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산양, 크래그 -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시튼의 동물 이야기 3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음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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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사냥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된 동기, 내 가장 큰 소망은 해롭지 않은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는 일을 멈추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P.10)

 

서문에서 시튼이 스스로 밝힌 의견이다. 종종 사람들은 착각한다. 야생 동물에 동정적 시선을 보내는 시튼을 동물 한 마리도 죽인 적 없는 순수한 동물보호주의자로. 그가 꿈꾸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자연 속에 공존하는 삶이다. 그는 지나친동물사냥이나 학대에 반대한다. 보이스카우트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이유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 8편 중 위대한 산양, 크래그’, ‘곰 조니’, 그리고 포로가 된 코요테의 세 편이 내용과 분량 면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위대한 산양, 크래그에서 사냥에 반대하지 않는 시튼조차도 크래그에 대한 스코티의 집착은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늑대처럼 가축에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쇠오리나 들꿩처럼 식육용도 아니다. 단지 멋진 뿔을 박제하여 집안에 장식하고 싶은 과시욕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사냥개를 잃어버린 동료마저도 크래그의 고고한 품격과 당당한 자태에 감탄하여 사냥을 그만두었지만 스코티는 결코 포기할 줄 모른다. 장장 12주에 걸친 크래그와 스코티의 쫓고 쫓기는 추적 장면은 인간의 맹목적이고 광적인 탐욕의 극한의 정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크래그에 공감과 동정을 아끼지 않는다. 절체절명의 순간은 차라리 절규와 탄식에 가까울 정도로 영탄조로 작가의 심경을 그대로 표출한다.

 

, 어머니 하얀 바람이여 제발 불어다오! 이 일을 막아다오! 당신의 힘은 모두 사라졌는가? 모든 봉우리에 100만 톤의 눈이 할 일 없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하나, 봉우리 하나면 충분하리. 흩날리는 한 번의 눈보라만으로도 아직 그를 구할 수 있으리. 이 산맥의 가장 고귀한 생물이 인간의 가장 천한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쓰러져야만 하는가? 그가 단 한 번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그런 운명이 닥쳐야 하는가? (P.88)

 

포로가 된 코요테는 인간의 손에서 사육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한 코요테의 야생 스토리다. 어린 티토가 온정의 보살핌을 받았다면 인간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미지수다. 다만 현실의 티토는 모진 구박과 학대로 그리고 갖가지 괴롭힘의 수법을 체험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체득하였을 뿐이다. 티토를 잡기 위한 개, , 독 등의 모든 장치가 무용지물로 변한 것은 사람들 스스로의 자업자득과 티토의 유별난 지능의 결합이라고 하겠다. 모든 코요테가 티토 같지는 않을 테니. 살진 프레리도그 사냥 장면과 아슬아슬하게 사냥꾼을 피하는 대목은 새삼 티토에 탄복하게 된다. 그러니 그처럼 번영할 수밖에.

 

인간이 가능한 모든 최악의 짓을 다해 왔음에도, 그들은 인간이 만든 것들로 가득한 땅에서 번성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친 코요테가 바로 티토였다. (P.302)

 

반면 곰 조니이야기는 우리네 마음을 슬프게 한다. 어미 곰 그럼피와 새끼 곰 조니의 좌충우돌은 우스꽝스럽고 유머러스하게 시작한다. 회색곰에 쫓겨나고 고양이에 혼쭐나는 곰 모자가 딱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조니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 복선을 깔아놓는다. 귀엽고 행복한 새끼 곰이 아니라 다리를 절뚝거리는 초라한 외모와 언제나 성가실 정도로 투덜대는 조니. 독자로서는 슬프지만 조니의 죽음에 차라리 안도하게 된다. 야생이었더라도 조니는 어차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더욱 비참하게 살아야 했을 테니 이렇게 보호자의 품에서 생을 마치는 게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나머지는 소품들인데 그중에서 왜 북미쇠박새는 1년에 한 번씩 미칠까는 특히 짤막하여 별다른 감흥이 없다. ‘참새 랜디의 모험은 한마디로 웃프다. 카나리아처럼 노래 부르는 참새라니. 랜디와 비디의 집 꾸미기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모든 신혼부부의 그것과 흡사하여 인간과 동물의 행동 방식의 유사성을 연상시킨다. 그들이 끝내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함은 유감이다. 그래서 아무 일 없는 듯 초연하게 새장 속 삶에 안주하는 랜디가 더욱 딱하다. 작가의 말마따나 그는 야생의 존재가 아니었다.

 

랜디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결국 랜디는 진정한 야생의 새가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 풀려난 것 자체가 사고였다. (P.123)

 

열 마리 새끼 쇠오리는 흐뭇한 미소를 안겨주는 짤막한 소품이다. 우리네 눈에는 작고 하찮은 일화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생사가 걸린 위험천만한 모험을 겪은 셈이다. 그들의 작은 목숨을 노리는 적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달빛 요정 캥거루쥐는 한 편의 서정시와도 같은 아름다운 글이다. 캥거루쥐를 달밤의 요정에 비유하여 환상적으로 묘사하여 난생처음 들어보는 종족임에도 호기심과 친근감이 교차한다. 그들이 그토록 바지런하고 대단한 건축가이자 가수라는 사실도. 작가로서는 불가피했다고 머리는 납득하지만 어쨌든 그를 가둬놓고 관찰하는 방식은 시튼치고는 다소간 유감스러운 건 사실이다. 캥거루쥐의 탈출에 일말의 안도와 지지는 아마도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강아지 칭크는 개와 인간의 우정을 다룬 이야기다. 진부하고 식상할 법하지만 상황의 긴박성과 극적인 결말은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다지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주인에 목숨을 걸고 충성하는 칭크. 반복하지만 굶주림과 두려움을 감내하고 며칠 동안 코요테에게 맞선다는 것은 강아지로서는 무모하기조차 한 행위이다. 죽기로 충성하는 칭크를 어떤 주인인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코요테에게 총구를 겨눈 늙은 오브리를 지지한다.

 

상관없어요.” 늙은 오브리는 말했다. “그 대신 친구를 얻었으니까요. 항상 나를 믿어 주는 친구를요.” (P.202)

 

인간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동물이 강아지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무조건 살생과 유희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존엄성을 가진 생명으로 인식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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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서재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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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의 다자이는 작가의 전모가 아닌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다채로운 작품 면모는 초기작 <만년>에서도 드러나지만, 단편의 속성상 체감 정도는 여기 수록작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의 개성적인 특색은 아마도 희극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일부러 조소하고 비하하는 자학 개그, 그의 본원이 무엇인지 간에 어쨌든 독자는 그의 해학미에서 미소를 짓게 된다. 그의 잇따른 어두운 작품 세계에서 독자가 절망하고 지치지 않는 원동력도 여기에 있으리라고 믿는다.

 

<쓰가루>에서 화자는 쓰가루의 험담을 자주 내뱉곤 한다. 유명 작가만 화제에 올리며 정작 자신은 언급하지 않는 주위 사람들에게 푸념도 늘어놓는다. 그의 투덜거림이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는 까닭은 작가가 대상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음에서이다.

 

나는 쓰가루 사람이다. 선조 대대로 쓰가루 번의 백성이었다. 말하자면 쓰가루 토박이이다. 그래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이와 같이 쓰가루의 험담을 하는 것이다. (P.30)

 

이러한 애정은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의 공통점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전시체제가 극에 달한 때에 작가는 고향과 과거로 시선을 돌린다. 전시상황에서 작가는 모종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용이 되거나 절필하든지 아니면 작금과 동떨어진 글을 쓰든가. 다자이는 마지막을 골랐다. 물론 <석별>에 대한 판단은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옛날 이야기>는 유명한 전래동화를 작가가 리메이크한 것이다. ‘혹부리영감’, ‘우라시마’, ‘부싯돌 산’, ‘혀 잘린 참새’. 작가는 대중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상투성을 뒤집어 놓는다. 쓴맛을 보는 다른 혹부리영감은 탐욕이 원인이 아니라 진지함의 외피로 놀이의 즐거움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라고. 용궁에 다녀온 모모타로가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짐은 슬픈 사건이 아니라 그로서는 다행이라는. 마찬가지로 악역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너구리가 사실은 토끼를 사랑한 죗값이라는 등.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을까. 다수의 힘을 등에 업은 여론의 오도와 편향에 함몰되지 말고 자신만의 독자적 판단과 견해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루쉰이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자이는 루쉰과 동문수학했던 늙은 의사의 수기 형식(이 형식은 다자이가 애용하던 기법이다.)으로 일본 유학 시절 루쉰의 모습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그가 문학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석별>에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중국의 적나라한 봉건적 현실에 절망한 루쉰의 심경은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냈다고 할지라도 매우 설득력이 높고 그만큼 절절하다. 저우 씨와 화자, 그리고 후지노 선생이 갖는 공통의 약점-주변인이 중심인에 대해 갖는 열등감은 다자이 작품 세계의 중요한 요소다-과 소위 국경을 초월한 묘한 우정.

 

순수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논란거리도 분명 존재한다. 우선 집필 계기가 군부와 우익단체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 물론 작가는 집필의 순수성을 말미에 밝히지만 어쨌든 찜찜한 면은 사실이다. 왜 하필 그 시점에서 중국의 후진성과 일본의 선진성을 대비하고, 루쉰을 통해 중일 우호를 표방하는지. 게다가 작중에서 러일전쟁을 언급하며 일본이 중국을 위해 싸우는 전쟁이라고 하는 인식(P.237),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단언(P.272) 등은 집필 시기와 결부할 때 작가의 순진한 역사 인식과 더불어 미필적 고의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쓰가루>는 개인적으로 다자이의 작품 중 가장 읽어서 기분이 좋고 호감이 가는 글이다. 분류상 소설에 가깝지만 역시 허구와 현실의 교묘한 결합이며 현실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 기행문의 성격도 다분하다. 개인적으로도 쓰가루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구글 지도로 작품 내 등장하는 주요 마을과 지형도 찾아봤을 정도다. 이와키산과 주산호도 구경하고 싶지만, 무엇보다 땅끝마을인 닷피의 비인간적인 풍경도 체험하고 싶다.

 

주위 풍경이 왠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무시무시해졌다. 처참하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이미 풍경이 아니었다. 풍경이라는 것은 긴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형성되는, 말하자면 인간의 눈에 닳아서 부드러워지고 인간에게 길들여지고 친숙해져서,...인간의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P.104)

 

얼핏 보면 작가의 고향 방문기 또는 기행문 정도에 그칠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후반부에 있다. 화자가 고향 친척과 만나는 장면이다. 형제간임에도 어색하고 서먹서먹함이 독자에게조차 진하게 배어 나옴에서 일찍이 가족들에게 절연 당한 다자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고향, 특히 가족은 정신적 평온함이 아니라 오히려 피곤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임이 애틋하다. 그런 면에서 다케를 찾아 나서는 모험은 특별하다. 어린 자신을 돌봐주었던 보모에게서 그는 진한 모성애를 느낀다.

 

이번에 내가 쓰가루에 와서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만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일생은 그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P.166)

 

형제 중에서, 나 홀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고 차분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은 이 슬픈 키워준 부모의 영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때 비로소 내 성장 과정의 본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결단코 고상하게 자란 남자는 아니다. (P.185)

 

고향은 자기 존재의 근원이다. 화자가 쓰가루 방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단순한 풍토기가 아님은 명확하다. 고향의 T, N, S씨를 통해 가련할 정도로 우직한, 그러나 시속에 흔들리지 않는 본연의 우의를 발견할 수 있다. 고향 가족과의 만남도 비록 껄끄러움은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사안이며, 의외로 마음 따뜻한 대목도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화자가 자기의 정체성을 명확히 인식하는 건 다케와의 해후를 통해서다. 갑작스러운 종결은 작가가 쓰가루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음을 뜻한다. 더 이상의 서술은 사족에 불과하므로.

 

다자이 오사무 하면, 그의 만년 <사양><인간실격>의 가라앉고 음울한 작품 세계가 연상된다는 독자에게 이 책을 읽히면 같은 작가가 굉장히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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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 그림이 있는 옛이야기 2
김원익 지음 / 지식서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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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째 북유럽 신화 개설서다. <에다 이야기>를 포함하면 네 권째인 셈이다. 덕분에 생소했던 신들과 거인들의 이름도 이제는 비교적 친숙해졌고, 북유럽 신화 체계도 어느 정도 머릿속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다. 이 책에서 기대하는 점은 두 가지다. 먼저 그림이 있는이라는 표제와 같이 풍요로운 도판이 주는 효과다. 아무래도 글자보다는 이미지가 이해도와 흥미도를 높이는데 유리한 게 사실이다. 다음은 저자다. 김원익은 그리스신화 전문가다. 신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하는 입장에서 북유럽 신화를 어떻게 다룰지 기대감을 품게 한다.

 

책의 만듦새는 매우 좋다. 특히 고급용지를 사용하여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데 컬러 그림 130점을 수록하기 위해 선택으로 보인다. 이 도판이 이 책의 최대 강점이라고 할 만하다. 중세와 근대의 유럽인들이 북유럽 신화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일목요연하게 그림으로 생생하게 입증된다. 굳이 책 내용을 살피지 않더라도 그림만 보더라도 북유럽 신화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라고 하면 과언일까.

 

북유럽 신화는 크게 두 가지 줄기로 구성되는데, 세계 창조에서 라그나뢰크로 이어지는 신들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통상 반지 이야기로 불리는 뵐숭 가문과 니플룽 가문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싣고 있어 초심자가 북유럽 신화 전반의 구조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이 책에 다소나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과도한 친절이라고 하겠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이 완전무결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신화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앞뒤 맥락이 맞지 않고 시간순서도 제멋대로 인 점을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작자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다소간 과한 점이 있다. 작자 자신도 이를 인식하고 있어 머리말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의 원전에서는 이야기의 단절이나 비약이 자주 보인다.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도 많다. 중요하지만 너무 짧은 이야기도 허다하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만 했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필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런 빈 공간들을 채워 보려고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해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잘못이 있다면 필자의 지나친 상상력 탓이다. (P.11)

 

기존 책들과는 전개와 해석을 달리하는 대목이 간혹 존재하는데 무엇이 더 원전에 가까운지, 더 올바른 해석인지 알 수 없다. 잘못하면 운문 에다마저 펼쳐 들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우려스럽다.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본다.

 

오딘 형제가 거인 이미르를 죽여서 세계를 창조하는 대목 중 이미르의 시체 구더기에서 난쟁이와 요정을 만들었다고 한다(P.29). 땅속의 난쟁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요정마저 구더기의 변신이라고 하니 의외다. 다른 책에서는 그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없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북유럽의 신들이 단일 신족이 아니라 아스 신족과 반 신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 단계로서 두 신족 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오딘이 두 신족의 왕이라고 하면서 오딘의 통치 아래 두 신족이 존재한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사이가 벌어지면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P.38). 오딘이 신들의 왕이라면 누가 감히 왕에게 반역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전혀 별개의 두 신족의 결합과 최고신 오딘을 함께 연결하기 위한 무리수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읽은 최순욱의 책에서는 로키를 불의 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 김원익은 로키와 불의 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P.83). 불의 신 로기를 로키와 동일시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로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점이다. 로키를 신족이 아닌 거인으로서 장난과 말썽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지나쳐 마침내 신족과 등을 돌리는 존재로 해석할 것인가? 또는 로키의 불안정한 속성을 쉴 새 없이 형체를 바꾸는 불의 본질로 이해하여 그의 변덕스러운 본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대목은 조금 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로키가 토르의 아내 쉬프의 금발을 잘라버려 발생하는 사건은 신들에게 여섯 가지 절대 보물을 안겨다 주는 해피엔딩으로 연결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로키가 대장장이 난쟁이들을 꾀어 신들의 보물을 만들게 하는 장면인데 앞선 책들과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난쟁이들은 로키의 말이 별로 실속은 없지만 약간의 황금과 수고만 들이면 되는 일이었기에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P.128)

 

로키의 단순한 감언으로 난쟁이들이 이렇게 엄청난 보물을 만들어 신들에게 선물로 준다고 하는 설정은 신빙성이 미약하다. 두 대장장이 집단 간 자존심을 건 경쟁이라고 하는 게 보다 설득력이 높다.

 

토르와 티르가 히미르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도 의문점이 존재한다. 우선 히미르와 티르의 관계가 모호하다. 티르는 히미르의 친아들인가 아니면 의붓아들인가. 친아들이라면 히미르가 티르를 죽이려고 그렇게 사납게 날뛴다는 게 상황에 맞지 않는다. 의붓아들로 보는 게 그럴 듯하다. 한편 토르와 요르문간드의 낚시 대결에서 요르문간드가 간신히 풀려난 게 누구 덕택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요르문간드 자신의 필사적 노력 때문이라고 하는데(P.172), 다른 책에서는 겁에 질린 히미르가 낚싯줄을 끊어서라고 풀이한다.

 

마지막으로 우트가르드에서 토르가 거인들과 힘 대결을 벌이면서 고양이를 들어 올리려고 애쓰는 대목을 보자. 토르가 끙끙거리며 온갖 힘을 쏟았지만 겨우 고양이 뒷발을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다(P.192). 이 책에서는 거인들이 이를 바라보며 조소를 날리지만, 이 고양이가 사실 요르문간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살짝 들어 올린 것만 해도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때 우트가르드-로키의 반응이 매우 심각해야 함이 마땅하다.

 

한편 뵐숭과 니플룽 가문의 수 대에 걸친 우여곡절은 잘 정리되어 니벨룽의 반지이야기 전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신의 손바닥에 좌우되는 영웅의 생을 포함하여 최고 신 오딘의 음울한 의지가 인간계를 완전 좌우하고 있어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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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산의 제왕 시튼의 동물 이야기 4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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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산의 잭은 회색곰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왑과 유사성을 지닌다. 둘 다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일대의 제왕으로 군림하였고 난폭하다는 평판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 사냥꾼에게 가족을 잃고 외톨이로 성장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양자의 삶은 전혀 다른 길을 따라갔고 그들의 마지막도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은 제법 적잖은 분량으로 단편집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표되었다. 게다가 잭의 일생은 자체로 극적인 대조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흥미진진함과 동시에 딱한 생의 여로에 공감과 연민을 이입시키기에 충분하다. 철부지 아기곰 잭의 재롱과 순진함, 그리고 영리함을 보며 우리는 잭이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한갓 애완동물로, 나아가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당하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동류 인간들을 향한 혐오감마저 감출 수 없다. 따라서 잭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을 때 독자의 환호는 당연하였다. 작가마저 독립기념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로.

 

잭은 왑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왑이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나무뿌리와 열매 같은 먹이를 선호한 반면, 잭은 양과 소 같은 육식을 선호하였으니 이해의 충돌은 필연적이 되었다. 시에라 산맥에는 자연 상태의 먹이가 부족하였을까? 아니었다, 그건 잭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할 운명이었고 고기에 대한 본능적 선호였을 뿐이다. 눈앞에 영양이 풍부하고 손쉬운 먹잇감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땅을 뒤적거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무엇보다도 잭은 살상 자체를 즐겼다. 수많은 소들과 양들을 잡아먹은 악명이 자자한 주변 일대의 육식 회색곰들이 결국 한 마리를 지칭하는 것이었을 때 잭과 인간들 사이에는 불구대천의 관계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잭의 파멸을 의미했다. 야생동물이 제아무리 사납고 영리하고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작심하고 뒤쫓는 인간들을 영원히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거대한 곰은 앞발에 코를 묻은 채 우리 안에 엎드려 울었다. 정말이지 길고도 가슴 쓰라린 맹수의 울음이었다. 마치 영혼에 상처를 입어 희망과 삶이 꺼져 가는 사람이 우는 듯했다. (P.127)

 

사냥꾼과 덫과 총으로도 제압할 수 없었던 탈락 산의 제왕을 패배시킨 것은 달콤한 미끼와 강력한 수면제였다. 인간들은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잭을 이길 수 없었기에 동물적 본능의 유혹을 이용하였다. 우리는 야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애완동물처럼 던져주는 먹이와 속박에 익숙하고 길들여져 가는 제왕의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야생동물에게 자유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어미 여우가, 야생마가 이미 처절하게 입증하였고 늑대 왕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였다.

 

잭은 삶을 선택하였고 살아남았다. 시튼은 잭의 향후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그리고 어떠한 양태를 갖게 될지 섣불리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잭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멀리 탈락 산과 바다가 있는 방향”(P.131)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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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곰 왑의 삶 시튼의 동물 이야기 2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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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두 편의 동물기 중 <회색곰 왑의 삶>은 이전에 읽었기에 비교적 친숙하지만 후자인 <샌드힐의 수사슴>은 이번에 처음 접하는 이야기다. 양자 모두 단독으로 발표되었고 시튼의 여타 동물기에 비하면 제법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다. 미루어 짐작건대 회색곰과 수사슴의 삶의 단편적 면모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그네들의 희로애락을 긴 호흡으로 기술하였으리라.

 

1. 회색곰 왑의 삶

 

회색곰 왑의 일생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특징은 우선 최상위 포식자임에도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고난과 고통이다. 어미를 비롯한 가족을 모두 잃은 새끼 곰은 무력하기 짝이 없고 그를 괴롭히는 모든 짐승은 그에게 결국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 우정을 기대할 수 없을 때 그에게 남는 감정은 오로지 분노와 증오일 따름이다.

 

무뚝뚝하고 까다롭고 난폭하며 성질 나쁜 왑의 일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보호구역 안에서의 순하고 얌전한 회색곰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 연유도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야생 동물의 모습이 참으로 편린에 불과함을 강조할 뿐이다. 아울러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갖는 미덕과 존재의의이기도 하다.

 

이 보호구역 안에 사는 동물들은 사람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거나 공격하지도 않았고, 서로에게도 훨씬 더 너그러웠다.

평화와 풍요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다. (P.79)

 

야생곰은 어떤 최후를 맞이할까?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거나 다른 곰과 영토싸움을 하다 부상 당해 죽기도 하고 드물게는 늙고 병들어 자연사할 것이다. 고독하지만 강력한 회색곰 왑의 권력도 영원하지는 못하니 그것 또한 자연의 순리라고 하겠다. 젊은 곰 로치백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제왕으로서 장렬한 전개를 바랐던 이들에게 왑의 최후는 기대에 반하는 것이었다. 독자는 동물 영웅을 기대하지만 왑의 선택은 고요와 평안이다. 병약하고 노쇠한 왑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일까?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죽음. 야생 동물로서는 드물게 찾아오는 선물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왑의 선택에 실망해서도 안 되고 실망할 수도 없다. 일생을 쉴 틈 없이 치열하고 숨 가쁘게 살아 온 그로서는 최선의 죽음일 것이므로. 독자의 값싼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일생을 망칠 수는 없으니.

 

2. 샌드힐의 수사슴

 

사냥꾼에게 쫓기기는 오히려 수사슴이 더욱 심하다. 회색곰 사냥은 자칫 사냥꾼의 목숨을 교환해야 할 중대사인 반면 겁 많은 사슴은 여러모로 스포츠로서 사냥에 적합한 대상물이다. 게다가 수사슴의 뿔은 얼마나 멋진 장식물이던가.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냥이라는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과 대상으로서 동물의 관계다.

 

타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의 정당성은 자기 존재의 생존 차원에 기인한다. 수많은 자연 다큐에서 매번 보게 되는 살상 또한 먹이사슬의 불가피성으로 자연법칙의 일환으로 간주된다. 우리네가 기르고 도축하는 가축들도 인간의 생명 유지라는 관점에서 일부의 맹렬한 반대주장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얀이 샌드힐의 수사슴을 쫓고 잡으려는 목적은 단지 정복욕과 소유욕이다. 그것의 힘차고 아름다운 몸뚱이에서 피를 뿜어낼 때의 쾌감을 즐기고, 빼어나게 멋진 뿔을 영원히 박제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것, 그래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으로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 사냥꾼이라면 대체로 유사한 동기와 목적을 갖게 마련이다. 동물에게 생명체의 감정을 가져서는 뛰어난 사냥꾼이 되지 못한다. 언제 어느 순간이건 오로지 대상물로서만 인식해야 한다.

 

얼마나 당당하고 생명력이 넘쳐나는가! 존귀하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임금이었다. 가죽 옷을 입고 그에 어울리는 왕관을 쓴......그 티 하나 없이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를 보자 총을 든 암살자는 용기를 잃었다. (P.130)

 

얀은 성공적인 사냥꾼이 될 수 없다. 문제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감정적 측면이다. 인간과 대등한 개별적 생명체로서의 존재를 의식할 때 누가 감히 살상을 감행할 용기를 갖겠는가. 죽이고자 하는 대상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더구나 이 수사슴처럼 왕자다운 당당함과 고귀한 품격을 갖춘 동물에게 말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동안,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는 동안 얀은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 얀은 눈을 마주치면서 녀석의 생명을 빼앗을 자신이 없었다. (P.158)

 

얀이 진실로 수사슴을 통해 성배를 발견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3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발자국을 통해 깊은 통찰을 얻게 될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얀은 절대로 그 수사슴을 죽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시튼의 여러 이야기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냥꾼이 실패의 쓴맛을 본 사례라고 하겠는데, 그럼에도 사냥꾼 자신도 글쓴이도 독자도 모두 흐뭇한 마음으로 실패를 축하하게 됨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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