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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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관점에서 셰익스피어의 가장 문제작이다. 작가 당대에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을 텐데 이것을 보면 문학 해석에 있어 시대와 가치관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한층 생생하게 다가온다. 더불어 예술의 외양을 한 꺼풀 벗길 때 내면에 드리워진 인간성의 진정한 의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원제보다는 <베니스의 유대인>이 표제명으로 보다 적합하다. 아마 말로의 작품명과 유사성을 꺼리려는 조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작품 내에서 사건의 핵심인 동시에 유이하게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서 샤일록의 압도적 영향력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바사니오와 안토니오는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매력적인 주인공이 못 된다. 샤일록과 포셔에 비교하면.

 

극 중에서 샤일록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 나온다. 샤일록에 대한 안토니오의 미움은 그가 우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인은 종교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들을 향한 탄압의 결정판이 나치 히틀러임은 자명하지만 역사적 배척은 뿌리 깊다. 일상적인 생업을 가질 수 없게 된 그들이 금융업에 매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극 중에서 샤일록은 고리대금업자로 비난받지만 그의 구체적 영업 행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에 대한 안토니오의 비난 대사만 등장할 뿐이다. 안토니오의 비난이 당대에는 정당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는 터무니없는 비난에 불과함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 시각이라면 금융업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한다. 결국 안토니오의 비난은 근본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의 소산이다.

 

(샤일록) 저자는 우리의 신성한 나라를 미워하고 / 상인들이 운집한 곳에서도 나와 내 장사와 / 정당한 내 소득을 이자라고 부르면서 / 욕을 했어. 내 민족이 저주를 받더라도 그를 용서 않으리라! (1막 제3, P.28)

 

(샤일록) 당신은 날 오신자, 무자비한 개라 하고 / 내 유대인 저고리에 가래침을 뱉었는데 / 그 모두가 내 것을 사용하는 대가였죠. (1막 제3, P.31)

 

(샤일록) 이유가 뭐냐고요? 내가 / 유대인이란 겁니다. 유대인은 눈 없어요? 유대인은 / 손도 기관도 신체도 감각도 감정도 정열도 없냐고요? (3막 제1, P.69)

 

작품 곳곳에는 유대인 차별과 멸시에 대한 샤일록의 억압되고 축적된 분노를 표출하는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라도 샤일록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결국 안토니오를 향한 샤일록의 증오를 유발한 사람은 안토니오 자신이다. 그를 파멸시킬 욕심에 샤일록은 무리수를 감행하였고 그것은 포셔의 판결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작품에서 유대인 차별을 강화하는 설정은 더 있는데, 샤일록의 딸 제시카다. 그녀는 기독교도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출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재물을 갖고 도망치며 이에 대한 죄의식은 없다. 게다가 유대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부인하고 오히려 비난한다.

 

(제시카) , 아버지의 자식임을 부끄러워하다니 / 내게는 이 얼마나 가증스런 죄인가! / 하지만 내가 비록 혈연으론 딸이지만 / 성향은 물려받지 않았어. , 로렌초, / 당신이 약속을 지키면 이 갈등을 끝내고 / 기독교인, 당신 아내, 둘 다 될 거예요! (2막 제3, P.47)

 

재판에서 진 샤일록의 전 재산은 몰수당한다. 베니스 시민의 정당한 생명을 노린 범법자로 취급받은 것이다. 이 혐의의 적법성 여부는 극 중에서 시비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쨌든 샤일록이 그나마 일부 재산이나마 보전할 방법을 안토니오는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안토니오) 그 조건은 둘인데, 우선 이 호의의 대가로 / 그가 곧장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이며 / 또 하나는 죽었을 때 소유한 모든 것을 / 사위인 로렌초와 딸에게 선물한단 기록을 / 여기 이 법정에서 남기는 것입니다. (4막 제1, P.114)

 

여기서 안토니오는 변함없는 유대인 혐오를 보여준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안토니오와 바사니오 등은 인간미 없고 박제된 성격을 꾸준히 유지한다. 바사니오가 포셔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의도의 순수성을 확인해 보자. 작품의 주인공이 그들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샤일록과 다른 의미에서 매력적인 주인공인 포셔는 양면적인 모습을 지닌다. 남편에게 순종적인 전통적 여성으로서의 포셔와, 남편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변신한 법학자 발타자르로. 발타자르는 샤일록의 계약서 맹신주의에서 약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빌미로 재판을 뒤집는 데 성공한다. 샤일록의 과도한 욕심이 부른 일대 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흠결을 찾아낸 발타자르, 즉 포셔의 날카로운 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샤일록과 그라티아노 모두 발타자르를 공정하고 박식한 판관으로 거듭 평가한다, 전혀 다른 의미에서지만.

 

(샤일록) 계약서에 그렇게 지정돼 있습니까?

(포셔)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오? / 그쯤은 자선으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샤일록) 그런 건 못 찾겠소, 계약서엔 없소이다. (4막 제1, P.108)

 

바사니오는 재판 도중에 감정에 북받쳐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하고야 만다. 제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우정이 소중하다고 해도 아내와 사랑보다도 더 우위에 두는 발언은 예나 지금이나 금물이다. 이를 듣게 된 포셔가 발끈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결혼반지를 둘러싼 우스꽝스러운 후일담은 결혼 생활에서 바사니오에 대한 포셔의 우위를 예고하는 서막이다.

 

이 작품은 단지 희극이라고 하기에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작품 해설에서도 역자가 언급하였듯이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향한 우리의 평가는 다면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악인임은 분명하지만 비난보다는 오히려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되는. 유대인이라는 자리에 지금의 시점에서 흑인, 이슬람인 등 주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위에 놓인 사람을 대치하면, 세상을 향한 샤일록의 외침은 안토니오와 포셔 부부, 그라티아노 부부, 로렌초와 제시카의 유쾌하고 행복한 장면보다 독자에게 더욱 진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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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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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을 때는 못 느꼈던 절절한 감정을 가지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의 경험이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남녀 간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공감하기엔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나 보다. 그들을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파국으로 몰고 가는 무정한 운명의 의지도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두 연인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역시나 양 집안의 근본적인 적대감이다. 단지 상대가 몬터규 가문이기에, 캐풀렛 가문이기에 미워하고 칼을 겨누는 척박한 환경에서 싹 튼 사랑의 가치를 로렌스 수사는 바로 알아차린다. 이들의 결합이 공인받는다면 베로나 시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근심이 일거에 사라질 테니. 하지만 운명의 힘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머큐쇼의 죽음과 줄리엣의 가짜 죽음으로 촉발된 운명의 엇갈림은 그들에게 지상의 행복 대신 천상의 자리를 선사한다. 이 숨 가쁘게 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흐름은 로렌스 수사의 말처럼 가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작용이리라.

 

(로렌스 수사) 우리가 거역 못할 커다란 힘 때문에 / 우리 뜻이 좌절됐다. 자 여길 떠나자. (5막 제3, P.150)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유명한 대목인 발코니 장면과 첫날 밤 대목은 사랑에 눈뜬 젊은 연인의 거짓 없고 열렬한 사랑의 언어가 가슴에 저며 온다. 이들이 원하는 건 단지 사랑뿐인데. 두 사람의 이름 자체는 허울에 불과한데. 오직 그들 자신이 진정한 본질인 것을.

 

(줄리엣)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완벽성을 / 유지할 거예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 나를 다 가지세요. (2막 제2, P.53)

 

사랑했기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 죽어서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었던 두 사람. 비극임에도 더없이 아름다우며, 슬픔이 북받치는 가운데 평온한 기쁨이 스며드는 양가의 감정.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깨닫는다면 새삼스럽지는 않다.

 

우리는 작품 속 인물의 행동과 선택에 이러쿵저러쿵 촌평할 수 있다. 덜 성급하고 조금만 이성적 사고를 하였다면. 특히 티볼트와 머큐쇼에 대해서. 머큐쇼는 본인이 싸움을 촉발한 당사자임에도 칼에 찔려 죽어갈 때 양 집안에 여러 차례 저주를 퍼붓는다. 티볼트는 로미오를 향한 맹렬한 적개심으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다. 캐풀렛 노인조차도 로미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인정하고 자제를 지시했건만. 친구 머큐쇼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 로미오로서는 아마도 다른 선택은 온당치 않게 여겼으리라. 어쨌든 이들은 두 사람의 사랑과 비극을 더욱 극적으로 몰고 가고 빛나게 하기 위한 조역일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극 중에서 억울하게 무덤에 묻히게 되는 파리스마저도.

 

이 작품에서 낮과 밤이 갖는 기능적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나는 때를 포함하여 그들의 사랑 고백, 첫날밤 그리고 무덤에서 사랑의 완성, 이 모든 게 밤에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밤은 둘만의 시간, 사랑이 지배하는 때라고 하겠다. 반면 낮은 미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두 가문의 다툼은 낮에 벌어진다. 머큐쇼와 티볼트, 티볼트와 로미오의 결투도 낮에 발생한다. 캐풀렛 노인이 딸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때도 밤이 지난 후다. 이러한 밤의 의미에 대해 작품해설은 이렇게 설명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사랑과 이별과 삶과 죽음은 주로 밤에 벌어지는 꿈 같은 생시이고 생시 같은 꿈으로 다가온다. (P.165)

 

이 작품은 매우 진지하고 열렬한 사랑과 그 슬픔을 다루면서도 분위기가 의외로 축 가라앉지 않고 반짝거리는 아름다움과 때로는 경쾌함마저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도처에 삽입한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대목의 효과라고 하겠다. 비극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유머는 독자 또는 관객이 극에 몰입하여 심리적으로 지치게 하는 걸 막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줄리엣의 유모, 머큐쇼, 그리고 하인 피터가 큰 몫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줄리엣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대상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과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올곧게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는 태도. 사랑에 지고지순한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미처 열네 살이 안 된 어린 아가씨가 성숙해지고 사랑의 본질을 발견한 것 역시 그들이 이루어낸 사랑의 효과라고 하겠다.

 

(줄리엣) 너그러운 마음으로 또다시 주려고요. / 하지만 가진 것을 주고 싶을 뿐이에요. / 아낌없는 내 마음은 바다처럼 끝이 없고 / 사랑 또한 같이 깊어 더 많이 줄수록 / 더 많이 생겨나요. 둘 다 무한하니까. (2막 제2,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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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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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달아 읽다 보니 가슴 한쪽이 묵직하였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금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 희극을 쓸 때 셰익스피어의 심정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절절한 사연을 집필 중이었다고 하니. 이 작품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라이샌더와 허미어,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의 두 쌍을 중심으로 테세우스 공작과 히폴리토 여왕,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사랑이 곁들여진다. 극중극인 피라무스와 디스비도 사랑 얘기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은 사랑의 다채로운 양태를 골고루 탐구하고 있다. 사랑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작가의 관심은 먼저 엇갈린 사랑의 바로잡기에 있다. 사실 남녀 간의 애정사에 있어 양쪽이 모두 진실한 사랑을 품고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다. 라이샌더와 허미어의 사랑이 그러하다. 두 사람은 가족과 사회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테네를 탈출할 결심마저 품는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강력하다.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데서 일은 꼬인다.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의 사례를 보자. 외모 등의 조건에서 헬레나는 허미아에 못지않음에도 드미트리우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한때 헬레나를 향하던 그의 마음은 이제 허미아만을 향한다. 그것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자는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안간힘 쓰는 헬레나의 노력에서 애처로움을 느낀다. 오죽하면 헬레나가 이렇게 토로할 것인가!

 

(헬레나) 아이 참, 드미트리우스! / 당신의 잘못은 여성을 욕보이는 겁니다. / 우리는 남자처럼 사랑 놓고 못 싸워요. / 구애를 받아야지 하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2막 제1, P.38)

 

사랑은 독점을 요구한다. 사랑은 공유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비애는 커다랄 수밖에 없다. 묘약의 효과로 드미트리우스와 라이샌더가 오히려 자신에게 구애하자 헬레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작당하여 불쌍한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며 분개한다. 이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독자는 감성지수를 확인해봐야 하리라. 그것은 우스움을 가장한 극한의 슬픔이다.

 

사랑의 결실을 이룬 부부간의 애정도 요정의 왕과 여왕의 냉전을 보면 순탄치는 않다. 극 중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의 발단은 결국 오베론이 퍽을 시켜 눈에 바르게 하는 사랑의 묘약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녀가 모두 참된 사랑을 품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라이샌더와 허미어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딸이 자신의 결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으면 죽음을 내릴 것도 불사할 정도로 강경하다.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사랑도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라이샌더도 극 중에서 참사랑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탄식할 정도다.

 

(오베론) 잠자는 눈꺼풀에 그 꽃즙을 바르면 / 눈뜨고 처음 보는 생물에게, 남자든 여자든 / 미치도록 혹하게 만들 수 있단다. (2막 제1, P.35)

 

문제는 어렵게 성취한 사랑이 영원하리란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참사랑의 어려움은 변심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데 있으며, 외물에 의하여 사랑의 감정이 영향받을 수 있음이다. 오베론의 사랑의 묘약은 사랑과 미움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약물이지만 외모, 재력, 계급 등의 영향에서 완전히 무관한 사랑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사랑의 감정과 대상은 가벼이 바뀔 수 있다. 예전 광고에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했던 게 빈말은 아니다.

 

(라이샌더) 허미아에 만족을? 아뇨. 그녀와 함께 보낸 / 지겨운 순간들을 후회하는 바입니다. / 허미아가 아니라 헬레나를 사랑하오. (2막 제2, P.45)

 

사랑은 맹목적이다. 제삼자의 눈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랑도 당사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의 감정이 최우선으로 작용한다. 이 작품의 독자는 나귀가 된 바틈을 향한 티타니아의 사랑을 비웃을 것이다. 티타니아 자신도 묘약의 효과가 사라지자 자신의 행위에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 자체는 더없이 순수하였음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티타니아) 고상한 인간이, 다시 한 번 노래해요. / 내 귀는 당신의 가락에 쏙 반했고 / 눈 또한 당신의 형상에 사로잡혔으며 / 당신의 아름다운 미덕은 나에게 강제로 / 첫눈에 사랑을 말하고 맹세케 한답니다. (3막 제1, P.53)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즐거움과 기쁨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엇갈린 사랑은 모두 제자리를 찾고 세 쌍은 각자의 연인과 결혼에 이른다. 요정의 왕과 여왕은 나란히 손을 잡는다. 장인들의 우스꽝스러운 희비극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며 특히 공작을 만족시킨다. 대단원을 마감하는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제5막 제1장의 찬가는 이 작품의 희극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모든 게 잘 되었으니 이걸로 충분한가? 눈 부신 빛 속에 한 가닥 그림자가 서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 자체가 정상 상태가 아니라 이상 상태, 나아가 일종의 열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꿈에서 열병에서 깨어나면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할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베론) 그들이 다음에 깨어나면 이 모든 웃음거리 / 꿈이나 무익한 환영처럼 보일 거고 (3막 제2, P.73)

 

(드미트리우스) 우리가 확실히 / 깨 있긴 한 거야? 난 아직도 우리가 잠자고 / 꿈꾸는 것 같아. (4막 제1,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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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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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는 비겁한 인물이 아니다. 반란군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제압하는 그에 대한 모든 이들의 평가는 왕의 친척으로서 충성스럽고 장군으로서 용감하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진다. 예언의 실현으로 자신에게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지만 그는 자신을 포기하거나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맥베스) 던시네인 언덕으로 버남 숲이 오기는 했지만 / 대적하는 네놈이 여자 소생 아니긴 하지만 / 난 끝까지 해보겠다. 이 도전의 방패를 / 내 몸 앞에 던진다. 덤벼라, 맥더프. 그리고 / “멈춰.”라고 하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5막 제8, P.131)

 

충신 맥베스를 반역의 길로 이끄는 것은 마녀들의 예언이다. 그들의 예언이 제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맥베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예언이 사실로 확인되자 맥베스의 잠재된 권력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유혹의 속성이 본래 그러하다. 살짝살짝 건드려서 감질나게 만들어 조금만 더 하면 손에 잡을 수 있으리라는 충동에 이성을 놓고 덤벼들게 만드는 것. 도박에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줄거리다. 이처럼 유혹에 취약한 인간의 본성, 그중에서도 권력욕을 다룬 게 <맥베스>.

 

(맥베스) 눈앞의 공포보다 / 끔찍한 상상이 더 무서운 법이다. / 살인은 아직도 환상에 지나지 않건만 / 그 생각이 내 온몸을 거세게 뒤흔들어 / 심신의 기능이 억측으로 마비되니 / 없음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1막 제3, P.26)

 

마녀는 그에게 왕이 되실 분이라고 했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는지 방법은 언급하지 않는다. 덩컨 왕과 왕자들이 갑작스럽게 전사하거나 병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맥베스는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도 맥베스는 대뜸 살인을 상상한다. 그의 권력욕은 욕망 실현을 인내하지 못한다. 그에게 욕망이란 무조건 당장 실현되어야 하는 성격이며, 즉각적인 권력 쟁취는 곧 피비린내를 뜻한다.

 

(맥베스 부인) 이 일을 감행코자 했을 때 당신은 남자였고 / 전보다 더 과감해져 훨씬 더 큰 남자가 / 되려고 했어요. 당시엔 시간과 장소가 / 안 맞아도 당신이 맞추려고 했는데 / 저절로 맞춰지니 이젠 그 적절함 자체가 / 당신 기를 꺾는군요. (1막 제7, P.39)

 

옛말에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하였다. 외부의 유혹이 솔깃해도 내 마음이 평온하다면 물결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가 유혹에 끌리는 것은 내 마음속 깊이 욕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때마침 유혹이 이 욕망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혹의 주체가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주변의 부추김이 더한다면 어지간한 당사자는 초연하게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맥베스처럼. 그렇기에 독자는 이 모든 비극의 사단이 맥베스 자신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그의 파멸에 한 가닥 안타까움을 품게 되는지 모르겠다.

 

모든 왕위 찬탈자가 비극을 맞이하지 않는다.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 선정을 베풀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권좌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극 중의 대화 장면을 통해 맥베스가 폭군이 되었고, 대다수 신하와 백성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맬컴이 아닌 누가 와도 그는 버텨내지 못하였으리라. 맥베스는 권력을 탐했지만, 무엇을 위한 권력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한계다.

 

(모두)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 (1막 제1, P.14)

 

(맥베스) 이렇게 더럽고 고운 날은 본 적이 없구려. (1막 제3, P.20)

 

더럽고 곱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되풀이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작가는 이 표현의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며 그것을 제때 제 곳에 정확히 사용한다. 인간의 내면은 완전한 순수와 완전한 불순의 중간 어디쯤이다. 이성과 야만, 아름다움과 추함 등 상반되는 요소들이 혼재된 게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네 자신도 맥베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맥베스의 처지에 있을 때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할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네 삶 자체가 모순과 상충의 연속이다. 이것이 조화와 안정을 이룰지 아니면 불화와 불안한 상태로 돌변할지는 자기 자신과 환경에 좌우된다.

 

맥베스는 권력의 욕망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허약한 인간의 전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의 잔인과 비열에도 불구하고 그를 저버리거나 매도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과신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에, 맥베스가 그러했듯이.

 

<햄릿>, <오셀로><맥베스>를 연달아 읽어나가면서 셰익스피어가 원숙기에 쓴 일련의 비극은 인간 본성의 불완전한 내재적 본성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다. 햄릿의 유명한 망설임, 오셀로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 그리고 맥베스의 치명적 욕망. 독자는 탄식하거나 분개할 수는 있지만 달관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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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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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를 읽다 보면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가슴 한쪽이 시리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파멸은 오로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그들 주변에 이야고 같은 악인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혹자는 말한다. 굳건하고 진정한 사랑은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 있다고. 그만큼 오셀로의 사랑이 견고하지 못하였다는 뜻일까. 오죽하면 삼인성호(三人成虎)와 증삼살인(曾參殺人)라는 한자 성어가 있을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옮긴이는 오셀로의 비극이 사랑과 질투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발생했다고 작품해설에서 밝힌다. 어디 오셀로뿐이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과 질투에 극단적으로 반응한다. 애증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애정이 깊을수록 증오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다. 이 작품에서 데스데모나가 그러하듯이. 불행하게도 오셀로는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야고) 무어인은 내가 그를 아무리 못 참아도 / 변함없고 고귀하며 애정어린 본성을 가졌고 / 내 감히 생각건대 데스데모나에게는 / 정말로 소중한 남편이 될 것이다. (2막 제1, P.75)

 

오셀로라는 인물 자체의 내적 탁월함은 이야고조차 인정할 정도다. 몬타노는 그를 훌륭한 총독, 완벽한 군인으로 상찬한다. 4막 제1장에서 로도비코의 탄식은 오셀로에 대한 베니스 정부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비극은 외견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합에 내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셀로가 무어인이 아니라면 이런 결과로 이어졌을까에 대해 의문스럽다. 작중에 무수히 반복되는 오셀로에 대한 무어인이라는 호칭. 직접적인 비난이 아니더라도 호칭 자체가 이미 비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물며 이야고와 브라반시오는 각각 그를 검은 숫양, 시커먼 악마로, 숯검정으로 대놓고 경멸적으로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다.

 

(오셀로) 아마도 내가 검고 안방 출입 한량들의 / 능숙한 사교술이 없기 때문이거나 / 내 나이가 황혼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 하지만 깊이 들어간 건 아닌데- / 그녀는 떠나갔어. 난 속았고 내 위안은 / 그녀를 증오하는 것이야. 오 결혼의 저주여, (3막 제3, P.114)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의 사랑은 공인받고 떳떳한 부부 관계로 이어지지만, 오셀로조차 인정한 자신의 약점이라는 내재적 불안이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 단지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을 뿐이며, 이야고에 의해 의식 세계로 끌어올려 진다. 이제 그는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 앞에서 왜소하고 초라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 불안이 고귀한 오셀로를 서서히 좀먹고 그는 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단연 문제적 인간은 이야고다. 그는 전형적 악인으로 소임을 다하는데 그 악행은 특별한 계기가 없다는 점이 이채롭다. 모두에게는 정직한 이야고로 불리지만 사실 이야고는 타고난 악인이다. 그는 서두에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이야고) 그들은 복종하는 태도와 안색을 보이지만 / 속마음은 자기네 자신들만 보살피며 / 높으신 분들에게 봉사하는 척하지만 / 그들을 이용하여 착실히 번성하고 / 자기네 실속을 두둑하게 차렸을 땐 / 자기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한단 말입니다. / 그런 친구들은 기백이 살아 있고 / 전 제 자신이 그런 사람임을 공언합니다... (1막 제1, P.26)

 

극 중에서 이야고는 자신이 오셀로를 파멸시키려는 이유를 자신의 부관 승진 실패와 오셀로가 자신의 부인과 부정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의심에 대한 복수로 설명한다.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음은 독자가 누구보다 잘 안다. 특히 후자는 완벽한 망상이다.

 

이야고는 낮은 신분상 부관 승진을 꿈꾸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다. 후에 부관 카시오가 오셀로의 후임으로 키프로스 총독에 임명되는 점을 상기하자. 한편 이야고의 아내 에밀리아의 정조는 제4막 제3장의 데스데모나와 대화에서 명백하다. 여기서 그녀의 페미니즘에 입각한 남성 비판은 또 다른 흥밋거리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에밀리아의 충심도 주목해야 한다. 최후의 순간 그녀는 불의한 남편을 거스르고 절규와 폭로로 가려질 뻔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는다.

 

(오셀로) 제발, 저 악마 인간에게 물어봐 주시겠소, / 왜 그렇게 내 영육을 덫에 몰아넣었는지?

(이야고)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시오, / 당신이 아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 난 지금부터 한마디도 안할 거요. (5막 제2, P.195)

 

이야고는 자신의 행위의 진정한 의도에 침묵한다. 이로써 관객은 영원히 진상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이야고의 악행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이야고는 태생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으며 계속적 악행이야말로 그의 존재 이유라고 한다. 정말 이대로라면 그는 악마 그 자체라고 하겠는데 정말 그럴까?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 데스데모나를 기억해야 한다. 자칫 그녀의 비극적 운명에 함몰되어 그녀가 가녀린 여성이 아님을 망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놀랍고도 이질적인 결합”(P.223)을 이루어 냈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오셀로에 대한 사랑을 한순간도 저버린 적이 없다. 비록 그의 손에 죽어 가면서조차도. 지고지순한 데스데모나!

 

(데스데모나) 난 죄 없이 죽는단다.

(에밀리아) , 누가 이런 짓을 했나요?

(데스데모나) 누구도 아니고 내가 했어. 안녕. / 친절한 주인님께 안부나 전해줘. , 안녕! (5막 제2, P.187)

 

다시 오셀로로 돌아가자. “설명과 극찬을 능가하는 아가씨”(2막 제1, P.64)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얻고 결실을 이룬 오셀로의 행복감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기에 그녀를 죽여야 하는 오셀로의 슬픔은 제5막 제2장의 절규에서 절정에 이른다.

 

(오셀로) 죽어서도 이렇다면 난 너를 죽여놓고 / 그 후에 사랑하리. 한번 더. 이제 마지막으로. / 이렇게 치명적인 향내는 절대로 없었어. / 난 울어야 하지만 내 눈물은 잔인하다. / 이 슬픔은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내려치는 / 천벌과 같구나. (5막 제2, P.181)

 

극도의 절망과 분노로 아내를 죽인 오셀로가 자신이 간계에 빠졌고 그녀는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오셀로의 슬픔과 회한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다. 동일한 수준의 극한 감정을 경험한 자가 아니고서는.

 

(오셀로) ......당신은 / 무분별하게, 너무 많이 사랑한 사람을, / 쉽게 질투하진 않지만 일단 빠지면 /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버린 / 비천한 인디언과 같은 사람을, / 부드러운 분위기에 익숙하진 않지만 / 차분히 가라앉은 두 눈에서 눈물을 / 미르라나무가 약용 진액을 흘리듯이 / 줄줄 쏟아내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5막 제2, P.197-198)

 

결국 오셀로의 잘못은 너무 많이 사랑한 데 있었나 보다.

 

앞서 읽은 <햄릿>과 마찬가지로 옮긴이는 대사 전체를 운문으로 번역하였다. 원작의 무운시로서의 본질을 상기시키고 작품의 운문적 성격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그동안 산문으로서의 셰익스피어에 익숙한 독자로서는 처음에 낯설게 다가오지만 점차 묘한 매력과 재미에 빠져듦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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