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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루노코 - 고귀한 영혼의 노예 ㅣ 동안 더 빅 북 The Big Book
애프라 벤 지음, 최명희 옮김 / 동안 / 2014년 6월
평점 :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개인적으로 시큰둥하였는데, <떠돌이>의 작가라니 급 관심이 생겼다. 여기서 작가는 남아메리카의 수리남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들은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택하고 있다. 따라서 사건과 인물의 진실성에 대한 기대감이 높지만 결국 소설이므로 사실 여하는 알 수 없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사항에 흥미를 갖게 될 텐데 우선적으로 주인공인 오루노코와 이모인다의 비극적인 삶에 강하게 이끌리게 된다. 제아무리 노예무역이 성행한 당대이지만 일국의 왕자인 오루노코가 속임수에 빠져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대목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더욱이 가증스러운 위선자 영국 선장의 배신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서구인과 서구 문명에 대한 작가의 날 선 비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자를 비참한 상태로 버려두는 악덕은 기독교도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곳에서 종교란 다만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미덕이나 도덕성은 없을지언정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P.31)
왕자와 이모인다의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 아름답지만, 늙은 왕이 이모인다에 욕심을 내고 권력으로 쟁탈하는 대목도 이해 불가능은 아니다. 봉건사회에서 절대적 권력자에게 불가능은 없으며 그것을 현대적 가치관으로 재단하는 게 타당하지 않으므로. 오루노코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전면적으로 반항하지 않았으리라.
오루노코는 비록 노예 신분이지만 우아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지닌 왕자로서 백인들에게도 존중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그가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여 백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렇게 대우받았을까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수많은 흑인이 모두 태생적 노예에 적합하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그에 대한 대우의 허상은 그가 뜻밖에 재회한 이모인다와 결혼하고 자유를 요청했을 때 갖은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는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에게 있어 오루노코와 이모인다는 고귀하지만 역시 노예일 뿐이다.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작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독자에게 색다른 흥미를 안겨주기 위한 장치를 설정한다. 바로 수리남의 이국적 풍경과 오루노코와 아마존 인디언과의 만남 장면이다. 이 작품은 1688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남미는 여전히 낯설고 머나먼 지역이었고 그곳의 풍토와 식생 또한 유럽과는 전연 상이했으므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와 이모인다는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절감하기에 그들의 선택은 필연이자 숙명이었다. 낯선 땅, 장비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오루노코는 저항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내몰린 것이다. 정직하고 고매한 인간성이 존중받지 못하며 거짓과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을 그는 감당할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왕자로서 예우받고 존중받았다면 굳이 저항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갔으면 그런 비극은 피할 수도 있었을 터라고. 오루노코의 말을 듣자.
시저는......노예 신분의 비참성과 치욕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무거운 짐과 힘든 노역에 시달리며 뼈가 빠지게 일하고 있는 노고를 하나씩 꼽으면서 노예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며,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분별이 없는 야수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P.127)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2백 년 전에 이미 애프러 벤은 노예제도의 실태와 참상을 생생하게 적시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부림을 당하는 노예만이 아니라 부리는 사람 자체의 인간성도 파멸시킨다.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부도덕성과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비윤리성이 그것이다. 독자는 동족 문명인의 기만적인 언행에 분개하고 오루노코에게 동정과 공감을 표하는 작가의 목소리에 소설을 읽는 내내 귀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단지 오래전 소설 속 상황에 그치지 않음을 모두가 다 같이 인식하고 있음이다. 그것이 이 작품이 단지 이국적인 인물과 배경의 로망스 소설에 그치지 않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