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들어오지 마시오 사계절 1318 문고 118
최나미 지음 / 사계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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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엄마가 사망한 이후 석균이는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낸다. 아빠와의 대화도 꺼리며 낯선 이가 집안에 들어오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품으며 정상적 식사를 마다한 채 햄버거 등의 급체로 숨이 막히기 일쑤다. 작품 초반부에 독자가 석균에게 갖는 태도는 유보적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동정적 감정이다. 엄마와 사이가 돈독한 만큼 심적 충격도 컸을 테니까. 그럼에도 석균이의 반응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다.

 

이번에도, 너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P.65)

 

엉뚱한 할머니의 등장과 석균 가족과의 티격태격이 있지만 그래도 평이하게 전개되나 싶던 작품은 한 통의 소포 배달과 함께 요동친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엄마의 휴대폰과 함께 발견한 문자메시지 하나. 석균이는 이것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재빨리 망각하는 편리한 기제를 갖고 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자구책이라 할 수 있는데, 의식의 맨밑에 가라앉아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석균이가 6학년 시절의 사진 사건에 대해 처음에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태까지 독자는 석균이를 피해자로 인정하였는데, 이것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친구들과 피해자의 시선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연락을 끊고 전화번호를 바꾸며 졸업앨범을 버리려 하고 초등학교 시절의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새출발하고자 하는 숨겨진 이유를 비로소 드러난다.

 

네가 의도하지 않았다는 거, 나는 믿어. 하지만 의도하지 않아도 엄연한 결과가 있고 피해를 본 사람이 있잖아. 무엇보다 넌 피해자가 아니고. 당사자는 그 일로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가 없어.” (P.141)

 

독자는 인정한다. 석균이가 직접적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할머니도 석균이의 진심을 믿는다. 그는 단지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일까 추리한 결과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그는 지목당한 친구를 비난할 의도도 없었고 다른 아이들의 몰지각한 괴롭히는 행위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비난받는 당사자가 당당하게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했다면 더 빨리 가라앉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석균이가 억울해 하는 이유도 납득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모순된 변명임을 그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다.

 

아들, 만약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 때문에 누군가 힘들어졌다면, 그런데 그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어?”

아빠가 기억에 없는 일이라고 자긴 책임 없대? 진짜 어이없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야, 사과하기 싫으니까. 안 봐도 알겠다.” (P.160)

 

애초에 사진의 당사자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을 때 사과하였다면 사안은 이렇게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석균이의 엄마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말은 쉽지만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수치심과 함께 무너진 자존감, 거기에 사죄 이후의 후속 처리에 따른 대가 등은 더더욱 사과를 망설이게 만든다. 어른도 그러할진대 아이들에게 마냥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법.

 

이제 지난 1년간 석균이의 생활을 되돌아 볼 때, 석균이의 은거가 단순히 엄마의 사망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미 세상과 절연하려는 퇴행적 성향을 지닌 석균에게 엄마의 죽음은 기폭제 역할을 한 게 아니었을까. 스스로 구축한 굴 속에 틀어박힌채 아무도 참된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위장 전술을 사용하는 것. 그래서 도우미 아주머니는 물론 고모조차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 물론 이 모든 행위가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잘 생각해라, 피한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거 아니다. 아예 시작을 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이 상태로 두고 떠나는 건 도망가는 거나 다름없어. 그런 곳이 낙원일 리도 없고.” (P.153-154)

 

석균의 용기는 친구 가람이와, 무엇보다 유사한 아픔을 겪은 할머니의 도움이 크다. 아빠의 진심어린 고백의 영향도 있다. 당장 모든 상처가 아물 수 없다. 언젠가 상처가 낫더라도 흉터자국을 없애버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할 용기를 냈다는 것, 용서와 화해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적어도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고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할머니의 말처럼 회피한다고 해서 있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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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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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으로든 싸워야 하며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었다. (P.159)

 

광포한 위력의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며 일선에서 싸우는 사람들-리외, 타루, 그랑 등-의 투쟁기록이라고 하면 대체로 차원을 달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게 마련이다. 나 같은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웅 말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리외는 시종일관 이러한 선입견을 거부한다. 랑베르와의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뭔가요?” 랑베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예로 들면, 성실성은 내 직분을 완수하는 거예요.” (P.194)

 

코로나19 환경에 처한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 볼 때 <페스트>는 더는 소설 속 가공의 상황이 아니다. 폐쇄된 오랑 시의 시민들은 자의든 타의든 격리 생활을 겪는 지금의 우리와 판박이다.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의 노도에 우왕좌왕하는 시민들과 정부 모습도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병실 부족 현상도, 비록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타국에서의 사망자 속출에 따른 시신 방치 및 폐기 등도 소설과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질병에 좌절하거나 현실을 회피하든지 하는 개개인의 반응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겪고 끝내 재회하지 못하는 아픔과 슬픔을 우리는 많이 겪지 않았던가.

 

완벽할 정도로 갑작스러운데다 언제 끝날지 예견할 수도 없는 그 이별에 망연자실한 채, 우리는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어느새 그토록 멀어진 존재, 그리고 이제 우리의 삶 하루하루를 다 차지해버린 존재에 대한 추억에 저항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는 이중의 고통-우리 자신의 고통 그리고 집에 없는 사람들, 즉 자식, 아내 또는 연인이 겪는 고통을 상상 속에서 함께 겪고 있었다. (P.89)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이 작품에서다. <이방인>이 개인과 세상의 괴리를 인식한 순간의 묘사라면, <페스트>는 깨달은 인식을 통해 개인과 세상을 합일시키고자 하는 행동의 장면이다. 소외된 두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쉽사리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좌절하지 말 것, 그리고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직분으로서 성실하게 수행할 뿐이라는 것. 작가가 여기서 보여주는 작중 인물들-리외를 제외하더라도-의 면면이 그러하다.

 

리외는 그랑을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다. 독자가 보는 그랑은 나약한 소시민, 늙은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문장 한 줄을 완성하지 못해 쩔쩔매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다. 페스트와의 투쟁에서도 그는 통계를 정리하는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그럼에도 리외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굳이 영웅을 찾고 싶다면 말이다.

 

그렇다,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예나 모델이 제시되기를 정 원한다면,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그런 영웅이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이 영웅,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며,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언뜻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이상밖에 가진 것이 없는 이 영웅을 제시하고자 한다. (P.164)

 

우연히 오랑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탈출에 필사적이다. 그는 오랑 시민도 아니므로 이곳에 갇혀서 남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이유가 없다. 지긋지긋한 오랑을 벗어나 사랑하는 아내와 하루빨리 재회하고픈 심정은 누구라도 다를 바 없다. 리외도 그런 랑베르를 비난하지 않으며 잘 되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여러 차례 탈출 시도가 어긋나는 동안 열병의 전파와 리외를 비롯하여 그것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랑베르가 내적 갈등을 겪는 것도 일면 타당하다. 페스트는 인간이 정한 경계를 지킬 의향이 추호도 없을 테니. 나와 그들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독자는 투쟁에 참여하는 두 명의 이념주의자를 확인할 수 있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 초기만 해도 전형적인 종교인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시련 자체도 신의 뜻이니 반성하고 감수하라는. 그의 초기 강론은 이렇게 영적 의지로 충만해 있다. 신부는 실험 대상이 되어 혈청 주사를 맞고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아이의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면서 다시는 추상의 세계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적나라한 현실은 이념의 틀을 거부한다. 그가 리외 일행에 동참하고 신앙에 변화가 생기게 됨은 진정한 종교인이기에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넷플릭스의 <지옥>에서 갓난아기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사도를 보며 대중들이 비로소 의구심을 품게 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따라서 파늘루 신부가 전염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 것은 필연이다.

 

타루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전염병의 의미와 사람들의 행동의 깊숙한 충동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서 리외와 유일하게 우정을 교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견딜 수 없는 그는 낯선 고장 오랑에서 페스트와 맞닥뜨리며 비로소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와 리외는 동일한 것을 추구한다.

 

(타루)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면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평화를 기대할 수는 있겠죠. 인간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비록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 행할 수 있으니까요. (P.294)

 

이 소설 속 많은 사건은 그의 기록에 의존하며 보건대 활동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중을 알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이 리외에게 갖는 충격과 아픔의 심대함은 절절하기 이를 데 없어 리외는 자신이 페스트에 패배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지금 그의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침묵은 너무나 깊고 페스트에서 해방된 도시와 거리의 침묵과 너무나 긴밀하게 일치해서, 리외는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패배, 전쟁을 끝내지만 평화 자체를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만들어버리는 패배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P.338)

 

역사상의 무수한 파괴적 질병과 마찬가지로 오랑의 페스트도 인간세계의 완전한 절멸에는 실패한다. 계절이 바뀌고 어느덧 정체 상태에 이르다가 급작스럽게 소멸하고 만다. 페스트의 쇠퇴에 리외와 보건대를 비롯한 사람들의 기여도를 어느 정도인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페스트는 인간과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존재 의지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결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봉쇄가 풀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헤어졌다가 재회한 가족, 연인, 부부들 모두는 기쁨의 웃음과 눈물을 흘린다. 극도의 고생이 가져다준 안도감과 행복감은 비교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페스트에 걸렸으나 운 좋게 살아남은 그랑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과거는 훌훌 털어버리고 밝고 행복한 나날만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공통적이다. 페스트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기억할 필요조차 없이.

 

물론 예외적인 사람도 있으니 코타르가 그러하다. 그는 페스트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삶의 편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비정상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페스트의 발달과 함께 그의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고 열병의 소멸과 더불어 그의 공포와 광기도 극에 달하였다. 타루는 그가 페스트의 공범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죽음에 대한 동의야말로 그의 진정한 죄악이라고 평한다.

 

그렇다. 페스트는 죄악이다. 평범한 도시에서 죄악은 그늘 속에 항상 드리워져 있다. 어떤 계기로 그것이 존재를 드러내기 전까지 사람들은 죄악의 정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리외를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죄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데 있다. 비록 그것의 성패를 확신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카뮈가 생뚱맞은 이 작품을 발표한 해가 1947년이다. 그 시절에 페스트가 발병한 사례도 없는데 그는 왜 잊혀버린 치명적 전염병을 제재로 들고나왔을까? 작품 해설에서처럼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유럽 레지스탕스의 투쟁”(P.365)은 빈말이 아니었으리라. 그의 눈에 나치즘은 페스트 못지않은 광기와 죄악으로 비쳤을 테니까.

 

타루는 페스트가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시민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는 욕망이 강할 거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으며,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페스트는 흔적을 남길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326)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한 것처럼 페스트가 소멸하였다고 해서 모든 죄악이 사라지고 세계가 정화되었다고 믿는다면 순진하리라. 나치에 동참한 사람들, 나치를 겪은 사람들,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에는 이제는 순수한 기쁨과 행복은 불가능하다. 제아무리 과거의 악몽을 지우고자 해도 기억과 인식은 의식 밑바닥 깊은 곳에 숨어서 떠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세상도 여전히 변함없이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수천 년간 인간이 반복해 온 삶의 패턴이다. 제아무리 무심하고 반성과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걸 기억하고 모든 걸 의식 속에 항상 담아둔다면 사람은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에.

 

코타르도, 타루도, 리외가 사랑했고 잃어버린 남자들과 여자들도, 죽은 자들도, 범죄자들도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간의 힘이자 순수함이었다. 리외가 모든 고통을 넘어 그들과 다시 만난다고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였다. (P.360)

 

다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리외가 마지막 대목에서 상기하듯이 페스트는 결코 소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병균이 어딘가에 숨어서 재기를 노리듯이 겉보기에 세상에 죄악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나치즘과 같은 죄악의 병균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마냥 순수하고 천진하게 환희에 빠져들 수 없는 까닭이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정점에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정부에서도 방역단계를 차츰 완화하고 있다. 강력한 신규변종이 발생하지 않는 한 코로나19 팬데믹도 머지않은 시기에 종결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스, 메르스 등 근년 들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유행병은 치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페스트보다 약하지만 전염성의 기준에서는 그것에 못지않다. 결국 질병은 인간과 사회에 끊임없이 도전장을 보낼 것이며 관건은 그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이 될 것임을 이 소설은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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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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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년은 함께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도 감정도 판이하게 다르고 의사 소통도 잘 되지 않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멧돼지만 손에 넣게 되면

난 돌아가 오두막 일을 계속 해야겠어(P.79)

 

두 소년은 얼굴을 맞바라 보았다.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P.103)

 

이 소설의 상징성은 너무나 분명하게 작품 내 드러나 있기에 독자라면 쉽게 알아차린다. 잭과 랠프로 대표되는 수렵 대 정착, 야만 대 문명의 이원적 대립구조가 노골적이기에 주제 이해에 용이하지만 너무나 선명한 단순화에는 거부감을 느낄 독자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외부적 요인 없이 소년들 스스로가 야만성으로 기꺼이 회귀한다는 전개가 가능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으로서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소설적 재미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후반부로 가면서 랠프와 잭의 갈등이 커지면서 야만성이 잔인함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부터는 영화못지 않은 박진감마저 느낄 수 있다. 특히 끝장면은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랠프의 공포가 극에 달한 압권을 보여준다.

 

그는 상처도 시장기도 갈증도 모두 잊어버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절망적인 공포에 몰려 나는 듯이 뛰면서 숲을 벗어나서 탁 트인 모래사장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검은 점이 여러 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것은 붉은 동그라미가 되어 잽싸게 커지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기진하여 자기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분간이 안 갔다. 필사적인 신호소리가 위협의 톱날을 번뜩이며 다가왔다. 금방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P.299)

 

이 작품은 <15소년 표류기>와 유사한 설정이면서 현저히 다르며, 작품 해설에 따르면 <산호섬>의 낙천적 인간관에 대한 패러디라고 한다. 두 주인공의 이름도 거기에서 따왔다. 이 작품이 발표된 해는 1954,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양대 세력의 냉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된 시점이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잇달아 실험되면서 인류 절멸의 위기가 암울하게 드리워진 시기다. 작품 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문명의 옹호와 복귀의지-봉화와 오두막-는 스러져가는 위기감의 발로라고 하겠다.

 

너나 닥쳐! 도대체 넌 뭐야? 가만히 버티고 앉아서 이것저것 지시나 하고. 사냥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는 주제에...

난 대장이야. 선출되었어

그래, 선출되었다는 게 어쨌다는 거야? 이치도 안 닿는 명령이나 내리고...(P.134)

 

잭과 로저의 오랑캐패, 즉 야만인은 스스로 문명을 거부하고 선택한 길이다. 대장 선출에서 낙선했음에도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 자신만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공동체와 함께 하길 거부하는 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규칙과 인간애마저 가차없이 저버리며 무자비하고 냉혹한 수단에 거리낌없는 잔인성.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유감과 후회의 감정마저 느끼지 않는 비인간성. 그것은 문명 이전의 원시 상태, 즉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무정부 사회의 타락한 장면이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옷을 입고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대충 보조를 맞추어 행진하고 있는 일단의 소년들이었다. 그들은 반바지나 셔츠나 다른 옷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P.25)

 

잭이 이끄는 성가대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이 대목에 상당히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여기와 나중에 타락한 잭과 사냥대를 연결시키면 몇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검은 제복, 나치, 광신적 종교집단 등. 나치와 광신도 모두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하고 타인을 지배하려고 들며 폭력도 불사한다. 고도 문명의 상징인 정치와 종교에서 오히려 절대적 타락과 비인간화가 두드러졌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잭은 그것에 대한 공포와, 멧돼지 고기로 대변되는 물질적 유혹으로 서서히 문명을 무너뜨린다. 숨가쁜 암퇘지 사냥과 이어지는 광란의 가무는 원시와 야만성의 폭발적 표출이다. 그리스 신화의 바쿠스 축제를 연상시키며, 작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인육을 먹는 좀비들과 다를 바 없다.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놈을 죽여라!

막대기가 내려 퍼부어지고 새로 원을 그린 소년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 짐승은 원형의 한가운데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짐승은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가 원형을 꿰뚫고 가파로운 바위 끝에서 물가의 모래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 소년의 무리는 물밀 듯이 그 뒤를 밟고 바위를 내려가 짐승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했다. 물어뜯고 살을 찢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빨과 손톱으로 물어뜯고 할퀼 뿐이었다. (P.228)

 

랠프는 외모와 성품 등 여러면에서 우수한 대장이 될 수 있음에도 동료를 모두 놓치고 잭 일당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가. 그는 잭처럼 단호하지 못하고 야심을 품지도 않았으며 돼지의 조언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길 과단성도 부족하였다. 평화시의 지도자상이지 전시의 지도자상은 아닌 것이다. 소라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정확한 대안을 모색하는 능력은 차라리 돼지가 훨씬 뛰어나다. 아래 랠프와 돼지의 대화는 이러한 랠프의 결점이 명확하게 언급된 대목이다.

 

랠프, 어떡할 작정이야? 얘기만 하고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았잖아? 나는 안경을 도로 찾아야겠어

나는 지금 생각중이야. 만약 우리가 그 전에 그랬듯이 단정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간다면-어쨌든 우린 오랑캐 쪽이 아니고 또 구조되는 것은 장난이 아니니까-(P.256)

 

이렇게 보면 랠프가 무척 무능하게 보이지만 사실 평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가깝다고 하겠다. 자신의 이성과 선의가 타인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믿음. 그는 소년들 사이에 규칙과 권위에 대한 준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보편적 믿음과 순진한 생각의 정반대가 소설의 표제이기도 한 파리대왕이다. 그것은 그것에 바쳐진 제물인 동시에 그것자체이다. 사이먼은 막대기에 매달린 파리대왕과의 묵시적 대화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알아차린다. 파리대왕 스스로가 자신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 즉 내면의 동물성의 증거임을 주장하므로.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P.214)

 

간신히 구조받은 랠프의 울부짖음은 처절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의연하게 버티던 성숙한 소년이 어른을 만나는 순간 소년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결코 예전의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음도 알기에 그의 눈물은 절실한 것이다. 다만 랠프의 심경을 어른인 장교가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P.303)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책을 고를 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도 최선이 아닌 차선의 의미에서 말이다. 서평의 많은 부분이 번역의 고루함을 지적하였는데, 읽다 보니 과연 오늘의 젊은 세대의 문체와 감각에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20세기 훨씬 이전 번역본을 새롭게 손보지 않은 상태에서 재출간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판사가 스스로 밝힌 새 문학 전집을 펴내면서의 모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투의 책에 익숙해서인지 몇몇 생소한 한자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낯설지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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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는 봄 : 청소년 비극 지만지 희곡선집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프랑크 베데킨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희곡 부문에서 소위 문제적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당대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억압된 성()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작품 <눈뜨는 봄>(또는 <사춘기>)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에 대한 관심과 무지, 반면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와 교육관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사춘기는 2의 탄생또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릴 정도로 청소년들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신체는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는 반면, 정신적 성장은 아직 불완전하며, 가정과 사회적으로 그들은 미숙아로서 보살핌과 교육을 받는 대상이다. 그들은 인생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찬 꿈을 품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당장의 신체적 변화와 자연적 욕구의 성장에 당혹감을 품는다.


오늘날은 청소년들의 성교육에 대하여 대체로 긍정적이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성문화의 확산이니 성 개방 풍조니 하는 일각에서 우려하는 현상도 앞서가는 서구에서도 1960년 이후에나 발생한 추세다. 따라서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세기 말은 전적으로 전근대적 보수적 사고관이 지배하던 시기임을 무엇보다도 인식해야 한다.


당시 성은 무조건 감추어야 하는 것, 어른들만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장 궁금한 질문, 즉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답변은 적당히 에두르는데 일차적 목적을 둔다. 우리의 경우,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식으로. 과거 유럽도 다르지 않다. 황새가 굴뚝을 통해 들어와서 아이를 주고 간다는 식으로. 그래서 벤들라의 호기심에 엄마 베르크만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결국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부인 자신도 그렇게 교육받아 왔고, 결혼 후에야 깨우친 내용이므로.


열네 살짜리 딸한테 그걸 말하느니, 차라리 태양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내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했을 뿐이란다.” (P.138)


6장에서 벤들라가 멜히오어와 우연한 경험을 갖게 된 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미소 짓는 걸 어머니가 보시니까. 넌 왜 입을 다물지 못하니? 난 몰라. 난 정말 몰라.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어...길이 마치 양탄자 같아....” (P.89)


이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당사자들의 성적 무지와, 어른들의 허위와 가식적 도덕관이 잘못 결합한 결과다.


모리츠의 자살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교사 회의의 면면을 보자. 베데킨트는 신조어로 사춘기 청소년 문제를 논의하는 어른들, 즉 교사들을 비꼬고 있다. 원숭이 비계, 몽둥이, 주린 띠, 골절상, 혀 놀림, 파리 시체, 일사병 등의 이름을 가진 교사들이 제대로 사안을 다룰 수 있겠는가? 그들이 답답한 실내 환기를 위해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설전을 보라.


벤들라는 잘못된 임신중절로 죽게 되고, 모리츠는 자살을 한다. 멜히오어는 청소년 감화원에 갇힌다. 에른스트와 핸셴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성인 중 유일하게 긍정적이고, 앞서가는 인격을 갖춘 이는 멜히오어의 어머니 가보어 부인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모든 면에서 솔직하며 사실에 기반을 둔 가정교육을 한다. 그녀는 학교의 처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 말대로 그들은 희생양이 필요했을 따름이다. 아들이 남녀의 성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학교에서 쫓겨나고 감화원에 들어갈 중죄에 해당되는가?


다만 당대는 가보어 씨의 다음 의견이 지배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소수자의 발언으로 치부되며, 그녀의 교육관과 그 결과는 다수와 충돌한 것이다.


멜히오어가 쓴 것 같은 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내면 깊숙이 썩어 있는 게 틀림없어요. 골수가 상한 거예요...그 글은 소름 끼치도록 분명하게 솔직한 의도를 기록하고 있어요. 그 자연적 성향, 부도덕한 경향 말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부도덕한 것이기 때문이오...” (P.123)


멜히오어가 묘지에서 죽음을 택하려는 순간 나타난 복면의 신사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그에게 기회를 주어 지평을 환상적인 방법으로 확대시킬 수 있도록”(P.151) 해준다고 약속한다. 즉 그에게 이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흥미로운 것을 빠짐없이 알게”(P.151) 해주겠다고. 작가는 멜히오어를 죽음에 몰아넣어 완전한 비극으로 구성할 수 있었는데도 복면의 신사를 등장시켜 그를 구제한다. 그 연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와 유사한 인상을 준다. 둘 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독일의 김나지움을 무대로 한다. 베데킨트가 좀 더 성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양자는 기본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인습적인 교육의 폐해를 노정한다. 엄격하고 보수적 가치관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욕망을 죄악시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그것을 억누르는 데 급급하다.


여기서 양육과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되새겨본다. 자녀를 본성과 자질의 자연스럽고 올바른 발로로 유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 순응적이고 보다 성공하기에 유리한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인가? 문득 이런 광고문구가 생각난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아니면 학부모입니까?


* 2011년에 쓴 글인데, 누락되어 있는 걸 찾아서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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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우애, 독재, 자유, 믿음, 환상, 죽음, 용기.

이 동화를 읽고 난 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이다.

 

우애. 동화를 시종일관 이끄는 힘은 요나탄과 카알의 우애다. 모든 면에서 완전히 대비되는 형제이지만 그들 사이의 우애는 비교할 수 없이 끈끈하고 따뜻하다. 겁많은 카알이 벚나무 골짜기를 떠날 결심을 품게 된 계기도 꿈속에서 들렸던 도와달라는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두 사람에게는 죽음조차도 장벽이 되지 않는다. 나약하고 무력한 카알이 형과의 모험을 통해 서서히 사자왕에 어울리게 성장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독재. 독재자 텡일에 저항하는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과 사자왕 형제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차지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낭기열라에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 상황이다. 강압과 착취, 폭력을 마구 일삼는 텡일은 독재자의 전형이다.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침내 자유를 쟁취해 내는 과정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독재자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번역본 출간 당시 국내 정세를 볼 때 의외인 동시에 시사적이다.

 

독재자들이 으레 저지르는 실수를 텡일도 별수 없이 저지르고야 말 거라는 얘기지. 결국 기생충처럼 죽어서 영영 사라져 버릴 거야. (P.69)

 

텡일이 갑자기 내 앞쪽으로 바짝 다가왔기 때문에 잔인해 보이는 얼굴과 눈빛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요나탄 형의 말대로 독사처럼 흉악스러웠습니다. 피에 굶주린 듯 끊임없이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다운 모습이었습니다. (P.154)

 

자유. 자유는 공기와 같다. 상실하고 나서야 소중함을 비로소 체감하며 되찾기 위해 뼈저린 고초, 때로는 죽음마저 감내해야 한다. 이렇게 자유를 위한 투쟁이 중요한 것은 자유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들장미 골짜기 사람들이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끝내 쟁취해야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자유가 곧 행복의 동의어는 아니므로.

 

이제 곧 자유의 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나무가 부러지고 뿌리 뽑히듯이 독재자도 쓰러져 버리겠지요. 끓어오르는 함성과 함께 그 폭풍은 속박을 휩쓸어 내고 우리에게 자유를 되찾아 줄 겁니다!” (P.254)

 

믿음. 공동체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믿을 수 없다고 여겨지면 자연스레 멀리하게 된다. 카일이 휘베트에 반감을 품었던 이유이다. 배신은 더욱 큰 실망과 증오를 유발한다. 형제에게 참으로 친절하고 벚나무 골짜기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황금 수탉의 반역이 인물들에게 그토록 충격을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래도 아직은 믿음의 힘이 한층 크다. 소피아 아주머니, 마티아스 할아버지처럼.

 

환상. 예술의 가치는 적나라한 현실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음에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간과하거나 현실을 벗어난, 하지만 또 다른 진실의 가치를 갈구한다. 예술을 통해서 현실을 버텨갈 힘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겉보기에 터무니없지만 꿈속 세계, 사후 세계, 용과 괴물들의 모험에 열광하는 모습은 자연스럽다.

 

죽음. 낭기열라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사람들은 언제나 사후 세계에 관심을 보여왔다. 천국과 지옥, 극락과 지옥 등 표현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동일하다. 착한 사람은 죽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대한다. 낭기열라조차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게 되었다. 요나탄이 카알에게 얘기했던 낭기열라와 낭길리마의 모습은 차이점이 없는데 낭길리마는 과연 어떠한 곳일까?

 

지금 우리는 낭기열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을 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오래전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니까. 그렇지만 어쩌면 어린 시절이라고 할 수도 있어. 젊고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 살아가는 것이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고 근심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그런 시절 말야.” (P.41)

 

용기. 형제이지만 요나탄과 카알은 우성과 열성 유전자의 극단적 표현형으로 비친다. 언제나 소심하고 겁 많고 주저주저하는 카알. 그런 카알이 낭기열라에 따라가고 홀로 벚나무 골짜기를 헤매게 된 것은 오로지 요나탄 형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에서다. 어떤 면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런 카알이 일련의 모험을 겪으면서 조금씩 바뀌어 감을 보면 일종의 성장소설로 간주할 수 있다. 낭길리마로 가기 위해 오로지 카알만이 실행할 수 있는 최종 행동을 보라.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을 하는 참된 이유라고 하겠다.

 

형은 아무리 위험해도 반드시 해내야 되는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래?”

내가 다그쳤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P.71)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하잘것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못난 쓰레기 이상의 그 무엇도 영영 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P.288-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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