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셰익스피어 전집 34
윌리엄 셰익스피어, 신정옥 / 전예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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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소위 문제극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으로 작품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희곡은 희극에도 비극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에 배반당하는 트로일러스, 아킬레스에게 살해당하는 헥토르를 보면 비극적 색채가 강하지만, 트로일러스는 침몰하지 않으며 헥토르의 죽음은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이 작품은 참다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개를 보이고 있는 동시에 뚜렷한 주인공이 부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표제 그대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를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작품 내 분량과 비중 면에서 취약하다. 헥토르, 율리시즈, 아킬레스, 아가멤논 등 전쟁의 주역이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앙상블 희곡에 가깝다.

 

(율리시즈) 대 아킬레스 장군입니다, 장군이야말로 / 우리 군의 원동력이요, 귀감이라고 받들어 모시고 있으나, / 그 허황된 명성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 자만심으로, 군막 안에서 우리의 작전을 / 비웃고 있습니다. (P.46, 13)

 

이 작품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전쟁과 사랑이다. 독자가 흔히 기대하는 트로이 전쟁의 신화화된 전사와 영웅의 이미지는 여기에 없다. 아킬레스는 오만함의 극치이며, 아이잭스, 즉 아이아스는 단순하고 멍청하다. 헥토르는 전쟁에 탐탁해하지 않지만 조국의 명예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작가는 아킬레스의 영웅성을 약화시키려고 유명한 서사시의 내용을 수정한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와 정당한 대결을 벌여 쓰러뜨리지 않는다. 무장을 벗고 쉬고 있는 헥토르를 무참히 살해한다.

 

(헥토르) 나는 무장을 풀고 있다, 그런데도 네 멋대로 하느냐, 그리스 놈아.

(아킬레스) 내리쳐라, 이 사람들아, 내리쳐. 내가 찾던 그놈이다. / (헥토르를 살해한다) / , 다음엔 일리움 성, 네가 쓰러질 차례다. 트로이여, 망해라. / 여기 너의 심장이, 너의 근육이, 너의 뼈가 누워 있다. (P.213-214, 59)

 

광대 서사이테스는 그의 특권을 활용하여 등장인물을 마음껏 희롱하고 조롱한다. 광대의 재담 속엔 진실이 숨어 있는 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특징이다. 그의 주된 목소리를 귀기울여 보면 전쟁에 대한 강력한 환멸과 비난, 냉소를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발발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쟁.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도, 위용을 자랑하는 영웅도 부재하고, 음모와 비열함, 어리석음이 주도하는 전쟁은 누구도 찬성하지 않으리라. 이렇듯이 반전 메시지로 해석하는 게 충분히 타당한 작품이다.

 

(서사이테스) (방백) 온통 속임수, 사기, 협잡투성이다. 모든 문제가 화냥녀과 오쟁이꾼에서 일어난 일이다-다툰다고 파당을 짓고, 피를 흘리며 죽기 살기를 마다하지 않고 아주 알맞은 명분이군. , 그런 명분에 농가진(膿痂疹)이나 걸려라, 전쟁과 색욕으로 모두가 작살나는 거다! (P.82, 23)

 

연인의 만남과 밀당, 그리고 약속에 이르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유쾌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현실과 상충하여 금방 깨어지기 일쑤다. 크레시다의 마음은 얼마나 절실하고 자신만만했던가.

 

(크레시다) 하늘이 두 조각나도, 가지 않겠어요. 숙부님. / 전 육친의 정 같은 건 없어요. / 제겐 친척이니, 애정이니, 혈족이니, 영혼도, 사랑하는 / 트로일러스님 만큼 소중한 건 없어요. , 신성한 신들이시여. / 제가 트로일러스님을 떠난다면, 크레시다의 이름을 모든 부정한 것의 / 끝장으로 삼아주십시오! (P.143, 42)

 

연인의 변심은 누구도 원치 않지만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법이다. 트로일러스는 크레시다의 배신에 치를 떨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 트로이에서 그리스로 신원이 이관된 마당에 적국의 왕자를 계속 사랑한다는 건 더 이상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그녀의 변심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다만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예상보다 빨랐던 점이 그녀에 대한 한가닥 아쉬움이라고 할까. 트로일러스가 준 정표를 새 애인을 유혹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를 더한다.

 

(율리시즈) 아니, 못써요, 저런 여잔! / 눈으로도 말을 하고, 뺨도 입술도 그렇고, / 아니, 발마저도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음탕한 기질이 / 그 여자의 사지 몸통에 곳곳에 배여 있어요. / 저렇게 어중간한 여잔 입심 좋고, / 상대방보다 먼저 자기가 꼬리를 치고 / 호색적인 자에게는 음탕한 생각에 / 가슴속을 열어 보이고 달려드니 / 기회만 있으면 몸을 내놓고 / 기꺼이 노리갯감이 되는 음탕한 계집들이요. (P.158-159, 45)

 

이러한 점 때문에 크레시다는 극중에서 매춘부 또는 화냥년 취급을 받는다. 율리시즈는 대놓고 크레시다를 폄하하는데, 이전까지 그녀에 대한 묘사나 대화에서 일체의 언질도 없는 마당에 갑작스럽게 박한 평가는 편견일지 예지일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두 연인을 연결시켜 준 판다러스는 무슨 죄인가? 양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추진하였던 정사가 졸지에 어그러지고, 끝내는 뚜쟁이 취급마저 당한 그의 회한은 처절한 울림을 남겨준다. 이래서 중매는 함부로 서는 게 아니라는 교훈이랄까?

 

(판다러스) 유곽의 문간을 지키는 뚜쟁이 형제자매들, 지금부터 두 달만 기다려라, 내 유언장을 써줄 것이니.

지금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이런 골칫거리가 있으니, 윈체스터의 매독에 걸린 창녀들이 왁왁 대면 말이지. 그때까지는 나도 땀을 빼며 매독치료나 하면서 쉬어야겠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에게 나의 병이나 유산으로 주리다. (P.219, 511)

 

이 작품을 전후하여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을 포함한 걸작을 연달아 집필한다. 이 시기에 그가 집중적으로 묻고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인간성의 본원적 모습이다. 인간의 내면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고귀함과 저열함, 순수함과 더러움,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결과에 무관하게 의도의 선함만을 중시할 수 없으며, 의도는 외면하고 결과가 인정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작가는 아킬레스를 낮추고 헥토르를 띄우며, 크레시다를 본래부터 화냥끼가 있는 여자로 격하시키는 듯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들의 참모습이 아님을 독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이며, 인간사는 정해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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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대학교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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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제 :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2015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상한 일이다. 저자가 다루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안은 현재 시점에도 전혀 진부하지 않은데, 7년이 경과한 지금은 거부감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취업사관학교? 대학의 최고 기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력 양성에 있다.

대학이 영어를 숭배할 때? 글로벌 캠퍼스로 발전을 위해 영어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대학은 완전한 기업이다?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은 대학은 도태가 마땅하다.

죽은 시민을 만들어내는 대학? 경쟁에서 뒤처진 자들의 불평불만에 불과하다.

 

4차 산업혁명이니 메타버스 혁명이니 하며 숨 가쁘게 변화하는 사회 경제 환경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자가 제기한 의문에 딱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겠다. 지금이 그런 한가한 논의나 하고 있을 때인가? 까딱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경쟁국에 뒤처져 이류국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는데. 정부도, 기업도, 대학생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리라. 지금은 적자생존의 시대이므로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는 건 당연하며 무한경쟁만이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분초 단위로 쪼개가며 자기계발과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학과 기업’, 총장과 ‘CEO’는 어색한 조합일 수 있지만, 지금은 명예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은 변했다. (P.144)

 

저자가 말하는 대학과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은 명칭은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존재다. 저자의 대학은 동서양의 고전적 대학(大學) 개념의 본질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나, 현대의 대학은 기능성을 강조한다. 전문대와 기술대만 실용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모든 대학이 다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국내만 해도 200개에 가까운 4년제 대학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모두 저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들 모두에게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라고 요구하는 게 마땅한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가 대학인가?”(P.114)라는 탄식의 대상이 되고, 잃어버린 사색에 안타까워할 만한 대학을 한정해 놓고 볼 때 저자의 주장은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생각하는 참다운 모습의 대학이 일부나마 구현되려면 대학의 숫자가 설립 자유화 이전으로 줄어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학의 인플레는 대학생의 인플레를 유발하였고, 전문대나 실업계 고교 졸업자들의 사회적 인식을 한층 하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다수의 직업군이 대학졸업자의 학력 수준을 진정으로 요구하는가 반문하고 싶다.

 

선택과 집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모두가 대학 졸업증을 취득하려고, 나아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고 목매달며 교육체계 자체가 왜곡되어 버린 마당에 대학 자체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늘어난 대학의 옥석을 가린다며 시도된 이러저러한 대학평가와 인증은 평가지상주의를 초래하여 평가 유불리 여부가 모든 대학행정의 판단기준이 되어 버렸다. 국내 대학 중 평가에 초연할 수 있는 대학은 기껏해야 서울대 정도라고 할 뿐이니 여타 대학은 평가결과에 목숨을 걸고 경쟁한다.

 

상대평가가 늘어날수록, 남을 제압해야 하는 토론에 길들여질수록, 정치를 위험요소로 인식할수록, 다양성을 경험할 구조를 파괴할수록 대학은 특정한 가치로 무장된시민만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을 죽은 시민이라 부른다. (P.195)

 

등록금 인상 억제 정책 시행 이후 대부분의 대학가는 피폐해졌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등록금 외에 고정적인 수익원을 확보한다는 건 국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다. 재원의 한계에 부딪힌 대학이 기업으로부터 기부금 확보에 눈 돌리고, 내부 지출의 효율성을 강화하려는 모습은 당연한 반응이다. ‘대학의 기업화는 정부와 사회의 요구 때문에 권장되고 가속화되었다. 대학평가 순위를 향상하고 우수교수 유치를 위한 재원 마련에 목마른 대학이 기업에 손 벌리지 않으면 학교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라면 비난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다.

 

나는 대학을 고발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이상한 방향으로 채찍질하는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시대를 비판적으로 봐야 할 증거로 제시할 뿐이다. (P.21)

 

저자는 이 책에서 오로지 앞을 향해 진격하는 대학의 적나라한 양태를 까발리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눈은 대학의 진격을 유도하고 강요하는 사회체제와 이념 자체에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학령인구 급감에 따른 대학 숫자의 과다와 대학 부실화가 근년 들어 화두가 되고 있다. 부실대학 정리 방향은 수도권 소재 대학과 지방소재 대학, 상위권대학과 중하위권 대학 등 이해관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생존에 급급한 마당에 삶의 질을 고민하자는 말은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종의 다양성을 줄이는 대학의 진격은 필연적으로 구성원들의 생각을 공동화한다. 식단의 다채로움이 소멸되듯 대학과 그 구성원의 다채로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P.236)

 

집단지성은 다양성이 보장되고 여론이 성숙했을 때 가능하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교육은 집단사고가 아니라 집단지성을 지향해야 한다. (P.240)

 

그럼에도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고발과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만장일치이므로 직진하는 대신, 과연 그것이 올바른 길인지 혹시라도 모두가 놓친 요인은 없는지 재검토하는 노력은 유의미하므로.

 

이 책의 목적은 대안이랍시고 경쟁보다 협력이라는 고도로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협력이 배제된 경쟁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를 공유하는 것이다.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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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에서 온 아이 라임 청소년 문학 40
코슈카 지음, 톰 오구마 그림, 곽노경 옮김 / 라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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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잠길 운명에 처해 있는 인도양과 남태평양의 섬나라에 대한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천재지변을 다룬 소설이라면 으레 재해 자체에 초점을 맞춰 흥미진진하게 전개하지만, 여기서 작가는 철저히 사람들, 특히 한 가족에 집중하고 있다. 특별히 극적이고 자극적인 전개와 표현도 자제하며 작가는 나니네 가족이 맞닥뜨린 상황과 점차 벗어나는 과정을 매우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로 기술하고 있다. 분량과 비교해서 무게감이 한층 느껴지는 까닭이다.

 

수몰된 섬 사람들은 섬을 떠나고 낯선 땅에서 힘겹게 정착하는 현실에 충실하다. 친숙한 공간을 빼앗긴 상실감, 소중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떠나야 하는 슬픔, 말도 통하지 않는 생소한 곳에서 수중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맨땅에서 일어서야만 하는 막막함. 작가는 이것에 대한 관심을 나니네 가족을 통해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섬의 수몰을 가져온 자연재해의 본질을 직시하게 된 것은 에필로그-‘우리는 기후 난민’-에 이르러서다. 인식의 확장이라고나 할까.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그동안 묶여 있던 밧줄을 푸는 작업이란다. 나니야, 이 섬을 버려야 해. 종려나무, 야자수, 레몬나무, 고운 모래... 이 모든 것들은 등 뒤에 남겨 둬야 한단다. (P.15)

 

해수면 상승과 폭우로 섬이 가라앉을 위기가 목전에 도래한 시점, 망설이던 나니네 가족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남들처럼 자신들이 살던 섬, 즉 고향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길을. 다리가 불편하여 거동을 못 하는 나니의 외조부와 외조모는 떠날 수 없다. 떠나지 못함은 섬에 남아있음을 가리키며, 이는 조만간 수몰될 섬과 운명을 같이함을 의미한다. 오로지 나니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죽음 앞에 놓아두고 떠나야 하는 나니 엄마의 심정은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다. 허망하게 할아버지를 영원히 떠나보내게 된 세메오의 심정은 누군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니야, 세메오야! 이런 도움이 필요하면 억지로라도 얻어 내야 해. 아픔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말고 슬픔에서 벗어나렴. 뭔가 멈춰버렸다는 생각이 들면 그곳에 시선을 두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삶은 결코 끝나지 않아. 너희가 서로 이어지게 놔두면 삶은 네 주위 어디든 있어. (P.102)

 

이 작품에서는 나니 외조부가 나니에게 전해준 두 종류의 물건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세 가지의 물건은 추억과 소통의 상징물이자 교감의 매개체이다. 나니의 외조부가 쓴 편지는 내용 및 의미 차원에서 더욱 깊은 호소력을 지닌다.

 

편지 속에서 외조부는 헤어짐의 불가피성과, 추억의 불멸성, 삶의 지속성 그리고 형제애적 인류애의 가치를 담담히 외손녀를 위해 풀어놓는다. 특히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은 작가가 지향하는 바가 더 깊고 넓음을 알게 해 준다.

 

네가 육지에서 어떤 선한 분을 안아준다면 네가 포옹한 사람이 바로 네 외할아버지인 거야. 육지의 어떤 할머니한테 따스하게 미소를 짓는다면 네 미소를 받은 사람이 바로 네 외할머니인 거지. 세상은 이렇게 서로서로 통하는 거란다. (P.107-108)

 

할아버지의 편지를 함께 읽으면서 나니와 세메오는 서로 공감하며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한 가족으로 새로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형제를 배려하는 뜻에서 편지의 자구를 수정하는 나니의 따뜻함은 아이답지 않은 마음씨라고 하겠다.

 

슬픔과 아픔을 극복한 두 아이는 나중에 자신의 조부모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회신한다. 작가는 이렇게 글을 통하여 생사와 시공간을 초월한 세대 간 소통을 시도하는 동시에 파도 전설 이야기를 둘러싼 사람들의 제각각 견해를 통해 사람과 바다, 그리고 섬에 대한 대상의 확장을 보여준다. 그것이 자연스레 에필로그로 이어져 독자는 무심코 간과했던 사안의 본질에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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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과학자들 - 생명 윤리가 사라진 인체 실험의 역사
비키 오랜스키 위튼스타인 지음, 안희정 옮김 / 다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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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생명 윤리가 사라진 인체 실험의 역사가 말해주듯 이 책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자행됐던 인체를 대상으로 한 서양의 부끄러운 근현대사를 파헤치고 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폭과 깊이가 제법 있다. 다만 대상 사례를 세부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과학, 특히 의학 발전을 위해서 인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몸을 학문과 기술 발전을 위한 실험 도구로 기꺼이 제공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적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이런 자명한 상식이 그동안 인체 실험의 역사에서는 통용되지 못하였음이, 나아가 강압과 불법이 난무하는 비윤리적 현장이었음을 알게 되어 충격적이다.

 

개인의 인권이 과학.의학의 발전과 대립할 때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P.17)

 

인권을 제대로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 즉 죄수, 소수민족, 고아, 군인은 물론이고, 정보 비대칭으로 실험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환자들처럼 인체 실험의 대상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 기니피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로운 진단법과 치료법의 개발로 인류가 얻을 혜택을 고려하면 절차와 방법의 일부 일탈은 불가피한 것으로 용인되어야 한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인류 역사는 언제나 훌륭한 이상의 실현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점철되지 않았던가. 과거에는 개별적으로 자행되던 비윤리적 인체 실험이 나치와 전쟁에 맞닥뜨려서는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지시와 방관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의도는 나름대로 고매한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벨몬트 보고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 연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3가지 윤리 원칙, 즉 인간 존중의 원칙, 선행의 원칙, 정의의 원칙을 담고 있다. (P.105-106)

 

인체 실험의 연구 윤리를 수립한 뉘른베르크 강령과 벨몬트 보고서를 통해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안심하면 오산이다. 벨몬트 보고서가 발간된 게 1979년이니, 이후에는 윤리 위반 사안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사안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업화한 의학이 초래하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은 생명 윤리 따위는 무시하도록 무분별한 경쟁을 쫓고 있음을.

 

수년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생각해 보자. 수많은 거대 제약회사들이 백신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임상시험의 성패는 초미의 중대사다. 먼저 개발에 성공할수록 막대한 수익을 그것도 독점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온 세계가 백신 수요로 넘쳐날 때 그들은 비싼 값을 지불할 수 있는 국가에 우선 공급하였다. 의술과 신약은 단순한 서비스와 상품이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것임에도 자본의 논리는 빠지지 않는다. 자국과 자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부 개인의 피해는 눈감아도 되며 국제적 일반 기준은 준수를 거부한다. 1993년 인체 방사능 실험에 관한 자문위원회와 2008년 식품의약국의 헬싱키 선언 거부는 생명과 인권에 앞선 가치가 실존함을 여실히 입증한다.

 

과학발전은 중요하다. 사회는 엄청난 의학적 발견과 치료법 덕에 많은 혜택을 입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학 연구는 어떤 경우라도 생명 존중과 혜택과 정의라는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사회의 요구와 개인의 권리가 대립할 때 우리는 공정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P.149)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생체 표본의 사용과 배아를 활용한 줄기세포 임상시험은 그것이 가져올 인류 차원의 혜택만큼이나 사용 과정에서 또는 오남용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공정한 잣대 적용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정답이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그래서 저자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통해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적 사례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야만 하므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인체 실험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당 내용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731부대를 떠올렸는데, 때마침 부록으로 일본 731부대의 야만적인 인체 실험을 소개하고 있다. 비윤리적인 인체 실험은 서양세계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자가 731부대에 대해 알았다면 본문에서 이를 절대로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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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초보자가 가장 알고 싶은 최다질문 TOP 45
이승환 지음 / 메이트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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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출간한 전작 <메타버스 비긴즈>는 본격적인 메타버스 소개서다. 그에 비해 이 신간은 메타버스 자체보다는 메타버스가 가져올 세상의 변화와 특히 NFT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메타버스와 관련한 질문에 대한 답변 방식을 사용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한층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겉표지의 표제 상단에 병기한 문구-메타버스와 NFT 세상에서 일하고 돈 벌기는 이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어 부제에 가깝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을 때 개인적 태도는 수용적이 되기 마련이다. 잘 알지 못하는 혁신적인 최첨단 문명의 이기 앞에서 개략적이라도 알아야 뭔가라도 비판적 인식을 가질 수 있음이다. 한참 발전이 빠르게 진행 중인 기술과 사회 변화는 명확한 예측이 어렵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가 전개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측과 전망은 항상 유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글로벌 혁신기업들은 점과 선, 면을 넘어선 새로운 연결점을 찾고 있습니다. 바로 가상공간입니다. 면이 모이면 공간을 만들게 되죠. 가상공간에서 실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공존감을 느끼며 우리가 연결된다면 기존의 연결에서 생겼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 수 있습니다. (P.20)

 

메타버스의 각광은 우연과 필연이 결합한 현상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코로나 19의 확산이라는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비대면 소통방식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하였고, 비대면이되 비대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면의 체험을 제공하는 수요가 메타버스의 유행을 앞당겼다. 메타버스가 일과성 현상이 아니고 인터넷의 뒤를 이어 차세대 산업과 사회 혁명의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는 싫든 좋든 메타버스 세상 속에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의 삶이 인터넷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명한 전망이다.

 

메타버스 태풍의 전조가 될 다양한 플랫폼과 기기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며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플랫폼과 기기들은 하나의 서비스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기존에 없던 수익모델을 만들고 경쟁 구도는 바뀌게 될 것입니다. (P.36)

 

경제적 유인 효과를 동반하지 못하는 기술발전은 반짝할 따름이다. 메타버스가 순전한 기술적 현상이라면 단지 흥미만 유발하고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겠지만, NFT 등장과 맞물려 강력한 수익성을 촉발할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메타버스 경제에서 NFT가 핵심적 기능을 담당함을 반복하여 언급하는데, 자신의 소유권과 지적 재산권을 증빙할 수 없다면 가상공간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이 불가능해서이다.

 

현실의 삶에서 소유가 중요하듯, 메타버스에서도 디지털 자산에 대한 소유가 가능해진다면 상상력을 통해 생산된 무한한 디지털 자산을 소유하고 거래하며, 기존에 없던 가치가 생겨날 것입니다. (P.65)

 

근년 들어 광풍이 일었던 가상화폐 채굴과 NFT 모두 가상공간의 거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용처가 가상공간으로 제한된다면 성장의 한계는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양자 모두 실물경제와의 교환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실물 화폐와 실물 상품에 비해 양자는 아직 불안정성과 호환성의 제약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므로 제약을 극복하는 시기를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하겠다. 현재로서는 대박과 쪽박 사이 어디쯤이므로 투자보다는 투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비친다.

 

NFT 시즌1에서는 NFT라는 이름만으로도 주목받고 가치가 있었으나 이제 거품이 사라지고 시장은 본질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픽셀의 소유를 넘어 왜 NFT를 가져야 하는지, NFT를 소유해서 어떠한 가치.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P.299)

 

메타버스의 이론적, 기술적 원리를 나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현실응용 사례를 제시하는 게 직접적인 이해와 수용에 유용할 수 있다. 저자는 메타버스 사무실로 온라인 출근하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워케이션과 통근시간 감소 등의 측면에서 효율적이지만, 비대면에 따른 조직관리와 비전 공유의 약점 등을 극복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완벽한 가상감과 몰입감을 구현하기 어려운 데 따른 기술적 요인도 빠뜨릴 수 없겠다. 모두가 온종일 HMD를 착용한 채 일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가상 인간의 등장 역시 비용 효과성을 고려하면 향후 지속적 증가가 예상된다. 초창기에 단순히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네들이 실제 인간과 경쟁 또는 대체하는 단계에 이르면 현실 세계에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파장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차별성은 단순히 메타버스 이해에 있지 않고 메타버스가 주류가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일하고 돈 벌기가 가능할지 살펴보는 데 있다. 메타버스를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세상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메타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활동과 영역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NFT 발행과 거래를 통해 수익을 도모할 수 있다면 무작정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비록 가상공간 내 활동이 유치해 보이고, NFT가 영 미덥지 않다고 여겨지더라도 로블록스와 샌드박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NFT가 실제로 거래되고 일부는 수익을 창출하고 있음도 무시하기 어렵다. 일례로 삼성전자는 신규 스마트폰 사전예약자에게 NFT를 증정하고 있다.

 

메타버스 혁명은 아무래도 대중보다는 몇몇 선도적 기업의 주도로 발전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메타, 유니티, 엔비디아, MS와 같은 외국계 다국적 기업뿐만 아니라 네이버, 현대자동차, LG이노텍 등 국내 대기업들의 SWHW 연구개발이 메타버스 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주요 메타버스 기업의 기업전략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투자 관점에서 어디에 주목해야 할지 덧붙여 말한다.

 

메타버스에 관심 있지만 접근이 막막한 독자라면 발간 순서와 무관하게 오히려 이 책을 먼저 읽은 후, 전작을 읽는 게 독자로서는 한층 자연스럽고 편하게 메타버스 세계에 다가서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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