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 낭만과 야만이 교차하는 그곳, 화해와 공존을 깨닫다
이종헌 지음 / 소울메이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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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그대로 발칸반도와 동유럽 지역의 역사 기행서다. 저자는 다크 투어리즘 여행서라고 지칭하며, 아름답고 화려한 역사가 아닌 비극과 아픔의 역사 현장을 둘러보고 교훈을 찾고자 한다. 1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를, 2부는 아우슈비츠,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독일을 여행한다. 저자가 이 두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세계사의 비주류로 강대 세력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지역이어서라고 한다.

 

가볍게 읽으려고 선택했는데 의외로 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고 내용도 매우 알차다. 각 지역의 일반적 소개와 함께 저자는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감성적 때로 분석적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다. 단순 여행자가 아닌 차분한 기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토록 낭만이 넘쳐나는 땅에서 그토록 야만스러운 일이 벌어진 배경과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게 저자의 목적이다. 따라서 야만에 대응되는 집단적 기억인종청소의 두 단어가 시종일관 반복됨을 볼 수 있다.

 

이성적 존재이기에 앞서 감정적 동물인 인간이 역사의 상처를 세대에 내재화시켜 집단적 기억으로 학습시킨다면 갈등과 증오의 확대 재생산을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구조를 낳게 한다. 선동과 정치의 불씨가 스치기만 해도 인화성 기억은 폭발적으로 연소할 것이다. 오스만 무슬림 지배 시절에 대한 남슬라브족 국가들의 기억이 그러하며, 우스타샤 크로아티아에 의한 세르비아인 학살의 기억은 여전하다.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의 붕괴와 함께 촉발된 내전의 결과가 어찌 되었음은 여러 책으로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참혹함은 여전히 마음 아프다. 그네들이 학살된 주요 원인인 인종과 종교의 차이가 묵과하기 어려운 절대적 원인으로 간주되었다면, 화해와 공존을 모토로 위태로운 평화가 유지되는 현시점에서 과연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 책은 발칸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비극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의 아픈 역사도 놓치지 않는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낸 히틀러는 선진국 독일에서 민주적으로 출범한 정권이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은 발칸 유럽과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 그들에겐 유대인에게 지배받고 탄압받은 집단적 기억이 없다. 극단적 인종주의와 합법적 독재화가 결합하여 한 민족 전체를 희생양으로 삼는 비이성과 광기로 돌변하였으니 저자의 말마따나 인간의 문명이란 참으로 취약하기 이를 데 없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보스니아와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참혹한 현상의 세부적 사실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나토에 폭격당한 건물을 그대로 놓아두고 있는 세르비아의 태도다. 후대를 위한 역사적 반성의 의미라면 좋겠지만, 실패한 영광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영원한 기억을 뜻한다면 세르비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세르비아와 일본 군국주의는 양자가 모두 침략자이지만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에 있어서 결부된다. 자신들의 악행은 반성하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를 열성적으로 참배하는 일본의 모습이 자연스레 세르비아와 겹친다. 과거를 반성하고 화해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독일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저자의 바람처럼 역사적 교훈으로 야만의 길에서 낭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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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쓴 편지 반올림 10
장 프랑수아 샤바스 지음, 정혜용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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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몇 년 동안 어떤 아이를 구타한다면, 더욱이 그 아이가 바라는 거라고는 평화뿐인데 그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건 강제로 아이의 목구멍 속에 두꺼비 한 마리를 쑤셔 넣는 것과 같답니다. 폭력의 두꺼비. 순수한 증오의 두꺼비. (P.40)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죄수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자원 봉사자. 오렐리앵은 안느 앞으로 편지를 쓴다. 자신의 공책에 꾹꾹 눌러서. 안느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편지를 쓸 대상이 필요했고 써야 할 이유도 충분했다. 그뿐이다.

 

감옥에서 십삼 년을 살아온 청년은 처음엔 안느의 방문을 거부한다. 그의 현재까지의 삶과는 전혀 이질적인 그녀의 존재는 익숙해진 감옥에서의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점차 조심스레 안느에게 마음을 여는 화자의 모습이 독자에게 기쁨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주는 건 왜일까.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한 어린 영혼에 대한 동정과 공감이다.

 

일상화된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속수무책으로 계부에게 당하고만 사는 엄마와 아이. 반복적 폭력에도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계부를 떠나지 못하는 엄마의 심리는 무엇일까? 사랑이나 두려움 같은 일반적 감정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차라리 길들여진 무기력과 자포자기에 가깝다. 반면 아이는 자라난다. 증오의 두꺼비를 품고서.

 

짧게 보면, 증오는 우리가 꼿꼿하게 등을 세우는 원동력으로 여겨질 수도 있어요. 증오는 강하다는 환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당신을, 당신 손이 닿은 것들을 전부 파괴합니다. (P.162)

 

오렐리앵의 인성이 어떠한 지 독자는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으면서도 타락하지 않았으며, 할아버지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잊지 않은 점. 보티첼리를 통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꾸준히 안느를 향한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한다.

 

이 작품의 다른 미덕은 감옥 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데 있다. 죄수들끼리의 폭력, 죄수의 간수 폭행, 동료 죄수들의 절절한 사연과 기이한 행동들. 화자 말마따나 감옥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는 영화 속과는 전혀 다른.

 

오렐리앵은 안느를 자주 보고 싶어 한다. 그의 나날에서 안느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만 간다. 독자는 안느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전적으로 오렐리앵의 눈과 손에 의해서만 안느를 대할 수 있기에. 안느의 사소하고 우연한 언행도 그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부풀어져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안느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화자의 만기 출소를 앞두고 둘의 만남은 끝을 맺는다. 안느의 방문 종료 통보에 충격을 받지만 이내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화자를 통해 독자 또한 화자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을 짐작한다. 오렐리앵이 바깥세상에 부디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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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간, 발칸유럽 - 발칸에서 동서방교회를 만나다
이선미 지음 / 오엘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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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유럽 여행기다. 부제 발칸에서 동서방교회를 만나다로 알 수 있듯이 일반적 여행기와는 성격 면에서 구별된다. 교회 순례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지만 의외로 저자는 중립적 입장에 가까우며 종교적 색채도 짙지 않은 편이다. 즉 문화유산으로서 발칸유럽과 그 안의 교회에 관심을 가진 비신자 독자들도 즐겁고 유익하게 독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순례 여정은 두브로브니크에서 시작하여 다뉴브강 너머의 루마니아와 이슬람권인 알바니아를 제외한 발칸유럽을 일주하고 다시 크로아티아로 돌아온다.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로 이루어졌으니만치 가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먼저 선택한 것은 십분 이해된다. 신자가 아니면 알지 못할 14구난성인과 성 블라시오, 닌의 주교 그르구르 이야기를 듣지만, 무엇보다 조각가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르구르 청동상의 장대함보다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피에타’, ‘의 탄원에서 볼 수 있듯 새삼 20세기 전반의 극심한 혼란기에 크로아티아인을 거부하고 슬라브인으로서 시대를 풍미하였던 인간적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발칸유럽의 지배적인 종교는 정교다. 이 책처럼 동방정교로 지칭하는 것은 서방 가톨릭과 대비하기 위함이다. 발칸지역 나라마다 교회, 성당, 수도원도 많고 수많은 성인도 곳곳에 자리한다. 저자가 들른 곳의 일부만 나열해도 그득하다. 세르비아의 지차 수도원, 스투데니차 수도원, 사보르나 대성당, 마케도니아의 거룩한 구세주 승천 교회, 불가리아의 보야나 성당, 릴라 수도원 등등. 더군다나 보스니아의 메주고리예에는 성모마리아가 발현된다고 하는데.

 

어딜 가나 종교적 내음이 물씬 풍기며 절로 신 앞에 겸손하고 절로 옷깃을 여미게끔 한다. 특히 저자는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여 글로는 한계가 있는 풍광과 건물, 거리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끔 도움을 주고 있다. 다만 의문점은 이렇게 종교적 땅과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반종교적인 일련의 사건과 행위들이 빈발하였는가이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와 보스니아의 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는 머나먼 옛 시절이 아니다.

 

레오폴도 만딕을 알게 된 건 뜻밖의 수확이다. 가톨릭의 성인이란 오래 전 인물로 우리 시대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몬테네그로 출신의 그는 무려 1976년에 시성 되었다고 한다. 그의 위대함보다 오히려 인간적 연약함에 더욱 마음이 쏠린다. 자그레브의 스테피나츠 대주교에 대한 엇갈린 역사적 평가는 그의 나약함의 반영일까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역사 속 풍랑을 오롯이 맨몸으로 부딪쳐 나간 대가일까?

 

발칸유럽에서 마주친 동서방교회 순례를 통해 저자가 발견한 것은 의외로 소박하다. 신앙과 종교의 본질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모스타르에서 자문자답한다.

 

늘 잊고 사는 일상의 고마움에 대해 모스타르는 다독다독 속삭였다......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정말 되찾고 싶은 선물이라고.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길 것, 별 볼 일 없는 매일의 일상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사랑할 것.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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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미 2021-08-0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자 이선미입니다. 리뷰 고맙습니다. 제 블로그로 가져가도 될까요?

성근대나무 2021-08-1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블로그로 가져가셔도 괜찮습니다.

이선미 2021-08-18 13:4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알람 기능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기다렸어요^^
에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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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전설 대산세계문학총서 49
요르단 욥코프 지음, 신윤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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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작품 해설에 따르면 불가리아의 성서라고 일컬어진다.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인데, 작가가 각 편의 배치 순서까지 지정할 정도로 전체로서의 유기적 구성 효과를 의도하고 있다. 수록된 단편들은 불가리아 민간전승에 기원을 둔 제재에서 출발하고 있으므로 작가도 표제를 당당히 발칸의 전설로 명명하였으리라. 각 편의 본문 시작 전에 민요, 이야기, 연대기 내용 등을 몇 줄 인용하여 작품과 해당 전승과의 연관성을 드러내어 독특하다.

 

불가리아는 500년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비록 1920년대에 출간되었지만 수록된 작품들은 오스만 지배 아래 신음하던 때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자주권을 상실한 채 피지배 계급으로 전락한 불가리아인들, 위세 당당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술탄 등의 오스만 지배층, 가난과 억압에 반항하여 산으로 숨어든 산적 또는 비적들이 등장하여 애환과 갈등과 대립 관계를 형성하여 다채로운 층위를 보여준다.

 

인제를 향한 구디 영감의 말마따나 평범한 불가리아 농민들은 양 같은 그저 그런 사람들”(P.124, <인제>)이다. 그들은 별다른 욕심이 없다. 평안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랄 뿐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산적들은 무슬림뿐만 아니라 동포들도 무참하게 살육하며(<인제>), 가뜩이나 어려운데 흑사병이 마을을 휩쓴다(<흑사병이 돌 적에>). 독립을 향한 열망은 참혹한 대가로 다가온다(<젊은이들의 머리>).

 

평범한 사랑마저도 그네들에겐 힘겹다. 작중에서 유일하게 스테판이 도이나와 사랑의 결합을 이룰 뿐(<암사슴>) 모두가 사랑의 쓰라림을 겪는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싸우다 죽고(<가장 믿음직한 경호원>), 질투와 배신감에 이성을 잃어 죽이고(<포스톨의 두 방앗간>), 연인의 죽음에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다(<보주라>). 그뿐이랴, 사랑의 상처를 입은 양치기는 하이두틴이 되어 숲속에서 슬픈 피리를 불며(<양치기의 비애>), 산을 버리고 사랑을 구한 산적은 사랑의 눈앞에서 죽음과 맞닥뜨린다(<시빌>). 늙은 영웅 크라이날리야는 옛적 연인을 잃었던 달맞이꽃 고원을 찾아가 행복한 죽음을 맞는다(<달맞이꽃 고원>).

 

당대 현실이 어려울 때 작가는 과거로 회귀한다. 욥코프도 마찬가지다.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획득했으나 주변국과 잇따른 전쟁에서 패배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패전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내홍에 휘말린 불가리아인들. 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민족적 화합을 기대하며, 국가와 민족의 거창한 이름 아래 무시되었던 개인과 감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것을 작가는 발칸의 전설에서 끌어왔다. 발칸이 불가리아인들에게 갖는 감성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마치 우리네에 있어 백두산이 갖는 상징성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루시 영감은 발칸을 쳐다보았다.

여느 때보다 더 웅장하고, 더 높고, 더 뾰족하고, 더 장엄해 보이는 발칸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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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을 든 사람들 시공 청소년 문학 24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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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장벽을 세우는 등 사백여 년에 걸쳐 브리튼을 강력하게 지배하였던 로마 제국이 철수한다. 이제 브리튼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이 원주민 켈트족과 스코트족, 잔존한 로마인들 간에 전개되는데, 북해 건너 앵글로색슨으로 대변되는 게르만족도 풍요한 지역을 찾아 브리튼에 거점을 구축한다.

 

주인공 아퀼라는 철수하는 로마 군대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로마인이지만 브리튼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자 가족이 있는 자신의 땅이다. 잔류의 대가는 혹독하여 온 가족을 잃고 그는 색슨족의 노예가 된다.

 

이 작품은 5세기 브리튼의 역사를 배경으로 보티건 왕과 색슨족 헹기스트의 동맹과 배신, 로만 브리튼의 암브로시우스 간 전쟁을 다루고 있다. 헹기스트의 딸이 보티건 왕과 결혼하자 전처의 아들들은 자신의 일파를 거느리고 암브로시우스에게 합류한다. 아퀼라도 우여곡절 끝에 암브로시우스의 수하로 들어가 동반자들의 일원으로 색슨족을 물리치기 위한 기나긴 투쟁에 동참한다. 역사적으로도 작품 내에서도 로마인들의 고토 회복은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실제 역사는 색슨족의 브리튼 통일로 귀결된다. 암브로시우스는 켈트족을 견제하며 색슨족을 물리치고 로마를 다시 일으키려는 로마 세력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훗날 아서왕 전설의 근원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로만 브리튼 아퀼라에게 색슨족은 자신들을 침략한 용서할 수 없고 영토 밖으로 내쫓아야 할 외적에 불과하다. 원주민 켈트족의 시각에서 보자면 로마 제국은 아퀼라에게 있어 색슨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색슨족의 입장에서 그들이 본거지를 떠나온 이유는 자명하다.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그들의 이주는 절실한 부족 생존의 차원이다. 브리튼에 정착하지 못하면 그들의 앞에는 오직 멸족만이 남을 뿐이다. 적대시하던 켈트족과 스코트족이 손잡고 색슨족과 연합하여 암브로시우스와 운명을 가를 일대 회전을 벌인 것은 아퀼라 일행에게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그들로서는 자신의 최대 적은 로마인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과 함께 색슨족을 탈출하길 거부한 누이 플라비아에게 느낀 생소함과 씁쓸함은 아들 송사리와 함께 잔류하는 네스를 보며 비로소 사그라진다. 그네들로서는 어쨌든 부족을 배반하더라도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있는 곳을 떠날 수 없었다. 무자비하고 냉혹하지만 역사 속 개인의 삶은 이렇게 굴러간다. 그러기에 적으로 마주친 누이의 아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돌려보낸 아퀼라의 선택 또한 불가피하였다.

 

커다란 희생을 무릅쓰고 암브로시우스가 승리를 거두고 켈트족과 색슨족의 수장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코 전쟁의 끝을 뜻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은 야만족에 의해 스러지고 있고, 모국의 원조가 없는 로만 브리튼은 서서히 지는 해에 불과하다. 루투피아에의 불은 어둠에 저항하는 불인 동시에 세상 모든 것과의 작별 인사이다. 횃불이 꺼지기 전까지 아퀼라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짙은 어둠을 헤치고 걸어갈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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