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기 - 신화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간보 지음, 임대근 외 옮김 / 동아일보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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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표적인 지괴소설집이다. 지괴 설화가 다루고 있는 귀신, 신선, 도사,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거의 모든 유형의 이야기가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수신기> 전체를 다 읽어볼 의도는 없었고, <수신기, 괴담의 문화사> 정도의 개략과 해설로 만족하려는 생각이었다. 막상 그 책을 읽고 나니 전체 이야기가 궁금해져 다소간 반복적이고 지루한 내용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결국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시중에는 <수신기>의 네 가지 번역본이 나와 있다. 전병구(자유문고), 임동석(동문선/동서문화사), 도경일(세계사), 그리고 이 책이다. 전병구 판과 도경일 판은 나온 지 오래되었고, 임동석(동서문화사) 판은 이야기 내용보다는 원문과 주석 등 한문 번역과 해석에 관심 있는 이에게 적합한 유형으로 판단되어 이 책을 선택하였다. 이 책은 원문을 수록하지 않고 있으며, <수신기> 내용 자체를 현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초심자를 배려하고 있다.

 

이 책의 이야기는 신기한 일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말해준다. (P.9)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가 신기한 이야기 모음’(P.5) 책을 만들어 낸 까닭에 대해서는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간보는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에 열린 자세를 보인다. 신기한 일이 반드시 터무니없고 근거 없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견해다. 당시의 상식과 문명 수준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먼 훗날 현실화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적지 않다. 따라서 지은이가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개연성이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허무맹랑하다고 간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그 당시 식자층의 일반적 견해에 해당할 것이다.

 

20권에 기록한 수백 편의 이야기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일화도 제법 많다. 조조와 좌자(P.31), 조조와 원소(P.441) 설화가 그러하다. 죽은 원소가 도삭군이라는 신령이 되었는데,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 살아서와 죽어서 모두 조조에게 패배하는 원소가 딱할 지경이다. 공자의 이야기도 있다. 공자가 사후 수백 년 뒤에 일어날 일을 상세하게 예언(P.70, P.231)하는 사례는 공자의 권위에 기대려는 마음일 것이다.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않은 공자가 설화에서 천연덕스럽게 귀신과 도깨비의 이치를 설파하는 대목(P.318, P.488)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육축(六畜)과 거북, , 물고기, 자라, , 나무 등은 오래되면 신령이 붙어 요괴로 변한다. 그래서 오유(五酉)라고 했다. 오유는 오행의 다섯 방위마다 그에 상응하는 요괴가 있다는 것이다. ()는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P.488)

 

신기한 자연현상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일식과 월식을 군주의 품행에 결부시킨다거나 가뭄과 폭우에 대해 임금 또는 지방관이 하늘에 빌거나 하는 등, 사람 또는 가축이 기형을 출산하거나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남자와 여자의 성이 바뀌는 사례의 함의를 찾으려는 노력 등은 그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려는 어떤 행동에 대한 징조로 해석하고 있음을 이 책의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 자연과 인간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존재이어서다. 따라서 자연의 변괴는 인간 세상의 재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니 어찌 허투루 넘길 수 있겠는가. 또한 남녀관계, 신분질서, 하다못해 패션에 있어서 인간 사회의 기존 질서에 어긋나는 현상도 역시 재앙을 가져온다. 이것이 당대인의 전통적 해석이다.

 

여러 제후와 패악한 수장들이 천자의 권위를 침탈하거나 나눠 가지면 수말이 망아지를 낳는 해괴한 일이 일어난다. 위에 천자가 없고 제후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말이 사람을 낳는 괴변이 생긴다.” (P.149)

 

음기가 극에 달해 양기로 변했으니, 이는 신분이 낮은 이가 높은 자리에 오를 징조다.”

그 뒤 조조가 벼슬도 없는 평범한 신분에서 시작해 훗날 결국 왕업을 일으켰다. (P.184)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시대와 등장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어 상당한 역사적 개연성을 보여준다. 얼핏 읽으면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게다가 등장인물은 대부분 역사적 실존 인물이니 우리가 잘 모르는 숨은 일화로 생각하기 딱 좋다. 점을 잘 치는 순우지와 곽박의 고사라든지 유명한 의사인 화타의 고사가 그러하다. 장자문, 즉 장후가 등장하는 5’의 여러 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박물지>의 저자인 장화에게 도전한 천년 묵은 여우의 비참한 최후(P.460)는 당대에 박학다식으로 유명한 장화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수신기>에 실린 모든 이야기를 하나하나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다. 압도적인 분량을 차지하는 게 귀신이 등장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귀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눈앞의 상대방이 귀신임을 알게 되는 이야기는 귀신의 존재 여부가 과거부터 논란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귀신이 온갖 사물에 달라붙어 있음을 볼 때 애니미즘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개의 귀신이 인간을 괴롭히거나 해악을 끼치지만, 간혹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든가 하는 예도 있고 때로는 인간이 귀신을 다스리거나 심지어 잡아서 팔아먹는 고사도 있다. 인간과 귀신 간 애틋하거나 아쉬운 사랑 이야기도 전한다. 담생의 고사는 대표적이며, 특히 귀신과 결혼하는 노충(P.419) 이야기는 한편의 잘 구성된 서사를 보여준다. 인간과 귀신의 인연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데, 결혼하여 해로가 가능한 경우 결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례 아니면 인연을 맺었지만 3일 밤낮이 시한인 경우와 같이 다양하다. 주목할 점은 남자 인간과 여자 귀신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남자들의 은밀한 욕망과 판타지를 반영한 이야기라고 하겠다. 반대의 사례는 거의 없지만 있더라도 귀신인 줄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지며 나중에 이걸 알게 된 여자 인간은 수치심으로 목숨을 끊는 결말로 이어진다. 남성 중심 사회의 전통 봉건적 사고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은 육신이 없고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을 가지는 게 일반적이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이승의 지방관에게 호소하는 귀신도 있는 걸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종요의 고사(P.426)를 보면 피 흘리는 귀신도 나타나니 사람과 귀신의 경계가 모호하기조차 하다.

 

오래 묵은 동물이 사람으로 변신한다든가 신선과 귀신의 존재, 꿈과 백일몽, 죽은 사람의 부활, 기이한 자연현상, 은혜 갚은 동물 등 세인의 호기심을 끌 만한 온갖 소재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는 건 신기함에 끌리는 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인과응보라는 공통점은 있다. 사람, 동물, 귀신 등에 대해 친절과 선의를 베풀면 보답을 받게 된다.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개 이야기, 단장(斷腸) 고사를 낳게 한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고사를 통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다양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자 하는 겸양의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다.

 

억울하게 죽어 나무가 된 채 가지와 뿌리가 엉키는 상사수(相思樹)가 된 한빙 부부 고사,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을 바친 아들의 처절함이 돋보이는 간장과 막야 고사, 당대의 가치관으로서는 절대적인 하늘도 감동할 만한 효자, 효부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만든다.

 

당대에는 우주 현상을 음양오행설로 이해하던 시기였다. 음과 양의 두 정기는 오행의 이치에 따라 형상을 달리한다. , 하늘, 인간, 남자는 양이며, , , 귀신, 여자는 음에 해당한다. 만물의 형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변화한다. 당대인들이 귀신에 대해 긍정적인 연유도 이것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차면 넘치듯이 한쪽 정기가 극에 달하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이렇게 보면 인간과 귀신, 인간과 동물 등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다른 형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동질성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 신화와 관련된 고사도 눈에 띄는데, 복희와 여와에게는 용납되었던 남매혼이 인정되지 않아 비극으로 마친 몽쌍씨(蒙雙氏) 고사(P.353)가 안타깝다. 반호 고사는 유명한데, 이 책에서는 반호의 자식들이 만이(蠻夷)임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결국 개의 자손이므로 부정적 인식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동명왕 고사(P.356)가 소개되어 있어 우리로서는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지은이의 순전한 창작이 아니다. 이런저런 경로로 듣거나 읽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설화집이나 지괴소설집의 내용과 중첩되는 이야기도 제법 있을 것이다. 차이점은 지은이가 단순히 이야기 기록자에 그치지 않고 뼈대를 가다듬고 과도하지 않은 수준에서 살을 붙여 훨씬 이야기답게 정리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여럿 있다는 데 있다. 아마 이 책 정도라면 위진남북조시대 지괴소설의 진수를 감상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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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선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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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한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신선 70명의 사적을 기록한 열전이다.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신선 설화집이자 신선 전기집”(P.181)이라고 하는데, 후대 신선 관련 저작의 원전에 해당한다. 해설에 따르면 저자는 전한의 유향이라는 설과 후대인의 위작이라는 설로 대립한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유향은 이 책 외에도 <전국책>, <열녀전>, <설원>, <신서> 등을 남긴 유명한 저술가이므로 가능성은 높다고 하겠다.

 

책의 구성을 보면, 70명의 전기는 각 몇 줄에서 한 면을 넘기지 않는 간략한 내용이다. 48구로 된 찬사가 매 편 덧붙여 있으며, 맨 뒤에는 총찬(總讚)’이라고 해서 저자 후기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 책을 쓴 의도와 신선을 바라보는 관점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오늘날 우리는 신선(神仙) 또는 선인(仙人)은 옛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공의 신적인 존재 정도로 치부한다. 저자는 신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 다만 그가 이 책에 기록한 인물 모두를 진짜 신선으로 여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무에는 [......] 180여 종이나 있으며, 풀에는 [......] 장생불사하는 것이 1만여 종이나 있는데, 한겨울에 서리와 눈을 맞고도 시들지 않고 울창하다. 이러한 부류를 본다면 어찌 신선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겠는가? (P.178)

 

70명의 신선은 신농씨, 황제 등과 동시대를 살았던 적송자, 영봉자에서 시작하여 목우, 현속처럼 전한 시대의 선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역사상의 실존 인물은 6(노자, 여상, 개자추, 범려, 동방삭, 구익부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실존 인물의 행적이 사서의 기술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채롭다. 예컨대 개자추는 역사에는 산에서 불에 타서 죽는 결말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신선이 되는 결말로 미화하고 있다.

 

신선의 성별은 대다수가 남자이지만, 구익부인을 포함하여 강비이녀, 창용, 모녀, 여환처럼 여자 신선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이 중에서는 여환(女丸)의 사례가 주목할 만한데, 주막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방중술의 요체를 알게 된 후 여러 젊은이와 교접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선이 되는 데는 도덕성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나 보다. 방중술로 선인이 된 사례는 용성공(容成公)도 해당한다. 이처럼 신선이 되는 데 있어 성별은 물론이고, 신분상에서도 위로는 왕족에서 아래로는 서민과 거지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귀천의 제약이 없는 점에서는 비교적 평등하다고 할만하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선인을 꼽아보면, 악전(偓佺)은 장생의 소나무 열매를 요임금에게 보내주었는데, 요임금이 너무나 바빠 복용하지 못하여 장생하지 못했다고 한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할 때 소극적 반대를 한 무광(務光)은 훗날 백이 숙제를 연상시킨다. 육통(陸通)은 접여(接輿)와 동일인인데, <논어>에서 공자에게 봉황의 덕이 쇠퇴했다고 말한 인물이다. 계부(桂父)는 저 멀리 베트남 남부 지역 출신이며, 하구중(瑕丘仲)나중에 부여(夫餘) 호왕(胡王)의 역사(驛使)가 되어 다시 영 땅에 왔다”(P.80)라고 하여 우리 역사와 관련성을 지닌다. 안기선생(安期先生)은 진시황에게 불로장생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퉁소로 봉황 소리를 낸 후 봉황과 함께 날아가 버린 소사(簫史)와 농옥(弄玉)의 고사는 아름답고 애틋하다. 한편 자주(子主) 편을 보면 다른 신선의 하인이었다고 하니 신선 세상도 신분 제도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실재성과 진실성에 대한 의심의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기술된 내용을 읽다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옛사람들의 은밀한 욕망과 상념을 살짝 들여다보는 흥미로움을 느끼게 된다. 신선이 되는 방법에 따라 세 가지 등급이 있다는 점, 즉 천선(天仙), 지선(地仙), 시해선(尸解仙)에 대한 설명(P.67)이 그러하다. 신선은 대개 불로장생하는 존재이지만, 신과 같이 영생하는 유형도 있는 반면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장생하는 유형도 있어 방법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신이라고 할 때, 여러 선인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부활하지만, 어쨌든 이런 점에서 신선은 신과 인간의 중간 수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선 사상은 도교에 기원하고 있는데, 황제와 노자를 자신들의 원류라고 믿기에 황로(黃老) 사상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70명 중에 황제와 노자가 들어있음은 당연한 까닭이다.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을 구하기 위해 삼신산으로 많은 사람을 보냈던 진시황과, 못지않게 신선을 찾아 헤맸던 한무제를 보면 인간의 숙명을 향한 두려움과 이를 회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볼 수 있다. 최고의 권력자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처지의 사람들도 수명, 지위, 신분, 빈부를 초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너무나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내재적 약점에서 비롯하거니와 믿고 꿈꾸는 동안 현실의 가혹함을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중국 민간신앙에서 도교와 신선이 인기를 끈 점이 이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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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다음 이야기 1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삼국지 다음 이야기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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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연의>의 애독자로서 결말을 항상 안타깝게 느꼈다. 의로운 촉한이 패자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반삼국지>를 읽기도 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궁금하였다. 시중에 이 궁금증을 달래줄 마땅한 대중 역사류의 책은 마땅치 않았다. 이후 시대는 역사서에서 흔히 516국 시대니 아니면 위진남북조라고 일컫는 중국사에서 별로 인기 없는 시기였다.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로 이어지기는 과도기 정도로 여겨지는 주목 받지 못하는 때로서.

 

이 책의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동양고전 연구자이자 번역가로서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갑자기 대중 역사서를 들고나왔다. 이 책에서 당연히 학문적 깊이와 새로운 학설 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망각의 늪에 빠져있던 위진남북조 시대에 빛을 비추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독자의 시선과 구미에 맞도록 일목요연하면서도 흥미롭게 기술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성공적이다. 물론 읽다 보면 정말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의 홍수와 각종 사건에 허우적대는 나 자신을 지켜보는 경험도 하게 된다. 이를 저자에게 책임 지울 수 없다. 10권 분량으로 풀어쓰더라도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격변기이자 전환의 시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혼란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본격적인 역사 서술에 앞서 저자는 제1장에서 새삼스레 시대구분을 거론하고 있다. 요컨대 516국과 위진남북조, 혹은 양진남북조라는 시대 구분명은 역사의 본질을 오도할 의도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신 저자는 서진남북조 명칭을 내세운다. 삼국 시대를 잇고 있으므로 역사 전개로 볼 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하면서.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용어였건만 시대구분을 통해 당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준이 바뀔 수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진남북조는 서진남북조로 바꾸는 게 타당하다. 사실 그래야만, , , 오 등 삼국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다툰 삼국 시대와 그 이후의 서진남북조 시기가 확연히 구별될 수 있다. (P.20)

 

시대구분의 용어와 관계없이 이 시대는 일대 혼란기다. 후한 멸망 이후 당나라가 들어서기까지 어떤 왕조도 보통 몇십 년, 잘해야 백여 년을 겨우 버텨냈을 뿐이다. 조조가 기틀을 다진 위나라는 자손들이 사마씨에게 찬탈당했으니 역사는 반복됨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일국의 개창자 또는 중흥자는 당대의 영웅이다. 조조, 유연, 석륵, 석민[염민], 부견이 그러하다. <삼국지연의>에서 악역을 도맡아 비난받고 있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 의론이 분분함을 기억하자. 소설과 역사는 분명 다르다. 하물며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성한(成漢)조차도 나라를 세울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 있었기에 개국할 수 있었음은 분명한 이치다.

 

문제는 영웅의 후손들이 항상 선조에 걸맞은 인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명군 뒤에 암군(暗君)이 뒤따르는 게 세상 이치다. 보통 정도만 해줘도 수성에 문제가 없을 터인데 군주 자리에 있는 자의 수준이 밑바닥에 있다면 나라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지 못하게 된다. 서진의 사마염 자신은 재위 동안 호색과 방종으로 점철하였지만, 최소한의 임금 노릇은 하였다. 그가 자신의 후계자로 자타공인 우둔한 혜제에게 물려주는 순간 서진은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평한다.

 

진혜제는 비록 암우하기는 했으나 포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광대한 진 제국을 이런 어리석은 군주 아래 다스리도록 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무제 사마염은 멀리 보는 식견이 없었다. (P.142)

 

황권을 가황후가 좌지우지하면서, 왕족들과 다툼이 생겼으며 이것이 팔왕의 난으로 이어져 결국 서진은 외침이 아닌 자체 모순으로 붕괴하였다. 오랑캐의 침입은 쐐기를 박은 정도에 불과하다. 모든 조명(詔命)은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당당하게 설파하는 가황후를 통해 황권 유린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중심의 한족 주변에는 항상 유목민족이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다. 통치가 잘 이루어질 때면 평화가 이루어지지만, 혼란기에는 국경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쉽게 중원을 욕심내지 못하며 한번 휩쓸었다가 다시 원래의 거주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유목민족이 비로소 중원에 터전을 잡고 중국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이 된 것이 서진남북조 시대다. 서진은 혼란에 빠져 제풀에 무너져 사회질서를 잡을 주도 세력이 사라졌으며, 동진은 회수와 장강으로 멀리 내려가 자기네 체제 안정과 유지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이때 흉노족, 갈족, 강족, 저족, 선비족 등은 중원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게 되어 제각기 나라를 창건했기에 ‘516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정보와 통신이 제한된 옛날에 서진이 혼란하다고 해서 유목민족들이 쉽사리 들어올 생각을 품지 못한다. 그래도 어떤 계기가 있어야 그들이 중원에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은 언제나 야만족의 힘을 빌려 세력 다툼에 이용하고자 하는 한족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팔왕의 난이 바로 이러한 계기가 되었다.

 

도독유주제군사 왕준은 산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곧 변경 지역의 연합 세력인 선비족과 오환족의 기병들을 이끌고 동해왕 사마월의 동생인 동영공 사마등과 합세한 뒤 업성을 향해 진공했다. (P.135)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유목민족의 약진을 일대 재앙이자 흑역사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당시 유목민족이 침공했을 때 한족을 대상으로 무지막지한 살육과 탄압을 자행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석민의 무시무시한 살호령(殺胡令)의 배경이 이의 반작용이라고 해도 과언을 아니다. 기실 한족과 유목민족을 상대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인권 개념이 희박한 당대로서는 피점령민들은 노예이자 착취의 대상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동아시아의 역사가 아닌 한족의 중국사로 바라보게 하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의 역사공정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 관건은 북방 민족이 중국사의 전면에 등장해 주도권을 장악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있다. 필자가 본서를 펴낸 이유다. (P.31)

 

중국 역사를 거시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서진남북조 시대는 새롭게 다가온다.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지리적 무대에서 한족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다투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후 중국 역사에서 수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유목민족이 전 중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이의 전초가 서진남북조 시대다. 또한 결과적으로 좋건 싫건 간에 한족과 유목민족은 중원에서 한데 어울려 살게 되었다. 상이한 민족 집단 간에 교류가 발생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거칠게 말해서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중국 문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고 문화 발전의 토대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호족의 문화는 한족 문화에 침전돼 있던 낡은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 내는 역할을 했다. 이는 훗날 수.당이 천하를 통일한 후 풍부한 사상적 기초를 닦는 근본 배경이 되었다. (P.143)

 

분열과 통일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난세의 영웅들은 진시황과 한 고조처럼 제각기 천하통일의 군주를 꿈꾼다. 전진(前秦)의 부견에 유달리 저자가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유는 그가 대업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인물인 동시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가장 어처구니없이 몰락한 영웅이어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참모 왕맹이 더 살았다면 중국 역사의 미래는 달라졌을 것이다. 비수 전투의 참담한 결과는 외화내빈의 전진의 실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부견의 꿈은 웅대하였지만, 다민족국가를 이루고 유지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전진의 사례를 통해 주축 민족의 존재가 필요함을 더욱 깨닫게 한다.

 

야만적이지만 역동적인 북조의 왕조들과 비교해 남조의 동진(東晉)은 정적이고 유약함을 적나라하게 노정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유목민족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지 않았다면 동진은 일찌감치 몰락하고 말았을 정도로 취약한 국가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어두운 군주, 임금과 귀족 간 권력다툼, 가문의 이익과 번영을 중시하는 거대귀족 등이 어우러진 동진에서 북벌에 나선 유곤과 조적의 존재가 돋보이고, 실패로 끝났지만 환온의 수차에 걸친 마지막 시도는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왕돈이나 환온과 같은 인물이 차라리 옥좌에 올랐다면 그토록 형편없이 스스로 몰락하는 국가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돈 및 환온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동진의 무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환현의 찬위 역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에 실패로 끝났으니 유유(劉裕)와 같은 호걸을 수하로 거두고자 하는 과욕을 부렸다. 맹수를 다스리려면 스스로 그만한 역량을 갖추어야 가능하다. 환현이나 석륵의 일족을 도륙한 석호를 볼 때 토사구팽의 역설적 정당성을 생각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안정과 평화 속에 전열을 정비하여 통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동진, 끊임없는 내홍으로 자기 역량을 갉아 먹고 마침내 자멸하고 말았으니 100년여를 버틴 것만 해도 차라리 장한 일이라고 해야겠다.

 

정사(正史)는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남쪽으로 쫓겨난 동진에서 바라보았을 때 북조의 소위 오랑캐 왕조들에 대한 평이 좋을 리가 없다. 한족이 기록한 역사를 맹종하게 되면 중국 역사의 이해는 편협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통해 삼국 시대 이후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되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점이 커다란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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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 소설선 - 한국문학과 관련있는
김종군 지음 / 박이정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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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앞서 중국 전기소설 모음집을 읽었는데, 번역과정에서 편집과 윤색이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보다 원형에 가까운 번역집을 찾던 중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전기소설 20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먼저 읽은 책과 중복되는 작품도 있는 반면 새로 실린 작품도 적지 않아 충분히 보완되는 장점도 있다. 이 책의 출간 의도는 표제(‘한국문학과 관련있는’) 및 옮긴이의 머리말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책은 우리 고소설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려고, 옛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어 고소설 작품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당대 소설 전기’ 20편을 엄선해 편찬하고, 해설을 붙여 번역 저술한 것이다. (<머리말>에서)

 

따라서 각 작품의 해설에 해당 작품이 영향을 미친 우리나라 고소설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어 양자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왜전><이춘풍전>, <옥단춘전>과 관계가 있으며, <배항전><운영전>,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앞서 읽은 책과 중첩되는 작품은 특기할 사항이 아니면 생략하고, 새로 읽은 작품 위주로만 간략하게 평을 남긴다. 앞서의 책과 자연스레 비교하게 됨은 어쩔 수 없다.

 

1장 애정(愛情) 소설류 : 이왜전, 곽소옥전, 앵앵전, 비연전, 장한가전, 유선굴, 이혼기

 

<이왜전>은 젊은이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극적인 인생 반전과, 개과천선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이왜의 변신이 결합하여 여전히 큰 재미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상투적인 교훈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젊은이를 죽을 지경까지 매질하고 버려두는 장면과, 훗날 아버지가 아들과 이왜의 결합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정식 혼인 절차를 밟게 하는 장면은 당대의 문화와 관습의 중요성을 짐작게 한다.

 

<곽소옥전>은 곽소옥을 배신하는 이생의 비겁하고 비열한 행동에 여전히 분개할 수밖에 없다. 곽소옥이 이생에게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닌데, 그렇게까지 냉정하고 잔인한 처사를 해야 했을 것인가? 곽소옥이 한을 품고 저주함은 당연하다. 다만 이생의 부인들이 덩달아 애꿎게 고초를 겪어야 하는 점에서 있어서는 지나친 감이 있다.

 

<앵앵전>은 먼저 유명한 회진시(會眞詩)’ 30운 전문이 수록하고 있어 앞서의 책과는 차별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장생의 초반부 호언장담이 훗날 자신의 행동과 자체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야말로 진정한 호색자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대저 모든 사물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것은 마음속에 깊이 박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냉정하게 맺었던 정을 던져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P.57)

  

은나라 주왕과 주나라 유왕의 고사를 언급하는 대목은 확실히 비겁한 변명이다. 앵앵을 나라를 망친 여인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앵앵에 대한 장생의 변심 원인도 어렴풋이 찾을 수 있는데, 앵앵의 적극성이 당시는 좋았을지 몰라도 훗날 오히려 의구심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앵앵도 이를 알아차린 듯하다. 어쨌든 인연이 아닌 남녀의 만남은 헤어짐이 불가피하지만 만남과 헤어짐에 있어 예의와 존중은 필요하다.

 

어찌 기약했겠습니까? 군자를 보고 정감을 억제치 못해 스스로 남자에게 몸을 던져 맡겨버리는 부끄러움을 이루리라는 것을... 다시는 분명하게 받들어 모실 수 없게 된 것이 죽을 때까지 영원한 한이 되고 말았으니 한탄을 품은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P.67)

 

<비연전>에서 비연과 조상의 애정 행각은 윤리적 기준에서 보면 분명 불륜이고 잘못이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윤리의 틀에 좌우될 성질의 것인가를 보면 당대는 물론 현대에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현상이라고 하겠다. 부정인 줄 알면서 원하는 남자,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 모든 비난과 피해는 유혹자가 아닌 피유혹자가 죽음으로 감내하게 되고 만다. 영혼이 된 비연의 말은 섣부른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지 말라는 경고다.

 

선비들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당신의 행동은 완전무결한지요? 어찌 거만스럽게 한 마디 말로써 꾸짖고 비난하여 괴롭게 합니까?” (P.87)

 

<장한가전>은 백거이의 장한가탄생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연을 장한가전문과 함께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이 또한 앞서의 책보다 나은 점이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유선굴(遊仙窟)>이다. 신선의 굴에서 노닌다는 표제처럼 주인공이 속세를 떠난 곳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하룻밤 사랑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다른 작품들보다 월등히 긴 분량을 자랑하는 이 작품은 또한 매우 많은 시를 수록하고 있어 운문의 비중이 큰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양만 많은 게 아니라 당사자들의 속마음을 드러내어 사건 전개의 계기가 되는 중요한 역할을 시가 담당하도록 하고 있음도 특기할 만하다.

 

선녀와도 같은 여인의 집에서 대접을 받으며 그녀와 올케언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이 바라는 것은 그녀와의 뜨거운 하룻밤이다. 미모에 대한 낯간지러운 찬미는 유혹의 상투적인 필수 단계이리라. 올케언니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그녀에 대한 육체적 결합에 성공하는 여정을 점층적으로 전개하는 점과 은유적인 외설 시구를 보면 단순한 애정소설보다는 성애소설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애석한 것은 그 머리 뾰족한 것이, / 종일토록 하는 일없이 가죽 속에 박혔음이라. (P.133)

자주 드나들어 꺼풀이 응당 느슨해졌지만, / 빈번하게 문질러서 쾌감은 되레 더해졌도다. (P.134)

오직 다리를 위로 번쩍 추켜올리게 된다면, / 그놈은 스스로 두 눈을 번쩍 뜨겠구먼. (P.140-141)

배꼽 아래를 잡아당겨 들어가게 할 것 같으면, / 백발도 쏘게 되어 맞추는 수가 많아진다오. (P.146)

 

주인공과 십랑은 하룻밤 이후 작별을 하는데 곧 이별을 암시하고 있다. 십랑이 속계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다시 접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은 정식 절차를 거친 당당한 만남이 아니라는 점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2장 별세계(別世界) 소설류 : 배항전, 보강총백원전, 침중기, 남가태수전, 유의전, 이위공전전, 이장무전, 정혼점

 

<배항전>은 우연한 인연으로 배항이 선녀와 혼인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가 운영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선군, 선녀, 옥황상제 등 도가의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강총백원전>은 창작 의도가 여전히 구양순을 향한 비난과 예찬 중 어디에 해당할까 생각하게 한다. 다만 구양흘이 전쟁터에 아내를 동반한 점은 무리한 설정이다. 동료와 부하들이 전적으로 목숨을 거는 곳에 홀로 예쁜 아내를 데리고 간 그를 바라보면 어떤 심정일까?

 

<남가태수전>의 결론은 다소 허무주의적이다. 만사가 허황한 것이라면 인간은 이생에서 무슨 의미로 생을 꾸려나갈 것인가. 비록 높은 곳에서 보면 우글대는 개미들에 불과하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주어진 생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의전> 또한 도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유의의 마음과 전당군의 위력에 굴하지 않는 당당한 지조는 마침내 용녀 아내를 얻게 한다. 인간과 용의 결합이라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전혀 해괴한 게 아님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넘어서 인간과 귀신의 교합을 보여주는 작품이 <이장무전>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은 한계를 모른다. 선녀, 변신한 동물에 이어 죽은 영혼까지도 욕망을 갈구하는 대상으로 변모시키다니. 하긴 요즘은 좀비물조차도 좀비와 연애하는 컨셉도 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겠다.

 

<이위공정전>은 당나라 초기의 명장인 이정(李靖)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승상이 되지 못한 이유를 불가항력적인 데서 찾고 있다. 인간의 힘을 벗어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정혼점> 역시 비슷하다. 남녀의 혼인은 어릴 때 하늘이 맺어준 운명이므로 제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위고의 기이한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3장 호협(豪俠) 소설류 : 곤륜노전, 무쌍전, 홍선전, 섭은낭전, 사소아전

 

<곤륜노전>의 결말 대목은 앞서의 책과 차이가 있다. 앞서서는 권력자가 곤륜노의 능력에 감탄하여 자신의 부하로 삼고자 하는 의사를 비치지만, 여기서는 권력자가 곤륜노의 능력을 일종의 재앙으로 간주하고 그를 제거하려고 군사를 보낸다.

 

<무쌍전>의 결말은 더욱 충격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협객 노인이 무쌍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본인을 포함하여 10여 명의 목숨을 해친다. 이는 구출 과정의 영원한 보안을 위한 나름의 불가피한 조치라고 협객은 밝히지만, 독자와 작가의 생각은 분명 다르다. 두 사람의 사랑 실현이 과연 많은 목숨을 억울하게 바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앞서의 책에서 편역자가 임의로 윤색하여 희생자가 없도록 하고 있음은 이런 의문에 기인하여 나름대로 조처한 것으로 보인다.

 

무쌍이 난리를 만나 가정이 적몰되어 궁녀로 들어가고, 왕선객의 구출하려는 노력은 목숨을 걸었도다. 마침내 그 노인을 만나 기이한 방법을 통하여 무쌍을 구출했고, 이 과정에서 원통하게 목숨을 바친 자 10여 명에 달하였다. (P.294)

 

<섭은낭전>은 기이하다. 그녀가 무술에 정통하게 된 과정이 그러하고 유 절도사를 섬겨 암살에서 구해낸 점 등도 마찬가지다. 다만 과유불급이랄까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과장하여 그려내다 보니 일반의 사람답지 않은 점이 두드러진다. 은낭의 아버지가 그녀에 대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사소아전>은 부친과 남편의 원수를 갚는 여인의 사연을 나타낸다. 죽은 영혼이 꿈속에 나타나 범인의 이름을 수수께끼로 알려주며, 작가가 사건에 직접 개입하여 이를 해석하여 범인의 실체를 밝혀 주는 대목은 이채롭다.

 

이 책은 앞서의 책에 비하며 확연하게 원문에 충실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작중의 시는 번역문과 원문을 병기하고 있으며, 작품 원문 전체를 책 후반부에서 별도로 싣고 있어 원문 또는 한문에 관심 있는 사람이 비교하여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당대 전기소설을 감상하고 싶은 독자라면 두 책 중에서 이쪽을 더욱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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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기, 괴담의 문화사
김지선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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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기(搜神記)>는 중국 동진의 역사가인 간보가 쓴 지괴소설집이다. 표제 그대로 귀신 이야기 모음집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정사를 집필한 역사가이자 유학자가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썼다니 특이하면서도 이례적이다. 중국 소설사에서 보았을 때 위진남북조 시기의 지괴류 이야기는 소설로 간주하거나 소설이 아닌 단순히 설화 모음으로 판단하는 등 애매한 영역에 걸쳐 있다. 다만 중국 소설의 기원에 해당하는 점은 분명하다.

 

저자는 앞서 읽은 <신이경>의 옮긴이다. 후기에서 비주류의 지괴 장르를 전공한 애환을 밝혔듯이 보기 드문 지괴류 전공자로서 <수신기>의 내용을 통해 위진남북조의 귀신 이야기가 담고 있는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의 세계를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당대인들의 현실과 원망을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 표제의 괴담의 문화사가 이를 의미한다.

 

귀신 이야기는 적어도 잠깐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종교적.민속적 맥락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공포보다는 연민의 시선으로, 자극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귀신을 바라보고 타자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P.198)

 

자칫 이런 유형의 저작은 대중의 흥미에 영합하기에 십상이다. 선정적이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선별하고 흥분을 부추기는 쪽으로 해석을 덧붙이면서. 시종일관 저자의 어조는 차분하다. 이야기를 흥미 위주로만 가볍게 읽고 스쳐 지나가지 말 것을 독자에게 신신당부한다. 이야기에 담겨진 당대인들의 희로애락과 꿈을 놓친 게 있는지 천천히 음미해볼 것을 되풀이하여 권유한다.

 

<수신기>는 이렇듯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괴력난신의 이야기를 단지 호기심으로 접근하지 말고, 천천히 다양한 방법으로 읽고 음미해보라고 말이다. (P.61)

 

<수신기>에서의 신()은 포괄적 개념이다. 신성한 신보다는 신선, 도인, 귀신에 가깝고 신비, 신기, 기이와도 통한다. 보통 사람의 이해로 파악되지 않는 모든 것을 신()으로 간주한다.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편하다. 영험한 초능력을 지니고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에 우리는 경외감을 품는다. 천년 묵은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이나 홍콩 영화를 통해 이미 친숙하다. 우리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귀신은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 의의를 지닌다. 하찮은 벌레나 사물에도 영혼이 있고 신기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장에 쉽사리 거부하지 못 한다.

 

왜 우리는 괴담에 끌림을 당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이다. 유한한 이해의 한계 내에서 유한한 삶을 살다가 우주 자연의 일부로 스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이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평등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에 있다. 제아무리 이승의 권세가 막강하더라도 세월의 흐름을 이겨낼 수 없다, 진시황도 한 무제의 바람도 헛될 뿐이다.

 

귀신이나 영혼은 저 너머의 세계, 죽음을 연상시킨다. 당연히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부적이나 주문 등으로 귀신을 제압하고 무덤 속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죽은 혼을 불러들여 산 사람과 만나게 해주는 이야기는 일종의 위안이 된다. 이야기만으로도 인간은 죽음과 귀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P.35)

 

공포는 생소와 무지에서 비롯한다. 이미 알고 있는 현상과 존재라면 두려움을 극복할 여지가 생긴다. 게다가 무서운 이야기는 재밌기 마련이다. 무서워하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화면을 쳐다본 경험은 누구나 갖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귀신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던 공자도 후대에 괴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판국이다. 금지한다고 외면한다고 B급 장르가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는 솔직해져야만 한다. 오랜 억압과 무시에도 질긴 생명력을 발휘한다면 존재 의의를 인정해야 함을. 인간이란 존재의 내면에 이것을 향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결코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장르가 여전히 쓰이고 읽히고 있는 데에는 문화사적.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 내면에는 너무도 다양한 감정들이 얽혀 있어 기쁨과 슬픔, 감동 등과 마찬가지로 공포, 기괴함, 섬뜩함 등의 감정들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P.194)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뀔 수 있다.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신선과 도사에 대해서는 범인의 유한한 능력을 초월하고자 하는 바람을, 남가일몽 같은 부질없는 꿈에서도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을 소망하는 기대를 읽을 수 있다. 삶이, 현실이 힘겨울수록 사람은 꿈에 기대고자 한다. 저자는 오히려 더 많은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부가 서로를 잡아먹는 이야기는 황당하고 기괴하다. 과연 사실일까 의심스럽다.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만약 그렇다면 왜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을까? 저자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풍자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목이 잘려나가도 굴하지 않는 형천 이야기와 적비 이야기는 기괴하고 끔찍함에 앞서 불굴의 의지를 떠올리게 한다. 구미호 하면 떠올리는 팜므 파탈이 사실은 여우의 여러 가지 변신 중의 하나임을 떠올리면 상상력을 구속할 필요가 없다.

 

소설, 영화, 만화, 게임 등의 다방면에서 지괴류의 괴담은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얄팍한 호기심과 욕망을 채워줌과 동시에 그것이 정형화된 인간과 사회의 틀을 벗어나고 자유롭고 무한한 사고와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해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괴함은 익숙한 질서를 교란하고, 폐쇄되어왔던 사유를 개방하게 한다. 정신의 해방, 그것이 우리가 판타지를 읽는 이유가 된다. (P.75)

 

열린 시선으로 이계를 바라보는 자만이 사유의 확장, 정신의 자유를 얻게 된다. (P.102)

 

간보는 <수신기>에 실린 이야기들의 사실 여부를 따지지 말고 즐겁게 읽으라고 했다고 한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가 사람의 확인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 있음을 인정하자는 동시에 이야기 자체의 흥미성을 중시하자는 뜻이리라. , 더더욱 <수신기>를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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