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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저자의 기아문제 연구자로서 전문 영역을 반영하였다면, 이 책은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체득한 현실과 인식이 한데 버무려져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서방세계와 제3세계 간의 아물지 않는 과거사와 현재의 암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제3세계는 미국과 유럽의 오랜 식민지배와 수탈을 경험하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정치적 독립은 쟁취하였으나 경제적 예속관계는 여전하다. 곡물, 광물, 석유자원 획득과 지배를 위해 서방은 기업, 국가 및 국제기구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예속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여의치 않으면 군부를 지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정권을 수립하거나 아예 직접적으로 군사개입을 감행한다. 즉 제3세계는 명목상 독립은 이루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 수탈체제가 너무나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방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원리를 남반구 국가들에 요구하며,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과 같은 국제기구를 동원하여 이를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와 기업의 무차별적 이윤추구 앞에서 남반구 주민들의 인권(이 단어가 사치스럽다면 생존권이라고 하자)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서방 선진국들은 인권을 매우 중요시하지만, 그네들의 인권 사안은 경제적 이해와 충돌하지 않거나 오히려 도움이 될 경우에만 유효하다. 게다가 식민지배 경험을 통해 각인된 서방우월주의와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는 이를 무의식 중에 외면하고 정당화시킨다.
남반구 주민들이 점차 각성함에 따라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출 작물 재배를 위한 곡물 부족으로 기아가 만연하는 농업국가 주민들, 석유가격이 비싸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 주민들. 이들은 부패한 과두지배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용하고 부추기면서 공고히 하는 서방에 대하여도 증오심을 품으며, 뼈아픈 아픈 역사인식이 부정적 증폭작용을 일으킨다.
저자는 대비되는 두 국가, 나이지리아와 볼리비아를 각각 별도의 장으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사례분석을 한다. 나이지리아는 산유권을 둘러싼 추악한 비아프라 전쟁의 실체를 파헤치고 부정선거 대통령을 둘러싼 자가당착적인 유럽의 인식과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반면 볼리비아는 원주민출신 노조지도자의 대통령 당선과 민족국가 수립 지향이라는 보다 긍정적 전망이다. 다만 산적한 현안과 뒤얽힌 계급 간 이해관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이 발간된 2008년 이후 현재 시점에서 모랄레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초심에서 멀어진 인격적 타락과 반대세력의 무자비한 선동의 승리인지 또는 양자의 결합인지는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희망은 남반구 주민들이 다인종적이며 민주적으로, 땅속의 자원과 토지가 주는 부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데에, 그리고 법에 의해서 유지되는 주권국가, 서양 강국들과 정정당당하게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는 진정한 주권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 (P.16)
제3세계 주민들이 인간으로서 생존권을 보장받고 남, 북반구가 수탈과 착취관계가 아닌 공생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갈 희망을 저자는 이와 같이 보고 있다. 이를 위해 식민지배의 탄압과 수탈이라는 원죄에 대한 서양의 진정성 있는 인식과 태도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단기간 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몇몇 남반구 국가들에서 기존 사회질서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일부나마 성공을 거두고 있음은 고무적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국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무엇보다 남반구 주민들의 의식 속에 잠재한 서양에 대한 증오의 본질, 그리고 이를 강화하는 서방의 그릇된 인식과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 점에 있다. 그것이 단지 머릿속 공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필요하다는 것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