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 입문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재현 옮김 / 살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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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를 흥미롭게 읽은 나로서는 그 책의 토대가 되었다는 이 책을 건너뛸 수 없었다. 원제는 '아들러 심리학 입문'으로 건조한데, 번역본은 다소 낭만적으로 윤색하였다. 대화체를 채용한 <공저와 구성이 전혀 다른데, 작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아들러 심리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진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1부 각 장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미움받을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책임을 묻는 엄격한 심리학이자 용기 있게 자신의 과제와 직면하기를 촉구하는 용기의 심리학인 것이다. (P.235)

 

이 책은 입문서이므로 아들러 심리학의 깊숙한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고가 후미타케와의 공저에서 이미 소개되었기에 자체로서 새로운 지적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최초 독자라면 아들러에 입문하는 계기로, 공저의 독자라면 대화체보다는 정리된 서술문으로 재음미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다. 2부는 인간 아들러를 알 수 있도록 아들러의 생애와 학문 세계에 대한 개요를 담고 있다.

 

아들러는 유독 용기를 강조한다. 환경 또는 성격(라이프스타일)에 굴복하고 안주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무능력과 실패를 곱씹으며 타자를 원망하고 자위로 일생을 점철할 뿐이다. 행복해지기 위하여 현상을 타개하려면 행동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움직일 수 있는 용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자신의 삶을 타인의 판단과 인정에 내맡긴다면 진정한 자신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에게 착하고 특별한 누군가로 보이기 위해 항상 눈치 보고 전전긍긍하기를 포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평범해질 용기이자 미움받을 용기다.

 

아들러 심리학이 개인심리학의 범주에만 머물렀다면 자기계발서와 차별성을 나타내진 못했을 것이다. 아들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공동체 감각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직면할 때 대다수의 행동 양태는 비슷하다. 나 혼자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으므로 괜한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내 체념하고 만다. 아들러는 다르게 말한다.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 나선다면 동조자가 생길 수 있다. 끝내 혼자 밖에 없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자신은 변화하게 되므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저자는 심리학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친절하고 부드럽게 아들러를 소개하려고 애쓰지만 베스트 셀러를 읽은 기대와 흥분으로 이 책을 펼친 독자 입장에서는 실망할 수 있음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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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 61-1
크누트 함순 지음, 김남석 옮김 / 범우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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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유명한 <절규>라는 그림 속 주인공. 함순의 이 작품 속 화자의 이미지가 묘하게 뭉크와 중첩된다. 눈이 퀭하고 머리칼도 빠져 듬성듬성해지며 뺨도 홀쭉하여 한마디로 앙상한 몰골. 차라리 다큐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아프리카 기아민들의 영상이 더 적나라할 것이다. 지독한 굶주림에도 여기 주인공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내 얼굴이 어찌되었단 말이냐? 정말 나는 죽을 상이란 말인가? 나는 손으로 뺨을 만져 보았다. 말랐다. 마른 것이 당연하였다. 나의 볼은 두 개의 접시를 바닥을 안으로 하게 세워 놓은 것 같았다......나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랐을 것이다. 그리고 눈은 머리통 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내 얼굴 꼴이 어떨까? (P.113)

 

화자는 신문 기고료로 생계를 유지하는 문필가다. 낮은 고료와 불안정한 수입으로 점차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는 가운데 인텔리 특유의 오만과 자존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눈물겨움을 넘어 우습기조차 하다. 주인공이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아사에 이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우연과 요행의 덕택이다. 내용만 보면 암울하고 질척거리며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만 같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현실과 배치되는 자의식이 빚어내는 엇박자가 빚어내는 어처구니없지만, 다분히 자학적이며 해학적 면모에 기인한다. 초반부의 거지 노인과 동행 장면, 공원 벤치에서 만난 노인과의 거짓말 대화, 잡화점 점원의 실수로 얻게 된 뜻밖의 횡재와 전전긍긍, 하숙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온갖 비굴함도 의연하게 감수하는 당당함 등

 

1인칭 시점으로 오롯이 진행되는 이 작품에는 별다른 극적인 사건도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나와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는 사회뿐. 작가의 관심은 오로지 화자 자신과 내면으로 향해 있다. 제아무리 부인-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길 한사코 거부한다. 그런 그의 외양은 외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미쳐가는 존재일 뿐이다-하고 분투해도 극한상황에서 서서히 침몰하는 개인의 자아. 이성과 허위의 외피를 벗어던지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연약하고 비이성적인, 때로는 비겁하기조차 한 인간의 분명한 실체.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소설은 소외된 인간 내면과 심리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문학적 형상화다.

 

윌라얄리와의 관계는 단색조 같은 작품에 잠시 이채로운 색채를 부여한다. 그녀가 그를 거부한 연유가 그의 미친듯한 모습에 있는지 또는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인정하기 거부하는 그에 대한 실망감인지 알 수 없다. 아니면 그녀가 실제로 그를 사랑했는지조차도 화자뿐만 아니라 독자인 우리도 확신할 수 없다.

 

함순은 나치 독일의 지지와 찬양으로 노년에 명성을 잃고 몰락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임에도 한동안 금기시되고 잊혀진 작가가 되고 말았다. <굶주림> 외에 다른 작품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근년의 일이다. 나치즘이야말로 인간 이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때, 비이성과 광기의 작품을 쓴 작가로서 함순의 성향은 다분히 추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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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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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저자의 기아문제 연구자로서 전문 영역을 반영하였다면, 이 책은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체득한 현실과 인식이 한데 버무려져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서방세계와 제3세계 간의 아물지 않는 과거사와 현재의 암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3세계는 미국과 유럽의 오랜 식민지배와 수탈을 경험하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정치적 독립은 쟁취하였으나 경제적 예속관계는 여전하다. 곡물, 광물, 석유자원 획득과 지배를 위해 서방은 기업, 국가 및 국제기구 단위에서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여 예속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여의치 않으면 군부를 지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정권을 수립하거나 아예 직접적으로 군사개입을 감행한다. 즉 제3세계는 명목상 독립은 이루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적 수탈체제가 너무나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방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원리를 남반구 국가들에 요구하며,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등과 같은 국제기구를 동원하여 이를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시장의 논리와 기업의 무차별적 이윤추구 앞에서 남반구 주민들의 인권(이 단어가 사치스럽다면 생존권이라고 하자)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서방 선진국들은 인권을 매우 중요시하지만, 그네들의 인권 사안은 경제적 이해와 충돌하지 않거나 오히려 도움이 될 경우에만 유효하다. 게다가 식민지배 경험을 통해 각인된 서방우월주의와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는 이를 무의식 중에 외면하고 정당화시킨다.

 

남반구 주민들이 점차 각성함에 따라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출 작물 재배를 위한 곡물 부족으로 기아가 만연하는 농업국가 주민들, 석유가격이 비싸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 주민들. 이들은 부패한 과두지배층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용하고 부추기면서 공고히 하는 서방에 대하여도 증오심을 품으며, 뼈아픈 아픈 역사인식이 부정적 증폭작용을 일으킨다.

 

저자는 대비되는 두 국가, 나이지리아와 볼리비아를 각각 별도의 장으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사례분석을 한다. 나이지리아는 산유권을 둘러싼 추악한 비아프라 전쟁의 실체를 파헤치고 부정선거 대통령을 둘러싼 자가당착적인 유럽의 인식과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반면 볼리비아는 원주민출신 노조지도자의 대통령 당선과 민족국가 수립 지향이라는 보다 긍정적 전망이다. 다만 산적한 현안과 뒤얽힌 계급 간 이해관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이 발간된 2008년 이후 현재 시점에서 모랄레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초심에서 멀어진 인격적 타락과 반대세력의 무자비한 선동의 승리인지 또는 양자의 결합인지는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희망은 남반구 주민들이 다인종적이며 민주적으로, 땅속의 자원과 토지가 주는 부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데에, 그리고 법에 의해서 유지되는 주권국가, 서양 강국들과 정정당당하게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는 진정한 주권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있다. (P.16)

 

3세계 주민들이 인간으로서 생존권을 보장받고 남, 북반구가 수탈과 착취관계가 아닌 공생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갈 희망을 저자는 이와 같이 보고 있다. 이를 위해 식민지배의 탄압과 수탈이라는 원죄에 대한 서양의 진정성 있는 인식과 태도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단기간 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몇몇 남반구 국가들에서 기존 사회질서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일부나마 성공을 거두고 있음은 고무적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국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무엇보다 남반구 주민들의 의식 속에 잠재한 서양에 대한 증오의 본질, 그리고 이를 강화하는 서방의 그릇된 인식과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 점에 있다. 그것이 단지 머릿속 공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필요하다는 것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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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삼의 피 대한민국 스토리DNA 12
박종화 지음 / 새움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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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은 우리 문학계의 대표적인 역사소설가다. 첫 작품 <금삼의 피>는 연산군 시대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금삼의 피><다정불심>을 수록한 구간 본을 가지고 있었는데, 책이 너무 낡아서 연초에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만 점이 못내 아쉽다.

 

조선 시대의 악명높은 폭군인 연산군의 대중적 이미지는 대중매체의 출현 이전 이미 이 작품을 통해서 세인에게 각인되었다. 그만큼 이 작품은 그의 기행과 파행의 비극적 경로를 준엄하게 때로는 애상적 어조로 호소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역사소설에서 역사와 소설의 비중 설정은 항상 따라붙는 갈등 관계이지만, 월탄은 사실(史實)의 큰 틀을 유지한 채 인물의 심리와 대화에서 독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문학작품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그 밑바탕에는 주인공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연민이 놓여있다.

 

표제에서 알 수 있듯 작품 서사의 핵심은 생모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과 이로 인한 아들 연산군의 한풀이다. 성종과 폐비 간의 애정과 소원, 폐비와 후궁 간 대립과 폐비에 대한 왕대비의 증오가 전반부 내내 작품의 갈등의 진폭을 확대하고 심화한다. 그러면서 연산군의 모든 폭정과 악행을 유발하는 트라우마가 폐비의 죽음에 있다고 작가는 섣불리 확대 해석하지 않는데 연산군을 수성보다는 창업에 적합한 군주 유형으로 보는 제안대군의 관점을 통해 성격적 특징을 부각하고 있다.

 

반추해보면 연산군 시절 두 번의 사화는 당시로써는 불가피한 일면이 있다. 왕실의 계통을 비방하는 무리를 임금 처지에서는 용납할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의 생모를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은 아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연산군이 만약 이에서 그치고 이후 왕조와 민생을 위한 정사에 몰입했다면 그와 태종 이방원 간에 역사적 평가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역사소설의 묘미는 역사의 재평가와 가상역사의 상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또한 역사 기술의 건조하고 거대한 흐름에서 간과되기 쉬운 인물과 행동에 뼈와 살을 입혀 당대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과 성종 사후, 왕조에 피바람이 불어닥친 게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세종은 삼남을 택한 태종에게서 교훈을 얻지 못하였고, 성종은 진실을 영원히 은폐 가능할 것으로 어설프게 예단하였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연산군과 다른 조처를 했을 사람의 아들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차라리 폐비와 동시에 폐세자를 같이 해버렸다면 후대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소설을 비롯한 사극 영화 및 드라마 등은 대중적 파급력이 높기에 역사의 과도한 왜곡이 논란이 되기 쉽다. 문학적 상상력과 흥미 외에 사료의 부족과 작가의 편향된 이념 등 사실(史實)을 비틀어버리는 요인은 많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적 흥미와 아울러 작중 기술된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엄정한 비판적 인식도 요구된다. 이 작품 이후 전형적 소인과 간신배로 영원히 낙인찍힌 유자광과 임사홍의 진실을 나로서는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사극의 단골 악연인 장녹수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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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2 (반양장) - 사랑과 진정한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2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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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청년은 자신의 뜻에 따라 교사가 되고 3년이 흐른 후 다시 철학자를 찾아온다. 그동안 청년은 개인적, 직업적 삶에서 자신이 감화받은 아들러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노력하나 돌아온 것은 당혹스러운 낭패감뿐이다.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아들러의 이론에 반박하는 청년, 청년이 아들러를 오해하였다며 다시금 아들러의 본질을 설명하는 철학자의 대화, 이것이 속편을 구성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 강조되고, 그들과 아이의 관계 설정이 매우 중요시된다. 아들러의 주장을 가만히 반추하면 교육론의 성격이 짙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라기보다 인생을 사는 바람직한 태도를 제시하는 삶의 철학에 가깝다고 저자도 언명한다. 인간의 문제행동에 작용하는 심리 5단계도 결국 교육학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상대방에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함은 교육자와 피교육자를 대등한 관계에 놓는 것이다. 교육자의 일방적 훈육과 꾸짖음은 올바르지 않다. 이는 비대등을 전제로 삼고 있으므로. 교육자는 피교육자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카운셀러에 불과하다. 변화의 주체는 피교육자, 즉 아이 자신이다.

 

상벌 무용론은 조직과 사회로 확장된다. 공동체는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기초해서 운영되어야 하며,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나를 넘어선 우리를 형성하고 사랑을 통해서 진정한 자립에 도달한다. 자립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속에서 나와 타인의 위치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진정한 자립은 사랑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가장 추상적 개념인 공동체 감각은 결국 사랑에 기반한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만 자립할 수 있다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하네. (P.296)

 

속편의 원제는 행복해질 용기. 전편의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존적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용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속편은 자유로운 인생을 행복한 인생으로 승화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보다 세밀하게 고찰한다. 어차피 동일한 아들러 심리학을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양자가 유사 내지 중복된 설명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교육적 방면의 실용성에서 속편이 보다 유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는 시간은 자신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내가 그동안 살았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은 말할 나위도 없고 아이를 대하고 가르치는 목적과 태도 또한 그러하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엄밀한 과학인지 아닌지는 지금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차라리 삶의 철학이라고 해도 좋다.

 

대화체 형식의 글은 내용의 쉬운 이해에 도움이 되지만 아무래도 체계적 접근에는 불리하다. 또한 저자와 아들러 심리학의 원전과의 관계도 궁금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아들러와 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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