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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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를 먼저 보았고, 후에 원작이 널리 알려진 동화임을 알게 되었다. 대개 동화는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결국은 갈등이 해결되고 주인공이 행복하게 되는 게 통상적인데 이 작품은 동화치고는 독특한 요소가 여럿 있다.

 

일단 주인공이 죽게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비극이다. 비극적 동화는 동화의 본질에 배치된다. 세상은 도처에 비극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굳이 동화에까지 반영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암탉 잎싹의 최후 장면을 복기해 본다.

 

, 나를 잡아먹어라. 그래서 네 아기들 배를 채워라.

잎싹은 눈을 감았다. 순간 목이 콱 조였다. 무척 아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뼈마디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를 물었구나, 드디어... (P.190-191)

 

잎싹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족제비에게 내던진다. 잎싹에게는 두가지 소망이 있었다. 하나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인데, 초록머리를 무사히 청년 청둥오리로 키웠으니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신도 날고 싶은 소망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잎싹은 나는 능력을 상실한 양계장 닭이므로. 하나는 이루었고 다른 하나는 불가능하므로 잎싹은 삶의 이유가 남아 있지 않다.

 

그랬다. 모든 것이 아래에 있었다. 저수지와 눈보라 속의 들판, 그리고 족제비가 보였다. 비쩍 말라서 축 늘어진 암탉을 물고 사냥꾼 족제비가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P.191)

 

작품의 가장 마지막 대목이다. 잎싹은 죽음을 통해 생전에 불가능했던 마지막 소망을 이루었다. 즉 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잎싹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동물, 아니 인간이 있을까?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지만 결코 슬프지 아니한 죽음, 오히려 행복한 죽음이라면 이를 비극이라고 할 수 없다.

 

잎싹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청둥오리 나그네 부부를 잡아먹고 마침내 잎싹마저 새끼의 먹잇감으로 물고 가는 힘겹게 걸어가는 족제비. 작품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던 냉혹하고 무자비한 족제비. 독자라면 누구나 잎싹과 나그네를 동정하고 악역 족제비를 미워하리라.

 

잎싹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아기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족제비도 어쩔 수 없는 어미라는 것을 알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지는 들판. 그 속을 뚫고 어미가 달려가고 있었다. 눈도 못 뜬 새끼들 때문에 곧 돌아와야 하는, 바람처럼 재빠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어미. 고달픈 애꾸눈 사냥꾼. (P.184)

 

잎싹은 깨닫는다. 족제비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본성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행위임을. 자신이 새끼를 낳아 기르고자 하는 본능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살아가는 양태가 다를 뿐. 어미 족제비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니까. 그것이 자연이 정해 놓은 생명의 법칙이다.

 

양계장 암탉으로 살아가던 잎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마당에 나오면서 원하던 자유를 누리지만 안전을 위협받는다. 자유는 항상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자유는 주체의 자발성과 책임감을 요구한다. 잎싹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먹이를 구해야 하고 천적의 위험도 극복해야 한다.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아닌 날씨도 대비해야 한다. 차라리 양계장 안에 있었던 시절이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작가는 여기서 자유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나 보다. 물질적 안락과 무사편안을 뛰어넘는 정신적, 도덕적 가치로서의 자유의 본질.

 

나한테는 소망이 있었어.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암탉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바람인데,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구나! (P.23)

 

잎싹이 마당을 나온 이유는 알만 낳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의 알을 낳고 키우고자 하는 소망에서다. 모성의 본능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알을 낳지 못하는 잎싹이 청둥오리의 알을 자기 알이라 믿고 정성껏 품는 장면, 그리고 아기 오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 초록머리와 잎싹이 종이 다르다고 해서 모자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매정하게 말해서는 안된다. 흔히 말하듯 낳기만 해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잘 키워줘야 부모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잎싹은 부모의 자격이 충분하다. 여기서 사랑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잎싹과 나그네는 처지가 달랐지만 서로를 이해했다. 초록머리와 잎싹은 서로가 같을 수 없음을 알지만 여전히 부모 자식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잎싹은 기쁜 마음으로 초록머리를 떠나보냈다. 심지어 잎싹은 어미 족제비조차 이해하고 자신의 몸을 제공했다. 이 모든 걸 결국 사랑이라고 해석하면 지나친 걸까?

 

같은 족속이라고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란다. 중요한 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야.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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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신은 야생 멧돼지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8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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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야생의 세계는 이제 없다. 야생 동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계 설정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없다. 인간과 더불어 살거나 주변을 배회하거나 아니면 인간을 피해 살거나. 제아무리 인간과 접촉하지 않으려 해도 인간은 집요하게 야생 동물에게 접근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동물 친구들도 어떤 사람을 마주치게 되는지에 따라 그들의 삶이 크게 좌우됨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길들여지지 않는 말은 무가치하다. 평상시에는 멀쩡하다가 사람이 타려고 하면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는 콜리베이 같은 말은 제아무리 외모가 훤칠하더라도 쓸모가 없고, 쓸모없는 말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 말의 관점에서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행위다. 노예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을 겪더라도 고귀한 본성을 지킬 것인가. 콜리베이는 후자를 선택했다. 화자는 콜리베이가 자유를 되찾은 것에 기뻐하지만, 이 드문 사례를 일반화하기는 곤란하다. 콜리베이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미국 너구리 웨이앗차 역시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미국 너구리가 살아가는 평화로운 정경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고 있어 독자가 흐뭇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반면 후반부는 인간에게 붙잡힌 웨이앗차가 우여곡절 끌에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 기술되어 있다. 너구리가 피곳의 농장에서 즐거운 시절을 보낸 것은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였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동물을 대하는 법이다, 웨이앗차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캐나다기러기 가족의 슬픈 가족사는 어떠한가? 장거리 이동을 하는 철새인 기러기가 자식들과 함께 날지 못해 호수에 주저앉았을 때 그들의 심정을 인간은 결코 알지 못한다. 어쩌다가 어미 기러기가 날 수 있게 되어 자식들과 함께 떠나가 버리고 아비 기러기가 홀로 호수에 버려졌을 때 우리 역시 그 처절한 슬픔에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 기러기 부부의 충실한 사랑으로 이산가족이 재회하는 기쁨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비극의 단초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한 인간의 몰지각한 개인적 욕망이라는 사실을. 비록 그가 후에 기러기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나는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득한 옛날 쐐기 대형으로 하늘을 날던 그 기러기들의 울음소리를 갈망했다. 나는 다른 호수에서 목이 검은색인 기러기 한 쌍을 잡아와서 날개의 칼깃을 잘랐다. 방랑의 계절이 돌아와도 날아갈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P.268-269)

 

원숭이 지니의 일생은 인간과 악연의 연속이다. 고향에서 잡혀 머나먼 타지로 운반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행위로 죽음에 이르게 되기까지. 비록 존과의 우정이 그에게 한 줄기 따스한 위안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니가 사로잡히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있었을 때와 비교 불가능이다. 지니를 창살 넘어 찌른 잔인한 인간이 어디 그 혼자뿐이겠는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야생 동물에게는 대부분 재앙적 영향을 미치게 됨을 동물 이야기를 통해 많이 보았다. 그런 인간에게 한결같은 충성과 애정을 보이는 개라는 동물은 매우 이색적이기에 다행하기조차 하다. 개마저 없었다면 인간은 어떤 동물을 동반하고 의지할 수 있었을까.

 

멍청이 빌리 이야기는 인간과 개의 숱한 미담에 하나를 추가해 준다. 무적의 터크에 대한 사냥꾼의 기대감도 우수한 혈통과 당당한 외모, 까칠한 성격 등을 보면 당연하다. 반면 빌리를 보자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겉으로 비치는 번지르르함에 현혹되어 진정한 내적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옅은 안목. 주인의 목숨을 구한 빌리를 향한 칭찬과 대우는 마땅하지만, 부끄럽고 비열한 행동을 보인 터크의 최후를 보자면 비단 동물에 국한되지 않는 점에서 뒷맛을 남긴다.

 

이 책의 대표적 이야기는 단연 구두 신은 야생 멧돼지박쥐 아탈라파의 대장정이다. 전자는 멧돼지가 인간과 감정적 교류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장면이 따뜻하며 해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구두약을 칠해 달라고 앞발을 내밀고 등을 긁어달라고 재촉하는 멧돼지, 마치 강아지처럼 리젯을 졸졸 따라다니는 거푸미를 보면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기본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원숭이 지니를 대하는 존처럼.

 

사실 그는 자신의 말을 동물들이 알아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친절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은 동물들도 이해할 것이라고 느꼈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P.289)

 

거푸미 이야기의 압권은 거푸미 부부와 불구대천의 원수 늙은 곰의 사생결단 대결이다. 화자를 통해 수컷 멧돼지의 무시무시함과 위력을 전해 들었지만 어쨌든 거대한 곰은 포식자다. 일반적 경우라면 싸움을 회피하고 등을 돌려야 마땅하지만 거푸미는 그렇지 않다. 가족에 대한 본능적 애정과 유대감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더해 준 것이다.

 

시튼 동물기 중에 박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지껏 최초의 사례가 아탈라파 이야기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박쥐의 생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박쥐가 엄청난 비행 선수라는 것, 번식기를 제외하면 암수가 따로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는 것, 그리고 철에 맞추어 대장정을 한다는 등. 박쥐가 해충을 많이 잡아먹어 인간에게 극히 이로운 동물이라는 화자의 열변을 보건대 흡혈귀와 어둠 속 두려움의 존재로 낙인찍힌 박쥐의 이미지는 잊어도 좋다. 눈을 가려도 잘 날아다닐 수 있는 박쥐의 능력은 요즘은 상식이지만 시튼 당대에는 신기하고 흥미로운 사실이었던 듯하다. 아탈라파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 풍요로운 남국에 다다른 것을 축하한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고 그들의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순수한 야생 동물의 세계는 대부분 사라졌다. 현존하는 일부 지역들도 인간의 불온한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거나 강제적으로 보호구역을 설정하였기에 살아남아 있을 따름이다. 웨이앗차가 살아가는 숲만 해도 인간에게 별 경제적 가치가 없기에 겨우 유지될 수 있다. 그 한 줌의 숲은 농부들의 말마따나 쓸모없는 나무만이 남은 것”(P.153)이기에.

 

언제까지 마냥 우연과 행운에 기댈 수 없는 법이다. 존이 지니에 대했던 것처럼, 시튼이 서문에서 적었듯이 동물들도 작지만 굳세고 지혜로운 영혼”(P.6)이 있음을 인식하고 무시하지 않고 좀더 따뜻하게 대해”(P.6) 준다면 인간과 야생 동물의 관계가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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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스톤 공원의 동물 친구들 - 우리 곁의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7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성은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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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의 통상적인 작품 특징은 동물 주인공을 하나하나 개별적인 인격을 지닌 존재처럼 간주하여 화자가 보고 듣고 겪은 그들의 사례담을 생생하게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시튼의 기존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이 책은 시튼 자신의 알고 지냈던 동물에 대한 일종의 소개서 내지 안내서에 가깝다. 그것도 북아메리카 전역이 아니라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국한해서. 시튼 자신은 서문에서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의의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872,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설립되면서 야생 동물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면서 서서히 이 동물들도 우리를 향해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현재 북서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이 보호구역에서만 야생 동물들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 시절부터 사람을 향해 보였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P.5)

 

이 책에 나타나는 동물의 수는 무척 많다. 코요테, 프레리도그에서 시작하여 여우, 수달 등의 털 짐승들과 사슴류, 다람쥐류, 곰 및 고양이과 동물 등 어지간한 포유류는 거의 섭렵하고 있다. 심지어 박쥐도 등장한다. 따라서 등장 동물은 충분한 호흡을 갖고 독자적인 개성을 보여 주기보다는 종의 일원으로서 화자에 의해 독자에게 소개된다. 일부 두드러진 일화조차 동물이 아닌 인간의 관점으로 접근한 경우다. 이 책의 주인공은 화자 자신이다.

 

국가에 의한 보호를 받고 있으니만치 순수 야생 동물과는 행동양식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두려워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대신 무덤덤하거나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는 예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검은꼬리사슴의 유명한 높이 뛰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슴을 놀라게 하였지만 전혀 의외의 반응을 보인 사례가 전형적이다.

 

녀석이 놀라 도망쳤을까? 전혀 아니올시다. 녀석은 옐로스톤 보호구역에 사는 사슴이었다. 총이나 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평생을 안전하게 살아 온 것이다......전혀, 단 한 발자국도. 그래서 오늘날까지 내 아름다운 반려자는 검은꼬리사슴이 언덕을 향해 튀어올라가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P.94)

 

화자와 동물 간의 숨 막히는 대결이 코믹하게 펼쳐지는 우는토끼 대목도 흥미진진하다. 뻘뻘 땀을 흘리고 용을 쓰며 토끼굴을 열심히 파헤치는 화자를 저 멀리 뒤쪽에서 여유롭게 바라보는 토끼의 대조적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은 스컹크와 오소리에 대한 옹호도 이채로운데, 스컹크에 대해서는 미국의 상징 동물로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나는 스컹크라면 가슴 깊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사실, 이 동물이야말로 미국에 어울리는 상징이라고 나는 한때 주장했다......녀석이야말로 이상적인 시민이다. (P.141)

 

강인하고 튼튼하며 끈덕진 데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용감한 오소리”(P.161)도 높이 평가하며 존경을 표한다. 소년 해리와 친절한 오소리 이야기의 독자라면 화자의 의견에 십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야생 동물의 외양과 소리 등에서 호감 대신 거리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게 사실이다. 이 녀석이 성질이 사나운 건 아닐지, 나를 당장 공격해서 물어뜯지나 않을까 등등. 야생 짐승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 빠졌던 사례를 들려달라는 집요한 기자의 질문에 퓨마가 아닌 미친 황소의 이야기를 태연히 들려주는 화자는 우리의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

 

미지의 존재는 일단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게 마련이고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적대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도 마찬가지지만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가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시튼은 이렇게 제안한다.

 

초원 위로 나지막이 솟은 흙무더기에 앉아 있는 힘세고 해로운 데 없으며 고결하기까지 한 저 야생 동물에게 이처럼 다정한 습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깨달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녀석을 사랑하고 또한 그 종족을 멸종 위기에서 구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동참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P.180-181)

 

시튼이 사냥을 중단하게 된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음미할 가치가 있다. 시튼이 말코손바닥사슴 암컷 소리를 흉내 내 수컷을 유인하여 아내의 사냥이 성공하였다. 이 경험이 일반인에게는 엄청난 영웅담과 자랑거리임이 틀림없지만 시튼에게는 불쾌감만 남긴다. 야생 동물 애호가인 자신이 떳떳지 못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운 동물을 단지 재미 삼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자책감이리라.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 듯했고 사냥 책과 이야기에 나왔던 올바른 규칙을 따라 정확하게 딱 떨어진 듯 보였지만, 아주 불쾌했다.

.......

그 이후로 나는 말코손바닥사슴을 결코 불러내지 않았고, 그때 사냥했던 라이플총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선반에 걸어 놓았다. (P.120)

 

익숙한 코요테에서 비롯하여 불쌍한 조니 같은 흑곰까지 다양한 동물군과 함께, 얼핏 동일해 보는 유형도 다종다양한 종으로 나눠진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우리네 야생 동물 인식이 얼마나 빈약한지도 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방문하여 여기에 소개된 동물들을 실물로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상 책갈피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펴야 하는 우리네 같은 사람들조차도 자체로서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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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고양이 - 진정한 동물 영웅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5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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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다. 이전에 읽은 논장 판 5권 세트에 전편이 분산 수록되어 있고 당시 이야기 하나마다 적지 않은 즐거움을 누렸다. 오늘 개별적 논평을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으므로 새삼 하나하나 억지로 반복 기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밝히고 싶은 점은 여전히 이 책의 이야기가 신선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시튼 동물기의 주인공은 대체로 야생동물이다. 순수한 야생동물이라면 이 책에 등장할 이유가 없다. 그네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알 까닭이 없음에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과 인간이 접촉하였고 인간에 의해 그들의 삶이 영향받고 관찰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가로놓였다, 인간과의 관계가 적대적인가 또는 우호적인가. 모든 동물이 야생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동물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네들의 내적인 삶을 정말로 잘 알고 있는지 정말 자신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에 나타나는 동물들은 이러한 유형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하지만, 작가는 단언한다. 그들은 모두 영웅이라고.

 

인간과 동물의 접촉 및 갈등은 대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영역을 점차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동물의 영역과 중첩되는 데서 발생한다. 아메리카들소가 인간에 의해 멸종하자 먹잇감이 사라진 배드랜즈의 빌리같은 늑대가 목장을 습격하게 되었다. 또는 인간의 간섭으로 먹이사슬 체계가 일거에 무너짐으로써 자연의 균형을 어긋나게 된 데서 문제의 발단이 비롯된 예도 있다. 카스카도 주의 멧토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까닭은 인간이 그들의 천적을 학살해 버린 데서 시작하였다. 도대체 매와 올빼미를 사냥한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주는 멍청한 법”(P.211)을 제정한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사람들은 원인을 차근차근 살펴보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목도한 상황만을 문제시할 뿐이다. 늑대가 소를 잡아먹는다고? 그러면 늑대를 다 죽여라! 토끼들이 너무 많아 들판이 황폐해진다고? 그러면 토끼를 학살해라! 매우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문제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인간의 사냥과 학살에 대항하여 순전히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동물을 보면 절로 박수가 나온다. 게다가 비열한 수단으로 동물 영웅을 해치려고 하는 야비한 인간에게는 반감이 치솟는다. 정당한 대결의 규칙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란.

 

페어플레이라고! 이런 게 너희들이 말하는 페어플레이야. 이 더러운 거짓말쟁이들, 이 치사한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P.230)

 

미키는 꼬마 워호스를 풀어주었고, 화자는 사냥개들을 몰살시킨 배드랜즈의 빌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동정심이든 영웅에 대한 외경심이든 확실한 것은 인간 내면 깊숙한 데서 분출하는 감정이다.

 

늑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녀석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고귀하지만 짧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P.292)

 

반면 위니펙의 늑대전서구 아녹스의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감정은 명백한 동정과 안타까움이다. 늑대는 위험을 감수한 채 굳이 위니펙에 머물러야 했을까, 지미가 그리웠다면 가끔씩 몰래 들러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등등. 아녹스도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반간지 않는 바람난 배우자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주저앉아 편안한 삶을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를 집으로 강렬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움 아니면 본능?

 

집으로, 집으로, 즐거운 집으로! 아녹스보다 더 강렬하게 집을 사랑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아녹스의 강렬한 본능은 옛 비둘기장에서 있었던 시련과 슬픔을 잊게 해 주었다. 창살 안에 갇혀 지낸 세월도, 새로운 사랑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그 힘을 내리누를 수는 없었다. (P.92)

 

뒷골목 고양이 키티는 다면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라한 길냥이의 인생 역전 스토리. 길냥이가 왕족 고양이로 대접받는 장면에서 엿보이는 인간의 얄팍함과 우스꽝스러움. 키티의 선택을 통해 되묻게 되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에 대한 질문. 위니펙의 늑대, 그리고 전서구 아녹스와 마찬가지로 키티 또한 현재의 안온함과 풍요로움을 거부하고 뒷골목 고양이로 남는 길을 선택한다. 독자로서는 둘 모두의 행로에 다소간 공감하면서도 반드시 그러했어야 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전반적 분위기가 다르다. 하얀 순록의 이야기는 실화와 전설이 교묘하게 뒤섞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단 지리적 배경이 미국과 캐나다가 아니라 유럽 대륙의 노르웨이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썰매 끌이 순록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처사에 대한 하얀 순록의 분노는 동물 모두의 공통적 감정일 것이다.

 

불테리어 이야기의 스냅을 영웅으로 부를 것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이 이야기의 분위기는 해학적인데, 화자가 자칭 개 전문가라고 하면서 첫 상봉 시 쩔쩔매는 대목이 그러하다. 사냥개들이 늑대를 구석에 몰아넣고 마지막 전투를 망설이는 대목에서도 결코 그들이 겁을 내는 게 아니며, 단지 숨을 고를 뿐이라고 강변하는 어절도 마찬가지다. 스냅의 맹목적 용기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유용하지만 개 자신에게는 무모하다. 현명한 사냥개는 늑대 사냥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지 않는다. 그런 개는 바보일 따름이다.

 

소년과 스라소니의 대결은 진정한 야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이 야생동물에게 우위에 있는 것은 강력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노약자나 병약자가 포식자와 마주친다면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될 수 있다. 이것이 엄혹한 자연의 법칙이다. 포식자 또한 자기 생명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작가가 스라소니를 물리친 소년이 아닌 죽임을 당한 스라소니를 영웅의 일원으로 취급한 까닭은 새끼의 생존을 위해 먹잇감을 구하려는 어미 스라소니의 처절한 노력에 마음이 쏠려서였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영속하지 않는다. 포식자든 피식자든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과정을 반복한다. 개체는 일생을 마치지만 종은 영속한다. 우리는 개체로서 불가피한 삶을 영위하지만 생명 자체의 소중함과 존엄성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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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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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작가의 무게 방점은 부제에 놓여 있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의 결과가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켰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중의 입방아에 올릴 수 있다면 진위 여부는 중요치 않다. 대중은 흥미 욕구만 충족시킨다면 보도의 진실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언론과 대중의 야합이 카타리나 블룸에게 폭력을 가한 셈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목적성이 뚜렷하다. 실제 사건의 바탕에 작가적 상상력이 일부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는 논픽션으로 이 작품을 심정적으로 인정한다. 여기에는 작가 자신의 모호한 태도로 일조한다. 그는 후기에서 이 작품의 소설적 성격을 부정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인정한다.

 

이것은 하나의 팸플릿이자 논쟁의 글로, 그 자체로 생각했고 계획했으며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내가 바로 이 테러리스트 소설(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소설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도 등장하지 않는다.)을 썼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지만 않았다면 (P.147)

 

제목, 부제, 모토라는, 얼핏 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은 이 세 가지가 이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이것들은 이야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이 이야기의 팸플릿 같은 성향-이것은 사실 경향 소설이다!-이 이해되지 않는다. (P.151)

 

이것의 소설 여부를 떠나 중요한 점은 언론의 자유라는 무소불위의 방패에 의지하여 본질을 저버리고 타락한 언론매체에 의해 인권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는 현실을 문학적 형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까발렸다는 데 있다.

 

죽음을 맞은 베르너 퇴트게스와 아돌프 쇠너 기자는 개인적으로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도대체 죽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할 수 없을 테니. 대중의 알권리를 충족하기 위해 헌신한 대가가 고작 죽음이라니. 자신과 비슷하거나 훨씬 심한 기자들도 세상에 널려 있고 오늘날에도 여전한데 말이다. 퇴트게스의 후임자인 에긴하르트 템플러의 기사도 전임자와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차이퉁>에 헤드라인과 센세이션을 제공하고 다른 신문에까지 진짜이야기를 제공하려 함으로써 그저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신문 기자의 이런 끔찍한 무지‘, 그렇다, 거의 아무것도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그의 무지함 (P.150)

 

요는 이러한 선정성과 센세이션을 도구 삼아 언론의 본질보다는 상업적 효과에 치중하는 상업 언론이 무자비하게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상업성에 치중하다 보니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된다면 진실 여부는 중시하지 않고 따라서 무수한 기레기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오늘날 언론은 기자와 기레기를 구분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혼재되어 있다.

 

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차이퉁>의 모든 비방, 거짓말,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P.122)

 

일개 젊은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그렇게 화제가 되고 속속들이 파헤쳐진 연유가 오로지 미모가 결부된 상업성에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다. 언론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 다른 사유가 있기 때문일 텐데, 빨갱이 투르데로 명확해진다. 카타리나가 일하는 블로르나 댁에서 부인이 좌파라는 점이 핵심이다. 까닭은 이 작품의 배경이 1970년대 초, 독일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충분하다.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구조를 이루던 당시, 좌파 세력이 사회의 유력인사가 되고 그들이 범죄자의 은닉과 부도덕한 여성을 후원하여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고 선동할 때 대중의 관심과 반응은 격렬해진다. 더욱이 그 여성이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고 보다 손쉬운 수단으로 부를 축적하며 일말의 회개 없이 뻔뻔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분노는 한층 치솟게 마련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의 과도한 작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텐데 오로지 조작, 날조 그리고 선동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때 그들에 면책을 부여하는 게 마땅할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는 다음 면을 읽고, <차이퉁>지가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라는 자신의 표현에서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범죄성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에서는 그녀가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되었다. (P.38)

 

잔잔한 연못에 누군가 돌멩이를 던지면 한동안 파문이 일고 난 후 다시금 잔잔해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말 그럴까? 나중에 나는 몰랐다, 의도는 순수했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외쳐본들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블로르나 부인은 일자리를 잃었고 남편은 중심적 업무 대신 시답잖은 일거리만 주어졌다. 사업상 긴밀한 친구이자 동지는 그와 거리가 멀어졌다. 이쯤에서 되묻는다. 그들 부부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이 쓰레기를, 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P.87)가 빚어낸 결과다

 

이런 소재는 자칫 감정에 휩쓸리기 쉽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분명한 사안에서 글쓴이와 읽는이가 똑같이 흥분하면 역시 선동적 글쓰기에 지나지 않게 마련이다. 작가는 객관적이고 건조한 문체를 구성한다. 때로는 조소와 냉소를 날리지만 결코 감정의 고조를 용납지 않는다. 작가가 냉정할 때 독자가 더욱 몸이 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작가는 배수 작업에 비유한다. 자신의 역할이 물빼기가 원활하게 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한정한다. 배수구의 물이 막히거나 고임 없이 안정적으로 흐를 수 있도록 정체된 웅덩이를 뚫는 일. 반복되는 작가의 차분한 배수 작업 비유는 언론의 과도한 흥분과 선동에 대조적이다. 그래서 더욱 논쟁의 글로서 성공적으로 되었다.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다름 아닌 일종의 배수 혹은 물 빼기 작업이다. 명명백백한 정리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때때로 수면 차이나 수면 조절이 필요한 흐름을 타게 되더라도, 관대히 이해해 주길 바란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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