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읽는다 미스터리 세계사 지도로 읽는다
역사미스터리클럽 지음, 안혜은 옮김, 김태욱 지도 / 이다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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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자극하는 표제에 유혹당해 책장을 펼친 독자라면, 특히 그가 나름대로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면 실망감을 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모두 43편의 세계사의 미스터리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다. 이백삼십여 면 정도의 분량에 채워 넣다 보니 각 사례는 평균 5페이지 남짓의 분량을 할당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이 책은 단지 사례를 소개하는데 의의를 지닐 뿐 심화된 내용을 독자에게 풀어주지 못한다.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보다는 살짝 스치는데 만족한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일본의 역사미스터리클럽인데 소개에 따르면 이 분야의 굉장한 전문가 집단으로 판단되는데, 구체적 정보는 미스터리 자체다. 소개 문구를 신뢰한다면 학회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의 실력이라고 하는데, 이 책의 성격상 그들의 진정한 솜씨를 확인하기 어렵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대륙별로 장을 나누어 미스터리 사례를 배정하고 있는데, 간혹 배정 기준이 모호할 때가 있다. 예컨대 노아의 방주와 카파도키아 사례는 유럽 편에 들어 있는 반면 솔로몬 신전과 시바의 여왕, 소돔과 고모라, 수메르인의 사례는 아프리카 편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미스터리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연원이 오래되어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신비한역사적 현상이다. 다른 하나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는 미스터리로서의 역사적 사건이다. 후자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는 것과 유사한 믿거나 말거나 유형에 가깝다.

 

이 책에 두 가지 면에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우선 대중적으로 식상한 소재도 있지만 이런 미스터리 사례를 처음 접하는 독자로서는 흥미로운 대목도 제법 있다. 나로서는 프리메이슨,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 적벽대전의 적벽, 타이타닉 호, 링컨 암살 사건, 메인 호 폭발 사건, 소돔과 고모라, 흑인 왕국 쿠시 등이 유달리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이 내세우는 특징은 바로 지도에 있다. 사례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자료는 물론 공들인 지도 자료를 추가하여 문자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사례를 보다 용이하게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면 시바의 여왕의 출처와 관련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예멘과 에티오피아 지도를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궁전의 호박방의 행방을 다루면서 독일과 소련 지도 위에 추정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이 책의 의도는 무엇일까? 역사상 미스터리 사례를 소개하면서 대중 독자들이 미스터리의 존재를 인식하게끔 하는 게 목적일까? 사례 소개로 개별적 사례에 더욱 깊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고 미스터리 탐구에 동참하기를 기대하는 데 있는 걸까? 무엇이 되었던 의도의 성공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운데 대개의 독자는 아 그런 게 있구나 하고 가볍게 넘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옥에 티는 만리장성 편에서 진한 대의 장성이 한반도에 걸쳐 있게 그린 지도에 있다. 감수자 없이 단순 번역과 지도 제작을 진행하다 보니 발생이 불가피한 오류라고 하겠다. 이 책에 진지한 신뢰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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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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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옷장 속의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의식주의 세계사기획물 중 음식을 주제로 한 책이다. 순서로는 이 책이 먼저 나왔고, 이 책의 성공으로 후속물이 이어지게 되었으니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느니만큼 흥미 유발이 매우 중요한데, 먹을거리는 분명히 관심을 끌 만한 소재임이 확실하다. 방송과 유튜브 등에서도 소위 먹방이 조회 수가 높듯이.

 

의식주 중 의 중요성은 나머지를 압도한다. 옷과 집은 부족하더라도 생명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의 결핍 내지 부족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성 자체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만큼 음식에 관련된 세계사의 내용은 처절하며 절박하다.

 

감자 대기근의 역사적 아픔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영국에 대한 원한을 되새기게 할 뿐만 아니라 식민 체제의 잔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국주의 탐욕은 같은 인종조차도 거리낌 없으며, 감자와 나중에 소개되는 옥수수를 통해 동일한 사회에서도 계급적 차별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달린 식량이지만 자본주의 관점으로는 사료이자 원료일 뿐으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썩어 버릴지언정 고른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상 빈부의 격차와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응당 비판적 인식을 갖지만 그것이 당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하다는 현실 의식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식량의 세계사적 의의를 새삼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식재료를 살펴보면 콜럼버스와 연관된 품목이 꽤 된다. 감자, 옥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포도는 거꾸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갔다. 그리고 후추는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시작한 목적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러한 교류의 장을 연 콜럼버스에게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겠지만, 소위 신대륙 탐험 이후 역사 흐름을 보면 결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콜럼버스의 날을 폐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제국주의 식민 체제와 긴밀하게 결부된 품목들도 있는데, 소금, 바나나, 차가 그러하다. 간디의 소금 행진을 통하여 인도 사람들은 식민 지배를 벗어날 계기를 찾게 되었지만, 바나나를 포함한 열대작물을 독점하는 다국적 기업의 전횡적 횡포는 여전하기에 가슴 아프다. 인간의 탐욕은 무한하고 맹목적인 게 아편 전쟁의 비극으로 드러난다. 마약을 팔아먹기 위해 전쟁을 벌일 정도이니 과거 제국주의의 무도함이란!

 

이 책은 기존의 잘못 알려진 통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보여준다.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세간의 오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좀 더 자세히 검토해야겠지만 표면적 사실에 휩쓸릴 경우의 오류를 깨닫게 한다. 한편 흐루쇼프는 굉장히 의외인 것이 스탈린 사후 데탕트의 주역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소련 인민의 삶의 개선과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은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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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 살인 -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원작 소설, 공식 출판작,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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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을 처음으로 읽다. 워낙 명성이 자자했지만 저작이 방대한 만큼 일단 빠졌다가는 헤어나질 못할 걸 우려하여 그동안 주저하였다. 특정 저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능하면 섭렵하려고 하는 개인적 독서 습관의 부작용이다.

 

각설하고 푸아로는 특이한 유형의 탐정이다. 셜록 홈즈가 지성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푸아로는 전적으로 지성에 의존한다. 이 작품에서도 의자에 기대앉아 추리만으로 진실을 밝혀낸다”(P.266)는 게 농담의 소재가 되었지만 나중에 이것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푸아로도 자신의 특장점을 이렇게 말한다.

 

의사 선생, 보시다시피 난 전문적인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사람의 심리 분석이지 지문이나 담뱃재 채취가 아니죠. (P.94)

 

이 작품은 푸아로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될 환경이 조성되었으니, 폭설로 고립된 열차 안에서의 살인사건이다.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고 범인이 빠져나갈 수 없으므로 열차 승객이 모두 용의자가 된다. 범죄 수법을 보건대 범인은 단독범이 아니라 복수라는 것이 확인되는데 승객 모두는 각자가 치밀한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오로지 승객의 진술과 자신의 회색 뇌세포에 의지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야 하는 어려운 과업인 동시에 푸아로의 능력을 최대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이번 사건의 경우 재미있는 점은 우리에게는 경찰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없다는 겁니다. 우린 사람들의 증언이 진짜인지 조사해 볼 수 없습니다.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게는 훨씬 더 흥미롭긴 합니다. 보통의 수사 활동은 전혀 없어요. 오직 추리만 가능하지요. (P.209)

 

작가는 탐정으로서 푸아로의 뛰어난 능력이 저절로 얻어진 게 아님을 보여주는데, 사소한 사항도 놓치지 않으며 일상화된 그의 탁월한 관찰력이다.

 

푸아로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뒤로 기대어 차분하게 식당차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부크의 말대로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열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푸아로는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P.41)

 

대개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대중과 독자의 동정을 사기 마련이다. 이 소설의 피해자는 전혀 반대다. 그의 숨겨진 신원이 밝혀지자 푸아로를 비롯한 모든 작중 인물은 오히려 그의 죽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대놓고 기쁨을 표시하는 승객마저 있을 정도로 그는 악랄한 범죄자였던 것이다. 푸아로조차도 자신을 경호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정도로 라쳇은 기분 나쁜 악인의 냄새를 풍길 정도이니. 라쳇에 대한 첫인상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레스토랑에서 그 사람이 날 스쳐 지나갈 때 기묘한 인상을 받았답니다. 마치 야수가, 아주 사나운 동물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P.31)

 

비교적 느슨하게 흘러가던 작품의 전개는 푸아로가 승객 전원과 차례로 면담을 거치면서 후반부에 급격하게 굽이친다. 간과되기 쉬운 미세한 틈을 발견하고 파헤쳐 자그마한 실마리를 찾아내고 이 실마리를 통해 또 다른 허점을 찾아낸다. 이 과정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흐트러져 있던 퍼즐이 조각조각 맞춰나가는 대목을 읽다 보면 푸아로의 치밀한 추리와 창의적 추론에 감탄하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바라보듯 그의 지적 매력에 황홀하게 빠져들 정도다. 작가 크리스티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오늘 밤에 여행하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P.33)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우연히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에 여행하기로 작정했나 봅니다. (P.34)

 

기실 초반부에서 작가는 중요한 복선을 깔아둔다. 비수기임에도 만석이 된 오리엔트 특급의 일등실. 호텔 지배인도, 철도회사 중역인 부크도, 그리고 차장조차도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정말로 보기 드문 우연이라고 할밖에. 그러나 푸아로의 생각은 다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암스트롱 사건과 관련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연히도 같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꾸민 일이겠지요. (P.328)

 

살인은 분명 범죄다. 살인범은 반드시 체포하여 법의 처벌을 받게 해야 함이 마땅하다. 탐정 푸아로의 역할이 그러하다. 그런데 피살자가 범죄자라면? 그것도 만인의 공분을 사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죄를 저지른 경우. 게다가 교묘하게 법의 심판을 피해 유유히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이 불의인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분명한가. 이 소설은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독자는 푸아로와 부크, 그리고 의사 콘스탄틴의 선택에 공감한다. 사람과 동떨어진 법은 존재 의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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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을유세계문학전집 105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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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아련한 기억에 따르면 당시 나는 이 작품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직은 세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여 이름값에 휩쓸린 매우 표피적인 감상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의외로 생소하거나 이질적인 요소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뫼르소의 사고와 행동, 그에 대한 사형판결이 대체로 이해된다고나 할까.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게 나한테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고 말했다......나는 결코 인생을 바꾸지는 못하며, 아무튼 모든 인생이 가치있고, 여기서의 내 인생도 전혀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답했다......내 인생을 변화시켜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P.54)

 

뫼르소는 타인과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일상생활에만 관심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발전시키거나 반추하는 모습은 없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그의 덤덤한 태도, 마리의 결혼 의사에 대한 그의 건조한 반응. 그렇다고 그를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삶에 특별한 매혹과 애정을 지니지 못한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노력이다. 단조롭지만 평온한 일상의 안분지족과 허무주의적 삶의 태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는 휘청거리고 있다. 그는 선구적인 현대인이다.

 

타인의 죽음이, 어머니의 죽음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의 하느님이나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생, 그들이 고르는 운명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P.143)

 

뫼르소의 현대인으로서의 특성이 요즘이라면 그런가 하고 수용되겠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40년대라면 사정이 다르다. 전통적,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뫼르소는 별종이자 이단이다.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은 사회 구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의 반응에 대해 예심판사와 검사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렬하게 추궁하는 사유는 분명하다. 썩은 싹을 초기에 도려내지 못하면 전체로 퍼져나가 걷잡을 수 없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을 본능적으로 예감한다. 아랍인의 살인 자체는 오히려 경미하다. 그의 반사회적, 반기독교적 가치관이 더욱 중죄다. 뫼르소에 대한 사형판결은 이로써 정당하다.

 

저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공백이 하나의 심연이 되어 사회가 궤멸할 수 있을 때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P.122)

 

내가 한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규칙들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와는 아무런 유대가 없으며, 또 내가 인간 심성의 기본적인 반응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따를 줄도 모른다고 그는 공언했다. (P.123)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되었다고 해명한다. 이 무슨 생뚱맞은 터무니 없는 변명이란 말인가? 당대 사람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그의 주장을 배척한다.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에. 독자라면 그의 해명에 타당성이 있음을 수긍하게 된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햇빛은 의식의 명료성, 이성의 합리성을 흐물거리게 한다. 그 순간 무언가에 의한 번뜩임과 충동적인 선택은 사후에 제아무리 뒤돌아봤자 설명은 요령부득이다. 뫼르소로서도 햇빛 외에 다른 사유를 대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 내리쬐는 햇빛은 강렬한 생명의 의지인 동시에 그 작렬하고 파열하는맹렬함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자 동시성을 지닌 존재다.

 

2부는 법정 드라마로서 제1부보다는 훨씬 흥미진진한데,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의 허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검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공방전을 떨어져서 바라보는 뫼르소의 태도는 청중 및 독자와 다름없다. 법정은 뫼르소와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다투는 뫼르소는 뫼르소에서 타자화된 다른 뫼르소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뫼르소의 부도덕성이다. 장례식장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 것처럼 당대의 관습이나 도덕률에 위배된 행동을 한 그 자체가 되돌릴 수 없는 중죄의 증거로 제시된다.

 

나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나는 잠을 잤다, 나는 카페오레를 마셨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뭔가가 법정 전체를 술렁이게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내가 유죄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P.108-109)

 

뫼르소는 항소를 포기한다. 항소로 구할지도 모르는 구차한 삶에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신부의 면담도 거절한다. 종교는 자체의 독선성으로 그에게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므로 그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신부의 옷깃을 거머쥐며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대목은 웅변적이다. 이렇게 뫼르소는 사회와도 종교와도 타협을 거부한다. 그에게 남은 길은 오로지 사형집행, 즉 죽음뿐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이야말로 처절할 정도로 솔직하고 진실한 영혼 아니겠는가.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가 정말로 한 인간의 이해관계가 걸린 유일한 관심사다는 걸 어째서 나는 몰랐단 말인가! (P.131)

 

내게 남은 일은 나의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이 많이 와 주기를 바라는 것,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P.145)

 

이 작품에서 유독 주목되는 인물이 있는데 법정 안의 젊은 기자다. 그는 재판 내내 그를 주시하는데 사형판결이 확정되는 순간에 그를 외면한다. 뫼르소는 그 기자에게서 자신의 분신 같은 인상을 받는데, 또한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카뮈가 기자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법정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작가는 뫼르소를 이해하고 있음을 기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책은 소설 본문 외에 50면에 가까운 방대한 주석을 추가하고 있다. 단순한 부가 설명에 불과한 예도 있지만 작품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깊이 있는 해석을 추가하고 있어 매우 유익하다. 또한 40면에 이르는 풍부한 작품해설도 새삼 독자가 이 작품의 심층적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이방인>같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면 매우 유용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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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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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햄릿>을 다시 읽는다. 몇가지 스치는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To be or not to be’의 해석

 

죽느냐 사느냐라는 해석으로 워낙에 친숙하다. 엄밀히 말하면 순서를 바꾸어 사느냐 죽느냐가 올바르겠지만. 옮긴이는 다르게 해석한다, ‘있음이냐 없음이냐’(3막 제1, P.94). 주석을 통해 자신이 왜 존재론적 해석을 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부기한다.

 

이 대사를 읊조릴 당시의 햄릿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유령이 알려준 덕분에 햄릿은 부왕 사망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미친 척한다. 그럼에도 한가닥 의혹이 여전한데 유령의 말이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다. 햄릿은 연극을 통해 왕의 반응을 알아보려고 준비한다. 그리고 제3막에서 이러한 대사를 내뱉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도 엉뚱한 해석은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문의 대사는 죽음을 가벼이 여겨야 함에도 죽음의 두려움으로 그러하지 못함에 대한 비판과 자기 각오를 담고 있다. 햄릿은 철학자가 아니다. 극중 대사와 행동을 보면 그는 매우 재기발랄하고 해학적이며 연극에도 조예가 깊으며 오필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인물에 가깝다. 그런 그가 갑자기 생뚱맞게 존재론적 철학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위 대목을 존재론이 아니라 행동론으로 시각을 보는 게 현실적이다. 계획한 연극으로 유령의 증언의 진실을 확인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진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행동으로 나설 것인가의 문제.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왕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다음 왕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오필리아와의 사랑도 결실을 이룰 수 있다. 반면 행동에 나서면 이 모든 걸 잃게 되며 자신의 목숨도 버려야 한다. 즉 이 대목이 포함된 햄릿의 전체 대사는 자신의 행동 선택에 대한 갈등을 내포한다.

 

2.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인가

 

흔히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인물의 성격을 양분할 때 햄릿형은 신중하지만 우유부단하다고 인식한다. 이 작품에서 과연 햄릿은 우유부단한 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초반부터 햄릿은 우울하게 등장한다. 부왕을 잃고 어머니가 삼촌에게 재혼한 그의 처지에서는 기쁠 일이 없으리라. 행동파라면 유령의 말만 믿고 바로 왕을 살인할 수도 있다.

 

햄릿은 보다 확실한 증거를 갖길 바란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데 섣불리 유령의 말만 신뢰할 수 없다. 유령이 악마의 변신일지도 모르니. 연극의 반응으로 햄릿은 왕의 불의를 확신한다. 마침 왕이 홀로 기도할 때 그를 죽일 수는 기회가 찾아왔지만 햄릿은 실행하지 않는다. 기도 중에 죽이면 그가 천당으로 가게 될까 우려해서다. 그가 결코 구원받지 못할 때를 노려서 죽여야 비명에 가서 저승을 헤매는 부왕의 복수에 적합하다.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고 주도면밀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앞뒤를 잰다고 여길 수도 있다. 햄릿 또한 스스로를 책망한다.

 

(햄릿) 잔인하고 음탕한 악당! 아니, 이 무슨 못난이란 말이가! , 참으로 장하다. 고귀한 부친이 살해당한 아들,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복수를 재촉받은 내가 창녀처럼 말로만 내 가슴을 비우고, 순 잡년 잡놈처럼 저주를 퍼붓다니! 역겹구나! ! (2막 제2, P.87)

 

(햄릿)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난 내가 왜 이건 하리라고 살아 말하는지 모르겠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 (4막 제4, P.149)

 

햄릿과 반대적 인물은 레어티즈다. 그는 자신의 부친 폴로니어스가 죽음을 당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성을 급습한다. 왕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허튼수작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부친을 죽인 인물이 햄릿을 알게 되자 그를 죽이기 위해 수단의 정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레어티즈가 극중에서 마구 날뛰는 인물이 아니므로 그의 이런 과감성 내지 저돌성은 햄릿과 대비된다.

 

(레어티즈) 허튼수작 마라고. 충성 따윈 지옥으로! 맹세는 흑마왕에게! 양심과 은총, 저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저주도 불사하리. 내 입장은 이렇다. 이승 저승 상관않고 무슨 일이 닥치든지, 철두철미 아버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그 말이다. (4막 제5, P.157)

 

3. 왕비가 시동생과 재혼한 까닭은 무엇일까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햄릿을 더욱 비통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 왕비가 불과 두 달만에 시동생인 왕과 재혼한 행위다. 원시부족의 형사취수제도 아닌데 이러한 선택은 기독교 국가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근친상간 행위다. 햄릿의 통렬한 비난도 무리는 아니다.

 

(햄릿) 아니, 그녀가 - 오 하느님, 이성 없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더 오래 슬퍼했으련만 헤르쿨레스와 내가 다르듯이, 아버지완 생판 다른 내 삼촌 아버지의 동생과 결혼했어. 한 달 안에, 쓰라려 불그레한 그녀의 눈에서 가장 부정한 눈물의 소금기가 가시기도 전에 결혼했어 오 최악의 속도로다! 그렇게 민첩하게 상피붙을 이불 속에 뛰어들어! (1막 제1, P.25)

 

여기서 왕비의 선택을 헤아려 보자. 극중 햄릿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인다. 5막 묘지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나이는 삼십인데 이는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 어쨌든 햄릿의 나이로 보건대 왕비는 사십대 후반 정도일 텐데 미모로만 보자면 클로디어스가 굳이 형수와 결혼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왕비 또한 새삼 정욕에 불타오라 도덕률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재혼을 감행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당시 덴마크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다고 한다. 5막 제2장에서 햄릿은 자신이 국왕 선출에서 낙마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햄릿이 삼촌을 더욱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햄릿) 자네 생각엔 내가 이제 내 임무로서 선왕을 시해하고 어머닐 더럽혔으며, 내가 희망했던 국왕 선출에 불쑥 끼고, 내 목숨을 노리고 그 따위 속임수로 낚시를 던진 놈을 이 손으로 빚갚음이 양심상 떳떳하지 않겠어? (5막 제2, P.192)

 

덴마크 국민과 신하가 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여 충성을 바치는 모습, 그리고 극중에 보이는 그의 올바른 국정 판단을 보건대 햄릿과 유령이 말한 대로 클로디어스가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 어쨌든 햄릿의 세력은 미미했고 클로디어스가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여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비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다. 가족이 따로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클로디어스는 홀몸이다. 햄릿을 그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면 다음 후계자 자리는 확고해진다. 클로디어스 처지에서도 전왕의 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지위가 한층 공고해진다. 왕이 자신의 후계자가 햄릿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행위가 이를 입증한다. 왕이 햄릿을 제거하려고 계책을 꾸민 것은 햄릿이 자신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행동을 하면서부터다. 한편 햄릿으로서도 슬픔과 불만은 있지만 이미 짜여진 판을 차마 뒤집지는 못하였다. 유령의 개입이 없었다면.

 

() 바라건대, 무익한 비통을 땅에 던져버리고 나를 아버지로 생각해라. 왜냐하면 온 천하에 알리노니, 왕자가 내 왕위 계승자요,......내 격려와 위안 속에 나의 최고가는 중신이요 조카이며, 내 아들로서 여기에 머물기 바란다. (1막 제1, P.23)

 

4. 오역 ?

 

아래 문장에 따르면 부왕은 그리 훌륭한 왕이 아님을 햄릿 자신이 인정하는 꼴이 된다.

 

(햄릿) 아니, 이건 청부 살인이지 복수가 아냐.

놈은 아버지를 그가 육욕에 푹 빠지고

모든 죄악이 활짝 핀 오월처럼

싱싱할 때 앗아갔다. 그리고 하늘말고

그의 벌이 어떨지 누가 아랴? (3막 제3, P.125)

 

인터넷에서 찾아 본 원문은 이러하다.

 

O, this is hire and salary, not revenge.

He took my father grossly, full of bread,

With all his crimes broad blown, as flush as May;

And how his audit stands, who knows sav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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