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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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신입생들의 자기소개서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책이라고 하여 호기심 차원에서 읽는다. 도발적 표제와 일본인 저자의 조합으로 뻔한 자기계발서라는 선입견을 품었고, 실제로 생소함과 친숙함이 혼재된 묘한 인상을 받았다. 전자는 심리학 3대 거장 중 하나라는 아들러 심리학을 접하게 된 데서 온 것인데 프로이트와 융은 대중적으로 성가가 높으며 개인적으로 프로이트 서적을 몇 권 읽은 경험도 있는 반면 아들러는 어렴풋이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다. 따라서 우연한 계기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세계에 입문하게 된 점은 기대치 않은 소득이다. 후자는 소개된 아들러 심리학의 내용이 시중에 산재된 자기계발서들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만사는 자신에게 달려있고, 나를 바꾸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이들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실제로 저자는 후대의 자기계발서들이 아들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준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지향함에도 많은 이들이 불행과 고통 속에 좌절한다. 아들러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행복의 기준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고 있다. 타인과의 비교, 경쟁, 인정에서 열등 콤플렉스를 지니며 이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자신의 콤플렉스를 자위한다. 성격-아들러에 따르면 라이프 스타일은 불변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변화할 수 있으므로 인정욕구를 버리고 자신과 타인의 인생 과제를 분리하여 진정 자신의 과제를 추구할 수 있다. 타자공헌과 공동체 감각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모두의 행복 실현이 가능하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충 이러한 내용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과제실현과 배치되는 타인의 과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게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다. 아들러는 트라우마를 부정한다. 중요한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경험에 부여한 의미라고 한다. 자신이 선택한 불행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위해 경험에 부정적 의미를 덧붙이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고 본다. 프로이트의 원인론과 비교하면 아들러는 목적론이다. 이 책에는 기존 통념과 어긋나는 여러 내용을 담고 있다. 인정욕구의 부정, 과제의 분리, 자기수용 등을 일관하는 정신은 주체로서의 자신의 발견이다. 타인에게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개척해 가는 나.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으려고 자신을 숨기거나 포기하지 않고 평범해질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곳과 현재의 삶에 충실하려는 태도.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이 책은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체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저자가 플라톤 전공자이기에 의도적으로 이를 따른 것이다. 일반적 서술문에 비하여 생생한 사실감이 두드러지는 장점이 있어 기초 개념에서부터 심화된 영역에 이르는 단계적 진행을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인적으로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현상을 뒤집어서 고찰하는 아들러의 사상체계가 매우 궁금하다. 이것이 아들러의 진정한 의론인지 아니면 기시미 이치로라는 필터를 거친 것인지도 확인하고 싶다. 한편 과학으로서 심리학과 부합하는가에 대한 일말의 의문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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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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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는 항상 인류 옆에 존재하였다. 우리는 기아에 친숙하다. 웬만한 기아는 이제 무감각하며 미디어에서도 관심 있게 다루지 않는다. 세계의 일부가 상시적 기아에 시달리는 현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기아 없는 세상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딱하지만 할 수 없지. 이것이 기아에 대한 대다수의 감정이다.

 

저자는 오랜 기간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세계 곳곳의 기아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기아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기아는 아프리카 등에 국한된 일부 지역적 사안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연관된 문제이다. 인류는 기아에 허덕일 필요가 없다. 식량의 절대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기아를 감소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달성하려는 노력을 방해하는 체제가 있다.

 

저자가 기술하는 기아의 참상에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막연하게 알던 기아의 실체는 너무나 처참함이 드러난다. 세계 도처의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 현장들. 당장이라도 뜻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합심하여 국제적 여론을 조성하여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한편으로 기아의 원인이 매우 다층적임도 알게 된다. 농산물 다국적기업을 우선적 공적으로 지칭하지만, 기후변화 같은 환경적 요인, 산업 구조적 문제, 사회정치적 내부 요인 및 국제정치 역학도 뒤섞여 있다. 쾌도난마의 속 시원한 해결책을 쉽사리 강구하기 어렵다. 이념적 갈등도 헤쳐나가야 하니.

 

신자유주의와 워싱턴 합의는 세계화의 고도화에 따라 더욱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맹목적 시장과 효율화가 세상과 인류를 지배하게 방치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인권으로서 식량권을 주장한다.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곡물에 대해서는 시장원리주의를 철폐하자는 것이다. 비옥한 토지와 근면한 농민을 가진 세네갈이 수출용 작물에만 주력하냐고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사례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다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의 막강한 힘과 서구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식량 자급 개혁의 여정에서 스러지고 마는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의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년 전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을 구하기 위한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에 대해 맹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일어났던 일을 기억한다. 자국민의 안녕과 생존을 무릅쓰고 정권 유지와 군비 지출에 매진하는 정권에, 비록 인도적이지만 식량을 지원하는 게 타당한가. 그것이 결국 독재정권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군사적 위협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명확하다.

 

국제적 기아의 실태가 심각하다는 점, 기아는 전 지구적 사안으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환경 등이 복잡한 어우러진 문제라는 점, 그럼에도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모두가 기아 극복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점. 출발점은 식량권을 인권으로 인정하고 개별 국가들이 식량자족을 이룰 수 있도록 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전달하고 독자에게 요청하는 목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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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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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상실의 시대>라는 표제로 유명하여 독자의 선택을 고민케 한다. 원작의 내용에 충실하는 의미에서 원제를 따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원작의 정신을 반영하는 측면에서는 다른 표제도 충분한 명분을 지닌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원제가 비틀즈의 노래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이 작품은 당대 국내 젊은 작가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가 있다. 이후 국내 소설의 경향이 바뀌었다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그럴만하다. 외형상으로나마 독재정치 체제가 무너지기 전까지 우리 문화계와 사상계를 짓눌렀던 억압과 검열의 시대, 민주화라는 거시적 주제 아래서 개인의 소소한 감정을 논하는 것은 사치로서 금기시되었다. 이때 정치와 사회의 현안에는 관심 없이 오롯이 한 개인의 내적 감정에만 충실한 이 작품은 무척이나 신선하였을 테니. 게다가 파격적일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적 감정과 표현의 일렁거림은 무언의 도덕규범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문학계에 한줄기 서광이었다. 196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19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이 작품이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새로 우면서도 소설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 연유라고 하겠다.

 

성장소설의 구성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서는 1960년대, 특히 1968년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이미 역사적으로 ‘68혁명으로 정립된 당시의 사회변혁운동을 통해 기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던 이념에 기반을 둔 보수적 정치체제를 거부하고 반전, 여성해방, 히피 등 탈권위주의화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사회변화가 갑작스레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작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대중가수들과 함께 유독 두드러진 존재, 비틀즈가 이를 드러낸다. 대중음악계에서 1960년대는 비틀즈의 시대였다. 작가 또한 이들의 음악에 경도되었음을 독자는 쉽사리 알 수 있다.

 

와타나베와 가까운 작중 인물은 모두 사회와 불화다. 기즈키는 물론 그와 와타나베를 연결하던 나오코 역시 정신적 불안정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와타나베는 기즈키, 나오코를 통해 세상의 끈을 연결하고 있다. 기숙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는 타인과 어울리기를 거부한다. 나가사와와 미도리를 제외하고는. 나가사와는 솔직하다는 면에서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남들의 이해를 굳이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 부유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미도리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현실에 기반한 실체적 인물이다. 그녀가 와타나베와 잘 되길 바랄 뿐이다.

 

레이코 씨와 나오코는 생과 사의 반대출구로 나아간다. 레이코 씨는 나오코의 죽음을 계기로 요양원을 떠나 세상에 나갈 용기를 낸다. 나오코와 모든 경험을 공유한 그녀가 세상에서의 첫 선택을 와타나베와 시작함은 일면 자연스럽다. 그녀는 나오코의 분신이자 대역이므로.

 

젊은 영혼의 때 이른 선택, 조숙한 성()의 남용, 비틀즈로 대변되는 당대 대중예술의 적극적 존재감. 과장되고 작위적이지만 한편 선열하고 순수하다. 와타나베는 마지막에 자문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와타나베가 상실의 시대를 버텨낼 것이고 세상을 꿋꿋이 살아낼 것임을. 가슴 속에 기즈키와 나오코를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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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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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희곡이라고 한다. 실제 연극으로 보면 이색적이고 독자적 미감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글만으로는 두드러진 감흥을 받기 어렵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만하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비인기 악기에 해당하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내세워 평범한 소시민의 삶의 양태를 관객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콘트라베이스는 저음역을 담당하는 현악기로 (바이올린과 첼로와는 달리) 대중적 인기가 취약하다. 이 점은 비올라와 유사하지만 그나마 비올라는 실내악에서라도 어울릴 기회가 많다. 콘트라베이스는 주로 오케스트라에서 주선율을 돋보이게 하는 화음을 받쳐주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일인극의 화자는 일반인들이 콘트라베이스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점을 하소연한다. 그는 이 악기가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악기보다 월등하며 중추적이므로 만약 콘트라베이스가 없다면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기초부터 무너질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 주장이 일견 타당함에도 독자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화자 자체가 자신의 말에 확신을 부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율배반적으로 자신의 악기마저 싫어한다.

 

피아노 같은 가구도 아닌데, 좁은 방에서 오며가며 발에 걸리적거리는 못생긴 덩치로 도저히 잊거나 외면하기 어려운 존재감. 처음부터 악기로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은 없다면서 누구나 다 사연이 있음을 언급한다. 하물며 이 악기를 주연으로 하는 곡을 쓴 작곡가마저 일류급이 아니라며. 국립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고용이 보장된 자신의 신분을 위안삼지만 혼자 연모하는 성악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에 회의적이다.

 

이렇게 공연 당일 연주회장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방. 화자는 맥주를 들이키면서 주목받지 못하는 악기의, 여러 명의 평범한 연주자 중 한 명인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토로한다. 그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함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커다란 불만이 있지도 않다. 적어도 세라라는 이름의 소프라노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다. 악기와 오케스트라 내 지위로서는 접근하기 어렵다. 그는 일탈을 꿈꾼다. 공연 도중 여인의 이름을 외쳐 공연을 망쳐 놓는다면. 그녀의 사랑을 얻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그의 이름과 존재를 그녀는 잊지 못할 테니. 파면당하고 연주자로서 경력을 잃는 대가로.

 

독자도 관객도 모두 알고 있다. 물론 화자 자신도 알고 있다. 그가 결코 일탈을 저지르지 못할 것임을. 그것이 소시민의 본분이자 한계이기에. 그는 그저 자그만 자신의 방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소수의) 관객에게 신세 한탄을 늘어놓을 뿐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듯. 화자와, 일인극을 보러 소극장을 찾는 관객 간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사회 내 별 볼일 없는 소시민으로서 관객과, 오케스트라 내 역시 별 볼일 없는 자신은 같은 처지다. 작품을 통해 화자는 관객에게서, 관객(그리고 독자)은 화자에게서 위안과 위로를 얻는다. 아마도 이것이 이 짤막한 희곡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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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나라 2
임영대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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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한 이순신의 앞날은 명약관화하다. 성공하면 권력을 잡고, 실패하면 역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할 뿐. 썩어빠진 조정을 갈아엎고 선조를 상왕으로 몰아낸 후 세자를 보위에 올린다는 이순신의 공언. 진정 권력에 욕심이 없기에 가능한 순진한 발상. 조정 측도 그를 따르는 부하장수들도 이를 믿지 못한다.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새 군주에게 권력을 돌려주면 이순신 일파가 위험에 빠지고, 이순신이 계속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 필연코 군주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

 

마포나루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이순신 군은 도성에 입성하고 선조는 또다시 급거 피난길에 오른다. 임진강이 막히자 임진년과 달리 함경도로 발길을 돌리는 임금, 그리고 이를 추격하는 반군. 거사의 성공 여부는 언제 어디서 임금 일행의 신병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체로 진압할 군사력이 부족하여 왜란에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정권, 내란에는 누구에게 손을 벌릴 것인가? 뜻밖에 야인, 즉 여진족을 등장시킨다.

 

왕조 초기부터 북쪽 국경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온 여진족.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감행한 임금. 한줌의 자존심도, 민족과 국격의 일말의 자부심도, 당연하지만 백성의 고달픔에 대한 눈꼽만큼의 인식도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깡그리 외면 받는다. 그리고 이것이 반군의 세력을 오히려 강화하고 이순신의 분노를 더욱 깊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만다. 작가로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순신이 주도하는 새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선조 일당은 패망해야 한다. 정도가 문제될 뿐이다.

 

작가는 불가피하지만 다소간 무리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먼저 야인들로 하여금 선조와 세자, 그리고 주요 종친을 살해하도록 함으로써 이순신 집권의 최대 난제를 자연스레 해결하게끔 한다. 도덕적, 윤리적 명분을 잃지 않고 내홍의 근원을 제거하며 동시에 이순신의 집권과 개혁의 정당성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반군 세력은 일종의 연합군이다. 수군의 이순신과 육군의 배설. 반군 측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훗날의 목표와 방법론으로 갈등의 개연성은 충분하다. 배설을 페이스메이커 역할에 불과하다.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 적절한 시점에서 무대에서 퇴장해야 하지만 명분과 수단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역시 야인의 손이 적당하다. 나라와 백성의 원수인 이 여진족 군을 함흥 회전에서 격파하여 명분과 실체를 모두 확보하는 대목은 비록 작위적인 설정이지만, 어차피 이 소설 자체가 그러한 법 아니겠는가.

 

배설이, 이원익을 필두로 한 이항복, 이덕형 등의 명신이 이순신을 선택하고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만 급급한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그들의 삶을 평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어서다. 배설의 처절한 유언이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개창한 새 나라는 분명 이를 구현할 것이다. 이순신 생존 시는 물론 잘하면 아들과 손자때까지도 가능할 수 있다. 선조와 인조처럼 혼군(昏君)이 왕위에 있을 때 왜란과 호란이 발발하였음을 기억하라. 왕조 정치의 단점은 임금이 모두 성군일 수 없다는 데 있다. 법과 제도가 아니라 인물 개인에 의존하는 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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