으로 그는 워릭의 분노를 유발하고 동생 조지를 떠나게 만든다. 평화는 일순간에 그치고 장미전쟁은 재개한다. 에드워드 왕은 의연하다, 아니 오만하다.

 

삼부작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 인물은 단연 워릭이다. 그는 요크 공작과 아들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의 막강한 세력과 무력은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는 데 제일 큰 역할을 하였다. 에드워드 왕은 그레이 부인과의 결혼이 그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라는 점을 몰랐을까 아니면 그저 별것 아니라고 오만하게 생각하였을까. 워릭으로서는 대안이 없다, 왕에게 바싹 엎드리든가 아니면 꼿꼿하게 일어서든가.

 

한바탕의 불필요한 피비린내가 진동한 후 전쟁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다. 랭커스터 가문의 주요 인물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워릭은 물론 헨리 왕과 그의 아들 세자까지도. 요크 가문의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제 혼란은 그치고 안정이 찾아오고, 어둠이 스러지며 빛이 떠오르게 된 셈이다. 에드워드 왕의 대사처럼.

 

(에드워드 왕) 나는 이제 내 영혼의 기쁨으로 앉아 있소, / 내 조국의 평화와 내 형제의 사랑을 지녔으니. (P.174, 57)

 

독자는 안다. 이것은 에드워드의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것은 어린 헨리, 리치먼드 백작의 머리에 손을 얹는 헨리 왕의 예언이 훗날의 복선인 점과 마찬가지다. 당시 에드워드 왕은 알았을까? 동생 리처드의 마음속에 시커먼 야욕이 그득 차 있고,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악마와도 같이 주저 없이 제거할 거라는 점을 말이다. 기형의 몸에 절름발이인 그는 철저히 자신을 감춘 채 큰형의 곁을 지킨다.

 

(글로스터의 리처드) 난 아니오-(방백) 내 의중은 더 먼 데지. / 난 머문다 에드워드 사랑 아니라, 왕관 때문에. (P.115, 41)

 

이제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이들이 안정과 기쁨을 희구하는 찰나, 리처드는 다시금 되새긴다. 자신이 앞으로 수행할 악마와도 같은 행위를. 위협은 가까운 곳에서 오기 마련이지만, 대개 보이지 않는 법, 등하불명(燈下不明)처럼. 셰익스피어는 3막부터 지속해서 리처드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글로스터의 리처드) 헨리와 그의 아들은 갔다, 네가, 클래런스, 다음이지. /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내가 나머지를 처치한다. / 최선이 될 때까지는 악으로 처신하면서. (P.171, 56)

 

<헨리 6> 삼부작은 영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인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배경과 결과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등장인물 간 은원이 축적되고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왕위를 향한 맹렬한 추구와 왕권에 대한 맹목적 집착은 새삼 군주의 본질과 권력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인간 세상의 다툼과 불화는 영속할 것이며, 혼란 와중에 인간성은 외면받기에 십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헨리 6세 2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두 명문가 요크와 랭커스터의 다툼 1

 

셰익스피어의 영국 사극 읽기를 시작하면서 두 번째로 고심한 것은 번역본의 선택이었다. 각 작품이 단권으로 되어 있으면서 한 명의 번역자가 사극 전체를 번역한 사례는 전영옥과 김정환만 해당하였다. 전영옥은 이미 여러 작품을 읽어보았으니 상대적으로 덜 읽었고 근래에 번역이 이루어진 김정환을 택하였다.

 

김정환 번역본은 옮긴이가 시인이라는 특징이 있고, 운문과 산문의 형식미, 원문과 번역문의 행 일치 등을 표방한 면에서 고유한 장점이 있다고 하겠다. 다만 지나치게 원문의 형식에 가깝게 하려다 보니 문체가 딱딱 끊어지고 자연스럽지 못한 점은 우리말과 영문의 차이 상 불가피하다. 독자를 고려하여 매끄럽게 할 것이냐 어색하더라도 원문 준수를 중점으로 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운문 번역의 숙명이며, 번역자의 결단이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좋아하고 말고의 차이는 있을망정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1부에서 잠재된 갈등은 제2부에 들어와서 수면 위로 떠 오른다. 2부의 부제가 두 명문가 요크와 랭커스터의 다툼이라고 명명된 까닭이 이를 입증한다. 1부에서 영국이 프랑스 영토를 상실한 결과를 탈봇과 잔다르크의 죽음으로 보여주었다. 2부의 영웅은 단연코 호국경 글로스터 공작이다.

 

(글로스터) , 이렇게 헨리 왕은 목다리를 버리는도다 / 그의 다리가 몸을 버텨 줄 만큼 튼튼해지기도 전에. / 이렇게 양치기가 패퇴합니다 폐하 곁으로부터, / 그리고 늑대를 으러렁대나이다 폐하를 먼저 뜯겠다고. / , 나의 우려가 거짓이기를, , 정말 그러기를! / 왜냐면, 착하신 헨리 왕, 폐하의 몰락을 제가 우려하나이다. (P.82, 31)

 

헨리 왕을 제외한 모든 귀족이 그를 경계하고 싫어하였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 그가 호국경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는데 제약을 받아서이다. 그가 21장에서 심칵스의 거짓 소경 흉내의 진실을 파헤치는 대목을 보면 그의 현명한 일 처리를 알 수 있다. 마가릿 왕비 또한 그가 자신과 왕의 결혼에 반대하였고, 그의 지위가 군주와 비등할 정도로 큰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우군이 없었던 게 부인조차도 야심에 사로잡혀 적대세력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몰락을 자초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글로스터의 몰락은 헨리 왕의 파멸로 이어진다. 그것은 글로스터의 탄식과도 일맥상통하듯이 그가 헨리 왕의 왕권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몰락하자 더는 헨리 왕을 지켜줄 존재가 없어졌고 귀족들은 대놓고 자신들의 이권 쟁탈에 매진하고 군주의 권위를 무시하게 되었다. 야심을 감추었던 요크 공작은 마음 놓고 자신의 발톱을 날카롭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요크) 가겠소, 추기경,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서포크) 아니, 우리의 권한은 그분의 동의고, / 우리가 정하면 그분이 승인하시는 거죠. / 그러니, 고결한 요크, 이 임무를 맡으시오. (P.87, 31)

 

1부에서 글로스터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보하였는데, 2부에서 그에 대한 극중 인물(귀족들과 왕비를 제외하고)의 평은 전적으로 호의적이다. 이것은 일부 중립적 귀족과 공작 자신의 발언,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인식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솔즈베리) 내가 볼 때 언제나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 고결한 신사처럼 행동하더군. (P.18, 11)

 

(글로스터) 언제든 내가 나쁜 생각을 / 나의 왕이자 조카, 미덕이 넘치는 헨리에게 품게 된다면 / 그것이 나의 마지막 숨 되리니 이 필멸 세상에서! (P.23, 12)

 

(글로스터) 이 모든 것들도 나를 해코지할 수는 없소 / 내 충직하고, 진실되고, 죄 없는 한. (P.69, 24)

 

(해적 우두머리) 훌륭하신 험프리 공작의 죽음에 미소 짓던 네놈은 (P.117, 41)

 

체제 밖을 떠도는 해적조차도 글로스터 공작을 높이 평가하는 마당에, 음해를 받고 호국경의 지위를 내려놓고, 끝내는 살해당하는 그의 고결하고 진실한 충정에 마음 한쪽이 뭉클하지 않다면 어찌 진정한 독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호국경의 상징인 직장을 왕의 요구에 따라 내려놓을 때조차도 아무런 사심 없이 기꺼움을 나타내는 충심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글로스터는 극 중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비극적 최후를 마치게 된다니...

 

글로스터의 죽음과 대비되는 다른 죽음은 서포크 공작이다. 그는 마가릿을 헨리 왕과 결혼시키는 일등 공신이 되면서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다. 자신을 가로막는 글로스터를 파멸시키기 위해 함정을 파서 그의 부인을 빠뜨리고 끝내 글로스터 자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왕비의 연인으로서 부정한 애정을 지속한다. 그에 대한 세인의 평가가 좋을 리 없다. 글로스터 살인 혐의로 추방당한 그가 해적에게 잡히자 해적 우두머리가 내뱉은 말은 좋은 본보기다. 해적조차도 경멸하는 존재이자 일반 백성들의 여론 반영이리라.

 

(해적 우두머리) 그래, 이 하수구, 웅덩이, 시궁창 같은, 네 추행과 오물이 / 잉글랜드의 은빛 식수원을 더럽히니, / 이제 내가 둑으로 막아 주마 크게 벌린 네놈 아가리를, / 왕국의 보물을 집어삼킨 죄로 말이다. / 왕비와 입 맞추던 네 입술 땅바닥을 쓸게 될 것이고, / 훌륭하신 험프리 공작의 죽음에 미소 짓던 네놈은 / 무정한 바람에 대고 헛되이 씨익 웃겠지, / 바람은 네놈을 경멸하며 네놈한테 다시 쉿쉿거리겠고. (P.117, 41)

 

마가릿 왕비의 편협한 질투심과 오만함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녀는 끊임없이 헨리 왕에게 글로스터 공작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데, 그럼에도 공작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놓지 않은 헨리 왕이 오히려 대단할 정도다. 그녀의 의심이 남편과 영국의 장래에 대한 순수함에서 나왔다면 용납되겠지만 그녀의 남편에 대한 실망 및 서포크와의 불륜을 염두에 둔다면 별로 동정 가지 않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답답한 인물은 헨리 왕이다. 그는 왕의 지위와 자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선악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자신의 의지조차 없이 부평초같이 이리저리 왕비와 귀족들의 뜻에 따라 흔들리는 인물이다. 아무런 대안 없이 호국경을 내쫓는 결과가 자신에게 어떠한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판단 능력조차 없이 그냥 물 흐르는 듯이 떠내려갈 뿐이다. 그가 왕비의 탄원을 물리치고 서포크를 추방할 때의 패기와 결단을 평소에도 보여주었다면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꼴을 나지 않았을 터이련만. 극 중에서 유일하게 나타날 뿐이다.

 

(헨리 왕) 고결치못한 왕비로다, 그를 고결한 서포크라니. / 그만, 어명이오! 당신이 정말 그를 위해 탄원한다면 / 더할 뿐이로다 나의 분노를. / 말을 한 이상, 나는 내 말대로 하는 것일 터, / 그러나 내가 맹세를 한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되오. (P.104, 32)

 

헨리 왕은 보통 사람으로서 신앙에 몰두하는 사제의 삶을 살았다면 행복하였으리라. 군주라는 자리는 성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과 자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벌이고 그래야 하는 게 왕이다. 사서와 역사소설을 읽다 보면 반역죄에 대해 유달리 엄중한 처벌이 가해지는 걸 볼 수 있다. 흔히 삼족 또는 구족을 멸한다고 하는데, 아무 죄 없는 친인척들까지 벌주는 이유는 이 작품에서 요크 공작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현재 처지, 왕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하며 없던 반항심이 생기는데, 하물며 왕위계승권의 정당성마저 지니고 있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는 행위는 잔인하지만 왕의 관점에서는 불가피한 처사라고 강변할 수 있다. 태종과 세종이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살려 둔 게 오히려 이색적인 처사일 정도다.

 

요크의 부추김으로 일어섰지만 잭 케이드의 반란은 극 중에서 나름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의 반란은 당시 봉건 체제가 반란 진압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화책을 제시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케이드와 백정, 직공의 교차하는 대사를 통해 해학성을 드러내며 케이드를 희화화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모든 학자, 변호사, 궁정 신하, 신사들”(P.135)기생충”(P.135)으로 매도하는 전언을 통해 일반백성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일면을 나타낸다. 케이드는 어차피 죽게끔 운명지어진 인물이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그의 불굴의 정신이다. 그는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삶을 감수하느니 고착화된 신분 체제를 타파하려고 죽음을 감내하고 행동에 나선 인물이었다.

 

(케이드) 켄트 사람들에게 내 말 전해 주게 그들이 가장 훌륭한 동향인을 잃었다고,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타이르게 겁쟁이로 살라고. 왜냐면 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굶주림에 굴복하였느니, 용기가 아니라. (P.157, 49)

 

최악으로 치닫는 사태를 막아보고자 하는 헨리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발발은 피할 수 없다. 전쟁에서 인정과 자비는 기대할 수 없다. 죽음은 원한을, 원한을 복수를 낳고 살육은 물고 물리며 반복된다. 어느 한쪽이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아들 클리포드가 아버지 노인 클리포드의 시신을 보고 무자비한 복수를 다짐하듯이, 이것이 제3부에서 파란을 낳는 복선이다.

 

다만, 불쌍한 것은 중간에 치인 무고한 생명뿐. 귀족들의 전쟁이 백성들에게 뭐란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