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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그 후 이야기 ㅣ Classics in Love (푸른나무) 9
진 웹스터 지음 / 푸른나무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는 <Dear Enemy>다. 화자 샐리 맥브라이드가 고아원 의사 로빈 맥클레이에게 보내는 서신의 첫 문구다. 번역본에서는 ‘싸움꾼 선생께’로 옮기고 있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음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상 <키다리 아저씨> 속편으로 간주하는데, 주인공이 성공한 전편의 주인공 주디의 친구라는 점, 그리고 형식이 대부분 주디에게 보내는 샐리의 서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주디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존 그리어 고아원이라는 점 등이다. 다만 주디와 저비스는 글 속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낼 뿐 실제 작품 속에는 활동하지 않으며,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전적으로 샐리 맥브라이드이다.
샐리의 서신에 따르면 고아원의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 그리고 고아원의 운영이 너무 권위적이고 획일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고아원의 본질적 설립 목적을 되새겨볼 때 존 그리어 고아원은 지금껏 고아들을 위한 단순 수용시설에 불과하였다.
저를 이 고아원에 오게 했던 낭만적인 매력은, 시적인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에요. 이 곳은 정말 끔찍하답니다. 어둠침침하고, 을씨년스럽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곳이에요. (P.20)
여기서 이 작품의 사회소설로서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전작에서 고아원의 비참한 현실은 주디의 서신에서 가끔씩 언급될 뿐이며 그 자체가 작품의 주도적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소설 전개의 핵심적 사안이다. 샐리는 고아원 원장으로서 고아원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좀 더 밝고 인간적인 곳, 즉 진정 아이들을 돌보는 곳으로. 샐리는 주디 부부와 샌디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서서히 고아원을 개혁한다.
애정만으로 결혼해서 내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그리고 난 내 삶을 발견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어. 결혼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둬야 할 테니까. (P.226)
더불어 그녀 자신도 바뀌게 되는데, 원장직을 한시바삐 그만두려던 생각은 사라지고 고아원 운영의 보람과 재미를 발견하게 되는 점이다. 그녀가 고아원에 매진하면 할수록 불가피한 갈등과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약혼자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평범한 여성의 삶에 안주할 마음이 없다. 여성의 자아실현과 자기 주도적 삶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여성주의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샐리는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샌디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그래서 ‘Dear Enemy’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었다. 샌디는 비록 완고하고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직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이다. 초창기 주디에게 샌디를 향한 불만을 토로하던 샐리는 업무를 공유하고 대화를 해나가면서 서서히 샌디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된다. 더불어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고아원의 탈바꿈이라는 동일한 지향점을 지닌 그들이 여러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음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러브 스토리이다. 평범한 가치관을 소유한 젊은 여성으로서 샐리의 장래는 성공한 정치가의 아내로 몇 명의 아이와 함께 남편을 정성으로 내조하는 여성상으로 예정되어 있다. 존 그리어 고아원 원장만 맡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재빨리 원장직을 그만두었더라면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샐리가 자신과 부합하는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서 러브 스토리는 결실을 이루었다고 보겠다.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하면 대중적 흥미를 끌어내는 요소가 약하다. 열악한 환경의 젊은 여성의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는 통속적 소재에 비하면 샐리의 이야기는 고아원 운영에 깊이 편중되어 있다. 가벼운 소설책에서 무겁고 진지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이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저비 도련님과 미스터리한 키다리 아저씨에 비하면 고든 씨와 샌디는 호감도도 낮은 편이다. 특히 고든 씨는 매우 평면적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어 흡입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단순히 <키다리 아저씨>의 속편으로 치부되기에는 아깝다. 샐리의 말처럼 주디 부부의 모습은 이상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주디 이야기에 비하면 샐리 이야기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샐리는 보다 진취적이고 현실 참여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행동에 가식이 없다. 고아원 운영의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은 결국 샌디가 아니라 샐리 자신이다. 그녀의 책임감과 사명의식이 있기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전작의 명성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길 기대한다
참고로 아래아한글에서 맞춤법 검색을 하니 ‘고아원’의 표준어는 ‘보육원’이라고 계속 지적한다. 직설적인 표현을 순화시킨 용어인데, 당사자의 감정을 고려한 변경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