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6세 1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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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영국 사극 독서를 시작하면서 출발점을 어디로 삼을지 고민하였다. 집필 순으로 보자면 <헨리 6> 삼부작이 앞서고, 왕위 연대순으로 따지면 <존 왕>이 첫 번째 순서가 마땅하다. 후자는 시대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개를 따라갈 수 있고 앞선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전자는 셰익스피어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발전되는 모습을 작품을 통해 발견할 수 있고, 작가가 시대순에 연연하지 않고 외연을 확장하게 된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할 기대를 품을 수 있다. 나의 최종 선택은 집필 순이다.

 

영국 역사를 극작의 소재로 삼았으니 아무래도 역사 지식이 있으면 전체적 맥락 이해에 유리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랭커스터가와 요크가의 장미전쟁을 거쳐 튜더 왕조가 성립하는 영국 중세와 근대 초기의 흐름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으면 작가가 강조하거나 생략한 장면, 변용을 가한 대목을 비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삼국지연의> 감상을 위해 <정사 삼국지> 선행 독서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 않는 것은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 시대를 삼부작으로 나누어 집필하였다. 영국사의 분수령이 되는 이 시기를 좀 더 상세하고 치밀하게 파헤쳐 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게 한다. 백년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에 어린 헨리 6세를 둘러싼 귀족들의 권력 암투가 점차 두드러지는 모습을 1부에서 볼 수 있다. 귀족들에게 중요한 건 왕권도 백성들의 고통도 아닌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 도모와 권력 확장에 있다. 호국경 글로스터가 통박하듯이 말이다.

 

(글로스터) 당신들은 그저 나약한 군주만 좋아하지. / 그래야 학동처럼, 당신네들이 겁을 줄 수 있을 테니. (P.11, 11)

 

왕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은 어린 헨리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작중 인물들에게 그의 존재와 행동은 의심과 질시의 대상이다. 호국경인 그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귀족들은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 게다가 왕위계승권 1위인 그의 지위는 그가 행하는 모든 언행을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해석하도록 만든다. 독자는 아직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확실한 것은 어린 헨리 왕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사실이다.

 

귀족들의 불화는 두 갈래로 구분된다. 글로스터와 윈체스터는 친척 간이다. 극 중에서 헨리 왕은 두 사람을 모두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양자는 또한 숙질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촌수로는 윈체스터가 앞서는 건 분명하지만, 직계가 아닌 방계인 듯싶다. 그래서 글로스터가 그를 무시하는 언사를 보이는 게 아닐까. 하여튼 윈체스터는 사제로서 나중에 추기경으로 오르지만 강력한 권력욕을 드러내어 다른 귀족들에게도 평판은 썩 좋지 않다.

 

서머싯과 리처드, 나중의 요크 공작 간 불화는 사소한 언쟁에서 비롯한다. 각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가운데 붉은 장미와 흰 장미로써 무리를 표시하는 장면은 영국사를 아는 독자라면 훗날 장미전쟁의 발단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헨리 왕도 말했듯이 어처구니없지만, 이것이 어디 근본적인 원인이겠는가, 방아쇠에 불과할 뿐.

 

(헨리 왕) 착하신 경,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 어떻게 그리도 사소하고 하찮은 이유로 / 이런 파당적 시샘이 생겨날 수 있단 말이오? (P.111, 41)

 

그럼에도 사소하고 하찮은 다툼은 거대한 불화와 분쟁으로 점화되는데, 엑스터 공작이 이를 31장과 41장에서 반복적으로 예언한다. 그는 극 중에서 독특한 인물이다. 어느 파당에도 속하지 않고 헨리 왕의 곁을 지키는 엑스터는 귀족들의 다툼이 비극을 가져올 것임을 초연하게 언명하는 예언자적 인물이다.

 

(엑스터) 하지만 소용없지,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두 눈으로 / 이 삐걱대는 귀족들의 불화를,/ 궁정에서 서로를 어깨로 밀쳐 대는 꼴을, / 추종자들이 일삼는 이 파당 싸움질을 본다면, / 그것이 정말 불행한 결과의 전조임을 알리라. / 왕홀이 어린이 손에 들려 있는 것도 문제지만, / 시샘이 기괴한 분열을 낳는 것이 더 큰 문제로다. / 거기서 멸망이 오고, 거기서 혼란이 시작되나니. (P.114, 41)

 

귀족들 간의 불화가 본격적인 갈등으로 점화되는 계기는 백년전쟁과 연관되어 있다. 시선을 잠시 프랑스로 돌리자. 초기에 유리했던 영국의 전황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다. 군사와 물자를 바다로 실어날라야 했던 영국 입장에서는 군주와 귀족이 단합해야 공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음에도 제1막 초반부에서 사자들의 전언에서도 보았듯이 귀족들의 내분으로 수세적으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전쟁 영웅 탈봇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본토의 다툼과는 무관하게 그는 프랑스에서 영국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순전한 애국심의 상징이다. 그의 막강한 무력은 프랑스군을 두렵게 만들고 오직 잔다르크만이 그의 적수가 될 뿐이다. 하지만 제5막에서 볼 수 있듯 탈봇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이라면 잔다르크는 악령의 도움을 받았으니 실질적 비교는 어렵다.

 

() 내 몸으로도 피의 희생으로도 / 간청할 수 없단 말이냐 너희가 늘상 주던 도움을? / 그렇다면 내 영혼을 주마-내 몸, 영혼, 그리고 모든 것을- / 잉글랜드가 프랑스에 패배를 안기기 전에. (P.143, 53)

 

이 작품에서 탈봇과 잔다르크 모두 목숨을 잃지만 양자의 최후는 전혀 다르다. 탈봇은 고결한 전쟁 영웅으로서 장엄한 최후를 마치지만, 성처녀는 마녀로서 고결에서 추악으로 전락한 채 경멸로 목숨을 잃는다.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잔다르크를 향한 편견과 비난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만큼 백년전쟁에서 잔다르크의 등장은 영국에게 있어 치명타였으므로, 성처녀가 아닌 마녀라고 믿고 싶었으리라. 탈봇, 요크공작의 그녀에 대한 비난적 언사, 자신의 양치기 아버지를 부인하는 잔의 대사, 그리고 애를 가졌다고 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잔의 행동을 보면 그녀에 대한 영국인의 악의적 감정을 알게 한다. 따라서 이점을 가지고 셰익스피어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탈봇) 더러운 프랑스의 적, 그리고 참으로 경멸스러운 마녀야, / 네 음탕한 정부들한테 둘러싸여, / 가당키나 하더냐 네가 그의 용감한 나이를 조롱하고 / 반쯤 죽은 이를 비겁하게 야유하는 것이? (P.91, 35)

 

() 형편없는 늙은이, 비천하고 저열한 놈 같으니, / 난 더 귀족적인 혈통 출신이야, / 네놈은 내 아비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란 말이다. (P.154, 56)

 

() 나는 애를 가졌다, 너희 피비린 살인자들아, / 그러니 살해하지 마라 내 자궁 속 열매를, / 설령 너희가 나를 난폭한 죽음에게로 질질 끌고 갈망정.

(요크 공작 리처드) 저런 하나님 맙소사-성처녀가 아이를 배? (P.157, 56)

 

1부에서는 아직 발아되지 않았지만, 향후 분쟁의 씨앗이 심어지는 대목을 볼 수 있으니 제2부와 제3부의 복선에 해당한다.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모티머가 조카 리처드에게 모티머 가문이 몰락하게 된 숨겨진 역사를 설명해주는 25장이 하나다. 리처드는 비로소 자신이 헨리 왕보다 왕위계승권에서 더 정통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반드시 이를 회복하리라 다짐한다. 모티머는 조카에게 신중을 기할 것을 재삼 당부한다.

 

(모티머) 조용, 조카, 신중해야지. / 랭커스터 가문은 확고히 섰고, / 산처럼, 제거할 수가 없어. (P.73, 25)

 

프랑스의 우세 속에 전쟁이 하염없이 길어지자 양국은 화친을 시도한다. 프랑스 왕을 영국 왕의 총독으로 삼는 조약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데, 영국의 패전을 완곡하게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서포크는 마가릿을 헨리 왕의 왕비로 삼고자 하는 모종의 책략을 꾸미고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헨리 왕을 미혹시켜 마침내 성공을 거둔다. 그의 의도는 제1부의 마지막 대사에서 확연히 나타나는데 이후 작품의 복선을 깐 셈이다.

 

(서포크) 마가릿은 이제 왕비가 되어 지배하겠지 왕을 / 그러나 나는 지배하리라 그녀, , 그리고 왕국 모두를. (P.166, 57)

 

이 제1부는 삼부작의 서막에 해당한다. 대체로 등장인물 소개와 그들 간의 내재한 갈등,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오래된 역사적 불씨를 보여준다. 또한 백년전쟁의 최종 결과를 탈봇과 잔다르크의 두 영웅적 인물의 대결로 압축함으로써 패배한 영국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을 볼 수 있다. 헨리 왕의 결혼이 가져올 새로운 국면과 장미전쟁으로 이어질 귀족 간의 본격적 대립은 아직 물밑에 놓여있다. 이는 제2부와 제3부에서 구체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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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평화 - 삼국지 이전의 삼국지, 민간전래본
김영문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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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삼국지 또는 아류작을 제외하고 <삼국지연의>와 같은 고전으로 다른 삼국지류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삼국지평화>라는 작품이 존재하고, 게다가 나관중의 소설보다 무려 170여 년을 앞선 글이라니 삼국지 매니아인 나로서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었다.

 

이 책은 내용 자체의 감상에 앞서 작품 자체의 소개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나관중의 것보다 앞선 시대의 것이므로 <삼국지연의>가 순전히 나관중의 창작이 아님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으며, 초기작을 통해 삼국지 이야기의 소설화가 발전되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다. 표제의 평화(平話)는 공연 대본을 가리킨다고 하며, 그림과 텍스트를 나란히 수록하여 시각적 이해와 상상을 돕고 있다.

 

<삼국지평화> 원본에는 맨 위 3분의 1 부분이 삽화, 아래 3분의 2 부분이 문자 텍스트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목 끝에 붙어 있는 평화라는 말은 당시 이야기 공연 장르의 대본이라는 뜻이다. (P.31)

 

원본은 상중하 3권 구성이며, 번역본은 한 권으로 옮길 수 있어 <삼국지연의>에 비하면 매우 간략하다. 따라서 사건과 인물의 다양성, 표현의 풍부함 등은 당연히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짐작하며 사실 그러하다. 대신 빨리 읽는 독자라면 앉은 자리에서 뚝딱 완독할 수 있을 정도니 속도감과 흡인력은 비교작을 능가한다.

 

전체적 구성에서 <연의>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특히 삼국 정립의 원인과 통일을 언급하는 도입부와 결말부이다. 삼국분열이 후한말 혼란과 부패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 고조 유방에게 토사구팽당한 한신, 팽월, 영포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후속 조치로 설명한다. 매우 황당하며 비현실적이다. 뒷날 나관중이 이런 논리를 배격하고 완전히 새롭게 짜 맞춘 것은 합당한 판단일 것이다.

 

세 사람은 천하를 삼분하려는 게 아니라,

한 고조에 참수된 원한 갚으러 다시 왔네. (P.45)

 

사마중달은 세 나라를 남김없이 평정했고,

유연은 한을 일으켜 황업을 공고히 했네. (P.389)

 

결말부에서 주목할 대목은 516국 중 하나인 전조(前趙)의 창설자 유연이 한나라를 계승하여 훗날 그의 아들이 한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복수를 하였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그렇게 믿었던 건지 아니면 흥미를 끌기 위한 단순한 장치로 도입했는지 알 수 없으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전혀 터무니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유씨라는 공통점을 내세웠지만 유연은 촉한 황제의 외손”(P.385)가 아니라 엄연히 흉노족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용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할 말이 많다. 큰 줄기에서는 우리가 아는 삼국지 이야기가 맞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연의>와 전혀 다르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연의>와 비교하여 당혹해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지만, 그냥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간주하는 게 맘이 편할지 모르겠다. 역사적 기록의 부합 여부는 거의 고려치 않는다는 면에서 나관중보다 작가적 자유분방함의 정도가 훨씬 크다.

 

조조는 여기서도 간웅이다. 후대작의 조조는 여기에 비하면 악독함이 덜하다. 황제의 태자를 때려죽이고 강제로 아들 조비에게 물려주도록 직접 행동의 전면에 나선다. 나관중의 작품에서는 예의를 차리며 관대하게 관우를 보내는 조조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조조는 호시탐탐 관우를 죽이려고 한다. 조조 죽음의 계기가 되는 관우의 수급을 보고 놀라는 장면도 여기에는 없다. 옮긴이에 따르면 초한지의 내용을 응용하여 관우를 높이고 조조를 낮추는 의도로 나관중이 지어낸 거로 보인다. 이처럼 초한지와 연결시켜 장면을 추가하는 대목이 많은 게 이 책이다. 반면 훗날 나관중은 무리한 관련성을 배격하고 역사적 흐름을 더욱 중시하고 있으며, 번개처럼 지나가느라 놓친 개개의 사건과 인물에 풍성함을 더하기 위해 다양한 일화와 고사를 추가한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적어도 문학적 재미와 흥미로서는 나관중의 압승이다. 그러기에 현대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겠지만.

 

의형제 삼인방에서 세인과 후인의 추앙을 받는 사람은 단연 관우다. 안량과 문추를 베는 용맹, 유비를 찾아가려고 조조를 떠나는 엄중한 의리, 죽어서도 굴하지 않는 기개 등 그가 민간에서 신으로 승격된 까닭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작품에서는 장비가 더욱 돋보인다. 의병 창설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이는 장비다. 황건적을 무찌르고 유비를 푸대접한 환관에게 주먹을 날리고 태수와 그의 아내 및 병졸 수십 명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독우를 매질하여 죽인 후 토막 내 버릴 정도로 용맹과 흉포함, 잔인성이 결합한 캐릭터는 나관중의 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삼국지 이야기에서 자타공인 최강의 무사는 여포다. 그런 여포가 여기서는 장비에게 꼼짝 못 한다. 장비는 여포의 일기토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패성을 포위한 여포를 무려 세 번이나 뚫고 나온다. 마지막에서 여포를 잡아 가둔 것도 장비니 그야말로 천하무적 여포의 유일한 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포의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그와 동탁의 만남은 다른 방식이었으며, 여포와 초선은 원래 부부 사이였다고 한다. 하후돈을 애꾸눈으로 만든 인물도 여포이다.

 

제갈량은 본래 신선인데, 어려서부터 학업을 닦았으므로 중년에 이르러서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천지의 기미에 통달하여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 뜻을 품고 있었다.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었으며, 콩을 뿌려 군사를 만들 수 있었고, 칼을 휘둘러 강을 만들 수도 있었다. (P.203-204)

 

<연의>에서도 제갈공명의 능력은 초인적인데, <평화>에서는 아예 대놓고 그를 신선이라고 칭한다. 초능력자 제갈량을 너무 높인 나머지 한편으로는 그렇게 뛰어난 능력자가 어째서 삼국통일의 대업에 실패하였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민간전래본이다 보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성과 일관성이 부족한 게 약점이다. 공명의 신통력과 도술을 강조하는 대목은 남만 정벌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제갈량은 하늘을 운행하는 풍륜(風輪)을 제작하여 맹획을 정복해낸다.

 

봉추선생 방통의 역할은 <연의>에서 제한적이어서 그의 참 면모를 알기 어렵다. 여기서는 방통과 주유가 호형호제하는 사이며, 유비에게 인정받지 못한 방통이 형주 4군의 반란을 부추기는 등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로 나온다. 다만 죽은 방통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두고 유비가 서천을 얻게 되는 장면은 황당한데,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평화>에서 죽은 공명이 수레에 타고 의젓하게 나서는 장면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제갈량의 북벌 실패의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마속이 가정을 잃은 데 있다. 훗날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의 유래인데, 전투의 상세 원인이 전혀 다르다. 마속은 술에 취해서 수비에 실패하였으며, 그에게 충언했던 왕평은 <평화>에서 남만 정벌에서 일찌감치 제갈량에게 참수당하여 등장할 기회조차 없었다.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촉과 제갈량의 북벌 실패 제일 원인은 제갈량 일인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의존 탓이다. 그는 승상이자 총사령관이므로 내정과 국방을 총괄해야 했는데, 전시상황에서 내정을 전담할 수 있도록 후주가 믿고 맡길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하는 만약의 가설이 여전하다.

 

조조의 후손이 그러했듯 사마의의 후손이 조조의 후손에게 황권을 빼앗은 걸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수십 년을 지속한 삼국 정립을 끝내고 통일,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을 이루어낸 것은 사마의의 후손이다. <연의>는 제갈량의 사후 통일까지를 다루고 있는 반면 <평화>는 공명의 죽음으로 대단원을 내리고 이후는 간단한 해설로 마무리한다.

 

옮긴이가 누차 강조했듯이 <평화><초한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나관중은 그것이 지나친 대목은 깎아내고 없던 장면은 덧붙여서 모방이 아닌 창작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연의>에서는 희석되어 두드러지지 않지만 <평화>에 앞서 <초한지>를 읽으면 두 작품의 관계가 더욱 강하게 의식될 것이다.

 

<연의><평화>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며 우월의 격차는 명확하다. <연의>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평화>의 전개와 서술에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역으로 <평화>를 접한 후 <연의>를 펼친다면 <연의>의 뛰어남과 나관중의 재능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이는 <연의>가 수준 낮고 일독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두 작품은 소위 삼국지 이야기를 공통의 배경으로 삼았기에 여러 면에서 겹칠 수 있지만, 별개의 독자적 작품으로 접근해야 한다. <연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평화> 자체로도 감상하고 묘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옛사람들은 나관중 이전에 이 작품 속 이야기에 일희일비하지 않았겠는가. 나아가 우리는 <평화>를 통해서 민간에 전승된 삼국지 이야기가 어떻게 기록으로 정착하고 방대한 소설로 발전해 나갔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비교하고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연의>도 비견할 수 없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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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환타지소설의 원조, 습유기
김영지 지음 / 한국출판협동조합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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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지괴소설집의 하나다. 저자는 도교의 방사(方士)인 왕가라고 하는데, 훗날 소기가 잔존한 판본을 오늘날의 형태로 편집하였다. 소기는 단순히 편집에 그치지 않고 주요 고사 또는 각 권의 마지막에 록()이라고 하여 자신의 비평을 추가하고 있다. 사실상 저자가 두 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도가와 유가의 분위기가 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앞서 읽은 몇 권의 지괴소설집과 비교할 때 이 책은 서술 체계가 독특하다. 언뜻 보면 역사서에 가깝다. 10권 중 1권에서 9권까지는 복희, 신농, 황제에서 시작하여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 당대까지의 고사를 담고 있다. 이처럼 시대순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주로 임금과 관련된 고사를 기록하고 있어서 정사를 보완하는 비사(祕史)로서의 성격을 포함한다. 표제조차도 빠뜨린 이야기를 주워서 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이런 연유로 과거에는 역사서로 분류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지막 10권은 고대와 당대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8대 명산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비사와 지괴, 박물지가 혼재된 특이한 지괴소설류로 간주할 수 있다.

 

저자의 서술과 관련한 특색을 추가로 언급하자면 시대순으로 기술하지만 인물과 고사의 선별 기준은 도가에 가깝다는 점이다. 주나라의 목왕,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희공과 연나라 소왕을 다룬 것은 이들이 신선도에 빠져있던 걸로 정평이 난 군주들이어서다. 8대 명산도 소위 오악(五嶽)과는 무관하게 도가에서 중시하는 산들이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은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러 보낸 삼신산이다. 곤륜산은 서왕모가 산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거리에는 붉은 풀들이 가득하고 무성한 수풀 위로는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하늘에 제사모시는 흙 단을 쌓아서 아침 해에게 제사를 드리고, 옥섬돌을 꾸며서 달빛을 담아낸다. 구천의 조화로운 음악을 연주하노라니 온갖 동물들이 춤을 추었고 여덟 가지 음색도 잘 어우러지니 나무와 돌에도 윤기가 흘렀다. (P.32, 염제 신농)

 

위의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록된 고사의 서술 내용 자체가 비교적 세밀하고 때로는 장식적, 낭만적 묘사도 주저하지 않는다. 다른 작품집의 간략하고 사실 전달에 중점을 둔 서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그만큼 저자의 집필 의도와 필력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소설로서 한층 진일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쓰인 때가 서진 시기였으므로 삼국시대와 당대의 고사를 다룰 때면 은연중 자국의 정통성을 표출하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가피성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견강부회라는 생각을 숨길 수 없다.

 

예컨대 위에서 진으로 넘어가던 무렵 궁궐 문에 작은 참새만한 하얀 빛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덕(金德)의 길조라고 해석하여 진의 성립을 천명으로 풀이하는 대목(P.233)이 그러하다. 옮긴이에 따르면,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위는 불에 속하며, 진은 금()에 속한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위, , 오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장면도 엿볼 수 있다. 유비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거부 미축의 사망 원인을 촉이 망하는 바람에 잃어버린 재물이 아까워 한이 되어 죽었다(P.268)고 하는데, 미축은 촉이 멸망하기 이전에 죽었으며 동생 미방이 촉을 배신하여 화병으로 죽은 것이라고 옮긴이가 의미읽기에서 바로잡고 있다. 악의적 왜곡의 전형이다.

 

이국원인(異國遠人)에 관한 관심은 <산해경>, <신이경> 등에서처럼 여전하다. 지리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정보가 부족한 시절 호기심과 상상력이 결부된 각종 먼 나라 기이한 물산의 이야기는 한낱 터무니없는 걸로 치부하기에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너무나 멀어서 조공을 오는 데 수십 년이나 걸려 어린 사람이 노인이 된다는 연구국(P.87), 선녀가 변신한 무희를 바쳤다는 광연국(P.137), 자유자재로 도술을 부리는 목서국=신독국(P.141), 수명이 삼백 세인 기륜국(P.174) 등은 당대인들의 호기심 충족에 그만이었으리라. 어쩌면 지리적 발달에 다소는 공헌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신선에 관한 고사가 많은 경우를 점하는데, 넓게 보면 삼황오제가 모두 신선이라고 할 수 있다. 서왕모를 만났다는 주나라 목왕의 서방 여행, 그리고 서왕모에게서 단약 재료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만 연나라 소왕 고사(P.141)는 서왕모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 정도를 보여준다. 신화적 인물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도 신비화하는데 괴력난신과 무관한 공자의 탄생 장면도 신비롭게 미화하고 있어 과연 공자가 이를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으려나 궁금하다.

 

주 영왕 21, 공자는 노나라 양공 통치 시절에 태어났다. 그날밤 푸른 용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머니 징재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꿈을 꾸고 공자를 낳았다. 두 명의 신녀가 하늘에서 향기로운 이슬을 받들고 내려와 어머니를 목욕시켜 주었다. 천제가 내려와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여 징재인 안씨 방에 베풀어놓았다. (P.107)

 

도가에서 숭상하는 노자 또한 그만둘 리가 없다. <도덕경> 저술과 관련한 신화화 사례(P.121)를 보자. 부제국에서 선서에 신통한 두 사람이 노자를 도와 저술 작업에 참여하여 골수와 피로 먹물과 등불 기름을 대신하였고, 경전이 완성되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도덕경>이 최초에는 1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고 하며, 노자가 간소하게 정리해서 5천 자로 줄였다고 하는 점도 기억하자. 서방으로 떠나면서 관윤 윤희의 부탁으로 글을 남겼다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신화와 전설 속의 제왕과 군주, 성인이 수록한 고사들의 주된 인물임에 반해 가까운 시기의 문인으로는 한나라 유향(P.210)이 유일하다. 이는 지괴소설의 선배에게 바치는 후배의 찬사다. 마찬가지로 소위 중원인을 제외하면 오랑캐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석호다. 그는 516국 중 후조(後趙)의 황제인데, 짐작하겠지만 폭정과 사치를 일삼은 안 좋은 본보기로 취급된다.

 

소기가 유학자이다 보니 원전의 내용에 본인의 가치관과 부합하지 않은 고사가 많이 있게 마련이다. 편집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로 반응을 보인다. 우선 지나치게 황당무계한 내용의 고사들에 대해서는 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득히 멀리서 아련히 흘러온 글들은 백가(百家)가 현실과 유리되어 각자 그 기억함을 숭상했을 뿐, 뜻이 깊이 배인 도리는 아니다. (P.63)

 

중원과 외지는 기운부터 달라 이상한 기운이 각기 생겨나 구름과 강물, 초목도 괴이하고 아름다운 여러 형태를 취하나 서적들을 살펴보면 그 유형이 동일하다. 지역이 멀고 변형이 심해서가 아니라 허망하고 괴탄함에 웃을 것이다. 널리 두루 살려 신령하고 기이함이 증험되길 바란다. (P.321)

 

그리고 유가적 가치에 부합하는 고사를 선별하거나 내용을 다듬는다. 주나라 영왕 때 위나라 영공의 악사였던 사연(師涓)이 작곡한 사계를 묘사한 음악에 군주가 미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을 지경이 되니 신하가 그 음악이 유해하다고 끊기를 간언하고 임금이 이를 수용하였다는 고사(P.124)를 보면 유가가 지향하는 참된 음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악사는 부끄러움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은나라 폭군 주의 악사였던 사연(師延)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였던 고사(P.79)를 함께 비교하면 음악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 한문 고전 번역본과 비교할 때 산뜻하고 현대적인 인상을 주는데 차별되는 점은 체재에 있다. 번역문과 원문, 주석, 그리고 해설로 이루어지는 게 통상적인데, 여기서는 번역문, 원문 그리고 의미읽기라고 하여 해설과 옮긴이의 감상 및 의견을 한군데 묶어놓았다. 주석은 매우 적어서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고리타분한 고전이 아닌 현대의 젊은 독자층에 다가서기 위한 캐주얼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표제도 원제 앞에 중국 환타지소설의 원조라고 수식구를 넣었듯이. 보다 현실적인 사유인데, 적당한 분량의 한 권으로 편집하기 위한 목적일 텐데 상세한 주석을 넣으면 분량이 대폭 늘어나 두꺼운 학술서적이 될 우려가 있어서이리라.

 

다른 지괴소설집과 비교할 때 별로 중첩되는 내용이 없다는 점, 체재와 서술방식이 역사서와 유사하여 신선하며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 기술과 묘사가 세밀하고 낭만적이어서 이야기 자체로서 상대적으로 완결도가 높다는 점, 그리고 편집자의 날카롭고 비판적 평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이채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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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충지 지음, 김장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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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지의 <술이기>는 위진남북조시대 남제의 대표적인 지괴소설(P.159)이다. 시기적으로는 앞서 읽은 <열이전><수신기>보다는 후대에 지어졌으며, 작품해설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록된 총 95조의 고사 중 거의 대부분이 다른 책과 중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수신기>를 시기적으로 보완하는 장점이 있다.

 

초반부의 고사는 신기한 지역을 소개하는 등 박물지 성격을 띠고 있으며, 중반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위진남북조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대체로 연도와 인물을 명기하고 있어 지괴라기보다는 당해 시기의 비사와 일화를 읽는 기분이다.

 

전대의 지괴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순괴 고사(P.126)처럼 종래의 신선, 선인 및 도사 등도 소수 등장하지만 법사, 부처님, 불경 등에 대한 언급 및 신통력이 더욱 강력하다. 백도유 고사(P.15)에서 자신이 머무는 산에 자리 잡은 법사를 쫓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산신은 방법이 통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산을 법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슬퍼하며 다른 지역으로 떠나간다. 호비지 고사(P.89)를 보면 소란을 피우는 귀신에게 맞대응한 게 무례했다고 지적받고 부처에게 귀의해야 무사할 수 있다고 한다. 나여의 부인 비씨 고사(P.155)에서 죽을병에 걸린 비씨는 오랫동안 법화경을 열심히 독송하였으니 부처의 가호로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신령과 부처가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도교보다 불교의 위력이 큼을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불법의 능력과 정당성을 알리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산신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말했다.

법사님의 위덕이 이토록 높으시니 지금 이 산을 당신께 드리고 이 제자는 달리 의탁할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백도유, P.15)

 

이 책은 착한 귀신과 올바른 저승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다. 황묘 고사(P.60)를 보면 신령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황묘에게 벌을 주는 것은 그렇다 해도 괜히 30명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게 만들고 황묘는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신령의 처사는 납득 불가이다. 진민 고사(P.133)처럼 진민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그나마 깔끔한 조처라는 생각이다. 어쨌든 자신에 대한 약속 위반자에게 무자비한 벌칙을 내리는 궁정묘 신령은 사람들과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다. 이런 귀신이라면 굴복하기보다는 맞서 싸우고 물리치는 자세도 나쁘지 않다. 부양 사람 왕 아무개 고사(P.68)에서 귀신 산소는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고 이름을 알려달라고 간청해도 소용없이 불에 타죽는다. 잡귀의 출몰을 목도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귀신을 끝내 물리친 박소지 고사(P.78)도 귀신에 겁먹지 않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전형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저승은 이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생전의 잘못이 드러나고 처벌받는 사후세계라면 응당 엄정해야 하겠지만, 비경백 고사(P.99)에 따르면 저승사자도 인정과 대접에 약한 면모를 보이며, 뇌물도 유효적절하게 통하는 모습(영천 사람 유 아무개 고사, P.102)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승에서 유능한 관리를 저승 세계도 탐을 내 관리로 데려가고자 하는 대목(조종지 고사, P.83)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과 귀신 간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으니 유막의 연인이었던 죽은 여인 곽응의 대답을 통해 알게 한다.

 

사람과 귀신은 길이 다르니 날 생각하는 수고는 하지 마세요.” (유막, P.136)

 

귀신, 사람, 동물 구분할 것 없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상대에게 선을, 괴롭히는 상대에게 악을 베풀고자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충견인 황이 고사(P.23)가 전자라면, 석현도 고사(P.71)와 오고지 고사(P.146)는 후자의 사례다. 잡아먹힌 새끼를 그리워하며 울부짖는 어미 개의 모성애를 생각하며 석현도의 병이 나을 수 없는 까닭을 짐작게 하며, 새끼 밴 어미 원숭이를 잔혹하게 죽인 오고지가 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호랑이가 된 태수(봉소 고사, P.20)에서 봉사군이 호랑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봉소에 대한 평가가 세인에게 좋지 않았음을 당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봉사군은 되지 말지니, 살아서는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죽어서는 백성을 잡아먹는다.” (봉소, P.20)

 

마지막으로 흐뭇하고 긍정적인 내용도 하나 덧붙인다면, 비견인 고사(P.21)가 그러하다. 비견인(比肩人)은 비익조와 연리지와 같은 의미로 애정 깊은 부부를 지칭한다.

 

이 책이 더욱 특징적으로 인식되는 사유는 지은이의 독특한 배경 때문이다. 조충지는 단순한 문인이 아니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그는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천문학자, 과학자이자 발명가라고 한다. 원주율을 소수점 7자리 이하까지 계산하고 전문 수학 서적을 썼으며, 새로운 역법인 대명력을 제작하였고, 지남거(나침반 수레), 수대마(물레방아), 천리선(쾌속선) 등을 발명하였다고 하니 보통 능력자가 아니다. 이러한 작자가 지괴 작품을 지었으니 허투루 넘길 게 아니다. 귀신 세계의 실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바탕에 깔린 게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대체로 명계(冥界)와 인간 세계가 비록 그 존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람이나 귀신이 모두 실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이한 일을 서술하는 것과 인간세계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 진실과 허망함의 구별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P.168)

 

인용한 루쉰의 발언처럼 당대인들은 귀신 세계 또는 저승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를 유치하고 야만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다. 현대의 우리도 꿈과 환상, 이성과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많은 영역을 알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그네들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가 위진남북조시대 지괴소설의 참된 즐거움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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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비 지음, 김장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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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수록한 내용보다도 책 자체가 흥미를 끈다. 실린 고사의 수도 많지 않고 그나마 대체로 짤막한 이야기라서 후대의 것과 비교하면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위진남북조 시대 최초의 지괴소설집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참작하면 납득할 만하다. 게다가 내용 자체도 별다른 꾸밈이나 과장 없이 진솔하게 사건을 전달하고 있어 오히려 질박한 감흥을 준다. 지은이도 유명한 조조의 아들인 조비다. 동생을 괴롭히는 악역 군주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조조와 함께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다. 반대 의견도 있는데, <박물지>로 유명한 장화라는 설도 있다. 옮긴이의 의견에 따르면 원작은 조비이고, 장화가 속작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열이전>에는 귀신, 요괴, 신선, 도술, 저승, 유혼(幽婚), 기이한 물건, 재생, 변신, 민간전설 등의 다양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위진남북조 지괴소설의 전형적인 내용이 된다. (P.107)

 

기억에 남는 몇 편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요괴가 등장하는 고사인데, 초왕의 딸을 치료한 노소천 고사(P.16)에서 뱀 요괴가 노소천에게 대접한 음식과 돈은 모두 관청에서 훔친 것임이 나중에 드러난다. 노소천이 뱀 요괴의 제안에 응하였다면 골치 아프게 되었을 것이다.

 

주류를 이루는 유형은 귀신과 저승이 나오는 고사들이다. 죽어서 누명을 쓰자 귀신으로 나타나 자신의 누명을 벗긴 선우기 고사(P.23)는 오죽 억울했으면 대낮에 귀신이 나타나서 장부를 확인하고 상소를 올릴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장제의 아들 고사(P.49)<수신기>에도 나온 이야기인데, 저승에서도 지위 고하가 있고, 청탁의 효력이 여전하여 저승도 이승과 별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해준다. 역시 사람들의 상상력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명한 담생 고사(P.77)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인이 마른 뼈만 있는 하체로 어떻게 부부 관계를 하였고 아들을 낳았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우연히 신계에 들어가고 마침내 죽은 아내를 되살린 채지 고사 (P.81)도 흥미롭다.

 

신선에 대한 호기심은 당대에 널리 퍼진 듯하다. 비장방 고사가 3, 진절방 고사가 2, 채경 고사 2편이 실려있다. 초월적 존재로서 신선보다는 인간적 면모에 가까운 선인들인데, 비장방 같은 경우 주석에 따르면 스스로 신선이 된 것이 아니라 신선의 부적을 얻어서 귀신을 제압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부적을 잃어버려 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딱하다.

 

사슴으로 변한 팽씨 고사(P.63)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땅에 쓰러지더니 문득 흰 사슴으로 변신한다. 아버지는 무슨 까닭으로 사슴으로 변신했을까? 사슴으로 변신은 본인의 의사였을까? 아버지에게 이미 사슴의 본성이 내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슴으로 변한 아버지는 행복하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이야기다.

 

생사의 일은 쉽게 말할 수 없고, 귀신의 일은 사람이 알 바가 아니다.” (P.19)

 

죽었다가 되살아난 공손달의 혼령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인간은 귀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산자는 이승에서, 죽은자는 저승에서 각기 맡은 소임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죽은자에게 정성을 다하고 떳떳한 마음을 지닌 포선과 자손의 영달 고사(P.31)은 이것을 보여준다. 쥐가 아무리 왕주남에게 저주를 반복해서 말해도 미동도 하지 않자 결국 쥐 자신이 거꾸러져 죽는 왕주남 고사(P.92)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알려준다.

 

<열이전>은 위진남북조 최초의 지괴소설로서 후대 지괴소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진 간보의 <수신기>. 현재 <수신기>에는 <열이전>의 고사 25조가 채록되어 있는데, 일부 고사는 그대로 전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본래 고사보다 훨씬 편폭이 길고 구성이 짜임새 있으며 문학성이 높게 묘사되어 있다. (P.108)

 

이 책의 원서는 일찌감치 잃어버렸고, 현재는 다른 책에서 실린 이야기를 수집하여 재구성된 것으로 총 51조만 전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 자체만의 독자적인 이야기는 없으며 다른 책과 중첩되는 이야기들이다. 주로 <태평광기>가 출전이며, 그 외 앞서 읽은 <수신기><열선전> 등이 언급된다. 특히 <수신기><열이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확실히 <수신기>에 실린 내용이 이야기로서 세부적 구성과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 지괴의 발전을 비교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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