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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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는 사회적 메시지 전달 매체로서 희곡을 소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장르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것이 그가 소설이 아닌 희곡에 주력한 까닭이리라. 자신이 사회에 대하여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대사의 형식으로 직접적 표현이 가능하므로. 이것이 소설과의 근본적 차별점이다. 그의 대표작인 사회극 작품들이 모두 그러하다.

 

이 희곡에는 몇 가지 가치 선택의 갈등이 잠복하여 있다. 먼저 가장 커다란 축인 켈러의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의 동기다. 켈러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는 자신의 가족들, 나아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결함 있는 부품을 선적하였다. 전시 상황에서 조금만 삐끗하거나 약점을 노출하면 몰락하고 만다는 강한 불안감이 내적 동기가 되었으리라.

 

(어머니) 가족을 위해서 그 일을 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켈러) 이유가 된다고!

(어머니) 그 애에겐 가족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어요.

(켈러)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P.129)

 

켈러는 자신의 도덕률에 당당하다. 가족과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면책이라고 주장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난하더라도 가족들에게서만 이해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그가 전후 기간을 꿋꿋하게 버티고 가족과 사업을 지킨 기반이다. 장남에게서, 그리고 마지막에 편지를 통해 차남 래리로부터 자신의 행위가 전면적으로 부인 받게 되자 켈러는 스스로의 앞선 발언처럼 자살을 선택한다. 그로서는 자기 삶의 목표와 존재 이유를 잃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을 테지만 이런 면에서 그는 구질구질한 유형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래리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지극한 모성애의 산물이 아님을 극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낸다. 마당에 쓰러진 나무를 래리의 운명과 결부시킨다거나 기적처럼 귀환하는 전시 군인의 기사를 철석같이 믿는 그녀에게서는 사실 수용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그에게서는 수용이 가져올 두려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 왜 아주머니 마음속은 래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는 걸까요?

(어머니) 왜냐하면 살아 있어야만 하니까.

() 그렇지만 왜요, 아주머니?

(어머니) 왜냐하면 어떤 일들은 그래야만 하고, 또 어떤 일들은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야. 태양이 떠올라야만 하듯, 그래야만 하는 거야. (P.47)

 

래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는 그녀의 말에서는 비이성적인 집착과 강박감이 느껴진다. 그녀에게 래리는 다른 가족 구성원보다 월등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크리스와 앤의 결합 계획을 인정하지 않고 앤을 래리와 굳이 묶어놓으려는 그녀의 시도에 안타까움과 어처구니없음을 품으면서도 일말의 동정심을 발견하는 것은 그녀의 간절함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 얘야, 네 동생은 살아 있어. 왜냐하면 그 애가 죽었다면 네 아버지가 죽인 게 되기 때문이야. 이제 날 이해하겠니? 네가 살아 있는 한 그 애도 살아 있어. 하느님께서는 아들이 제 아버지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단다. 이제 알겠지, 안 그래? 알겠지. (P.117)

 

독자는 크리스와 앤에게서도 의문을 품는다. 무엇보다도 크리스는 진정 자신의 아버지가 무죄이며 정당하다고 믿는지를. 조지의 추궁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 아버지의 고백으로 진실을 접하게 되자 법의 심판을 받도록 권유하는 장면 등을 통해 우리는 크리스가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선한 인물임을 알게 된다. 독자 역시 크리스의 입장이라면 아버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샅샅이 파헤치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 최소한의 믿음이 있다. 비록 수는 크리스를 가식적 이상주의라고 비난하지만 개인적 감정 이외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짐이 대사가 그의 성품을 잘 알려준다. 크리스는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재능이 없다는.

 

(켈러)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P.141)

 

래리의 죽음과, 크리스의 절규가 주창하는 바는 동일하다. 그것은 이 작품의 주제이자 표제이기도 하다. 켈러가 크리스와 래리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편협한 인식을 확장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사망한 21명의 젊은 조종사들이 모두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비도덕적인 행동 선택은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작가는 켈러의 과거와 현재의 행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켈러와 크리스의 극중 대사처럼 전시 상황에서는 쓰러진 시신들 위에서 부를 걸머쥐는 게 성공한 삶이며 그것에 도덕적 책임을 지니지 않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작가는 크리스의 입을 통해 이를 비판하고 싶었으리라. 가장 가까운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크리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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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틴 강가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3
필리파 피어스 지음, 유기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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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감을 자아내는 표제와 달리 이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는 어슴푸레하다. 케이트네 가족의 이런저런 일상이 묘사되는 장면이 이어지지만 밝고 따뜻한 화기애애한 느낌은 전혀 없다. 가족 간 사이가 특별히 나쁘거나 한 건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서먹하고 데면데면하다거나 할까. 기대 밖 전개에 다소 당혹스러움을 품은 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케이트네 아빠가 부재한 사실이 드러난다. 가족들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아빠의 부재는 그들에게 일상의 화두조차 되지 않는다.

 

사라진 묘비와 관련된 해프닝을 통해 케이트는 비로소 알게 된다. 아빠가 돌아가신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음을. 과거형의 아빠로 회상에 그치지 않는 현재형의 아빠를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엄마와 할머니는 그에 대해 언급하길 꺼리며 케이트보고 빨리 잊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케이트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닐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다. 아빠는 죽었으니까. 하지만 달라진 것은 있었다. 케이트는 아빠를 알고 지낼 수 있을 뻔했다. (P.147)

 

새틴 강가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케이트의 과감한 행동으로 새틴 강가는 과거의 망각에서 벗어나 현재와 접점을 가지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랜달 오빠를 통해 새틴 마을의 친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지난날의 새틴이 슬프고 끔찍한 기억을 남긴 장소였다면 이제는 케이트와 아빠가 조우하고 잃어버린 가족과 가정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모든 게 케이트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때도 아니고, 더 이전도 더 나중도 아닌, 왜 하필 지금일까? 예전에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지금인가? 오랜 세월 동안 불가능했던 일이 왜 이제 와서 갑자기... (P.200)

 

독자는 프레드 트랜터에 대해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작중에서는 두려움때문이라고 요약하는데,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프레드가 매우 나약하고 소심한 인물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그렇게 보면 외할머니가 케이트의 아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자신의 딸과 손주를 나 몰라라 방치해 두고 훌쩍 사라져버린 딸의 남편이자 손주의 아빠로서.

 

아빠의 귀환. 그것은 케이트와 가족들에게는 기쁨인 동시에 전환점이다. 동시에 외할머니의 권력 상실을 의미한다. 작중에서는 외할머니를 비판적으로, 친할머니를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독자 입장으로는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긴 시간 비밀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인이 필요한데 무엇보다 아빠의 실종이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리라. 남편의 부재에 따른 실망과 좌절이 시댁과의 인연을 끊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남편과 시댁에 대한 언급을 철저하게 회피하였을 것이다. 어찌 외할머니만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밥 삼촌의 죽음에 연관된 진실을 말미에 슬쩍 보여준다. 진범을 알게 되었다면 응당 실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의외로 인물들의 반응은 담담하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결국 밥 삼촌 자신이 자초한 셈이다. 케이트의 친할머니가 그를 용서하고 포용하려는 심정을 케이트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지만, 독자로서는 바닥에 깊이 깔려있는 정서를 외면하기 어렵다.

 

아빠가 돌아오자 케이트네 식구들은 달라졌다. 케이트는 걷혀가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산처럼 크나큰 변화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세월이 지나면 아빠를 비롯해서 식구들이 얼마나 변했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P.294)

 

케이트네 식구는 이제 온전한 가족을 꾸리게 되었다. 아빠의 부재에 따른 공허감도 사라질 것이며, 랜달과 레니도 롤모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가족의 완성이 맞는 것인지. 케이트네는 호주로 이민을 떠날 예정이다. 친할머니와 시럽은 영국에 남아 있을 것이며, 외할머니도 홀로 남는다. 아빠의 일자리로 인한 불가피한 사유이지만 결과적으로 프레드는 새틴에 자리 잡지 못하는 셈이다. 케이트의 외할머니와도 화해하지 못하고. 연로한 모친을 홀로 남겨두고 친숙한 인간관계를 벗어나 생소하고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는 케이트네. 외관상 이 소설 역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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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6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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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진실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 때로는 외면하고픈 마음도 들 때가 있다. 그것이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희곡을 읽는 내 심정이 꼭 이러했다. 17세기 광기와 공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사회의 정당한 권위에 올라타고 인간성과 이성을 무참히 압살하던 역사적 기록. 훗날 우리는 이를 마녀재판이라 칭하며 이를 주도했던 당대 사회와 인물, 특히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일 수 없다.

 

역사의 진보를 굳건히 믿는 사람들에게 17세기의 마녀재판과 20세기 중반의 매카시즘은 비이성적 광기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그것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외투를 차용했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개인적 목적을 위해 조장한 공포의 위협과 광기로의 확산은 그 주장이 갖는 터무니없는 불합리성을 건드리지 못한 채 해일처럼 사회를 휩쓸어 무수한 피해자를 양산하였다.

 

작가는 질문한다. , 무엇 때문에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종교계, 재계의 인물들은 어떻게 정치적, 개인적 이익 달성을 위해 이러한 광기를 심화하고 유포하는데 이바지하였는가? 여기서 작가는 특유의 희곡적 기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정공법으로 서사와 대사의 힘으로 극의 강력한 전개를 밀어붙인다. 압박감에 숨이 막힐 정도이지만 독자는 결코 책장을 덮지 못한다.

 

퍼트넘, 애비게일, 패리스 등이 사적 이익을 위해 악마와 마녀의 출몰을 주장하고 인정하는 반면 헤일 목사는 순수한 신앙의 차원이다. 신앙인으로서 그의 자세는 한치의 허물도 탓할 수 없다. 레베카와 프록터에 대한 사례를 통해 그의 확고한 신념은 금이 가고 마침내 그는 마녀재판이 전적으로 오류임을 깨닫지만 자신의 힘으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의 유일한 잘못은 초기에 악마의 존재에 대한 지나친 경도로 사건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리라. 그의 과도한 순수성 내지 순진성을 비판할 수밖에. 그것이 악용되면 광기로 전환되기 쉬우므로.

 

(헤일) 그들은 자백을 했습니다.

(프록터) 부인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판인데 왜 자백하지 않겠습니까? 교수형을 당하지 않으려고 무엇이나 맹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P.106)

 

(헤일) 저는 법정에서 너무나도 많은 무서운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악마가 세일럼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발하는 손길이 가리키는 곳이면 어디든지 감히 겁내지 말고 쫓아가야만 합니다! (P.110)

 

극의 주인공은 프록터다. 작가의 긍정적 소개 글을 통해서도 그가 견실한 농부인 동시에 비판적 신앙인임을 알 수 있다. 드물게 보는 지성인인 그조차도 애비게일과의 관계에서 약점을 지녔으니 완전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애비게일로부터 파문은 비롯된다.

 

악마의 수하로 지목당한 사람들의 선택 대안은 두 가지다. 악마와 거래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면 목숨은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당사자는 다른 악마의 수하를 지목해야 한다. 거래를 부정하고 자신의 신앙적 올곧음을 주장한다면 그는 교수형을 모면할 수 없다. 양심과 생명 사이에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이 독자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라면? 그래서 우리는 프록터의 고뇌와 갈등에 공감하며, 그와 아내의 엇갈린 증언에 탄식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다. 프록터가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지 못하며 형장의 북소리와 함께 사라짐에 대해서도.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붉은 지옥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정치적인 정책은 도덕적 권리와 동급이고, 그걸 반대하는 것은 악마적인 악의와 동급이 된다. 일단 이 같은 등식이 효과적으로 맺어지면, 사회는 책략과 대항의 집적으로 변하며, 정부의 주된 역할은 중재자에서 하느님의 응징으로 바뀐다. (P.56-57)

 

악마와 마녀는 종교의 영역이다. 정치와 법정이 종교에 개입한다면 남아날 존재가 없다. 종교와 얽혀진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이를 예증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당연시하며 우매한 옛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잘못된 마녀재판을 중단할 권한과 때를 지닌 유일한 인물이 부지사 댄포스다. 헤일 목사를 비롯한 다른 사람처럼 그도 오해와 착오를 범하였지만 진실의 그림자를 접하였으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길 거부한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하므로. 정치적 인간은 냉혹하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킬 용의를 갖고 있다. 헤일 목사의 절절한 호소조차도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 세일럼의 비극이 절정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다.

 

(댄포스) 지금 연기한다는 것은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게 되오. 형 집행의 연기나 사면은 지금까지 죽은 자들의 죄에 의혹을 일으킬 것이오......나는 감히 법에 대항해서 반기를 드는 자들은 만 명이라도 교수형에 처하겠으며, 짠 눈물이 바다를 이루어도 법의 결정을 녹일 수는 없다는 것을. (P.190)

 

세일럼의 마녀재판으로 대변되는 광기는 완전히 소멸했을까? 우리는 쉽사리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면 중동과 이슬람 지역의 종교분쟁이 여전하다. 이데올로기는 어떠한가? 공산주의 몰락으로 과거와 같은 대대적인 매카시즘 선풍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바이러스처럼 지속적으로 변형하고 있어 언제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우리네 심정은 결코 편치 못하다. 세일럼은 과거형이 아니라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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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간산을 내려가다가 현대희곡선 3
아더 밀러 / 현대미학사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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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먼의 이중 결혼생활을 향한 의견은 성별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대다수의 건전한 이성을 지닌 남성과 여성이라면 라이먼의 비도덕성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낼 것이다. 결혼의 신성한 서약을 송두리째 뒤집은 그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라이먼에게 깜빡 속은 두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 무한한 동정심을 표한다. 극소수의 일부 몰지각한 남성들은 꿈꾸지만 차마 실행하지 못한 욕망을 감히 행동에 옮긴 라이먼의 용기에 갈채를 보내며 딱한 처지에 놓인 그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표한다.

 

(라이먼) 솔직히 자네 같은 일부일처주의자들이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믿지를 않았어. 데오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걸 알 수 있다구. 데오도 행복할 리가 없어. (P.35)

 

일부일처제로 대변되는 결혼제도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의 관점에서 라이먼의 행위는 충격적이다. 외견상 화목하고 평화로우며 부러움을 살만한 모범적인 부부와 가족에게서 라이먼은 무슨 불만과 부족을 지녔단 말인가? 일순간의 흔들림이 있었더라도 잘못을 깨닫고 리와의 관계를 정리한 후 데오에게 돌아오는 게 순리가 아닌가 등등. 독자는 라이먼과 데오의 대사를 통해 완벽하게 보이는 부부관계에서조차 미묘한 흠결이 상존함을 발견한다.

 

사랑하면서도 관계에 의한 흠결을 가슴에 담고 살아나가는 게 대다수의 부부다. 중혼 기간 동안 라이먼과 두 부인과의 관계는 돈독하고 오히려 행복했다는 사실을 그녀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데오의 남편 라이먼과 리가 아는 라이먼은 같지만 다른 인물이다. 경비행기를 몰고 스포츠카를 질주하는 라이먼의 모습을 데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자네 바라는 게 뭐야?

(라이먼) 내 평생의 소망은 두 여자였어. (P.87)

 

비록 한구석으로 자유와 일탈을 희망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찰나의 꿈에 불과하다. 라이먼은 다르다, 자신의 바람과 감정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점에서. 라이먼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남성이 아닌 보편적 남성의 숨겨진 욕망을 대변하는 전형에 가깝다.

 

병실에 누워 꿈과 현실을 오가며 라이먼은 자신과 데오 간의 숨겨진 결혼생활의 이면을 독자에게 드러낸다. 모두가 궁금해할 데오와의 이혼을 감행하지 않게 된 사유도. 이 과정에서 라이먼은 불리할 때면 깁스한 몸속으로 숨어들며 어떻게든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두 부인과의 관계도 유지하길 원한다. 역자 후기에도 나와 있듯 작가는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기 위한 기법으로 플래시 백 기교를 사용하여 실제 장소는 병실 한 군데이지만 극 중 스펙트럼은 뉴욕에서부터 아프리카까지 광활하게 십 년여에 걸쳐 펼쳐진다.

 

라이먼의 온갖 호소와 노력에도 두 부인은 그의 곁을 떠난다. 언론에 대서특필된 마당에 그녀들이 피해자로서 대중적 동정심 유지 및 자신의 도덕적 자존감을 지키려면 다른 방안이 없으리라. 데오의 내심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자 하지만 베시를 비롯한 현실이 이를 용납하지 못한다. 리는 자신이 법률상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서 그를 떠날 명분이 충분하다. 데오가 비판했듯이, 그녀와 라이먼의 관계는 애당초 정당성과는 거리가 멀게 시작하였다. 이렇게 작품은 부도덕한 라이먼의 심신이 파탄 나는 것으로 끝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라이먼) 그러나 이 말을 꼭 해야겠어 비참하고 슬픈 내 영혼은 마음 한 구석에서 외치고 있어. 왜 내가 비난받아 마땅한지를 말이야. (P.138)

 

라이먼과 작가는 이렇게 끝낼 마음이 추호도 없다, 라이먼의 항변처럼. 법률과 도덕의 허울을 벗어던지면 라이먼은 거짓 없이 솔직하다. 일부일처제의 부부관계에서 얼마나 부도덕한 행위와 사건들이 자행되는지는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네 과거사로 돌아갈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일부일처제는 신성불가침한 하늘의 윤리원칙이 아니다.

 

중혼 생활이 드러나고 부인들이 떠나가 외톨이가 된 처지이지만 라이먼의 꿈은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병실에는 아직 새로운 여인이 남아있다. 간호사! 본능의 질주를 향한 수컷의 억제 불가능한 맹렬한 기세. 마지막 장면서 라이먼의 얼굴에는 놀람과 욕망이 드러나며 그의 입은 기적을 외친다. 꿈이 현실로 전환될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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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위에서 바라본 풍경
아더 밀러 지음, 이한섭 옮김 / 예니 / 198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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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서문 격인 제법 장문의 <사회극에 대하여>가 부록으로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 희곡을 사회극으로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작가는 개인과 사회[폴리스]가 분리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 연극을 이상으로 삼아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연극이 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연극은 희랍적이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서 연극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대하고 과거의 연극의 그 자잘구레한 편파성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P.95)

 

작가는 일개 날품팔이 노동자인 에디에게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부여한다. 본디 선하고 좋은 사람인 에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기에 독자는 에디 카본을 차마 비난할 수 없고 다만 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맹목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변호사 알피에리가 말미에 토로하듯이.

 

(알피에리) 에디가 얼마나 잘못했고 그의 죽음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면서도 또한 그의 순수성을 추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죽어간 것입니다. (P.78)

 

작중에서 에디의 사고와 행동을 관통하는 두 가지 이슈가 있다. 먼저 애정과 욕망의 문제. 조카딸 캐더린을 향한 에디의 사랑을 아내와 알피에리는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베아트리스는 특히 예민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캐더린의 장래와 결혼에 대해 에디가 유달리 까다롭게 구는 것을 성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해석하는 게 올바른지 모르겠다. 깊이 사랑하는 딸에 대한 아버지들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캐더린이 조카딸이 아닌 친딸이라고 할 때도 이런 해석이 유효한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관습과 법률의 문제. 캐더린과 결혼하려는 로돌포의 의도를 의심하는 에디에게, 밀입국자를 밀고한 에디의 행위를 규탄하는 마르코에게 알피에리는 동일한 대답을 한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에디와 마르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방안을 모색한다. 그것이 관습과 실정법에 위배된다고 할지라도

 

로돌포의 머리카락 색깔, 노래를 잘 부르고 풍부한 유머를 지닌 것, 그리고 힘들게 모은 돈을 홀라당 소비해버리는 행태 등. 무엇보다 캐더린과의 결혼 의도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한 사기적 목적이라는 의심. 에디가 로돌포를 싫어하는 원인은 분명치 않다. 욕망 대상을 향한 경쟁자인 탓인지 아니면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로돌포의 숨은 면모를 발견한 것인지. 어쨌든 로돌포의 모습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마르코와 에디의 대적을 막으려 애쓰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디) (비탄에 차서 외친다.)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구? (P.77)

 

에디가 원하는 건 바로 캐더린이었을까? 베아트리스의 주장에 에디의 반응은 위와 같다. 그는 비탄과 실의로 가득하다. 그가 법률보다도 엄중한 시칠리아계의 관습을 어기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캐더린의 장래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사실. 심지어는 캐더린마저도 자신을 의심하고 꺼린다는 현실. 게다가 이미 마르코에 의해 되돌릴 수 없이 실추된 명예. 그것은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이다.

 

사적 처벌을 강행하는 마르코를 앞에 두고 에디 카본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은 생존의 이유를 갖지 못한다. 마르코의 괴력을 알고 있는 에디는 정면으로 그와 맞선다면 목숨을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선다.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해. 비록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에디 카본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스러지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영웅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에디) 이웃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누더기로 만들었지! 내 이름을 돌려다오! (천천히 마르코를 향해 간다.) ! 내 이름을 돌려다오. (P.77)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이다. 절판된 지도 한참 되어 시중에서는 도저히 구할 방안이 없다. 편집도 글꼴도 고색창연한 느낌이다. 신간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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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0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근대나무 2021-10-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