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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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의 교향곡 매니아 사이에는 BMS라는 작곡가 약칭이 있다.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가 그것이다. 중후장대하고 강렬하며 극적인 대편성 교향곡의 묘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작품들을 이 세 사람은 남겼다. 저자가 이 책에서 천착하는 것은 바로 쇼스타코비치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서양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같이한다. 볼셰비키 혁명과 스탈린의 공포정치, 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 시대까지. 게다가 그는 당대의 가장 저명한 작곡가로서 언제나 당국의 예의주시 대상이었다. 정권은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찬양과 비판을 번갈아 하며 그를 본보기로 삼아 예술계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표면적인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는 공산주의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소비에트인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뒤바뀌게 된 계기는 볼코프의 <증언>이 발표된 이후로 스탈린 정권에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쇼스타코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과연 증언이 쇼스타코비치의 목소리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다.

 

이 책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7번 교향곡,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다.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서 독일에 의한 레닌그라드 포위전 와중에 쓴 작품이다. 70분에 육박하는 장대함,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나타나는 강렬함과 심각함 등이 어우러져 압권을 이루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 교향곡은 작품 전후, 그리고 서방 초연을 위한 소련과 미국의 협업 등의 음악 이외 요소로 더욱 대중의 흥미를 끈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기 소비에트 사회와 예술을 다룬 역사서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이면서 쇼스타코비치의 간략한 전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전쟁 한복판에서 이 교향곡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연주되고 사람들에게 힘을 준 이야기가 있다. (P.498, 옮긴이의 말)

 

예술작품은 작가와 시대와 동떨어져 난데없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레닌그라드 전투의 성격을 알려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배경, 나아가 나치와 볼셰비키 정권의 탄생과 본질에 대해서도 다가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음악 이야기이지만, 음악을 둘러싼 인간과 사회, 역사를 다룬 다큐에 더 가깝다.

 

쇼스타코비치 애호가라면 그가 스탈린 정권에 의해 박해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5번 교향곡의 성공으로 1930년대의 대공포 시대라는 1차 위기를 넘겼고, 7번 교향곡으로 스탈린 정권의 생명 연장에 기여하였지만, 전후인 1948년 형식주의 비판은 통과하지 못하였다.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P.477)

 

당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스탈린의 공포주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몇백만 사람의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겼다. 반체제라고 의심하면 저명한 지식인, 예술가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유형에 처해졌다.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족 모두가. 오늘은 무사하더라도 내일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살아가야 했다. 제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혹자는 그가 더 당당하게 정권에 맞섰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전설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보통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축구에 열광하고, 친구들과 예술에 대하여 교류하며 우정을 나누는 그.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부모와 친척들을 지켜야 할 의무와 본분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쇼스타코비치는 예술세계에 가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그의 인간적 면모다.

 

아쉽게도 우리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없다. 그의 공식적인 발언은 시대의 압력을 감안해야 하며, 볼코프의 증언은 진의를 알 수 없고, 후대 친척과 지인의 회상은 오염과 과장을 감내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으리라.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추정하려는 시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시기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일기 때문에 누군가가 투옥되고, 편지 때문에 누군가가 총살되는 시대였다. (P.151)

 

그의 삶은 스탈린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작곡가로서 그의 주활동기는 스탈린 집권 시대와 정확히 맞물린다. 아니 그의 삶 전체는 공산주의 혁명의 발발로부터 시작하여 냉전과 데탕트, 신냉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소비에트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제아무리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 체득한 분위기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그의 작품 바탕에 깔려있음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레닌그라드 전투의 배경과 발발, 전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관계, 독소전쟁이 불가피하였고 레닌그라드의 처절한 비극이 생긴 까닭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에 의해 이미 짓밟혀졌고, 나치는 이를 마무리하려고 덤벼든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탈린은 전쟁에 앞서 레닌그라드, 나아가 소련 전체의 국방력을 불구로 만들었고, 나치 침공을 자초하였으니.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다.” 한 여성이 일기에 썼다. “우리는 쥐덫에 걸렸다.”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으로 기록되는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쇼스타코비치 가족은 다른 250만 명과 함께 덫에 걸려들었다. (P.274)

 

나치의 전략이 잔인하지만 지능적이며 효율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채 인명과 물자 유통을 끊어버림으로써 아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레닌그라드는 스스로 포위를 풀 역량이 없었고, 스탈린은 외부에서 독일군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 딱한 것은 레닌그라드 주민들뿐. 이 책은 포위된 채 굶어 죽어가는 도시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전쟁 자체가 비인간적이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없이 비인간적이다. 그 극치는 바로 인육을 먹는 사람들과,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사냥하는 무리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반대로 극한상황에서도 인간성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독일군에게 침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땅에서 썩을 겁니다. 수십만, 수백만이 이미 썩고 있어요. 그에 반해 우리의 도시는 굳건하게 버티며,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일하고 시를 쓰고 러시아 노래를 부를 겁니다.” (P.392)

 

레닌그라드 교향곡이 이 책의 내용처럼 영미와 소련 간 동맹을 맺는데 정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지는 역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서양에서의 연주를 위해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악보가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간신히 전달되는 역경은 자체로서도 극적이다.

 

이 책의 압권은 포위된 채 굶주림에 연주자들이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레닌그라드 초연을 감행하는 오케스트라와 그 연주를 듣기 위해 참석하는 시민들의 태도다. 그들에게 이는 단순한 교향곡과 연주회가 아니다. 생사를 넘나들며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바로 자신들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을 듣고 열광한 다른 나라 사람들, 소련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차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 (P.450)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처럼 7번도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해석의 차가 분분하다. 공산주의의 승리, 나치의 패배 같은 전통적 해석에서 폭압적인 전체주의 일체에 대한 냉소로 보는 해석까지. 거기에 순음악적 접근도 가능하다. 단일한 정답은 없다. 문자적 언어가 아닌 음표로 표현된 음악은 폭넓은 의미를 포용한다.

 

이 책에서 결국 저자가 주목하는 것도 음악과 인간의 관계, 좀 더 명확히 한다면 극단적 상황에서도 용기를 부여하는 음악의 힘과 그것이 실증해 보이는 역사의 실례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파괴하는 음악은 참다운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인간에게 기쁨과 위안과 용기를 주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한다. 저자가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 레닌그라드를 제재로 삼아 장대한 다큐를 쓴 의도 또한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음악의 힘과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은밀한 메시지들과 에두르는 말의 이야기, 암호로 작동하는 음악의 이야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견디도록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할 때 감옥 창살 사이로 속삭이게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여 위안을 주는 음악의 이야기이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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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포네, 또는 여우 - 벤 존슨 희곡선 대산세계문학총서 42
벤 존슨 지음, 임이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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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존슨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다. 나이로 보면 살짝 후배에 가깝다. 오늘날 벤 존슨의 성가는 셰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성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최초로 2절판 작품집을 출간하였으며, 사실상 최초의 계관시인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생전 그의 인기가 선배 못지않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만만찮은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통상 그를 도시 희극의 대가라고 일컫는다. 주로 영국 런던이라고 하는 당대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중하층 계급의 삶, 특히 권력, , 섹스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상공업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연극 향유 계층도 귀족에서 시민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궁정과 왕실보다는 자기네와 같은 서민들의 적나라한 삶에 동질감을 느꼈으며, 작가들은 도시적 삶에서 기존의 전통적 가치보다는 물욕과 금전욕 같은 일차원적 욕망이 팽배한 적나라한 사회 현실을 풍자하였다. 따라서 벤 존슨의 작품은 오히려 현대적이다.

 

존슨의 희극이 근래에 들어 재평가되고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존슨이 풍자하는 인간의 탐욕과 대도시의 생활상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P.400)

 

이 책에 수록된 두 작품도 모두 희극이다. 사기꾼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속여 넘기는 내용에서 공통성을 띤다. 선량한 시민들이 사기꾼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까닭은 탐욕에 있다. 그들은 독신 부자 노인의 상속자가 되어 거액의 유산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또는 현자의 돌을 얻어 희대의 부를 누리려는 욕망 등과 같은 저마다의 욕심에 현혹당한다. 탐욕에 지배당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독자들이 보기에는 조잡하고 유치한 사기극에 그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빠져들고 도덕 윤리마저 쉽사리 내버리는 현실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량함이 현명함과 반드시 대응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모스카) 그자들이 뭘 보려 해야 말이지요. / 불이 너무 많으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에요. 각자 / 자기 자신의 희망에 가득 차 그 생각에만 사로잡혀서는, / 자신의 희망과 반대되는 것은 / 그 이상 진실되고 명백할 수가 없고, / 그 이상 빤할 수가 없는데도, 그냥 거부하려는 거지요... (P.157, 52)

 

권선징악 또는 인과응보로 끝나는 결말에 우리는 대체로 익숙하다. 선인이 피해를 보고 몰락하는 것으로 끝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면서 해피엔딩이 된다면 우리네 양심이 용납 못 한다. 이는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속고 속이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극 중의 악인은 불행을 당하거나 엄혹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볼포네>에서 사기의 주역인 볼포네와 모스카는 물론, 피해자라고 할 법한 볼보테, 코르바치오, 코르비노가 모두 처벌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 사유다. 그들이 헛된 욕심에 법과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를 해서다. <연금술사>는 약간 다르다. 사기의 세 주역 중 돌과 서틀은 아무 이득 없이 쫓겨나다시피 한다. 페이스, 즉 제레미는 간계를 부려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한밑천을 단단히 잡게 된다. 역시 피해자인 매몬, 대퍼, 드러거와 트리뷸레이션 일행은 허망하게 재산만 날리고 만다.

 

(볼포네) 이제, 이 여우가 법에 의해 처벌되더라도, / 여러분께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 벌을 받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P.199, 512)

 

관객은 <볼포네>에서 사법적 정의가 잘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사실 관객은 극 중에서 심적으로 내내 볼포네와 모스카 편이다. 왜 사기꾼을 편드냐고 하면 그들이 덜 어리석고 덜 탐욕적이어서다. 그들은 오히려 탐욕스러운 이들을 벌주는 역할에 가깝다. 그들의 악행은 더 큰 정의 구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할까나. 관객과 그들은 심리적 공범이므로 독자는 전적으로 그들을 욕할 수 없다. 작가조차도 이를 인식하고 있기에 사법적 단죄 후에 볼포네에게 다시 한번 무대에 설 기회를 부여한다. 그래야 엄혹한 결말로 마음이 불편했을 수도 있는 관객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존슨은 탐욕보다 어리석음을 더 비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볼포네와 모스카의 술수와 책략을 전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편에 서서 같이 즐길 수 있게 된다. (P.401)

 

<연금술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주인 러브윗은 집사 제레미의 불법 행위를 슬쩍 눈감고 오히려 동참한다. 그가 자신의 재산을 불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유한 미모의 과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볼포네>의 판사처럼 위법 행위를 정죄하는 역할을 수행할 만한 배역이 이 작품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여기에서 엄격한 사법 정의를 굳이 들이밀지 않는다. 러브윗의 말을 들어보자.

 

(러브윗) 하인 덕분에 이렇게 부유한 미망인을 / 아내로 얻는 행복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 그 주인이 정직함을 조금 훼손해서라도, / 하인의 꾀를 관대하게 봐주지 않거나, / 하인도 한밑천 마련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 아주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P.395-396, 55)

 

그런데 사기를 당하는 등장인물들을 우리는 과연 선량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볼포네>에서 보나리오와 실리어의 고발로 진실이 드러날 뻔한 상황이 닥치자 볼토레는 자신의 사법 지식을 악용하여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만든다. 코르바치오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며 불효자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코르비노는 최악이다.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자신의 아내 실리어를 제 손으로 볼포네에게 바친다. 이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퍼붓는 욕설과 악담을 듣다 보면 그의 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코르비노) 집에 가서, 그 양반을 준비시키게. 내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 그리고 기꺼이 아내를 보내는지 꼭 얘기하고. / 얘길 듣자마자 / 내 자진해서 그러기로 했다고 맹세했다고. (P.85, 26)

 

(코르비노) 이 역병 같은 메뚜기야, 하늘에 맹세코, 메뚜기야. 창녀, / 악어, 네년은 악어처럼 눈물을 준비했다가, / 때가 되면 흘리려고 그러지. (P.110, 37)

 

<연금술사>의 경우 대퍼와 드러거의 욕망은 그나마 순진하고 소박한 측면이라도 있다. 트리뷸레이션과 아나니아스는 종교적 목적의 실현이라는 외피라도 지닌다. 매몬은 위선자다.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현자의 돌을 구하는 것처럼 표방하지만 그의 내심은 개인적 쾌락 충족에 있다. 관객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매몬) 이제 나도 / 솔로몬 왕과 맞먹는 숫자의 부인과 첩을 / 거느리려고 한단 말일세. 솔로몬도 / 나처럼 돌이 있었거든. (P.249, 22)

 

(매몬) 진귀한 고기 요리로 쾌락을 최고로 높일 준비를 합시다. / 그리고 다시 좀 하강했다가, 엘릭시르를 마셔 / 젊음과 기력을 새롭게 하며, / 영원히 즐기도록 합시다. / 인생과 쾌락을. (P.325, 41)

 

이 두 작품은 일부 선인도 존재하지만 비중은 크지 않을뿐더러 결말도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전편에서 유이하게 긍정적인 인물로 보나리오와 실리어가 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희생 당사자에서 벗어나지만, 부친과 남편의 처벌이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후편에서 유일하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인물이 설리다. 그는 연금술이란 게 사람을 기만하는 술책임을 간파하고 그들을 징벌하려고 애쓰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이로써 권선징악이 작가의 목적이 아님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폴리틱 우드-비 경과 카스트릴은 광대역에 가까운 배역이다.

 

마지막으로 <볼포네><연금술사>를 관통하는 특징 중 연극적 요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볼포네와 모스카는 코르비노, 코르바치오, 볼보테를 대상으로 각각 죽음에 임박한 환자 역할로 속인다. 볼포네는 한술 더 떠 약장사로 변신하여 실리어의 마음을 떠본다. 그가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법정 하사관으로 변장하다가 역시 볼포네의 상속자로 변신한 모스카에 뒤통수를 맞는 대목은 연극적 유희의 극치다.

 

<연금술사>에서 돌, 서틀, 페이스의 사기 행각은 자체로 연극이다. 그들은 각 고객의 신분과 유형에 맞춰 배역을 넘나들면서 분장과 연기를 완벽하게 수행한다. 이해관계가 엇갈린 등장인물들이 교대로 등장하여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과정을 절묘하게 설계하는 장면에서 일종의 연극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전편과 후편의 차이는 주요 인물의 다양한 배역과 변신이 후편에서 한층 더하다는 데 있다. 후편에서는 설리, 플라이언트 부인과 심지어는 집주인 러브윗마저도 변장에 동참한다.

 

존슨의 두 작품에 두드러지는 연극성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풍자하되, 웃음을 통해 그 악덕들을 유쾌한 문학 상품으로 포장하는 극작가의 전략인 셈이다. (P.407)

 

작품 해설에서는 이러한 연극성을 작가의 뛰어난 작법 솜씨인 동시에 중하층 관객을 향한 직접 비난과 자기반성을 통한 불쾌감과 반발을 희석하려는 장치로 이해한다. 대놓고 손가락질하면 기분 나쁘지만 코미디를 통해 풍자하면 웃음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심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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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요정 파데트
조르주 상드 지음, 이혜은 옮김 / 파롤앤(PAROLE&)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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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에 충실하자면 <꼬마 파데트> 정도이며, 이재희 번역본은 <소녀 파데트>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앞에 사랑의 요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까닭은 처음에 동화책으로 번역 출간하면서 접근성과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것이 너무나 친숙해져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이 책은 사정이 낫다, ‘파데트라는 주인공 이름을 살리고 있으므로. 다른 책들은 통상 <사랑의 요정>이라고만 표제를 붙인다.

 

이 작품을 단순히 파데트와 랑드르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간주한다면 참모습을 놓치는 것이다. 랑드르와 실비네 쌍둥이 형제 이야기가 소설 전반부를 주도하고 있으며, 형제간 감정의 엇갈림과 갈등이 소설 말미에 이르기까지 내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즉 프랑스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쌍둥이 형제간 사랑과 랑드르와 파데트 간 사랑이라는 두 축을 지닌 작품을 봐야 한다.

 

실비네는 몸도 마음도 동생보다 훨씬 더 어렸으며, 생각하는 것은 랑드리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랑드리로부터 똑같은 사랑을 받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비네는 둘이 재미있게 놀았던 외진 곳이나 숨겨진 장소인 둘만의 장소에 랑드리와 가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지금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은 예전에 하던 놀이를 하고 싶어 했다. (P.46)

 

아마 많은 독자는 쌍둥이 형제의 깊은 우의와 애정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실비네의 과도한 집착에 탄식을 하게 될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운명이라고들 하는 부정적 전망이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그래서일까 독자의 뇌리에 형제의 유전적 우열이 계속 떠오른다. 쌍둥이 상대방에게만 애정을 느끼며 가족 이외에 주변과 사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실비네. 나약하고 소심하기에 더더욱 감싸고 보호하는 조치와 맞물려 사회화를 성취하지 못하는 실비네.

 

심리학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실비네의 성격과 행동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리라. 형제간 단순 애정을 넘어서 상대방이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 애정을 쏟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 상태. 성인이 되어서도 둘만의 어린 시절의 사랑과 추억에 머물고자 하는 심리 상태. 동성 형제의 이성을 향한 사랑에 질투와 분개를 품는 태도. 이런 것을 누구도 정상적인 성장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실비네가 바로 그러하다. 파데트가 랑드리를 떠났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실비네에게 파데트는 사랑의 경쟁자이다.

 

파데트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비네는 우선은 자기한테 유리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제부터는 랑드리가 자기하고만 사이좋게 지낼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다. (P.185)

 

실비네에게 파데트는 랑드리의 애정을 두고 싸우는 연적이었기 때문이다. (P.203)

 

작가도 바로 이렇게 단언한다. 사실 이러한 설정은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형제간 사랑과 남녀 간 사랑은 다른 현상이며 마땅히 달라야만 한다. 양자를 혼동하면 인간과 사회 윤리의 토대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파데트의 대화로 현명하게 마무리되지만, 결말도 자못 산뜻하게 떨어지지 않는 찝찝함을 지닌다. 실비네는 쌍둥이 동생에 대한 애정을 단념하고, 파데트를 향한 새로운 감정을 억누른 채 일생을 독신과 전장에서 살아간다. 실비네의 삶은 과연 행복할까.

 

랑드리와 파데트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이 작품은 한없이 아름답고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전원 소설이다. 게다가 세속적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하는 파데트에게는 누구나 애정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파데트와 마을 사람들 간 오해와 불화는 누구 한 편의 잘잘못이 아니고, 양자 모두의 잘못이다. 사람은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타인의 언행, 복장, 행동 등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는 곧잘 비정상으로 간주되기 마련이며, 비난과 놀림의 대상이 되기 쉽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 성향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설사 대놓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들과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한다. 개인적 친밀감 또는 애정을 품은 사람만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파데트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는 랑드리처럼.

 

내가 네 얼굴 본 적이 없니?” 참을성이 바닥난 랑드리는 말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 네 얼굴이 잘 보이게 달빛 쪽으로 와봐. 네가 못생겼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난 네 얼굴이 좋아. 너를 좋아하니까. 나한텐 그게 중요해.” (P.128)

 

나중에 파데트가 자신의 말투나 태도, 옷차림 등을 조신하게 바꾸자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파데트나 동생 메뚜기의 파르르 한 반응이 없어지자 더는 갈등과 다툼의 여지가 사라짐은 자연스럽다. 게다가 파데트는 다년간 축적된 자신에 대한 편견과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마을을 떠나 타향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자 실행한다.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훗날 사랑의 결실을 거둔다는 설정은 자못 동화적이다. 가난한 여주인공이 부잣집 아들과 결혼한다는 신분 상승의 이야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세속적인 시각에서 파데트는 형편없는 출신에, 못난 외모에 형편없는 태도의 여자아이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뒤집히는 데서 독자는 통쾌함을 느낀다. 원래 탁월한 지혜와 현명함을 가진 바탕에, 사실은 누구 못지않게 빼어난 외모를 지녔으며, 갑자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부에서도 꿀릴 이유가 없다는 점. 이렇게 보면 조건에서 오히려 랑드리가 밀릴 지경이다. 만약 반전이 없었다면, 즉 외모도, 재산도 처음 설정과 마찬가지였다면 바르보 씨의 결혼 승낙이 어찌 되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오로지 곧은 심성과 현명함만이 가진 게 전부인 파데트 말이다.

 

그럼 넌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파데트가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랑드리를 계속 바라보던 파데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아 신이시여! 신이시여!” 랑드리가 파데트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내가 착각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P.178)

 

의젓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랑드리와 어린아이 같았지만 현명함과 의지력을 갖춘 파데트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독자를 흐뭇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비네의 애정과 아픔을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사랑의 요정따위로 치부되어서는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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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양장본
김중미 지음, 송진헌 그림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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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탄 창작동화다. 언젠가 한 번 읽어볼까 생각만 하다가 우연히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표제에 이끌려 처음엔 어느 시골 마을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전원적, 낭만적 작품으로 생각하였다. 착각이 깨지는 데는 첫 쪽 첫 줄의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였다.

 

괭이부리말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이다. (P.9)

 

괭이부리말은 인천 만석동 달동네의 별칭이다. 매립되어 육지가 된 고양이 섬(묘도)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동네 이름을 확인한 순간 예상했던 줄거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편으로는 우려도 들었다. 모름지기 동화라면 고정관념이 있다. 세계와 삶의 아름다움과 올바름이라는 긍정적 일깨움을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이것이 이 작품에서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작품의 전반적 기조는 어둡고 우울하고 슬프다. 등장하는 동네 가족들은 대체로 온전하지 못하고 불행하다. 숙자네 가족은 생활고와 아버지의 주취 폭력으로 엄마가 가출한다. 졸지에 어린 숙자가 살림을 꾸려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동준이네는 수년 전 어머니가 가출하였고, 최근에 아버지마저 돈을 벌러 나간다며 집을 떠났다. 동준과 형 동수는 아버지가 남겨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버틸 뿐이다. 동수는 패거리들과 어울리고 본드 흡입에 의존하는 등 상황은 악화된다.

 

동네 친구들 중에는 그렇게 어머니가 떠난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숙자는 친구들처럼 어머니를 지워 가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P.62)

 

오죽하면 다시 돌아온 어머니의 귀가 사유가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숙자는 안심하고 기뻐한다. 어머니가 다시 가출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숙자 자매와 동준의 천진한 일상으로 겨우 한줄기 길을 헤쳐나가던 작가는 돌연 영호를 등장시킨다. 괭이부리말의 주저앉은 사람들 가운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앞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영호와 김명희 선생님이다. 이 두 사람이 시간의 순서는 다를지언정 숙자네와 동준이네의 구세주 역할을 하며, 명환이와 훗날 호용이마저 보듬게 된다.

 

나두 고마워. 그리고 명희야, 꼭 고백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이들한테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한테 아이들이 필요해.” (P.179)

 

영호는 어쩌면 이 동네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개인적 이익보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더 강하고, 피붙이가 아닌 아이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온정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우여곡절은 있지만 그를 중심으로 두 가족이 함께 삶을 단단하게 여밀 수 있게 되었음은 순전히 영호의 내재적 힘 덕분이다. 물론 영호도 홀어머니의 죽음 후 천애 고아 처지에서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었으니 일방적 시혜라고 할 수 없다.

 

어쩌면 단단한 빗장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던 것은 동수가 아니라 명희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165)

 

동화의 한계는 김명희 선생님의 역할과 영호와의 관계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괭이부리말 출신이면서 동네와 동네의 불량한 아이들에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명희야말로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의 삶은 지긋지긋한 동네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분투로 점철되었고 마침내 떠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명희가 괭이부리말 출신으로서 자신의 태도를 되돌아보고 교사로서 비교육적 인식을 갖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괜찮다. 나아가 상처받은 아이들을 보듬고 숙자네와 영호네 식구들과 교류를 맺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숙자네 집 다락방으로 이사 오는 설정은 개인적으로 과도하다는 생각이다.

 

작중 인물 가운데 숙자와 동준이가 초지일관 가장 긍정적이고 굳센 마음가짐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싶다. 두 아이가 없었다면 두 가족은 일찌감치 파탄에 맞닥뜨렸을 것이며, 영호나 명희는 아예 개입할 기회도 없었을 테니. 실은 동수는 동준이보다 마음이 여리다. 동수는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버텨나갈 자신이 없어서 방황하였다.

 

작가는 이들의 삶이 녹록지 않을 것을 예고라도 하듯이 개심한 숙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숙자네 식구를 한층 힘겹게 만든다. 동수의 회개와, 동수와 명환의 진로 설계로 드디어 어둠이 사라지고 밝은 새해를 맞이하려는 기대감도 잠시 성탄절 이브에 버림받은 호용이가 영호네 집에 들어온다. 비록 밑바닥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들이 더 낫고 행복한 삶에 이르게 될지 아니면 재차 나락으로 굴러떨어질지 작가는 섣부르게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는 쉽게 걷힐 것 같지 않았다. (P.191)

 

동수와 공원 노숙자가 만나는 장면의 마지막 문장이다.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안개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동수와 우리는 좀 더 밝은 앞날을 기대하고 싶다. 그래도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다고 하려면 이들이 계속 불행해서는 안 될 것이므로. 마침 민들레 새싹도 움텄고, 눈부신 햇살이 동수가 다니기 시작한 공장을 비추는 가운데 노래를 흥얼거리는 동수가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게 됨은 의미심장하다.

 

, , , , 봄이 왔어요......”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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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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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 번째 이 책을 읽는다. 자그마한 판형에 백 쪽을 겨우 넘기는 분량, 게다가 시종일관 흥미롭고 이채로운 내용 전개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실체를 잡기 어려운 작품으로 인상에 남았다.

 

이 소설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볼 것이냐에 달려 있다. 표제처럼 좀머 씨가 주인공이라면 특이한 행적을 보이고 소멸해 간 사나이를 향한 주의 환기와 독자의 고민을 요하는 문제소설로 볼 수 있고, 화자가 주인공이라면 좀머 씨와의 조우를 통해 인생의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꿋꿋하게 자라는 성장소설로 여길 수 있다. 내용 전개가 화자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 좀머 씨보다는 화자의 삶과 사건이 차지하는 분량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표를 던지고 싶지만, 작가가 굳이 표제를 달리하였다는 점, 좀머 씨가 던지는 화두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도 외면하기 어렵다.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았던 반쯤 벌린 입과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의 얼굴, 빗물로 범벅이 된 좀머 아저씨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 그런 얼굴은 뭔가 겁에 질린 얼굴이었어. (P.43)

 

화자와 독자 모두가 좀머 씨에 주목하는 대목은 그가 날씨와 관계없이 일 년 내내 줄기차게 걸어 다니는 점이다. 워낙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고 걷기가 그의 일생의 최고 취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는 어린 화자의 목격과 진술로 산산이 부서진다. 공포에 쫓기는 불쌍한 사람, 그것이 좀머 씨의 실체다. 작가는 좀머 씨의 신상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좀머 씨가 전쟁(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이리라) 직후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 줄 던져놓을 뿐이다. 여기서 좀머 씨의 행동 배경에 대한 희미한 추측이 가능하다.

 

수년 후 좀머 씨와 좀 더 유의미한 조우를 하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화자와 더불어 좀머 씨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어린 화자는 자전거, , 피아노 교습, 코딱지가 불러일으킨 사고와 세상을 향한 분노로 자살을 결심한다. 나 또한 청소년 시절에 죽음을 추구하던 경우가 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생사를 가를만한 중대한 사안이었다. 이 작품에서의 어린 화자 또한 감정의 격렬함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P.94)의 진정한 절망의 모습을 목격한 화자에게 자신의 고뇌와 분노는 우스울 뿐이다.

 

아니 그것은 한숨이 아니었다. 한숨을 쉬면 뭔가 홀가분해지는 듯한 소리가 나지만 그것은 뭔가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웠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갈망과 절망이 엉켜서 가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깊고 참담한 소리였다. (P.92-93)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화자와 좀머 씨가 그리는 인생의 그래프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는 어린 시절에 기쁨보다 슬픔, 즐거움보다 분노가 더 컸고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이내 불쑥 정상적인 삶의 성장 과정을 따른다. 화자는 스스로 최고의 시절”(P.98)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반면 좀머 씨는 세월 다 보낸 사람”(P.98)이다. 그의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잊히고 외면당한다. 쇠퇴의 끝은 소멸이다. 호수 한가운데를 향하여 단호하고 고집스럽게 걸어 들어가는 좀머 씨의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영웅적이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멈추지 못하고 절망에 압도당한 채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분투하던 좀머 씨. 그가 마침내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감내할 수 있었던 용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 말뿐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말뿐이었다. (P.35)

 

작가는 자칫 경직되고 엄숙하기 그지없을 이야기를 동화 속 사건처럼 별것 아닌 듯 담담하게 풀어낸다. 화자에 얽힌 여러 일화-헛된 꿈이 되고 만 카롤리나와, 분노 폭발로 이어진 피아노 교습 등-는 작품 시종일관 밝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표면상 보이는 흐름의 영향으로 좀머 씨의 비극도 독자는 비교적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좀머 씨의 외침은 가볍지 않다. 그것은 차라리 세상을 향한 구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을까.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에서 자신을 놔두지 말고 꺼내달라는. 죽음을 감내하고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그가 진작 삶을 향해 보여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기에 좀머 씨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화자의 성장과 어우러져 삶의 소박함과 소중함을 한층 두드러진 존재로 보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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