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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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니 자연스레 동양 신화, 그중에서도 중국 신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머릿속에 중국 신화란, 삼황오제 정도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며, 그것도 신화인지 역사인지 모호하게 드리워져 있어 도대체 중국에 일반적 의미에서의 신화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위앤커의 <중국신화전설 1>을 보면, ‘개벽편에서 하은편까지 시대순으로 중국의 신화와 전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어 마치 역사책을 읽는 마냥 자연스레 흐름이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나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중국 신화를 이전에는 왜 미처 몰랐을까 할 정도로. 그것은 전적으로 중국 신화학계의 대부라고 할 저자 위앤커의 공로가 크다. 단편적이고 산재되어 있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어 흥미롭고 다채로운 신화 세계를 재창조하였다.

 

중국 신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세계 창조와 인류 창조를 다룬 개벽편과 황제(黃帝)가 최고신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염제(炎帝)와 그 후손들과 벌이는 신들의 전쟁을 포함하는 황염편이라고 하겠다. 중국 신화 역시 혼돈에서 출발함은 다른 지역의 신화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고(盤古)는 북유럽 신화의 이미르와 비슷한 구실을 하는데, 그 사체에서 지구의 갖가지 현상과 사물, 그리고 인류가 비롯해서다. 여와(女媧)도 인류 창조라는 면에서 반고와 또 다른 의미에서 주도적 기능을 맡는데, 양자의 공존은 상이한 지역적 배경이 결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신은 아득히 높은 구름 위에 존재하면서 인간들이 바치는 희생물과 제사를 받았지만, 인류는 고통과 재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신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인간들은 그저 눈물을 삼키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P.91)

 

저자는 유독 전욱(顓頊)을 부정적으로 기술하는데, 인간의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세계를 단절시킨 천신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비록 지위의 차이는 있었지만 소통과 교류가 가능했던 두 세계가 특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머나먼 세계가 되었고, 인간은 신들의 전횡에 고통을 겪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사회주의적 인식에서 비롯한 짙은 감정이 투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전욱에게 도전했던 공공(共工)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황제는 중국인들의 자신들의 시조로 여기는 천신이다. 요즘은 역사 공정의 차원에서 황제와 염제를 동급으로 취급한다고 하는데, 염제와 공공, 치우(蚩尤)는 모두 동이족 계열로 인정받고 있어서다. 황제는 염제와 대결에서 승리하여 중앙 천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에 반발한 공공, 치우, 형천(刑天) 등의 도전도 모두 물리쳐 명실상부한 제일인자가 되었다. 특히나 치우와의 전쟁이 매우 격렬하여 황제가 상당히 고전 끝에 간신히 제압했음을 신화는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형천의 처절한 도전이 심금을 울린다. 저자 역시 같은 의미에서 그를 예찬한다.

 

[형천]는 결코 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음모의 칼날에 우연히 머리가 잘려진 것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지지 않았다. [......] 좌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영웅이 끊임없이 분투하는 정신에 대해 쓴 그 내용이 과찬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P.212)

 

불운한 영웅의 사례는 천신 예(羿)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도 같은 존재다. 세상을 불태우는 열 개의 태양 중 하나만을 남기고 쏘아 떨어뜨렸으며, 인간들을 괴롭히는 여러 괴물을 차례차례 제거하여 세상을 편안하게 만드는 크나큰 공덕을 쌓았다. 그럼에도 천제의 미움을 받아 하늘에 오르지 못하였고, 아내의 배신으로 불사의 몸도 얻지 못하게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참으로 비극적 영웅의 전형이다.

 

예에 못지않은 슬픈 천신이 곤()이다. 그는 하 왕조의 개창자이자 유명한 우() 임금의 아버지다. 중국 정사와 고전은 곤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흉(四凶)이라고 대표적인 악인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신화는 그것이 위정자의 조작임을 알려준다. 한마디로 그는 중국의 프로메테우스다. 그리스 신들의 관점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준 배신자였듯이, 곤도 인간 세상을 대홍수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식양(息壤)이라는 신들의 물건을 훔쳤다가 처참한 말로에 이르게 되었다. 정사 기록에 굴하지 않는 민중의 끈질긴 구비문학 전통이 오늘날 곤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한 셈이다.

 

역사 시대 이전의 많은 영웅들, 즉 황제와 싸운 치우라든지 천제의 흙을 훔쳐다가 지상의 홍수를 막은 곤, 그리고 공공이나 예 같은 인물들은 위대한 천신들이었거나 혹은 한 부족의 훌륭한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후대의 문헌 속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포악하고 못된 인물들로만 그려져 있다. 이것은 통치의 정통성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고쳤을 가능성이 크다. (P.535)

 

<작품 해설>에서도 이 점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역사 기록과 마찬가지로 신화 역시 지배세력의 입맛에 맞게 변형됨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일 것이다. 그래야만 기록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중국 신화를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기존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중국 역사의 숨겨진 단면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데 이로써 중국 역사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태평성대의 대명사였던 요순(堯舜)시대의 요 임금 시절을 보면 과연 태평성대가 맞는 것일지 의심스럽다. 임금은 인덕이 훌륭할지라도 열 개의 태양이 나타나는 괴변과 곧이어 대홍수에 이르기까지 민초들의 삶은 매우 퍽퍽하였으리라. 게다가 양위와 관련하여 부자간 대립이 있었고 마침내 아들 단주(丹朱)의 반란과 죽음이라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졌다.

 

자신의 뛰어난 궁술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후예(后羿)는 자만심이 영웅을 몰락시키는 전형적인 이야기다. 어디 신화에서뿐이랴, 오늘날도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끊이지 않으니 통탄할 뿐이다. 역사상 폭군의 대명사는 걸주(桀紂)인데, 그들 역시 개인적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고 하니 뛰어난 인물은 더더욱 근신해야 함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 임금이 만들었다고 하는 구정(九鼎)의 실질적 의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후대에 단순히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보물로 표피 상으로 이해하는 역사상의 사례에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다.

 

그 존경심이라는 것이 어찌 그 몇 근의 구리가 상징하는 <왕권>이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랴. 정을 얻었다는 것과 잃었다는 신화 전설은 그야말로 몇몇 독재자들의 시끌벅적한 헛된 짓거리에 불과할 뿐, 만인의 존경을 받는 우임금과는 근본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일 뿐이다. (P.384)

 

저자의 견해 중에서 유독 동의하기 힘든 대목이 하나 있는데, 요와 순의 관계 설정이다. 순 임금이 요 임금의 사위라는 데는 역사와 신화가 모두 일치한다. 기록에 따르면 요는 제곡(帝嚳)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제곡과 제준(帝俊), 순을 동일 인물로 간주한다.

 

순임금이 요임금의 사위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제곡은 또 요임금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순과 제곡은 본래 동일인인데 이렇게 한 인물이 갑자기 아버지도 되고 또 사위가 되기도 하니, 고대의 신화와 전설이 역사로 변화할 때 생겨난 복잡함이 바로 이와 같았다. (P.235)

 

저자가 제시하는 몇몇 근거만을 가지고 이렇게 삼자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소위 족보가 꼬이는 문제를 해명하기 어렵다고 볼 때 개인적으로 과잉해석으로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대로 신화와 전설에서는 이야기의 분화 또는 복사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참고로 걸과 주의 이야기를 동일한 전설로 평가하는 저자의 해석은 설득력 있는 견해다.

 

중국 신화의 이해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영웅을 역사상의 실존 인물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서구 신화와 마찬가지로 신화와 역사는 혼재될 수밖에 없지만 중국 신화는 그 정도가 유달리 심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독자는 사서의 기록을 사실(史實)로써 맹신해서도 곤란하고,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를 중시하거나 외면하는 일방적 접근도 곤란하다. 작품 해설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중국 신화의 신화성과 역사성의 중심을 찾는 노력과 태도가 필요하다.

 

이 책은 중국 신화와 전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추천할 만하다. 다만 무엇보다도 시대적 한계도 명확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원저가 출간된 해가 1984년이고, 한국어 번역본은 1999년에 발간되었다. 당시로써는 최신의 중국 신화 관련 문헌이었을 테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원서는 거의 40년 전의 것이다. 그동안 이루어진 중국 신화 연구의 많은 발견과 발전이 이 책에는 구조적으로 반영될 수 없는 요인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이 책의 내용에 연연하지 않고 중국 신화의 더욱 새로운 지평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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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슬란과 류드밀라 비룡소 클래식 7
푸슈킨 지음, 카랄리코프 그림, 조주관 옮김 / 비룡소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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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푸슈킨은 외국 문예를 추종하기 급급한 당대에 러시아어를 사용하여 러시아적인 글감과 정신을 담아내면서도 충분히 예술적 감동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이런 연유로 러시아 근대문학의 시조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푸슈킨의 출세작인 서사시로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글린카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 서곡(서곡만 유명한!)으로 친숙한 작품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푸슈킨의 위상과 마찬가지로 이 서사시 또한 러시아 문학의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이 러시아적인 것을 다루고 있음을 자각하며 이를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곳이 마녀 바바 야가를 태운 / 절구통이 꿈을 꾸듯 걸어가고 / 마법사 코쉐이 왕이 / 황금 위에서 힘을 잃은 곳이었다. / 이곳은 러시아의 혼이 살아 있는 곳이요, / 러시아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P.12)

 

중세 러시아를 배경으로 민속적 요소에 중세풍의 환상을 결합하고 있어 내용 자체는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를 접하는 것처럼 사랑, 모험, 마법, , 죽음, 전쟁 등이 작중 내내 펼쳐진다. 발단은 신혼 첫날밤 신부 류드밀라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사건이다. 황당하면서도 엄연한 현실이므로 신랑 루슬란과 블라지미르 왕으로서는 통탄할 일이다.

 

루슬란 외에 세 명의 기사가 류드밀라를 찾기 위한 경쟁의 대열에 참여하는데, 대왕에게서 사위 루슬란이 믿음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루슬란과 용사 로그다이의 결투는 미인을 차지하기 위한 수컷들의 목숨마저 내건 역사적 동물적 본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로그다이가 그래도 정정당당하였다면, 음모와 비겁으로 감싼 파를라프는 루슬란을 죽이고 신부를 탈취하였지만 그녀의 잠을 깨우는 데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무능력함을 왕 앞에서 드러냈을 따름이다. 그래도 목숨을 건졌으니 상대적으로 다행이라고 할까나.

 

의외의 선택을 한 인물은 칸 라트미르였으니, 열두 명의 요부의 유혹에서 파멸로 이어질 뻔한 길에서 순결한 처녀의 도움으로 세속적 욕망을 떨친 채 숲속의 은둔자 생활을 한다. 루슬란과 다른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찾았고 행복에 찬 삶을 누린다.

 

나에겐 아내만이 소중하오. / 나를 행복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아내입니다. / 아내는 나의 삶이요, 기쁨입니다! / 아내는 나에게 잃어버린 청춘과 평온한 마음과 / 순결한 사랑을 되돌려 주었어요. (P.165)

 

이 작품에는 루슬란의 모험을 돕거나 방해하는 세 명의 신통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난쟁이 마법사 체르노모르는 자신의 마법을 악한 일에 사용하며, 류드밀라를 납치하여 사건의 발단을 일으킨다. 자신의 형을 죽여 거대한 머리통만 남겨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올바른 본성을 지니지 못하였다. 마법의 힘의 근원인 수염을 잃은 그는 궁의 난쟁이로 전락한다. 마녀 나이나는 파를라프를 꼬드겨 루슬란을 죽이게 하며, 체로노모르를 부추겨 루슬란과 핀란드 노인에 대항하게 한다. 그녀와 핀란드 노인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엉클어진 실타래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마녀였기에 목동이자 나중엔 영웅이 된 젊은이의 구애를 거부하였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쭈그러진 노인이 된 마당에 분별없는 사랑과 원망을 품으니 마녀든 마법사든 사랑의 힘 앞에는 누구나 무력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나이나의 최후를 언급하지 않는다.

 

핀란드 노인은 일종의 치트키다. 그는 루슬란에 닥친 일을 오래전부터 예상하였으며,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결과를 예언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루슬란이 비겁자에게 암습을 당해 죽음을 맞이하자 사체를 부활시키고 마법의 반지를 전해 준 것도 역시 노인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구먼. /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날이 / 드디어 온 걸세. (P.29)

 

이 귀중한 비밀 반지를 받아라. / 이것을 공주의 이마에 갖다 대면 / 기이한 마법의 힘이 사라질 것이다. / 너를 보고 적들은 혼비백산할 것이다. / 악은 멸망하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 너희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 것이다! (P.191)

 

거대한 머리통을 언급하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할 독자가 많으리라. 이 작품에 실린 여러 기이하고 환상적인 일화 중 가장 충격적이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바로 그다. 난쟁이의 마법과 저주로 몸뚱이를 잃은 채 머리통만 남아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로 남은 그의 운명을 떠올리면 동정심이 절로 나지만,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루슬란을 향한 적의는 그의 심성 역시 올바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마치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는 원귀라고나 할까. 수염 잘린 난쟁이를 보자 오랜 고통을 끝내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에게 기도할 따름이다.

 

이 서사시에서 류드밀라의 역할은 아무래도 미미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방심한 거만한 마법사의 뿔 모자를 움켜쥐어 빼앗고, 마법의 비밀을 발견하여 정원에 숨은 채 마법사의 손길을 피하고 루슬란이 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낙담하여 운명에 절망한 채 자포자기하였다면 그녀는 마법사의 손에 타락하였을 것이며 참다운 사랑을 되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두 여섯 개의 노래가 끝난 후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본인의 심정을 토로한다. 정치적 이유로 수도에서 멀리 변방의 카프카즈로 추방당한 자신의 암담하고 막막한 현실을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하소연한다. 갓 스무 살의 젊은이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고난이었을 것이지만, 후대의 독자로서는 이것이 그의 작품세계에서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사교계의 풍설에 잊혀진 지 오래다. / [......] / 내 영혼은 전처럼 순간순간 /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 찼으나 / 시의 불꽃은 시들었다. / 감동을 찾아보았지만 소용없다. / 시는 죽었다. / 운문을 즐기던 시절도, / 사랑과 즐거운 꿈을 꾸던 시절도, / 진실한 영감의 시절도 모두 가 버렸다! (P.206-207)

 

대부분의 동화책 삽화는 형식적이어서 원래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의 삽화는 꼭 밝혀야겠다.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다수의 채색 삽화는 자체로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이 문학에서 삽화가 지니는 역할과 가치에 대한 하나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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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2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 활발하게 공연했던 오페라 작품인데 이젠 아마 무대에 올리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누가 용감하게 푸틴 눈치 안 보고 키이우 공국 이야기를 공연할 수 있겠습니까.
내용은 키이우 지역에서 내려오는 옛 이야기(또는 비슷한 분위기로 쓴 푸슈킨의 창작) 비슷합니다만 러시아 국민악파 작곡가들과 차이코프스키 등의 오페라에 정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만 5막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작품이라서 듣기 쉽게 우리한테는 서곡만 알려졌을 거 같군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

성근대나무 2022-12-23 22:15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서는 제법 공연이 된 작품이군요. 요즘이야 두나라 사이에 전쟁중이니 공연이 쉽지 않겠지만요. 기회되면 영상물로라도 한번 보고싶은 생각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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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거리의 아이들 비룡소 클래식 17
몰나르 페렌츠 지음, 한경민 옮김 / 비룡소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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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헝가리 청소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제재, 정신 그리고 내용 전개 등에 있어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과연 이것이 청소년 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작품인지에 대한 근본적 회의라고나 할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오늘 대장을 뽑기로 했다. 우리는 대장을 뽑을 것이다. 대장이 명령하며 모두가 복종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대장을 뽑는다. [......]” (P.44)

 

팔 거리의 아이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보커의 말이다. 강력한 대장, 절대적 복종. 군국주의와 전체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청소년 무리 사이에서 기대하고 지지받을 만한 주장과 표현이 아니다.

 

모두들 이 작은 땅을 정말로 사랑하는 표정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도 되어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조국을 지키자.” 하고 외치듯이 그들은 공터를 지키자.” 하고 외쳤다. 모두의 눈이 반짝였고 가슴은 벅찼다. (P.49)

 

아이들은 공터를 조국과 동일시한다. 공터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과 일맥상통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게 공터(“거칠고 울퉁불퉁한 황무지, 집 두 채 사이의 이 작은 땅”(P.126))가 갖는 의미가 매우 남다르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터를 지키고자 다른 패거리와 전쟁을 불사하고, 거창하게 선언문마저 낭독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는 배신자로 간주하며, 염탐과 매수 등의 전술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니 과잉 애국주의의 발로로 여겨질 따름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일어나야만 한다! / 우리 땅에 커다란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 만일 우리가 용감해지지 않는다면 / 땅을 전부 빼앗길 것이다! / 우리 땅이 사라질 수도 있다! (P.148-149)

 

이 작품이 발표된 해인 1906년 당시, 헝가리는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오랜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와 이중제국을 형성한 불안정한 정치체제 속에서 민주주의와 제국주의 속성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양상이 여기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공터를 빼앗으려고 하는 붉은색 셔츠 패거리는 작품 초반에 거의 절대 악으로 여겨진다. 부당하게 남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제국주의 세력처럼. 네메체크의 구슬을 뺏는 파스토르 아이들을 통해 이런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보커에 비해 거칠고 무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아츠 페리처럼.

 

작가는 파스토르 아이들에게도 벌을 가하며, 물에 빠져 감기에 걸린 네메체크의 안부를 묻는 아츠 페리를 부각함으로써 그들 붉은색 셔츠 패거리가 사악하고 무법적인 존재가 아니며 똑같이 인간적인 청소년들임을 보여준다. 그들 역시 자신만의 공터가 필요했을 뿐이다.


두 패거리의 리더인 보커와 아츠 페리가 외형상 두드러지지만 실제적으로 작품의 핵심 인물인 네메체크는 서서히 비중과 역할을 더해간다. 그는 팔 거리의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사병으로 괄시받고, 정당한 항의조차도 외면받으며 쥐새끼’(P.46) 취급을 받는 처지다. 조그마한 체구에 겁도 많은 그가 무리에서 영웅이 된 것은 오로지 공터에 대한 사랑에서다.

 

더 이상 공터를 볼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는 어린아이였다.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지만 공터만은, 공터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공터는 절대 버릴 수가 없었다. (P.278)

 

세 번이나 물에 빠지고 열병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몰래 빠져나와 적의 대장을 쓰러뜨림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보통의 청소년 문학과 달리 쓰러진 네메체크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아이들은 목격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인생에서 처음 겪는 낯선 경험이므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친구가 죽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처음 당해 보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일 앞에서 너무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P.296-297)

 

그들은 당혹해하지만 곧 일상으로 돌아온다. 산 자는 살아야 하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자연스레 터득한다. 네메체크의 죽음에도 학교 수업은 계속되므로 그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그 정도면 차라리 낫다. 보커는 더한 충격을 받게 된다. 친구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땅의 배신, 전쟁의 무의미성을. 그리고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다.

 

그의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어떤 느낌이 어른거렸다. 인생은 때로는 아주 어렵고, 때로는 아주 행복한 것이며, 모든 사람은 인생을 이겨내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P.306)

 

아이들의 단순성과 순수성과 비교할 때 어른들은 오히려 몰이해와 몰인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의 정직성을 맹신하고자 다른 아이들을 의심하고 비웃는 게렙의 아버지,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재봉사에게 어쨌든 급하게 옷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체트네키 씨, 공터가 곧 사라질 것을 알고 있던 토트 사람.

 

시시해 보이는 본드 동아리가 작중에서 왜 그렇게 큰 비중을 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와, 공터와 두 패거리의 대립에 굳이 그래야만 했는지 갸우뚱하는 독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공터 전쟁과 게렙의 배신, 네메체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친구와의 우정, 삶과 죽음의 공존이 갖는 의미를 직접 겪고 깨닫게 함으로써 성장과 인생이 가지는 굴곡을 드러낸다. 물론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한계의 틀을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정묘하게 청소년 문학의 틀을 유지하기에 여전히 헝가리에서 평가받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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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 판소리 사설집 - 쉽게 풀어 쓴
최혜진 외 지음 / 민속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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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가사가 있는 성악곡이다. 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반쪽짜리 음악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지 못할 언어로 노래하는 외국 성악곡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 전해지는 판소리 가사, 즉 사설을 최초로 정리한 인물이 신재효다. 과연 판소리 사설을 읽다 보면 현재 공연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기본 골격이 이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변강쇠가>는 지금은 사라진 악곡의 흔적이나마 찾아 음미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굳이 이 사설집을 읽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독자들은 전반적 내용을 꿰뚫고 있다. 옛날이야기, 동화책, 판소리계 고전소설, 영화 등을 통해 너무나 익숙한 작품들이다. 특히 판소리계 소설과는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친연성이 높다. 따라서 사설과 소설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더욱 흥미로우리라. 오늘날 다섯 마당이 살아남은 것은 무엇보다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사랑, , , 우애 등과 같이 사회의 기본 윤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변강쇠가>의 소멸은 이것을 은연중에 알려준다.

 

머리말에 따르면 수록된 사설의 판본은 아래와 같다.

 

가람본 : 춘향가(동창)

성두본A : 박타령

성두본B : 춘향가(남창), 적벽가, 변강쇠가

신씨가장본 : 심청가, 토별가

 

춘향가 남창(男唱)

현전 판소리와는 분위기, 줄거리 및 사설이 제법 차이 난다. 여기서 춘향은 퇴기 월매의 딸로서 대비를 넣어 기생 신분을 면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상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이도령과 연분은 어디까지나 사랑받는 첩”(P.16)으로서임을 자각한다. 광한루에 놀러 가고, 그네 타는 춘향에게 매혹되어 유혹하며, 춘향과 사랑가를 벌이는 장면 등이 오늘날 판소리 사설과는 다르다. 좀 딱딱하고 밋밋하여 아기자기한 멋이 부족한 게 남창인 연유이리라.

 

춘향은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선녀가 밝은 미래를 약속해 주었기에 걸인 꼴인 이도령을 옥중상봉 해도 오히려 이도령이 당황할 정도다. 신관 사또의 죄명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기생이 아닌 춘향을 강제로 수청들도록 강요하여 불응하자 감옥에 가둔 죄. 그리고 어사또가 남원 민심을 살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고리대금과 송사로 농민을 수탈하는 죄다. 만약 동창에서와 같이 기생 신분임에도 신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였다면 춘향의 처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조치였을뿐더러 사또를 모욕한 죄목이 훨씬 더 중하였을 것이다.

 

춘향가 동창(童唱)

동창은 춘향과 이도령이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대목으로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미완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설은 오히려 현대에 가깝다. 보다 섬세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해학성도 더 짙다. 현대 판소리는 남창과 동창을 결합한 구조에 해당한다.

 

여기서 춘향의 신분은 명확하게 기생(“퇴기 월매 딸 춘향이란 기생”(P.79))으로 제시된다. 기생인만큼 춘향의 성격도 남창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희로애락이 분명하며 직설적이고 화끈하다. 춘향이가 방자에게 쏘아붙이는 말투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사랑가 장면에서도 동창은 사랑가 전에 춘향의 옷을 벗기는데, 남창은 사랑가 후에 옷을 벗기는 차이가 있고, 이별 통보에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춘향의 행동은 더 사실적이며 인간적이다. 동창 춘향가의 마지막 대목은 오리정 이별인데, 담담한 남창과 달리 매우 정서적이어서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할 정도다.

 

심청가

심청가의 묘미는 극적인 신분 상승의 대조에 있다. 전반부는 온통 슬프고 애달프며 딱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다가 인당수 이후 심청의 처지는 일거에 뒤바뀌어 황후가 된다. 맹인 잔치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은 확실히 비현실적이지만 청중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전반적 작품 기조에서 분위기의 균형과 대비를 유지하는 역할이 심봉사와 뺑덕어미에게 맡겨진다. 사설 초반에 심봉사는 비록 맹인이지만 양반의 후예로서 행실이 청검하고 지조가 경개하여 모든 행동을 경솔히 아니 하니 사람이 다 일컫더라”(P.111)일 정도로 품위 있는 인물이지만 우리가 보는 심봉사는 차라리 해학적 인물이다. 심청가에서 전혀 뜻밖일 정도로 걸쭉한 육담과 해학미가 역시 이 장르가 대중적 취향임을 드러낸다. 방아타령이 전형적이다.

 

어디, 하여 볼까? 뒷소리를 잘 맞추렸다! 이내 몸이 방아 되고 주장군이 고가 되어 각씨님네 옥문관을 밤낮으로 찧으면, 다른 물 아니 쳐도 보리방아 절로 익제.” (P.165)

 

토별가

해학미 하면 별주부와 토끼가 벌이는 한판 지략 대결도 놓칠 수 없다.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니다 보니 표현상에 한껏 자유분방함과 환상성이 배어있다. 육담이 주는 골계미도 만만치 않다. 물개가 별주부에게 자신이 친척 아저씨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피식 웃음을 유발한다. 한편 오늘날 판소리와 소설과는 결말이 다른데, 창자가 들려주는 도덕적 교훈은 결국 창작의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자라와 토끼란 게 모두 미물로서 장한 충성 많은 의사 사람하고 같은 고로 타령을 만들어서 세상에 남겨 전하니 사람이라 명색하고 토끼와 자라만 못하면 그 아니 무색한가? 부디부디 조심하오. (P.216)

 

박타령

흥부와 놀부는 너무나 유명한 전래동화 캐릭터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놀부[놀보]가 현대인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흥보는 착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형적인 무기력한 소시민에 가깝다. 게다가 자기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자식만 스물다섯을 낳아서 무책임할 정도로 가난에 방치한다. 요즘이라면 아동학대로 고발당할 수준이다. 이러니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흥보가 마뜩잖은 것이다.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이나 오줌이 마려우면 덕석을 쓴 채로 앉아 누어,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 본 일이 없고, 한 번도 문턱 밖에 발을 디뎌본 일이 없다. (P.230-231)

 

유명한 박 타는 대목에서 전혀 의외의 대목이 나오는데, 셋째 박에서 양귀비가 나타나서 흥보의 첩이 되는 장면이다. 현전 판소리와 소설에서는 일체 이러한 내용이 없다. 당대 청자의 솔직한 욕망을 반영하였으리라고 추정되지만, 가치관의 변화에 발맞추어 부적합하다고 여겨 언제부터인가 제외된 것이리라.

 

놀보 집안의 결정적 패가는 놀보의 상전 노인의 등장에서 시작한다. 요점은 놀보가 천민 출신이라는 점이고 놀보는 속량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다시피 한다. 당시 신분사회에서 계급의 구별은 엄격한 점이었기에 놀보가 사색이 될 수밖에 없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놀보가 천민이면, 흥보도 마찬가지일 텐데. 주인공을 천민으로 만들어 놓으면 자가당착이 아닐는지.

 

여보시오, 주인님, 이 동네가 반촌, 양반의 고을이요, 아비의 가세가 요부키로 갓을 쓰고 지내오니 이 고을, 온 동네에 모모한 양반 댁이 모두다 사돈이오.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꼴이 우스우니 사정을 봐서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량으로 바칠 테니 면천이나 하여 주요.” (P.273-274)

 

적벽가

나관중의 작품에 뿌리를 둔 <적벽가>는 현대 판소리의 사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전히 제갈공명은 지략이 뛰어나며, 주유는 한 방 먹으며 애석해한다. 조조는 안하무인에, 깐족거리는 입 때문에 화를 자초한다.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이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를 그대로 소리에 담아내고 있다. 원작 소설에 없는 군사 설움 대목이 중시되는 까닭은 전쟁이라 결국 지배층의 이익을 위함이요, 힘없는 민초에게는 오직 고통과 슬픔을 안겨줄 뿐임을 토로하고 있어서다.

 

변강쇠가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적인 B급 캐릭터로 단단히 자리 잡아서 그네들의 이름만 언급해도 대부분 민망한 웃음을 자아낼 정도다. 확실히 작품 초반에는 음란물의 한 장면과도 같은 노골적이며 해학적인 성기 묘사(P.355-356)가 존재하지만 이후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달리 보면 성적인 기준에서 전통적 보수성을 탈피하고 현대적 성 관점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강쇠의 평생 행세 일하여 본 놈이냐.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할 수 없어 애긍히 말한다. (P.359)

 

변강쇠는 사설 내내 확실하고 고정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데, 바로 음남이자 잡놈이라는 것이다. 반면 옹녀는 우리가 아는 바와 많이 다르다. 즉 우리가 아는 음녀옹녀는 없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대목에서 옹녀와 변강쇠의 행동은 대비된다. 옹녀는 어떻게든 살림을 유지하여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강쇠는 음주, 도박, 계집질 등으로 전혀 보탬이 안 된다.

 

후반부에서 장승을 베어 땔감으로 썼다가 저주받아 시체가 된 강쇠의 뒤끝은 더욱 남다르다. 유언조차 옹녀보고 자진하라고 요구하고 송장을 수습하려고 온 뭇 남성들은 모두 급살맞게 해버린다. 그야말로 시체의 저주라고 할밖에.

 

입관하기 자네가 손수하고 출상할 제 상여 배행도 하고, 시묘 살아 조석 상식 삼년상을 지낸 후에 비단 수건 목을 졸라 저승으로 찾아오면 이생에 미진한 연분, 끊어진 줄을 잇는 것이 되려니와, 내가 지금 죽은 후에 사나이라 명색하고 십 세 전 아이라도 자네 몸에 손 대거나, 집 근처에 어른거리면 즉각 급살할 것이니 부디 부디 그리하소.” (P.375)

 

우여곡절 끝에 강쇠의 시체는 동강 나고 남자들은 떠나가고 옹녀 홀로 남는다. 사설은 더 이상 옹녀의 장래를 언급하지 않는다. 혼자는 살 수 없기에 개가를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여성 옹녀에게 동정심이 쏠리는 것은 아마 인지상정일 것이다.

 

예전에 문고본으로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에 비하면 사설의 여러 대목이 더욱 잘 이해되고, 입속으로 읽다 보면 저절로 리듬감이 생겨남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사설 내용 자체는 백 년도 더 전 옛 시기의 것이어서 요즘 어휘와 문화로서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부지기수다. 특히나 고전을 인용하는 사례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순전히 사설만 수록하였을 뿐 일체의 주석은 달지 않고 있어 철저하게 독자의 손에 맡기고 있다. 독자들이 사설의 세부 내용을 얼마나 속속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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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하다고요? - 신종 감염병 시대, 비인간 동물과의 공존 이야기, 2021년 11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사서추천도서, 2022년 (사)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곰곰문고 5
이항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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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팬데믹을 경험하고, 중국 우한지역의 박쥐에게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옮겨왔다는 게 점차 정설이 되어가는 현재. 인수 공통 감염병을 예방하려면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동물과 인간의 건강이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원 헬스(one health) 개념의 접근이다.

 

자연보호, 환경 보전, 생태계 유지 등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정복과 개발의 대상에서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둔 보전과 개발의 조화로 변화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큰 틀에서는 여전히 미흡하지만 조금씩이나마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동물에 대한 우리네 인식은 과거에 여전히 묶여 있다. 즉 이용과 착취의 대상이다.

 

일부 반려동물을 제외하면 대다수 동물은 일상 환경에서 사라진 상태이며 자연 속에 사는 동물들의 서식지도 지속적으로 파괴되고 있어 조만간 멸종이 임박한 동물도 많다. 어디 그뿐이랴, 육식에 대한 선호로 식육 동물의 사육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돌림병으로 떼죽음을 겪는 게 일상화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실험동물과 동물원의 동물에도 저자들은 주의를 환기한다. 인간의 안녕과 편의를 위하여 숱한 동물이 죽어 가며 열악한 환경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불편하고 단순한 일상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즐겁거나 재미있는 변화가 아닐 것입니다. (P.35)

 

이 모든 사실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예도 있지만, 대체로 관심 밖에 있던 사항이므로 각성과 자기반성을 하게끔 한다. 벤담의 의견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인정된다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변화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동물의 생명을 끊거나 고통을 줄 만한 행위가 금지되어야 하는데, 현실적 가능성은 매우 부정적이다.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며, 천연가죽 옷이나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게다가 실험동물은 어찌할 것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인류는 생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크게 줄여 나가기라도 할 수 있을까요? 인류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그럴 준비가 되었을까요? (P.41)

 

근본적 변화가 어렵다면 현실적, 실용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소위 동물 복지에 힘을 쏟는 것이다. 야생동물 서식지를 최대한 보전하도록 노력하며, 식용동물의 사육 환경을 개선하는 운동에 동참하며, 동물실험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최대한 인도적으로 처우하는 등이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애완용이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으로 책임감을 지니고 돌봐야 할 것이다.

 

여러 유형의 동물 복지를 주장하지만 저자들의 의견은 결국 하나로 합일한다. 동물을 상품이 아닌 생명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야생동물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유지하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동물도 건강하고 인간도 건강해질 것이라는 점,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의 삶의 질을 향상하도록 노력하는 게 결국 인간 자신의 복지와도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람과 동물을 가르지 않고 사회적 약자의 삶의 질을 두루 걱정할수록, 주어진 상황과 문제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갈수록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질 거예요. ‘동물 복지와 사람 복지가 하나라는 의미로 원 웰페어라는 말이 주목받는 까닭입니다. (P.114)

 

실험동물과 동물원 동물의 현황은 당혹스럽다. 그렇게나 많은 동물이 각종 연구 개발의 목적으로 생명을 잃는다니 게다가 그들의 거주 환경의 열악성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그나마 동물실험에 대한 기준과 절차가 정립되기 시작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동물원이 결코 동물을 위한 시설이 아님은 조금만 생각해도 분명한데 우리는 외면해 왔다. 아무나 동물을 사서 동물원을 차려 수익사업을 벌일 수 있다는 점에 놀랍다. 우리네는 동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그토록 무관심했고 윤리적 기반마저 이토록 허술했다니,

 

저는 대다수의 동물원을 생추어리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원은 동물을 이용하는 곳이 아니라 보호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동물원의 기능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차순위로 하더라도 동물원이 생추어리로 바뀌면 동물을 보호하는 곳이 될 수 있습니다. (P.157)

 

동물 보호에 대한 관심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동물에 대한 사랑과 보호 의식이 명확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은 물론 찬성조차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것이다. 요즘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반려동물의 에티켓, 길고양이에 대한 먹이 주기는 격론이 벌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동물 보호와 복지는 관심을 기울이고 개선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지만, 기준과 한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종으로서 동물의 안녕과 생존은 말할 나위도 없고, 궁극적으로 우리네 자신의 건강한 삶과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동물 복지를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도 결국 동물의 일원이므로. 곳곳에서 부르짖는 저자들의 외침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인간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게 독을 시험하고, 새로운 외과술을 시험하고, 백신을 시험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일까요? 이렇게 많은 동물이 인간을 위해 고통스럽게 죽어 가도 괜찮은 것일까요? (P.135)

 

인간을 물리적으로 동물원에 전시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만, 인간은 가두면 안 되고 동물은 가둬도 된다는 명쾌한 윤리적 근거를 우리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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