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정글 - 세계의 숨은 걸작 1 : 영국 높은 학년 동화 22
존 로 타운젠드 지음, 정지인 옮김, 윤봉선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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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극단적이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는 어른은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무책임하기 일쑤다.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렇다고 주인공 청소년이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치고 사건을 해결하며 해피 엔딩을 이루지도 못한다. 도중에 인정 많고 능력 있는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동화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팽개치고 집을 떠나버린 월터 삼촌과 도리스 아줌마가 그러하며, 딱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토니 목사님과 실라 선생님, 그리고 밥 삼촌이 또한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동화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케빈과 샌드라 오누이와 친구 딕이 그러하다. 케빈 남매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도 어린 사촌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들의 아빠조차도 감히 해내지 못한 행동이다. 케빈은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고, 다른 도시를 홀로 헤매며 밥 삼촌을 찾는다. 샌드라는 홈스테드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동생들을 돌보는 책임을 오롯이 감당한다. 딕은 친구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과 희생을 감내한다. 어린 그가 검블 선착장에서 플릭 일당과 홀로 맞서는 대담함과 용기는 어른들조차도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화사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정글은 화사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동네여서 시청이 철거해 버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전에 저절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P.6)

 

객관적으로 케빈네 가족은 가난하다. 일단 그들이 사는 곳인 정글에 대한 서두의 소개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조만간 철거가 진행돼도 이상하지 않을 동네. 월터 삼촌이 가출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삶이 넉넉하고 윤택하지 못했음을 작가는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비록 이것에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취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독자의 눈에는 안쓰럽게 비칠 따름이다.

 

나도 사실은 건강한 편이다. 하지만 비쩍 마른 데다 안색이 창백하고 피곤해 보인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좋은 옷도 아니었기에 목사님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P.87)

 

나는 목욕을 하고 난 뒤 토니 목사님의 가운을 입고 앉아서 베이컨과 계란 두 개를 먹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먹어 본 건 처음이었다.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P.187)

 

케빈 일행을 위험에 몰아넣고 작품에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은 플릭 일당이 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어정쩡하게 월터 삼촌도 개입하지만. 케빈과 딕, 그리고 플릭 일당의 만남은 검블 선착장의 아지트에 홈스테드를 구축할 때 이미 암시되었고 막판에 광포한 범죄 현장으로 증폭된다. 여기서 작가의 교묘하게 짜 맞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우연이지만 전혀 우연이지 않게 보이는 기술이란. 반면 동화의 특징인 우연적 요소도 나타나는데, 케빈이 밥 삼촌을 우연히 만나는 대목이다. 갖은 고생에도 찾지 못한 삼촌을 정말 뜻하지 않게 마주친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가족 소설이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상황에서 아이들의 선택은 어떻게든 가족을 유지하고자 한다. 비록 그것이 험난하고 힘겨운 노력을 요구하더라도. 우여곡절 끝에 가족은 재회하고 원래의 삶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해럴드의 입장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친부가 자신을 버렸다는 상실감과 아픔을. 작아서 쓰지 못하는 헬멧을 챙기고 싶은 이 아이의 마음을 누구라도 탓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짜증을 낼 수 없었다. 해럴드는 정말로 마음이 상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보다는 해럴드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사라져 버린 것이니까. (P.65)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극한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비록 고달프지만 이런 경험으로 그들은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케빈과 샌드라의 책임감을 보면 확실히 알게 된다. 특히 케빈이 위험 상황에서 자신의 두려움과 싸우는 대목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개인의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어른조차도 쉽지 않아서다.

 

나는 다시 커낼 가를 달려가다가 공터를 사이에 두고 오두막이 마주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거기서 멈춰 섰는데, 심장이 쿵쾅대고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내가 계속 가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의 비겁함에 화가 났다. 딕이라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꾸짖었다. (P.172)

 

작품의 끝은 케빈, 샌드라와 딕이 걸어가면서 티격태격하는 장면이다. 낯설지 않은 게 작품 초반과 똑같은 문장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다. 작가의 자기표절 또는 실수인가? 여기서 작가의 세심한 의도를 발견한다. 세 명의 아이들의 모습은 사건 전후로 무관하게 처음이나 끝이나 동일하지만, 그때의 아이들과 지금의 아이들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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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개정판
김훈 지음 / 푸른숲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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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김훈 작가의 글을 읽는다. 작가 특유의 문체와 표현 양식이 반갑다. 그는 비루한 일상을 정면으로 다루되 비루하지 않게 만드는 특이한 마력을 지녔다. 그는 평범한 나날과 순간에서 비범한 의미를 찾고 되새김질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 모든 게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김훈만의 것이리라. 그래서 오늘도 이 작가에게 흠뻑 빠진다.

 

이 소설의 화자는 사람이 아닌 개다. 개만큼 인간에게 친밀한 동물이 있을까. 개똥에서 상팔자까지 광활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개에 대한 평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천대와 애정의 경계선을 무시로 넘나드는 이 존재만큼 인간을 잘 아는 동물도 없다. 그래서일까 개가 지켜보고 증언하는 인간의 모습은 흥미와 아울러 약간의 두려움마저 예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눈치가 모자란다. 사람들에게 개의 눈치를 봐달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끼리의 눈치라도 잘 살피라는 말이다......

개의 말이 너무 건방졌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내 입을 틀어막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P.34)

 

비록 개를 화자로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쓴 글이니 개의 마음을 오롯이 전할 수는 없다. 결국 이 글은 사람의 시각과 사고에서 쓴 글이다. 독자 입장에서 다소간 기분이 안 좋더라도 개가 평한 문장이 아니라 작가가 그렇게 썼으려니 너그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개는 후각과 청각이 인간보다 뛰어나다. 개에게 후각은 시각의 상위 호환성을 지닌 감각이다. 정체가 모호한 물체도 후각을 통해 비로소 의미가 개에게 다가온다.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 맛있는지 역겨운지 여부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런 개에게 인간의 냄새는 어떻게 다가올까.

 

사람의 몸 냄새 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까지도 그날 모두 알게 되었다. 그 냄새는 모두 사랑받기를 목말라하는 냄새였다. (P.42)

 

주인님 몸에서 나는 경유 냄새는 고단하고도 힘찬 냄새였는데, 어딘지 쓸쓸한 슬픔도 느껴졌다. 나는 그 경유 냄새를 아침바다의 차갑고 싱싱한 안개 냄새보다 더 사랑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냄새였고, 내가 지키고 따르고 사랑해야 하는 냄새였다. (P.72)

 

개는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개의 희로애락은 인간의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개도 동일하게 느낄까. 미처 젖을 떼기도 전에 형제와 그리고 어미 개와 이별할 때 강아지의 심정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살던 고향 집이 한순간에 수몰되어 집도 절도 없이 나앉게 되었을 때 밭고랑에 주저앉아 울고 우두커니 서서 담배만 피우던 노인네의 심경을 개도 공감하려나 알 수 없다.

 

인간과 개가 상호 간에 친밀한 존재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개가 인간에 더욱 의존적이다. 개 없이 인간은 살 수 있지만, 인간 없이 개는 살아갈 수 없다. 야생화된 개는 더는 개가 아니며 단지 인간의 적일 뿐이다. 인간은 개를 경시한다. 개의 고마움과 가치를 올바르게 인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귀여워하고 용도가 다하면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다. 시골에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와 유기견센터에서 보호 중인 수많은 개를 보면 반박하지 못하리라. 애완견입네 반려견입네 하며 물고 빨고 하지만 조금만 귀찮아지면 짐스러워한다. 개 중에서 사랑하는 주인 곁에서 평화롭게 일생을 마치는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개들의 최후는 항상 비극적이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보리의 어미와 형제, 짝사랑하던 흰순이, 그리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던 악돌이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보리의 장래도 불투명하다. 버림받은 존재로서 보리의 남은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우울과 슬픔이 교차한다.

 

내 마지막 날들은 며칠 남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나면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할 것이다.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새벽안개와 저녁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세상의 온갖 기척들로 내 콧구멍은 벌름거릴 터다. (P.221)

 

어디 개뿐이겠는가. 보리의 가족들, 보리가 함께 생활한 주인네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수몰되어 고향에서 내몰린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가난한 어부로서 근근이 살다가 파도에 휩쓸린 주인아저씨. 생계를 위해 보리를 버리고 도시로 떠나야 하는 남편과 아빠를 잃은 주인네 가족. 사람조차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개의 처지에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람이나 개나 서글프고 고달픈 존재들이다.

 

내가 영수의 똥을 먹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의 몸속이 어떤 냄새와 어떤 느낌으로 차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따스함과 축축함과 부드러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서 한바탕 놀다 온 것처럼 사람을 환히 알 수 있게 되었다. (P.88)

 

똥을 먹는 똥개 취급받은 보리가 똥을 먹음으로써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똥을 먹은 보람이 있겠지만, 아기의 순수한 똥과 세파에 찌든 어른의 똥을 어찌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른의 똥은 보리로서는 도저히 삼킬 수 없을 테니 진정한 똥개라야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사람을 환히 알게 되었다고 자평한 보리조차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이해 불가능하다.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 죽음이란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회피하고픈 것이며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러기엔 두려운 현상이다. 개도 죽음을 의식하면 개의 삶을 살아갈지 모르겠다.

 

주인님은 어디에 계시나. 주인님은 왜 땅속에 계시나.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럴 수는 없고 이럴 리가 없고 이래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P.189)

 

이 작품의 보리는 개의 탈을 쓴 사람이다. 개라면 흰순이를 향한 본능을 그렇게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개라면 진정으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보리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렸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눈에는 개가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의 순수한 눈빛, 주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 순진함을 어찌 사람의 그것과 비교하겠는가. 그래서 보리를, 나아가 개를 생각하면 아련하다.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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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10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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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따분하기 마련인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쉽고 재밌게 이해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는 흥미를 끌 만한 특정 테마를 가지고 역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책은 무엇보다 기획력이 매우 중요하다. 다음에 어떤 내용을 수록할 것인지 선별의 미학이 요구된다. 이 두 가지에 적절한 글솜씨가 더해진다면 성공은 거의 보장된 셈이다. 이 책은 의식주의 세계사기획물 중 옷을 주제로 한 책이다.

 

여기서 저자는 청바지, 비단, 벨벳, 검은 옷, 트렌치코트, 마녀의 옷, 바틱, 나일론, 비키니, 넥타이와 양복의 10가지를 별도의 장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옷 자체, 소재, 색상, 패션 등 광의의 의류 범위 속에 다양한 사례를 포함한다. 결국 저자가 관심 두는 것은 의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다.

 

청바지를 언급하자면 청바지가 탄생하게 된 계기인 골드러시를 소개하면서 이 현상이 미국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 나아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난사를 함께 다룬다. ‘젊음과 자유, 저항의 패션 아이콘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청바지가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그러나 잊히기 쉬운 사연을 품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비단과 나일론을 통해서는 의류 소재가 인류 생활에 미치는 파급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비단길[실크로드]은 동서 문명교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일론으로 대표되는 합성 섬유를 빼고서는 현대의 의생활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스타킹을 포함해서.

 

벨벳처럼 부드럽고 매끈하게 전개되었다고 붙여진 벨벳 혁명은 공산 체제의 암울한 시절과 민주화를 위한 유혈의 상흔을 들추어내며 인간을 배제한 이념의 맹목과 공허를 읊조린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위해 개발된 옷이 전후에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된 트렌치코트도 마찬가지다. 운치 있는 트렌치코트의 멋에 흠뻑 빠져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위해 화학 무기 개발에 매진하는 국가 간 경쟁에서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반문해야 할 것이다.

 

펠리페 2세와 크롬웰, 그리고 잔 다르크를 다루는 장들에서 저자는 의류와의 직접적 연관성보다는 그들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지도자의 자질과 태도의 중요성은 새삼스럽지 않으리라. 일국의 흥망이 결국 한 개인에게 좌우될 수 있다. 하나의 전설이 된 잔 다르크를 통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됨은 슬프기조차 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마녀사냥은 오래전 과거지사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게 현대에도 방식을 달리할 뿐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입장이 바뀌는 사례가 많다. 발리섬의 바틱을 소개하면서 인도네시아를 잔혹하게 지배했던 네덜란드가 오랫동안 스페인의 압제에 시달렸다는 역사적 역설. 식민 지배에서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가 주변 섬들에 대한 강압적 지배를 일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일본 제국주의는 어떠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 일본이 원자 폭탄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가해자 신분을 은연중에 세탁하는 태도는 낯설지 않다.

 

비키니와 비키니섬, 그리고 핵 실험의 관계를 순차적으로 이끌어 나가며 저자는 핵폭탄이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아야 할 존재라고 단언한다. 나아가 원폭 투하의 정당성에 부정적 견해를 취한다. 여기서 나는 저자와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 원폭 탄생의 부정에는 동의하지만, 원폭 투하의 정당성을 무조건 비난함은 옳지 않다. 핵폭탄의 피해자 다수가 민간인임은 안타깝지만, 현대전은 자체로서 군인과 민간인 구분 없는 비정한 총력전의 성격이다. 원폭 투하 없이 연합군이 조기에 전쟁을 종결지을 다른 방안이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섣부른 원폭 비판은 스스로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흉내 내는 일본 극우파의 논리구조와 동일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역사 서술에서 비판적 시각과 균형 잡힌 안목의 중요성은 이것이 독자에게 잘못된 믿음과 신념을 전달할 우려에서다. 특히 청소년 대상의 책인 경우는 더욱 유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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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비, 광고가 과학이라고? - 창의력도 과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알고 있니?, 광고인 내가 꿈꾸는 사람 14
김병희 지음 / 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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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상으로 진로 탐색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직업별 대표적 위인의 직업 세계를 위인전 형태로 기획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오길비란 인물은 여기서 처음 듣는다. ‘광고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고 하는데, 해당 분야의 문외한이기에 이번 참에 관련 책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오길비는 광고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요리사, 세일즈맨, 갤럽 조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자칫 인생 낭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오길비는 각 직업을 통해서 훗날 성공적인 광고인이자 경영자가 되는데 필요한 역량을 습득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첫 출발부터 자신이 꿈꾸고 원하던 직업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현재 종사하는 직업 분야에서도 기초 역량을 배양하고 업무 수행의 기준을 확립할 수 있다고 하니 섣불리 실망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

 

오길비는 자신의 직관이나 감이 아닌 철저한 자료와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과학적 분석을 한 다음에 광고 제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P.65)

 

오길비가 동시대의 광고인들과 차별되는 점은 광고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다. 그의 광고는 철저히 판매 지향적이다. 지금이야 새삼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광고와 판매의 결부가 그렇게 긴밀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고 제품이 자체로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라면 제품 자체만 집중하면 되지만, 현대 사회의 대다수 상품과 서비스는 품질의 균일성으로 차별성을 보이기 어렵다. 이때 중요한 것이 해당 브랜드의 강조다. 특정 브랜드 애호가는 다른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 브랜드의 상품이면 충분하다.

 

오길비는 광고에 브랜드 스토리를 접목하였다. 비록 그의 경쟁자로 소개되는 번벅과 접근방식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동일하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고 있는 해서웨이 셔츠 광고, 슈웹스 음료 광고, 도브 비누 광고 및 롤스로이스 자동차 광고 등이 오길비의 대표적 광고 사례다.

 

오길비와 번벅은 제품 중심의 광고를 주장하면서도 브랜드 이미지의 중요성을 일깨워줌으로써 이미지 광고라는 광고의 새로운 문을 열었습니다. 친구이자 경쟁자로서 서로를 의식하며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P.173)

 

예술로서의 광고를 지향했던 번벅이 아닌 과학 지향적 오길비가 광고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신조를 저작물로 남겨 후대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광고계 후배들은 오길비의 책을 통해 광고인의 역량, 태도 및 가치관 등을 확립할 수 있었고 그를 계승하는 동시에 도전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오길비의 삶을 되돌아볼 때 유년기 시절 교육의 혜택을 무시할 수 없다. 몰락하였지만 어쨌든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엘리트 교육 코스를 받은 기초 체력에 그의 남다른 자질이 결합하였고 헌신적인 노력이 더해져서 오늘날의 오길비가 되었다. 그가 남들과 달리 글쓰기에 소질과 관심을 보였던 것 또한 전혀 의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찍이 세일즈맨 시절 쓴 판매 팸플릿에 대한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은 그의 팸플릿을 역사상 최고의 판매 교과서이자 매뉴얼로 선정했어요. 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일하는 광고인의 싹이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걸까요? (P.48)

 

또 하나 오길비는 광고인으로서 자부심이 굉장히 높았다는 점이다. 광고인은 대체로 광고주 앞에 을의 처지에 놓이게 마련이고, 대형 광고주라면 더욱 그러하기 쉽다. 오길비는 광고인의 독립성을 요구하였고 그것이 어려울 경우 광고 수주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포드 자동차의 광고 수주에 참여를 포기한 사례가 이를 말해 준다.

 

오길비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광고인이었죠. 광고주가 광고회사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광고회사가 광고주를 선택하는 놀라운 관행을 만들어 나갔어요. 이런 용기와 전문성을 높게 평가받아 오길비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최고의 광고인이 될 수 있었어요. (P.116)

 

한편 기획물의 속성상 오길비의 장점과 성공만을 강조하였지만 그의 가정생활을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성공을 위해서 개인적 삶, 그리고 가정을 포기하는 태도는 당대 가치관으로는 특이한 게 아니지만 현재처럼 일과 생활의 균형을 중시하는 시대에서는 용납되기 어렵다. 그가 두 번이나 이혼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야근과 휴일 근무를 당연시하고 남들에게도 이것을 요구한다면 도덕적 비난에 앞서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기 마련이다. 과거의 위인들에 대해서는 항상 비판적 수용 태도를 지향해야 마땅하다.

 

본문 중간에 오길비 광고 전략의 핵심을 잘 요약하여 유용하며, 마지막 장은 별도로 광고라는 직업 세계에 대한 개략적 소개를 하고 있어 직업으로서 광고 분야에 관심을 품은 청소년에게는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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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19
제임스 프렐러 지음, 김상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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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사안은 국내에서도 오래전부터 대두되었다. 근래는 관리체계가 나름 정착된 탓인지 관련 이슈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학교폭력이 근절되었다고 섣불리 단언하는 건 곤란하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라면 개인적 경험도 있고 보고 들은 이러저러한 사례와 견해가 제법 있기에 말하고자 하면 지리하게 늘어날 수 있으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고 이 책 자체의 내용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학교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마지막으로 학교 당국으로 구성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비교적 명확하다. 이 책에서는 그리핀과 할렌백이 해당한다. 외견상 그리핀은 매력 만점의 학생이며, 할렌백은 다른 아이들도 어울리기 싫어할 정도로 비호감의 대상이다. 그리핀 일당의 할렌백 괴롭히기에 다른 아이들이 굳이 나서서 반대하지 않는 것도 이런 연유다. 물론 그것으로 학교폭력의 정당성이 옹호되지 않는다. 작가가 그리핀의 외모와 언행을 기술하는 대목만을 보자면 그리핀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학생이다. 그의 외면과 내면의 극적인 대조는 그래서 더욱 두드러진다.

 

녀석의 미소는 깨끗하고 순수한 햇살 같았고, 긴 속눈썹은 가볍게 깜빡였으며, 볼은 투명한 핑크색을 띠고 있었다. 녀석은 완벽한 천사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P.146)

 

그리핀의 마음 한가운데는 큰 구멍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은 없었다. 그리핀은 그게 뭐든 간에 별 느낌이 없는 애였다. 차갑고 딱딱한 벽돌 같은 애였다. (P.199)

 

여기서 작가의 관심은 지켜보는 아이들, 즉 방관자에게 주어진다. 방관자는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굳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언뜻 보면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방관자의 존재 자체가 이미 가해자에게 승리감을, 피해자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해준다. 내가 나쁜 짓을 해도 누구도 말리지 않고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 인간관계는 뒤틀리기 마련이며,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악영향을 받는다. 방관자는 이처럼 폭력을 묵인하는 동시에 잠재적 피해자가 될 우려가 있다. 작가는 방관자의 위선적 태도를 한 꺼풀 벗기기 위해 밀그램의 실험을 소개하고, 마틴 루서 킹의 격언을 인용한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에릭은 생각했다. 그 못된 장난에 참여한 적이 전혀 없으니 말이다. 할렌백을 괴롭히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도 없고, 그 게임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에릭은 한 걸음 물러난 채, 그저 못 본 척했다. 하지만 사실 에릭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었다. 복도에 있는 다른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점차 그 장난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건 청바지를 입은 악동들의 테러였다. (P.101)

 

그리고 방관자는 언제든 자신이 피해자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는 에릭이 그리핀의 무리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그리핀은 할렌백에서 에릭으로 괴롭힘의 대상을 변경한다. 이제 주변에 에릭을 도와주는 사람은 같은 처지의 메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방관자 대다수는 자신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을 예감하지 못하거나 그 위험성을 염두에 두기에 더욱 몸을 사리게 되는 행동 방식을 선택한다.

 

가해자 그리핀의 왜곡된 성격, 그를 배태한 불완전한 가족관계는 이 작품에서 살짝 드러나지만 그것이 학교폭력을 변호할 수 없다. 가정환경을 탓하자면 에릭도 그리핀에 못지않게 열악한 처지이므로. 결국 당사자의 수용 방식에 따른 것이다. 피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서 할렌백과 에릭은 상반되는 대응 태도를 보인다. 할렌백은 피해자인 동시에 스스로 가해자가 되려고 한다. 폭력의 전형적인 대물림 구조이지만 폭력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피해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에릭은 폭력에 저항한다. 물리적 폭력도 에릭의 정신을 굴복시키지 못한다. 그리핀이 에릭을 놓아두는 것은 그를 괴롭혀봤자 자신에게 별달리 득이 될 게 없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위는 학교 당국이 가지고 있다. 학교 당국은 학교폭력의 인정과 처리에 의외로 소극적이다. 이 책에서도 그리핀은 여전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학교에 다니고 있다. 칼을 소지했다는 근거 없는 제보만으로 에릭의 사물함을 이 잡듯이 뒤지는 교사들이 어째서 에릭과 할엔 백의 폭행당한 흔적에는 둔감한지. 근거 없는 제보자에 대해 어떤 조처를 했는지 여기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물론 이해는 된다. 학교폭력의 발생은 학교 관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관리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여차하면 향후 교사의 경력 및 승진에서도 감점 요소가 되므로 누구도 원치 않는다. 다만 학교폭력에 대한 학교 당국의 외면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에게 중요한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핀 코넬리의 문제는 저절로 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에릭이 뭔가 행동에 옮기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P.187)

 

학교폭력은 방치하면 저절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시간의 힘은 가해자의 공격성을 강화하고 피해자의 억압과 분노를 심화시킨다. 방관자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모호해진다. 학교 당국은 잠재적 핵폭탄을 키우고 있을 따름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핀도, 에릭도, 할렌백도 여전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화로운 중학교의 외양이다. 에릭 자신은 학교폭력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평범한 학생의 위치로 복귀하였다. 개인 차원에서 해결이지만 구조 차원에서는 달라진 바 없다. 그것은 학교폭력은 근원적 해결 없이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을 작가가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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